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바울 서신의 초점

하나님아들 2023. 10. 6. 16:36

바울 서신의 초점

 

하나님의 신약 경륜(經綸) 

 

바울 서신의 주요한 초점은 하나님의 신약경륜이다.

신약경륜은 구약경륜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목적을 점진적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신약경륜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 구약경륜의 중심이 여호와 하나님이었다면 신약경륜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전파되는 모습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고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더라(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신 점진적인 경륜이다.

우리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다음에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육신이 되어서 점진적으로 신약경륜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마침내는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경륜이다. 신약경륜은 은혜시대에 감추어진 비밀인데,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비밀(고전4:1), 그리스도의 비밀(엡3:4)이라고 말하고 있다.

 

1. 은혜시대에 감추어진 비밀. 

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시다. 골로새서 2장 2절에서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다. 구약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인류 가운데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기록한 책이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어떤 일을 하셨고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감춰져 있다. 홍해가 갈라진 것도 보고,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도 보았지만 하나님 자신은 감추어져 있다. 그분 자신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말로 표현되어 있지만 말로 듣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사과를 한번도 본 일이 없으면 사과에 대한 각종 서술(敍述)을 보고 듣는다 하더라도 사과 자체를 알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사과 하나를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관찰해서 우리에게 언어로 표현한다고 해도 사과를 본 일이 없으면 우리가 사과를 알기 어려운데, 하물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을 어떤 모양으로 말해서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행사(行事)를 눈여겨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곧장 바알을 섬겼다. 하나님을 본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들었고 그분이 행하시는 역사(役事)를 많이 보았지만 그 분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우스운 사건이 있었다. 범인(犯人)의 몽타주를 그리려고 하는데 아무리 말해도 몽타주를 그릴 수 없으니까 형사들을 중에서 비슷하다고 지목된 사람의 얼굴을 사진으로 찍어서 배포한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무리 말을 해도 그 사람을 그려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방법을 썼는데, 그 사람의 코는 어떻고 눈은 어떻고 하는 말보다 비슷한 사람의 사진이 더 정확하기 때문에 그런 현명한 방법을 찾았던 것 같다. 그러니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렵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비밀이다.

 

구약 안에서 하나님은 비밀이다. 구약에서는 여호와라는 말을 수도 없이 쓰고 있고, 그 여호와를 경배하고 섬기고 찬양하고 있어도 그분 자신의 얼굴을 그려낼 수 없고 알아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혼돈이다.

오늘날 종교의 혼돈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갖 종교적인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지만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분 자신이 어떻게 생기신 분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천사가 어떻게 다른지 구별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고 깨끗한 분이라고 생각하면 천사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지금 종교적인 혼란이 바로 그것이다. 입으로는 다 같은 하나님을 말하지만 결국은 보지 못한 어떤 신(神)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적인 창조자, 최초의 근원이신 분을 말하고 있는데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하든지, 하느님이라고 하든지, 여호와라고 하든지 상관이 없지만 과연 그분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가는 비밀인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이 예수라는 한 사람에게서 인격화(人格化)되지 않았다면 그는 영원히 비밀이 될 것이다. 그분이 '이 사람같이 생겼다. 이 사람같은 사람이다.'라고 표현되지 않으면 영원한 비밀이고 수수께끼인 것이다. 아무리 몽타주를 그려도 이 사람같이 생겼다고 할 수 없다. 인격이 아닌, 눈으로 볼 수 있는 외모조차도 표현하기가 그렇게 어려운데 하물며 영원하신 인격을 인간의 무슨 언어로 다 표현해서 다시 몽타주를 작성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50억의 인구가 있지만 자기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몽타주가 다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은 몽타주는 없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자기가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비밀이신 것이다.

 

40년 동안이나 만나를 먹고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바알을 섬기고 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과 바알은 천지차이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바알이라는 이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라고 하든지, 바알이라고 하든지 그것은 문제가 안된다. 형체가 안보이니 아무리 그 이름을 아무리 불러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다.

소나무라고 하든지 솔나무라고 하든지 마찬가지이다. 한 나무를 놓고 소나무라 하기도 하고 솔나무라 하기도 한다. 그 나무가 있기 때문에 소나무라 해도 상관이 없고 솔나무라 해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 나무를 보지 못했다면 소나무와 솔나무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기에 여호와와 바알은 이름이 틀린데 어떻게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실은 여호와도 보지 못했고 바알도 보지 못했다. 단지 큰 능력을 행하여 자기들을 위태로운 가운데서 구출하신 것을 본 것뿐이다.

그들은 여호와라고 하는 신이 구출해주셨다고 믿고 있었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까 그들은 바알이라는 신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훨씬 더 문화적이고 부유하게 잘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하! 우리가 지금까지 광야에서 여호와라고 불렀던 그 신은 바로 바알이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오늘날 너희가 섬길 자를 택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섬길 자를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노라(수24:15).'라고 말하고 있다. 모두가 우왕좌왕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바알을 섬기겠다고 하니 여호수아가 그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종교적인 혼란이다. 종교는 모두 보이지 않는 신을 믿고 있다. 그 신은 개념상으로는 절대적이지만 형상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인격(人格)으로 나타나심으로 우리는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밀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우리는 신약 안에서 축복된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구약 안에 살았더라면 우리도 별 수 없이 여호와를 섬기다가 바알을 보면 바알을 섬길 수밖에 없다. 아무리 똑똑해도 구약 시대에서는 어쩔 수 없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그의 어떤 영향력을 경험하는 것이고, 감동을 받는 것이지 그분 자신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 자신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그분 자신과 함께 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범주를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이다. 끝없이 헤멜 수밖에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완성시켜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나.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

그렇지만 오늘날 또 다시 문제가 생겼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기 때문에 또 비밀이 생기게 되었다. 2000년 전에 나사렛 땅에서 나서 죽으시고 부활해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아있다. 전부 다 증인들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구약 시대 때에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 경험을 써놓은 것이나, 신약 시대에 와서 사도들이 예수라는 사람을 경험해서 그에 대해서 기록해 놓은 것이나 지금에 와서는 비슷한 것이 돼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현재적인 그리스도가 없다면 또 다시 구약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밀은 교회라고 말하고 있다(엡3:4, 1:23). 만일 교회가 없다면 그리스도 역시 구약의 하나님처럼 우리에게 전설적인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사람들마다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상상하게 된다. "아! 그는 자비가 많은 분이었구나! 사랑이 많은 분이었구나!"라고 알고 있다. 그러면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는가? 우물가의 여인을 만난 그런 사랑이었는가, 눈먼 자를 뜨게 해준 사랑인가, 38년 된 병자를 고쳐준 사랑인가, 아니면 베드로를 다시 찾아간 사랑인가? 우리는 그렇게 그리스도를 알 수밖에 없다. 직접적으로 오늘 내가 그것을 경험하고 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분적인 경험밖에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비밀이었듯이 그리스도 역시 비밀이 되게 되었다.

이 비밀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시 종교 생활로 돌아가게 된다. 결국 예수님이 오신지 2000년이 지난 오늘 또 다시 종교생활로 돌아간 것이다. 구약에서 여호와를 섬기고 경배했던 것처럼 신약에서 예수를 섬기고 경배하는 종교가 또 다시 돼 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교회들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신으로써 경배 받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다. 그런 과정은 이미 구약 안에서 겪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경배했어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간격이 메꿔지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교회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사시기 위해서, 교회로 표현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나타나고, 그리스도는 교회로 나타나서 현재적으로 그리스도가 사는 것, 현재적으로 우리 안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신약 경륜이다. 결국 신약경륜의 초점은 교회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2000년전에 왔다가 떠나고 없으면 우리는 또 다시 종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교회 생활이 있으면 우리에게서 종교가 없어지게 된다. 교회 생활 자체가 그리스도 생활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일생동안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써 산 삶을 고찰(考察)해볼 때 그는 탁월한 그리스도의 증인이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했던 말씀대로 그는 땅 끝까지 이르러서 예수의 증인이 되었다. 그의 증인으로써의 삶은 바로 그리스도의 확산(擴散)이었고, 그 확산은 교회로 드러났다. 바울은 결국 교회 생활이루고 내놓은 사람이다. 그 교회 생활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예수를 안다는 것은 초대 교회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내려왔던 교회를 통해서 아는 것이다.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알기 어렵다. 성경에 쓰여진 것만으로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 교회를 통해서 알았기 때문에 만일 교회가 잘못되면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도 잘못된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표현인데, 교회가 빨간색이라야 될 것이 파란색이 돼 버렸다면 우리는 빨간색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고 파란색 그리스도를 아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이 땅위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교회가 얼마나 온전하냐에 따라서 그리스도가 얼마나 온전하게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결정하기 때문에 교회는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비밀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 시대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이다. 첫째로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이고, 둘째로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인 것이다.

 

2. 저서(著書)의 기본적인 내부구조(內部構造)

바울 서신의 기본적인 내부구조를 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표현된 삼일(三一) 하나님 안에서 그분 자신을 자기가 부른 백성 안에 분배하신다는 것이다. 생명으로 분배해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바울 서신의 구조의 내용이다.

 

삼일 하나님은 어떤 형태로 우리 안에 분배되는가? 그리스도라는 형태로 우리 안에 분배되신다. 그리스도는 삼일 하나님이 과정을 거쳐서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생명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 속에 들어오는가? 사람들은 생각할 때 "하나님, 내 안에 들어와 계십시오. 내 안에 좌정하여 주십시오." 하거나, "주여 내가 당신을 믿나이다." 라고 하면 자기 안에 들어와 있는 줄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오, 주 예수여!"라고 부르면 주님이 자기 안에 들어오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기도하고 그를 간절히 사모하면 그분이 자기 안에 들어오시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각자 자기들이 하나님을 모신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치 신주 단지를 집안에 모시듯이 하나님을 모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 육체(肉體)인 우리 안에 어떻게 신(神)이신 하나님을 모실 수 있겠는가? 하물며 우리가 오라고 한다고 오시고 가라고 한다고 가시겠는가?

사람들은 제사(祭祀)를 지낼 때 조상신들이 그날 밥을 얻어먹으러 온다는 개념을 갖고 있다. 밤 12시가 지나야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오늘 드리는 제사가 아니고, 내일이 돌아가신 날이기 때문에 내일 첫째 시간에 맞이하기 위해서 12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날 당일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밤 12시가 지나 기일(忌日)이 되면 방문을 열어놓고 대문밖에 나가서 "할아버지 오셨습니까?"라며 캄캄한데 대고 절을 하고 "들어가십시오." 하며 방으로 모시고 들어간다. 상을 차려놓고 밥을 두어번 떠서 국에 말아놓고 식사를 대접한 다음에, 문을 열고 다시 모시고 나가서 문밖에서 "안녕히 가십시오."하며 배웅을 하고 들어오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귀신을 부르고 보내고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내 속에 그렇게 모실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어떤 형태가 되지 않고는 들어오실 수 없다.

만일 내가 여러분 속에 들어간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어떻게 여러분 속으로 들어가겠는가? 어떤 방법으로도 들어갈 방법이 없다. 나를 어떤 방법으로 변화시켜서 여러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변화시켜야만 들어갈 수 있지, 지금 나대로는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게 된 것이다. 내가 여러분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 자신을 말씀으로 만들어서, 말씀이 되게 해서 그 말씀을 여러분에게 들려주는 것뿐이다. 그 말씀을 듣고 난 후에 여러분은 나 자신을 여러분 속에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게 된 것이다. 결국 그 말씀은 하나님의 변형(變形)인 것이다. 변형된 하나님이신 것이다. 우리 안에서 들을 수 있는,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육체(肉體)는 먹음으로써 받아들이지만 인격(人格)은 무엇을 듣고 봄으로 말미암아서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이 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과정을 거치신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과정을 겪으셨는가? 하나님은 그냥 말씀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어떤 모양으로, 어떤 형태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데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매개체인 인격이 필요하셨다. 그 매개자(媒介者)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이 되셨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본 것은 뇌성과 벽력과 불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모세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여러 가지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율법이 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율법을 만들어서 주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수많은 과정을 지나서 율법이 되셨다. 컴퓨터에서 글자 하나가 나오기 위해서는 그 안에서 많은 과정을 지나서 만들어지듯이 과정을 거치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안에서 과정을 거쳐서 우리가 소화할 수 있는 분으로 변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될 때는 그분이 우리 속에 동화(同化)될 수 있고 동일시(同一視)될 수 있는 어떤 분으로 변화된 분을 받는 것이다. 그냥 하늘에 계신 분은 우리가 받을 수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시라고 아무리 알아봤자 우리 생각에만 있을 뿐이지 속으로 들어오시지 않는다. 그분 자신이 어떤 인격으로 우리 안에 동일시 되었을 때 그가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내 안에 모시겠습니다."라고 하는 말은 내 마음을 열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을 내 속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겠습니다."라고 하면 될 것 같지만 컴퓨터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과정을 겪지 않으면 어느 장소로 들어갈 수 없다. 컴퓨터 내부에는 저장할 수 있는 창고가 많아서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많은 수학적 과정을 통해서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그렇게 많은 수학적 과정을 통과해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우리 안에 분배함으로써 우리가 그의 지체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계시가 바울 서신의 기본적인 내용이다. 이것을 모른다면 아무리 신약성경을 읽어도 소용이 없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 속에 들어오셔서 생명이 되는가를 모르면 신약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구약성경을 읽는 것과 똑같다.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오늘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약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구약을 읽고 있는 셈이다. 전혀 소화되지 않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교리(敎理)가 되거나 생활지침서가 될 수밖에 없다. 성경을 읽고 그대로 하는 생활지침서가 되든가,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사람을 구원하셨다는 교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종교의 한계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거처라는 의미이다. 아들 안에 아버지가 거한다. 아들 속에 아버지의 생명이 거한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집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거처라는 뜻이고,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할 때는 거룩한 생명 안에서 연합하여 몸이 된다는 뜻이다. 지체(肢體)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인격과 인격이 연합해서 하나의 몸, 하나의 교회, 단체적인 인간을 구성한다는 뜻이다. 지체가 되기 위해서는 인격이 아니면 안된다.

교회는 다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인격이 아닌 것은 지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모여서 어떤 곳으로 연합해갈 때 인격과 인격이 연합해서 하나의 완성된 인격을 형성해 간다. 예를 들면 A라는 형제가 팔의 어떤 성분을 나타낼 수 있다면, B라는 형제는 다리라는 성질을 나타낼 수 있다. 결국 팔이라는 성분과 다리라는 성분이 합해서 팔 다리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성분이 아니고서는 연합이 불가능하다. 똑같은 장소에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기 때문에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성질의 생명이 있어야만 지체가 될 수 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처라는 말보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더 구체적인 말인 것이다. 더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말이다.

 

고린도 전서 12장에 보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고 있다. 에베소서 1장 절에는 '아들의 명분'이라는 말이 나오고, 에베소서 3장 1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충만'이라는 말이 나온다. 아들의 명분은 하나님과 관계된 말이고, 그리스도의 충만이라는 말은 예수와 관계된 말이다. 그리스도의 충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우리가 누린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의 명분과 그리스도의 충만에 이르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누리는 것을 통해서 금세(今世)와 영세(永世)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 서신의 기본적인 구조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서까지 하나님의 표현이 되기 위해서 아들의 명분과 그리스도의 충만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라는 한 사람의 인격이 우리 안에 분배될 때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신약경륜의 초점은 그리스도이다. 이분 자신이 우리 안에 단체적으로 분배되어서 하나의 단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을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의 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그리스도와 교회'라고 말하게 된다. 이것이 신약 경륜의 중요한 요점이다.

 

과거에 기독교라는 종교생활을 할 때 우리는 구약의 생활을 해왔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고, 전능하시고, 인간의 사정을 아시고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고 찬양하고, 성경에 기록된 여러 가지 교훈들을 지키고 시행하는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리 해도 하나님과 내가 하나되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한계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듣고 소망을 갖게 되었다. '아! 새 언약이라는 것이 있었구나!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할 것이라 하신 대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내 생명이 되시는구나!' 하는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신약 교회의 소망이다.

지금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성경대로 살고 성경말씀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 속에 들어오셔서 어떻게 내 생명이 되시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만을 말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생활하는 부분에 대해서 별로 얘기하지 않았다. 때문에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고도 나중에 찾아와서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라고 답답한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어떻게 하라는 말은 구약이다. 지금 하는 말은 어떻게 하자는 말이 아니다. 어떻게 해도 안되니까, 어떻게 해도 안되는 사람들이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셔서 하나님이 내 생명으로 살아야 된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고 물으면 우리는 할 말이 없게 된다.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답을 들을 수 없다. 어떻게 하라는 것은 구약이다.

그 세계에서 인류는 실패했다. 이스라엘은 우리를 대표해서 실패한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들만큼 해보지는 않았지만 문설주에도 바르고 미간에도 붙이고 옷깃에도 바르고 다니는 일을 우리는 해보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만큼 철두철미하게 성경이 하라는대로 해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우리보다 훨씬 더 앞서 있고 적극적이고 절대적이었던 이스라엘이 우리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실험한 것이다. 그런데 다 실패하고 말았다.

 

100점짜리가 불합격하면 그 밑으로는 전부 다 불합격하는 것이다. 100점짜리 학생을 시험을 보러 보냈는데 그 학생이 합격하면 그 다음 95점짜리도 합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지만 100점짜리가 불합격하고 왔다면 그 이하의 학생은 시험을 보러갈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가보나 마나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철저하게 성경을 지키고, 종교생활을 한 백성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사에서 어떤 사람도 유대인 이상으로 구약을 경험할 사람은 없다. 우리는 유대인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실패를 깨달아야 되는 것이다. "나는 아직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라고 하는 것은 멍청한 생각이다. 마치 50점 짜리가 100점 짜리 학생이 불합격하고 온 것을 보고도 자기가 시험을 보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다. 가보나마나 떨어진 것이 뻔한데도 해보려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특이한 백성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선택하셨다. 그 백성만 되면 다른 백성은 다 되기 때문이다. 그 백성 안에서 되면 모든 인류가 다 되고, 그 백성이 안되면 모든 인류가 다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거역하기도 하고 순종하기도 하고 섬기기도 한 것이다. 모든 것을 우리를 대신해서 했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대표자이다. 예수를 죽인 것도 우리를 대표해서 죽인 것이다. "나는 예수를 죽이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죽였지 내가 왜 죽였는가?"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우리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우리를 정확하게 끄집어내면 유대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 속에도 예수를 죽일 만한 것이 다 있었지만 우리는 너무 소극적이어서 표현이 되지 않았던 것 뿐이다. 유대인들은 적극적이어서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아담도 그렇다. 어떤 사람은 조용한 아담이 있고 시끄러운 아담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조용한 아담속에도 시끄러운 것이 있는데 소극적이기 때문에 조용하게 보일 뿐이다. 그 사람이 완전히 드러나면 역시 그렇게 되는 것이다.(그 사람도 튀겨 놓으면 역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의 대표자이다. 그들은 우리를 대표해서 축복도 받았고 저주도 받았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거울과 같다.

100명이 물가에 있는데, 물에 빠지면 죽는가 사는가를 시험해보려면 100명이 다 들어갈 필요가 없이 한 사람만 실험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중에 가장 건강한 사람 한 사람만 물에 넣어보아서 그 사람이 죽으면 다 죽는 것이고, 그 사람이 살면 다른 사람도 살 가망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의 행동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바로 우리 자신의 표현이고, 우리 자신의 적극적인 면이 드러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예레미아서에서 예시된 대로 '내가 이스라엘에 새 언약을 세우리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리라(렘31:33).'고 하신 새 언약이다. 지금까지 했던 것은 실패했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이다. 훈련을 해도 안되고, 교육을 해도 안되고, 은혜를 베풀어도 안되니까 결국 두 생명이 한 생명으로 합해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해보셔도 안되니까 다른 방법을 쓰시려는 것이다. 경륜이라는 말은 방법, 경영(經營)이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경영하던 방식에서 다른 방식으로 바꿨다는 뜻이다.

대구에서 섬유공장을 해서 돈을 벌었는데 이제 섬유산업이 사양길에 들어서게 되니까 자동차 부품 산업으로 경륜을 바꾼 것이다. 머지않아 섬유도시라는 이름이 바꿔질 것이다. 이것은 돈 버는 방식, 돈버는 경영이 달라진 것이다. 하나님의 경영이 달라진 것이다. 이것이 신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구약의 경륜 안에 있다. 2000년 동안 여전히 구약의 경륜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심한 일일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탄에게 속아있는 것이다.

신약경륜을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죽고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신약 경륜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구약 경륜은 교육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죽을 것이 없었다. 교육은 십자가가 필요하지 않다. 우리 속에 있는 것을 개발해주기 때문이다. 구약은 있는 것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은 있는 것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죽고 다시 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 경륜은 참으로 아름답고 영원한 것이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꼭 십자가가 필요하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십자가를 받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구약의 생활을 하게 된다. 아무리 내가 여기서 신약경륜을 말하고, 하나님께서 신약경륜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셔도 우리가 십자가를 거부하면 우리는 구약 생활을 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2000년을 왔지만 아직도 구약 경륜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십자가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종교적인 방법으로 회피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받고, 고난을 받고, 고행을 한다고 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매장하는 것이다. 내가 알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는 바울의 말과 같이 전에 있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신약 경륜은 십자가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새로운 인격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오게 된다. 죽지 아니하면 다시 사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한대로 죽지 않으면 다시 사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신약 경륜은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신약경륜을 말씀하신 것이다. 니고데모는 70인 공회원의 한 사람이고 종교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신약 경륜을 말씀하신 것이다.

신약 경륜은 많은 교육을 받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훈련을 받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종교적으로는 되지 않는다. 십자가로 옛 율법과 구약과 종교를 다 끝내고, 인간의 모든 생각을 다 끝내고 다시 나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가 없이는 신약 생활을 할 수 없다. 단지 말씀을 듣고 성경을 보면서 "그렇지, 내가 그렇게 살아야지. 그렇지, 내가 그렇게 해야지."하는 수준에 있는 것이다. 그 수준을 벗어나서 진전할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과하면 새로운 세계가 오지만 회피하면 그 수준에 머물러서 더 이상 발전이 되지 않고 여전히 구약의 생활을 하게 된다. 계속해서 구약 생활을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교회의 숫자도 많아졌고 여러 가지 예배 의식도 개발되었고 전도, 봉사, 사회기여도 많이 하고 있다. 기도도 많이 하고 신령한 일도 많이 하고 병도 고치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지만 아무리 있어도 구약이다. 구약에도 그런 일들이 다 있었다.

사울은 사무엘이 경영하는 선지자 학교에 갔다가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예언하는 것을 보고 휩싸여 예언을 한 일이 있었다. 사울은 감정적인 사람이다. 다윗을 보고 죽이려고 하다가도 금방 풀려서 "내 아들아, 내가 잘못했다."라고 하지만 다시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곳에 가니까 자기도 감정에 휩쓸려서 예언을 하게 되었다.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는 속담이 생기게 되었다. 구약에는 신약보다 더 많은 예언자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입신을 해도 다 구약에 있는 것이다.

십자가 이후부터 신약이다. 무덤에서 나온 후부터 신약이다. 물에서 다시 올라올 때부터, 죽음에서 다시 나올 때부터 신약이다.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보일 때 신약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가 신약 경륜 안에 들어온 것은 너무나 큰 축복이다. 하나님은 이미 완전한 방법을 이 땅위에 내놓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을 통해서 신약경륜이 실행되고 전파되었다. 오늘 우리에게 신약경륜이 전파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인류에게 있는 유일한 소망은 신약 경륜이다.

종교는 여러 가지이지만 모든 종교가 다 똑같은 양상(樣相)을 갖고 있다. 불교를 봐도 구약적 불교가 있고, 신약적 불교가 있다. 구약적 불교는 종교적인 불교이다. 부처님을 섬기고 경배하고 불경을 읽고 따르는 것을 구약적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대중들은 그런 구약적 불교를 믿고 있다. 내일이 초파일인데 그들은 연등행사를 하면서 연등을 만원씩, 큰 것은 10만원씩 받게 된다. 불교 인구가 천만명이라고 하니 내일 엄청난 돈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구약 불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갓바위를 가거나, 경을 읽어서 수양을 하는 것도 구약적인 불교를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 중에도 신약적인 불교가 있다. 자기 자신이 부처가 되어 성불(成佛)해 보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로 성육신(成育身)하겠다는 것이다. 부처가 석가모니를 통해서 성육신 했으니 그것을 따라서 자기들도 성육신 하려는 것인데 이것을 신약적인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구약적 불교를 믿는 사람들과 자신들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구약적인 불교를 믿는 스님들은 성불이 불교의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돈벌이가 안되고 불교가 전파되지 않기 때문에 우매한 대중들에게는 구약적인 불교를 전파해서 자비심도 갖게 되고, 교화도 되고, 함부로 살생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불교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단지 중생을 교육하려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예 그런 구별이 없다. 다 똑같이 구약의 경륜 안에 있다. 어쩌면 불교보다 수준이 낮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성육신 하셨는데 예수에게서 끝나고 그 다음에는 없는 것이니까 구약의 기독교가 되고 만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새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시행하기 위해서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된 이 놀라운 사건이 예수님 한 사람에게서 끝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는가! 예수님 한 사람에게서 끝날 일이 아니고 영원한 일이 되어서 마지막에는 온 인류 안에 보편화되는 사건이 될 것이다.

전에 부사 사과 묘목을 구하려면 일본까지 가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데서나 구할 수 있다. 이것은 보편화된 것이다. 보편화되어서 아무데서나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도 그렇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라야 진리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될 수 있어야 희망이 있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종교에 머물러서 옛날 일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바울에게서 신약 경륜의 중요한 요점이 계시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성경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그를 통해서 우리는 놀라운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요한에게 와서 이것이 더 완성되어서 완전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로마서 이후의 사도들의 서신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약경륜이 어떻게 발전해서 구체적으로 발전하고, 마지막에 어떻게 새 예루살렘이 되는가를 보게 되기를 원한다.

 

역사의 소망은 공산주의와 기독교안에 밖에 없다. 공산주의는 역사의 소망을 인류앞에 제시했었다. 공산주의를 하면 유토피아가 온다며 화려하게 약속했었다. 그 약속이 실행될 것이라는 확신 속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참가하게 되었고 수백만의 사람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이 목적을 달성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 세계에 대한 비전이 너무 확실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70여년의 역사가 흐르면서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를 할 수 있는 인간이 없기 때문에 실패하게 된 것이다. 이상국가를 말했지만 그 나라를 건설할 벽돌이 없었던 것이다. 좋은 집을 지을 수 있는 설계도가 있었지만 그 설계도에 맞는 재료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재료를 만들기 위해서 밤마다 학습을 하고 총칼로 우기기도 했지만 되지 않았다. 구약 시대에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처럼 거기서는 공산주의의 유토피아가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교육을 통해서 될 줄 알았는데 되지 않았다. 그들이 신약 경륜이 없기 때문이다. 신약 경륜은 자기가 죽어서 변화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자기가 죽어서 변화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남을 죽여서 이상국가를 만들자는 것이기 때문에 안되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 제시된 것은 새 예루살렘이다. 이것이 역사의 마지막 소망이다. 이것은 무엇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신약 경륜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 인류의 새 소망이 있다. 다른 데는 소망이 전혀 없다. 자본주의는 역사적 비젼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현실에서 보다 낫게 살아보자는 것 뿐이다. 어떤 뚜렷한 역사의식이 있어서 자본주의가 생긴 것이 아니다.

두가지,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비젼 가운데서 한가지는 이미 끝났다. 공산주의는 이제 지구상에서 끝나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기독교만 남았는데 이것 마져 실패하면 인류는 절망이다. 다른 길이 없다. 결국 아무리 해도 마지막에 그 나라가 안되면, 그 사회가 안되면 소용이 없게 된다. 아무리 혼자서 도를 통해도 사회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다시 시들어져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서는 궁극적인 소망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새 예루살렘이다. 하나의 씨가 밭이 되고 밭은 농장이 되어서 온 땅이 그 열매로 가득한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 소망 안에서 지금 교회 생활을 누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숫자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지만 여기는 씨가 들어가 된 밭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숫자가 몇 명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성질이 그렇게 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의 씨가 천개, 만개로 퍼지는 것도 있고 단지 둘로 퍼지는 것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를 심어서 두 개가 나더라도 그 씨가 심어져서 나기만 한다면 처음에는 적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퍼지게 되고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면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만일 씨가 들어가서 다시 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영원한 씨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씨이신 그리스도가 있다. 공산주의에는 영원한 씨이신 그리스도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지만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될 것이다. 씨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소망하고 우리의 인생을 헌신하는 것이다. 이 나라를 위해서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이것이 거룩한 인생의 경영이고, 거룩한 인생의 행로인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 어디를 향해 갈 것인가? 모든 문제의 초점이 여기 맞춰져 있다.

우리는 어차피 역사 안에 태어난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의식이 필요하고 그에 맞는 행동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부름 받았지만 구약의 경륜 안에서 실패한 백성이 되었다. 이제 이방인이 우리에게 이 사명이 돌아와서 이방인 안에서 그의 몸된 교회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오늘 우리 안에서 이 씨가 드러나고 밭이 드러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몇대에 이르더라도 이 씨가 계속 번식하고 성장해서 그의 나라로 확장되어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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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신약 경륜(經綸) 

바울 서신의 주요한 초점은 하나님의 신약경륜이다. 신약경륜은 구약경륜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목적을 점진적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신약경륜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 구약경륜의 중심이 여호와 하나님이었다면 신약경륜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전파되는 모습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고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더라(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신 점진적인 경륜이다.

우리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다음에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육신이 되어서 점진적으로 신약경륜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마침내는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경륜이다. 신약경륜은 은혜시대에 감추어진 비밀인데,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비밀(고전4:1), 그리스도의 비밀(엡3:4)이라고 말하고 있다.

 

1. 은혜시대에 감추어진 비밀. 

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시다. 골로새서 2장 2절에서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다. 구약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인류 가운데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기록한 책이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어떤 일을 하셨고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감춰져 있다. 홍해가 갈라진 것도 보고,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도 보았지만 하나님 자신은 감추어져 있다. 그분 자신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말로 표현되어 있지만 말로 듣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사과를 한번도 본 일이 없으면 사과에 대한 각종 서술(敍述)을 보고 듣는다 하더라도 사과 자체를 알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사과 하나를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관찰해서 우리에게 언어로 표현한다고 해도 사과를 본 일이 없으면 우리가 사과를 알기 어려운데, 하물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을 어떤 모양으로 말해서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행사(行事)를 눈여겨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곧장 바알을 섬겼다. 하나님을 본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들었고 그분이 행하시는 역사(役事)를 많이 보았지만 그 분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우스운 사건이 있었다. 범인(犯人)의 몽타주를 그리려고 하는데 아무리 말해도 몽타주를 그릴 수 없으니까 형사들을 중에서 비슷하다고 지목된 사람의 얼굴을 사진으로 찍어서 배포한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무리 말을 해도 그 사람을 그려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방법을 썼는데, 그 사람의 코는 어떻고 눈은 어떻고 하는 말보다 비슷한 사람의 사진이 더 정확하기 때문에 그런 현명한 방법을 찾았던 것 같다. 그러니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렵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비밀이다.

 

구약 안에서 하나님은 비밀이다. 구약에서는 여호와라는 말을 수도 없이 쓰고 있고, 그 여호와를 경배하고 섬기고 찬양하고 있어도 그분 자신의 얼굴을 그려낼 수 없고 알아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혼돈이다.

오늘날 종교의 혼돈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갖 종교적인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지만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분 자신이 어떻게 생기신 분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천사가 어떻게 다른지 구별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고 깨끗한 분이라고 생각하면 천사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지금 종교적인 혼란이 바로 그것이다. 입으로는 다 같은 하나님을 말하지만 결국은 보지 못한 어떤 신(神)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적인 창조자, 최초의 근원이신 분을 말하고 있는데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하든지, 하느님이라고 하든지, 여호와라고 하든지 상관이 없지만 과연 그분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가는 비밀인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이 예수라는 한 사람에게서 인격화(人格化)되지 않았다면 그는 영원히 비밀이 될 것이다. 그분이 '이 사람같이 생겼다. 이 사람같은 사람이다.'라고 표현되지 않으면 영원한 비밀이고 수수께끼인 것이다. 아무리 몽타주를 그려도 이 사람같이 생겼다고 할 수 없다. 인격이 아닌, 눈으로 볼 수 있는 외모조차도 표현하기가 그렇게 어려운데 하물며 영원하신 인격을 인간의 무슨 언어로 다 표현해서 다시 몽타주를 작성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50억의 인구가 있지만 자기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몽타주가 다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은 몽타주는 없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자기가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비밀이신 것이다.

 

40년 동안이나 만나를 먹고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바알을 섬기고 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과 바알은 천지차이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바알이라는 이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라고 하든지, 바알이라고 하든지 그것은 문제가 안된다. 형체가 안보이니 아무리 그 이름을 아무리 불러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다.

소나무라고 하든지 솔나무라고 하든지 마찬가지이다. 한 나무를 놓고 소나무라 하기도 하고 솔나무라 하기도 한다. 그 나무가 있기 때문에 소나무라 해도 상관이 없고 솔나무라 해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 나무를 보지 못했다면 소나무와 솔나무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기에 여호와와 바알은 이름이 틀린데 어떻게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실은 여호와도 보지 못했고 바알도 보지 못했다. 단지 큰 능력을 행하여 자기들을 위태로운 가운데서 구출하신 것을 본 것뿐이다.

그들은 여호와라고 하는 신이 구출해주셨다고 믿고 있었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까 그들은 바알이라는 신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훨씬 더 문화적이고 부유하게 잘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하! 우리가 지금까지 광야에서 여호와라고 불렀던 그 신은 바로 바알이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오늘날 너희가 섬길 자를 택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섬길 자를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노라(수24:15).'라고 말하고 있다. 모두가 우왕좌왕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바알을 섬기겠다고 하니 여호수아가 그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종교적인 혼란이다. 종교는 모두 보이지 않는 신을 믿고 있다. 그 신은 개념상으로는 절대적이지만 형상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인격(人格)으로 나타나심으로 우리는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밀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우리는 신약 안에서 축복된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구약 안에 살았더라면 우리도 별 수 없이 여호와를 섬기다가 바알을 보면 바알을 섬길 수밖에 없다. 아무리 똑똑해도 구약 시대에서는 어쩔 수 없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그의 어떤 영향력을 경험하는 것이고, 감동을 받는 것이지 그분 자신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 자신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그분 자신과 함께 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범주를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이다. 끝없이 헤멜 수밖에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완성시켜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나.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

 

그렇지만 오늘날 또 다시 문제가 생겼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기 때문에 또 비밀이 생기게 되었다. 2000년 전에 나사렛 땅에서 나서 죽으시고 부활해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아있다. 전부 다 증인들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구약 시대 때에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 경험을 써놓은 것이나, 신약 시대에 와서 사도들이 예수라는 사람을 경험해서 그에 대해서 기록해 놓은 것이나 지금에 와서는 비슷한 것이 돼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현재적인 그리스도가 없다면 또 다시 구약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밀은 교회라고 말하고 있다(엡3:4, 1:23). 만일 교회가 없다면 그리스도 역시 구약의 하나님처럼 우리에게 전설적인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사람들마다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상상하게 된다. "아! 그는 자비가 많은 분이었구나! 사랑이 많은 분이었구나!"라고 알고 있다. 그러면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는가? 우물가의 여인을 만난 그런 사랑이었는가, 눈먼 자를 뜨게 해준 사랑인가, 38년 된 병자를 고쳐준 사랑인가, 아니면 베드로를 다시 찾아간 사랑인가? 우리는 그렇게 그리스도를 알 수밖에 없다. 직접적으로 오늘 내가 그것을 경험하고 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분적인 경험밖에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비밀이었듯이 그리스도 역시 비밀이 되게 되었다.

이 비밀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시 종교 생활로 돌아가게 된다. 결국 예수님이 오신지 2000년이 지난 오늘 또 다시 종교생활로 돌아간 것이다. 구약에서 여호와를 섬기고 경배했던 것처럼 신약에서 예수를 섬기고 경배하는 종교가 또 다시 돼 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교회들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신으로써 경배 받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다. 그런 과정은 이미 구약 안에서 겪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경배했어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간격이 메꿔지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교회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사시기 위해서, 교회로 표현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나타나고, 그리스도는 교회로 나타나서 현재적으로 그리스도가 사는 것, 현재적으로 우리 안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신약 경륜이다. 결국 신약경륜의 초점은 교회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2000년전에 왔다가 떠나고 없으면 우리는 또 다시 종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교회 생활이 있으면 우리에게서 종교가 없어지게 된다. 교회 생활 자체가 그리스도 생활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일생동안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써 산 삶을 고찰(考察)해볼 때 그는 탁월한 그리스도의 증인이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했던 말씀대로 그는 땅 끝까지 이르러서 예수의 증인이 되었다. 그의 증인으로써의 삶은 바로 그리스도의 확산(擴散)이었고, 그 확산은 교회로 드러났다. 바울은 결국 교회 생활이루고 내놓은 사람이다. 그 교회 생활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예수를 안다는 것은 초대 교회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내려왔던 교회를 통해서 아는 것이다.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알기 어렵다. 성경에 쓰여진 것만으로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 교회를 통해서 알았기 때문에 만일 교회가 잘못되면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도 잘못된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표현인데, 교회가 빨간색이라야 될 것이 파란색이 돼 버렸다면 우리는 빨간색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고 파란색 그리스도를 아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이 땅위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교회가 얼마나 온전하냐에 따라서 그리스도가 얼마나 온전하게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결정하기 때문에 교회는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비밀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 시대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이다. 첫째로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이고, 둘째로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인 것이다.

 

2. 저서(著書)의 기본적인 내부구조(內部構造)

바울 서신의 기본적인 내부구조를 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표현된 삼일(三一) 하나님 안에서 그분 자신을 자기가 부른 백성 안에 분배하신다는 것이다. 생명으로 분배해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바울 서신의 구조의 내용이다.

 

삼일 하나님은 어떤 형태로 우리 안에 분배되는가? 그리스도라는 형태로 우리 안에 분배되신다. 그리스도는 삼일 하나님이 과정을 거쳐서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생명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 속에 들어오는가? 사람들은 생각할 때 "하나님, 내 안에 들어와 계십시오. 내 안에 좌정하여 주십시오." 하거나, "주여 내가 당신을 믿나이다." 라고 하면 자기 안에 들어와 있는 줄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오, 주 예수여!"라고 부르면 주님이 자기 안에 들어오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기도하고 그를 간절히 사모하면 그분이 자기 안에 들어오시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각자 자기들이 하나님을 모신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치 신주 단지를 집안에 모시듯이 하나님을 모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 육체(肉體)인 우리 안에 어떻게 신(神)이신 하나님을 모실 수 있겠는가? 하물며 우리가 오라고 한다고 오시고 가라고 한다고 가시겠는가?

사람들은 제사(祭祀)를 지낼 때 조상신들이 그날 밥을 얻어먹으러 온다는 개념을 갖고 있다. 밤 12시가 지나야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오늘 드리는 제사가 아니고, 내일이 돌아가신 날이기 때문에 내일 첫째 시간에 맞이하기 위해서 12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날 당일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밤 12시가 지나 기일(忌日)이 되면 방문을 열어놓고 대문밖에 나가서 "할아버지 오셨습니까?"라며 캄캄한데 대고 절을 하고 "들어가십시오." 하며 방으로 모시고 들어간다. 상을 차려놓고 밥을 두어번 떠서 국에 말아놓고 식사를 대접한 다음에, 문을 열고 다시 모시고 나가서 문밖에서 "안녕히 가십시오."하며 배웅을 하고 들어오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귀신을 부르고 보내고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내 속에 그렇게 모실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어떤 형태가 되지 않고는 들어오실 수 없다.

만일 내가 여러분 속에 들어간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어떻게 여러분 속으로 들어가겠는가? 어떤 방법으로도 들어갈 방법이 없다. 나를 어떤 방법으로 변화시켜서 여러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변화시켜야만 들어갈 수 있지, 지금 나대로는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게 된 것이다. 내가 여러분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 자신을 말씀으로 만들어서, 말씀이 되게 해서 그 말씀을 여러분에게 들려주는 것뿐이다. 그 말씀을 듣고 난 후에 여러분은 나 자신을 여러분 속에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게 된 것이다. 결국 그 말씀은 하나님의 변형(變形)인 것이다. 변형된 하나님이신 것이다. 우리 안에서 들을 수 있는,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육체(肉體)는 먹음으로써 받아들이지만 인격(人格)은 무엇을 듣고 봄으로 말미암아서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이 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과정을 거치신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과정을 겪으셨는가? 하나님은 그냥 말씀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어떤 모양으로, 어떤 형태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데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매개체인 인격이 필요하셨다. 그 매개자(媒介者)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이 되셨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본 것은 뇌성과 벽력과 불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모세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여러 가지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율법이 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율법을 만들어서 주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수많은 과정을 지나서 율법이 되셨다. 컴퓨터에서 글자 하나가 나오기 위해서는 그 안에서 많은 과정을 지나서 만들어지듯이 과정을 거치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안에서 과정을 거쳐서 우리가 소화할 수 있는 분으로 변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될 때는 그분이 우리 속에 동화(同化)될 수 있고 동일시(同一視)될 수 있는 어떤 분으로 변화된 분을 받는 것이다. 그냥 하늘에 계신 분은 우리가 받을 수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시라고 아무리 알아봤자 우리 생각에만 있을 뿐이지 속으로 들어오시지 않는다. 그분 자신이 어떤 인격으로 우리 안에 동일시 되었을 때 그가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내 안에 모시겠습니다."라고 하는 말은 내 마음을 열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을 내 속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겠습니다."라고 하면 될 것 같지만 컴퓨터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과정을 겪지 않으면 어느 장소로 들어갈 수 없다. 컴퓨터 내부에는 저장할 수 있는 창고가 많아서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많은 수학적 과정을 통해서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그렇게 많은 수학적 과정을 통과해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우리 안에 분배함으로써 우리가 그의 지체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계시가 바울 서신의 기본적인 내용이다. 이것을 모른다면 아무리 신약성경을 읽어도 소용이 없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 속에 들어오셔서 생명이 되는가를 모르면 신약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구약성경을 읽는 것과 똑같다.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오늘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약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구약을 읽고 있는 셈이다. 전혀 소화되지 않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교리(敎理)가 되거나 생활지침서가 될 수밖에 없다. 성경을 읽고 그대로 하는 생활지침서가 되든가,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사람을 구원하셨다는 교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종교의 한계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거처라는 의미이다. 아들 안에 아버지가 거한다. 아들 속에 아버지의 생명이 거한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집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거처라는 뜻이고,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할 때는 거룩한 생명 안에서 연합하여 몸이 된다는 뜻이다. 지체(肢體)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인격과 인격이 연합해서 하나의 몸, 하나의 교회, 단체적인 인간을 구성한다는 뜻이다. 지체가 되기 위해서는 인격이 아니면 안된다.

교회는 다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인격이 아닌 것은 지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모여서 어떤 곳으로 연합해갈 때 인격과 인격이 연합해서 하나의 완성된 인격을 형성해 간다. 예를 들면 A라는 형제가 팔의 어떤 성분을 나타낼 수 있다면, B라는 형제는 다리라는 성질을 나타낼 수 있다. 결국 팔이라는 성분과 다리라는 성분이 합해서 팔 다리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성분이 아니고서는 연합이 불가능하다. 똑같은 장소에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기 때문에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성질의 생명이 있어야만 지체가 될 수 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처라는 말보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더 구체적인 말인 것이다. 더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말이다.

 

고린도 전서 12장에 보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고 있다. 에베소서 1장 절에는 '아들의 명분'이라는 말이 나오고, 에베소서 3장 1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충만'이라는 말이 나온다. 아들의 명분은 하나님과 관계된 말이고, 그리스도의 충만이라는 말은 예수와 관계된 말이다. 그리스도의 충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우리가 누린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의 명분과 그리스도의 충만에 이르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누리는 것을 통해서 금세(今世)와 영세(永世)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 서신의 기본적인 구조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서까지 하나님의 표현이 되기 위해서 아들의 명분과 그리스도의 충만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라는 한 사람의 인격이 우리 안에 분배될 때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신약경륜의 초점은 그리스도이다. 이분 자신이 우리 안에 단체적으로 분배되어서 하나의 단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을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의 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그리스도와 교회'라고 말하게 된다. 이것이 신약 경륜의 중요한 요점이다.

 

과거에 기독교라는 종교생활을 할 때 우리는 구약의 생활을 해왔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고, 전능하시고, 인간의 사정을 아시고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고 찬양하고, 성경에 기록된 여러 가지 교훈들을 지키고 시행하는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리 해도 하나님과 내가 하나되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한계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듣고 소망을 갖게 되었다. '아! 새 언약이라는 것이 있었구나!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할 것이라 하신 대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내 생명이 되시는구나!' 하는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신약 교회의 소망이다.

지금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성경대로 살고 성경말씀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 속에 들어오셔서 어떻게 내 생명이 되시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만을 말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생활하는 부분에 대해서 별로 얘기하지 않았다. 때문에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고도 나중에 찾아와서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라고 답답한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어떻게 하라는 말은 구약이다. 지금 하는 말은 어떻게 하자는 말이 아니다. 어떻게 해도 안되니까, 어떻게 해도 안되는 사람들이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셔서 하나님이 내 생명으로 살아야 된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고 물으면 우리는 할 말이 없게 된다.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답을 들을 수 없다. 어떻게 하라는 것은 구약이다.

그 세계에서 인류는 실패했다. 이스라엘은 우리를 대표해서 실패한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들만큼 해보지는 않았지만 문설주에도 바르고 미간에도 붙이고 옷깃에도 바르고 다니는 일을 우리는 해보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만큼 철두철미하게 성경이 하라는대로 해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우리보다 훨씬 더 앞서 있고 적극적이고 절대적이었던 이스라엘이 우리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실험한 것이다. 그런데 다 실패하고 말았다.

 

100점짜리가 불합격하면 그 밑으로는 전부 다 불합격하는 것이다. 100점짜리 학생을 시험을 보러 보냈는데 그 학생이 합격하면 그 다음 95점짜리도 합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지만 100점짜리가 불합격하고 왔다면 그 이하의 학생은 시험을 보러갈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가보나 마나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철저하게 성경을 지키고, 종교생활을 한 백성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사에서 어떤 사람도 유대인 이상으로 구약을 경험할 사람은 없다. 우리는 유대인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실패를 깨달아야 되는 것이다. "나는 아직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라고 하는 것은 멍청한 생각이다. 마치 50점 짜리가 100점 짜리 학생이 불합격하고 온 것을 보고도 자기가 시험을 보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다. 가보나마나 떨어진 것이 뻔한데도 해보려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특이한 백성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선택하셨다. 그 백성만 되면 다른 백성은 다 되기 때문이다. 그 백성 안에서 되면 모든 인류가 다 되고, 그 백성이 안되면 모든 인류가 다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거역하기도 하고 순종하기도 하고 섬기기도 한 것이다. 모든 것을 우리를 대신해서 했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대표자이다. 예수를 죽인 것도 우리를 대표해서 죽인 것이다. "나는 예수를 죽이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죽였지 내가 왜 죽였는가?"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우리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우리를 정확하게 끄집어내면 유대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 속에도 예수를 죽일 만한 것이 다 있었지만 우리는 너무 소극적이어서 표현이 되지 않았던 것 뿐이다. 유대인들은 적극적이어서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아담도 그렇다. 어떤 사람은 조용한 아담이 있고 시끄러운 아담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조용한 아담속에도 시끄러운 것이 있는데 소극적이기 때문에 조용하게 보일 뿐이다. 그 사람이 완전히 드러나면 역시 그렇게 되는 것이다.(그 사람도 튀겨 놓으면 역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의 대표자이다. 그들은 우리를 대표해서 축복도 받았고 저주도 받았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거울과 같다.

100명이 물가에 있는데, 물에 빠지면 죽는가 사는가를 시험해보려면 100명이 다 들어갈 필요가 없이 한 사람만 실험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중에 가장 건강한 사람 한 사람만 물에 넣어보아서 그 사람이 죽으면 다 죽는 것이고, 그 사람이 살면 다른 사람도 살 가망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의 행동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바로 우리 자신의 표현이고, 우리 자신의 적극적인 면이 드러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예레미아서에서 예시된 대로 '내가 이스라엘에 새 언약을 세우리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리라(렘31:33).'고 하신 새 언약이다. 지금까지 했던 것은 실패했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이다. 훈련을 해도 안되고, 교육을 해도 안되고, 은혜를 베풀어도 안되니까 결국 두 생명이 한 생명으로 합해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해보셔도 안되니까 다른 방법을 쓰시려는 것이다. 경륜이라는 말은 방법, 경영(經營)이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경영하던 방식에서 다른 방식으로 바꿨다는 뜻이다.

대구에서 섬유공장을 해서 돈을 벌었는데 이제 섬유산업이 사양길에 들어서게 되니까 자동차 부품 산업으로 경륜을 바꾼 것이다. 머지않아 섬유도시라는 이름이 바꿔질 것이다. 이것은 돈 버는 방식, 돈버는 경영이 달라진 것이다. 하나님의 경영이 달라진 것이다. 이것이 신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구약의 경륜 안에 있다. 2000년 동안 여전히 구약의 경륜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심한 일일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탄에게 속아있는 것이다.

신약경륜을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죽고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신약 경륜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구약 경륜은 교육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죽을 것이 없었다. 교육은 십자가가 필요하지 않다. 우리 속에 있는 것을 개발해주기 때문이다. 구약은 있는 것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은 있는 것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죽고 다시 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 경륜은 참으로 아름답고 영원한 것이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꼭 십자가가 필요하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십자가를 받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구약의 생활을 하게 된다. 아무리 내가 여기서 신약경륜을 말하고, 하나님께서 신약경륜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셔도 우리가 십자가를 거부하면 우리는 구약 생활을 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2000년을 왔지만 아직도 구약 경륜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십자가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종교적인 방법으로 회피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받고, 고난을 받고, 고행을 한다고 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매장하는 것이다. 내가 알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는 바울의 말과 같이 전에 있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신약 경륜은 십자가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새로운 인격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오게 된다. 죽지 아니하면 다시 사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한대로 죽지 않으면 다시 사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신약 경륜은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신약경륜을 말씀하신 것이다. 니고데모는 70인 공회원의 한 사람이고 종교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신약 경륜을 말씀하신 것이다.

신약 경륜은 많은 교육을 받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훈련을 받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종교적으로는 되지 않는다. 십자가로 옛 율법과 구약과 종교를 다 끝내고, 인간의 모든 생각을 다 끝내고 다시 나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가 없이는 신약 생활을 할 수 없다. 단지 말씀을 듣고 성경을 보면서 "그렇지, 내가 그렇게 살아야지. 그렇지, 내가 그렇게 해야지."하는 수준에 있는 것이다. 그 수준을 벗어나서 진전할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과하면 새로운 세계가 오지만 회피하면 그 수준에 머물러서 더 이상 발전이 되지 않고 여전히 구약의 생활을 하게 된다. 계속해서 구약 생활을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교회의 숫자도 많아졌고 여러 가지 예배 의식도 개발되었고 전도, 봉사, 사회기여도 많이 하고 있다. 기도도 많이 하고 신령한 일도 많이 하고 병도 고치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지만 아무리 있어도 구약이다. 구약에도 그런 일들이 다 있었다.

사울은 사무엘이 경영하는 선지자 학교에 갔다가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예언하는 것을 보고 휩싸여 예언을 한 일이 있었다. 사울은 감정적인 사람이다. 다윗을 보고 죽이려고 하다가도 금방 풀려서 "내 아들아, 내가 잘못했다."라고 하지만 다시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곳에 가니까 자기도 감정에 휩쓸려서 예언을 하게 되었다.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는 속담이 생기게 되었다. 구약에는 신약보다 더 많은 예언자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입신을 해도 다 구약에 있는 것이다.

십자가 이후부터 신약이다. 무덤에서 나온 후부터 신약이다. 물에서 다시 올라올 때부터, 죽음에서 다시 나올 때부터 신약이다.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보일 때 신약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가 신약 경륜 안에 들어온 것은 너무나 큰 축복이다. 하나님은 이미 완전한 방법을 이 땅위에 내놓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을 통해서 신약경륜이 실행되고 전파되었다. 오늘 우리에게 신약경륜이 전파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인류에게 있는 유일한 소망은 신약 경륜이다.

종교는 여러 가지이지만 모든 종교가 다 똑같은 양상(樣相)을 갖고 있다. 불교를 봐도 구약적 불교가 있고, 신약적 불교가 있다. 구약적 불교는 종교적인 불교이다. 부처님을 섬기고 경배하고 불경을 읽고 따르는 것을 구약적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대중들은 그런 구약적 불교를 믿고 있다. 내일이 초파일인데 그들은 연등행사를 하면서 연등을 만원씩, 큰 것은 10만원씩 받게 된다. 불교 인구가 천만명이라고 하니 내일 엄청난 돈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구약 불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갓바위를 가거나, 경을 읽어서 수양을 하는 것도 구약적인 불교를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 중에도 신약적인 불교가 있다. 자기 자신이 부처가 되어 성불(成佛)해 보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로 성육신(成育身)하겠다는 것이다. 부처가 석가모니를 통해서 성육신 했으니 그것을 따라서 자기들도 성육신 하려는 것인데 이것을 신약적인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구약적 불교를 믿는 사람들과 자신들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구약적인 불교를 믿는 스님들은 성불이 불교의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돈벌이가 안되고 불교가 전파되지 않기 때문에 우매한 대중들에게는 구약적인 불교를 전파해서 자비심도 갖게 되고, 교화도 되고, 함부로 살생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불교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단지 중생을 교육하려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예 그런 구별이 없다. 다 똑같이 구약의 경륜 안에 있다. 어쩌면 불교보다 수준이 낮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성육신 하셨는데 예수에게서 끝나고 그 다음에는 없는 것이니까 구약의 기독교가 되고 만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새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시행하기 위해서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된 이 놀라운 사건이 예수님 한 사람에게서 끝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는가! 예수님 한 사람에게서 끝날 일이 아니고 영원한 일이 되어서 마지막에는 온 인류 안에 보편화되는 사건이 될 것이다.

전에 부사 사과 묘목을 구하려면 일본까지 가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데서나 구할 수 있다. 이것은 보편화된 것이다. 보편화되어서 아무데서나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도 그렇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라야 진리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될 수 있어야 희망이 있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종교에 머물러서 옛날 일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바울에게서 신약 경륜의 중요한 요점이 계시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성경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그를 통해서 우리는 놀라운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요한에게 와서 이것이 더 완성되어서 완전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로마서 이후의 사도들의 서신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약경륜이 어떻게 발전해서 구체적으로 발전하고, 마지막에 어떻게 새 예루살렘이 되는가를 보게 되기를 원한다.

 

역사의 소망은 공산주의와 기독교안에 밖에 없다. 공산주의는 역사의 소망을 인류앞에 제시했었다. 공산주의를 하면 유토피아가 온다며 화려하게 약속했었다. 그 약속이 실행될 것이라는 확신 속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참가하게 되었고 수백만의 사람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이 목적을 달성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 세계에 대한 비전이 너무 확실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70여년의 역사가 흐르면서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를 할 수 있는 인간이 없기 때문에 실패하게 된 것이다. 이상국가를 말했지만 그 나라를 건설할 벽돌이 없었던 것이다. 좋은 집을 지을 수 있는 설계도가 있었지만 그 설계도에 맞는 재료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재료를 만들기 위해서 밤마다 학습을 하고 총칼로 우기기도 했지만 되지 않았다. 구약 시대에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처럼 거기서는 공산주의의 유토피아가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교육을 통해서 될 줄 알았는데 되지 않았다. 그들이 신약 경륜이 없기 때문이다. 신약 경륜은 자기가 죽어서 변화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자기가 죽어서 변화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남을 죽여서 이상국가를 만들자는 것이기 때문에 안되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 제시된 것은 새 예루살렘이다. 이것이 역사의 마지막 소망이다. 이것은 무엇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신약 경륜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 인류의 새 소망이 있다. 다른 데는 소망이 전혀 없다. 자본주의는 역사적 비젼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현실에서 보다 낫게 살아보자는 것 뿐이다. 어떤 뚜렷한 역사의식이 있어서 자본주의가 생긴 것이 아니다.

두가지,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비젼 가운데서 한가지는 이미 끝났다. 공산주의는 이제 지구상에서 끝나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기독교만 남았는데 이것 마져 실패하면 인류는 절망이다. 다른 길이 없다. 결국 아무리 해도 마지막에 그 나라가 안되면, 그 사회가 안되면 소용이 없게 된다. 아무리 혼자서 도를 통해도 사회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다시 시들어져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서는 궁극적인 소망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새 예루살렘이다. 하나의 씨가 밭이 되고 밭은 농장이 되어서 온 땅이 그 열매로 가득한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 소망 안에서 지금 교회 생활을 누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숫자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지만 여기는 씨가 들어가 된 밭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숫자가 몇 명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성질이 그렇게 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의 씨가 천개, 만개로 퍼지는 것도 있고 단지 둘로 퍼지는 것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를 심어서 두 개가 나더라도 그 씨가 심어져서 나기만 한다면 처음에는 적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퍼지게 되고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면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만일 씨가 들어가서 다시 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영원한 씨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씨이신 그리스도가 있다. 공산주의에는 영원한 씨이신 그리스도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지만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될 것이다. 씨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소망하고 우리의 인생을 헌신하는 것이다. 이 나라를 위해서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이것이 거룩한 인생의 경영이고, 거룩한 인생의 행로인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 어디를 향해 갈 것인가? 모든 문제의 초점이 여기 맞춰져 있다.

우리는 어차피 역사 안에 태어난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의식이 필요하고 그에 맞는 행동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부름 받았지만 구약의 경륜 안에서 실패한 백성이 되었다. 이제 이방인이 우리에게 이 사명이 돌아와서 이방인 안에서 그의 몸된 교회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오늘 우리 안에서 이 씨가 드러나고 밭이 드러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몇대에 이르더라도 이 씨가 계속 번식하고 성장해서 그의 나라로 확장되어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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