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일을 위해 창조된 자 에베소서 2:8~10 주일낮예배 이승희 목사
에베소서는 사도바울의 사상의 진수 혹 왕관이라는 말을 듣는다. 교회론이 탁월하게 정리되어 있는 서신이다(2장, 4:1~16, 5:21~33). 특히 2장은 교회론에서 성경적이고 영적인 기초를 밝혀내고 있다.
에베소서 2장은 1장의 확대이면서 내용을 더 정교하게 다듬었다.
2:1~10은 헬라어 본문에서 1~7과 8~10 두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2:1~7은 또 다시 두 부분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1~3절은 독자들의 과거의 삶에 대해 상기하고 있고, 4~7절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난 변화를 대조하고 있다.
그리고 8~10은 구원, 즉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창조와 함께 목적을 요약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앞서 1장에서 찬양과 기도가 비록 한글이나 영어성경에서는 몇 개의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도 헬라어 본문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2:1~7 역시 헬라어 본문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본문의 1절은 한글성경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헬라어 본문에는 주어와 동사가 없이 목적어만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죽었던 너희를(Kai; uJma'" o[nta" nekrou;")’는 목적어구문이다. 4~6에서 주어가 나타나는데, 주어는 하나님(4절)이요, 주동사는 세 개다. ‘함께 살리셨다(4절, suzwopoievw)’, ‘함께 일으키셨다(6절, sunegeivrw)’, ‘함께 앉히셨다(6절, sugkaqivzw)’가 주동사이다.
이방인들(non-Jews, Gentiles)이 하나님의 백성의 반열에 서기 전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2:1~10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도적적인 조건(the moral condition)에 대해 열거했다. 이제 2:11~22에서는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평가되는 바 종교적인 지위(status)에서 이전에 박탈되었던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제 2 절 죄의 종노릇할 때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1. 죄의 종노릇하며 행하다
2절의 시작은 ‘그 때’이다. 그 때는 언제를 가리키는가? 죄와 허물로 죽었던 때이다. 죄의 종노릇할 때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다(in which you used to live, ejn ai|" pote periepathvsate). ‘행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파테오(peripatevw)’는 걷다, 행하다(walk), 살다(live)의 의미이다. 구원을 받기 전에 어떻게 행동하였는가? 두 가지 삶의 양식을 소개한다. 첫째는 이 세상 풍조를 따랐다. 둘째는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 행하다는 것은 따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제 6절 함께 하늘에 앉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하나님게서는 지극히 큰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하늘 보좌에 앉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허물과 죄로 죽었고, 죄의 종노릇하며, 진노 아래 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서 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개정개역성경을 단순히 읽으면 ‘앉히시니’라고 했을 때 과거인지 현재인지 심지어 미래인지 시제가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 헬라어 본문의 ‘sunhvgeiren kai; sunekavqisen’는 ‘함께 일으키셨다(sunegeivrw)’와 ‘함께 앉히셨다(sugkaqivzw)’의 과거동사이다.
제 10a 절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10절은 2:1~10의 보충적인 추신(subsidiary postscript)이라기보다 전체를 아우러는 핵심구절이라 하겠다. 구원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다. 구원은 선한 일(the good works)을 하게 하는 동기부여를 한다.
1. 하나님의 작품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다. NIV에서는 “For we are God's workmanship”. 우리는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creature)이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창조주(Creator)이다. 작품인 우리가 먼저냐 아니면 작품을 만드신 하나님이 먼저인가? 누가 영광을 받아야 하는가? 누가 삶의 주도적이어야 하는가? 우릴 만드신 창조주와 피조물인 우리 둘 중에 누구 주인공인가? 우리인가? 아니면 우리를 만드신 분인가? 피조물이 없다고 창조주가 없는 게 아니다. 창조주가 없다면 만물은 없다. 창조주 없이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창조’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자립(自立)이라는 말은 있을 수 있으나 우리 인간은 ‘스스로 창조’는 있을 수 없다. 우리를 존재케 하신 분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주인이요 창조주가 우리 아버지이시니 얼마나 영광스럽고 기쁜가?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즉 재창조하였다. 새롭게 지으셨다. 우리는 새 이스라엘,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이다. 이런 그림을 바울은 2:1에서부터 세 가지로 설명하였다. 첫째, 하나님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부활시켰다(2:5~6). 둘째, 하나님이 우릴 종노릇에서 해방하게 하였다(2:1~2). 셋째, 하나님이 우리를 정죄로부터 면제시켜 주었다(2:3).
2. 선한 일을 위한 포이에마
‘만든 것’ 혹 ‘작품(workmanship)’이란 헬라어 ‘포이에마(poivhma)’는
본문을 포함하여 신약성경에 2번 사용되었다(롬 1:20).
‘작품’, ‘완제품’이라는 의미와 함께 ‘피조물(creation)’를 의미한다.
우리는 옛아담과 같은 피조물이 아니라 종말의 아담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음을 받은 ‘새 피조물(a new creature, 카이네 크티시스, kainh; ktivsi")’이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존재였는가? 창조주의 관심과 손길을 받을만큼 가치가 있는 자였는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2:4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때문에, 긍휼이 풍부하신 하나님 때문에 그 은혜로 구원을 받은 존재이다. 단지 믿음으로 그 은혜로 주시는 구원을 받을 뿐이다. 그 믿음조차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우리 편에서는 자랑할 구석이라곤 티끌만치 없다. 즉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솜씨(workmanship)이다. 하나님의 걸작품(work of art)이다. 상품과 작품은 다르다. 콜라병은 대량으로 생산되는 상품이다. 그러나 유명 화가의 작품은 세계에 하나 밖에 없는 고가품이다. 우리를 지으신 분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지으심
우리는 두 번 창조함을 받은 자다. 첫 번째 창조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망가지고 깨어졌다. 이제 두 번째 창조, 즉 새창조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마쉬아흐 예슈아) 안에서 창조한 하나님의 작품이다.
본문에 창조와 관련된 두 개의 단어를 보게 된다. ‘만드신 바(포이에마, poivhma)’와 ‘지으심을(크티스덴테, ktisqevnte)’이다. 두 헬라어 모두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가르키는 데 사용된다. 특히 후자인 ‘크티조( ktivzw)’는 칠십인역(LXX)에서 히브리어 ‘바라(ar;B;, 창조하다)’의 역어로 16회 사용되었다.
제 10b 절 하나님이 예비하신 선한 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1. 하나님의 예비하신 선한 일
새 창조와 선한 일은 어떤 관계는 있을까? 선한 일은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신 것이다. 그 미리라는 시제는 언제를 말하는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바로 직전인가? 아니면 그 사람이 태어나기 전을 말하는가? 그렇지도 않다면 창세 전에 선한 일도 미리 준비하셨다는 말인가? 1:4에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고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예정을 하셨다. 창세 전에 이미 우리의 존재와 삶의 방향을 정하셨다면 그 내용까지 예비하셨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을 듯 보인다. 물고기를 만들기 전에 바다를 지으셨다. 그리고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다. 물고기를 만들기 전에 바다를 미리 예비하셨고, 예비하신 물에 물고기가 뛰놀게 하지만 물을 떠나 결코 살수 없게 하셨다. 이와 같이 사람을 만들기 이전에 우리를 택하셨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셨고, 선한 일을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길 원하셨다. 그런데 창조의 목적대로 선한 일을 행하기보다 오히려 마귀의 꾐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신이 하나님 노릇하려 하다 결국 죄의 종이 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전에 죄의 종노릇하며 영적으로 죽어 있을 때는 선한 일에 관심이 없었고, 악한 일을 행해도 죄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기 전에, 즉 구원하기 전에 계명을 주시거나 율법 준수의 의무를 부과하지 않으셨다. 그들에게 선함이 있거나 공로가 있기에 출애굽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일어났다. 이처럼 구원받은 자로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게 된 우리로서는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
‘선한 일을 위하여(에피 에르고이스 아가도이스, ejpi; e[rgoi" ajgaqoi'")’라고 할 때 전치사 ‘에피(ejpi;)’는 여격과 함께 사용될 때 목적을 나타낸다. NIV에서 ‘to do good works’, 새롭게 창조된 자의 삶의 목표를 가리킨다. 선한 일은 우리 자신들이 생각하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전에 예비해 놓으신 일이다(프로에토이마조, proetoimavzw). ‘미리 준비하다’는 동사는 신약성경에 두 번 나온다(롬 9:23). 도대체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여 놓으신 선한 일이란 무엇인가? 구원 받은 자들에게 어떤 선한 일을 요구하시는가? 마귀의 손 아래에서 죄의 종노릇할 때는 악을 일삼았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자는 하나님으로 하나님 노릇하게 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마음껏 우리를 사용하고,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일상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늘 검증(시험)해야 한다. 바울이 에베소서 전장에서 전반부에 해당하는 1~3장까지는 교리요, 4~6장까지는 실천적인 윤리부분이라고 할 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선한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떻게 행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후반부에서 더 면밀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선한 일을 행하는 삶, 선행이라는 열매를 보아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를 가름할 수 있다는 사상은 야고보의 믿음과 행위와 같은 맥락을 하고 있다.
2. 구원받은 자의 생활양식
앞서 2절에서 ‘행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파테오(peripatevw)’가 사용되었다. 2절에서는 구원받기 전의 삶의 양식을 설명할 때도 동일하게 사용하였다. 하나님이 없었던 시절에는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통제 아래 살았다. 죄의 종노릇하며 살았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 즉 그리스도의 중재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야 한다. 10절은 2절과 정반대로 구원받은 자의 삶의 양식을 말한다. 이전에는 죄를 짓고 악하게 살았다면 이제는 의를 행하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수하로서 일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일을 대비하고 있다. 이렇게 단락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페리파테오’ 동사는 읽은 본문의 수미쌍관(首尾雙關, 首尾相應inclusio)를 이룬다.
만일 구원받은 자가, 즉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자가 말하길 ‘나는 선한 일을 행할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일단 구원을 받았는가 한 번 재검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선한 일을 행하기에 구원을 받는 것은 순서상 맞지 않다. 또한 선한 일을 많이 하여 공로를 쌓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공로사상을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택할 뿐만 아니라(1:4), 때가 되면 그리스도아 함께 살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게 할 뿐만 아니라 그 나라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 살 대 선한 일을 그 앞에 내어놓는다. 그러면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자신의 길에 쓰러진 강도만난 자의 이웃으로서 자비를 베푸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일을 행할 기회로 받아 드리는 것이다. 자신의 선행으로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함이요, 사람들의 칭찬과 상을 받기 위함이라면 얼마나 전시성 행위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닌가?
성도들에게 선한 일은 옵션이 아니라 필연이다. 선한 일을 행하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열매이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이 글을 쓰는 시기는 가장 무더운 여름이다. 수박 씨를 그냥 땅에 심으면 우리가 가게에서 사 먹는 크기의 수박을 기대할 수 없다. 뿌리가 튼튼하고 병충해에 강하며 양분을 잘 흡수하는 호박과 수박의 겉단면에 수박 줄기를 서로 맞대어 접붙이기를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박과 식물은 뿌리 부분을 담당하고 줄기는 수박이 열리게 된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돌감람나무 가지이다. 그런데 참감란나무에 접붙이기를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참감람나무 열매를 맺게 된다. 좋은 나무에 접붙이기를 했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상식이다. 아무튼 접붙이기를 한 수박줄기요, 돌감람나무라면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십분 받아 좋은 열매를 맺어 주인을 기쁘게 해야 한다. 선행을 행함으로 농부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의무이다.
바울은 ‘페리파테오(peripatevw)’를 이처럼 이방인의 생활을 설명할 때와 같이 육신을 좇아 행할 때(롬 8:4)에서 사용하고 있고, 범인처럼 행할 때도(고전 3:3) 사용하였다. 반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다(골 2:6).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한다고 할 때 사용하고 있다(롬 8:4; 갈 5:16). 로마서 14:15에서 음식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것은 사랑으로 행하지 앉는 것이라 말씀한다. 에베소서 5:8에서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할 때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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