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경 - 오경 - 육경
우리가 부르는 오경이 과연 언제, 누구에 의해 쓰여졌느냐는 것은 알 수 없다. 유대교 전통과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 오경을 토라라고 부르고 있고, 이것의 기원을 모세로부터 찾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다. 그러한 근거는 첫째, 오경은 천지창조로부터 모세의 죽음까지라는 하나의 단락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출 24:4; 민 33:1-2; 신 31:9 등에서 모세가 야웨의 말씀을 기록하여, 제사장들에게 이 법을 주었다고 말한다. 셋째, 신약성경 요 1:17.45; 5:46; 7:19; 9:29절 등을 포함한 많은 곳에서 예수님도 모세가 오경(토라)을 기록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오경에 대한 회의 오경을 모세가 저작했다는 전통적인 견해는 이미 교부시대부터 끊임없는 문제제기가 있어 왔었다. 그러한 문제제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모세가 자신이 오경을 기록했다면 “나”라는 1인칭을 사용해야 하는데, 오경에서는 모세를 대체로 3인칭을 사용하고 있다. ② 아브라함의 용병들이 “단”(Dan)까지 그의 적들을 추적했다는 창세기 14:14절의 기록은 모세시대가 훨씬 지난 후대에 와서야 “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사기 18:28절과 서로 모순이다. ③ 창세기 36:31절의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을 다스리던 왕”이라는 말은 이미 이스라엘에 왕이 있던 시절을 전제, 암시하고 있는 것이기에 창세기 36:31절의 본문을 모세시대의 저작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 ④ 신명기 1:1절 “모세가 요단강 저편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라는 표현은 이미 이스라엘이 요단강이 이쪽편인 가나안 땅에 거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⑤ 신명기 2:12절을 보면 에서의 후손들이 호리족을 치고 세일 땅에 거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야웨가 준 땅에서 가나안 사람들을 치고 땅 정착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 아직 들어가지 못한 모세가 벌써 가나안 정복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⑥ 오경의 마지막 부분인 신명기 34:5절 이하에서 모세의 임종과 죽음 후의 백성들의 애곡과 장사 지낸 사실에 대한 글은 모세가 직접 쓸 수 없는 것이다. 2) 오경의 비평적 연구 시작 ① 비터(Witter): 1711년 독일 힐데스하임의 목사 비터는 최초로 신명의 교차(엘로힘과 야웨)를 통해 창세기 1-2장의 전승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주위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② 아스트룩(Astruc, 1684-1766년): 프랑스 왕실 의사였던 아스트룩은 신명을 토대로 창세기 전체가 두 가지 문서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야웨라는 이름을 가지고 표현된 문서들을 J문서, 엘로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표현된 문서들을 E문서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이 두 문서가 서로 합성이 되어 창세기가 되었다고 보았다. ③ 이후 학자들은 E 문서를 더 세분하여 더 조직적이고, 종교적인 E1과 덜 조직적이고, 덜 종교적인 E2로 나누게 되었다. 그래서 J, E1, E2라는 세 개의 자료로 분리하게 되었고, 나중에 벨하우젠은 E1을 Q(=P)라고 부르면서 J, E, P로 명명되게 되었다. ④ 드 베테(de Wette, 1780-1849년)는 열왕기하 22-23장과 신명기를 서로 비교하면서 왕하 22-23장에서 나타나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신명기 법과 유사함을 발견하고, 신명기(특히, 신명기 법전)를 요시야 시대의 것으로 보면서 이를 D문서로 부르기 시작했다. - 열왕기하 22-23장을 보면 요시야 왕 18년에 제사장 힐기야가 사반의 명을 받들어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하게 되자, 요시야 왕에게 이 율법책을 들려주게 되었고, 이것을 요시야는 여선지 훌다에게 진위를 확인케 한다. 여선지 훌다가 이를 확인하자 요시야는 옷을 찢고, 종교개혁을 일으킨다. - 드 베테는 요시야 시대에 발견된 율법책에 따라 실시된 종교개혁과 신명기의 내용적인 일치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 드 베테는 열왕기하 23장과 신명기를 서로 비교하면서 이러한 내용적인 일치가 있게 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요시야 종교개혁의 바탕이 되었던 율법책은 요시야 통치 18년, 즉 주전 622/1년에 발견된 것으로써 신명기의 기원연대로 삼을 수 있다. ㉯ 열왕기하 23장의 개혁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제의중앙화 개혁이었는데, 이는 신명기에 나오는 예배의 중앙화를 염두해 둔 개혁이라고 볼 수 있다. ㉰ 요시야의 개혁으로 신명기 운동이 일어나 열왕기하 22-23장을 포함하는 신명기 역사 또한 자극을 주게 되었다. ⇒ 결국 오경은 4개의 문서가 합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즉, J, E, D, P. ⑤ 벨하우젠(Wellhausen, 1844-1918년): 벨하우젠은 이러한 네 문서 가설을 내놓으면서 J 는 다윗-솔로몬 시대인 주전 950년경, E는 북왕국에서 제일 번성했던 주전 750년경 여 로보암 2세 때, 그리고 D는 율법책이 발견된 요시야 왕 통치기간 중인 주전 622/1년, 그리고 제사장 문서는 포로 이후(유다 멸망 이후 제사장적인 통치와 성전중심의 종교활 동이 있었던 에스겔로부터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의 어느 시기로 봄)로 본다. 3) 문서설의 한계와 문제점 ① 문서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각 문서들에 대해 추정하는 연대가 학자들마다 다르다. 특히 제사장 문서(P)를 포로 이전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② 이 독립된 문서들이 결합되어 형성된 오경의 범위 역시 정확하지 않다. 딜만(Dillmann), 벨하우젠(Wellhausen), 쿠에넨(Kuenen) 등과 같은 학자들은 오경을 넘어서 여호수아서에서도 J와 E, 그리고 D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③ 이러한 독립된 문서들을 누가 결합했는가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④ 신명(神名)의 다양성은 신약에서 바울이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주 예수’, ‘주’, ‘그리스도 예수’ 등과 같은 한 분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라 할 수는 없는가?이다. ⑤ 내용의 모순과 불통일성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모세 장인의 이름이 르우엘(J문서)과 이드로(E문서)의 차이가 있다 하여 전혀 다른 문서로 구분함에는 무리가 있다. 이는 고대에는 이름이 두 가지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여디디아-솔로몬). ⑥ 언어나 문체의 다양성에 의해 저자가 다르다고 성서를 문서단위로 분해하는데는 무리가 있다. 주제가 달라지면 문체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사용되는 단어가 달라질 수 있다. ⑦ 벨하우젠은 “아브라함 이야기는 무의식 예술의 자유스런 창작으로 취급되어야 할 성질의 문학”이라고 하면서 족장사의 역사성을 부인했다. 그러나 고고학의 발달로 인해 족장사의 배경이 역사적인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J. Bright). 2. 육경(Hexateuch) 역사비평이 발전하면서 오경에 대한 연구 가운데 오경이 아닌, 육경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한 약속이 있는데, 출애굽은 약속된 땅 정착을 위한 준비 작업이었고, 그 약속의 성취는 여호수아에 와서 완전히 성취되었다. 또한 일부학자들에 의하면 여호수아서에 오경에서 발견되는 자료들(J, E, D, P)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명기 26:5-9절의 역사신조는 출애굽에서 가나안 정착까지의 구속의 내용을 보도하고 있는데, 이는 여호수아서에서 성취되었다. 1) 폰 라트(G. von Rad)의 육경이론 폰 라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제의를 통해 자신들의 역사신조(historical credo, 신 26:5-9; 신 6:20-24)를 낭송했다고 주장한다(마치 현대의 사도신경처럼). 그런데 이 역사신조의 내용이 가나안 정착을 전제로 하고 있고, 또 동일한 내용의 문장이 여호수아의 맨 마지막 장인 24장에서 나타나고 있다(수 24:2b-13). 폰 라트는 역사신조에 족장사로부터 시작해서 여호수아서에서 땅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역사신조에는 출애굽 이후 있게 된 시내산 계약사건(출 19:1-민10:10)이 빠져 있는데, 이것은 J 기자가 원래 있던 땅의 약속전승과 이 시내산 계약사건을 덧붙여 하나의 커다란 육경으로 만들었던 것이라고 보았다. 이 시내산 사건은 히브리 노예들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인데, 그 본문에 있는 십계명이나, 계약법전, 성결법전과 같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계약본문이 이 역사신조에서 빠져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폰 라트는 말한다. 폰 라트는 육경의 가장 간단한 형태는 신명기 26:5b-9절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은 암송문에서 시작했다고 보고, 이것이 J 기자라고 불리는 야웨기자에 의해 전체를 육경으로 확장시켰다고 본다. 폰 라트는 육경이 본래 길갈에서 추수 때인 칠칠절에 암송되던 글이 기초가 되었던 것으로, 이것이 다른 전승들과 사슬식으로 연결되면서 확장된 것이라고 보았다. 육경 구조는 독립적이던 족장전승과 정복전승이 서로 결합되었고, 이후에 이 전승들 사이에 커다란 시내산 단화가 들어오게 되었다. 이 시내산 단화는 율법과 계약갱신에 관한 글모음이다. 특히, 시내산 전승 안에 있는 법들은 어떤 이야기라기보다 여러 가지 법규나 규정들이 혼합된 채 수집해 모아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수집된 법규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목록화 되고, 질서가 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법규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부분에는 “너희는 지킬지니라”로 마쳐진다(레 16:29; 19:19; 23:41; 민 9:3). 이러한 법들이 예배의 장소인 성막과 관련되어 정리되었다. 따라서 폰 라트는 이러한 법들이 수집되고, 낭송되었던 곳은 세겜(Shechem)으로 때는 장막절 축제라고 본다. 이 장막절 축제에는 계약갱신도 이루어졌다고 폰 라트는 본다. 공동체를 위해 제정된 법규들은 정기적으로 갱신되어 공동체 안에서 다시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폰 라트는 이러한 추수감사절의 축제에서 행해지던 여러 가지 전승과 장막절 계약 갱신제의에서 행해지던 법규가 융합되어 하나의 커다란 육경이라고 하는 이야기군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봤다. 그 순서는 족장전승(창 12-50장)과 가나안 정착 전승(출 1장-수 24장)이 먼저 결합되었으며, 그 다음에 출애굽 이후 단락을 나누어 시내산 단화(출 19장-민 10:10)가 현재의 위치에 삽입되었고, 이후에 족장들의 배경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해 소위 원역사(창 1-11장)를 덧붙였다. ⇒ 종합하면 폰 라트의 이론은 원래 있던 정복설화(출 1장-수 24장)에 족장전승(창 12-50장)을 덧붙여서 정복전승을 확장했고, 이것을 출애굽 직후의 부분에서 잘라, 가장 긴 시내산 단화(출 19장-민 10:10)를 삽입했고, 마지막으로 천지창조의 역사인 원역사(창 1-11장)를 덧붙여 현재의 육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구조를 형성시킨 J기자는 아무런 의도 없이 이런 구조를 형성한 것이 아니라, 커다란 두 개의 신학적인 구조를 염두에 두고 했다는 것이다. 하나는 정복전승을 통해 그 땅을 차지하리라는 약속과 복음의 이야기로, 다른 하나는 시내산 단화에 나타나 있는 계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지켜야 할 율법과 심판으로 엮여졌다는 것이다. 이는 J의 신학적 의도 가운데 기술된 것이다. 2) 육경이론의 비판 폰 라트는 오경에 있는 이야기 전승군들을 분리하는 작업을 통해 육경이론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폰 라트가 말한 역사신조의 본문은 분리해 낼 수 있는 본문이 아니다. 신명기 26:5b-9절은 신명기 26:10절 이하와 분리될 수 없으며, 여호수아 24:2-13절은 14-26절과 분리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본문은 역사신조가 아니라, 단순한 역사적 회상일 뿐이다. 폰 라트는 신명기 26:5b-9절인 역사신조의 역사적 고대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로스트(Rost)는 신명기 26:5b-9절이 이차적인 첨가이며, 요시야 시대의 본문이라고 본다. 또한 이 본문은 원신명기(신 12-26장) 안에 들어와 있는 본문이다. 폰 라트는 시내전승과 정착전승을 분리하고 있으나, 시내전승과 정착전승은 분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시내전승 안에는 계약체결 과정 속에 고대 근동의 조약형식인 역사적 서언과 법조항이 항상 함께 나온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언급을 하는 정착전승과 법조항에 해당하는 시내전승은 오래전부터 하나였다. 3. 사경(Tetrateuch) 1) 노트(M. Noth)의 사경이론 노트는 폰 라트의 육경 주장 이후에 사경 이론을 내놓았다. 즉,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 하나의 문학단위이고, 신명기에서 열왕기하까지가 단일 저자에 의해 기록된 하나의 역사서였다는 이론이다. 노트는 신명기와 신명기 역사서는 사상적으로 거의 동일하며, 문체적으로 소위 요약연설문(leading speeches)이라는 것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요약연설문은 특징적인 구조로 되어 있으며, 그 내용이 회상과 요약으로써 역사가 꺾이는 곳마다 역사를 제대로 흐르게 하기 위해서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때로는 유언의 형식으로, 때로는 보고의 형태로 연설을 배치하여 역사가 끊이지 않도록 해 놓고 있다고 보았다. 노트는 신명기와 신명기 역사서도 바로 이러한 방식에 의해 이어져 있다고 보았다. 신 1-3장 → 사경의 여행경로를 회상 신 31-34장 → 전체의 신명기 역사를 예상 수 1장 → 여호수아서의 도입 수 23장 → 여호수아서의 마무리와 사사기의 도입 삿 2장 → 사사기의 도입 삼상 12장 → 사무엘의 유언으로 사사시대를 종결하고 왕정시대를 열음 삼하 7장 → 다윗 왕정의 확립과 성전건축을 미리 선보임 왕하 17장 →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보고 왕하 25장 → 남왕국 유다의 멸망에 대한 보고 ⇒ 노트는 이렇게 신명기 역사가 소위 “요약연설문”이라는 것으로 짜여져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노트는 이러한 작업이 어떠한 특수한 목적이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서라기보다 한 역사가의 단순한 호기심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았다. 노트는 이렇게 신명기 이하를 신명기 역사로 끊어 낸 후에 사경에 대한 연결을 구축했다. 노트에 따르면 사경은 폰 라트가 말한 것과 같은 형식과 절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커다란 5개의 막대지남철과 같은 주요전승이 사경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족장들에게 한 약속/ 출애굽/ 광야여행/ 시내산 계시/ 가나안 입성). 그래서 이러한 전승들이 왕정 이전 시대에 더 작은 전승들을 흡수하면서 결합되어, 현재의 사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2) 사경이론의 비판 노트의 사경이론은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의 네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을 것을 요구하고 있고, 신명기에서부터 열왕기하까지를 동일한 사상에 의한 한 저자(역사가)의 글 모음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트의 사경이론은 출애굽의 지도자인 모세 이야기가 민수기로 끝나야 한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모세의 출생에서 죽음은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인데, 출애굽의 주요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중간에 단절되어야 한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4. 결론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분류상 토라(율법서)로 분류되어 있는 오경은 포로이후 시대인 에스라 시대에 고정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 이전의 모습이 사경이었는지, 혹은 육경의 모습 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왕대일은 육경이 아닌, 오경인 이유에 대해 에스라와 페르시아 사이의 정치적 의도로 요단 동편의 땅이 이스라엘 소유였던 것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옳지 않다. 민수기 32:33절 이하에서 이미 요단 동편 지역은 이스라엘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경, 육경이 아닌, 오경을 고수하는 이유는 첫째는 기독교 전통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오경 저작설에 많은 지적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경은 우리 기독교의 정경으로 이미 주전 5세기경에 거의 고정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둘째로 사경과 육경의 이론들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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