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을 깨달아라.
고린도후서 5장15-17절/이찬수목사
➤“10. 우리가 반드시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니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 11. 그런즉 우리가 [주]의 두려움을 알므로 사람들을 설득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께 밝히 드러났고 또 너희 양심에도 밝히 드러난 줄로 나는 확신하노라.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우리 자신을 추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리를 대신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노니 이것은 마음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인가 대답하게 하려 함이라.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그것은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이라. 우리가 이같이 판단하노니 곧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으면 모든 사람이 죽었느니라. 15.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16.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아무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니 참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분을 더 이상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0-17 KJV)
지난 주 시편 49편 19-20절 말씀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9. 그가 자기 조상들의 세대에게로 가리니 그들이 결코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20. 존귀함 가운데 거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
그 19절에 보면 그 부연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존귀는 [빛]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이 세상의 이러한 권세가 죽음 앞에서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부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12장16절부터 나옵니다. 그 모습이 시편 49편20절에 나오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2장 20-21절에 하나님이 경고하십니다. ➤“20.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 어리석은 자여, 이 밤에 네게서 네 혼을 요구하리니 그러면 네가 예비한 그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해 부요하지 못한 자는 이와 같으니라, 하시니라.”
결국 죽음은 이 땅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그리고 제 주변에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사시는 크리스찬 분들도 많습니다. 가평 우리 마을의 경우에도 많은 전문가들이 준비하고 있는데, 이 가평우리마을은 신실한 두 가정에 의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연로하신 권사님이 평생 일구어 놓으신 재산을 맡기고 가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못 받겠다고 2년을 싸웠습니다. 이분 아드님의 사업이 어려운데도 마음이 흔들릴까봐 와서 그냥 통장하고 던져놓고 가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바로 다른 분이 가평의 땅을 헌신 하셨어요.
어리석은 부자의 관점으로 봤을 때 이분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을 못하잖아요. 그래서 불면증으로 잠을 못 이루고, 가평 우리 마을이 열리면 하나님 안에서 두분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죽음에 대한 바울의 자세를 보세요.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로 인한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하고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이 단순한 인격의 변화를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에 보면 죽는 것도 이득(利得)이라고 고백합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따라 내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나니 21.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利得)이니라.”
그리고 바울은 죽음을 초월하였다고 고백합니다.
단지 사명이 있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더 사셔야 합니까?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누리기 위해서 사십니까? 이런 면에서 바울이 정말 부럽습니다. 바울은 이 땅의 죽음을 텐트를 거둔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사명을 다 하면 그 텐트 걷고 하늘나라로 간다고, 우리도 이땅의 마무리를 텐트를 걷어치우듯 이 땅에서 소풍처럼 잘 살았다. 하고 걷고 일어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울의 죽음관은 이런 맥락에서 본문을 보면 고린도전서 15장에서도 바울은 “죽노라” 하고 고백하는데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8절에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죽음에 연연하지 않는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하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본 어떤 사람은 살아있고 어떤 사람은 잔다고 하지 않습니까? ➤로마서 8장18절의 고백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생각하건대 이 현 시대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
왜 여러분은 맨날 “죽겠다. 죽겠다” 하십니까? 바울같이 살고 싶으시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요. 저도 영적으로 다마서커스 길에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해주세요. 하고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깨닫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와 예수그리스도를 깨달으면 나타나는 혁명은 이렇게 나타납니다.
1. 나 중심의 삶을 내려놓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15절에 직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오는데요. 이 진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전히 나 중심, 교회 안에서 싸움하고, 하는데 이게 다 나 중심 때문 아닙니까? 주차 하면서도요.. 백화점 주차 오시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예배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수요예배는 주보에 누가 설교자인지 먼저 보시는 것 아닙니까?
예배는 하나님께 하는 시간인데요. 말씀에서 적나라하게 지적합니다. 빌립보서 3장 18-19절에서 부터 경고합니다.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한 적이 있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너희에게 말하는 많은 사람들 곧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걷느니라. 19. 그들의 마지막은 파멸이요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수치스러운 일에 있고 그들은 땅의 일들을 생각하느니라.”
부활절을 맞아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선포합니다. 마가복음 8장 34-35절에서, 그리고는 왜 그래야함 하는지를 35절에서 설명해주십니다. ➤“34. 그분께서 전에 사람들을 자기 제자들과 함께 불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려 하는 자는 그것을 잃되 누구든지 나와 복음으로 인해 자기 생명을 잃을 자는 바로 그것을 구원하리라.”
2.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내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15절, 후반부를 다시 보시면 빌립보서 1장20절과 같은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1:20절의 정신을 잊고 사는 것 아닙니까? 실은 제가 작년 12월부터 2월 중반까지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어느 정도 실의(失儀)에 빠졌냐면 설교하기가 싫은 거여요. 1부 예배 하시는 분들은 눈치를 챈 분도 계셨을 것입니다. 실은 토요일 늦은 시간까지도 설교 준비가 않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집사람에게 이 교회를 3년 후에 사임하겠다고 말했는데 고맙게도 허락해 주더라고요.
이게 잽 효과 인 것 같습니다. 잽을 계속 맞으면 권투 선수가 8회 정도 되면 그냥 조그마한 잽에도 쓰러진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님들과 목회자들에게 잽을 많이 맞은 것 같습니다. 화요일 목회자들을 모아놓고 그렇게 눈물 흘리고 하는 목회자들이 내 주머니에서 단 돈 만원 손해 보는 일 생기면 안색이 바뀌는 목회자들의 모습을 보고 약장사 이야기를 했지요. 약장사는 자기 약을 안 먹는다 합니다.
제가 4월 달까지 나와서 설교를 하고 있는 것 보면 심경의 변화가 있는 것 같지요? 그 과정에서 두 사건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2.18일자 설교 기억하십니까? 바울이 로마서 11장 36절에서 한 고백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인하여 그분께로 돌아가나니 영광이 그분께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바울처럼 니 삶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성도와 목회자들을 바라보지 말라고 하면서 트레비스라는 아이 이야기 드렸지요? 배를 만들겠다는 목표, 이 이야기가 저를 살려준 이야기 입니다. 너도 바울처럼 이런 목표를 가지면 안 되겠니? 하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저는 주일날이 다시 기다려집니다.
두번째 계기는 12/20일에 방영된 [교회 오빠]라는 영상입니다. 너무 신실한 부부인데 둘 다 암4기입니다. 아내가 아이를 낳고 산후 조리원에서 2주 쉬고 가는데 남편의 발병을 압니다. 그리고 릴레이처럼 남편의 항암 치료가 종료되는 시점에 아내의 항암 치료가 시작됩니다.
저는 6번을 이 영상을 봤습니다. 이 부부의 절망의 시기들에서 나누는 대화들이 저를 살렸습니다. 내 안에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만 사는 삶, 이런 말이 우리는 하기 쉽지만 생사(生死)를 오가는 이들이 나누는 이 말은 얼마나 진정성이 있겠습니까?
이 다큐를 보면서 내 안에 드는 2가지 질문은?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하시지? 그리고 두 번째는 끝에는 나아야 하는데, 그런데 주인공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병이 낫는 것을 기적으로 바라보겠지만 하나님은 이 질병에 내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시겠지! 암 자체는 복은 아니지만 암을 통해서 얻은 유익은 이런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결정적으로 저를 무너뜨렸던 한마디는 남편이 한 말입니다. 왜 저보고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하냐면, 하루를 더 살아서 내가 조금이라도 온전하고 성숙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 입니다. 여러분이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을 다 쓰기 위한 것이 여러분의 삶의 이유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여섯 번의 다큐를 보면서 하나님이 저에게 보여 주신 것은 니 눈에는 그렇게 엉터리로 사는 성도들만 보이냐? 이렇게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내가 하루를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의사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온 몸에 암 세포가 모래가 퍼져 있는 것처럼 퍼져있어서 이런 수술을 하고 있는데 교회 오빠라는 남자주인공은 주변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고통을 보면서 기도하게 되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회복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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