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형통(亨通)하였더라.

하나님아들 2023. 5. 2. 15:10

형통(亨通)하였더라.

저서/이찬수 목사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 어떤 사람이 약속 시간에 늦어 과속을 하며 차를 몰고 있었습니다. 한참 달리고 있는데 단속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깜짝 놀라 재빠르게 속도를 줄였는데, 자신의 차가 지나가자, 단속 카메라가 '찰칵'하며 촬영 음을 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속도를 기준 이하로 낮췄는데, 카메라에 왜 찍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

 

호기심이 많은 이 사람은 다시 돌아가 속도를 낮춘 다음, 카메라가 있는 곳을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단속 카메라에 자신의 차가 또 찍히는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이번에는 속도를 최대한 낮춘 다음, 그 앞을 다시 지나갔습니다. ​그랬더니 또 '찰칵'하고 자신의 차가 찍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며칠 후 이 사람에게 고지서 석 장이 날아왔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안전벨트 미착용' ​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이 썰렁한 이야기를 마음에 자주 떠올립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자신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은 그 기준에 맞춰 속도를 줄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과속하는 것을 보면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기준, 하나님의 관점은, 속도가 아니라 안전벨트 착용의 여부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잘못된 관점으로 인한 오해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 ​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물 '요셉'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 인물인지 모릅니다. 요셉은 외국에서 우리나라의 '철수'만큼이나 흔한 이름입니다. 그들은 왜 자기 자녀들의 이름을 요셉이라고 짓는 것일까요? 저희 어머니도 어릴 때부터 저를 무릎에 앉혀 놓고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들 찬수가 요셉과 같은 훌륭한 인물이 되게 해주세요."

 

왜 저희 어머니는 사랑하는 막내아들이 요셉 같은 인물이 되기를 원하셨을까요? 아마도 자신의 자녀가 요셉처럼 꿈의 사람이 되길 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꿈을 가진 사람, 비전을 가진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성경퀴즈를 할 때 '꿈'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무조건 정답은 요셉입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조금 더 알기 시작하고 묵상하면서 자꾸 다른 의문이 들었습니다. 진짜로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은, 그의 꿈 때문이었을까?

 

묵상하면 할수록 '꿈'보다 더한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17살 청소년 시기에 요셉만큼 꿈 안 꾸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장기에 요셉만큼 꿈을 안 꾸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요셉과 관련된 성경 구절을 살펴보면, 요셉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꿈'이 아니라, '형통'임을 알 수 있습니다. ​

 

➤“2. {창조주}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 있더라. 3. 그의 주인이 {창조주}께서 그와 함께 계심을 보고 또 {창조주}께서 그가 행한 모든 일을 그의 손에서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세기 39장2-3절) 
➤“23. 감옥의 간수는 그의 손 밑에 둔 것은 무엇이든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창조주}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라. {창조주}께서 그가 행한 일을 형통하게 하셨더라.”(창세기 39장23절)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요셉의 '요셉 됨'은 그가 꾼 꿈이 아니라, 엄청난 꿈을 현실로 대답해주신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엄청난 꿈을 꾸어도, 하나님께서 형통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꿈은 개꿈이 되는 것이고, 형통을 허락하시면 비로소 복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요셉과 같은 꿈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기보다는 ”요셉이 누렸던 형통의 복을 주시옵소서!“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요셉이 누렸던 이 형통의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통의 복을 받으려면, 먼저 형통의 개념부터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형통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형통의 개념이 다르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통의 복을 제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우선 요셉은 진짜 형통한 삶을 살았을까요? 사실 세상적인 관점으로 생각해보면, 요셉만큼 형통하지 않은 인생도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형들에게 모진 구박과 핍박을 당했고, 급기야 형들에 의해 다른 나라의 노예로 팔려간 인생이, 어디를 봐서 형통한 삶이겠습니까?

 

형들에 의해 웅덩이에 갇혀 그 웅성웅성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어린 나이에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참 괜찮은 청년이었습니다. 그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게 산 결과, 그의 주인인 보디발의 신임을 얻어 가정 총무의 일을 보게 됩니다. 이제 좀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 요셉이 그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어 그를 섬기매 그가 그를 자기 집을 감독하는 자로 삼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그의 손에 맡기니 5. 그가 그를 자기 집과 자기의 모든 소유를 감독하는 자로 삼은 뒤부터 {창조주}께서 요셉으로 인하여 그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으므로 {창조주}의 복이 그의 집과 들에 있던 그의 모든 소유에 임하니라. 6. 그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요셉의 손에 맡기고 자기가 먹는 빵 외에는 자기 소유 중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며 잘생겼더라.”(창세기 39장 4-6절)

 

2)그런데 그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인생을 방해합니다. 성경에 보면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습니다. 이런 요셉을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그녀와 함께 있는 것조차 피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에 다른 사람들은 한 명도 없고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만 남게 됩니다. 이 기회를 틈타 보디발의 아내는 친위대장의 아내로서의 체면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요셉의 옷을 잡으며 그에게 동침하기를 청합니다. 당황한 요셉은 자신의 옷을 보디발의 아내의 손에 버려두고 그 자리를 피해 도망칩니다.

 

➤“11. 이럴 즈음에 요셉이 자기 일을 보러 집에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안에 그 집 사람들이 하나도 없더라. 12. 그녀가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함께 눕자, 하니 그가 자기 옷을 그녀의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가니 13. 그가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아감을 그녀가 보고 14. 자기 집 사람들을 불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와 함께 누우려고 내게로 들어오기에 내가 큰 소리로 외쳤더니 15. 내가 소리를 높여 외치는 것을 그가 듣고는 자기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며 16.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의 옷을 자기 곁에 두니라.”(창세기 39장 11-16절)

 

저는 가족과 함께 이민생활을 했음에도 너무 외롭고 고독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혼자, 그것도 형들에게 팔려 타지에 와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의 나이는 피가 끓는 나이입니다. 이 대목에 이를 때마다 저는 정직하게 상상해봅니다. 저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저라면 99퍼센트도 아니고 100퍼센트 유혹에 넘어 갔을 것입니다. 그런 유혹을 이겨낼 남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것을 이겨냈습니다. 요셉은 구약에서 예수님을 예표(豫表:미리 알려주는 표징)하는 인물입니다.

 

➤“8. 그가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보소서, 나의 주인이 집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며 또 자기의 모든 소유를 내 손에 맡겼은즉 9. 이 집에는 나보다 더 큰 자가 없으며 주인이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당신이 그의 아내이기 때문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까? 하니라.”(창세기 39장 8-9절)

 

멋진 말을 남기며, 그 유혹을 이겨낸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보상심리가 있습니다.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면 그에 따른 보상심리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시험에서 100점을 맞은 자녀가 시험지를 들고 집에 오자마자 엄마에게 외치는 말이 무엇입니까? "엄마, 저 100점 맞았어요. 뭐 사주실거에요!"입니다.

 

이것이 보상심리입니다. 요셉이 보통의 남자라면, 물리치기 힘든 유혹을 하나님만 의지해 이겨내는 놀라운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 요셉의 마음속에 무언가 보상심리가 있을 법합니다. ​ '하나님 제가 한 일을 보셨지요? 장하지 않습니까? 그 무서운 여자의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하나님, 무엇을 저에게 보상해주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보상해주셨을까요? 이 시대의 장한 청년상, 모범상, 순결상 같은 상을 주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은 감옥으로 보내졌는데, 죄명이 강간 미수범이었습니다.

 

3) 요즘처럼 성적으로 타락한 시대에도 강간 미수범에게는 관대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고대사회에서 그런 죄명을 쓰게 되었으니 얼마나 수치스러웠겠습니까? 이런​ 요셉의 인생이 어디를 봐서 형통한 인생입니까? 우리 가운데 이런 인생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요셉의 삶이 형통하다고 말합니다.​ ​

 

여기에서 우리는 정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형통, 우리가 목말라하는 형통, 우리가 갈구하는 형통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형통과 괴리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갈망한 형통은 어떤 형통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형통을 추구해야 하는지 알아가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형통,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형통은 과연 무엇일까요?

 

➊첫째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하는 삶입니다.
성경 창세기 39장에서 형통을 설명하는 표현 전후에, 어떤 설명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 {창조주}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 있더라. 3. 그의 주인이 {창조주}께서 그와 함께 계심을 보고 또 {창조주}께서 그가 행한 모든 일을 그의 손에서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세기 39장2-3절) 
➤“23. 감옥의 간수는 그의 손 밑에 둔 것은 무엇이든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창조주}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라. {창조주}께서 그가 행한 일을 형통하게 하셨더라.”(창세기 39장23절)

 

창세기 39장2절에 '형통한 자가 되어'앞에, '창조주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또3절에도 '창조주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앞에 '그 주인이 창조주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라는 전제가 나옵니다. 2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진리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형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 ​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든 함께하지 않으시든 상관없이, 돈만 많이 벌면 그것이 형통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면 좋은 것이고, 또 그렇지 않으셔도 자신의 목적만 이루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이런 잘못된 가치관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심지어 목회자들 안에도 자리 잡고 있다 보니, 오늘날의 기독교가 점점 그 본질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되더라도,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거기가 복의 자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업에 성공하는 것이 형통이라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사이비 형통'에 빠져 삽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모으나 저렇게 모으나, 사람만 모으면 된다는 잘못된 가치관이 알게 모르게 스며들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의 능력이 약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비꼬는 말 중에 참 가슴 아픈 말이, "예수님 믿는 사람이 더 하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얼마나 성공에 집착하는지, 세상 사람과 마찬가지로 뇌물이나 세금 포탈을 일삼는데, 거기에 '예수님'이름까지 동원해 성공을 빈다는 것입니다.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께 부르짖는 것이, 세상적인 성공과 형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형통의 개념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대궐 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이 형통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이 형통입니다. 요즘 시대는 외적인 것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교회도 보면 건물, 인테리어, 주보 등 눈에 보이는 것에 큰 관심을 쏟습니다. 이렇게 외적인 것에 자꾸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 내면이 무너지기 쉽습니다. 저는 한국 교회를 지탱하는 것은 작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교회들이 내실 있게 한국 교회를 받쳐주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 작은 교회들을 살려야 하고, 작은 교회들이 긍지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교회들이 "우리는 하나님의 형통의 복을 받았다"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이 즐겨 부르던 찬양,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가난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조상들이 눈물로 부르던 찬양이 뭔 줄 아십니까?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내 영혼이 은총 입어-

 

바로 이것이 형통입니다. 넓은 평수의 초호화 아파트에 살지만,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아 불안하고 두렵고 날마다 죽음의 공포에 떨며 고아처럼 부르짖는 사람이 형통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지하 단칸방에 살더라도,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경험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형통한 사람입니까? ​ ​

 

우리는 도대체 어떤 인생을 원합니까? 우리는 자기 자신 뿐만이 아닌, 가족, 친구, 지인 등을 위해 기도할 때, 요셉처럼 고난과 역경을 만날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진정한 형통의 자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➋둘째,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형통은, 환경을 초월하는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성경을 풀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성경이 말하는 능력을 모두 '탁월'함으로만 생각합니다. 탁월함도 성경에 많이 나오는 능력이지만, 이보다 더 많이 나오는 능력은 '초월'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식당 같은 곳에 가장 많이 붙어 있는 성경 구절이 무엇일까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개역개정)​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킹제임스흠정역)​

 

식당 주인이 이 구절을 벽에 붙일 때, 무엇을 기대하며 붙였겠습니까? 아마도 이 구절에 나오는 '능력'을 '탁월함'으로 생각하고 붙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벽에 붙어 있는 이 문구를 보면 종종 간담이 서늘해 지곤 합니다. '아 저 주인은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저 말씀을 벽에 붙여놨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말씀을 앞 구절과 연결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만족하는 것을 내가 배웠으니 12. 내가 비천하게 되는 것도 알고 풍부하게 되는 것도 알아 어디에서나 모든 일에서 배부른 것과 배고픈 것, 풍부한 것과 궁핍당하는 것을 다 배웠노라. 13.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장 11-13절)​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식당 주인이 생각하는 '탁월함'이 아닙니다. 내가 배운 비결, 즉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가지고,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곧,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모든 상황을 이기는 '초월'입니다.

 

따라서 식당 주인이 빌립보서 4장13절 말씀을 식당 벽에 붙임으로써 의미하게 되는 것은, 나는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그것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괜찮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식당이 망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본래 그 주인이 의도한 바는 그게 아닐 것입니다. '주변의 모든 식당은 다 망해도 우리 식당은 망하지 않을 줄 믿습니다.'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초월의 능력으로 오해한 데서 비롯되는 일입니다.

 

이와 비슷한 오해에서 비롯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한 연인이 식당에 갔습니다. 그런데 벽에 사자성어 새옹지마가 한자로 써 걸려 있었습니다. (새옹지마 塞翁之馬:인생에 있어서의 吉凶禍福(길흉화복)은 항상 바뀌어 미리 헤아릴 수가 없다는 말)

 

이것을 본 여자가 남자에게 "오빠, 저게 무슨 글자야?"라고 물어봤습니다. 이 사자성어가 뒤에 두 한자는 쉬운데 앞 두 한자는 조금 어렵습니다. 이 남자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남기지마!"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한 부분만 보고, 성경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전체적인 의미를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 개역개정)

​➤“비록 네 시작은 작을지라도 네 마지막 끝은 심히 크게 되리라.”(욥8:7 킹제임스흠정역) ​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개역개정) ​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만일 믿을 수 있거든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 하시니”(막9:23 킹제임스흠정역)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개역개정)​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구절에 나오는 이런 능력을, 우리가 자꾸 탁월함으로, 일등으로, 최고로, 실패가 없는 것으로 해석하다 보니, 한국 교회에 부작용이 심각하게 생겼습니다. 성도나 목사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가 유약한 신앙인들이 양산되는 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다음과 같은 이치입니다.

 

●몇 년 전,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여학생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전교 2등을 했습니다. 이것이 그 여학생에게는 너무 큰 충격이었습니다.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한 여학생은 투신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아이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탁월함만, 1등만 추구하다 보니 2등은 상상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전교 2등도 꿈의 등수인데, 이 여학생에게는 견딜 수 없는 수치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탁월함만 추구하다 생긴 부작용입니다. 이와 비슷한 부작용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도 있습니다. 감옥에서 상처받지 않는 요셉과 같은 '초월의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탁월함만 추구합니다.

 

 요셉의 특이한 점은, 바로 '상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형제들에게 핍박받고, 인신매매 당하고, 강간 미수범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으며, 감옥에 가서도 관리들에게 배신을 당해 2년 동안 세상에서 잊혀진 세월을 보냈는데, 요셉에게는 상처의 흔적이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셉은 진정한 형통의 복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너무 약합니다. 청소년 사역을 하는 10년 동안 아이들이 걸핏하면 상처를 받았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상처받는 이유도 여러 가지입니다. 설교가 조금만 길어도 힘들고, 조금만 재미없어도 괴롭답니다. 청소년 사역을 할 때는, 아이들 뒷바라지하고 달래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제 어른 목회를 해보니, 아이들 삐치는 것을 달래는 것은 일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삐치는 것이 단수가 좀 얕은데, 어른들은 너무 복잡합니다. 어떨 때는 눈빛만 조금 이상해도 이분이 또 마음이 상했나 싶습니다. 형통의 개념이 바뀌고, 축복의 개념이 바뀌고, 능력의 개념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능력은 환경을 초월하는 능력입니다. ​

 

우리 조상들은 이런 능력을 얼마나 풍성하게 가지고 있었습니까?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보릿고개를 지나면서도, 쌀독에 쌀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며,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 평강, 환경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에 비해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날마다 상처받았다고, 날마다 부족하다고 앓는 소리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날 사람들이 추구하는 사이비 형통의 부작용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내재하심의 형통을 추구하면, 이런 환경을 초월하는 능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➌셋째,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형통은 그 형통의 결과가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말하는 형통은 나 자신에게로 귀착됩니다. 텔레비전 광고를 보면 하나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파트에서 살고 싶지 않으세요? 이 아파트에서 살면 행복해질 것입니다." "이 차를 타고 싶지 않으세요? 이 차를 몰면 짜릿한 행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종착은 나 자신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말하는 형통의 복은 내가 잘 먹고 잘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내가 형통하면 이 형통의 복을 내 주변 사람이 받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창세기39장5절 “그가 그를 자기 집과 자기의 모든 소유를 감독하는 자로 삼은 뒤부터 {창조주}께서 요셉으로 인하여 그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으므로 {창조주}의 복이 그의 집과 들에 있던 그의 모든 소유에 임하니라.”

 

창조주께서 누구를 위하여 누구의 집에 복을 내리셨나요? 요셉을 위하여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그 복이 누구에게까지 미쳤나요? 이집트 사람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영향을 줬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우리 상식으로는 창조주께서 요셉을 위하여 누구에게 복을 내려야 합니까? 당연히 요셉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요셉을 위하여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형통의 복이 내려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형통의 결과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어긋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형통의 복을 받으면, 그 모든 열매는 나를 위한 것이길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그 모습은 엉터리일 때가 많습니다. 은혜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고, 그동안 막혀 있던 것들이 다 풀린 것처럼 시원해지며, 또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는 것이 은혜 받는 것일까요?

 

그것은 은혜 받은 것일 수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은혜의 개념을 바꿔야 합니다. 내가 은혜 받았다면, 그 은혜의 혜택을 나와 가장 가까운 남편, 아내, 자식, 시부모님, 며느리가 함께 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은혜는 가짜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형통의 복은, 자신의 복을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청소년 사역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이런 구호를 외치게 했습니다. "공부해서 남 주자. 돈 벌어서 남 주자. 은혜 받아 남 주자." 우리는 너무 잘못된 세뇌를 받아왔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공부해서 남 주느냐"라는 야단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우리는 공부해서 남 주고 은혜 받아서 남 주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 받을수록 더 탐욕적이 되고, 더 남을 무시하고, 더 폐쇄적이 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은혜 받으면 남 주는 것입니다. 은혜 받으면 베푸는 것입니다. 저는 1 년에 한두 번은 외국 집회에 갑니다. 몇 년 전, 밴쿠버 교민 집회에 갔는데, 시차가 안 맞아 새벽 3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저는 잠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 딱 5분만 있으면 잠이 듭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아무리 노력해도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행기에서 읽으려고 가져온 '나는 정직한 자의 형통을 믿는다.'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은 코스타 명강사들의 글을 모은 것인데, 그중 김동호 목사님의 글을 읽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김천에서 설렁탕을 파는 성도의 가게에 심방을 갔는데, 이 성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제가 비록 설렁탕 파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설렁탕 한 그릇 한 그릇을 정성스럽게 만듭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 집에서는 최고급 재료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제일 비싼 소뼈를 사서 24시간을 꼬박 고아 손님에게 진국 설렁탕을 대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뼈를 고는데, 고을수록 뽀얀 우윳빛 국물이 나와야 하는 최고급 뼈에서 누런 국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거래처에 전화를 했더니 너무 당황해하면서, 물건이 잘못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오늘 하루만 커피에 타 먹는 크림을 좀 넣어 국물을 뽀얗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그 성도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날 하루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입구에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오늘은 재료가 좋지 않아 영업을 할 수 없습니다.' ​

 

 새벽에 이 책을 읽는데 잠이 아닌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런 마음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가? 우리 성도들에게 좋은 것을 주기 위하여, 가장 좋은 재료를 가지고 설교하고 있는가? 성도들을 예수님 섬기는 마음으로 섬기고 있는가?' 저는 고작 시차 때문에 잠을 못 자고 고생하고 있는데, 그것도 3일만 버티면 저절로 사라지는 불면증인데, 우리 성도 중에는 사업 부도로 몇 개월째 불면의 밤을 보내는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심지어는 2년 째 불면증을 겪는 어르신도 계셨습니다. 성도 한 가정 한 가정을 만나보면,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어려움과 문제를 가진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날 저는 과연 그들의 아픔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었는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 새벽에 그 자리를 고쳐 앉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분처럼 목회하게 해주세요.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정성을 다해 목회하게 해주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한 사람이 예수님께 대접하는 마음으로 설렁탕을 준비하니, 인근의 많은 사람이 진국 설렁탕을 먹으며 그 복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요셉을 위하여 요셉의 주변 사람들이 복을 받아 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 ​직장 동료가 나로 인해 형통의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시댁이 나로 인해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까? ​혹시 골치 아픈 예수쟁이 며느리가 들어와서, 제사 지낼 때마다 집안을 시끄럽게 만든다고 하지는 않습니까? 믿지 않는 시댁에서 죽은 조상을 섬기지 않으려면, 살아 있는 부모님을 예수 그리스도 안 믿는 다른 사람보다 두세 배는 더 잘 섬겨야 합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 믿는 우리 며느리가 나한테 이렇게 잘하는 것을 보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옳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 주로 천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중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잘 믿는 마부 한 명이, 자신이 모시고 있는 왕손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그 마부가 왕손을 모시고 지방으로 내려가게 된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부가 왕손에게 복음을 전하며 “나리, 예수님 믿으시지요?“ 라고 권했습니다. ​그랬더니 왕손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마부를 바라보며 이렇게 비아냥거렸습니다. ​”야, 이놈아!, 네까짓 상놈이 예수님 잘 믿으면 누가 양반이라도 시켜준다더냐?“ ​이 말을 들은 마부의 대답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나리, 예수님 믿는 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예수님 더 잘 믿으면 마부 노릇을 더 잘해야 합죠." ​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투정하듯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제가 이렇게 예수님을 잘 믿는데, 언제 왕손 시켜줄 것입니까?"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믿음의 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잘 믿으면 마부 노릇 더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형통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형통의 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래서 마부 노릇 더 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부 노릇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의 깊은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을 위해, 교회를 위해 마부 노릇을 더 잘하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내가 마부 노릇을 더 잘하면, 내 자녀들이 왕손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내 남편과 아내가, 내 이웃이 왕손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형통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구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또한 내가 받은 이 형통의 복을, 우리 가족에게 우리 교회에게 또한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로 흘려보내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구하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되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찬수목사 저서 [보호하심]중에서 발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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