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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Karl Barth)의 성경관

하나님아들 2023. 7. 11. 22:51

칼 바르트(Karl Barth)의 성경관              

 

I. 바르트 신학이란 무엇인가? 

  

바르트의 신학에 관해서 짤막한 지면에 제대로 논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많은 전기 내지 평전들이 작성되어 출판되었으며 (대표작은 일반적으로 에버하르트 부쉬 (Eberhard Busch)에 의해 쓰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신학을 다양한 측면에서 다룬 신학적 평가서들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그의 신학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글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화란의 G. C. Berkouwer, 미국의 C. VanTil 같은 인물들의 글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간략한 방식으로 다음의 세 가지 차원에서 고찰한 후에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나름대로의 비판을 시도하고자 한다. 첫째, 그의 신학의 특징적인 차원을 살펴보고 둘째, 그의 신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이유와 셋째, 그의 신학에 나타난 비개혁주의적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바르트 신학의 특징

  

바르트 신학은 도대체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바르트의 신학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지만, 막상 바르트의 신학을 바르트의 신학으로 만드는 독특한 바르트만의 무엇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이는 바르트 신학에 통달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필자도 바르트 신학에 통달했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저런 모양으로 바르트를 연구하고 가르쳐 온 결과에 근거해서 그의 신학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신학은 특징은 방대함, 깊이, 그리고 독창성이라는 세 단어에 의해 총괄된다. 우선 방대함이란 아마 그의 주저 (magnum opus)에 해당하는 <교회교의학 (Church Dogmatics, Kirchliche Dogmatik>을 읽으려고 시도해 본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느끼게 되는 주제일 것이다. 바르트는 교의학을 단순히 교의학으로만 간주하지 않는다. 그에게 교의학은 신학의 모든 주제를 총괄하는 신학이다. 그에게 교의학은 곧 신학이며 신학은 곧 교의학이다. 그가 <교회교의학>에서 다루지 않는 신학의 분야는 거의 없다. 그는 총체성을 지닌 신학자로서 신학의 분과화 현상이 일어나기 전에 신학이 원래 지니고 있던 신학의 방대함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신학자이다. 그의 신학이 지닌 방대함은 신학이 포괄하는 모든 지식에 관한 것이다. 그는 신구약 성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주해에 임한다. 또한 교회사의 모든 시대에 걸쳐 발생하였던 사건들이 어떤 차원에서 교리적 또는 교의적 의미를 지니는가를 캐묻는다. 또한 신학이 지닌 윤리적이며 실천적 차원도 빠뜨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의학은 그 자체로서 신학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총체적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교의학자의 아주 흥미로운 단면이 드러난다. 교의학자는 신구약, 교회사, 실천신학을 위시한 신학의 모든 분과를 마치 제 집 앞마당 드나들듯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 자신의 분과가 교의학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교의학이 지닌 방대함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섭렵(?)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런 섭렵의 종착역은 언제나 자신이 다루는 교의의 문제이다. 여기에 바르트의 신학이 지닌 첫 번째 특징, 즉 방대함이 발견된다. 둘째, 바르트의 신학이 지닌 깊이이다. 그의 신학은 방대하지만 이 방대함이 그 깊이에 대한 방해물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방대함은 깊이를 위한 출입문에 해당된다. 그는 성경의 특정 본문 주해에 임하면서 자신의 신학의 깊이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탕자에 관한 비유를 주해함에 있어서 바르트는 자신의 주해작업이 얼마나 신학적이며 교의학적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는 특정 본문의 주해는 결코 주해에 머무르지 않고 한 차원 더 깊이 나아간다. 이 깊이는 물론 기독론적으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이 그의 신학이 기독론적 신학이라고 불리는 주된 이유이다. 바르트는 신학의 모든 주제에서 기독론적 깊이를 발견한다. 탕자 비유를 통해 그는 비유 깊숙한 곳에 숨어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마치 광부가 광물을 캐내기 위해 깊은 탄굴에 들어가기를 마다하지 않듯이 기독론적 심원으로 깊숙이 추적해 들어간다. 바르트는 어느 정도의 깊이에 머무르지 않는다. <요한 칼빈의 신학 (The Theologyn of John Calvin)>이라는 그의 저서를 살펴보면 이러한 신학의 깊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칼빈이라는 16세기 신학자를 연구하기 위해서 표면에 드러난 16세기 신학을 고찰하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심층에 자리 잡은 중세 로마 가톨릭 신학으로 파고 들어간다. 이 책의 대부분이 오히려 중세 로마교에 할애된다. 그렇지만 그 깊은 곳에서 그는 칼빈 신학의 핵심을 찾고자 노력한다. 여기에 바르트 신학의 두 번째 특징이 드러난다. 셋째, 바르트 신학이 지닌 독창성이다. 그의 신학의 독창성은 바르트를 바르트로 만들었으며 바르트의 신학을 20세기 신학의 최고봉위에 올려 놓았다. 그는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신학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창적 신학, 그야말로 '바르트의' 신학을 구현했다. 그렇다면 그의 신학의 독창성은 무엇인가? 이 독창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집중에서 출발하고 종결된다. 그는 1909년에 스위스의 작은 마을 자펜빌이라는 곳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했는데, 얼마가지 않아 자신의 설교가 전혀 그의 청중들에게 다가가지 않으며 호소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뼈아픈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신학이 인본주의의 신학이었으며 하나님을 놓친 신학이라는 엄청난 현실을 깨닫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간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몸부림치게 된다. 이 몸부림의 결과로 주어지게 된 것이 바로 1919년에 발행한 <로마서주석>이었다. 이 책은 즉시 유럽의 신학계를 뒤흔들었으며, 이 책 한권으로 그는 괴팅겐의 교수로 초빙받게 된다. 엄청난 반향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말씀을 향한 그의 관심과 열정이 결국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 세상을 완전히 초월하신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는 사실상 정통교회가 지금까지 수 천년 동안 추구해 온 신학의 본질중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것을 몰랐던 것일까? 그는 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알았던 것이 자신의 목회적 삶에 반영되지도, 이를 지배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지닌 엄청난 영향력이 잘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신학이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지니게 되었고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선 것이다. 여기에 그의 신학이 지닌 세 번째 특징이 발견된다. 

  

2. 바르트의 신학이 매력적인 이유

  

흔히 20세기는 바르트의 세기이었다고 말한다. 바르트는 20세기를 풍미한 20세기의 신학자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신학이 지닌 종교개혁적 뿌리를 찾아내었고 다시금 정통주의 신학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의 신학은 또한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불리워진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 1914년에 1차 대전이 발발했으며 이는 유럽과 전세계에 걸쳐 엄청난 공포감과 위기감을 조성했다. 그의 신학은 이러한 시대적 위기의식 속에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무능한 신학이며 직면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는 신학임을 직시한데서 비롯되는 신학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바르트의 신학은 위기의 신학으로 불리워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련의 객관적 사실들이 그의 신학을 매력적인 신학으로 만드는가? 아니면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의 신학이 지닌 방대함, 깊이, 그리고 독창성이 그의 신학을 매력적인 신학으로 만드는가? 여기에 대한 답을 필자는 나름대로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그의 신학이 지닌 매력은 헤겔의 변증법에 근거를 둔 변증법적 차원에서 비롯된다. 이는 이미 종교개혁자 루터의 신학에도 어느 정도 발견되는 신학방법론에 해당되지만, 바르트는 이를 전적으로 승화시켜서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론으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는 신학에서 건전한 균형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충분하게 탐지하고 있는 신학자이었다. 신학은 긴장 속에서 탄생하고 균형을 통해서 완성된다. 신학은 어떤 한 종류의 신학적 흐름이 등장하고 이렇게 등장한 흐름이 또 다른 종류의 신학적 흐름에 의해서 자신의 위치가 지닌 정당성이 평가받는 구도 속에서 흘러간다.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 위기의 신학, 말씀의 신학에 내재된 능력을 활용하여 자신보다 시대적으로 앞섰으며 자신의 신학 형성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자유주의 신학, 인본주의 신학을 여지없이 부인하고 이와 결별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신학방법론을 세워나갔다. 이는 철두철미하게 변증법적 신학의 흐름에 관한 것이다. 또한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도 그의 신학은 변증법적이다. 바르트는 자신의 계시론과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지닌 양면성, 즉 신성과 인성을 변증법적으로 전개하면서 신학에서의 긴장과 균형을 유지해 나가는 독특한 신학적 방법론을 취했고 이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방법이 되었다. 둘째로 그의 신학이 지닌 매력은 그의 신학이 지닌 활력에서 비롯된다. 아마도 '활력'이라는 단어가 그의 신학이 지닌 진정한 멋과 매력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는 단어일 수 있다. 그러나 바르트의 신학에는 다른 신학이 지니지 못한 살아있는 기운이 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계몽주의의 산물로서 합리적인 신학이며 인간이 지닌 능력을 극대화하고 이를 찬양하는 반신본주의적 신학이다. 이는 사실상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정을 상실한 맥빠진 신학이다. 하나님을 지향하고, 그를 추구함에서 비롯되는 피조물의 피조물됨에서 비롯되는 뜨거움과 에너지를 상실한 신학이다. 이성을 지니고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은 이미 진화의 최고 단계에 도달한 존재이며 사실상 하나님을 논하나 그의 실제적 도움을 부인하는 신학이다. 이런 신학에는 만물의 주인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어떤 열정도 발견되지 않는다. 설사 있다하더라도 이는 다 식어버린 열정아닌 열정에 불과한 것이다. 바르트는 이런 신학적 분위기 속에서 탈피하고 이를 철저하게 부인하는 가운데 자신의 신학이 살아있고 활기를 지녀야 할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찾은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금 공부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갈망했던 신학의 뜨거움을 비로소 회복하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이제 과거에 그가 발견하지 못했던 모든 것을 초월하는 놀라운 신적 확신이 나타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학이 그가 발견한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면 그것이 비록 반복되는 차원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저돌적인 차원을 지니게 된 것이다. 여기에 바르트 신학의 놀라운 매력이 발견된다. 그의 신학에는 야성미가 넘쳐난다. 마치 먹이를 놓치지 않고 추격하는 사자의 질풍노도와 같은 맹렬함이 그의 신학에서 발견된다. 그는 칼빈의 신학을 원시림에 비유했지만, 바로 자신의 신학에 다른 신학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신선함으로 가득찬 신학의 바람이 불어온다. 여기에 바르트 신학의 놀라운 매력이 숨겨져 있다. 저돌성, 야성미, 신선함, 이 단어들은 비록 바르트 자신이 사용한 단어들이 아니지만, 그의 신학이 지닌 놀라운 매력을 묘사하기에 어느 정도 유용한 개념들을 묘사하는 단어들이다. 바르트의 신학을 대할 때 인간에 의해 채색되지 아니한 원래 그대로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독자들을 매료시킨 그의 신학이 지닌 놀라운 힘의 원천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3. 바르트 신학의 비개혁주의적 모습

  

지금까지 우리는 바르트 신학의 긍정적인 단면들을 살펴보았다. 바르트 신학은 많은 장점들을 지닌 신학이다.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한 독창성을 지닌 신학이며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킨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신학이다. 

  

그렇다면 그의 신학은 과연 얼마나 개혁주의적인 신학인가? C. VanTil을 위시한 몇몇 신학자들은 그의 신학을 바르트주의로, 즉 기독교에 대항하는 새로운 종교로까지 폄하하기도 한다. 이들의 주장에는 바르트가 사실상 정통적 기독교의 신학을 변모시켜 자기 나름대로의 새로운 신학을 구상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강조는 사실상 그가 인간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 즉 내재의 가능성이 완전히 상실된 신학을 추구하도록 만드는데 이는 신학적 딜레마를 구성한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바르트가 제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접촉점이며 이 접촉점은 전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어서 믿음이라는 도약대를 사용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문제는 여기에서 드러난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게 거의 자동적으로 믿음을 제공한다는 것인데 이는 결국 인간이 지녀야 할 믿음을 사실상 자의식에 근거한 인식으로 정의하도록 만든다. 이는 사실상 개혁주의 신학이 가르치는 믿음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G. C. Berkouwer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바르트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므로 거기에 상응하는 인간의 반응이란 사실상 없는 것이다. 인간의 역할을 최소화되어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신 것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식하는 정도에 머무른다. 바르트의 믿음에 관한 이러한 이해는 요한 칼빈이 내세운 성령론적 특징을 지닌 믿음의 정의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칼빈은 믿음을 인간 내면에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파악한다. 그에게 믿음이란 성령의 인치심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호의를 그리스도 안에서 확신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를 차이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바르트에게 믿음이란 성령론적 역할이 최소화되거나 극소화된 상태에서 단지 인간의 인식 작용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 가리키지만 개혁신학은 인간 마음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주어져서 인간이 실존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확신을 강조한다. 이러한 확신이 없는 믿음은 정상적인 믿음이 아니다. 바르트가 말하는 믿음이란 칼빈과 개혁신학에 있어서 하나의 견해이며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 칼빈에게 믿음은 견해와 인식을 포함하지만 이를 넘어서는 놀라운 지식이자 확신이다. 이러한 확신의 배경에는 성령 하나님을 위시한 삼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함께 한다. 바르트는 이 점에 있어서 자신이 가장 극찬하고 따랐던 칼빈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의 신학에 나타난 비개혁주의적 신학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것은 바르트 신학의 주변부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다. 하나님을 인간을 전적으로 초월한 존재이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나타나신다. 바르트에게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해당된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사실상 바르트는 개혁신학의 진수에서 이탈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물론 하나님의 초월 또는 불가완해성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의 현현 가능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내주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믿음을 받아들인다. 비록 이 믿음이 그 자체로서는 도구에 불과하지만, 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주어질 때 이것이 더 이상 어떤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것이 된다. 이는 인간의 논리적 사고나 능력으로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 그래서 구원의 핵심 사안인 칭의도 성화도 결국 믿음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 점에 있어서 한스 큉이 <Justification, Rechtfertigung>이라는 책에서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사실상 개혁신학의 전통적 이해를 저버리고 오히려 가톨릭의 이해에 더 가까운 견해를 택하게 되었다. 이 점에 있어서 바르트는 비개혁주의적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비성경적인 견해를 지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바르트주의는 개혁신학의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II. 바르트 (1886-1968) 신학의 발전 단계

  

(1) 첫 번째 단계는 리츨 (Albrecht Ritschl), 헤르만 (Wilhlem Herrmann), 그리고 하르낙 (Adolf von Harnack)의 영향을 받아 19세기 자유주의의 틀 속에 갇혀 있던 시기로서 1917년까지의 시기에 해당된다. 주로 신칸트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헤겔의 정반합의 원리를 비롯한 철학적 원리를 수용하였던 시기로서 사실상 그의 신학은 사회주의적 자유주의 (social liberalism)를 지향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신학적 성향은 그를 당대의 신학자들로부터 차별화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2) 두 번째 단계는 덴마크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의 영향 아래 신적 계시와 인간적 실존이라는 두 가지 강조점에 의하여 사상이 발전하는 시기이며 또한 이로부터 탈피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하는 시기에 해당된다. 이는 1917년부터 1929년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이 기간 동안 바르트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 그의 사랑과 자비라는 신학적 주제들을 섭렵하는 가운데 신적 계시의 인간 실존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기였으며 이는 구체적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변증법적 방법론이 도출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아직 체계적 신학의 토대를 형성하지 못한 시기로 보인다. 1927년에 <괴팅겐 교의학>으로 알려진 <기독교 교의학> (Christian Dogmatics)을 집필하였으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스스로가 벗어나려고 하였던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신학의 형태, 인간적 철학에 의하여 신학이 형성되었음을 깨닫고 이를 탈피하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첫 번째 교의학적 작품을 찢어버리고 만다. 

  

(3)세 번째 단계는 바르트가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탈피하여 자기 자신만의 신학적 방법론을 찾아 나선 시기로 안셀름의 방법론, 즉 이성으로서의 신학이라는 방법론으로부터 탈피하기 시작하였던 시기이었다. 1930년부터 자신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로 1932년에 <교회교의학> (Church Dogmatics, 전 14권) 제 1권에 대한 집필이 시작되어 1959년에 완성되어졌다. 또한 에밀 부루너 (Emil Brunner)의 인격주의 (personalism)를 비판하고 이를 부인하였다. 

  

상대적으로 긴 기간을 총괄하는 이 세 번째 단계는 또 2개의 세부 단계로 나뉘어질 수 있다. 1930년부터 1949년까지가 그 첫 번째 단계로 바르트는 자신의 Geschichte, 즉 해석되어진 역사 개념을 내세웠다. 이는 믿음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계시를 통한 현재적 만남의 장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0년부터 Geschichte에 있어서 객관화시키는 요소들에 열중하기 시작하였다. 이 요소들은 Historie, 즉 사실로서의 역사는 아직 아니었다. 이 Historie 개념을 통해 일시적 역사, 인간의 역사, 과거에 발생하였던 객관적 역사를 뜻하였다. 이 시기에 등장한 “객관화시키는 요소들”이라는 개념이 그가 주장해 온 신적 계시의 객관적 차원의 부인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는 그가 불트만을 비롯한 실존주의 신학의 주관적 체험 강조로 인하여 일어나게 될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차원이었으며 이를 통하여 사실상 실존주의적 신학으로부터 벗어나서 독자적 행보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 세 단계는 더욱 요약적으로 전 실존주의적 (pre-existentialistic) 단계, 실존주의적 단계 (existentialistic) 단계, 후 실존주의적 (post-existentialistic) 단계로 구분되기도 한다. 

  

III. 신학적 방법론

  

바르트의 신학은 모든 철학의 영향으로 탈피하여 순수한 말씀의 신학을 전개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불행스럽게도 그는 몇 가지 첫 번째 원리들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원칙들이 때로는 성경과 대립되었을 뿐 아니라 많은 경우에 그 원리 자체들과 서로 충돌하는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방법론은 다음과 같은 4가지 단계를 채용하고 있다. 

  

(1) 특정한 철학적-신학적 전제조건들 (presuppositions)을 취한다.

(2) 이 전제조건들로부터 특정한 논리적 추론들 (inferences)을 이끌어낸다. 

(3) 이 전제조건들과 이에 근거한 추론들을 성경의 주해에 적용하고 이들을 수단으로 하여 성경을 해석한다.

(4) 이러한 적용과 해석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지 않을 경우가 있음을 (약간 거리낌이 있지만) 인정한다. 

  

IV. 바르트 신학의 기본적 전제조건들

  

1. 하나님은 전적으로 초월적이시다. 

그는 이 중요한 전제조건을 자신의 <로마서 주석>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나의 신학에 만약 체계가 있다면 그것은 키에르케고르 (Kierkegaard)이 시간 

영원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 (inifinite qualitative distinction)라고 불렀던 것에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를 부정적이면서도 또한 긍정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본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그대는 이 땅 위에 존재한다.” 이러한 하나님과 그러한 사람 사이의 관계, 이러한 사람과 그러한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나에게 성경의 주제이며 철학의 핵심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전적 타자이시며 이러한 과격한 초월은 그의 모든 면에서 발견된다: 그의 정체, 그의 본질, 그리고 그의 속성.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인간은 유한하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인간은 죄인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무한하며 결코 그 무엇으로도 채울수 없는 엄청난 틈 (chasm)이 가로막고 있다. 이 틈은 사실상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초월하는 틈이라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2. 하나님은 합리적으로 불가해적 (inapprehensible)이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이러한 불연속성 (discontinuity)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든 간에 이는 늘 모순 (paradox)과 충돌 (contradiction)로 가득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결코 합리적으로 알려지지 않으며 단지 실존적으로 알려질 따름이다.

  

3. 하나님은 절대주권적 (sovereign)이시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면에 있어서 피조세계로부터 자유로우시며 이보다 위에 존재하신다. 그는 자신의 존재나 작정, 그리고 그의 사역, 더 나아가서 계시된 진리의 어떤 체계에 의하여 제한되거나 얽매이지 않으신다. 

  

4. 하나님은 항상 주체이시지 결코 객체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아시며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인격체로서 당신이시다. 결코 비인격적이시거나 객관적 그 무엇이 아니시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되 마치 인격체가 다른 인격체를 아는 것처럼 알 수 있으며 결코 사람이 어떤 사물을 알듯이 알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항상 주체로서 아시는 것이지 객체로서 아시는 것이 아니다. 

  

5. 하나님의 계시는 그리스도 일원론적 (christomonistic)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자연 속에서도 인간 속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성경 속에서도 아니며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계시이며 실제로 계시는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바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 (self-revelation)란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지 결코 자신, 또는 자신에 관하여 어떠한 객관적인 형태로 명제들을 통하여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은 결코 계시의 내용으로서 객관화되지 않으며 그리스도라는 주체로서 여전히 남아있게 된다. 

  

6. 계시는 해석된 역사 (Geschichte)에 해당된다. 

계시가 사실로서의 역사 (Historie) 속으로 들어가지만 이는 항상 현재적 만남이라는 해석된 역사 속에서 숨은 채로 존재한다. 그 이유는 합리적으로 이해되어질 수 없는 초월자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 바로 그 행위에 의하여 숨겨지신다. “해석된 역사는 사실로서의 역사로서의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사실로서의 역사는 해석되어진 역사로서의 측면을 포함하지 않는다. (Gechicte ist historisch, aber Historie ist nicht geschichtlich.)”라는 바르트의 표현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바르트에게 Historiedp 존재하는 역사적 예수를 논하는 것은 이미 폐기된 것을 논하는 것과 같은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철학과 과학은 Geschichte 속에 숨어계신 그리스도라는 계시를 결코 발견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는 계시가 전적으로 신학의 영역에 속해 있다는 바르트의 확신을 잘 반영하고 있다. 

  

7. 진리는 계시적 만남을 통하여 주어진다. 

진리는 계시되어진 명제들, 또는 하나님에 대한 주장이나 설명에 의하여 발견되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는 그 자체로서 만남 (encounter)이다. 참된 진리는 인격적이며 변화를 불러일으키며 실존적이다. 그 이유는 초월적 하나님에 대하여는 어떠한 지적 명제들이 형성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 따라서 삶에 변화가 없는 진리는 있을 수 없음을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사고는 실존주의적 사고와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8. 믿음이란 계시에 대한 비합리적 반응이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은 영원으로부터 돌출하여 시간 속으로 들어오시며 우리를 만나신다.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우리에게 믿음의 결정을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은 이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이는 기독교의 믿음이 이성보다 우위에 있으며 때로는 이성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9. 성경은 신적 계시에 대한 인간의 증거들이다. 

성경은 신적 계시를 경험함에 대한 인간의 반응과 초월적 하나님에 대한 경험들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성경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그의 말씀이다.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말이다. 성경에 대하여 바르트는 “성경이 실수할 수 있으며 또한 실제로 모든 말씀에 있어서 실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오하며 실수투성이인 인간의 말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다.”고 밝혔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기록하려는 시도 자체가 하나님을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객체로 바꾸는 것이므로 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며 성경은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10. 성경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바로 그리스도이다. 

계시가 그리스도이며 성경은 이 계시에 대한 증거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성경과 신학의 유일한 주제라는 그리스도 중심론적 이해를 펼친다. 모든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 결정적인 원칙, 그리고 더 나아가서 모든 신학의 출발점, 그리고 목표는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따라서 신학은 그 모든 분야에 있어서 기독론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 vs. 그리스도 일원론적 신학). 이는 자신의 <교회교의학>의 구도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철학적 원칙을 배제하려고 한 그의 의도는 서론의 필요성을 부인하도록 이끌었을 뿐 아니라 신론 또한 기독론적 시각에서 구성하였다는 점에 있어서 독특하다. 창조론 또한 기독론적으로 재해석되어 창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은 언약의 외적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마지막으로 화해론 (the doctrine of reconciliation, Die Lehre vom Versöhnung)의 주체는 성령 하나님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인데 그를 화해자로 묘사하는 가운데 화해의 본질과 성격, 그리고 그 종말론적 의미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 이는 칼빈이 구원론의 주체를 사실상 성령으로 이해하고 이를 자신의 <기독교 강요> 제 3권의 중심 주제로 부상시킨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V. 바르트의 신학적 위치 

  

긍 정 (Affirmed)                                             부 정 (Denied)

  

1.삼위일체론                                                    1.객관적 계시의 가능성

2.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죄의 필연성                     2.일반계시 

3.인간 타락과 원죄                                              3.하나님과 진리의 계시로서의 성경

4.모든 인류의 죄성                                              4.성경의 무오성

5.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5.성경의 최종적 권위

6.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참된 인성                          6.아담의 역사성

7.성육신                                                            7.타락의 역사성

8.동정녀 탄생                                                      8.기적의 역사성

9.그리스도의 부활                                                 9.그리스도의 무죄성

10.그리스도의 승천                                              10.그리스도의 부활이 지닌 역사적 성격

11.죄 용서                                                         11.이 세상 후의 삶

은혜를 통한 이신칭의                                             몸의 육체적 부활과 영생

    

VI. 신적 계시에 대한 증거로서의 성경

  

바르트의 성경에 대한 설명은 크게 나누어서 다음의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신적 계시에 대한 증거로서의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여기에 해당된다. 

먼저 신적 계시에 대한 증거로서의 성경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바르트에게 ‘증거’ (witness)라는 단어는 사실상 일종의 ‘제한’ (limitation)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계시에 대한 증거라고 부를 때는 성경과 계시 사이에 그런 간격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증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증거는 그것이 증거하는 바와 절대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니다. ... 성경에서 우리는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인간의 말들을 대하게 되며 이러한 말들과 그 리고 이 말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주권자이신 삼위 하나님의 음성을 뜯게 된 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 자체로서는 계시가 아닌 이러한 수단들, 이 말들, 즉 이 증거와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이것이 바로 제한에 해당된다. 

  

그러나 증거가 이렇게 부정적인 차원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증거는 그 자체로서 계시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 바르트는 이 측면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제한 가운데 성경은 계시로부터 구분되지 아니한다. 성경은 단순히 계시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으로서 이는 매개체적이며 그 결과 계시를 우리들에게 적응시킨다. ... 그러나 선지자와 사도들의 말을 통한 계시는 우리를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하여 지금도 살아서 우리로 하여금 계시의 직접적인 수용자가 되도록 만들며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실제적 증거는 증거하는 바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그 증거하는 바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 만약 우리가 정말로 성경의 언어들을 그 인간성 (humanity) 속에서 듣는다면, 만약 우리가 이를 증거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분명히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들었음을 의미할 뿐 아니라, 이 수단을 통하여 증거가 우리에게 실제적 임재와 사건이 되었음을 뜻한다. 

 

증거는 이런 수단들을 통하여, 그리고 우리가 이를 올바르게 듣고 수용한다면 증거의 부정적인 요소인 ‘제한’이 극복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증거 되어지는 것의 실제적 임재를 체험할 수 있음을 뜻한다. 즉 증거는 이중적 기능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계시에 대한 증거는 단순히, 그리고 곧 바로 계시 자체와 동일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증거는 계시로부터 구분되는 독특성 (distinctness)을 지니고 있음에 동시에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 (unity)을 지니고 있다. 이 통일성은 계시가 증거와 동 떨어진 채 들려지거나 이해될 수 없음과 관련된 것이다. 육신을 덧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거나 듣지 못한 우리는, 성경의 증거 없이는 이 계시에 관해서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바르트는 그가 사용하는 ‘증거’라는 단어를 신약 성경의 사도성 (apostolate)과 연관시킨다 .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우심을 받은 자들이며 (막 3:14), 그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정한 사람들을 사도들이 되도록 하셨던 것이다 (엡 4:11). 이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으며 (눅 10:16) 또한 그들이 받은 특별 계시를 잘 알고 있었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도 동일한 개념이 적용되었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구약 성경의 성취라고 주장했던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고 바르트는 보았다. 예수께서 처음 등장하신 날이 곧 성경이 성취되는 날이었다 (눅 4:21). 구약의 선지자들이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이었으며 그들의 증거는 기대 (expectation)에 대한 증거이었다고 한다면, 신약의 사도들은 이미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이며 따라서 그들의 증거는 회상 (recollection)의 증거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의 이런 차이가 큰 것임에도 불구하고 양자에서 드러난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라는 고유한 통일성은 더욱 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라는 차원에서 성경 저자들이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가 드러난다. 바르트는 성경 저자들의 이러한 독특성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는 이들의 독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계시에 관한 세 가지 특정한 시기(time)를 언급한다. 첫째, 하나님 자신이 직접적이며 원천적인 언급을 통하여 계시하신 때를 들 수 있다. 원래 계시가 주어졌던 시기를 가리키는데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계시도 포함된다. 둘째, 이 계시에 대하여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그 받은 바를 증거하는 시기를 생각할 수 있다. 셋째는 교회의 시기로 주어진 계시에 대한 증거를 기초로 선포하는 시기이며 이 선포는 선지자와 사도들의 말씀에 의해 통제된다. 여기에 이들의 독특성이 드러난다. 즉 그들은 우리들과 똑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증인으로서 그들의 직분은 교회에 있어서 전적으로 독특한 것이었다. 그들 이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들의 증거인 성경을 통해서만 계시에 연관될 수 있다. 성경저자들의 독특성뿐만 아니라 성경적 증거의 독특한 위치도 여기에서 확인된다. 성경 저자와 성경은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단지 이들을 통해서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계시에 접근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왜 바르트가 증거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제한의 개념을 이렇게 강조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르트의 계시 개념에서 발견될 수 있다. 먼저 그는 “계시는 항상 사건 (event, Ereignis)이다.”라는 명제를 내세운다. 이 명제는 증거라는 개념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개념에도 바르트는 성경과 증거를 날카롭게 구분한다. 성경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과거 계시는 아니다. 단지 성경은 하나님의 과거 계시를 인증한다 (attest). 여기에서 ‘인증하다, 증명하다’(attest)라는 단어는 결정적인 구별 (distinction)을 포함한다. 인증한다는 것은 항상 그 자체를 넘어서 다른 것을 지향하는 결정적 방향성을 뜻한다. 성경적 증거의 기능은 그 자체를 완전히 떠나서 완전히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과 계시 사이에 직접적 일치(identification)라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르트의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치를 기대하거나 가정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이러한 일치는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시는 사건에 해당된다. 이는 계시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임을 뜻한다. 따라서 바르트는 계시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단지 하나의 직접적 계시만이 있을 뿐인데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의 계시를 뜻한다. 그 분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그가 내세우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Deus dixit)의 의미이다. 따라서 성경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를 요한복음 5장에 나타난 베데스다 연못의 물과 비교한다. 이 물은 그 자체로서 어떠한 치유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위로 들려 올려 졌을 때 그러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이는 항상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때때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러한 “때때로” (from time to time)의 진리가 성경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는 인간 경험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 (freedom of God's grace)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하나님은 그의 계시에 있어서 항상 주권자로 작용하신다. 이는 항상 그의 계시이며 결코 인간의 소유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르트의 계시 개념에 제한성의 개념을 설명하는 또 다른 측면이 존재한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언어에 나타난 세속성 (worldliness)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용어는 하나님의 계시는 이 세상에 속하거나 이 세상에서 도출된 형태로 항상 인간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는 사실상 “하나님의 자기 표현으로 적합한 형태가 아니라 부적합한 수단에 해당된다. 이는 그 내용에 걸맞지 않지만 이와 대립된다. 이는 그 내용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감춘다.” 하나님의 말씀은 피조 세계의 언어로 다가올 뿐 아니라 타락한 피조 세계의 언어로 다가온다. 따라서 여기에는 이중적 간접성 (twofold indirectness)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피조성의 형태와 타락한 피조성의 형태로 다가온다. 그가 주장하는 계시의 세속성이라는 개념에는 그가 주장하는 변증법적 (dialectical) 요소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르트는 이 계시의 언어가 지닌 세속성이 우리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해 있으며 핵심적으로 우리는 세속적이라고 때문이라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런 세속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에게 전혀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표현까지도 서슴없이 사용한다: “그의 말씀의 세속성에 도달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 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불행한 방해물에 의하여 우리에게 가리워져 있으며 그 후에 이러한 방해물을 제거함으로서 자신을 드러내었다”고 생각해서 아니된다고 주장한다. 진실은 오히려 하나님 스스로가 자신을 가리웠으며 이렇게 스스로를 가리는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여기에도 바르트가 말하는 소위 ‘변증법적’ 사고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이 사실들은 순수한 사랑과 자비를 뜻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려워지지 않음 (unveiledness)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 곧 모든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바르트는 믿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리움이라는 상태에서 주어지는 것이 세속성이라고 바르트는 해석한다. 따라서 바르트는 “이러한 세속성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측면에서 은혜의 말씀이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왜 바르트가 ‘증거’라는 개념을 강하게 주장하는 이유를 다음의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그의 의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를 더 강조하고 이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계시가 증거라는 차원을 통해 부여받은 세속성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고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해석하였다. 둘째, 그는 계시가 하나님의 행위이기만을 바랐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사실상 그는 증거에 세속성을 부여한다. 셋째, 그는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소유하고 처분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오만 (hubris)의 경우와 이와 관련된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하여 ‘증거’를 중요시한다. 즉 그가 이를 중요시하는 동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르트가 주장하는 계시는 단지 하나 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계시. 단지 그 분 안에서 우리는 직접적 계시를 지니게 된다: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Deus praesens).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라는 표현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시간이 되셨음을 뜻하는 것이다:󰡒말씀이 시간이 되셨다.” 말씀이 성육신하신 시간은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적 시간과 관련된 것이며 역사적 시간의 일부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시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육신을 덧입으신 시간, 즉 그의 생애에 해당된다. 이는 사실상 시간의 주인이신 분의 시간이며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이는 실제적이며 성취된 시간에 해당된다. 이 시간은 확실하게 그 이전의 시간 (pre-time)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앞서 언급된 계시의 기대에 대한 증거와 관련된 시간인데 곧 구약의 시기에 해당된다. 이 이전의 시간이 바로 성취의 시간에 속하며 이는 사실상 성취의 시간과 병행하지만 이에 종속되기도 한다. 이는 또한 계시의 시간이라고 불리워질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진정한 기대는 계시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취된 시간은 확정된 시간으로 연결된다. 이 시간이 바로 계시의 회상의 증거에 대한 시간이며 신약의 시기에 해당된다. 이 시간 또한 성취의 시간에 속한다. 그러나 이 시간은 앞서 언급된 그의 생애에 해당되는 계시의 시간임이 분명하지만 바르트는 여기에서 더욱 신중을 기한다. 계시의 시간을 더욱 축소하여 그의 부활 이후의 40일이라는 기간으로 제한시킨다. 이 시기는 시간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원한 현존을 가리킨다. 이 시기가 바로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순수한 현존’에 해당되는 시간이다. 이는 종말의 실존이 현실화되는 시간이며 또한 새로운 종말론적 기대가 시작되는 시간에 해당된다. 그래서 바르트는 “우리는 그의 계시를 우리 이전에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를 우리 이전에 지니고 있으므로 또한 우리는 이를 우리 앞의 시간에 지니고 있다.”라고 밝힌다.

   

VII.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바르트는 앞서 언급되어진 계시의 증거로서의 결과물인 성경이 전적으로 인간적인 책이며 더 정확하게 이는 이스라엘 정신의 산물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이는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뜻한다. 즉 무오한(infallible) 하나님의 말씀이 유오한 (fallible)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성경에 유오성 (fallibility)을 인정하면서 고등비평 (higher criticism)을 수용한다. 그렇지만 그가 모든 종류의 성경 고등비평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다. 그는 19세기 성경비평 이면에 존재하였던 개념들을 비판하였고 이들이 성경 본문 뒤에 숨어있는 소위 ‘이면의 본문’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즉 이들의 주장은 우리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성경 이면에 가상적인 정경이 따로 존재하였음을 인정하고 이를 찾아 나서는 것이 그들이 지닌 사고이었다. 이를 통하여 사실상 성경 내에 존재하는 본문과 본문이 의도하는 주제와의 연결고리가 무너져 내리게 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성경비평가들이 본문을 연구하면서 추구하게 된 것은 숨겨져 있는 본문이며 이를 찾아내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성경 본문과 그 본문이 지닌 내용을 상실하게 된 셈이며 이는 결국 신학을 상실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이런 상황에서 바르트가 의도하는 바는 성경이 어떤 측면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답하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 “우리는 교회와 함께 신적 계시에 대한 원천적이며 적법한 증거로서의 성경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선언이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였던 축자적 영감설 (verbal inspiration)과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르트가 이 영감설을 두드러지게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교리는 영감 교리에 관한 것이며 교회는 이러한 견해를 지지할 수 없다고 밝힌다. 

  

이러한 축자적 영감설에 대한 부인은 바르트가 계시에 대한 이중적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계시에 대한 이중적 개념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지 아니한다. 성경에는 신적 측면과 이에서 비롯된 사고와인간적 측면이 공존하고 있으므로 이 두 가지 측면은 반드시 구별되어야하며 이러한 구별을 구체화하여 성경의 어떤 부분이 신적이며 어떤 부분이 인간적인가를 가려내는 것이 신학자의 임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러한 ‘수평적’ 사고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형식 (증거)로부터 그 내용 (계시)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성경을 배우려는 모든 사람들이 성경의 본문에 집중해야 함을 뜻한다: “우리는 성경의 본문에 매달려야 한다. 이 본문에 확증된 기대와 회상에 순복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계시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내용과 형식, 계시와 증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은 구별이 불가능한 것이다. 바르트는 이를 ‘간접적 동일성’ (indirect identity)이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간접적이라는 형용사는 어떤 경우에도 그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형용사로 결코 대체되어서는 아니된다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도 직접적 동일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동일성은 가정된 동일성이며 이러한 동일성은 성경 본문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만약 이런 동일성이 존재한다면 이는 신적 계시를 변질(transmutation)시키는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성이 존재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본문들을 통해서 그리고 단지 이 본문들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오로지 성경에서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대할 수 있다. 그가 말씀하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므로 우리는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이 기도는 그의 신실하심을 믿는 태도 가운데 행해져야 한다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은 간접적 동일성을 직접적 동일성으로 대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수평적 이중론 (horizontal dualism)를 거부하고 어떤 주장을 전개하였는가? 이는 수직적 이중론 (vertical dualism)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적 측면과 인간적인 측면이 성경에 나란히 존재하고 있다는 이중론을 부인하고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을 날카롭게 대립시킨다. 인간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으며 이런 차원에 있어서 인간의 말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그러나 바르트의 이러한 주장은 다음의 두 가지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는 지적인 차원에 관한 것으로 인식론과 관련된 질문에 해당된다. 만약 성경이 직접적 동일성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가정 아래, 인간의 말이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들려지는 인간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인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하여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세 가지 형태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의 실재성은 그 자체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 의해 획득되는 이에 관한 지식도 이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가능한 것이며 이 인식은 말씀 자체를 통해서 실제화 될 수 있으며 우리가 이 자체로부터 시작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바르트가 이 인용문에서 의도하는 바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자연적 인식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음을 뜻한다. 즉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어떠한 접촉점 (point of contact)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를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즉 계시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인간 능력 이외의 일이며 이는 하나님 편에 그 우선순위가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 편에서 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셔야 가능함을 뜻한다. 계시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행위이며 이 계시를 증거를 통해서 듣게 되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말씀을 통하여 이 들음 (hearing)을 조성하실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밝힌다. 이것이 의도하는 바는 계시를 듣는 것이 바로 ‘믿음의 사건’임을 깨닫게 하는 데 놓여 있다. 믿음이란 인간 편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스스로를 열어 놓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는 이러한 열려 있음에 그 이상도 아니지만 그 이하도 결코 아니다. 진정한 열려 있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조성되며 이는 진정한 이해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즉 진정한 이해는 진정한 열려 있음의 결과에 해당된다. 

  

수직적 이중론과 관련된 두 번째 질문은 존재론적인 것이다. 만약 성경이 그 자체로서 계시에 대한 증거로서 인간적이며 유오한 것이라면, 어떻게 바르트가 여전히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다른 인간의 글들에 비교해서 성경이 지니고 있는 우선성 (priority)에서 시작한다. 이러한 우선성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님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하시는 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에 등장한 동일성 (즉,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결코 존재론적 동일성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지 신앙을 통해서 부여된 동일성을 뜻한다. 즉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믿음이라는 상호연관성 속에 주어진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바르트의 주장은 사실상 믿음에서 비롯된 선언이며 여기에는 종교개혁자들이 지녔던 직접성 동일성의 차원이 결여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바르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최종적 판단자가 인간의 믿음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의 믿음과는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믿음은 단지 성경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진리를 발견하는데 그 기능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불신 때문에 성경의 이러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유에 의해서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바르트는 선언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바르트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르트의 강조점은 동사 “다가오신다”의 시제에 놓여 있다. 이는 지금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즉 성경의 영감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금 현재 다가온다. 이러한 현실성은 바로 성경의 구체성 (concreteness)으로 그 모습을 드러나게 된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