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목사
의의 가슴받이 (에베소서 6:10~20)
16세기 일어난 종교개혁은 역사가들에 의해서 개혁이라고 불리지만 실상은 엄청난 영적전쟁이었습니다. 1세기 사도들의 믿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15세기 동안이나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도록 눈을 가렸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진리를 사람들은 왜 그토록 깨닫지 못했을까? 성경을 마음대로 읽을 수 없게 만든 지도자들의 문제, 언어의 문제 등이 있었지만 본질적인 원인은 인간의 자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인간의 자아를 이용한 것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죄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분열되어 있습니다. 그 분열된 자아를 사탄이 이용해서 위대한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해서 다시 발견하고 깨닫게 된 진리는 ‘죄인 된 인간들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마틴 루터나 몇몇 개혁가들에게만 깨닫게 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진리의 빛을 비춰주셨고,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셨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통해서 올바른 복음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인간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거짓과 역사를 무너뜨린 하나님의 영적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끊임없이 인간의 자아를 공격합니다. 세상의 구조, 세상의 문화, 세상의 타락한 것을 이용해서 우리 안에 있는 왜곡되고 깨어진 자아를 공격함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자기 의존, 자기 의, 자책감
인간의 깨어진 자아는 세 가지 분열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첫째, 자기 의존(Self- Reliance)입니다. 자기 자신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죄의 정의는 잘못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잘못된 상태이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본질은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는 것은 정상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피조물입니다. 하나님 외에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는 하나님을 반역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게 하고, 자기 자신을 의존하게 만듭니다. 죄 자체가 자아를 분열시키고 왜곡시킵니다. 흔히 “너 자신을 믿고 열심히 하라”고 격려합니다. 굉장히 좋은 말입니다. 그 말에 힘을 얻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엄청난 사탄의 거짓말입니다. 어떤 성공이나 업적을 자신이 만든 결과라고 믿으면서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생활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로워져야 하는 존재이자 죄 가운데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존재인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혀져야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첫째, 자기 의존(Self- Reliance)입니다. 자기 자신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죄의 정의는 잘못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잘못된 상태이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본질은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는 것은 정상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피조물입니다. 하나님 외에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는 하나님을 반역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게 하고, 자기 자신을 의존하게 만듭니다. 죄 자체가 자아를 분열시키고 왜곡시킵니다. 흔히 “너 자신을 믿고 열심히 하라”고 격려합니다. 굉장히 좋은 말입니다. 그 말에 힘을 얻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엄청난 사탄의 거짓말입니다. 어떤 성공이나 업적을 자신이 만든 결과라고 믿으면서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생활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로워져야 하는 존재이자 죄 가운데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존재인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혀져야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둘째, 분열된 자아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모습은 도덕입니다. 도덕은 선한 것입니다. 때로 다른 사람들 앞에 손가락질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거나 다른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나은 삶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기 의가 가득 차 있을 수 있습니다. 옳지 않은 모습으로 회자되는 뉴스를 들으면서 ‘나는 저런 사람이 아니지. 왜 저렇게 살까?’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생각한다면 무서운 복음의 대적이 ‘자신의 자아’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우리가 바리새인들을 나쁘게만 생각하는데 그들의 겉모습은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사회지도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 같다’고 말할 정도로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빠지는 또 하나의 복음의 대적이 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의존에 빠져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셋째, 자책감(Self-Accusation)입니다. 자기 의에 빠진 사람들과 정반대로 죄와 허물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빠지는 분열된 자아의 모습입니다. 자기 자신을 고소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죄책감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복음의 진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금지된 열매를 따 먹고 하나님이 찾으시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심어주신 양심이 작동한 것입니다. 여러분, 양심은 선한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좋은 것입니다.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부르셔도 계속 도망하는 것은 사탄이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우리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반대입니다. 죄는 상관없고 죄인을 미워하는데 몰두합니다. 하나님은 죄와 사람을 철저하게 분리해서 대하십니다. 죄는 미워하시되 죄에 넘어진 사람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와 사람을 분리시키는 도구입니다. 죄를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못 박아 죽이고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살리는 도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탄은 자책감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인이고, 죄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고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겨주셔야 되는 존재라는 것을 끊임없이 거부하게 합니다. 자기 의존, 자기 의, 자책감으로 복음의 진리를 끊임없이 거부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복음의 진리를 15세기 동안이나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유럽 전역에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진리로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가 되었는데 사탄이 또 속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많아지고, 신앙생활이 문화가 되고, 교회가 사교클럽처럼 되게 해서 교인만 되면, 직분만 받으면, 의롭게 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저 사람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하면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 이 시대 모든 크리스천들이 회복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진리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의롭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입니다.
위대한 교환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에 두 번째 장비는 ‘의의 가슴받이’입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의의 흉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의 가슴받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기초이자 전부입니다. 우리가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 “나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 않은 것도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된 사람입니다. 이 표현을 자주 써야합니다. 성경에서는 구원이라는 단어보다 의롭게 되었다는 단어를 훨씬 많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는 의,
곧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께로서 난 의입니다”(빌 3:9b).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약속을 믿음으로 얻는 의가 하나님께로서 난 의입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움을 우리의 것으로 계산해주시고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의인으로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열심히 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자기를 의존하고 있고, 자신의 의와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그 영혼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아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진리를 방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에 빠지기 쉬운 사람입니다. 옛 성품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에 빠질 때 사탄은 “너 같은 사람이 어떻게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느냐? 너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냐”고 참소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가리는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내가 믿는 것은 내 자신도, 내 의로움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밖에 없다”고 대항해야 합니다.그것이 바로 의의 가슴받이입니다.
구원은 열심히 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자기를 의존하고 있고, 자신의 의와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그 영혼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아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진리를 방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에 빠지기 쉬운 사람입니다. 옛 성품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에 빠질 때 사탄은 “너 같은 사람이 어떻게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느냐? 너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냐”고 참소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가리는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내가 믿는 것은 내 자신도, 내 의로움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밖에 없다”고 대항해야 합니다.그것이 바로 의의 가슴받이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믿는 자의 죄는 그리스도에게로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범한 자로서의 책임이 그리스도에게로 가고, 율법을 다 이루고, 진리이신 그분의 권리와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위대한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기초 위에 우리가 서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위대한 교환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교환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주어진 것입니다.
선언적, 법정적인 의미
위대한 교환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이것은 선언적인, 법정적인 의미입니다.
첫째, 이것은 선언적인, 법정적인 의미입니다.
재판장에서 분명히 죄를 지은 사람인데 무죄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때로 통치자들을 통해 사면이 주어집니다. 죄가 분명히 있지만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다른 어떤 근거에 의해서 죄가 없다고 선포하는 것이 법정적 선언입니다. 단지 죄를 용서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에게 속한 모든 지위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의 첫 번째 목적입니다. 스가랴서 3장에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죽어 마땅합니다. 사탄이 그를 “율법에 의하면 저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그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소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거짓말로 우리를 속이지만 때로는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공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책망하시지 않고 사탄을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의로운 옷을 입혀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사건입니다. 진흙탕에서 뛰노는 아이가 있습니다. 모두가 더러운 아이라며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더러운 아이를 덥석 안고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머니입니다. 그 더러운 아이를 덥석 안았다는 것은 ‘너는 내 아이다’라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서 씻기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더러운 옷으로는 못 들어와. 씻고 들어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는 내 자녀”라고 하시며 자신의 옷이 더러워지더라도 안고 들어가 씻깁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창조했고, 내가 너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택했기에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내 자녀다. 그러므로 나는 너에게 무죄를 선언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죄가 분명히 있는데 무죄를 선언할 수 있는 것은 죄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끌려 왔을 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치지 못했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 돌을 던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던질 돌을 자신에게 던지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그 여인을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 여인에게 던져질 돌을 자신이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둘째, 관계적인 의미로 발전합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여겨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탄의 주권 아래 있던 우리들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살아가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셔서 그분이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우리는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골 1:13~14).
‘구속, ’죄 사함‘이라는 말은 의롭게 되었다는 것의 소극적 표현입니다. 적극적 표현은 의롭게 된 것이고, 소극적 표현은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아들의 나라 백성으로, 하나님의 권세 아래 사는 백성으로 관계 맺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의를 나눠주시는 것입니다. 수혈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무슨 죄를 지어도 상관없이 뻔뻔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놀랍게도 그리스도의 생명이 역사해서 실제로 의로운 삶이 이루어지고, 나타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착용하는 것이 의의 가슴받이를 착용하는 것이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밤낮으로 고소합니다. 때로는 거짓말로, 때로는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고소합니다. 사탄의 고소에 우리가 어떻게 대항해야 합니까? “나는 의로운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덧입혀 주시는 의로 나는 그리스도를 붙잡을 것이다. 나는 십자가에 나갈 것이다”라고 대항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의를 붙잡을 때 우리는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신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함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의지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우리 안에는 자신의 의가 끊임없이 솟아오릅니다. 끊임없는 자책감이 우리를 덮습니다. 무엇으로 이것을 이기겠습니까? 의의 가슴받이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덧입혀 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능력이 됩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14장에서 조카 롯을 북쪽 연합군과 싸워서 구해냈는데 그 이후 두려워졌습니다. 지난번에는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롯을 구했는데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두려워진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은 자기 의존의 결과입니다. 모든 교만은 자기 의의 결과입니다. 모든 부정적 감정은 자책감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며 약속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이 믿으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동일합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의롭게 될 것입니다. 일평생 “나는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 된 백성이다”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이 진리 위에 믿음을 굳게 세우기를 바랍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의를 붙잡을 때 우리는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신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함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의지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우리 안에는 자신의 의가 끊임없이 솟아오릅니다. 끊임없는 자책감이 우리를 덮습니다. 무엇으로 이것을 이기겠습니까? 의의 가슴받이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덧입혀 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능력이 됩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14장에서 조카 롯을 북쪽 연합군과 싸워서 구해냈는데 그 이후 두려워졌습니다. 지난번에는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롯을 구했는데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두려워진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은 자기 의존의 결과입니다. 모든 교만은 자기 의의 결과입니다. 모든 부정적 감정은 자책감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며 약속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이 믿으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동일합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의롭게 될 것입니다. 일평생 “나는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 된 백성이다”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이 진리 위에 믿음을 굳게 세우기를 바랍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은혜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핵심을 깨달아라. (0) | 2023.05.02 |
---|---|
호산나! 호산나! (0) | 2023.04.27 |
추수의 원칙과 축복의 원리 (0) | 2022.12.04 |
달란트의 비유 (0) | 2022.10.09 |
'버가모 요한계시록 2:12-17 (0) | 2022.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