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신학] 예배와 제사
제사는 형식, 규칙과 절차를 따라서 해야 한다. 전문 기술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예배란 넓은 범주 안에 들어간다. 예배는 기술적인 측면보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진솔한 측면이 부각되는 것이다. 내면의 문제이다. 전반적으로 제사와 같지만 내용에서 차이가 난다.
하나님의 말씀과 응답의 차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한 것을 외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제사와 예배에 있다. 벧엘은 북이스라엘의 성소/세겜, 마므레, 모리아는 예루살렘, 브엘세바는 북쪽이다. 이 제단들이 여러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예배하고 싶은 곳에 장소가 있었다.
기존 가나안 땅(약속의 땅)에서는 기존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래서 기존 예배의 장소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족장들이 가나안 예배 장소를 이용했다는 것이 추측가능하다. 가나안 족속들이 예배를 드리는 장소를 허용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족장들은 가나안 신들을 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위험성이 있다. 가나안 신들이 제사드리는 곳에서 예배를 한다는 것은 “가나안 신들과 장소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혼합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예배장소의 문제도 있고, 이미지나 상징물에도 문제가 있다.
벧엘의 금송아지 : 여호와의 발등상이다 와 같이. 금송아지는 바알 신과 오버랩된다. 자신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지정된 장소에서 예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런건 있다. 찬송가와 원주민들의 신 찬양 노래와 동일한 것이 있기도 하다. 원주민 송을 차용하고, 그 기원은 인디언들에게 있는데 그것을 우리에게 가져온 것도 있다.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
인디안들이 고난가운데 불렀던 노래를 흑인들이 차용하고, 물론 여기서 믿음이 발휘하지만. 어쨌든 노래는 차용했다.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왔다. 이러한 전제아래 가나안 제단을 생각해본다면, 이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제단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이다.(차용된 상징들이 들어올 수 있다) 후대의 장소, 상징물과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 기원을 따져보면 우리 마음이 좀 불편하겠지; 이방 제단에서 사용했던 장소다.
*성막
-성막(Tabernacle) 회막(Tent of Meeting) => 성전(Temple) -Sanctuary (성소, 지성소)
1. 처음에 회막이 있었어 Tent of Meeting
2. 그리고 성막이 있어써 Tabernnacle
3. 그리고 성전이 되었지. Temple
4. 근데 2번과 3번 사이에 실로 성전이 있었다. 붙박이 개념으로.
*회막과 성막의 차이는?
성막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이다. 성막 안에서! 회막은 회막에서 성막으로 간다, 회막에서 성막으로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막에 대한 계시가 떨어질 무렵 모세가 진영 바깥에 있는 회막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계시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성막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 내려온 후에는 “주로 성막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모세같은 경우에 지성소까지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명칭이 필요하다. 회막과 성전이 공존하던 시기가 있다.
*(이동식)성막이 다시 (붙박이)성전으로
원래 언약궤가 있던 곳이 어디에요?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빼앗아서 성전을 세웠는데 고전에 언약궤가 어디있는가? 다윗이 언약궤를 빼앗았다. 그 전에 있던 곳이 바로 “실로”이다. 실로에서는 Temple 개념은 아니지만 빼앗기기 전에는 “성막”으로 볼 수 있지만 붙박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실로에는 정착된 개념으로서 성막이 있었다. 성전이라고 이름 붙이는 경우도 있다. “실로성전”(정확한 의미는 성막이겠지만)
실로에 있다가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그것이 쭈욱 돌아다니다가 다윗이 찾아서 예루살렘 성전안에 가져다 놓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24장까지 체결이 끝나고 25장부터 성막에 대해 지시를 내리신다. 금송아지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성막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금송아지 사건이 발생함으로 말미암아 일시중단된다. 34장에 이르러 모세가 중재를 해서 언약이 갱신되고 35장이 되면 다시 성막이야기가 등장한다. 40장에 가면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내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막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확보되는 순간이다.
“내가 머물 수 있도록 너희 안에 성전을 지어라(?)" 언약궤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출애굽기에서 광야에서 성막을 지으라고 하신다. 이것은 지속적인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중앙의 지성소에 성막을 안치해라. 제의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에 참가할 수 있다. 다만 물건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은 레위인이다. 제사장도 레위 후손이다. 아론의 후손들은 다 제사장이 되고 보조역할은 레위 자손들이 한다. 아론은 고핫자손이다. 고핫자손인 아론은 므라리, 게르솜이라는 사람들이 다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
학자들 : 이러한 차별성은 역사의 후반부일 것이다. 제사장들을 계급적으로 나누는 것은 역사의 전반부이기 보다는 후반부에 체계화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성막 봉사자들 사이에 차별성이 존재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임재는 특별한 장소와 연관되어 있지만 그의 능력은 장소에 초월한다. 가나안 신관과 비슷하다. 볼 바알. 갓 바알. 뭐 이런 것들; 장소의 바알의 의미인데, 바알은 장소에 묶여있다. 그래서 장소 뒤에 바알의 신개념이 있다. 이 사고가 이스라엘에게도 들어온다?. 사상들이 존재한다? 뭐 이러는데 “그건 아니다!” 하나님은 장소에 연관되지만 동시에 초월성이 있는 분이라고 이야기한다. 특별한 장소에 묶어두지마라. 열왕기상 8장에 솔로몬의 기도, 성전 헌당식을 하면서 “기도하는 형식 자체가(제사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혹 잘못할지라도 우리를 지켜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게 나온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초월성을 솔로몬 자신이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장소에 묶여 있지 않다.
예레미야도 성전 설교를 한다. 예레미야 7장에, “하나님은 묶여있지 않다.”라고 말했다. 초월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성막이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성막을 가지고 다닌다. 하나님이 옆에 있다고 위안을 받으려고 했다. 특정한 장소에 묶여있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은 거기에 익숙해져버렸다.” 그 이후, 시온에서 “히스기야 때에 산헤드립 침공을 했지만 시온을 정복하지 못했다.” 왕위계승 문제로 포위를 했지만 그냥 내버려두고 돌아갔다. 이것을 가지고 ‘아, 하나님이 이 시온에 임재해계시기 때문에 이방대적들이 우리를 공략하지 못했다.’하는 시온신학이 생겨난다. 오. 시온신학!!!
하나님이 임재한 장소에는 그 어떤 대적도 우리를 침해할 수 없다! (시온신학) 백성들이 이것이 공식처럼 자리잡아버렸다. 그래서 예레미야/하나냐와 같은 선지자가 같은 위치에서
“바벨론이 침략해오지만 우리는 넘어지지 않는다. 시온의 하나님이 임재해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레미야 사상이 아니라 그 일반 백성들의 생각이 그러했다. 특히 지도층에. 이런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이것을 깨버리는 사람이 누구냐면 바로 예레미야 이다. “성전이 여기 있다고 해서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누가 예레미야를 좋아해? 아무도 예레미야를 좋아하지 않지; 하나님을 성전의 붙박이로 붙잡아 놓으려는 어리석은 생각; 이 생각을 예레미야가 지적했다. 예레미야의 이야기처럼, 바벨로니아가 침공을 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려버렸다.
가나안 약속의 땅에 들어오고 언약궤 소재의 장소는 길갈, 세겜, 벧엘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 “성소가 있던 곳은 실로”였다. 회막으로 존재하다가 여호수아에 의해 성전으로 볼 수 없지만 그런 성전구조물이 존재하는 것이 실로에 존재했다. 하나님에 광야, 보호, 인도하심을 위해 “절기 초막절”을 지켰다. 그래서 이 곳에 모였다. 하나님을 기념하게 되었다.(실로 이야기하는 듯) 열 두 지파의 통일성, 단합을 추구하는 장소가 바로 실로였다. 그러나 이 실로는 블레셋에 의해 침공되고, 언약궤를 탈취당한다. 비극!!
*신명기로 넘어가자.
신명기는 한 성소에 대하여 강조한다. 신명기는 사상자체가 한 하나님에 대한 한 성소에서의 예배를 줄곧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명령을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단일성소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고 여러 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기에 “단일성소”를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단일성소의 명령의 이유는 여러 성소가 근거가 될 수 있다.
가나안의 성소들은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방해한다. 가나안의 성소들!! 니네!! 방해하지마!! 단일성소 고고!! -~~~시대에 와서 “줄곧 단일성소에 대한 명령을 부분적으로 강조”하다가 요시아 시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강조했다. 산지에 위치하고 있었던 산당이나 지방성소, 하나님과 우상을 섬기는 관행들이 많이 있었다. 기브온도 무슨 산당에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다. 나중에는 불법화가 되고, 솔로몬도 그랬는데 요시야에 와서 그것도 다 불법임이 밝혀진다. 가나안 우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산당은 다 불법이야!
그러나 아직 이 때는 구분 없이 예배를 드릴 때가 있었다. 히스기야의 개혁과 요시야의 개혁으로 인해 예루살렘 중심의 예배 중앙화가 등장한다.(왕하 18:4, 22; 23:8, 13) 요시야는 7c 히스기야는 8c ? 아마도?
그래서 어쨌든 북이스라엘이 망하면서 내려온 피난민들 가운데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토대로 이 작업을 했다. 요시야보다는 상대적으로 히스기야 개혁은 좀 미미했지만 개혁자를 뽑으라면 히스기야와 요시야를 뽑을 수 있다. 단일성소에 그 사상이 신명기 역사서 전체에 배열되어 있다. 처음부터 단일성소는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단일성소와 지방성소들 가운데 힘겨루기가 있었다. 노력하는 남은 자들이 있었다. 개혁작업은 남은 자들의 노력이었다.
*예루살렘 성전
성전에서 하나님이 임재했을 때에 영광의 구름이 가득찼다. 솔로몬이 성전봉헌식을 했을 때
이스라엘 땅에 죄가 넘쳤을 때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모습을 에스겔서에서 볼 수 있다. 에스겔이 예언자로 부름 593년인데. 유다가 거의 망할 상태였다. 597년에 이미 1차로 포로로 끌려간다. 여호야김을 비롯하여 에스겔도 포함했다. 바벨론에 가있었던 에스겔, 자기 나라 유다에 대해서 예언을 한 것이다. 바벨론 포로로 가서 부름을 받은 것이다. 포로민들을 대상으로 예언을 한다. 593년에 부름을 받았는데, 예루살렘이 587-6년에 망한다.
6년정도 후에 망하는 것이다. “니들이 죄를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날 수 있따!”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에스겔서 11장에 떠난다. 죄가 가득한 이스라엘 땅을 하나님께서 떠나신다.
그러다가 나중에 망하고 난 다음에 에스겔 40장~48장이 “나라 회복과 성전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37장에 마른 뼈 이야기. 이 때가 회복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다. 뼈에 살이 붙는다는 것, 그래서 군대가 된다. 조직화가 된다는 것이지! 회복이 되었을 때 43장에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떠날 수 있다는 것. 기억하라! 늘 붙박이처럼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
*시온신학
성전이 위치하고 있었던 시온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일하다. 시온신학, 시온전승은 이곳에 토대를 두고 있다. 시온은 야훼의 산이다. 고대근동에서는 신의 주거지가 산이라고 생각했다. 여호와의 주거지는 바로 시온 산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나님의 지상보좌가 산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다윗왕조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왕조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해 계시기 때문에 대적들이 결코 훼손할 수 없는, 넘볼 수 없는 그런 곳이다. 그런데 이 성전이 결국 무너진다. 포로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고레스가 칙령은 539(8)년. 포로기는 587년-539(8)년을 포로기라고 한다. 포로기 자체가 587(6)년에서 539(8)년이라고 한다. 포로후기/포로기/ 포로기후기 잘 이해해야 한다. 돌아온 사람들이 회복을 꿈꾸며 돌아왔다. 그러나 사회적인 실체가 너무 가난한 것이다. 다들 힘들게 살고; 그것도 다 돌아온 것도 아니고 소수만 돌아왔다. 스룹바벨, 세스바살, 이 사람들이 성전의 기초작업을 해놓는다. 성전의 필요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정체성의 구심점이 바로 성전이기 때문에!
그러나 성전의 진척이 없다. 그러다가 516년 정도 학개와 스가랴, 동료에 힘입어 제2성전이 지어진다. 하나님이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있는데 그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 더 넓게는 성소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인데. 이 성소가 있어야 진정한 회복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임재를 통해서 축복을 보장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경제가 힘든데도 제2성전을 짓는다. 하나님의 임재인 곳이 안전하고, 축복의 근원지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데. 출애굽기에서는 성막건축. 레위기로 넘어오면 제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사라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예를 들어 화목제. 자원하는 마음으로! 서원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관계의 깊이를 다지기 위해서 제사를 드린다.
속죄제나 속건죄는 “죄가 있으면 소통이 안되니까 속죄제, 속건죄를 드려서 수직적인 관계를 회복한다.” 속죄제, 속건죄는 수직적인 관계회복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결해야 들어간다. 부정 <-> 성결, 그리고 죄의 개념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부정, 성결, 죄, 병 의 개념(성결은 거룩이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차별적인 특성, 이방신들이라던지 인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성, 이스라엘 백성(인간)에게 적용하면 다른 인간과는 차별되는 특성, 사랑의 차원/사회도덕적인 책임/ 다른 사람보다는 다른 존재로써 그 사람을 리드할 수 있는/ 사랑도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사회적인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 그렇기에 부정과 죄는 구분해야 한다.
남자들의 유출병, 여자들의 생리현상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부정(죄가 아니다)이다. 레위기에서 이 규정을 내린다. 하나님 앞에서 준비를 갖춘다. 그 다음에 성결법전이 나온다. 17장에서 26장까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상해를 입힌다는지, 종에 대한 규정들이 등장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대로 해야 된다. 제사장과 레위사람이 이 역할을 한다. 원래 제사장직이 존재한 것은 아니다. 출애굽기가 19장에서 24장까지 시내산 언약을 맺는 부분이다. 19장에 시내산에 등장한다. 출애굽기 20장. 20장 22~33절까지가 언약법이 나타난다.
(출 24:5, 개정)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이 사람들이 제사장의 시초라고 본다. 이 때는 아직 제사장 규율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장 제도가 없었다. 이 젊은이들이 제사를 돕거나 장로나 가장이 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아론계와 레위계를 분류한다. 아론계는 대제사장직을 세습한다. 사독은 아비아달을 제거한다. 아비아달은 솔로몬이 왕이 될 때 아도니아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사두개인들이 바로 사독의 후예이다. 사독은 아론계라고 볼 수 없다. 사독은 족보의 계열이 좀 모호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솔로몬을 잘 잡았다! 어떤 학자들은 여부스 족속의 일원이 아니겠는가 추론한다. 사독은 아무런 힘이 없었으나 솔로몬을 밀어주는 바람에 제사장으로써 특권을 지속적으로 누리게 된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사상은 후대사상이다.
겔 44:6-16(Wellhausen)을 중심으로 레위 사람은 성전에서 봉사는 할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성소는 들어가지 못한다. 상당수의 레위사람들은 지방성소에서 일했을 것이다. 요시야 왜 개혁했느냐? 경제적인 재원이 있어야 그 사람들이 먹고 살아야지 않겠느냐! 지방성소에서 중앙성소로 올라와야 하는데 지방성소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다 줘버린다. 그래서 세금이 안 올라온다.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한 종교개혁이다, 그러나 배후에는 자기들의 밥벌이의 몫이 적어지니까 지방산당들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럼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는가? 뿔뿔히 흩어진다. 그럼 줄서기를 해야지. 그래서 포로기 이후에 역대기나에서 보면 “레위 사람들은 극진히 대접하게 된다.” 족보도 다시 만들고. 그 때에 보니까 “일할 사람이 없거든! 흩어졌으니까, 그래서 고용하는 거니까”
벨하우젠은 역할분담을 이야기한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역할분담. 그러면 이 사상은 에스겔 사상에 등장하는데 44:6-16; 후대의 사상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역할 분담; 제사장과 레위인의 역할 분담; 후대의 사상; 벨하우젠; 그래도 이건 다 추론이다!
라우트리지는 :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역할분담은 후대사상이 아니라 광야 유람시대에 이미 존재했다고 본다. (민 3:6-10)에 근거한다. 민수기는 시내산에서 모압평지로 가는 상황이다.
-(민 3:9, 개정) “너는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맡기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아론에게 온전히 맡겨진 자들이니라” -아론의 휘하에 넘겨진 사람이다!
-(민 3:10, 개정)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무를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오로지 아론 계열의 제사장만이 가까이 갈 수 있다. 이미 민수기에 존재했는데. -벨하우젠은 민수기 자체를 후대에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오경 자체를 후대로 본다.
라우트리지는 모세의 저작이라고 생각한다. 모세의 말이라고 본다.
*정착한 이후에서의 예배
레위 사람들이 지방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동할 때에는 그냥 동서남북으로 각 지파가 배당이 되었고, 중앙에 성막을 이동식 성막을 만들어서 이동했다. 이 때는 이동하는 성막만 신경쓰면 된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다 흩어져 살게 되니까 “한 성막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은 불가능 해졌다.” 그래서 레위인의 필요성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성경에서는 제사장이 없을 때 레위인들이 제사를 드리는 예도 있다. 엄격하게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차이를 말이다. 어쨌든 라우트리지의 입장은 나눠서 보는 것이 후대가 아니라 역사초기일 수 있다. 벨하우젠은 나눠서 보자. 역사후기다!
레위 사람은 지방에서 제사장 역할을 했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사사기 17장을 보라;
삼손 이야기 다음에 이 이야기, “미가”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어머니의 돈을 훔쳤다. 1100냥.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어머니에게 돌려준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돈의 일부를 돌려준다. 그것을 가지고 다시 우상을 만들게끔 한다. 돌아다니는 레위 사람, 이 레위 사람이 job이 없었나보다. 그래서 미가가 들어와서 제사장을 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제사장을 고용한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우상을 놓고 레위사람을 고용했다. 이 이상한 일이; 단 지파에서 지파 전체에서 “나는 너에게 더 높은 페이를 줄게. 니가 개인 제사장보다 지파 전체 제사장 하는 것이 더 낫지 않냐”고 제시한다. 그리고 제사장은 돈에 따라서 여기저기 왔다갔다 한다. 레위인도 제사장 기능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정시대에 들어와서도; 뭐 비슷; 중앙성소가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레위 사람이 제사장 역할을 대행했을 가능성은 없다.
에스겔 때에 와서는 역할분담을 강력하게 규정하게 된다. 기강이 헤이해져서. 성전을 타락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레위 사람이 우상숭배를 조장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성소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엄격하게 나누게 되었다는 거지요(교수님)
*제사장과 레위
이 두 부류의 역할을 거의 비슷하다. 우림과 둠밈, 품에 품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는 우림과 둠임을 가지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토라 교육과 재판 기능을 했다. 정결과 부정을 선언했다. 레위 사람도 토라 교육을 했다. 언약궤를 강조하고. 문지기나 가수로써 예배 인도 역할을 했다. 나머지는 유사한 역할을 했다.
*절기
-봄 : 유월절/무교절, 칠칠절(오순절)
-가을 : 속죄일, 초막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유월절/무교절
니산월 14일 저녁, 해방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함이다. 보리수확. 칠칠절(오순절)은 양력 5-6월, 무교절이 끝나고 50일째. 밀수확기. 이 절기는 시내산 언약과 율법 수여를 기념하는 것이다. 보리수확/밀수확 다 먹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가을절기 (속죄일 : 티쉬리월 10일에 대속죄가 있다. 국가전체를 속죄하는 날이다. 1년에 한번씩. 히브리어로 욤 키푸루? 염소 두 마리를 선정해서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해서,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해서 제사를 드린다. 여호와를 위해서 드리는 것은 OK, 아사셀은 무엇이길래? 이 아사셀은 쉽게 생각하면 광야에 사는 귀신이다. 그러나 유일신론사상에서 귀신이라고 이야기하면 좀 어패가 있다.; 어쨌든 아사셀은 귀신의 일종일 것이라고 본다. 염소 한 마리를 일종에 제물로 바쳤다. 광야에 보내는 염소에 온 백성의 죄를 전가한다. 그러면 온 백성의 죄를 가지고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사셀 염소를 보내는데 이 염소가 광야에 가서 절벽에 떨어져 죽게 만들어 버린다. 죄가 완전히 소멸될 수 있도록,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지;)
(초막절 : 포도나 올리브를 수확하는 날이다. 광야천막 시절을 경험했고, 자신들을 얼마나 지켜 보호했었는지를 기념한다.) 여름은 건조기라서 다 죽는다; 그래서 절기가 없다;
-여름 : 바알과 모트가 있다. 모트는 죽음이라는 뜻이다. 모트신은 죽음의 신이다. 바알 신과 모트 신과 싸워서 바알 신이 죽는다. 그래서 지하로 들어간다. 그 때가 바로 여름, 건조기이다. 그러다 가을이 되면 바알 신이 부활을 한다. 바알 신은 폭풍의 신이다. 비의 신이다. 비를 몰고 와서 파종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여름 건조기는 “죽음”이다. 밑에는 다 마르고, 위에는 푸른색깔.
*제사의 의미와 목적
제사의 제물은 신에게 바치는 음식이냐? 하나님은 음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뇌물의 개념이 아니라 선물의 개념이다. 뇌물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함이다. 그러나 선물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인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을 인정하는 의미로써 선물의 개념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제물이 있을 수 없다..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조정한다는 개념은 불가능하다. 목적은 죄의 정화, 속죄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게 된다. 동물을 죽이는 것은 죄를 전수하는 것이다. 안수가 아니다. 전송된다. 그래서 제주가 손을 얹고, 죄를 대신 전가시키는 의미를 가진다.
아사셀의 염소도 나라의 죄를 다 전가시킨다. 전가를 시키면서 고백을 하게 된다. 이 고백은 진정한 참회가 필요하다. 형식적인 것은 안 된다. 동물의 피를 흘림으로써 말미암아 ‘죄를 깨끗하게 정화시키고 죄의 용서를 받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과 소통의 관계가 형성된다.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관계성이 확보된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 “거룩한 하나님이 그 안에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가 가능해진다! 그래서 죄를 제거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제사의 유형
선물 성격이 있고(번제-올라, 소제-선물/민하) -하루에 2번 (민 28:3-4) / 교제 성격이 있고 /속죄 성격이 있다
*성물 성격
교제 : 화목제(관계성을 깊게 만드는 제사), 화목제는 제주의 몫이 있다. 번제는 다 태우는 것이지만 제사장의 몫도 있고, 제주의 몫도 있다. 형식은 비슷하지만 하나님-제사장-제주가 함께 나누어 먹는다.
화목제는 서로 나누어 먹을 수 있다. ‘새’를 나눠먹는 건 좀; 이건 안 된다; 누가 먹냐? 하나님의 몫은 제단위에서 불태우고, 제주와 가족들이 나눠 먹는다. 화목제는 ‘감사제, 서원제, 자원제’ 세 가지로 나뉜다. 언약관계를 튼실하게 만드는 제사이기도 하다.
속죄제는 보상이 불가능하다. 속건제는 보상이 가능하다. 속죄제는 부주의 하여 저지른 죄, 제사의식이라든지 의식의 부정이 있을 시에 속죄제를 드린다. 죄의 경중에 따라서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제단 뿔에만 다를 것이냐/ 대속죄제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해야 한다. 피를 바르는 것은 피의 원천인 하나님께로 향한다. 중대한 죄는 지성소로. 대속죄일의 속죄는 번제로 제사를 드리지만 아사셀에 전가한다. 제물의 차이는 죄의 경중에 따라 차이가 나타난다. 기름기는 제단에서 제거,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을 수 있다.
속건제는 보상가능한 죄이다. 원 가치에 1/5 추가해야 한다. 비고의적인 죄에 해당한다. 속건제는 개인에게 저지른 보상 가능한 고의적인 죄이다. 나머지는 화목제와 유사하다. 속죄, 교제, 선물의 성격이 있다는 것을 알아둬라!
*헤세드와 죄 용서
죄가 있을 때는 제사를 통해서 용서받는데. 하나님의 성품을 의도적으로,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의도적으로 위반했을 때에는 제사를 통해서 속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성품과 연관된 죄; 좀 모호하긴 하다. 예를들어 민수기 15장. (안식일에 일을 한 사람: 안식일에 일을하면 언약을 파괴한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언약공동체 밖으로 간주된 사람으로 밖에 여겨질 수밖에 없다. 이 사람은 공동체로부터 쫓겨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언약공동체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가?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헤세드의 직접적인 호소”의 개념이 등장한다.“ 헤세드가 제사보다는 더 넓은 범주에 위치한다. 제사는 언약공동체를 전제로 한다. 바깥에 존재하는 언약공동체였던 사람; 이 사람은 제사를 통해서 완전한 속죄가 가능하다(?).)
헤세드 :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인간은 언약을 깬다.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존해야 한다. 언약의 체제 안에서는 일단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성품에 신실하심에 의존해야 한다. 언약이 위험을 받을 때에도 헤세드는 유효하다.
*율법 : 기차가 철길을 가야지 일반 도로를 다니면 기차 자체가 자유스러울 수 없다. 이스라엘이라는 언약공동체가 세상가운데에서 존속이 되려고 하면, 자기네들의 정체성에 걸맞은 규정들을 지켜야 이스라엘로써 존속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한국 같은 경우에도 “북한에 시장경제”를 이야기하는데 북한은 “시장경제”가 확립되면 정체성이 무너진다. 체제와 제도가 성립되면 그 제도 안에서 3자가 보기에는 부자연스럽게 보이지만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시장경제체제만 보아도 그렇다. 우리의 관점과 북한의 관점은 다르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 규정과 율법들은 필요하다. 그 가나안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나안이 더 자유로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규정자체를 지켜야 “너희가 살 수 있어”라고 볼 수 있지만. 지킬 때에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어겼을 때 부자연스러운 현상을 겪게 된다. 아담과 하와 그들의 선악과 개념도 바로 그런 것이다. 이스라엘이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때 규율을 지켜야만 하는 개념으로 봐야 한다. 그러니까 제 3자의 입장에서 율법을 보면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이스라엘의 내부에 들어가서 그 율법을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존속!!”
*십계명과 언약법이 연관이 있을까? 바알과 같은 신들을 섬겼느냐? 히타이트 법전, 조약법은 다수의 학자들이 다루고 있기는 하다. 특징적인 요소가 들어왔을 것이라고는 생각은 한다. 그러나 동일하게 제시된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성경에서는 자연이란 그냥 종속물로 여겨진다. 히타이트가 앞섰다고 해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에는 섣부르다.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나라만의 특수성은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시편 56편에
다윗의 죄책감(밧세바 사건..), 공동체 바깥에 위치한 것처럼 고백을 한다.
-시편 51장
(시 51:14-19, 개정)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새번역에 내가 살인죄를 짓지 않게 지켜 주십시오. 주님은 번제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으로도 나온다. 어쨌든 살인죄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 또 번제를 드려도 기뻐하지 않는다고 나타난다.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절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제물임이 나타난다.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순수성, 마음의 정결성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기도가 아니던가.
헤세드는 언제나 유효하다. 언약이 위협을 받아도. 언약의 틀밖에 놓여있는 자라도. 이 죄의 용서를 빌 때에 중요한 것은 바로 “기도”이다. 내적인 진실성이 담긴 참회이다. 그래야 하나님이 받으시고, 언약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참회의 진솔성이 중요하다. 기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고, 언약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듣고 응답하시는 전제를 가지고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죄 고백의 진솔성이 부족할 때 기도가 방해받을 수 있다. 그래서 언약공동체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 기도의 중요성이 거론된다. 솔로몬의 기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역사초기보다 역사중기이후로 기도가 유효성을 가지게 된다. 후기로 넘어오면서 포로기/그 이후로 해당체제에 의해서 “기도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왜냐하면 성전이 없기 때문이다! 제사의식 자체가 안 된다; 자연히 대체되는 방법이 바로 “오경낭독”과 “기도”이다. 에스라서에서 보면 율법낭독과 기도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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