목사님들 설교 모음

육신 생각의 3대 정체 (막 6:1-6)

하나님아들 2024. 2. 29. 14:21

육신 생각의 3대 정체 (막 6:1-6)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이 시간에 “육신 생각의 3대 정체”라는 제목입니다. 세계적인 부흥사 해리 무어하우스가 젊었을 때 그는 영국의 한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과 영국 어느 곳에서도 영적 부흥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무어하우스는 밤낮으로 그는 무릎을 끊고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었습니다. “오, 하나님, 왜 이곳에 신앙의 부흥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걸어가고 있을 때 다음과 같은 글자가 쓰여 있는 큰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해리 무어하우스, 영국의 전도자 중 가장 유명한 전도자!” 주최측에서 집회의 흥행을 위해 내건 현수막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그는 “이것이 바로 왜 신앙부흥이 일어나지 않는가 하는 이유다.”


이렇게 깨달은 그는 즉시 집회 준비위원회에 가서 말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이제야 나는 신앙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여러분들이 모든 면에서 나를 얼마나 위대한 사람같이 선전해 왔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지요.” 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신앙의 방해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육신의 생각으로 예수님을 배척한 나사렛 사람들에 대해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자라신 고향인 나사렛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 메시아에 대한 이사야의 글을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날 너희에게 다 응하였다고 하시면서, 메시아의 표적을 보이시며 전도하셨지만 육신의 생각으로 가득한 고향 사람들은 귀를 막고 결국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에서 소수의 병인에게만 안수하여 고치셨을 뿐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고향 사람들의 인간의 생각 때문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육신의 생각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을 육신적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 인간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배척하게 됩니다.


그래서 롬8:5-8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척한 고향 사람들에게서 육신의 정체를 발견합니다.


육신의 생각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1. 신령한 것을 배척하는 방해꾼입니다.


2절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말씀하실 때 고향 사람들은 그 은혜로운 말씀의 권세와 손으로 행하시는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런 은혜로운 말씀과 권능은 일생 한 번도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토록 어릴 때부터 귀가 닳도록 배웠던 메시아의 모습과 표적 그대로였습니다. 6절에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는 것은 충분히 믿을 만큼 그들에게 증거가 되고 표적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랬지만 그들의 반응은 호기심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우리와 함께 자랐던 저 예수가 도대체 언제 어디서 저런 인품과 능력과 지혜와 권세를 얻었을까?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그들은 의아해 할 뿐 육신 생각의 장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전2:14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조물에게서 그 놀라운 신비를 보면서도 우주의 이치만 논하면서 자기 주장의 탑만 높여가지 그걸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구도자의 자세가 바르지 않습니다. 정직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눈만 뜨였지 보이지 영의 차원은 그들에게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신앙생활 바로 하려면 영의 눈부터 열어야 합니다.


엊그제 기독교 텔레비전에 설교학을 가르치시던 총신의 90이 넘으신 저의 은사께서 정정한 모습으로 나와 대담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 담화 가운데 이런 체험담이 있었습니다. 옛날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만 찾아가 해결하려고 했지만,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사람 만나지 말고 엎드리라고 하셔서 그 때부터 엎드리기 시작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때부터 지금까지 아름답게 이끌어주고 계신다. 하나님의 일은 기도로 하는 것을 배웠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이처럼 육신의 문제 너머 영의 세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못할 뿐 아니라 남이 하는 걸 보면 심히 비웃고 역겨워 하기까지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문제가 풀려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육신의 정체입니다.


2. 육신은 보이는 것밖에는 알지 못하는 무식꾼입니다.


3절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나사렛 사람들이 회당에서 하나님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권세 있고 은혜로운 말씀을 들었지만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지식은 보이는 것 이상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에서 함께 자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는 사실 밖에는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육신의 무서운 편견입니다. 그 예로 아직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 신학을 연구한다고 성경을 문서설 편집설 등으로 난도질해서 믿을 수 없는 책으로 만들어버렸는데 이것이 자유주의 신신학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보이고 예수가 보이고 신령한 진리가 보여야 하는데 그들의 눈에는 그것밖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닙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편견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의 놀랍고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아주 복되고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우주라도 움직이실 준비가 되어 있는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기만 하면 우리를 도우실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영생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눈앞의 사실만 보고 실망하고 절망한다면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육신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합리주의 철학자 베이컨은 사람들이 빠지는 편견을 네 가지 우상으로 설명하였는데 첫째가 종족의 우상입니다. 이것은 모든 현상을 종족 즉 인간의 관점에서 보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저 새는 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이 구슬프게 운다." 이건 자기 느낌이지 새에게 물어본다면 다른 뜻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는 동굴의 우상인데, 동굴에 갇혀 있는 사람처럼 개인적 경험이나 성격적인 편견으로 인해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셋째는 시장의 우상인데, 사람이 모이는 시장에 여러 소문과 말이 있어 영향을 받듯 잘못된 정보 때문에 생기는 편견을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잘못 배워 편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는 극장의 우상인데, 무대를 보고 환호하는 관객들처럼, 전통이나 권위에 의지하여 나타나는 지식이나 학문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켜 극장의 우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권위자가 말했다고 무조건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편견을 가지고 보면 성경을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실도 다른 말로 들려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장 정확한 거울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우리를 보고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편견으로 “나는 안 될 거야.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복이 없어. 나에게 무슨 희망이 있을까?” 이렇게 현실의 눈만 밝아 편견 가지면 하나님께서도 도우실 수 없습니다.


지금은 천국 가셨지만 어느 성도는 손을 자꾸 잡으려고 합니다. 알고 보니 손만 잡아도 마음이 시원해진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차를 태워드렸더니 차만 타도 몸과 마음이 시원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아주 쎈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만이 아니라 우리 성도는 세상 말로 모두 쎈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고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엊은 즉 나으리라”(막16:17-18) 하셨습니다. 육신의 눈으로만 보면 무식자가 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안에서 위대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3. 육신으로는 믿음 없어 도움도 구원도 받지 못하는 소란꾼입니다.


5-6절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고향에 병자들이 많았지만 주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에 소수 말고는 도울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이상히 여기신 것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수밖에 없는 수많은 말씀과 표적을 보았음에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육신의 생각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출애굽할 때 얼마나 불신앙의 잡음이 많았습니까? 이스라엘과 동행한 잡족들이 특히 불평이 많았습니다. 믿음이 없으니 소란스럽습니다. 대항합니다. 통곡합니다. 이런 육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히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의사를 믿고 수술대에 몸을 맡기고, 이발사를 믿고 얼굴을 면도에 맡기고, 은행을 믿고 돈을 맡기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의심 없이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생각으로 가득한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과 같은 육신의 생각, 이 시간에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생각으로 가득한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생각처럼 신앙에 방해물은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 따라가다가는 영원한 절망의 지옥에 다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육신적인 어리석은 지식과 지혜와 편견과 불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로 나의 왕으로 믿고 성경을 영원불변의 말씀으로 받아 순복하여 진정한 구원이 우리와 함께 하고 주님께서 우리 곁에서 놀라운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