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중간상태
1. 중간상태
우리는 질문한다. 신자로서 죽은 자들-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이
죽음과 부활사이 기간 동안에 어떤 상태에 놓여 있을까?
① 로마 카톨릭 교리
로마 카톨릭에서는 연옥교리를 만들었다.
죽을 때 완전한 자들의 영혼은 즉시 천당에 들어가지만, 완전히 정화되지 못한 자의 영혼은
연옥이라는 정화의 장소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거기 거하는 기간은 사람마다 다른데,
살아있는 친구와 친척의 기도나 선행 미사에 의해 단축될 수 있다고 주장하나.
이 교리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또한 로마 카톨릭은 선조림보라는 것을 만들어 구약의 성도들이 그곳에 억류되어 있다고
말하고, 세례 받지 못한 모든 아이들의 영혼이 유아림보에 있다고 말하지만,
아무런 성경적 근거가 없다.
② 영혼수면설
육신의 죽음과 더불어 영혼이 무의식적 휴식이나 수면상태에 들어가는 영혼수면설을
주장하는 학파도 있다. 이들은 죽음이 영혼의 잠이라는 것과 죽은 자는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주장하나 옳지 못하다.
③ 영혼멸절설과 조건적 불멸설
이들 교리에 의하면 죽은 뒤의 악인에게는 설사 그가 존재한다 해도 의식적인 존재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멸절설은 인간은 불멸하도록 창조되었지만, 죄 속에서 계속된 영혼은 하나님의 적극적
사역에 의해 그 불멸성의 선물을 박탈당하여 궁극적으로 멸망하거나,
영원히 의식을 박탈당한다는 견해다.
조건적 불멸설은 불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영혼은 궁극적으로 존재할 수 없거나
모든 의식을 박탈당한다는 것이다. 이 두 견해 모두 믿지 않는 영혼은 제한 된 시간만
고통을 받고 그 이후의 영원한 형벌을 의식 가운데 느끼거나
지각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동일하게 주장한다.
④ 성경이 말하는 중간상태
그렇다면, 신약성경은 중간상태에 되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성경은 이런 상태에 대해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며
이에 관한 질문에도 분명한 답변은 내리고 있지 않다. 하지만)
성경에 제시된 몇 가지 힌트를 통해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세 개의 중요한 핵심 성경구절을 보자.
* 회개하고 있는 우편 강도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다. (눅23:42-43)
강도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 하소서”
주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기서 낙원은 축복받은 죽은 자들의 영역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처소인 하늘을 의미한다.
영혼이 잠잔다는 사상은 여기서 전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 빌 1:21-23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 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나의 소망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됨이니 이는 그것이 더욱 좋기 때문이니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가 떠나서 죽는 순간이
곧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후에 잠자는 상태나 무의 상태로 들어갈 것이라는 사상을 배격한다.
죽는 순간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고, 그 상태는 현세보다 훨씬 좋을 것이다.
*고후 5:6-8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 함이로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 5:1을 보아야 한다.
1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노라”
우리의 해석문제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3가지 학자의 견해가 있다.
ⅰ)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란 현재와 몸과 부활의 몸 사이에 있는 일종의 중간적 몸이다.
재림 시에 이 중간적 몸이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은 영원한데, 이 견해의 중간적 몸은 잠정적이므로 옳지 않다.
ⅱ)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란 재림시 얻게 될 부활육신을 가리킨다.
ⅲ)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란 중간상태 동안에 하늘에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나눌
신자들의 영화로운 존재함을 묘사하는 것이다.
ⅱ.ⅲ 해석 중 어느 하나를 주장할 수 있지만,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 대한 칼빈의 해석은 매우 인상적이다.
칼빈의 ‘고린도 후서 주석’
“나는 1절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기를 원한다.
즉 사후에 영혼의 축복받은 상태는 이 집의 시작이면 마지막 부활의 영광은 이집의 절정이다. ”
칼빈은 ⅱ와ⅲ의 해석을 결합한다. 중간상태와 부활육체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둘 다 모두의 관점에서 평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땅위의 장막이 파괴되어 사라질 때 즉시 우리는 하나님의 지으신 집을
소유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이 지으신 집이 사후에 즉시 시작되어 그리고 부활의 몸으로
인해 절정을 이루게 되는 천상의 존재양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자연스럽게 6-8절의 구절에 도달한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여기서 바울은 부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 즉시 일어날 일을 말한다.
몸 안에 거하는 상태로부터 몸을 떠나게 된 상태로의 즉각적인 옮겨짐으로서의 죽음을 가리킨다.
이 죽음의 그 순간 우리는 주님과 함께 집에 있게 된다.
중간상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중요하다.
이미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살전4:6)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롬14:8).
생명도 죽음도 모든 피조물의 그 무엇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끊을 수 없다.(롬8:38-39)
중간상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고린도후서 5:6-8이 보여주는 표상으로 볼 때 우리의 현재의 삶은 실제로는 주님과
떨어져 있는 일종의 순례의 삶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죽음은 그리스도인의 순례의 끝이다
죽음이란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진정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육체의 부활 - 연속성과 차이점
육체의 부활은 성경의 종말론적 메시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인 인간관과 헬라인 인간관은 근본적 차이점이 있다.
헬라철학자들은 인간의 육체는 약하고 그의 완전한 존재의 방해물이다.
죽음 시에 육체는 소멸하고 영혼은 살아남는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하셨고
인간은 육체 없이 완전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이 육체가 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선한 것임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의 육체와 부활육체 사이에 연속성이 있는지 질문 할 수 있다.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연속성과 아울러 차이점도 있다.
연속성이 있을 것이다. 고전15:53은 이러한 연속성을 암시할 뿐 아니라 이 연속성을
요청하기까지 한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바울은 신자들의 부활과 그 후의 교회의 휴거에 대해 묘사한 후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다(살전4:17).
부활이나 변화 후 주님과 항상 있게 될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차이점이 있다.
고전15:51-54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
마22:30에 따르면 장차 올 세상에서의 모습을 묘사한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리라”
여기서 천사와 같게 된다는 말은 천사처럼 육체적 몸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남녀의 성적분별이 없을 것이라는 뜻으로 가르친 것도 아니다.
그때에는 결혼이란 제도가 존속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새로운 자녀를 낳아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고전6: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폐한다는 말은 끝낸다. 없앤다는 말이다.
육체의 소화기적 기능이 장차 올 세상에서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고백할 것은 성경이 부활육체의
정확한 본질에 대해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약간의 힌트는 주어졌으나 대부분의 문제에 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
우리는 바울이 말한 것을 주의해서 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전2:9)
- 출처 : http://blog.daum.net/kwang00kim/7892030 (김광영목사)
2. 제3의 장소는 존재하지 않음
중간 상태에 관한 로마 천주교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생소하면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바로 연옥 교리이다. 조셉 폴은 그것을 정의하기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생을 떠났으나 아직 가벼운 죄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그들이
지은 죄에 합당한 형벌을 현세에서 충분히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대한 잠정적인 형벌의 상태”
라고 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적으로 완전한 상태에서 이생을 떠나는 사람들은
천국에 간다고 한다. 반면 자신들의 영혼에 죽을 죄를 가지고 있거나
교회의 은혜로부터 전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은 지옥에 던져진다
그러나 대다수의 삶들은 이러한 두 그룹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연옥은 그들의 가벼운 죄들을 정화할 수 있는 일종의 중간 상태인 것이다.
신약에서 자주 인용되는 분몬은 마12:31로서, 예수께서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로마 천주교에서는 주장하기를, 이 구절은 어떤 죄들(즉, 성령을 거역하는 것과는 다른 죄)이
장차 올 세상에서 용서될 것임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해석은 일찍이 어거스틴과 몇몇 다른 교부들에 의해 주장된 바 있다.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를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우리가 연옥 개념을 거부하는 주된 요점은 일반적으로 천주교와 개신교를 구분짓는 요점들이다. 천주교에서는 주로 외경에 호소하여 그 교리를 주장하나,
개신교는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마12:31로부터의 추론도 다소 억지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구절은 결코 어떤 죄들이 오는 세상에서 용서받을 것을 가리키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연옥의 개념은 행위에 의한 구원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죄를 속량해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갈3:1-14과 엡2:8-9을 포함한 성경상의 수많은 가르침들과
명백하게 반대가 된다. ........ 따라서 성경적 근거에서 볼 때,
연옥 개념은(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에 시련과 속죄의 기간이 있다고 가정하는 그 어떤 견해도)
거부되어야 마땅하다.
- 에릭슨「밀라드 J 에릭슨: 기독교신학 시리즈7 종말론」 (기독교문서선교회1994) 69-73
* 성경은 연옥에 대하여 전혀 말하지 않는다.
구속받은 영혼은 이 세상과 천당 사이의 어떤 중간 장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천당으로 가게 된다. 죄의 정화를 위해서는 아무런 연옥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죄는 인간의 공로로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기 때문이다.
- 신복윤, 종말론 (개혁주의 신행협회, 2001) 184
* 제 2 시련설
제2시련설은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다음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번 가지게 된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죽을 때 신자였던 사람만이
구원 받을 수 있으며, 한 번 죽은 후에는 회개할 수 있는 어떠한 종류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성경에는 제 2 시련설의 근거가 될 만한 구절은 하나도 없다.
성경은 시종일관 선악간에 인간의 운명은 이 세상에서 결정되며,
죽을 때에 그 사람 그대로 영원토록 계속된다고 가르친다.
한번 이 세상에서 살고 죽은 후에는 다시 되돌아오지 못한다.
크고 넘을 수 없는 구렁은 의인과 악인을 분리하며,
중간 상태는 심판을 대비하는 데 아무런 가치가 없다.
- 신복윤, 202-206
* 윌리엄 헨드릭슨의 내세론 102- 106 일체의 연옥설에 대해 반대합니다.
* 그밖에 안토니 A 후크마 교수의 개혁주의 종말론,
조지 엘돈 레드 교수의 개혁주의 종말론 강의(마지막에 될 일들) 등에서는
천국과 지옥 외의 제 3의 지역에 대한 주장에 대해 설명이나 해명은 물론
아예 언급조차 없습니다.
* 의인들의 영원한 처소는 천당(천국)이다.
이 천당은 물론 신세계를 구성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한다.’고 규정짓는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다. 그러나 이 하늘을 반드시 천국과 동일시해야 할 이유가 없다.
하늘에 대해 유대인들은 첫째 하늘인 대기권, 둘째 하늘인 천체, 셋째 하늘인 낙원으로 이해한다.
바울이 이끌려 간 곳도 바로 셋째 하늘, 낙원이고 예수께서 승천하신 곳도 바로 낙원이다.
이 낙원은 천국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말임과 동시에 성도들이 부활하여 들어가는
완성된 천국과는 차이가 있다. 신복윤 교수는 예수께서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신 아버지 집,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 곳을 육체 없는 천국, 부활 전의 천국인 낙원이라고 말 한다.
이 낙원의 이해를 위해서는 중간 상태의 학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중간 상태는 영혼이 죽음과 부활 사이에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중간 상태가 있다는 것은 부활과 최후 심판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다 인정한다.’
성경은 신체를 떠난 영혼들을 위해 예비 된 곳으로서 낙원과 음부만을 인정한다.
이 중간 상태는 최종적인 완성의 단계인 천국과 지옥이전에 거하는 거처이다.
즉 낙원과 음부에 거하는 영혼들이 최종적인 완성의 단계인 천국과 지옥에 부활체를 입고
들어가기 전까지 기다리는 상태이다.
- 신복윤 종말론
* 성경은 중간상태에 관하여 독립된 교리를 갖고 있지 않다.
중간상태의 교리는 육체 부활, 땅의 새로워짐에 관한 교리와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벌카우워가 지적하듯이 신자는 미래에 관해 “이중적 기대”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기대”를 갖는다. 그러므로 중간상태와 부활은 하나의 단일한 기대의
두 가지 측면으로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계2:7에서는 하나님의 낙원 속에 있는 생명나무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된다. -
여기서도 낙원은 중간상태를 가리키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최종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회개한 강도에게 그가 바로 그날
하늘의 무한한 축복상태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안토니 A 후크마, 개혁주의종말론, 155-156.
☞ 낙원은 중간상태의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천국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서, 단일한 기대의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본질적으로 낙원과 천국은 다르지 않습니다.
∴ 성경에 천국과 지옥 외의 제 3의 장소를 말하는 곳은 전혀 없습니다.
☞ 이와 같이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은 천국과 지옥외의 제3의 장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인간론!! 영!! 혼!! 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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