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
I.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과연 누구였을까? 사도 바울만큼 기독교 역사에서 극적이고, 독특하고, 중요한 인물이 있을까?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배웠으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외모는 어떠했을까? 출신과 가문은? 그리고 회심 이전에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부활의 예수를 만난 후 돌연 신앙의 변곡점을 맞았던 것일까?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 번쯤 이런 궁금증이 없었던 사람이 있을까?
▲조덕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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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길리기아 다소(행9:11;21:39;22:3)에서 로마 시민이었던 부모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경에서 그의 가족에 대해 더 이상 알려진 내용은 거의 없다. 제롬(Jerome)은 한 구전을 통해 그의 부모가 원래 기스갈라(Gischala)라고 불린 한 성읍 출신으로 주전 1세기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유린할 때 다소로 도피한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2세기 문헌은 바울의 외모에 대해 “체구가 작고 양 눈썹이 붙었으며 코가 좀 크고 머리는 벗겨졌으며 다리가 구부정하고 단단한 몸을 가진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다. 사람처럼 보이면서도 때때로 바울은 천사의 얼굴(the face of an angel)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천사의 얼굴이란 표현이 바울의 어떤 외형적 부분을 묘사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바울이 선한 표정을 가진 평범한 외모의 인물로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것으로 보아 평범한 히브리 가정이라기보다는 약간의 기득권을 누린 유대 출신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초대 교회 집사 중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을 돌로 치는 자리에 함께 있던 불신자로서 놀랍게도 부활한 예수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다. 그의 회심이 세상 그리스도인 가운데 그 누구와도 달리 정말 극적이고 독특한 이유다. 이후 그는 예수의 12 제자, 초대교회 집사 출신도 아닌 사람으로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친히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되었다. 그런 그가 없었다면 과연 기독교가 지금의 틀을 가진 종교가 될 수 있었을까?
바울에 관한 자료는 거의 전부가 신약성경 안에 들어있다. 첫째 바울 서신이요 둘째는 사도 행전이다. 사도 바울은 성경 계시의 저자 40여 명 가운데 가장 많은 성경을 저술한 저자다. 성경 66권 중 최소 13권이 바울이 쓴 책이다. 예수 불신자요 기독교 핍박자에서 극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대면하면서 기독교회의 일원에 동참하게 된 인물로 공교회를 굳건히 견고하게 만든 공로자였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가 되는 데 있어 그가 최고 공로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초대 교부들이 바울 저작들을 연구하고 다룬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사상도 바울 저작인 로마서의 이신칭의(以信稱義)에서 비롯되었다.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학자들이 바울 저작들을 언급하고 연구하였다. 헤겔, 불트만, 본 하르낙, 헤르만 리델포스, 게할더스 보스, F.F. 부르스, 칼 바르트, 그레샴 메이천, 윌리엄 바클레이, 알버트 슈바이처, N.T. 라이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신학자들이 사도 바울 연구에 매달린 것도 기독교 안에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가졌던 인물인가를 증거한다. 비록 바울의 이신칭의만이 정경성의 표준(principium canonicitatis)은 아니었으나 종교개혁 이후 바울 사상의 요점이 기독교의 중심 교리 안에 자리 잡은 것은 분명하다.
바울이 가지는 이런 상징성이 구속 신학의 칭의 교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바울 연구에 있어 미흡한 부분들이 생겨났다. 바로 창조, 창조주, 창조 세상에 대한 사도 바울의 관심은 관심에서 밀려난 감이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창조 이해는 기독교의 올바른 창조 이해와 섭리에 대한 대단히 중요한 기초 자료이며, 바른 구속 신앙의 근본이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이 부분들을 다루어보려고 한다. 사도 바울은 창조를 어떻게 바라보았으며 자신의 복음에 어떻게 이 창조 신앙을 연결하고 있는가? 즉 사도 바울은 자신의 창조 신앙(신학)을 어떻게 구속 신앙(신학)으로 연결하여 기독교 신학을 완성해 간 것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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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학자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믿었는지를 알아보기 전에 우선 두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했다.
첫째 바울은 조직신학자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일대 교회사 교수를 지낸 교회사학자 윌리스턴 워커(1860-1922)도 바울이 요즘의 눈으로 보면 조직신학자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의 저술들(세심하게 계획하고 논증하는 로마서를 포함하여)은 사실 우발적이고 개인적이었다고 했다. 바울은 신학을 체계화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바울뿐 아니라 모든 성경 저자들이 그렇다. 성경이 신학적 체계를 의식하고 쓰여진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람의 지성이나 지력에 충분한 만족을 줄 어떤 체계를 만드는 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오직 자신의 경험에 의거한 믿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 그 믿음을 말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는 예수에 대해 말할 때 부활하신 주님에 대하여 자신이 경험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말했다. 이것을 바르게 해석할 책임과 짐은 후대 신학자들에게 있다.
둘째, 바울 신앙 안에는 정적(靜的)인 것이 전혀 없었다. 복음의 내용에는 전승의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복음은 본질적으로 계시다. 이 계시는 성경 저자의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환경 속에서 주어졌다. 바울도 늘 이같이 변화하는 인간 경험의 조류에 항상 직면하면서 살았다. 때론 실수도 하고 사색가들과 이단자들을 응대하고 교회가 제도상 정통교회로 정착하기 이전 시기를 살면서 변화무쌍한 상황과 문제에 대면하고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보고에서부터 새로운 진리, 새로운 보물을 꺼내오는 일을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위대함과 새로운 풍요로움을 늘 발견하면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려는 의도가 바울에게는 있었다. 텍스트와 컨텍스트에 대한 사도 바울의 구별과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정확했다는 의미다. 이를 바탕으로 바울의 기독론, 칭의론, 구원론, 죄론, 종말론, 교회론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었다.
문제는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결코 정적이지 않았던 사도 바울이 변화하는 과학 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를 보고는 무어라 말하고 어떻게 복음을 설명하려 했을까 하는 점이다. 사도 바울 연구에 있어 주류에서 밀려난 바로 그 부분이다. 조금은 관심을 덜 받는, 바로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의 창조와 창조주, 그리고 작금의 창조 세상에 대한 것이다. 즉 오늘의 인간, 율법, 의식주, 환경(땅)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 속에 있는 세상에 대해 사도 바울의 계시는 어떤 연결 고리를 가질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II. 사도 바울의 인간관
1.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는 하나 아이러니하게도 창조주 하나님을 외면한, 사도 바울이 말하듯 인간의 본성은 핑계할 수 없는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 바울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나님으로 영광스럽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으며 생각은 쓸모없고 마음은 어리석어 어두워졌다고 했다(롬1:21).
사도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람은 스스로 지혜로운 체하지만 사실은 어리석으며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 형상의 우상을 섬기는 존재라고 했다(롬1:21-23). 불멸의 하나님의 영광을 소멸되어 버릴 것의 형상으로 바꾸어버렸다. 구약 시대뿐 아니라 바울이 살던 1세기 당시에도 샤머니즘과 토템과 물신숭배(der Feitischismus)가 만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대로 내어버려 두셨다.
이 같은 인간의 어리석음은 첨단과학기술 시대를 자처하는 21세기가 되었음에도 여전하다. 우리 사회 속에서도 고급 승용차 앞에 놓인 돼지머리나 정부 행사에 고사(告祀)를 위한 떡이나 기관 단체 행사와 제사에 동물의 머리 고기가 등장하는 것이 여전히 낯설지 않다. 하늘에나 땅에나 거짓 신들이 많고 많은 신(神)과 주(主)가 있고 그것을 따르는 어리석은 피조물들이 여전히 허다하다. 바울은 인간의 마음이 창조주를 마음에 두기보다 피조 세계의 인간이나 동물이나 자연의 양상들을 섬기기를 좋아한다는 점을 꿰뚫고 있었다.
2. 창조주를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내어 버려두셨다”라고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롬1:24, 26, 28). 사람들이 하나님과 참 된 진리를 찾으려하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부패한 마음으로 합당치 못한 악한 일을 하도록 내어버려두셨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에 대해 하나님이 그대로 내어 버려두자 인간은 하나님의 것을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기 시작했다(롬1:25). 진리를 거짓과 맞바꾸었다.
바울은 오늘날까지 결혼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여 순리를 역리로 쓰는 동성애도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의 결과라고 했다(롬1:26). 바울이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문제를 거론한 것으로 보아 당대 로마 시민들에게도 이 이슈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이 인간 자신이 스스로 마음의 정욕대로 사는 것에 대해 바울은 부끄러운 일이라 하면서 그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는 마땅한 보응(대가)이 있다고 했다. 그 보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바울은 설명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보응, 법적 규제, 동성 간 불편한 동거, 잉태하지 못함, 동성 간 연애로 인해 발생하는 문화적, 심리적, 육체적 불편함과 불균형, 그리고 예기치 못한 질병의 초래 등 보응은 많다.
지금도 동성애를 옹호하는 정치인들이나 우매한 대중들이 있다. 군 생활을 체험한 남자들에게 있어 군 생활 중 당하는 가장 곤혹스러운 상황과 경험은 바로 동성애 성향의 상관을 만나는 것이다. 전혀 상대방의 동의 없이 그들이 일방적으로 저지르는 폭력적 행위는 불쾌함뿐이요 어떤 병사에게는 자살의 충동을 일으킬 만큼 혐오스러운 체험이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당하고 감싸라고? 군 생활을 경험해보지 않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예수께서 마귀와 귀신과 독사의 새끼들을 감싸라고 하셨던가? 도착(倒錯)을 정상이라 말하면 안 된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사람은 사랑해야 하나 죄와 죄인은 보응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법이다.
이 밖에도 온갖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함,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으로 가득한 자들과 수군거리며 서로 헐뜯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건방지고 교만하며 자랑하고 악한 일을 꾸며 대고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미련하며 언약을 배신하거나 인정도 없고 무자비한 자들이 모두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사람들이 행하는 결과물들이다(롬1:29-31). 하나님의 법은 인간이 이런 식으로 살다가 죽는다는 사실을 끝없이 알려주고 경고한다. 그런데 어그러진 인간은 자기들만 이런 행위를 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을 옳다고 두둔까지 한다(롬1:32). 인간을 물질에 불과한 유물론적 일원론적 존재로 믿는 공산주의자들이 상습적으로 거짓말과 악을 정당화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정말 구제불능의 존재인가. 그렇다! 인간의 지식은 완전하지 않고 사람을 교만하게 할 뿐이다. 정부가 한반도 대운하를 밀어붙일 때 그 정당성을 설파한 것은 일부 지식인들, 과학자들이었다. 최근 방사성 물질 검출로 대량 회수 소동이 일어난 건강 침대 소동도 음이온이 건강에 이롭다는 일부 방송 의사들의 음이온 예찬에서부터 착안된 광고 결과물이었다. 임산부의 입덧을 드디어 잡았다고 과학의 성과를 찬양하던 진통제 탈리도마이드는 수많은 사지(四肢) 기형의 태아로 인해 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에 대해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처럼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분이 아니다. 하지만 직접적 보응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이렇게 스스로 그 보응을 충분히 달게 받는 것으로 대가를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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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울의 육체론-연약한 육체와 신령한 몸
바울은 육체(육신)라는 말을 아주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영국의 신약학자 브루스(F.F. Bruce)는 육체의 용법에 대해 (1) “사람의 신체”(롬2:28; 고후12:7; 갈4:13; 갈2:29), (2) “인간의 혈통 또는 혈연 관계”(롬1:3, 9:3, 5, 11:14), (3) 단순한 “인류”(갈2:16; 롬3:20; 고전1:29)라는 의미로 구분하였다. 주석가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이 문제를 좀 더 신학적으로 접근한다.
먼저 그는 신령한 몸과 대조하여 육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전15:44-46). 이 육체는 질병에도 고통 받을 수 있는 연약한 몸이다(갈4:13). 바울은 예수도 이 연약한 육체로 인해 육체적 죽음을 맞아(골1:22) 화목 제물이 되었다고 했다. 즉 이 몸(육체, sarx)는 쳐서 복종시켜야 되는 연약한 몸이다. 그런데 이 육체는 또 다른 성향을 보인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en sarki) 행하나 육체대로(육신의 생각대로, kata sarka) 싸우지 아니하노니”(고후10:3). 이 몸(육체)은 또 다른 경향성, 즉 중의적 요소와 의미가 있음을 언급한다.
사람의 본능에 속한 육체는 첫째 아담에게서 온 것이요(고전2“14) 신령한 생명은 둘째 아담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육신의 몸은 신령한 생활에 적합지 않으므로 ”사람의 몸“이라 하고 신령한 몸은 ”부활의 몸“이라 하였다. 겉으로 보면 다 같은 육체이나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요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다. 이 육체의 몸은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해야 한다(엡6:5).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한다고 우리 몸의 다른 측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육체의 상전이 장악할 수 없는 몸이 있다. 바로 진정한 하늘의 주인이 다스릴 신령한 몸이다.
바울은 율법적 관점에서는 육체적으로 누구보다 신뢰할만한 인물이었다(빌3:4).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순수 이스라엘 사람이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인으로 교회를 핍박하기까지 열심을 내었던 율법에 비추어 보면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육체가 전부가 아니었다. 알고 보니 율법에 매달린 이 육체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가치를 알고 난 다음에는 마치 배설물이요 쓸모없는 쓰레기나 다름이 없었다. 몸과 마음이 육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게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육체조차 의롭게 된다(빌3:9). 그래서 바클레이는 바울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롬7:5)라고 말한 표현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이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율법적 싸움을 벌이던 때요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 얻으려다가 오직 좌절과 패배와 절망을 맞볼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을 말한다.
바클레이는 이 몸(육체, 육신, sarx)과 유사한 또 한 단어를 지적한다. 바로 사르키코스(sarkikos)이다. 바울은 불신자도 아니요,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도 아닌, 제3의 인간 곧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지적한다. 아이처럼 여전히 단단한 것이 아닌 젖을 먹고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병든 육체가 육신의 질서를 잃어버리듯 교회도 시기와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고전3:3-4). 성화되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설명한 단어라 볼 수 있겠다.
육신을 따라 생각하는 것(롬8:6)과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은 죽는 것이요(롬8:12, 13) 죄 아래 팔린 삶이다(롬7:14).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은 벗어버려야 한다(엡4:22).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갈5:24).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멸해야 한다(롬6:6).
4. 인간의 의식주 문제(고린도전서 8장을 중심으로)
사도 바울이 인간의 의식주 문제에 대해 심각한 의미를 부여한 적은 없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빼곤 무엇이든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모두 해로 여길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처럼 여겼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빌4:12). 하지만 모든 세상은 그리스도의 세상이요 모든 창조 세상은 그리스도가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섭리의 땅이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일이 바울의 사역 속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가장 첨예한 문제는 매일 닥치는 섭생에 관한 것이었다. 모세 율법은 다양한 음식 규례를 다루지 않던가. 고린도 지역에서 이 문제가 정면으로 발생한다. 바울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였을까? 헬라의 고린도지역은 우상과 잡신과 음란이 넘쳐나는 도시였다. 시장에 출하되는 육류들 대부분은 온갖 잡신들을 향한 음란한 제사 속에서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들이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들을 먹어도 되는 것인지 바울에게 질문하였다. 이 문제는 초대교회 심각한 이슈이기도 했다(행15장, 롬14-15장). 고린도전서 8장 본문을 통해 이 우상에 바쳐진 제사 음식과 먹거리 전반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자.
(1) 첫째 우상(idol)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8: 1-7절).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우상에 대해 약간의 지식들이 있었다. 그걸 가지고 서로 고기를 먹어도 되느니 먹으면 안 되느니 논쟁을 벌였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다음의 다섯 가지를 지적한다. 1) 지식(여기서 지식은 남보다 별난 신비적 지식 즉 영지주의적 지식을 말함)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2) 지식보다 덕을 세우는 것이 사랑이다. 3) 지식이 있다고 생각(자랑)하는 자들은 실은 당연히 알만한 것도 잘 모르는 자들이다. 4)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된다. 5) 따라서 하나님이 알아주는(인정하는) 사람이 참 지식을 가진 사람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으로 인간의 길흉화복, 흥망성쇠, 생사를 주관하지 못한다. 따라서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대단하게 여길 필요도, 겁낼 필요도, 거리낄 필요도 없다. 제사 음식이든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든 먹든 안 먹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는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아닌가(6절).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느냐 안 먹느냐의 문제는 사실 믿는 이의 논쟁거리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이방인들이나 따질 문제이다. 속되고 부정 탄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나 두려움을 줄 뿐이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
(2) 둘째 식물은 우리를 세우지 못 한다: 먹거리의 유익은 아주 작은 유익에 불과할 뿐이다(8절).
이것을 일반 은총이라 한다. 즉 믿지 않는 이들도 누릴 수 있는 자연 은총이다. 물론 인간에게 바른 먹거리의 유익은 분명 있다(단 10장). 평범하게 먹든 잘 먹든 작은 유익일 뿐이요 영생을 믿는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다만 약간의 유익(수명 연장, 육체적 건강)이 있을 뿐이다. 건강하게 살아도 결국 인간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다(시90:10). 세우지 못 한다는 말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말이다.
본질상, 잘 먹는 유럽 사람들이나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이나 우상 식물을 먹는 자들이나 먹지 않는 자들이나 식물은 우리의 영적 삶을 세우는 일과 별 관련이 없다. 음식은 선하지만, 거룩과 무관하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경건해지는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정결법과 안식일 규정을 철저히 준수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정결하지도, 안식을 누리지도 못했다. 경건에 이르는 길을 사도 바울은 말씀과 기도, 야고보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그 자체로 속된 것은 없다. 다만, 부정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만 부정할 뿐이다.
(3)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이 믿음 약한 자를 넘어지게 만드는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절제하라(9-12절).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요 우리를 세우는 것도 아니므로 먹든지 안 먹든지 별 문제는 없다. 하지만 자유 하더라도 절제할 필요가 있다. 믿음 약한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도 믿음이 혼란을 겪기 마련이다. 형제에게 죄를 지으면 안 되고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해서도 안 된다. 그런 것들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약한 자를 실족케 함은 아주 큰 죄이다(마18:6). 자유하다고 목사가 거리낌 없이 아무 것이나 함부로 먹는 것을 보고 초신자들이 멋대로 따라하면 교회는 질서가 무너지며 혼란이 발생한다. 사실 목사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은 무엇이든 먹어도 문제없다고 보양식조차 함부로 거리낌 없이 즐기는 경우가 있으나 때론 조심해야 한다. 필자는 애완동물을 아주 사랑하는(?) 어느 기독언론 기자가 사철탕 등 보양식 즐기는 교회지도자들을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강하게 비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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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도 바울의 개인적 처방은 신앙 지식보다 앞선 복음을 위한 배려와 사랑이다(13절).
먹어도 아무 상관없는 이 우상 제물 문제에 대해 사도 바울은 어떤 개인적 처방을 하고 있을까? 바울은 무엇을 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나 복음을 위해 기꺼이 절제한다. 복음만 전해진다면 고기 한 점 덜 먹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이것이 올바른 지식을 바탕으로 남을 배려하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복음의 대선배 사도 바울의 결단이었다.
필자는 과거 부산에 집회를 갔다가 하루 세끼를 모두 회만 먹은 적이 있다. 집회 장소와 대접해주시는 분들이 모두 다르다보니 생긴 불상사(?)였다. 내륙 지방 출신 사람이라 회를 그다지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았던 내게는 아주 큰 고역(苦役)이었다. 사도 바울이 볼 때 이웃을 배려하는 것이 사랑의 마음이었지만(1-3절) 대접해주시는 분들의 준비된 사랑을 생각해서 거부 하지 못하고 필자는 하루 종일 회를 꾸역꾸역 열심히 먹었다. 사도 바울의 개인적 처방은 신학적 지식과 처방보다 사랑이 먼저였다. 사도 바울은 먹어도 상관없는 우상에 바쳐진 제물을 형제들을 위한 배려로 평생 먹지 않겠다고 고백한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강아지를 친자식처럼 여기는 형제들을 위해 사철탕 먹기를 금할 수 있을까? 이것이 범인(凡人)들은 흉내 내기 어려운 사도 바울의 결단이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4:1-3).
III. 사도 바울의 새 창조 신앙
바울의 창조 신앙은 단순한 창조 신앙에 머물지 않는다. 창조주요 구속의 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한다. 즉 성경의 창조 신앙은 궁극적으로 새 창조(구원 창조) 신앙으로 발전한다. 바울은 이 새 창조를 주로 강림(파루시아)과 부활이라는 말로 표현한다(살전4:16, 17). 게할더스 보스는 이 강림과 부활에 대해 첫 번째 부활은 그리스도가 강림하실 때 일어나고, 두 번째 부활은 그리스도가 그의 나라를 바치실 때 일어난다고 보았다. 부활의 시기와 빈도에 대해서는 신학적 관점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본고는 이 부분을 지면의 제약 상 다루지 않는다. 다만 필자가 주목하는 바울의 새 창조 사상은 이 강림과 부활 속에 사도 바울이 사람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허무함의 종살이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 위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중에 있다고 한 말이다(롬8:18-22).
기독교는 결코 동물을 무시하거나 동물에게 무례한 종교가 아니다. 인간은 피조물의 주인도 아니다. 청지기일 뿐이다. 바울은 동물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요 언약의 약속 안에 있는 존재임을 암시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뿐 아니라 수많은 가축이 있는 니느웨 성을 불쌍히 여기셨다(욘4:11). 창조는 종말론적 구원을 지향한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든 피조물을 위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이며(사65:17, 계21:1), 아담의 죄로 인해 파괴된 인간과 동물 간에도 평화가 다시 회복될 것이다(사65:25). 그 때까지 인간은 다스림의 위치에서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 다스림은 군림이 아니다.
인도의 신학자요 생태학자인 켄 그나나칸(Ken Gnanakan)은 이 ‘다스림’ 안에는 사랑, 상호 연결, 지속 가능한 창조성,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 종으로서의 섬김, 청지기,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존경심, 정의라는 여덟 가지 요소가 들어있다고 했다. 마치 예수께서 죄 짐 맡은 우리 구주요 좋은 친구였던 것처럼 인간은 당연히 동물들과 사랑 안에서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의 새 창조 속에 이 같은 하나님 사랑의 본질이 담겨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Ⅳ. 창조 신앙을 복음으로 연결하는 바울
파이네(P. Feine)가 바울의 복음이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zentrisch)으로 바울이 자신만의 고유한 “하나님 표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본 것은 바울이 어떠한 인물이었는지를 바라보는 신학자들의 일반적 정서를 바르게 표현한 말이다. 사도 바울은 어떤 사도보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넘어 초대 기독교의 인식에 대한 새로운 신 이해를 심어준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이 바울의 모호한 “하나님 표상”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참된 창조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거짓 것들을 비판만 하고 있을 바울은 아니었다. 바울은 우리가 한 하나님 곧 만물을 창조하신 아버지가 계실 뿐 아니라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그분이 바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요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다고 했다(고전8:6). 바울의 “하나님 표상”(신론)이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비록 바울이 조직신학자는 아니었으나 히브리적 창조, 창조주, 창조 신앙에 그치지 않고 바울은 당연하게 기독론적 접근으로 나아갔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창조와 창조주 신앙에 그치지 않고 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이스만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입장을 발견한 것”이었다. 즉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창조 신앙을 “창조주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과 신학으로 연결하여 기독교 구속 신학을 완성하고 있다.
누가는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에서 바울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놓은 제단을 소개하면서 이곳에 있던 헬라의 신 이해를 통해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 전하려 하였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종교성이 많다는 덕담 비슷한 언급을 하면서 복음을 소개하고 있다. 사실 이 도시는 우상이 가득한 도시였다(행17:16). 바울은 아테네의 이런 풍경을 보고 격분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인 바울은 마음을 가다듬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회당의 유대인 및 경건한 이방인들과 토론하고 장터로 나가 날마다 거기 모이는 사람들과 토론하였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철학자들과도 논쟁하였다. “외국 신들을 선전하는 것 같다”는 이들에게 바울은 한 사람에게서 모든 민족을 만들고 온 땅 위에 살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각 나라의 연대를 미리 정하시고 그들의 국경을 정하셨으며 이제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통해 회개하고 영원히 사는 영생의 복음을 전하였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에 어떤 사람들은 비웃었고 또 더 듣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었다(행17:32).
이 부분에 대해 주석은 바울의 선교 전략이 실패했다고 보는 측과 성공적이었다고 보는 견해로 나누어져 있다. 슈바이처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바울의 사상이 여기서는 “하나님 안에” 있다는 이교 사상으로 대치되었다고 말한다. 이 연설이 복음이 아니라 헬라 시인들과 사상가들을 전거로 삼아 하나님에 대한 참 된 지식을 확증하려 했다는 점에서 2세기 변증론자들의 합리주의를 보여준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콘젤만이 주장한 것처럼 정말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이방인에게 미련한 것“으로 알려졌기에 교묘히 그것을 회피하려고 한 것이었을까?
과연 바울의 선교 전략은 실패한 것이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권, 북한, 이슬람 등 창의적 선교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복음의 양적 열매는 가시적으로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의 선교 전략이 실패한 것일까? 바울이 전한 복음에 아테네의 몇 사람들은 복음에 반응하고 바울을 따르고 믿었다. 그중에는 놀랍게도 아레오바고의 법관 디오누시오(Dionysius)와 다마리(Damaris)라는 여자와 그 밖에 몇 사람이 있었다. 결코 복음은 좌절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이유 가운데는 바리새인 출신 바울의 확고한 유대적 창조 신앙이 뿌리박혀 있었음을 선교 방식의 지혜 속에서 확인이 되는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들을 접촉할 경우에는 그들에게 일부러 창조 신앙을 역설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다르다. 선교 전략상 그들에게는 먼저 창조주 하나님 선포를 통해 그리스도 복음을 전파할 필요가 있었다. 신 자체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이 전략은 동일하다.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한 기초 선결 지식으로서의 창조 신앙 선포는 선교 전략 상 이렇게 중요한 것이었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와 “십자가의 도”를 강조한 로마서의 저자다. 로마서는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한 서신이요 아레오바고 연설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브루스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바울의 선교적 지혜로서 이것을 복음적(evangelium)이라기보다는 ‘복음의 예비(Praeparatio)적 성격을 띠는 연설로 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신출내기가 아니었다. 복음의 본질(텍스트)와 상황(컨텍스트)를 구별 못할 만큼의 미숙한 전도자는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도 이 같은 유비는 설득의 도구였다. 예수는 창조계식, 자연계시를 구속 계시의 접촉점으로 부단히 사용하셨다. 예수의 자연계시는 단순한 자연계시와 자연 신학에 그치지 않고 구속 계시로 연결하는 복음 사역의 예비적 과정이었다. 예수의 창조주 자연계시는 이신론(理神論)에 머무르지 않고 복음적 창조주 하나님 계시로 나아간다.
골로새서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묘사하면서 영적 존재들도 피조 된 존재들이라고 설명하였다(골1:16). 4복음서는 모두 이들 영적 존재들인 사단과 귀신의 존재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 사탄은 32회 가운데 14회 복음서에서 언급되며 귀신은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행, 고전, 딤전, 약, 계) 성경에 11회 언급된 가운데 복음서에는 100여 회가 넘는 빈도로 등장하고 있다. 사도 바울과 달리 예수는 이들 영적 존재의 창조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사탄과 귀신과 같은 영적 존재들이 있음과 더불어 그들도 예수 자신의 통치 아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영적 존재인 사탄과 귀신에 대해 예수는 인격을 가진 그들과 대화한다. 물론 그들이 예수의 사귐의 대상은 아니었다.
예수에게 사탄은 꾸짖어 쫓아낼 존재요(막8:33), 귀신도 악하고 더러워 추방해야 할 존재였다(마12:43, 45). 예수는 십자가 죽음과 3일 만에 살아날 것을 예언한 가르침에 대해 예수께 항변하며 이 같은 일이 예수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소원하던 제자 베드로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말하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로 책망하였다. 또한 ‘사탄’은 제자 가룟 유다에게 들어갔다(요13:27). 그렇게 복음서의 예수는 인류 타락과 죄와 불순종의 배후에 있는 인간이 그 전모를 파악하기 결코 쉽지 않은 심각한 영적 존재에 대해 자연스럽게 계시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자연계시를 통해 의인 욥의 고난의 배후에 있는 사탄의 존재를 계시하신 하나님을 연상케 하는 한다(욥1-2장 참조). 심지어 하나님은 욥기 41장에서는 ‘사탄’이라는 언급을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도 ‘리워야단’이라는 동물(자연계시)를 통해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으로서의 사탄에 대해 암묵적 계시를 하고 있다. 욥이 깨닫고 회개하고 은혜 받고 복 받은 것은 구속 계시가 아닌 놀랍게도 모두 70여 가지에 달하는 속사포 같은 하나님의 자연계시 속에서 이루어졌다. 교만하고 군림(소위 ‘갑질’)하는 자는 베드로나 가룟 유다처럼 ‘사탄’의 도구나 다름없다 할 것이다.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요 기독론의 중심이다. 예수의 자연계시가 자연을 초월함 속에서 전개되는 것은 삼위의 제 2위이신 창조주 하나님, 예수의 모습을 드러낸다. 초대교회 교부 이레네우스 역시 말씀과 하나님의 영, 즉 그리스도와 성령을 우주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두 손이라고 표현하여 삼위일체적 창조를 언급한다. 그런데 20 세기 들어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을 비롯한 현대 신학자들은 예수를 구속사(Heilsgeschichte) 내에 묶어두려는 의도적 시도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애써 숨기려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가 인간만이 아닌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임을 언급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골1:15-17). 예수는 곧 창조주임을 전파하여 자연스럽게 그 예수를 우리의 주(主)요 구주(救主)로 연결한다(고전8:6). 바로 예수가 전한 그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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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나가면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존재론적 간극(ontological gap)이 엄연한 현실 아래에서 자연계시의 구원적 가치(salvific value)의 문제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맞으면서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다. 전면 부정론과 비관론을 넘어 오히려 논쟁은 더 심화 되는 듯하다. 포스트모던 신학자 클락 피녹(Clark H. Pinnock)은 일반 계시를 구원적 가치에 적극적으로 연결을 시도하는 인물이다. 오늘날 일반 계시에 구원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가톨릭 신학의 공식 입장이다. 대표적 종교 다원주의자 존 힉(John Hick)은 신적 계시로서의 성경을 포기하고 자연 종교로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반 틸(Cornelius Van Til)은 개혁신학의 특징 가운데 일반 계시의 명료성을 말하나, 타락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일반 계시로는 누구도 실제적인 하나님을 참된 창조주로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우리 인간은 늘 제한을 가진 도구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불완전이라기보다 분명 인간의 죄성과 그에 따른 교제의 상실 그리고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지니는 한계 때문이다. 인간은 오직 부분을 다룰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특수 계시가 적용되는 공간은 여전히 일반 계시의 영역이다. 이 점을 깨닫는다면 창조된 우주 안에 하나님이 계시(啓示)는 인간의 정신 활동 가운데서 제한적으로 살아날 수 있다.
예수의 자연계시는 두 가지 측면 즉 자신이 곧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동시에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구속 계시를 향한 연결 고리를 제공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신론의 영향 속에서 ‘자연에 의존하는 신학이 계시를 뒷받침하기보다 희생시켜 왔다’는 생각이 20 세기 신학을 지배하여 온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래서 지난 세기 신학자들이 자연계시의 합리성을 알면서도 자유주의 신학자라거나 무지한 신학자라는 공격을 염려하여 자연 신학이라는 언어의 불충분성 때문에 자연계시의 유용성조차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가 자연 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극단적인 부정적 견해에 대해 바르트의 비판이 (1) 부적절한 성경적 기초에 기초하며, (2) 바르트 자신이 개혁신학의 전통에 있다는 주장이나 칼빈이 자연 신학에 대해 반대자의 입장에 있었다는 견해는 모두 잘못이요, (3) 자연 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부정적 태도는 자연과학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라고 비판한 것은 바로 20 세기 주요 신학에 있어 자연계시와 자연 신학을 보는 편견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삼위의 제 2위이신 ‘창조주 하나님, 예수’가 바라보고 언급하고 사역한 공생애를 통한 창조계식(자연계시)는 결국 궁극적 구속 계시로 연결되는 접촉점을 찾는 작업이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창조 신앙도 결국 체계적으로 의도한 작업은 아니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개종 이전의 히브리적 창조 신앙을 그리스도에게 연결한다. 즉 바울은 기독교 신앙을 정립하는 과정 속에서 창조 신앙을 구속 신앙의 완성을 위한 마중물이요, 기초석으로 삼았다. 그는 통전적인 기독교 사랑의 실현으로서의 하나님 계시를 구원론적, 종말론적 구원-창조 신앙으로 연결하는, 조직적이며 선교적인 작업을 통해서 자신의 창조 신앙을 복음을 전혀 몰랐던 이방인들을 향한 자연스러우면서도 필연적인 논리적 도구로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조덕영 박사 bareunmed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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