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호산나! 호산나!

하나님아들 2023. 4. 27. 23:22

호산나! 호산나!( 21:5~9, p.34,  118:24~26, 142, 216)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마태복음은 2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마태복음 21~27장까지 무려 일곱(7) 장을, 예수님의 공생애 중 마지막 일주일, 고난(수난)주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서도 동일합니다. 이는 복음서는 예수님 일생의 전기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구원 사역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기록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덧 우리 곁에는 완연한 봄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화사한 꽃들이 곳곳마다 만개했습니다. 위도상 우리나라와 이스라엘과는 위치가 비슷하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도 봄꽃이 피어나는 계절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원에 피어난 노란 수선화꽃을 손주 녀석에게 보여 주었더니, ‘누가 밤사이에 가져다 놨어?’라고 묻습니다. 어른들에게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봄꽃을, 그 아이는 누가 갖다준 선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동화작가 정채봉 씨는 동심의 마음이라야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을 남겼나 싶습니다.

사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선물입니다. 물 한 모금을 입에 넘기면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감사를 연발하는 병아리처럼 매사에 감사로 화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서에 드러난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의 행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오늘 주일은 종려 주일입니다( 21:1~11).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성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야자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깔거나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을 외치며 환호했던 날입니다.

 

월요일에는 시장하신 예수님께서 열매 없던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 21:18~22)과 성전에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환전상들과 비둘기파는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며 성전을 정화시키십니다( 21:12~17).

 

화요일 날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함하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율법사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22:17~40), 한 여인이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음으로 순전한 사랑을 고스란히 받은 날이었습니다( 26:6~31).

 

수요일에는 예수님께서 조용히 쉬시면서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신 날입니다.

 

목요일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시고( 13:1~17),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26:17~29)과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에 찬 기도를 드린 일( 26:36~46)과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되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6:47~56).

 

금요일은 고난의 날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날입니다( 27:1~11, 32~56). 이날에는 해도 빛을 잃고 달도 그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전통에 의하면 금요일 밤에는 촛불을 켜지 않고 십자가를 검은 휘장으로 가려 예수님의 죽으심과 슬픔을 표현하게 됩니다.

 

토요일 날은 매장되셨던 날입니다.

 

돌아오는 주일은 부활하신 날입니다.

 

이제 본문을 따라서 종려 주일에 얽힌 사건을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종려 주일은 유월절을 지키는 한 주간의 첫날에 해당됩니다. 당시 유월절은 무려 25만 마리 이상의 양들이 백성의 속죄제를 위한 대속 제물로 바쳐졌고 유월절 제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250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월절에 맞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그 주간에 붙잡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십니다. 유월절 행사와 겹치고 있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사건은 예언의 성취요 완성이었습니다. 짐승을 희생 제물로 삼는 속죄의 약속은 반복적이고 한시적인 효과만을 갖게 되었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은 인류의 죄악을 위해 단번에 완전한 제사와 제물 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몸 찢고 피 흘려 죽어 주시기 위해 찾아오시는 길이었습니다. 고난의 길이요 순종의 길이요 사랑의 길이요 승리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를 위하여 말없이 순종하시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께 죽도록 충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은 예수님이 나귀 타고 입성하시는 것은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오심을 중명하는 일이 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9:9). 나귀는 말보다 덩치는 작았지만 힘이 세고, 병치레를 잘하지 않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교통수단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왕이 시찰을 나설 때에 이용하던 짐승이었지만 예수님 당시는 서민들의 운송 수단에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폭군이나 독재자의 모습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와 겸손으로 충만하신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찬송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기는커녕 업신여기며 무시하며 심지어 환영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폭언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약하고 힘없는 군중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자신들의 겉옷을 펴거나 종려 가지를 베어다가 길에 깔아놓고 소리 높여 찬송을 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9)”고 했습니다.

여기서 호산나라는 뜻은 이제 구원 하소서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부르는 찬송은 무심결에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연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절규요 외침이요 간청이며 바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요 구원자로 부르는 영혼의 노래였습니다. 구원과 간구의 노래 경배의 노래 환희와 기쁨과 승리의 노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본문에 나오는 군중들처럼 가난한 심령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주님을 환영하며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안팎으로 존재하는 온갖 우상들을 버리고 우리의 자아를 깨뜨려서 주님께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싸늘하고 냉소적인 분위기를 이겨내고도 남는 믿음으로 주님을 칭송하고 찬양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구별하여 부르신 이유가 찬송하는 자로 삼고자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1:5~6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3:15에서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요 세상을 향해 복음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교우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찬송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큽니다. 찬송 생활은 놀라운 은혜와 주의 임재를 체험케 합니다. 심령이 메마르지 않게 합니다. 영적으로 힘을 얻는 비결입니다. 하루 중에 5~10곡 정도 찬양을 불러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찬송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대하 20, 16).

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호산나의 외침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주님의 구원하심이 간절한 시대입니다. “호산나!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님의 보좌를 향한 간구와 찬양이 온 세상에 울려 퍼져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의 유배지에서 1821 5 5월 저녁, 52살에 눈을 감으며 그의 부하였던 버틀러 장군에게 이런 말을 남습니다. “나는 칼로 세계를 지배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였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는 놀라운 사랑으로 온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

 

1천 년 전에 영국에 카뉴트(King Canute, 1016-1035)라는 한 괴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절대로 왕관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신하들이 자기를 지나치게 존경하고 높이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왕이 신하들에게 왕좌를 해변으로 옮기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서는 바닷가에 놓인 왕좌에 앉아 수평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밀물이 밀려오는 것을 보더니 갑자기 밀려오는 파도를 향하여 파도여, 멈추어라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 번 명령했지만 물결은 아랑곳하지 않고 밀려들었고 왕은 파도에 밀려 왕좌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때 왕이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 모두 똑똑히 보았느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찮은 것이다. 우주를 다스리는 권능은 오직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왕은 왕관을 벗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상에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유명한 아프리카의 개척 선교사 리빙스턴이 깊은 정글 속에서 홀로 기도하다가 죽었습니다. 죽기 며칠 전 그는 일기장에 이런 글을 적었습니다. “내 예수, 내 왕, 내 생명, 내 전부시여, 나는 다시 오늘 나의 전체를 당신께 드리나이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맞이하고 있습니까? 과연 예수님께서 내 왕이 되십니까? 내가 과연 예수님을 내 왕으로 영접하고 있습니까? 과연 예수님께서 나를 다스립니까? 과연 주님이 내 마음을 다스립니까? 내 말을 다스립니까? 내 생활을 다스립니까? 내 재산을 다스립니까? 내가 과연 그의 백성이 되었습니까?

예루살렘에 모인 백성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주님을 맞이하듯이, 우리도 우리의 삶에 왕으로 오신 주님을 환영하며 맞이해야 합니다.

나귀를 드린 사람처럼, 겉옷을 벗어 드린 사람처럼, 종려나무를 꺾어 드린 사람처럼, 아니 목소리를 다하여 호산나 찬송한 사람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있는 것을 다 드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주님께 영광과 찬사를 돌려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이 한 주간에 고난의 주님을 깊이 생각하며 날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의 은혜를 묵상하고 감사함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섬길 것을 다짐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윤동주의 십자가라는 시를 낭독하며 말씀을 맺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했던 사나이 /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나에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기도문/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를 구원하옵소서.’ 종려 주일의 찬양을 드립니다.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 우리들의 마음에 임하신 주님, 기뻐함으로 영접합니다. 높이고 경배합니다. 사랑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주님을 아시는 지식과 믿음이 온 세계에 충만하게 하옵소서.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구원과 평화와 회복과 승리를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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