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예배관
1. 예배의 성경적인 원리와 신학적인 근거
기독교 예배의 성경적 근거와 원리는 앞서 살핀 요한복음 4:21~24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경배의 대상은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시며, 그 하나님께 경배하려면 그 방식은 성령과 진리로(안에서) 경배하는 은혜의 행위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짐승을 제물로 삼아 제사하던 행위는 신약에 와서 이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제물이 되시며, 대제사장이 되시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러한 방식의 경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새로운 시대에 언약 백성의 예배로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는 것이다. 이것이 초대교회 이후에 기독교가 행하는 예배의 원리와 방식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인 포인트는 역시 삼위일체의 신학이다. 즉 경배의 대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구원의 계시와의 관계에서 예배가 성립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1) 기독교의 예배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
기독교의 예배는 처음부터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설정되었으며, 그것은 곧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 이해를 전제로 한 예배의 구조를 만들게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의 역사에서 쉽게 확인되는 것으로, 기독교의 예배는 실제로 삼위적인 구조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예배가 되었다. 특별히 기독교 신앙의 대상이요,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의 교리는 후에 니케아 종교회의(AD 325)와 콘스탄티노플(AD 381) 종교회의를 통하여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확증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예배의 삼위적인 구조는 성경적으로는 사도들의 복음증거 가운데서 이미 상세히 설명되고 제시되었던 것으로 판단한다.
(1)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존된 예배 구도
바울서신 가운데서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신학적 근거를 밝혀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에베소서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공동체가 하나님을 향하여 어떻게 경배하며 섬기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할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8절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에게로 나아가게 함을 얻게 된다는 예전적인 표현을 발견한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장 12절에서도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하였고, 같은 장 20~21절에서는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엡 3:20-21)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을 높이고 그에게 경배하는 예배, 곧 찬양의 한 대목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찬양의 마지막 목표는 하나님, 곧 아버지이다. (엡 3:15) 그리고 우리 안에 작용하시는 능력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은 또한 성령으로 설명되고 있으며(엡 3:16),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교회 본래의 장(場)은 하나님 찬양을 위한 능력을 보이는 예배에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엡 3:11 이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경배하러 나아가는 일에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가 되신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사실을 유대교의 성전 제사와 관련하여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 하겠느뇨”(히 9:14).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4절 이하에서도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씀에 근거할 때, 예배구조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예배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는 길에 중보적인 역할자임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성령은 그 일의 보증자이시며, 그 일을 가능하도록 도우시는 분임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지하여 이제 찬양과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배의 정황은 하나님이 먼저 인류에게 그의 아들의 보내심과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가까이 접근하신 그 움직임의 상대적인 반응 관계에서 확인되는 일이다. 그리고 예배의 중심은 에베소 교회에서 삼위의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접근을 전제로 하여, 그러한 접근을 앞서 불러일으키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모습을 유대교적인 축복기도의 형태를 취하여 예전적인 모습으로 표현해 준 것이다.
이러한 삼위적인 관계의 예배 형태는 역시 로마서에서도 확인된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 아들의 영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밝혀주고 있다. (롬 8:3, 9, 14-17) 또한, 갈라디아서에서도 같은 맥락의 내용이 확인된다. (갈 4:4-6) 그리고 이러한 내용에서 우리는 기독교 예배가 어디에 근거하고 있으며, 어떤 모습의 형태로 이루어지게 해야 할 것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엡 1:3-5, 13)
이처럼 사도들의 증거에 따르면 기독교의 예배는 처음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해에 기초하여 행해진 예배라고 할 것이다. 즉, 하나님은 경배의 대상이시며, 찬양받으시는 예배의 주인이시다. 그리스도는 인간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와 찬양을 드리게 하는 중보자가 되시며, 또한 대제사장이 되신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과 아들에게서 나온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예배에 함께하시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시는 분이시며, 보혜사 성령으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하신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깨닫도록 도우시는 분이신 것이다. 그리고 예배를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삼위적인 구도와 역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기독교의 예배이다. 이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성령)과 진정(진리)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고 하셨던 예수 말씀의 실현이라고 할 것이다. 경배의 대상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예배자들은 그 하나님께 구속의 주되신 그리스도와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의지하여 나아가게 되는 예배 원리를 보여준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2)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거룩하심에 의존된 예배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인 인식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존된 것이다. 특히 그의 역할과 인격, 그리고 신분에 의존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초대교회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예배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에 따라 기독교 예배는 바로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장(場)이며, 그것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초대교회 설교의 중심적인 내용이 되었으며,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은혜를 알리고 전하는 그것이 설교의 중심적인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은 침례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즉,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가 베풀어졌고(행 2:38, 8:16, 10:48, 19:5),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롬 6:3, 갈 3:27) 침례가 행해졌다.
예수의 약속대로 믿는 자들이 예배에 참여할 때,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모였으며, 예수는 그들 가운데 함께 있었으며, 또한 지금도 예배하는 모임 가운데 함께하시는 것이다. (마 18:20)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적인 이해는 성찬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표현되었다. 성찬에서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언약의 피의 표시로서 상징적 관계로 전제되었고, 주님의 만찬으로 불리면서 거행되었다. 이러한 만찬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하나의 선포적인 행위였다. (고전 11:17-26) 이러한 이해는 역시 기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결정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만 기도를 가르치는 선생이었을 뿐만 아니라(마 6:5-13, 눅 11:1-13),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본보기였으며(엡 5:2), 동시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 기도의 중보자이다. (딤전 2:1-5, 롬 1:18, 16:27, 고후 1:20, 히 7:25, 13:15, 벧전 2:5) 요한의 증거에 따르면 예수는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직접 말씀하기도 하였다. (요 14:13).
초대 교회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벌써 예배 가운데서 예전적인 경배의 대상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예수를 주님으로 높여 부르는 명칭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침례 시에도 주님으로 알려졌다. (롬 10:8-13, 고전 12:3)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예배에서 그를 주님으로 부르며 경배했다. (고전 16:22, 계 22:20) 또한, 개별적인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예수를 주님으로 기도했던 것이 확인된다. (행 7:59, 고후 12:8) 특별히 빌립보서 2장 9절 이하에서는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라고 찬양하였다. 그리고 도마는 부활한 주님을 만난 후에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는데, 그것은(요 20:28) 그의 경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신적 신분의 인정은 구원에 의한 그의 역할을 통하여 또한 불리게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역시 경배와 관련하여 찬양되는 것들이라 할 것이다. 예수는 특별히 창조 사역에 하나님과 함께 한 분으로 찬양된다. (요 1:1, 고전 8:6, 골 1:15-20, 히 1:2) 이러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적인 존재였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들이다. 물론, 이러한 그리스도의 역할과 신분은 역시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주님으로 표현된 것이며, 예수라는 이름으로 경배와 기도 응답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먼저 거룩한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신적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성령의 인격성에 관한 질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며(눅 1:35), 침례 시에도 성령은 그에게 비둘기같이 임하셨으며(요 1:32), 또한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에 성령은 부어 주신 바가 된(행 2:33) 일들과 관련하여 어떻게 성령은 인격적인 모습인지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은 요한복음에서 확인되는데, 예수를 대신하여 역할을 하게 되는 ‘보혜사 성령’, 또는 ‘위로자’(요 14:16)가 오심을 밝혀 준 말씀과 특히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밝혀준 말씀들에서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며, 사람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역할자이다. (요 16:4-13) 그리고 성령의 인격성에 대한 대답은 초대교회를 거쳐 2~3세기로 오면서 성령은 아들과 아버지와 함께 있으며, 성령은 주님으로서 아버지에게서 나아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되었으며 영화롭게 되었다고 고백함으로 언제나 아들과의 관계에서 거룩한 신적인 존재로 칭해졌으며, 이러한 관계는 콘스탄티노플의 종교회의를 통하여 교리적으로 결정되었다.
(3) 삼위일체 예전의 실제적인 모습
삼위일체 중심의 예전은 먼저 침례와 관련하여 나타나게 되었다. 의식의 실제와 신학적인 원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들의 공동체에 인간의 구원을 유지하는 하나님이 실제로 삼위일체 되신 분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구원의 증표인 침례의 신비 가운데서 알려지고 불린 이름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침례의 예전 의식(儀式)에 반영되었다. 신학적으로 볼 때 다만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구원하시며, 거룩하신 분으로 계신 것이다. 그리고 언약 백성의 공동체 안에 화목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이 또한 하나님의 신적인 본성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독자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삼위 관계의 역할을 통하여 표현되었다.
초기 기독교 예배 실제는 이러한 삼위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인 생각과 교리적인 정의에 의하여 삼위일체의 예전으로 지탱해 갔던 것이다. 이것은 계속해서 섬겼던 교회의 예전을 위한 신앙의 규범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 예배의 삼위적인 구조는 항상 반복해서 시행하는 교회의 세 가지 예전의 형태인 설교, 세례, 성만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설교 행위에서이다. 설교는 내용뿐만 아니라 사건으로서도 역시 삼위적인 역할과 관계가 있다. 초대교회 이래로 복음 선포는 아버지의 구원계획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역사를 이야기하며, 도래하는 심판과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전망하면서 성령의 새롭게 하는 선물을 제시한다. 역시 복음 전파와 그 전파에 대한 인간의 응답도 동일하게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살전 1:5, 고전 12:3) 그리고 복음이 선포되고 영광을 향한 믿는 자들의 신앙적인 희망과 삶은 전적으로 그들 안에 거주하시는 그리스도에 달렸으며,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자요, 부활하신 자이다. (고전 1:18-2:16, 15:1-56, 비교, 갈 2:20, 골 1:27) 이 소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데로 인간을 인도하게 된다. (롬 10:8-17)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으로 설교 되고 믿는 자들이 그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처럼 성령의 은혜도 더 많은 사람에게 확대된다. 그리고 그 성령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감사가 예전을 통하여 충만해진다. (고후 4:5)
둘째, 침례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의 침례는 사도시대 이래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졌다. (마 28:19) 그것은 역시 침례의 주인이신 세 인격 각각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침례 후보자들에게 “내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너에게 침례를 주노라.”는 말로 시행되었다. 침례는 아버지의 가족으로 양자 됨의 표시이며(갈 4:4 이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잠기게 됨의 표시이다. (롬 6:1-11, 골 2:11) 그리고 그의 몸에 지체됨의 표시이다. (고전 12:13) 또한, 그의 의로 새 옷을 갈아입은 것이며(고전 6:11, 골 3:9), 성령을 통한 중생과 새롭게 됨과 기름 부음과 봉인의 표시이다. (요 3:5, 딛 3:5, 고후 1:22, 엡 4:30)
셋째, 성만찬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의 성만찬은 역시 예전 가운데서 찬미의 제사로 이해된다. 이것은 복음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으로써 사도의 제사장적인 섬김을 통하여 생겨나는 이방인의 제물을 말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며, 성령을 통하여 거룩하게 하셨다(롬 15:16). 결과적으로 복음 전파의 결과는 감사를 찬양하는 찬양대의 확대인 셈이다. (고후 4:13) 그리고 찬미의 제물(히 13:15)은 전통적으로는 말라기 1:11에 예언된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란 말씀의 성취로 보였다. 그리고 백성들에 의하여 해 뜨는 때부터 해 지는 시간까지 봉헌된 순수한 제물로 이해된다. 이러한 주님이 행하신 구원의 은혜는 이제 주의 만찬 가운데서 성례의 표현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성례의 축제 가운데는 아버지에 대한 거대한 감사의 기도가 나타나며, 창조와 구원을 이루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과 변화의 신적인 창시자이신 성령을 부르는 관계로 전개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찬에서의 기도는 삼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떡과 잔과 축하하는 공동체에 대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믿는 자들은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축제 잔치의 선취적인 행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원기를 거기서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2)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구원계시에 근거
여기서 우리는 ‘뮈스테리온’(μυστηριον)이란 말을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은 우리말에서 신비(神秘)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 말은 라틴어에서 ‘사크라멘툼’(Sacra- mentum)으로 번역되었고, 이교도가 신 앞에서 맹세하는 종교적인 서약 의식을 가리키는 말로 알려져 있다. 그 말이 희랍의 교부들이 기독교의 예전을 표시하는 언어로 탈바꿈된다. 우리말에서는 다시 성례(聖禮)로 번역되어 기독교의 거룩한 예식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침례와 성찬)
그런데 ‘뮈스테리온’이란 말은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결부되어 사용되었던 말로 알려져 있다. 즉, ‘뮈스테리온’이란 세상을 위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을 말하거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시고, 수행하시며, 하나님의 궁극적인 나라를 지향하며, 성령에 의하여 완성된 구원의 계획을 말할 때, 표현되었다. (막 4:11, 롬 11:25, 16:25, 엡 1:9, 3:1-12, 6:19, 골 1:25, 2:2, 4:3, 딤전 3:16, 계 10:7)
이런 이해와 함께 그리스도는 스스로 신적인 비밀의 근원적인 구현(具顯)으로 이해되었다. (딤전 3:16) 이러한 구체화(具體化)가 그리스도에게서 합치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바로 거기에 포함하여 있는 것이다(에베소서). 하나님의 이러한 신비로 결합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곳곳에서 전파할 때 그것은 곧 이러한 하나님의 신비(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계획)를 섬기는 일이 되는 것이다. (고전 4:1) 그리고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점차 교회의 모든 행위를 신비(뮈스테리온)로 표현하게 된다. 즉, 신비는 성경이 증거 하는 것들인데, 의식과 교회의 축제행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거대한 신비를 세상에 알리고, 축하하는 일을 돕는 뜻에서 사용된 말이었다. 이처럼 교회의 예전은 하나님 구원 계획의 실현(實現)과 그 실현의 결과이며, 동시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道具)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해를 전제할 때, 기독교의 예배는 구원역사의 세 단계인 창조, 구원, 완성의 과정과 그 과정에 개입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된 사건으로 이해된다.
(1)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예배
고전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1643~1648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소요리문답서”(The shorter catechism of Westminster)의 첫 질문과 대답에서 우리는 기독교 예배의 본질이 신학적으로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먼저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과 즐거워하는 축하 잔치, 이것은 예배의 실제에 대한 언어적인 표현으로 이해된다. 이 두 가지 기본 요소(영광 돌림과 즐거워함)는 인류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서만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서로 결부되어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말이다.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분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 인간의 삶의 근원이라는 것을 성경은 증거 해 준다. (신 8:3, 마 4:4, 시 34:9, 119:103, 히 6:4, 벧전 2:2)
예수도 역시 그의 사역의 한 복판에서 제자들에게 나의 음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는 것이라(요 4:32)고 하였으며, 또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며, 아버지는 그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요 17:1-5)고 말씀하였다. 이러한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화롭게 되는 관계는 이제 기독교의 예배를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즉, 지금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주의 영광을 바라보거나 그 영광을 반영하는 예배자들과 예배 가운데 있는 모든 이가 영화롭게 되는 은혜를 예배를 통하여 경험하도록 하신다. (고후 3:18) 그 밖에도 예수의 제자 된 자들로부터 나누어진 삶(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더 큰 영화로움은 확대되고 있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일에 섬기는 자들로 존재하는 것이다(삶의 예배). 이러한 예배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을 살아 있게 만들며, 인간의 삶은 역시 하나님을 직시(直視)하는 관계 속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화로움에 참여하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 사이에 하나의 밀접한 연결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론(Imago Dei)에서 논의되었던 형상(Imago)과 유사성(Similitudo)의 관계에서 하나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이레니우스의 창세기 1장 26절 주석에 나타난 형상(Imago)과 유사성(Similitudo)의 구별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여기서 ‘형상’(Bild)이란 하나님과의 인간적인 결합에 있어서 존재론적이거나 구조적인 가능성을 표현한 말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유사성’(Gleichnis) 이란 말은 인간의 하나님과의 실존적이거나 윤리적인 관계의 유사성으로 보았다. 즉, 인류가 실제로 하나님과 결합하여 사는 동안 유사성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그러한 구별과 인간적인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섭리의 실현에서 하나의 시간(역사)과 과정(계획)이 있음을 생각하게 해 준다.
이러한 이레니우스(Ireneus)의 이해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의 세 가지 연결점에 대하여 중요한 의미를 제시한다고 본다. 첫째는 하나님과 나누는 의사소통의 자질이며, 둘째, 창조 사역의 보존과 관리에 대한 책임성이며, 셋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을 반영하고 나누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질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예전에서 의식적인 표현을 찾는 관계로 나타나며, 또한 기독교 예배의 조직적인 이해를 위하여 의미를 제시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첫째, 인간 안에 내재해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적이며 신적인 말씀(Logos)으로 지어진 역사를 통하여 부여된 이성과 언어로 해석되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언어는 근원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이다. 그러므로 신적인 은혜에 근거하여 인간의 말들은 예전 가운데서 표현되며,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 서로의 뜻을 교환하는 왕래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성경적인 이해로는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신적인 말씀은 육신이 되신 것이다. (요 1:14) 그리고 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히 1:1) 그러므로 교회의 예배에서 항상 반복하는 성경낭독은 모인 회중을 위하여 하나님 계시의 낱말들과 문법과 문장들을 보존하게 하는 방편이 된다. 그리고 현재 상황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설교자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에 감동 받으면서 찬동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역시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 즉 남녀와 어린아이의 말을 들어주시는 인생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소개해 준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기도이며, 신약성경에서 이러한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롬 1:8, 고후 1:20) 그리고 이제는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한다. (마 18:19, 요 16:23) 이것은 특히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서 확인되는 것인데, 우리가 아버지를 향한 주님의 기도에 참여와 그의 의지의 성취와 그의 나라의 임하심을 통하여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며, 그의 자녀를 돌보고, 보호하며, 구원하는 것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마 6:9-13) 성경에 전승된, 그리고 주님에게서 가르쳐진 기도의 모범에 신실하게 머물 뿐 아니라 동시대인의 믿음과 고난을 감지하는 능력을 가진 예전의 도움으로 인간들의 소리(기도)는 현재 상황에서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전은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를 구체적으로 인지하도록 표현하게 된다. 물론, 그 대화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기쁨으로서 인류의 존재 목적에 속한 것이라 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형상은 현세적인 창조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봉사와 왕적인 성직에 대한 부름으로 해석되었다. 창세기 1장 28절의 “땅을 정복하라”라는 명령은 땅을 빼앗고 약탈하라는 강탈의 특허권이 아니라, 그것을 가꾸고 경작하며 보존하도록 분부하신 하나님의 명령이요, 인간에게 부여한 책임으로서 문화적인 사명으로 이해한다. 창세기 2장 19절 이하에 아담에게 다른 피조물의 이름을 짓도록 한 것은 그것을 마음대로 남용하라고 한 허락이 아니며, 그것들에 의미와 소리를 부여하도록 한 특권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것들이 인간에게서는 감사의 말로 수용되었다면(딤전 4:3), 그것은 또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의사소통의 수단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그것들은 선물로서 신적인 축복을 가져다주며, 인간은 감사로서 대답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가 창조 세계의 한가운데서 이러한 다스림의 왕적인 성직을 수행하게 된 것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폭풍을 잠잠케 한 일과, 많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일과, 악마를 몰아내고 병자를 치유하신 일 등에서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직 수행의 성례전적인 표시는 이제 물과 기름, 떡과 잔을 가진 교회의 예전 의식(Riten)에서 계속 진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규칙적인 리듬과 하나님의 역사적인 의도를 위한 봉사행위는 기도하는 행사와 교회의 축제일을 통하여 연중의 순환 관계로 축하 되고 있는 것이다. (교회력 사용의 가치)
셋째, 하나님의 형상은 그들의 의사소통의 참여가 신적인 삼위성을 가진 공동체에 상응하는 사람들의 사회적인 창의성으로 해석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은 근본적으로는 사랑하는 능력(자질)인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다. (롬 12:10, 살전 4:9, 벧전 3:8) 특히, 하나님의 형상은 형제와 자매일 수 있는 이웃(눅 10:25-37)과 적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해야 하는 능력으로 지향되었다. (마 5:43-48) 그것은 실제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시험일 수 있다. (요일 3:10, 14-18, 4:20 이하) 또한, 그러한 사랑은 사람들이 예수를 대적했을 때, 그 원수들을 사랑했던 하나님에 대한 걸맞은 대답으로 이해된다. (롬 5:8 이하, 요일 4:7-12)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가 그들과 함께한 식탁에서 교제하는 은혜의 선물로 묘사되었다. (마 9:10-13, 11:19, 눅 15:1 이하, 19:1-10) 그리고 그것은 이제 주님의 만찬 제정에까지 확대되었다. (마 26:26-29) 기독교의 형제를 사랑하는 몸짓은 역사적으로 초대교회의 예전에서 평화의 입맞춤의 의식으로 발전하였다고 전한다. (롬 16:16, 고전 16:20, 고후 13:12, 살전 5:26, 벧전 5:14) 그리고 성도들과의 교제는 내적인 삼위의 신적인 공동체성을 반영하는 모습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인간 창조와 관련된 하나님의 이러한 뜻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제 정지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인류의 화해를 위한 신적인 중재가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는 신적인 구원계획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의 구원과 인간의 새롭게 함이 하나님에게 요구되었다. 사도 바울의 증거에 따르면 인간의 타락은 예전적인 표현들 가운데서 이해할 수가 있게 된다. 즉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대신에 인간들은 하나님의 참된 것을 거짓으로 바꾸고 피조물을 경배하며, 창조주 대신에 그 피조물을 섬기게 되었던 것으로 지적된다. (롬 1:18-25) 하나님을 섬김이 우상을 섬김으로 더 악하게 되었고, 예배는 우상숭배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칼빈은 타락 이후의 인간 정신이 모든 시대에 우상들의 사역 장이 되었다고 탄식하여 말했다. 루터도 그의 대 요리문답서에 첫 계명을 해석하면서 “너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느냐? 너의 마음을 두고 의지하는 그것이 사실은 너의 신이다”라고 경고하였다.
기독교 신앙으로 오게 되는 것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뜻하며 살아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미래의 진로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즉 하늘의 아들을 기다리는 것을 뜻한다. (살전 1:9 이하) 또한, 요한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 17:3)라고 증거 하였다. 현상학적으로 말해서 세상에는 많은 신과 많은 주인이 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신은 한 분 하나님, 아버지, 한 분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고전 8:5 이하)
침례는 이러한 타락에서 그리스도에게로 되돌아오는 회개와 개종의 표시이다. 그 의식은 사탄에 대한 거절(동방 교회의 의식에서)과 그리스도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그들의 의식적인 표현을 찾는 행위이다. 그리고 아직도 사람의 모습을 죽을 때까지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역시 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죄에 대한 고백은 이 세상 가운데서 행하는 우리의 기독교 예전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깨끗하게 되도록 예전의 시작에서 행할 수 있거나(Didache 14:1), 또는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인간은 의인임과 동시에 죄인임이 고백 될 수 있다.
(2)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와 예배
20세기에 예전 학자들은 대부분 기독교 예배의 초기 이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이 유대교의 유월절의 신비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확인하고 있다. 그 증거로 초대교회는 부활절에 그리스도의 유월절 행사를 기억하고 매년 축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기억함이며, 감사와 축하하는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이것은 역시 침례 후보자들이 회개하는 동안에 앞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 됨에 대한 직접적인 준비를 경험한 후에 침례를 베푸는 중심적인 기간이 되었다. 그리고 부활절이 지난 다음 50일 기간은 침례를 받은 모든 자에게는 금식이 금지되었다. 왜냐하면, 오순절은 부활이 가져다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새로운 생명의 축제와 함께 도처에서 기뻐해야 하는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새로운 침례 신학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의 참여를 강조한다. 그리고 주일과 부활절은 기독교 예전의 월력을 형성하게 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특별히 동방 교회에서 주일은 작은 부활의 날이며, 부활절은 큰 주일로 부르는 일에서도 확인된다. 이것은 역사와 시간에 대한 교회의 이해를 형성하게 한 주된 내용이다. 그것들은 기독교의 예배가 얼마나 기독론의 관계되었던지를 확실하게 하며, 동시에 삼위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의미를 잘 드러내게 한다. 성탄절은 이 세상의 권세 자들을 십자가에 매달게 하는 영광의 주님의 현현(懸懸)하신 날로, 그리고 동시에 죽음에서 그의 부활로 확인된 하나님 아들의 탄생으로 보았다. (마 2:1-23, 고전 2:8) 오순절은 복음의 전파를 통하여 땅의 모습을 새롭게 하려고 아버지가 아들의 간구에 따라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신 부활에 대한 보증(확증)이시다. 이러한 이해와 함께 기독교의 예배는 인간의 구원과 모든 만물의 완성 사이에 새롭게 함의 시대에서 교회의 장을 특징짓게 한다. 예전은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기억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임재에 대한 요청의 기도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역사를 기억함이며(고전 11:24 이하), 또한 새롭게 함의 신적인 창시자이신 성령의 부르심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딛 3:5 이하)
여기서 기독론과 성령론은 서로 조건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취하고 전파하게 하기 때문이다. (요 14:26, 16:14 이하) 그리고 예전은 역시 그 예전이 아버지의 나라를 선취하는 한 미리 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역사 안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그것을 축하하며, 축하하는 것을 전하며, 전하는 그것을 계속하여 보여주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고후 5:17)에 화목의 말씀의 전달자로서, 그리고 세상과 화목 하는 일에 하나님의 동역자로서(고후 5:18-6:2), 하나님의 피조물들의 첫 번째가 되는 것이다. (약 1:18)
(3) 창조 세계의 완성과 예배
기독교의 예배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된 재림과 연관된 행위이다. 그의 재림을 기대하고 바라보면서 역사 속에서 행하는 교회의 경배이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마라나타’(Maranatha)란 부름의 기도 소리를 전제하였던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고전 16:22) 언어적으로 볼 때 이러한 표현은 그가 여기에 있는 것처럼, 주님이 이미 역사 속에 오셨던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서(성육신), 그리고 그 주님이 지금 오신다는 전갈로써(현재의 예전에서), 또는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의 열망 된 강림의 요청으로서 이해되는 기도였다. 요한계시록 22장 20절의 말씀을 미루어 볼 때, 후자의 것이 가장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어떠한 경우도 성찬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한 죽음을 전파하는 것이며, 떡을 뗌에서 부활하신 자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며,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시행되는 복음의 선포적인 행위로 이해되는 것이다. (고전 11:23-26, 눅 24:35)
기독교의 예배는 이처럼 분명한 종말론적인 전망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즉, 그것은 미래의 근거와 선취로서 현재에서처럼 과거에 이미 받아들여진 종말론적인 전망과 기대를 담고 있다. 그리고 예배는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하여 표현되는 것인데, 세상에 불신자들이 존재하며,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자들이 존재하는 한 아직도 복음의 설교는 필요한 것이다. (마 24:14)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새로운 신앙적인 삶의 시작을 표시하기 위하여 역시 침례도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반복적인 회개와 죄 용서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믿는 자는 다시 은혜에서 떨어지거나 아직도 완전히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까지 호소의 간구와 도고가 필요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란 주님의 기도를 항상 기도해야만 한다.
교회의 예전은 역시 요한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 적어도 두 가지 요소를 벌써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것들은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진행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첫째는, 천상에서의 예전이 찬양의 노래들을 통하여 특징지어졌다는 것이다. (계 4:8-11, 5:8-14, 7:9-12, 11:16, 15:3, 19:6-8) 교회가 역사 속에서 거룩, 거룩, 거룩을 노래한다면, 그것들은 벌써 천사들과 하늘의 전 무리와 함께 그들의 소리를 결합하는 것이다. 찬송가 안에서 하나님은 이중적으로 찬양되는데, 한번은 말씀을 통한 것이며, 다른 한 번은 음악으로 찬양된 것이다.
둘째는, 교회의 역사적인 예전은 주의 만찬을 항상 어린양의 혼인 잔치의 식사에서 미리 맛본 사건으로 보았다. (계 19:9) 변화된 떡과 포도주로 여기는, 지금 여기에서의 성찬식은 새 하늘과 새 땅 아래에서 삼위의 하나님과 결합의 담보와 약속으로서 보였다.
우리는 기독교의 예배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과 완성을 향한 준비와 선취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앞서 시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구원받았으며, 새롭게 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분명해진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한복판에서 삼위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며, 그 하나님으로 더불어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인간들은 완전한 하나님의 일 가운데서 그들의 왕적인 자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예배의 실제화
여기서 예배의 구성원리와 요소에 대하여 논의해 보려고 한다. 물론, 예배 구성은 예배란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 이해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구성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진다. 그러나 예배의 실제 모습에 대한 이해는 대체로 기독교의 예배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 행위라는 이해에서 예배 실제를 구상하게 된다. 즉, 예배의 실제 모습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 공적인 만남이요, 교제의 시간이며, 서로 대화하며, 서로의 뜻을 교환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으로 이해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과 교제와 대화와 의사소통의 성격에 걸맞게, 예배는 기본요소를 중심으로 예배의 형식을 가지며, 예배는 표현되는 것이다. 특별히 예배를 실제로 구성하고 성립시키기 위하여 요구되는 중요한 세 가지 전제조건은 첫째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것이며, 둘째 인간의 참여이며, 셋째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역사적인 것들을 현재화하는 일이다. 이 세 가지는 예배를 구성하기 위한 전제 조건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역사적인 것들을 현재화하는 구체적인 내용이 말씀과 성례(침례와 성찬)이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는 도구가 바로 기도이다. 역시 기도는 감사와 찬양과 간구를 포함한다. 여기 찬양은 은혜의 감사 표현에 속한 것이며, 기도에 속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뜻에서 찬송부르기는 표현의 도구로서 그 필요성이 인정된다.
그리고 예배 구성에서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예배는 그 종합적인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예배하는 자의 편에서 찾는 존재론적이며, 실존적인 물음들의 대답을 항상 반복해서 표현하는 예배의 목표를 가져야 한다. 존재론적으로는 항상 인간이 던지는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물음에 대답이 예배 가운데서 제시되어야 한다. 그 질문의 대답은 역시 창조주 하나님, 구원의 주로서 그리스도로 오신 하나님, 언제나 함께하시어 위로와 격려와 용기와 희망을 일깨우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실존적으로는 인간들이 믿고 의지해야 할 대상임을 일깨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믿음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현세에서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이 감당해야 할 하나님이 요구하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일깨우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한 것으로 실존적으로는 삶의 보람과 긍지와 자부심을 발견하게 하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 그리고 실존적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서 경험되는 것이 낙심과 절망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에게서 미래적으로 약속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그에게서 인내하며 기다려야 할 것인가? 즉, 인생의 삶에 유일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들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내용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세 가지 요소에 대한 것으로 믿음, 사랑, 소망에 관한 것이다. (살전 1:3-4, 고전 13:13) 이러한 세 가지 내용은 예배의 실제적인 목표설정에서 견지해야 할 예배의 방향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목표에 걸맞게 예배는 구체화하고 실제화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1) 기본적인 예배의 구성요소
종교개혁의 역사는 오랜 논쟁을 통하여 두 가지 은혜의 수단인 ‘성경 말씀’과 ‘성례’를 기독교 예배를 구성하는 기본요소로 삼았다.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만남을 경험하도록 사용한 도구는 성경 말씀과 성례 두 가지였다. 이것은 벌써 초대교회와 로마 초기 교회로 오면서 이미 사용. 확정되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역시 영국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전통은 종교개혁자들이 대체로 합의하였던 두 가지 은혜의 수단인 성경 말씀과 성례에다 새로운 요소로서 ‘기도’를 포함시켰다. 물론, 종교개혁자들은 성례에서도 로마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7가지 형태 가운데서 두 가지인 침례와 성찬만이 성경적인 근거를 가진 성례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한국장로교회는 역사적인 전통에 따라 이러한 세 가지 은혜의 수단(말씀, 성례, 기도)을 목회 방법의 근본원리로 수용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예배는 은혜의 수단인 이 세 가지를 중심으로 예배를 구성하고 실제화하는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츠빙글리는 설교와 성찬의 관계를 엄격히 분리하여 적용하였고, 반복되는 주일예배의 중심적 행위로는 설교 하나에다 중점을 두게 되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성찬을 소홀히 하는 한국교회의 예배는 츠빙글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교회로 여겨진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해 놓은 세 가지 도구를 균형 있게 잘 활용하여 기독교 예배가 구성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2) 현대 예배 구성의 원리에 대한 새로운 시도
오늘날 현대 예배신학자들은 이러한 말씀의 설교와 성찬의 분리된 두 요소를 하나의 통합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가장 성경적인 예배의 요소와 구도로는 예수의 엠마오 도상에서의 성경 강론과 두 청년의 집에서 나눈 식탁에서 교제(눅 24:13-35)의 모습에서 찾는다. 그리고 달리는 ‘이사야의 부르심’(사 6:1-11)과 ‘베드로의 부르심(눅 5:1-11)에 대한 성경적 내용을 예배 구도의 원리로 삼기도 한다. 그것은 선교 지향적인 예배 구도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 관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과 교제를 끝내고, 부활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파송하는 의미를 생각한 것이다. 필자가 학문적으로 가장 의존하고 있는 개혁주의 예배신학자 랑게(E. Lange)의 제안에 따르면, 그는 기독교 예배를 ‘언약 갱신의 축제’라고 명명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과의 관계에서 예배를 이해하게 해 주고 있다. 그리고 예배의 구성은 ‘참회와 용서’(absolutio), ‘언약의 청취’(promissio), ‘세상으로의 파송’(missio)이란 세 단계의 구도로 형성되기를 제안하였다. 이러한 흐름을 따라 그 전. 후 관계에서 다른 부수적인 순서들을 연결하도록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랑게는 ‘증거’(설교)와 ‘고백’(성찬)이란 두 종류의 예배를 통합한 예전의 모습으로 제시하였고, ‘의식으로서의 주일 공 예배’(증거/설교)와 ‘일상의 삶으로서의 예배’의 연결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일예배는 삶의 예배를 성취하기 위한 영적 능력을 충전하는 예배로 이해되기도 한다. (롬 12:1)
3) 말씀 중심 예배에 대한 새로운 이해
원래 종교개혁의 입장을 따르는 교회들은 로마가톨릭교회와는 다르게 루터의 제안대로 설교를 중심에다 둔 예배를 실천하였다. 이러한 원칙은 전통적인 설교 중심의 예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는 원칙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생각은 역사적으로 츠빙글리와 칼빈에게서 더 분명해진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배가 구성되도록 하는 원칙을 전제하면서 ‘말씀 중심 예배’가 예배 신학의 원리로 등장하게 되었다. 오늘날 개혁주의 예배 신학에서는 ‘말씀 중심 예배’란 말을 예배 신학의 새로운 방향으로 전제된다. 그리고 말씀 중심 예배란 설교 하나의 행위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예배 전체가 말씀에 근거해야 하며, 또한 예배의 순서 각각이 말씀에 근거해야 함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설교 중심 예배가 예배의 모든 순서를 설교순서 하나에다 종속시켜 오직 설교를 절대화하는 데 반하여, 설교와 성례를 연결하며, 동시에 예배의 모든 순서가 각각 은혜의 독립된 수단과 표현으로써의 기능적 역할을 드러내게 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예배의 모든 요소와 순서가 성경 말씀에 통합되게 해 주는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폰알멘도 같은 맥락에서 말씀 중심 예배의 가치를 새롭게 강조하였다. 물론 그는 ‘말씀 중심 예배’라는 용어를 직접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예배행위 전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모든 예배의 순서는 하나님 말씀의 직접적인 표현이거나, 간접적인 표현에 속한 것이라고 규정하였고, 그러한 사실은 오늘 한국교회의 설교 중심의 주일 예배순서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예를 들면 직접적인 것은 묵도(성경 인용), 성시 교독, 주기도문, 성경낭독, 설교, 성례, 축도(고후 13:13) 등이며, 간접적인 것은 사도신경, 찬송, 기도 등이 이에 해당한다.
말씀 중심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배받으시는 하나님과 경배하는 자들과의 사이에서 대화와 의사소통의 관계이다. 예배의 실제는 양자가 언어적 표현을 통하여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충분히 표현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예배에서 각각의 순서 진행은 하나님과 회중 사이에 교환되어야 할 대화와 의사소통 수단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배의 두 국면인 하나님의 부르심(말씀과 설교, 축복)과 인간의 응답(기도, 찬송, 신앙고백, 헌금)은 서로의 마음과 뜻을 표현하는 역할을 예배 가운데서 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순서에서 사용되는 모든 언어적인 표현들은 적절한 의미가 담긴 것으로 잘 진술되어야 하며, 순서를 담당한 자들의 역할은 진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진지하고, 진솔한 마음을 담아낸 언어적 표현들에서 참여한 회중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임재)과 은혜의 기쁨을 더욱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예배 가운데서 회중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회개와 영혼의 치유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기쁨과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4) 한국교회 예배의 미래
생각해 보면 한국교회의 예배는 처음부터 선교사들에 의하여 만족할 만한 예배 형태를 전수받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 형태의 예배, 또는 성경을 가르치는 사경회와 부흥회 중심의 쉽게 시행할 수 있는 자유로운 예배 형태가 전수되었고, 한국교회에 정착되었음을 뜻한다. 그 때문에 한국교회의 예배는 기독교의 예전적인 형태를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부흥회 시에 행하는 회개하는 통성기도의 모습은 현재 주일예배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으며, 평일에 행하는 사경회, 부흥회 등의 설교 형태나, 성경 강해 중심의 예배형식이 그대로 주일예배의 모습이 되었다고 본다. 물론, 주일예배는 지난 70~80년대에 이르면서 평일의 집회와는 구별된 예전적인 형태를 갖추려고 노력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주일예배에서 목사의 성직 이해와 참회 순서와 축복의 순서가 강조되면서 상당한 예전적인 모습을 견지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주일예배는 설교 중심 예배에 한정되어 있으며, 설교 외의 다른 모든 순서는 전부 설교 하나에 종속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아직도 성만찬은 주일예배의 필수요소로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다만 한국교회예배의 특징으로 보이는 것은 역시 주일예배에서 평신도의 역할이 증대되고 있는 점이다. (대표기도, 성가대와 찬송 인도 등)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예배는 자기의 모습을 더 온전하게 하기 위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성숙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21세기, 한국교회 예배의 미래적인 방향은 어디로 향하여야 할 것인가? 그것은 지금까지의 비예전적인 예배를 말씀 중심의 예전적인 모습을 갖춘 예배로 전환하는 일일 것으로 판단한다. 그것은 설교와 성찬과 기도(찬송)의 요소를 균형 있게 적절한 조화를 이루게 하는 예배를 말한다. 필자의 시각에는 현재 한국교회의 새로운 예배 형성에 영향을 주고 있는 찬양과 경배, 또는 열린 예배로 불리는 예배 형태들은 과도한 음악적 요소와 문화적 도구들을 극대화하여 예배의 분위기를 바꾸어 주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지나치게 대중적이며, 소비자 중심의 심리와 감정에 맞추려는 태도는 예배의 세속성에 대한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예배에서의 도구 사용이 지나치게 음악적인 도구 사용에 치우쳐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 목회자가 과도한 음악적 도구의 사용과 문화적 도구의 도입을 통하여 새로운 예배형식이 이루어지도록 허용함으로써, 지금까지 시행되어 온 전통적인 예배 형태가 지나치게 설교 일변도의 예배에 한정되었으며, 더 이상 성도들에게 새로움을 줄 수 없음을 자인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예배는 왜 이러한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인 분별력과 통찰력이 목회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그리고 그러한 통찰에 따라 한국교회의 예배는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 예배는 언제나 시대마다 새롭게 변화를 시도해 왔지만, 역시 교회의 역사에서 선진들이 밝혀 놓은 기본적인 예배 요소(말씀, 성례, 기도)와 수단을 떠나서 다른 것을 이용할 수는 없다. 오늘의 한국교회 예배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예전적인 모습을 갖추지 못한 예배 때문이며, 본질적인 것을 외면한 채, 지극히 부수적인 다른 요소를 극대화하는 것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 본질적인 것은 침례와 성찬으로 표현되는 성례의 가치에 대한 것이며, 한국교회의 예배가 예전적인 모습을 갖추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성례의 사용을 예배에서 제외하는 문제이다. 그 때문에 현재 과도한 음악적 도구 적용의 예배 모습은 어떻게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예배의 모습으로 개선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말씀에 근거한 예배 모습의 개선은 성례의 올바른 사용이 포함되어야 하며,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성찬이 말씀과 함께 예배의 중심에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 다수의 목회자는 성찬의 가치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인식을 아직도 갖지 못하고 있으며, 성찬을 자주 하면 로마가톨릭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러한 오해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은 성례를 가리켜 하나님의 약속의 ‘가시적인 표’와 ‘은혜의 외적인 증거’라고 하였다. 성찬의 회수도 매 주일 말씀의 설교와 함께 있어야 할 내용으로 강조하였고, 희망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츠빙글리의 영향 아래 있었던 제네바교회의 시의회 위원들의 생각과 충돌하였고, 베른의 칙서에 근거하여 그는 적어도 월에 한 번씩 행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후퇴하였다가, 다시 일 년에 4차례 거행을 주장했던 츠빙글리 입장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성만찬을 매주 행하지 않는 기독교의 잘못된 예전에 관하여 비판적 입장을 제시하게 된다. 즉, 그는 “1년에 한 번 성만찬에 참여하도록 하는 관례는 분명히 악마의 농간이다. 주님의 만찬은 적어도 매주 한 번은 참여하도록 거행되어야 한다. 사탄은 사람들이 일 년에 한두 번 성만찬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들의 본을 따르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큰 결점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칼빈의 이러한 성찬에 대한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실천하는 장로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성찬의 가치를 표현한 말 가운데 필자에게 가장 도전을 준 말은 역시 폰알멘의 선언이다. 그는 성찬은 희생적 요소를 가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준 것처럼, 성찬의 참여자들은 하나님의 자기희생에 감사하여 자신을 헌신하게 된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한 번의 성찬은 백번의 헌신을 강조하는 설교보다도 더한 효력을 가진 것임을 생각하게 해 주고 있다. 현재 한국장로교회의 예배 모범에도 성찬은 “몇 회를 하던지, 당회가 은혜 나눔에 합당한 대로 판단하여 거행할 것이라”라고 명시해 놓았다. 그런데도 현재 1년 중에 한두 번 시행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오직 설교와 음악(노래) 중심의 방향으로만 질주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예배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중세로마가톨릭교회가 설교하는 일을 망각하고 성찬 중심만을 고집하던 그 반대의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기우와 염려를 금할 수가 없다. 만일 한국교회가 말씀 중심의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이 개혁신학의 토대에서 확립된 올바른 기독교의 예배일 것으로 판단하며, 그러한 예배가 실천된다면 한국교회의 예배는 한 단계 더 성숙한 온전한 기독교의 예배일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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