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제자-요한
요한복음 21장 20~23절
<서론>
미국에 요한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이 약 60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죤”이라고 하지요. 다음이 야고보로 30만 명, 톰(도마), 피터(베드로)… 순이랍니다. 그걸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베드로가 단연 인기이고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외국에서는 요한을 더 선호합니다.
“요한”의 의미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아들에게 임하소서! 그래서 요한이라는 이름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12제자-열한 번째로 요한에 관한 설교입니다. 요한-그가 남긴 사역 때문에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그가 보여준 사랑 때문에 위대한 사람입니다. 앞으로는 어떤 시대가 될까? 일, 업적, 실력보다는 사랑에 성공하고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고…사랑에 성공한 사람들이 알아주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귀한 교훈이 됩니다. 일에 대한 성공, 업적에 대한 성공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만큼 실력이 있어야 하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성공-누구나 마음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들에게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1. 요한-기독교는 사랑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요한은 제자들 중에서 안드레와 함께 12제자 중 가장 먼저 부르심을 받고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요한은 제자사역의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둘씩 부름을 받고 모여들던 제자그룹의 초창기, 제자훈련의 과정,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강림, 초대교회의 시작… 이 모든 것들을 다 꿰고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주후 100여년 될 때까지 생존했던 인물입니다. 그를 통해 초대교회가 초석을 이루었습니다.
그만큼 12제자 중에서 베드로와 함께 기독교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상당히 사역 중심입니다. 물론 그가 베드로전서와 후서를 통해서 기독교의 교리와 삶을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베드로는 가는 곳마다 기적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서 수천 명 씩 회개하게 하는 활동가입니다. 자연히 업적 중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제자들 중에서 마지막까지 생존했다면 어떤 기독교가 되었을까? 상당히 이적중심이고, 활동중심인 기독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오래 살며 영향력을 남겼던 사람은 요한입니다. 요한은 사역 중심이 아니라 관계 중심인 사람입니다. 그 관계는 사랑입니다. 요한은 일에 대한 관심보다는 먼저 주님 자신을 원했고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중시했습니다.
요한이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보세요.(요 1:35-42).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요한은 스승에게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했을 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구하느냐?” 했을 때, 대답하기를, “지혜를 구합니다!” “능력을 구합니다.” “새로운 세상을 구합니다!” 라고 하지 않고 “어디 계십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요한과 안드레는 개인적인 야망, 소원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 자신을 원했습니다. 주님과 관계를 구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거하면서 그분에게서 사랑을 배웠고 사랑을 전했고 사랑하다 갔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자”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과의 관계보다는 사역과 이적과 능력에 관심이 있었을 때, 그래서 베드로에게 성장이 더디게 나타날 때, 요한은 주님과 개인적인 만남을 우선했고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서 더욱 깊어지는 사랑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한을 가장 오래도록 살려두신 것은 교회가 사역 중심보다 관계가 더 중요하고, 에 모든 사역의 중심에는 사랑이라는 주제가 있어야 하고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복음임을 심어주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모세의 후계자 지명-갈렙과 여호수아. 인간적으로는 당연히 갈렙이 후계자감입니다. 그는 활동가이며 사역이 능하며 지도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후계자는 여호수아로 지명됩니다. 왜 그랬을까? 여호수아는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부관으로 있으면서 하나님과 대면하며 말하는 모세를 알았습니다. 모세가 내려갔을 때도 홀로 남아 하나님의 회막을 지키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의미 있게 만들어 갔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후계자가 되었기에 가나안 입성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일보다는 하나님을 더 좋아야 하고 사역보다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앞장을 서야 합니다. 일보다는 교인들을 더 좋아하고 교인들과의 좋은 관계를 사역의 중심에 놓는 사람들이 앞장 서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사랑의 교회가 될 수 있고 사랑에 넘칠 때 진정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장군이 낙하산 부대를 방문했습니다. 너는 낙하산 공수가 좋으냐? 네! 너는? 저도 좋습니다. 너는? 싫습니다! 깜짝 놀란 장군, 그런데 왜 여기에 있느냐? 이 사람들이 좋아서입니다.
이겁니다! 일은 좋은데 사람들이 싫으면 안 됩니다. 사역보다는 사람들을 더 좋아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만들어 가는 교회가 오래 가고 아름다운 화합을 이루어갑니다. 이런 교회가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2. 요한-사랑이 성장된 사람입니다.
요한을 왜 제자들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생존하게 하셨을까? 그 이유를 사랑에서 찾았습니다. 사랑의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랑의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도 요한을 가장 오래도록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생존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이 보여주었던 그에 대한 묘사-그는 사랑의 사람입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했습니다. 그는 사랑의 대명사입니다. 나중에 요한복음을 썼는데, 주제도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입니다. 요한 1,2,3서도 사랑이 주제입니다.
사랑의 사도-처음부터 사랑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때 형과 함께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 말 속에는 격렬함, 거센 열정, 고삐 풀린 사나운 짐승 같은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요한은 편협된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을 반대하면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격함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눅 9:49에,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당장에 금하였다고 보고했습니다. 상당히 단호함을 봅니다. 자신의 눈에 보기에 이게 아니다, 하면 그냥 두고는 못 보는 사람입니다.
눅 9장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을 영접하지 않자, 버럭 화를 내며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태워죽이면 어떻겠습니까?”하던 사람입니다. 얼마나 위험한 사람입니까?
요한은 좋은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자기편에는 한없이 좋지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는 비판과 공격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거친 사람입니다.
나와 달라도 인정해야 하는데 나와 다르다고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열정이 있지만 그 열정은 그야말로 세상을 불태워버리는 파괴성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사랑을 배우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역 중심으로만 나가고 배움에만 열심 했다면 그의 사역은 더 많은 지지자들과 더 많은 적들로 인해 주님의 진정한 모습을 왜곡시켰을 것입니다. 그가 사랑이 없이 배움만 계속되었다면 그의 지식은, 남을 비판하는 일에 사단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주님을 만나면서 사랑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고 영향을 받았습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무한정 용서하라” 이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랑의 가르침은 단지 지식으로만 귀로만 배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요한을 묘사할 때는, 20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이런 표현은 요한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가, 를 보여줍니다.
격렬했던 사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행동하고 처신했던 사람 요한이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배운 것이고 이 배움은 눈으로 귀로만 습득하고 터득한 것이 아니라 가슴과 가슴으로 배운 것입니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배운 사랑, 느낀 사랑-그 사랑은 눈물나는 사랑이요 감격하는 사랑이요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만이 순교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을 녹여내는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신체 중 사랑의 주소는 어디일까요? 머리? 손과 발? 물론 여기에 우리의 사랑들이 있습니다. 머리로 남을 사랑하는 것, 손과 발을 통해서 남의 손 잡아주고 선행을 보여주는 것-중요합니다. 그러니 진정한 사랑은 가슴에 있다고 봅니다.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목자의 사랑-그 사랑이 위대한 것은 그 사랑이 가슴으로 나오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가슴에 사랑의 발전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사랑의 불을 켤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은 사랑을 받아본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사랑은 배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받음에서 나옵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 사랑의 맛을 알게 되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받은 것만큼 전달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받은 사랑이 없이도 사랑을 말할 수 있습니다.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의 전달은 불가능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남에게 전달할 때, 받는 사랑에서 주는 사랑으로 승화될 때 그 사랑은 성장하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기를 얻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이 아이에 대해 한가지의 소원을 말해라! 어머니는 곰곰이 생각하다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대답했습니다.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받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 데 있습니다. 짝사랑은 누가 기쁩니까? 받는 사람이 기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쁩니다. 물론 사랑의 아픔도 있습니다. 그러나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훨씬 더 행복합니다.
요한은 받는 사랑에게서 주는 사랑이 되었습니다. 그는 받은 것이 많았기에, 사랑의 저축을 많이 했었기에 가장 오래도록 살면서 사랑을 실천하며 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사랑은 성장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의 품에서 시작하고 성장한 사랑이었기에 그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우리 늘빛교회가 사랑이 부흥되고 사랑이 성장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요한-사랑에는 미워함에 대한 속성이 있습니다.
요한은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모든 것을 융합하고 함께 하는 사랑이면서 나쁜 것을 가려내고 불순한 것들을 제거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의 속성은 열정에 있지만 그 이전에 사랑의 속성은 순수함에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 별로 열심을 내지 못하고 부서활동을 하지 못하면서도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어느 때부터 아주 열정적으로 일합니다. 열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열심이 있고 열심이 일하는 데 기쁨이 없습니다. 열심이 있는 것만큼 불만도 많아지고 할말도 많아집니다. 왜 그럴까? 순수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무 것이나 좋아하고 함께 하는 무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대상을 잘못 아는 사랑을 불륜, 욕심, 이기심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른 것에 대한 미움, 잘못된 것에 대한 미움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은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쓴 성경들은 “사랑의 찬가”(讚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사랑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두움에 대헤서는 누구보다 독한 눈을 가졌습니다. 이단에 대해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입니다.
초대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요한이 목욕탕에 들어왔을 때 게린투스라는 이단자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목욕탕에서 박차고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저 이단자를 벌하실 때 나도 같은 목욕탕에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형벌을 당할 수 있는 우려심 때문입니다.
그는 그만큼 악을 싫어한 사람입니다. 그는 사랑이었기에 악을 견딜 수 없어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기고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지만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했을 때 그들을 처벌했던 분입니다.
거짓이 없는 사랑, 어둠을 미워하는 사랑-이것이 사랑의 진정한 속성입니다. 그래서 어둠 속에 있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을 사랑한다면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악의 본성, 기질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어둠을 향해 짝하지 말고 도전을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사랑으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결론>
요한은 말년에 에베소교회를 섬겼습니다. 체포당해 독사 굴속에 손을 집어넣고 끊는 물에 던져졌습니다. 그의 몸은 끔찍하게 뭉그러지고 거동도 불편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강단에 앉히면 그는 “서로 사랑하시오!” 이런 말만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육신의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했습니다. 사랑의 사람이었기에. 그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 사랑을 전수받았기에. 예수님은 마리아의 품에서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요한에게 맡겼습니다.
주님은 누구에게 교회를 맡길까요? 따뜻한 가슴이 있는 사람들에게 사역을, 교회를, 형제들을 맡깁니다. 따뜻한 사랑의 가슴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을 잘 하는 베드로가 필요합니다. 조직적인 바울도 필요합니다. 사고가 풍부한 나다나엘-바돌로매 같은 분들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요한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요한은 사랑의 모델입니다. 요한의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목사님들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님을 존중하는 삶 (0) | 2024.02.26 |
---|---|
“결혼의 목적” (0) | 2024.01.21 |
어느 마음 밭입니까?마태복음 13장 1~9절 (0) | 2023.08.12 |
점점 좋아지는 인생요한복음 2장 1~11절 (0) | 2023.08.12 |
십자가, 기독교의 아이콘(icon)고린도전서 1장 18~25절 (0) | 2023.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