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도 유래, 의미, 아론의 축도, 바울의 축도
"아론의 축도"에 대한 신학적 고찰(민수기 6:24~26)
Ⅰ. 들어가는 말
John P. Milton은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의 임재 자체이며,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과 하나님 앞에서의 행함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부르신 후 복을 선포하셨다. 즉,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축복은 영적인 특성이 지배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독특한 한 인격적 의미에서 믿음으로 갖게되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축복이었다. 축복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을 가지게도 못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대신 내릴 수도 없는 것이다.
오늘 날 축도는 단순히 예배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정도로만 인식되거나, 반대로 축도를 예배의 가장 신성한 요소로 여기는 경향도 간혹 나타나고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복을 빌어주는 것은 제사장들의 고유한 권한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민수기 6:24~26에 기록된 '아론의 축도'의 구조와 내용을 신학적으로 고찰하고, 목회적인 차원에서 축도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구체적인 적용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본 론
1. 축도(祝禱)의 일반적 개요
(1) 축도의 정의
'축도'(benediction)란 말은 <잘, 좋게>라는 뜻의 bene와 <발하다>를 뜻하는 dicere의 합성어 benedicere에서 유래되었다. 축도의 정의에 대하여 프랭클린 M. 지글러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자신을 맡기고 하나님의 복을 회중에게 선포하는 귀중한 말이다. 이 기도는 예배 의식에서 하나의 절정을 이룬다. 이 기도는 예배 의식에 나타난 태도들을 한데 모아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나가는 회중의 서약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라고 하였다.
구약 민수기 6:24~26 아론의 축도는 '바울의 축도'(고전 13:13)와 더불어 교회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어진 축도이다. 이는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도록 주셨지만, 실제 그 축도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만 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축복을 선포하는 것이 제사장들의 임무였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내 이름으로 축복을 선포하라. 그리하면 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루터교 예배에서는 아론의 축도(민 6:24~26)가 사용되며, 스웨덴 예배는 삼위일체 양식문(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과 더불어 아론의 축도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러한 축도 의식은 1958년부터 일반예배에서 행해지게 되었다. 영국의 성공회의 기도서에는 성만찬시에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문구가 첨가된 바울의 축도(빌 4:7)를 사용하며, 아침 기도서와 저녁 기도서에는 고린도후서 13:13의 축도를 사용하고 있다.
(2) 축도의 방법
구약 성경에는 두 곳에 대표적인 축복의 양식이 나오는데, 하나는 민수기 6:24~26 '아론의 축도로서 기원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이 동사가 동사의 피엘 기원명령형의 형태로 되어있으며, 이것이 이스라엘 제사장 전통으로 발전되어 왔던 것이다.
또 하나는 신명기 28:3~6의 형태인데, 이는 기원이 아니라 선언의 형태로 되어있다. 이와 유사한 신약의 양식을 찾아보면 누가복음 24:36 예수님께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10:12~13에서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방식으로 축복을 빌어주라고 말씀하셨다.
축도하는 방법에 있어서 레위기 9:22에서 두 손을 들고 하는 장면이 나오고, 창세기 48:17에는 손을 머리에 얹어서 축복하는 모습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축복하시는 방법 중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고 축복하시는 것은 구약적인 전통과 연결시켜 볼 수 있고, 오병이어를 받으신 후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을 확인하려는 행동으로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손을 들어 축복하셨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축복할 때에 일정하게 사용되는 행위와 축복 양식이 전승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교회사의 측면에서는 주후 3세기부터 신체에 손을 얹는 것이 성호를 긋는 것으로 바뀌었다. 십자가 성호를 긋는 행위가 복을 비는 행위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세이후 종교개혁 시대에는 하나님의 복이 말씀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여 성호를 긋는 등 행위보다 말씀 선포를 중시하였다. 따라서, 축도문이나 축도 양식,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 선포에 크게 중점을 두었다.
(3) 축도의 주체와 객체
축복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체가 되고, 인간이 대상 객체가 되는 것이 구약의 복에 관한 문맥의 기본적이고 일관된 흐름이다.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을 축복하신다는 것은 창세기 신학으로부터 묵시 신학에 이르기까지 나타난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복을 주시고(창1:28 ; 5:2) 이스라엘 백성을 복주시며(출 20:24, 레 26:3~13), 조상들의 복이 자손들에게 계속되도록 복을 내리시며(신 7:13), 홍수 이후 노아 자손들에게 계속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창 9:1이하) 또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속 복을 주신다.(행 3:24~26)
다음으로 인간이 인간을 축복하는 경우인데 대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윗 사람이 아랫 사람을 축복하는 것이 보편적인 경우이다. 구체적인 실례를 찾아보면 족장들이 후계자나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경우로, 노아가 아들을 축복한 것(창 9:26),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것(창 27:23~29), 야곱이 임종 시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한 것(창 48:15), 가장이 임종 시에 자손들을 축복하는 것, 지도자였던 모세와 여호수아가 지파나 백성들을 축복한 것(신 33:1~29, 수 14:13), 왕이 백성을 축복한 것(삼상 6:18, 대하 6:3), 제사장이 하나님을 대표하여 예배에 참석한 사람을 축복한 것(민 6:23~27), 제사장이 개인적으로 성도들을 축복한 것(삼상 2:20, 대하 30:27)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축복한 경우가 있다. (창 47:7~10, 대하 14:22, 신 24:13, 시 72:15, 왕상 1:47, 잠 30:11, 룻 2:4) 이는 구약의 전통에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축복의 용어를 사용하여 인사, 호의, 경의를 표하는 경우가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신약성경의 대표적인 축복을 들면 예수님의 축복을 들 수 있는데 어린이들에게 하신 축복(막 10:26), 오병이어의 축사(마14:11),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축복(눅24:50)이 그것이다. 그 외에 예배 순서로서의 축도란 것은 기록된 곳이 없으며(고전14:26~33) 다만 고린도후서 13:13에 교회 상대 서신의 결론적 축사로 나와있을 뿐이다.
2. 아론의 축도 (민6:24~26)
(1) 원문 구조분석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제사장의 축도의 기본 내용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3구절로 이루어진 3행시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3구절은 「평행 대구 구조」로 되어있다. 평행 대구 구조 문장에서는 당연히 각 단위별로 서로 대응되는 요소들, 즉 A1, A2, A3와 B1, B2, B3는 동질성을 갖게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내용 뿐 아니라 형식적 정형성까지 갖추고 있다.
A1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B1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A2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B2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A3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B3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먼저 각 구절의 전반부 A1, A2, A3 문장들은 모두 여호와란 하나님의 이름을 주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정형성을 지니고 있다. 히브리어에서 동사는 그 자체 내에 주어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본문의 경우 '여호와'란 고유명사를 한 번만 사용하여도 내용 전달에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문장에 모두 '여호와'란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로 사용된 것은 비록 외형적으로 제사장에 의하여 복이 선포되고 있지만 당신의 백성에게 복을 주시는 궁극적인 주체는 바로 여호와 되심을 3중으로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3이란 숫자는 삼위 하나님을 나타내는 신성한 숫자로서 하나님의 완전성 또는 충만함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성부 하나님은 축복과 보존의 하나님으로, 성자 그리스도는 비추임과 은혜로, 성령은 비추임과 평안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으로 A1, A2, A3에는 모두 미완료형 동사가 사용되었다는 정형성을 지니고 있다. 미완료형 동사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되(A1), 일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로 비추시되(A2) 계속해서 환하게 비추시며, 그 얼굴을 드시되(A3) 계속하여 당신의 백성을 향하여 드실 것을 바라는 강한 희구의 뜻이 담겨져 있다. 즉 A1, A2, A3는 모두 단회적인 복이 아니라 지속되는 복을 기원하는 의미가 각 문장의 동사의 형태 가운데서도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A1, A2, A3는 점층법이란 수사적 기교가 사용되고 있다. 즉 A1에는 '복'이라는 포괄적이며 추상적인 용어가 사용되었으나, A2에는 '그 얼굴로…비추사'란 보다 구체적이며 구상적인 용어가 사용되었다. 무릇 얼굴이란 한 존재를 대표하는 부분이다. 이같은 얼굴을 어느 한 대상에게 돌려 집중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당신의 얼굴로 이스라엘을 비추기를 비는 것은 결국 여호와께서 깊은 사랑으로 이스라엘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시고 빛이 대지에 생명을 주듯 이스라엘의 앞날을 돌보아 주시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층법적 구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되 점점 더 큰 복을 받는 자리로 나아가게 됨을 전달하고 있다.
B1, B2, B3는 A1, A2, A3의 복이 주어짐에 따라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A1) 외부적인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며(B1), 여호와께서 그 얼굴로 비추어 주시므로(A2)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B2),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드심으로(A3) 완전한 평강을 얻게 되는 것이다.(B3) 그런데 B에 있어서도 모든 동사는 A와 마찬가지로 정형적으로 미완료형이 쓰임으로 이러한 복스러운 결과적 상황이 단회적으로 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을 축도하고 있다. B1, B2, B3도 점층적인 구조를 보인다. 즉 B1은 소극적으로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의미하며, B2는 적극적으로 은혜를 체험하는 상태를 보여주고, B3는 은혜를 받은 자가 누리는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 완전한 평강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특기할 사항은 A1, B1 / A2, B2 / A3, B3로 구성된 3행시인데 A1과 B1은 3단어로, A2, B2 는 5단어로, A3, B3는 7단어로 각각 구성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1행보다는 2행이 2단어가 더 많고, 2행보다는 3행이 2단어가 더 많은 것이다. 이러한 구성 역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복이 점점 더 크게 확장되어 감을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잘 느끼게 한다. 또한 각 행의 단어를 모두 합하면 15단어가 된다. 본 축도는 단어의 수효까지 의도적으로 조절함으로써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복이 점점 확장되어 갈 것이란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짧은 3행시로 이루어진 본 축도문은 그 원어적 분석을 통하여 볼 때 히브리시 특유의 깔끔한 압축미, 그리고 각 단어의 동사형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계산된 평행 대구 구조에 의한 정형미는 물론 그 내용과 단어 배열 양측면에서 적절히 구사된 점층법이라는 수사적 기교에 의한 역동성과 더불어 고도의 상징성까지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아론의 축도의 특징
이 축도에 있어서 '너'란 바로 '이스라엘 자손'을 말하며, 이 축도를 말하는 발화자(發話者)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다. 따라서, 이 축도에서 세 번 반복되는 "원하며, 원하며, 원하노라"라는 동사의 주어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이 축도를 말하는 제사장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복을 베풀어주실 것을 간구하는 내용의 기도인 것이다. 반면, "복을 주시고"( ) "백성에게 얼굴을 비추시고"( ) "은혜 베푸시고"( ) "얼굴을 향하여 드시고"( ) "평강 주시고"( )라는 동사의 주어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이런 축복을 주시는 주체가 된다.
이 부분에 있어서 바울의 축도문과 차이점이 보인다. 아론의 축도문은 여호와 하나님께 은혜를 기원하는 형태로 되어있는 반면, 고린도후서 13:13에 나타난 바울의 축도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 하나님의 사랑 - 성령의 코이노니아'라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간구하는 독특한 양식을 갖추고 있다. 아론의 축도는 오랜 기간을 거치는 동안에 그 형태의 변화를 겪었으며, 바울에게 까지 그 영향이 나타났다고 보아야 한다.
(3) 축복의 내용
① 하나님의 보호 (24절) :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지켜주신다"는 말씀 속에는 우리에게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연약하고 미숙하고 죄를 짓기 쉬우며,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일하고 완전한 보호자가 되신다. 여기에서 "지키다"라는 말은 원래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친다"는 뜻이다. 가시로 담장을 친다는 것은 어떤 대적도 막아주신다는 철저한 표현이다.
② 하나님의 은혜 (25절) :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기에서 여호와의 얼굴이란 표현은 그 분의 성품과 전인격을 상징하는 신인동형 동성론(神人同形 同性論 : Anthropormophism)적인 표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우거나 감춘다는 것은 인간 편에서는 절망과 죽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하나님이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진리의 광채로 비추어 주신다고 하는 것은 생명이요, 구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 방향은 곧 인간 생존의 열쇠라고 할 수 있다.
③ 하나님의 평강 (26절) :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표준 새번역에 의하면 "주께서 고이 보시어 너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라고 되어있다. 여기에서 평화를 뜻하는 샬롬( )은 구약성경에서 237회나 쓰여졌으며, 이 용어는 하나님에 의하여 결정되고 주어진 온전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므로 세속적 평화와 종교적 평화로의 구분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 샬롬은 개인에게 쓰여질 때 건강하고 훌륭한 삶을 말한다. 건강 회복, 전쟁에서의 무사한 귀환, 곤궁의 돌봄, 장수, 후손의 축복, 천수를 다한 고요한 죽음 등에 쓰여졌다. 국가나 가족 등 공동체에게 쓰여질 때에도 공동체의 번영과 안전을 의미한다.
또한 평화는 계약과 깊은 관계를 맺고 그 계약 안에서 이루어 질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레 26:6, 욥 5:23~24) 정치적인 안전도 평화요 전쟁의 종식도 평화로 나타난다. 모든 평화는 하나님의 것이며(사 45:7) 평화의 조건은 하나님의 임재이다.(민 6:26) 그러므로 샬롬은 인간을 평화롭게 만드는 계약의 조건 아래 있는 인간의 의다.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 32:17) 따라서, 평화는 사악의 반대개념이 되고, 인간 삶의 온전성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포함한다. 또한 화평의 언약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오는(사 54:10) 영원한 것이다.(겔 37:26) 언약의 평화는 하나님의 축복을 인간에게 전달해 준다.(민 25:12) 하나님의 축복은 관계성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특히 평화의 축복은 예루살렘, 즉 이스라엘 종교의 고결함에 필수적인 것이다.(시 122:6~8)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평화는 구원이다.(사 52:7, 나훔 1:15)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자는 평화를 갖게 된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약속은 평화의 약속이기 때문이다.(시 85:8, 사 26:12)
3. 축도의 목회적 이해
(1) 축도는 아론으로부터 계승된 것인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백성을 축복하는 권한을 부여하셨다. (레 9:22~23, 민 6:22~27). 따라서 이것이 오늘 날 강단에서 목사들이 하는 축도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구약의 축복기도는 중보자가 드리는 기도이며, 대제사장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축도권을 주신 것은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대제사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히 3:1, 히 4:14)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딤전 2:5) 목사는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칠 뿐이며 중보적 권한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요,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한 대언자이시다. 오히려 우리는 목사나 집사나 성도나 모두 주 안에서 형제이다. (히 2:11, 마 23:8) 이와 같이 아론의 대제사장적인 축도권에서 그 기원을 찾아 축도한다면 누구도 축도할 수 없다. 오늘 날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2) 축도는 예수님께서 명하신 것인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축도를 가르치신 일이 없다. 아무 제자에게라도 축도는 이렇게 해야한다고 가르치신 적이 없다. 사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가르치신 기도, 도고, 감사등의 기록은 있으나 축도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말씀이 축도의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8)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그러나 이러한 말씀은 목회자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주신 말씀이다. 이것은 악인에 대한 선한 대응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3) 축도는 목회자나 성직자의 특권인가?
축도자의 자격에 관한 내용이다. 목사는 교회가 세웠으므로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제사장이나 사도와 같지 않다. 그의 위치는 일반 교우들과 마찬가지로(벧전 4:10~11) 그의 자격은 안내자이지 결코 지배자가 아니다. 다만 목사는 교회의 지체들 중 하나로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사역과 치리 사역을 받들어 교회를 섬기는 자이다.(고후 4:5)
장로교에서는 목사만 축도를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렇다고 목사라는 직위 그것에서만 그런 기도 행위가 정당화된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그런 사상은 사제주의와 같다. 목사의 직위는 그의 겸손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나는 높기 때문에 축도를 한다"고 생각하는 목사는 사실상 축복할 자격이 없다. 교회의 세움을 받아 교회를 봉사하는 사역자는 약할 그 때에 강해지고(고후 12;10), 겸손할 때에 존귀해지고,(잠 15:33), 충성할 때에 하나님께 쓰임이 되는 것이다.(잠 25:13, 고전 4:1~2)
(4) 목회자가 축복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가?
축복은 그 예식적인 언어와 행위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중요한 것이다.(말 2:2) 목회자가 축복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축복하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바로 되지않으면 오히려 축복은 저주로 바뀐다.
(5) 축도는 예배의 마지막 순서이어야 하는가?
예배는 끝마치는 개념이 없다. 예배는 계속적인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후에 만찬으로서 그 모임을 마무리하고 서로 교제하였다.(행 20:7~11, 고전 11장) 저들의 모임은 말씀을 강론하고 떡을 떼며 교제하고 헤어졌던 것이다. 예배는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삶 속에 계속되는 것이다. 축도는 예배를 폐회하는 선언이 될 수 없다. 베스터만의 말을 인용하면 "축복은 예배 안에서 일어난 일과 예배 밖에서 일어난 일을 연결짓는 다리이다"라고 하였다. 오늘 날 축복의 목회적 기능 가운데 중요한 것은 바로 신앙을 생활화하는 것이다. 축복은 신앙과 생활을 연결짓는 고리이다.
Ⅲ. 나가는 말
하나님께서는 엿새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 인간을 향하여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다스리라"(창 1:28)고 복을 선포하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외 맺으신 행위언약이 깨어진 후 에덴동산엣 쫓겨났고, 땅이 저주를 받고,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축복의 기도문을 직접 주셨고, 대제사장으로 취임한 아론의 첫 행사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러한 축복을 선포하였다. 아론의 축도 내용을 통해 복의 근원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단회적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복을 주시고, 얼굴을 비추시고, 백성들을 향하여 얼굴을 드실 것임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이 복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 믿음이 없이는 받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래되어 그 이후 모든 제사와 오늘날 예배라는 틀 속에 빠져서는 안 될 요소로 되어있다. 이처럼 제의적(祭儀的) 요소로 축도가 매번 반복되다 보니 축도 속에 담겨있는 뜻을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형식적으로만 반복하는 것에 그칠 위험이 없지않으므로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에게 축복의 정의를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
한편, 장로교에서 축도권이 목사에게만 주어져 있지만, 목사가 결코 이를 특권의식이나 권위의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자가 되어야 하며,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심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주께서 너에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켜주시며
주께서 너를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너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께서 너를 고이 보시어서
너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민수기 6: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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