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바울 읽기

하나님아들 2023. 10. 6. 16:27
바울 읽기
 
Ⅰ. 내용 요약


 


1. 서론 : 거대한 산(山) 바울


 


   바울과 그의 서신들에 대한 다양한 입장은 바울 그 자신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해 준다. 본서의 목적은 바울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개론이자 현대적인 연구에서 제시되고 지지를 얻는 바울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관한 개론이기도 하다.




   바울은 시간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우리와는 동떨어진 사회 속에서 살았고 글을 썼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하게 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어휘와 문체, 신학과 윤리, 그리고 전제되는 교회의 질서와 조식의 수준에 빗대어 볼 때, 목회서신이 바울이 죽은 후 몇 십년 후에 그의 이름으로 저술되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신약성서에는 바울의 것으로 추정되는 7권의 편지가 있는데,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그리고 빌레몬서이다.


 


 


2. 예수로부터 바울에 이르기까지


  


 


나사렛 예수가 선포했던 메시지와 바울을 포함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선포했던 복음 사이에는 매우 명백한 차이점들이 발견된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춘 바울의 복음 사이에는 언어와 용법에 명백한 차이가 존재한다.




   예수의 메시지와 바울의 복음 사이에 있는 차이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 역사 속에서 바울이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영향력 때문에, 기독교를 비판한 몇몇 사람들은 바울이 ‘기독교를 실질적으로 창시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과제는 부활 이후부터 바울이 활동하고 저명한 사도가 되는 시점까지의 기독교의발전에 관한 증거를 짤막하게 검토하는 것이다. 이러한 검토는 바울을 실질적인 기독교의 창시자 또는 기독교의 제2의 창시자라고 부르는 근거가 있는지를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의 기독교 운동에 대한 몇 달 그리고 몇 년 동안을 설명해주는 실질적인 자료는 사도행전뿐이다.


   히브리파(그리스도인)는 유대인들이었고 이들은 아마도 팔레스틴 출신이었고 그들의 모국어는 아람어였을 것이다. 히브리어를 알아듣고 자신들의 예배에서 히브리 성서를 사용했다. 헬라파는 디아스포라 출신이었고 주로 헬라어를 사용했다. 이들은 아람어 또는 히브리어로 읽는 성서와 회당 예배를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고 70인역으로 알려진 구약의 헬라어 역본을 사용했다.


   따라서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전파에 있어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데, 로마제국 동부의 공통어였던 헬라어로 복음을 기록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들의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다른 도시로 가지고 가서 비유대인들과 그것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3. 바울의 생애: 그리스도와의 만남 이전과 이후


  


 


스텐달은 바울의 개종이 아니라 그의 소명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를 불렀다고 분명히 말하며(갈 1:15), 예레미야서와 제 2이사야의 ‘종’의 소명을 생각나게 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스텐달이 이런 의미에서, 바울이 ‘개종’한 것이 아니라 그가 평생 섬겨왔던 하나님에 의해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유대교 학자 씨걸은 바울이 종교적 경험의 관점에서 개종이라고 보고 있다.




   던은 ‘율법 준수에서 벗어난’ 이방인 칭의에 대한 바울의 관점은 특히 안디옥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리즈너 같은 다른 이들은 일반적으로 누가가 믿을 만한 자료이며, 사도행전의 증거는 바울 사역을 재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바울 서신은 그의 선교 활동과정과 서신들의 기록에 관해 단지 최소한의 정보만 제고어한다. 사도행전은 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믿을 만하며 그것과 서신의 정보가 서로 얼마나 관련되는지를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


   바울의 회심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에 발생했다는 점에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지만 정확한 연대가 언제인지는 논란이 되고 있다. 제안된 연대는 30년 혹은 가장 그럴듯한 33년과 함께 CE 26-36년 사이로 범위 지어진다.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첫 3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몇몇은 그가 이미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다른 이들은 ‘은둔의 기간’이라는 생각을 지지한다. 우리가 바울로부터 아는 것은, 3년 후 그가 예루살렘에 갔고 베드로와 15일을 함께 지냈고,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만났다는 사실이다(갈 1:18).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여 예루살렘을 첫 번째로 방문한 후에 바울은 안디옥 교회와 함께 했고 바나바 곁에서 선교사로서, 혹은 바나바의 협력자로서 활동했다.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 교회 공동체로부터 위임되어 함께 여행 했다. 이것이 소위 바울의 ‘1차 선교 여행’이다.


 


 


4. 서신 기록자 바울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의 초기 서신으로 고린도에 교회를 세우려했던 그의 선교 기간 동안,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것이라는 데 일반적인 동의를 얻고 있다. 그 연대는 41년에서 50-1년으로 추정된다. 데살로니가전서에 대한 놀라운 것들 중 하나는 바울의 중심 주제라고 여겨지는 것들 중 어느 것도 크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데살로니가인들에 대한 분노나 비평이 거의 없는 서신이다.




   데살로니가전서와는 완전히 반대로,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근심이 명백히 드러나는 서신이다. 여기에는 바울서신에서 통상적인 ‘감사’의 인사말이 없다. 대신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다른 복음’으로 너무 빨리 전환한 것에 대한 놀라움(갈 1:16)과 이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자들에 대한 저주를 나타낸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그가 보낸 초기 서신과 그가 고린도인들로부터 받은 서신(7:1)을 언급한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큰 환란과 애통의 ‘눈물로’ 기록된 서신을 언급하는데(고후 2:4), 그는 그것을 고린도후서 2장과 7장을 쓰기 전에 썼다.


   바울의 첫째 관심은 고린도 공동체내의 분열과 관련돼 있다. 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적어도 바울의 두 서신, 즉 빌레몬서와 빌립보서는 옥중에서 기록되었다. 빌레몬서는 집주인이자 노예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아마도 도망을 쳤거나 그의 주인에게 뭔가를 잘못한 오네시모라는 노예를 위해 호소하는, 간략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개인적인 편지이다.


   빌립보서에는 투옥으로 인한 바울의 충격이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바울은 여러 번 그의 고통과 죽음의 가능성을 언급한다. 그러나 빌립보서는 기쁨의 주제가 특징적인 편지이기도 하다.


   바울의 가장 큰 영향력 있는 서신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CE 55-8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마지막 서신들 가운데 하나인 로마서이다.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로마서는 바울이 세웠거나 이전에 방문하지 않았던 교회에 발송되었다. 더욱이, 로마서는 11장까지 광범위하고 복잡한 신학적 논쟁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12장 이후에 나타나는 윤리적 교훈을 토대로 형성한다.


 


 


5. 신학자 바울


  


 


아브라함은 바울에게 있어, 정의로 인도하는 모델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또한 아브라함에게 행한 하나님의 약속 즉, 그를 통하여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을 축복하리라는 약속이, 바울이 아브라함의 ‘씨’로 묘사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기 때문에 중요하다.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과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 사이의 기간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 즉, 유대교의 토라를 주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는, 비록 하나님의 그러한 구속적인 역사의 최종적인 완성은 아직까지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데 있어 하나의 결정적인 순간을 기록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강조하기를 율법의 효력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로운 계약 백성의 구성원들이 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특별히 그의 죽음과 부활이 전한 기독교의메시지의 핵심에 위치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바울에게 있어 둘 다 동일하게 중요한 것들이고, 그 두 가지의 것들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에 있어 핵심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언어는 대부분 유대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기름 부음 받은 자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세상에게 자신의 약속을 성취할 자로서 선포했다.


   바울은 분명하게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라는 초기 기독교의 고백을 나누고 반복한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바울의 이해에 관한 두 개의 주요 학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그들 사이에 그리고 그들 안에서도 많은 미묘한 차이와 논쟁을 보였다. 그 둘 중에 한 노선은 죄를 위한 대속으로써 하나의 희생 제물로 드려진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개념을 강조했다. 또 다른 노선은 바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신자들이 참여하는 것으로써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사상이다.


   신약학자들 가운데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관점, 어떤 ‘기독론’을 가졌는지에 대한 논쟁이 상당하다. 그것은 ‘위로부터의 기독론’이었는가 또는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적이었는가이다.


   중요하지만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한 책에서 제임스 던은 “바울이 예수를 그가 태어날 때 ‘성육신’ 한 선재적이고 신적인 인물로서 간주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다른 학자들은 위와 같은 입장에 반대하면서, “하나님의 본체대로”와 “종의 신분을 입었다”는 것은 단지 예수의 인간적인 존재와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음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하나님과 함께 성육신 이전의 실존과 그의 인간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바울에게서 하나의 ‘위로부터의’ 기독록을 주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라이트는 바울이 유대교의 유일신론이라는 틀 속에 머물면서도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유대교의 단 한 분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 섞으면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라고 알려지고 고백된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적 고백을 향한 방향으로 나가면서 하나님을 ‘다시 정의했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그리스도와 가장 잘 비교하는 구약성서에서 인물은 아담이다. 바울은 아담을 그리스도의 ‘유형’으로 언급한다. 분명히, 그는 역할과 신분을 대조시키면서 첫 번째 아담(=아담)과 ‘두 번째 아담’(=그리스도)을 명백하게 말한다.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둘 다 어떤 면에서 ‘통일된’ 사람들로서, ‘그들 소거에서’ 사람들이 산다고 인상적으로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구절은 오래 동안 바울만의 의미심장하고 독특한 것으로 여겨졌다.


   바울 복음의 핵심적인 초점은 그리스도 그리고 특히 그의 죽음과 부활인 듯하지만, 우리는 바울 신학이 하나님에 깊이 있게 근거한다는 증거를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확실히 바울서신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조식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행했고, 어떻게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냈고, 그를 죽음으로부터 살렸으며, 그를 주로써 높였는지에 대한 복된 소식이다.


   우리는 또한 바울이 그가 하나님을 언급할 때, 그와 동시대의 유대인들, 그리스도인들과 나란히, 그들이 믿었던 특정한 ‘하나님’을 말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근본적인 것처럼, 그 생명이 ‘성령 안에서의 삶’이란 것도 똑같이 근본적인 것이다.


   바울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자신들은 바로 ‘말세를 만난’ 자들이었다. 그리스도의 오심 그리고 특히 그의 부활은 ‘종말의 시작’을 구분한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이미 죄에서 벗어났고 성령의 권세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이미 하나의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 과정의 완성을 기다려오면서 신음했고 고통을 받았다. 그러므로 현재는 하나의 긴장의 시대, 하나의 중간적인 시대, ‘시대들 가운데’ 있는 시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종말론은 종종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문구로 요약될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의 구원사의 드라마에서 마지막장의 시작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분명히 확신한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이제 아브라함에게 한 그의 옛 계약-지구의 모든 민족들을 그를 통하여 축복하시리라는-을 성취하신 것이고 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도록 해주는 수단들을 사람들에게 제공했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구원은 부활한 새로운 몸, 불멸하고 타락할 수 없는 육신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하나님의 목적은 모든 이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분명히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로마서 8장에서 그는 모든 피조물들을 위한 구속의 예상을 보고 있다. 바울은 결코 자신의 사상 소거에서 이런 명백한 갈등에 대하여 하나의 해답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명백한 것은 바울 신학이 종말론적인 지향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의 고난과 압박감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구속, 부활, 그리고 불멸의 과정의 완성을 꾸준히 내다보고 있다. 그것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바울의 생애와 사역들이 향하고 있었던 미래적인 전망들이다.


 


 


6. 바울, 이스라엘 그리고 율법


  


 


 바울의 율법에 대한 기독교의 관점을 해석하는데 기본적인 문제는 그가 율법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것들을 모두 다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대조적이고 또는 모순적이기까지 한 언급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몇몇 학자들, 특히 레이제넨은 바울은 단지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은 바울의 사상이 그의 상이한 서신들 특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사이에서 발전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같은 서신에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언급들이 둘 다 나타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제안은 불완전한 것으로 보인다. 분명히 기본적인 문제 또는 딜레마는 바울이 일치시키고자 했던 신학적인 확신들에게 유래한다. 그는 한 편으로 하나님이 율법을 주었고 하나님이 실수를 하지 않는 이상, 또는 계획들을 실현시키지 못했거나 아니면 단지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상, 율법은 분명히 하나님의 목적의 일부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바울은 하나님이 믿는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했고 그 구원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다는 것을 확신한다.


   바울과 율법에 대한 그러한 관점은 일반적으로 마틴 루터의 이름과 결합되어 있는데, 자기 자신의 개인적이고 종교적인 투쟁이라는 배경에서 바울을 해석하는 루터의 해석은 당연히 루터파의 전통에 서 있는 개신교 교회들 가운데서 아직까지도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남아 있다.


   바울은 완전히 유대적인 주제들, 구약성서로부터 알려진 주제들을 채택해서 하나님의 구속적인 은총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는 그의 확신에 비추어서 그것들을 전개한다. 그러한 기독교적 관점에서 그는 율법 그 자체는 구원을 제공할 수 없다는 파단을 내리고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을 제공한 목적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봐야 했다. 바울은 여기서 자기 자신이, 그의 사상에서만 거의 유일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닌, 매우 잘 알려진 신학적인 딜레마에 부딪힌 것을 발견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전능한 창조주이고 일어날 모든 일들을 예견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은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유발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생각에 반대한다. 그는 하나님의 목적들이 드러나고 율법이 구속의 우주적인 드라마 속에서 그리스도로서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그 역할을 했다고 꾸준하게 주장한다.


   바울이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고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완고히 지키기 때문에 이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 그리고 역시 이방인들을 죄의 권세 아래 그리고 구원이 필요한 상태로 남겨 두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바울은 유대적이고 이방적인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이스라엘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던 신분을 부여한다. 특히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유대 민족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참된 후손들은 믿음을 가진 자들,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고 주장하는 데 상당한 부분을 할당한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씨는 ‘그리스도’인 점을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고 약속된 축복의 상속자들이다. 반대로 사라와 하갈의 이야기에 대한 전통적인 유대교의 해석을 뒤집으면서 바울은 ‘현재의 예루살렘’에 머무는 자들,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 상태에 머문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전체 이스라엘은 믿음이 아니라 행위에 기초해서 자신의 의로움을 세우고자 했으므로 갈 길을 잃었다고 반복해서 주장한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특정한 물음에 대하여 11:26의 바울의 언급-‘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신비함’-은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상당히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7. 바울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


  


 


어떤 이들은 여기서 정리된 방법론들을 바울 연구에 있어 비교적 주변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로 간주할 수 있겠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한 방법론들로부터 제기된 질문들은 바울서신에서의 ‘의’라는 용어의 의미에 대한 논쟁들보다는 현재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에서 더 큰 연관성을 갖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분명한 점은, 성서 연구의 그러한 영역들은 최근 들이 성장하고 전개되었고, 소멸되는 듯한 암시를 보이고 있지 않다.  게다가 사회-과학적 그리고 페미니스트 전망들은 해방신학과 이념 비평과 같은 신학과 성서해석에서 최근 들어 발전된 범위들과 연관이 있다.




   사회-과학적 비평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학을 실질적인 사회 배경속으로 배치시키면서 그들이 살았던 세계에 대한 상당한 안목을 얻게 해 줄 수 있는 방법들을 제공해 준다.




 


 


8. 신약성서 내에서 그리고 신약성서를 넘어선 바울의 유산


  


 


바울은 사도행전의 후반부에 두드러진 인물이고 나머지 사도들은 장면에서 거의 다 사라져 버린다. 신약성서 이후 최초의 저술들 가운데, 바울은 베드로와 나란히 눈에 띄는 사도와 순교자로 나타난다.




   가끔씩 초대 교회에 있어 바울의 영향력은 제시된 것과 같이 흔히 잘못 이해되었던 그의 신학과 저술들보다는 사도와 순교자로서의 영웅적인 신분을 통하여 나온다고 주장한다. 초기부터 분명히 바울 서신들은 이해하기에 까다로웠고 다양한 해석의 대상이었던 점이 인정되었다. 확실히, 바울의 영향력은 정통 기독교라고 간주된 범위 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의 인물됨과 저술들은 ‘이단적인’ 초기 기독교 그룹들로 불리게 된 광범위한 영역 내에서 아마도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예를 들어, 영지주의자들은 바울의 서신들로부터 많은 염감을 얻었다. 그리고 또한 2세기경에 쓰인 바울과 테클라의 행전 속에서의 바울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들은 여자들이 지도적인 역할들을 계속해서 가졌던-아마도 수다쟁이나 남의 


일에 끼어들기 잘 하는 사람들로서 목회 서신의 저자가 비판하는 ‘멍청한 여인들’로서가 아닌-그리스도인 그룹들 내에서의 바울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바울이 초기 기독교의 지배적이었던 ‘전통적’인 모형에 있어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도 사실인 듯 하다. 클레멘트, 이그나티우스 그리고 폴리캅과 같은 ‘사도 교부들’의 문헌들 속에서, 그리고 반 이단적인 저자 이레니우스의 신학 속에서 등등.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에 기초하여, 윌리엄 뱁콕은 ‘바울은 기독교에 고대의 문화적인 환경 속에서 그리고 그것에 반하여 독특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결정적인 요소들 가운데 하나였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개신교의 종교개혁에 있어 핵심적인 마틴 루터의 신학은 바울 없이는 상상도 안 된다. 루터에게 있어서 바울의 신앙인의 복음을 죄와 죄의식과의 그의 개인적인 싸움에서나 은혜를 돈 주고 사고 얻을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버린 교회에 대한 비판에 있어 해답을 제공해 주었다.


   실제로, 루터와 바울이 자신의 동생과 감리교를 창립한 존 웨슬리의 회심을 일으키는데 협력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가 재빨리 20세기로 넘어와서, 아마도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인 칼 바르트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바울의 깊은 영향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르트가 세상을 향하여 자신의 새로운 신학적 계획을 발표했던 저서는 바울의 가장 영향력 있는 로마서에 대한 주석을 통해서였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은 단지 오랜 세기 동안 신학사 속에 나타난 여러 명의 큰 인물들을 개략적으로 살펴본 것에 불과하다. 바울의 유산에 대한 연구는 교회의 벽을 훨씬 넘어서 더 많은 것들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9. 왜 오늘날 바울을 연구하는가?


  


 


첫째, 역사적, 문학적, 그리고 신학적 이유들이 그것이다. 현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역사가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 없이, 특히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둘째, 바울을 연구하기 위한 문학적 근거가 있다. 헬라 그리고 라틴 문학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바울서신들은 순위의 최정상에 있는 작품들에 못 미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서신들은 그것들이 작성된 이래, ‘중하고 힘이 있는’ 것으로 인정된 강력하고 예술적인 저술들이다. 곳곳에서 그 서신들은 아름답고, 서정적이고 시적이다.


   마지막으로 바울 사상을 이해하지 않고 그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바울을 연구한다는 것은 마치 음악을 듣지 않은 체, 베토벤의 원고의 저작 연대를 측정하고 악보의 구성을 연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Ⅱ. Comment


  


 


이 책은 미스바 성경 신학 시리즈 2편으로서 저자는 데이비 G. 호렐이다.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영국 엑서터대학교 신학부 신약학 교수로 재임중에 있다. 그의 저서로는 The Social Ethos of the Corinthian Correspondence와 The Epistle of Peter and Jude, Social-Scientific Approaches to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등이 있다.




   이 책의 주된 목적은 바울의 생애, 작품, 신학, 실천과 그 밖의 요소와 같이 다양한 측면을 연구함으로써 오늘날의 바울 연구에서 다루어지는 다양한 분야에 대한 논의를 독자들에게 소개하는데 있다. 


   이러한 목적 때문에, 이 책은 본질적으로 대답을 제공하기보다는 우리에게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이 책의 의도가 바울에 대해 독특한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 연구자들에게 다른 연구자들이 제시한 해석을 평가하고 자신의 관점을 개발시키는데 도움이 될 도구들을 제공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바울읽기는 총 9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들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장 서론에서는 우리가 왜 그리고 어떻게 바울을 연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제2장 예수로부터 바울에 이르기까지 에서는 나사렛 예수가 선포했던 메시지와 바울을 포함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선포했던 복음 사이의 명맥한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예루살렘 초대교회와 분열과 핍박 가운데 복음이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전파되고 비유대인들과 나누어지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제3장 바울의 생애에서는 바울서신으로부터 대강을 재구성할 수 있으나 그의 소명, 개종 이전과 이후의 바울의 활동의 윤곽은 완성할 수 없으며, 또한 학자들 간에 사도행전의 정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와 그것이 얼마나 믿을만한 가에 대해 상당한 차이가 있을지라도 누가의 자요 역시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제4장 서신기록자 바울에서는 하나님의 사명에 대한 바울의 주된 임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으며, 바울은 단지 이미 개종한 공동체들에게 편지했고, 격려했고 믿음 안에서 그들을 가르쳤으며, 문제와 논쟁에 대면했을 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바울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서신만을 통해서일 뿐임을 주장하고 있다. 제5자 신학자 바울에서는 바울신학의 주요 주제들을 간단하게 설명(그것들에 대한 해석학적인 논쟁들)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신학의 핵심에 관한 질문들에 대하여 해답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그 신학에 있어 핵심적인 다양한 주제들을 개요 하고자 했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해석되거나 결합되어야 되는지에 대해서 하나의 특정한 관점을 제시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특별한 관점에 대하여 독자들을 설득시키는 것보다, 이 책의 저자는 바울을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왜 그리고 어디서 학자들이 상이한 해석들을 내놓는지를 설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제6장 바울, 이스라엘 그리고 율법에서는 바울사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주제들, 바울의 유대적이고 기독교적인 신학 사이에서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는 범위에 관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특히 이 장에서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대교에 관한 기독교의 견해가 폭력적인 반유대주의의 출현에 일부 책임이 있다는 인식이 점점 더 늘어남에 따라 바울 뿐 아니라 또한 그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유대교의 다양한 측면들을 호의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과제의 강화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제7장 바울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에서는 사회?과학적 방법론과 페미니스트 방법들을 다루고 있는데, 사회?과학적 비평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학을 실질적인 사회 배경 속으로 배치시키면서, 그들이 살았던 세계에 대한 상당한 안목을 얻게 해줄 수 있는 방법들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제8장 신약성서 내에서 그리고 신약성서를 넘어선 바울의 유산에서는 바울의 사역이 어디에서 끝나고 그의 유산이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즉 어디까지가 바울의 저술들이고 그의 후계자들의 저술들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학자들간의 입장을 매우 간단하게 요약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많은 학자들에게, 논쟁이 되는 서신들은 바울의 후계자들로부터 그의 유산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의 가르침과 권위가 발전하는 교회에게 격동하는 상황을 어떻게 버텨내야 하는지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며, 그 모든 서신들이 실제로 바울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어떻게 그 서신들의 신학들과 윤리들이 바울의 초기 서신들로부터 발전되었고 그것들이 직면하고자 했던 새로운 이슈들과 문제들에 대하여 중요한 질문들을 가져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바울의 유산이 어디서 시작하든 간에, 그의 인물과 서신들은 초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줄곧 교회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지속하는 것이 틀림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제9장 왜 오늘날 바울을 연구하는가에서는 왜 바울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지에 대한 세 개의 주된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첫 번째 이유는 역사적인 이유이다. 즉 현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역사가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 없이, 특히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문학적인 이유로써, 헬라 그리고 라틴 문학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바울서신들이 순위의 최정상에 있는 작품들에 못 미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서신들은 그것들이 작성된 이래, ‘중하고 힘이 있는’것으로 인정된 강력하고 예술적인 저술들이며, 곳곳에서 그 서신들은 아름답고, 서정적이고 시적이다라고 말한다. 세 번째 이유는 신학적인 것으로 바울 사상을 이해하지 않고 그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바울을 연구한다는 것은 마치 음악을 듣지 않은 체, 베토벤의 원고의 저작 연대를 측정하고 악보의 구성을 연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바울을 연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임을 주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바울읽기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들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기독교 역사상 예수님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을 꼽으라면 나는 바울을 꼽고 싶다. 바울은 그 영향력에 걸맞게 수많은 사람들의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삶과 사상은 갈갈이 파헤쳐졌고, 낱낱이 드러났다. 그에 관한 책과 논문은 아마도 산을 이룰 정도로 굉장히 많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그에 대한 담론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바울의 인기가 이와 같이 식을 줄 모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계속 마셔대도 갈증이 나는 바닷물처럼, 아무리 연구해도 속 시원히 할 수 없는 그의 사상적 깊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바울의 산에 오르다가 조난당한 사람들에게 정상적으로 안내하는 지도와 같은 책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바울에 관한 또 다른 주장을 제기하여 바울에 관한 모든 연구(생애, 작품, 신학, 실천)를 종합적으로 집대성하여 한 눈에 볼 수 있게 만들어 졌다. 비록 바울 연구가들에게 속 시원한 결론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하여 독자 스스로 판단하도록 의도되었다. 또한 최근의 연구 성과인 사회과학적 연구와 페미니스트의 관점도 반영되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책을 통해 바울에 대한 전반적인 부분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정리할 수 있어서 참으로 유익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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