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는 게할더스 보스의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 유일한 설교집인 「은혜와 영광」을 완역 합본한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THE TEACHING OF JESUS CONCERNING THE KINGDOM OF GOD AND THE CHURCH)
제 6 장 하나님 나라의 본질: 구원의 능력의 영역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p.49.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명칭을 사용하신 주요 이유는 의심의 여지도 없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사물의 새로운 질서 가운데서는 마치 인간의 나라의 군주처럼 하나님이 최고의 주권자로 계신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은 그 핵심에 있어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개념인 것이다. 이 개념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행하신 바를 행하도록 해야 하며, 또한 모든 세상과 모든 삶을 하나님의 영광에 종속시키는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만 한다. 이를 이루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닥치는 어려움은 비단 우리가 사람 중심의 천박한 신앙관을 가지기가 쉽다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가 지니는 국가에 대한 현대적 관념에서는 그런 사물의 질서를 하나님의 나라라는 명칭과 연관짓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어려움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현대적 개념에 따르면, 특히 공화제적인 사고에서는, 국가라는 제도는 신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요, 심지어 왕도, 최소한 입헌군주국의 경우에는,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 정도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고대의 국가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그 때에는 개인이 국가를 위하여 존재하며, 동방의 군주국에서는 나라 전체가 군주라는 한 인물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원리가 우리 인간의 정치적 삶을 결정하는 원리로서 어떠한 장점과 단점을 지니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를 파악하는 유일한 관점을 제시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초기부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왕적 통치의 형식으로 표현해 온 것은 바로 그러한 왕권 개념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신정적 정치 체제의 주된 목적은 세상을 향하여 통치 원리를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물론 그런 점에서도 귀중한 교훈을 주는 것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마지막 날의 완성된 삶 가운데에 존재하게 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신앙적 교류의 영원한 법칙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유대교는 이런 점을 인식하지 못했고, 결국 무게의 중심을 하나님에게서 사람에게로 옮겨버렸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본래의 적절한 관계를 회복(p.50)시킨 것이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계신 곳만이 아니라(하나님은 언제나 어떠한 상황에서나 주권자로서 존재하신다)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그의 주권을 다른 모든 적대적인 권세에 대항하여 초자연적으로 자신의 주권을 실행하시며, 사람으로 하여금 그 주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순종하도록 하시는 그런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모든 것이 집중되는 그런 사물의 질서인 것이다.
제 9 장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p.75.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우리 주님의 전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지만, 교회의 개념은 마태복음 16:18과 18:17에 기록된 대로 주님의 사역의 특정한 시점에서 두 차례만 나타나고 있다. 두 번째 구절은 교회를 아주 우연히 언급하고 있으며, 만일 거기서 말씀하는 교회가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유대교의 종교 체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 교회를 가리킨다 하더라도, 이 구절은 교회에 대해서 상세한 내용을 전달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첫 번째 구절은 교회를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 소개하며, 그 성격을 묘사하고,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그것을 정의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으로 교회를 다루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우리 주님께서는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진술을 해 주신 것이다. 물론 이 주제는 역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우리 주님의 사역 가운데 이 특정한 시점에서 교회에 대해서 이런 중요한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게 만든 정황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시몬 베드로는 바로 직전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중요한 고백을 했다. 이 고백을 받아서 우리 주님은, 대다수의 백성들이 불신앙으로 응답하는 가운데서 주님의 메시야이심을 최초로 고백한 자로서의 베드로 위에 주님의 교회를, 그의 에클레시아를 세우실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그러나 베드로가 여기서 비로소 처음으로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위엄에 대(p.76)하여 확신에 이른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되며, 여기서 처음으로 그런 확신을 말로써 표현했다고 보아서도 안 될 것이다. 복음서의 기사들을 모두 무시해버리지 않는 한, 그런 확신은 그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현재의 이 고백이 지니는 중요한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곧, 전에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를 떠난 그 시기에 그런 고백이 있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칭찬하신 것은 베드로의 바위와 같은 성품, 곧 확고함이었다. 다른 이들이 흔들리고 있는 때에 그는 자신의 확신을 든든히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그 계시에서 처음 예수님의 메시야이심이 드러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계시를 통해서 베드로는 많은 무리들과는 달리 겉모양으로 볼 때에는 예수께서 메시야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때에 예수님에게서 메시야의 참된 속성을 분간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고백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과 완전히 대조를 이루는 고백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교회의 특성이 바깥에 있는 자들이 예수님의 메시야이심을 부인하는 그런 모순 속에서 그의 메시야이심을 인식하는데 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은 그 말씀이 되어진 그 때의 상황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 자체의 어조에서도 동일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의 교회를 또 다른 종류의 어떤 교회와 대비시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카할과 에다를 번역한 것인데, 여기서 에다는 이스라엘의 회중을 지칭하는 명칭이었다. 이런 연관성 속에서 살펴보면, “내 교회”란 다름이 아니라 “나를 메시야로 인정함으로써 현재의 유대인 교회를 대신하게 될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새로운 교회가 예수님의 메시야이심에 관한 하나의 주관적인 믿음에만 의존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일 것이다. 우리 주님은 “내가 세우리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며, 그리하여 이 교회를 존재케 하시는 객관적인 임무가 예수님 자신의 메시야적 행위로 말미암는 것임을 스스로 천명하시는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이 기초가 되지만, 교회는 베드로의 것도 아니요, 인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주님 자신이 세우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 자신(p.77)이 주권으로 교회 안에서 다스리실 것이다. 주님의 충만한 귄위로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너에게 주리니.” 그러므로 객관적으로 생각할 때에, 교회는 이스라엘의 옛 회중을 대신하는 새로운 회중으로서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세우시며 그의 메시야의 통치 아래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진술의 의미가 이것으로 충만히 다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그 교회라는 건물과 그 자신의 권위의 시행을 미래와 관련지어 말씀하신다는 점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내가 세우리라”: “내가 주리라”. 이 말씀을 하는 시점에서는 아직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교회의 기원과 그 경영이 예수님의 메시야이심에 의존한다면, 이 메시야이심은 여기서 구체적인 의미로 취하여, 그 실현이 아직 미래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주님은 다름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죽음과 부활,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을 통하여 들어가시게 될 그 새로운 영광의 상태, 천상의 상태를 지칭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메시야의 권위를 지니고 계시며, 이미 이 땅에서 메시야의 사역을 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다른 의미에서는 자신의 메시야적 기능이 그가 영광의 상태에 들어가심으로써 시행되기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하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훗날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부활로 말미암아 그를 주와 그리스도로 만드셨다(한글 개역 성경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번역하고 있다-역자주)고 선언했는데, 이러한 선언은 예수님 자신의 관점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이었다(행2:36).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주님이 메시야로서 영광된 상태에 들어가신 이후에야 비로소 교회가 시작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이 미래형 표현을 써서 말씀하신 것이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사실은 다음의 사실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마태복음 기자는 교회에 관한 선언이 있은 이후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셔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히시며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음(p.78)을 보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마16:21). 그렇다면, 주님의 마음에는 자신의 고난의 결과들과 교회의 기원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교회와 관련지어서만 생각했고, 하나님 나라의 교의와 관련해서는 살펴보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처음 공식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교회가 지금까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온 하나님의 나라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교회를 세우시리라는 선언 바로 직후에 주님은 계속해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고 하신다(19절). 물론 교회와 하나님 나라가 서로 별개의 것이라는 견해를 근거로 하여 이러한 양자의 관련성에 대해서 그럴듯한 해석을 제시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여기의 나라를 마지막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하고, 천국 열쇠를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하거나 거부하는 권세로 이해하면, 이 말씀은 교회의 초석인 베드로에게, 그러므로 교회에게,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런 견해를 취하게 되면, 교회는 여기서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천국)와 서로 별개의 것이 되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마치 집을 지키는 문지기와 같은 관계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19절의 선언의 말씀 그 자체에 관한 한 이런 해석은 거의 불가능하다. 매고 푸는 일은 마치 하늘 그 자체가 닫히고 열리듯이 하늘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영역 내에 속한 어떤 것들을 지칭하며, 하늘만이 아니라 땅의 영역도 여기에 포함되는 것이다.
매고 푼다는 비유적 표현은 다른 의미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를 죄를 매고 푸는 것으로, 즉 죄의 전가와 죄의 용서를 뜻하는 것으로, 즉 죄의 전가와 죄의 용서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거나, 유대인들의 통상적인 용례를 따라서 “맨다”는 “금지한다”의 뜻으로, “푼다”는 “허용한다”의 뜻으로 해석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할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18:18을 보면 전자의 의미가 합당한 것처럼 보인다. 거기서는 동일한 표현이 교회의 권징 절차를 생각하게 하는 그런 식의 연관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16장에서는 매고 푼다는 비유적 표현이 이처럼 제한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히려 반대로 거기 나타난 (p.79)표현 모두가 지극히 일반적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여기서 말씀하는 열쇠란 십중팔구는 바깥 문의 열쇠가 아니라 집 전체와 관련된 열쇠일 것이며, 문지기의 열쇠가 아니라 집 전체를 관리하는 관리인의 열쇠를 뜻할 것이다. 그러므로 열쇠는 집 전체의 사안을 운영하는 것을 상징한다(참조, 사22:22; 계3:7).
그러나, 이 둘 가운데 어느 견해를 취하든지, 천국이,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이 땅에 존재하는 무엇인 것으로 나타난다. 베드로는 이 땅에서 매고 풀도록 천국 열쇠를 받는다. 그가 이 땅에서 그 나라의 경영을 위하여 행하는 일이 하늘에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 약속이 베드로를 교회의 초석으로 말씀하는 선언에 곧바로 이어서 주어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둘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신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이 두 말씀에서 본질적으로 똑같은 집이라는 비유적 표현이 사용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를 잘 알 수가 있다. 먼저, 집이 베드로를 기초로 하여 세워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으로 묘사하며, 다음에 그 동일한 집이 완성된 것으로 나타나고 베드로에게 그 집의 문제들을 운영하는 열쇠가 주어진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첫 번째 말씀에 나타나는 집과 두 번째 말씀에 나타나는 집이 서로 다르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 교회를 하나님 나라(천국)라고 부를 수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확신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 살펴보게 되겠지만, 교회가 모든 상황 속에서 항상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이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교회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공동체의 특질을 지닌다. 그것은 하나의 집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성격은 예수님의 교회로 대치되는 바 구약의 교회의 성격이기도 하며, 에클레시아라는 명칭 그 자체에서도 그대로 표현되는 것이다. 에클레시아란 사회의 복지에 대하여 논의하고 조치를 취하기 위하여 불러서 모인 자유 시민들의 회합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초기의 가르침에서도 그가 하나님 나라를 사람들의 유기체의 측면에서 보았다는 흔척들이-물론 그런 것이 아주 두드러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나타나고 있다. 마20:25; 막9:35; 눅20:25등의 말씀들은 최소한 하나님 나라의 관념이 이 세상의 나라들을 지배하는 원리와는 완전히 다른 원리에 근거한 하나의 사회임을 시사해준(p.80)다.
사실상, 예수께서는 자신의 주위에 제자들의 무리를 불러 모으셨으므로, 주님이 그들의 상호 연관성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이 의도하는 바가 시작되는 것을 보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알곡과 가라지 비유와 그물 비유는 물론 그 요점이 마지막 때까지 선한 자와 악한 자와 서로 뒤섞여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비유는 모두 똑같이 하나님 나라를 사람들이 모여 형성한 하나의 무리로 보는 사고를 암시해준다. 마13:41의 “그의 나라”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교회에 대한 나중의 선언에 가장 근접하는 사상을 접하게 된다. 이 “인자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교회”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메시야를 통치자로 하여 구성되어 있는 하나의 사람들의 모임체로 본다는 점에서 서로 일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만일 교회가 여태까지 우리 주님의 가르침에서 그렇게 두드러지게 나타난 내적이며 불가시적인 하나님 나라를 넘어서서 발전하는 것을 뜻한다면, 그 발전은 그것이 제자들의 모임체와는 다른 어떤 것이 된다는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발전은 두 가지 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로, 기존의 제자들의 모임체가 이제 구약의 교회를 대신하게 되며, 따라서 그 모임체가 어떤 외형적인 조직체의 형식을 취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면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까지 갖지 못한 면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본질에 있어서만 내적이며 불가시적인 성격을 띤 것이 아니라, 외형적인 구체적 형태도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집과 그 집의 열쇠에 대해서, 이 땅에서 매고 푸는 일에 대해서, 교회의 권징에 대해서 말씀하심으로써, 이러한 외형적인 조직체의 면에 대해서 시사하시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 주님은 자신의 메시야직이 이제 곧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어가게 되며,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에 초자연적인 권능이 새롭게 부여될 것이며, 그리하여 그 나라로부터, 외형적으로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새로운 것, 즉 주님이 자신의 교회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 형성될 것임을 이해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주님이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선언을 하신 직후에 따라오는 하데스의 문에 대한 말씀에서도 이를 가리키는 면을 찾을 수가 있다. 어떤 이들의 주장에 (p.81)의하면, 이 말씀은 죽음의 영역으로서의 하데스와 생명의 영역으로서의 교회와의 사이의 갈등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곧 죽음이 교회를 정복하지 못할 것이라든가, 또는 교회가 죽음을 정복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며, 이런 약속에 대한 근거는 예수께서 곧 죽음에 대해서 승리를 거두시고 그의 교회를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생명으로 가득 채우실 것이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계1:18). 그러나, 이 구절의 정확한 번역은 아마도, “하데스의 문이 능가하지 못하리라”일 것이다. 하데스의 문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힘을 상징하는 표현인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문을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번역을 취하고 보면, 우리 주님은 단순히 교회가 사람이 알고 있는 가장 강한 것보다도 더 강할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 된다. 이 표현은 곧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운다는 관념을 한 걸음 더 구체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사역의 말기의 동일한 시점에 속하는 다른 말씀들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이전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하나의 새로운 권능으로 임할 것임을 예언하시는 것이 나타난다. 마16:28; 막9:1; 눅9:27; 마26:64; 막14:62; 눅22:69등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그의 나라에 임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 일은 가까운 미래에 일어나서 그 당시에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것을 직접 목격할 자들도 있다고 하신다. 이 말씀들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은 이것들이 세상의 종말에 임할 마지막 하나님 나라의 강림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를 취하는 자들은, 우리 주님이 그 문제의 사건이 가까운 장래에 있을 것으로 보신 점에서 오류를 범하셨고, 따라서 그의 가르침의 무오성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고 만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이 말씀을 하나님 나라가 교회 안에 강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가 있다. 이 말씀들이 아주 강한 표현을 취하고 있지만, 그 표현들의 이런 해석을 막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이 표현들이 다른 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강림을 말씀하실 때에 사용한 어법을 매우 닮았다는 것은 인정하여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이며, 예수님이 (p.82)그의 나라에 임하는 것이며, 심지어 예수께서 하늘 구름을 타시고 임하시는 것을 말씀한다. 그러나 교회가 처음 등장할 때의 모습이 어떠했으며 예수님 자신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그 가까운 미래에 있을 그 상황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면, 이런 표현들을 쉽사리 해명되는 것들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놀라운 현상들이 초대 교회 시대에 일어나게 되는데, 그런 현상들은 어떤 점에서 세상의 종말에나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만큼 정말로 놀라운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것 말고도, 성령께서 교회 안에 임재하셔서 그 전보다도 훨씬 일상적인 형식으로 활동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이런 강한 표현들을 써서 묘사하여야 할 만큼 놀랍고 엄청난 것이었다. 교회는 실제로 다가올 세상의 권능들을 그 자체 내에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영광을 입으시기 전에 존재하던 내재적인 하나님 나라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교회는 현재의 삶과 영원의 삶 사이를 직접 이어주는 연결체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형태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우리 주님의 개념이 얼마나 철저하게 초자연적인가를 가장 잘 볼 수 있다. 우리 주님은 이 교회의 출현을 그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에서 바라보신 것이다. 주님은 그 교회의 주요, 왕이 되실 것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교회의 형태를 취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 땅에 사는 우리를 위하여 마련된 마지막 하나님 나라 사이에 날카로운 구분이 없었다. 주님에게는 모든 것이 성취되는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그의 부활과 승천으로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이 다가오는 단계를 마지막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생각하게 할 수도 있는 그런 어법으로 말씀하셨다 해도 전혀 부자연스러움이 없는 것이다.
이 구절을 이외에도 마18:20의 진술이 있는데, 여기서는 우리 주님께서 자신이 그의 제자들 가운데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임재해 계실 것을 약속하시는데, 이 약속은 마지막 하나님 나라의 강림 이전에 그가 임한다는 관념을 조명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요한복음에 주님의 마지막 강화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이 문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잘 이해하도록 도움을 얻을 수가 있다. 여기서 주님은 자신이 성령 안에서 제자들에게 임하실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세상의 마지막에 있을 그의 강림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그런 방식으로 임하시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자신을 드러내시지 (p.83)않을 것이나, 제자들은 그의 강림을 친히 목격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 이후에 육체로 나타나신 사건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계속해서 임재해 계실 것을 말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인용한 공관복음의 진술들과 매우 흡사한 점을 보게 된다.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요한복음의 다른 곳에서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 그 자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전혀 별개의 두영역으로 분리시키는 견해는 모두가 우리 주님의 가르침의 흐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메시야직이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결과로 취하게 된 하나의 형식이다. 교회의 회원의 범위에 관한 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불가시적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도록 만든다. 둘 중 하나에 속하면서 다른 하나에 속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요3:3,5에서 거듭남이 아니고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거나 그리로 들어갈 수가 없음을 분명히 선언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 나라는 불가시적 교회와 마찬가지로 진실로 중생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오직 중생한 자만이 그 나라의 권능을 체험하며 그 나라의 의를 배양하고 그 나라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다.
물론, 이처럼 범위가 동일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중생한 자를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로 부르는 그런 관점에서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하여 이런 방향에서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었다. 하나님을 통치자로 모시고 그와 관계를 맺는 신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지칭하며,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그들 서로서로 유기적인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들을 교회로 칭한다는 식으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교회는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의 자세를 가진 신자들을 지칭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서로를 향하여 윤리적으로 활동하는 신자들을 지칭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을 그들이 이상적인 질서를 예배하며 소개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관점에서 본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그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을 그들 가운데 그 이상적인 질서가 원칙적으로 실현되고 (p.84)있다는 관점에서 본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유의 구분은 나름대로 교리적으로 유용하고 반대할 이유가 없다.
다만, 이런 구분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나 교회나 중생자로 이루어진다는 사실과 불가시적 교회 그 자체가 그 내적인 본질, 하나님과 및 그리스도와의 관계, 참된 하나님 나라를 결정하는 그 원리 속에 있다는 사실이 흐려지지 않아야 한다. 불가시적 교회는 하나님의 대변자로서의 메시야의 다스림을 받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시적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여기서도 우리는 또다시 우리 주님께서 가시적 교회를 그의 나라의 진정한 구현으로 보셨다는 점을 강조하여야 할 것이다. 불가시적 교회가 하나님의 왕권을 실현하기 때문에, 가시적 교회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성격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매고 푸는 권세가 교회에게 주어졌다는 관념이 천국의 열쇠라는 비유적인 표현을 통해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을 살펴본 바 있다. 우리 주님은 이 권세를 전수하심으로써 가시적 교회를 다스리는 왕으로서의 역할을 하시는 것이다. 마13:41에서 천사들이 마지막 날에 인자의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제거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인자의 나라는 다름아닌 바로 가시적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가시적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왕으로서의 왕위에 오르심으로써 구성된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그의 왕적인 권위를 충만히 발휘하셔서 복음을 전파하며, 열방을 제자로 삼아 가르치고 세례의 성례를 시행하라는 지상 명령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불가시적인 영역 속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가시적 교회라는 하나님 나라의 유기체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의 왕이시며 교회 조직 내에서 시행되는 모든 권위가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교회 정치의 중요한 원리로서, 하나님 나라와 가시적 교회를 서로 구분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은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시적 교회가 반드시 불가시적인 하나님 나라의 유(p.85)일한 외적인 표현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왕권은 물론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 속에 스며들어 그것들을 통제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것이 분명하다. 누룩의 비유가 이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인간의 삶은 각기 다른 영역 속에서 활동하며 스스로를 구체화시키고 있다. 과학의 영역이 있고, 예술의 영역이 있으며, 가정의 영역과 국가의 영역이 있고, 상업과 산업의 영역이 있다. 이런 영역들 가운데 어떤 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영광의 원리의 영향력에 지배를 받게 되고 그 자체에서 그 영향력이 외적으로 드러나게 되면,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현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가르침 속에서는 이런 것들에 대한 언급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주님은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여한 하는 크나큰 신앙적․도덕적 원리들을 제시하시는 것으로 만족하셨다. 그 원리들을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문제를 가르쳐 주는 것은 주님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를 인정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모든 만물 속에서 역사한다는 깊고도 넓은 확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인간의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나라의 일부분을 이루는 목적을 갖는 것으로 바라보지 않으실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둘째는,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을 가시적 교회에 종속시키려 하신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옛 언약 아래서는 이런 성격의 것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신정정치 체제에서는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범위 전채를 지배했었다. 국가와 교회가 지극히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최소한 이런 점에서만큼은 옛 언약의 조건들이 영구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셨다(참조, 마22;21; 요18:36; 19:11).
그러므로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에 적용되는 그 원리는 가시적 교회와 인간의 유기적 삶을 구분 짓는 여러 가지 다양한 삶의 가지들과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이것들을 하나님 나라 밑에 포섭시키고, 그것들을 이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현현으로서의 가시적 교회와 조화를 이루도록 만드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담긴 정신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 여기서 하나(p.86)님의 주권과 그의 영광이 그것들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한편 언제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지배적 원리가 되려면, 이 모든 것이-가시적 교회를 포함해서-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초자연적으로 소개되는 중생의 능력과 살아 있는 접촉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시적 교회와 기독교 국가, 기독교 예술, 기독교 학문들의 것들을 구분하는 것이 적절하지만, 이런 것들도, 만일 그것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진정으로 속하여 있다면, 불가시적 교회의 중생된 생명에서 성장하여 나오는 것이라 하겠다.
이미 진술한 바와 같이, 이 주제에 대해서는 우리 주님이 명확하게 드러내어 가르치지 않으셨고, 따라서 이 주제는 추측을 통해서만 다룰 수가 있다. 알곡과 가라지 비유와 그물 비유가 교회보다 넓은 범위로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다는 주장이 가끔씩 있어왔다. 이런 주장이 제기된 것은 이 비유들이 하나님 나라에 선한 것들과 악한 것들이 함께 뒤섞여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데, 교회에서 권징을 시행하라는 명령이 있는 것을 볼 때에 이것이 교회 내의 다스림을 가리키는 것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해석하면, 이 비유들을 그런 식으로 추론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제자들도 함께 공유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당시의 교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하나님은 가장 먼저 선과 악을 절대적으로 영구하게 구별하는 일을 시행하시는 것으로 보았다. 그 나라의 역사를 두 단계로 구분하지 않는 한, 이런 추론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두 단계를 구분하시자, 하나님 나라의 마지막 강림에 적용될 수 없는 모든 것이 현재의 가시적인 형태의 강림에 포함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 두 비유는 이런 결과에 대한 하나의 경계로서 주어진 것으로 해석해야 마땅한 것이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제 실제로 임하고 있지만, 악과 선을 서로 완전히 분리하는 일은 세상의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이루어질 것임을 분명히 하고자 하셨다. 현재의 시대 동안 하나님 나라는 죄악된 환경에 드러나 있어서 제한성과 불완전성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외형적으로 조직화된 하나님 나라로서(p.87)의 교회에 대해서는, 이것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분명하다. 교회는 세상이라는 밭에 존재하고 있다. 마지막이 오기 전에는 어느 때에도 모든 악의 요소가 완전히 제기되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진리가 교회의 권징의 의무의 가능성을 저해하거나, 그 의무를 무효화시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마18:17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절차는 선한 자와 악한 자를 절대적으로 분리시키고, 그리하여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최종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그런 이상적인 순수함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은 교회를 그 교회의 고백에 합당한 거룩한 상태 속에 보존케 하기 위함이다. 공개적인 죄가 회개하지 않은 상태 그대로 있다면 신앙적 교제의 시행으로 말미암아 그 거룩한 상태가 파괴될 것이다. 권징의 최고의 목적은 치료하는 것으로서 죄인을 그렇게 홀로 내버려진 죄인을 구원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 비유들에서 가르치는 교훈을 잊거나 부인하지 않음으로써 이 두 가지 목적들을 추구할 수가 있다. 곧, 마음을 판단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만이 심판 날에, 외형적으로는 교회 안에 내재하고 있으나 내적인 영적 실체에 있어서는 그 교회에 속하지 않는 모든 악의 요소들을 오류가 없이 교회에서 제거하실 것이다.
은혜와 영광(GRACE AND GLORY)
제 1 장 놀라운 나무
p.117.
호세아에게 있어서 이러한 귀중한 진리를 나타내주는 가장 힘있고 과연 최종적이며 절대적인 표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서로 혼인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데서 나타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언약의 관념을 좀더 상세하게 구체화시킨 것으로서 우리에게 해당되는 면, 곧 하나님과 그 백성의 연합의 인격적인 면을 정확히 드러내줍니다. 이 혼인 관계라는 표현이 사안의 본질상 쌍방에 다 해당되는 것이지만, 특별히 하나님에 관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해서 이스라엘도 여호와께 인격적으로 스스로를 굴복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어릴 때에 응답했다는 말씀이 있고, 또한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렘2:2).
그러나 처음에만 그러했습니다. 그후 이스라엘은 곧 무관심해졌고, 불신실해졌습니다. 이 메시지의 뜻은 영원하며 불변한 성격을 지니신 여호와께서 그 언약의 관계를 계속 지키셨다는데 있습니다. 여호와는 한 순간도 이스라엘의 인격적이며 친밀한 삶의 동반자된 신분을 떠나신 일이 없습니다. 그 언약이 유보될 수도 있으나, 그 언약이 지속되는 한, 이것 이외에 다른 의미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그 언약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미세한 표현들을 통해서 선지(p.118)자는 자신이 그것을 의식하고 있음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판으로 말미암아 처절한 재난이 온 백성을 압도하고 더 이상 아무 것도 쓸어갈 것이 없는 상태가 된 다음, 다른 모든 것을 무의미한 상태로 만들어버린 그 이스라엘의 행동으로 인하여 여호와께서는 이제 스스로 이스라엘에게서 인격적으로 물러서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것과 상응하여, 그들이 여러 날을 포로의 황폐한 상태 속에 지낸 후에(그러나 하나님과 이혼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회심하여 돌아서는 첫 번째 가장 중요한 단계는 바로 말일에 그들이 여호와와 그의 선하심을 향하여 떨며 나아온다는 것입니다.
메시야의 관점에서도 이러한 강한 인격적인 시각이 나타납니다. 선지자는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서 그 백성들이 마지막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의 이름에 확실한 언약의 긍휼하심이 연루되어 있음을 기억하고서 다윗을 그들의 왕으로 구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그리하여 그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사랑을 베푸실 것을 스스로 보증하고 있습니다. 외형적이고 세속적인 은총들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p.119)영적인 영역에서도 모든 것이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지적할 필요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편안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값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패물로 주신 선물은 곧 의와 긍휼과 신실함과 인자함입니다. 여호와께서 환난 중에 그들에게 보여주신 긍휼하심은 그저 보통 불쌍히 여기는 마음보다 훨씬 더 깊고 더 세련되고 더욱 영적인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그것은 헤세드, 곧 인자함입니다. 즉, 부드러운 사랑을 통해서 천배나 더 강화된 (p.120)긍휼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은 연민의 마음이 아닙니다. 연민의 마음은 그 자체가 영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 신비한 구원의 역사의 주변을 맴도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의 역사는 사랑과 은혜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둘째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주셔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소유하고 누리게 하시는 것은 바로 둘만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결혼의 이미지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호세아는 이 결혼이라는 상징을 지극히 이상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적어도 그 당시의 관습에 비하면 그렇습니다. 호세아서의 처음 세 장이 알레고리냐, 아니면 실제의 역사적인 사실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위하든, 그 내용이 호세아 선지자의 독특한 체험에서 나온 것이든 독특한 환상을 통해서 나온 것이든 간에, 선지자가 결혼이라는 것을 언약을 설명하는 하나의 이상적인 비유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이상적인 형태의 결혼은 언약의 본질적인 특질들을 가장 성실하게 보여줍니다. 언약 관계의 순수한 영적인 면을 강조하는데는 이런 이상적인 결혼보다도 적합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결혼의 비유는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를 훨씬 능가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본질상 자유로운 선택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가 보는 대로 결혼의 결속된 관계는 영적인 과정을 통해서 세워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후에 이스라엘에 대한 애정을 추구하시고 그것을 키워가셨습니다. 그는 태초부터 그렇게 하셨고 미래에도 다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선지자는 그 결혼의 이상을, 그 연합 관계의 아름다운 완전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복된 상태를 그 이전의 관계가 회복된 것으로 묘사하지 않으려고 무진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죄악의 구름이 그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도록 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묘사의 일관성을 무시합니다. 보상이나 재혼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과거는 모두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죄의 얼룩이나 냄새도 없애버립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그 망각의 바다에 완전히 묻어버리고 거기서 미래가 하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청년 시절 처음으로 피어나는 새롭고 다시 반복되지 않는 사랑으로 모두에게 (p.121)그 향기를 뿌립니다: “내가 진실함으로 장가들어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그런데 이제 이처럼 이상적인 언어로 묘사하는 현상은 언약의 상호 배타성에서도 나타납니다. 선지자는 혼인 언약을 맺은 남편에 대해서도 그 언약의 아내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으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호세아 당시의 관습은 전혀 이상적인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때에 명확한 이해와 약속으로 그렇게 하시는 데, 이는 다른 어떤 백성에 대해서도 행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이스라엘에게만 독특하게 행하셨으므로 이스라엘도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만 사랑과 섬김으로 돌려드려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도 현실은 여기 나타난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제 2 장 의에 주리고 목마름
p.131.
산상수훈은 우리 주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위치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산상수훈은 권위를 지니며 윤리적인 표준을 제시하며 신앙적 생활의 높이와 깊이를 드러내주는 것으로서 복음서 어느 곳에서도 이를 능가하지 못합니다. 복음서 기자들도 이것을 기록할 때에 이런 사실을 의식했던 것 같습니다. 마태는 이 강화를 그저 보통하는 식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관용적인 문구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입을 열어 가라사대”라고 아주 엄숙하게 소개하고, 그리하여 이 말씀을 발설하는 행위가 예수님 자신이 의도적으로 행하신 행동이었다는 점을 깨닫게 해줍니다.
누가도 다음과 같이 진술하여 이와 다소 동일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눅6:20)......
(p.132)사실상 마태복음의 경우 여기서 ‘제자’라는 단어가 처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께서 “앉으시고”제자들이 가까이 나아와 그들을 가르치셨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청중들이 주위에 둘러 서서 있는 가운데 앉아 있는 것은 스승과 제자들의 관계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자세입니다. 이는 선지자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서서 외치는 자세와는 구분되는 것입니다.
이런 세부적인 묘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인 관심사는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로 신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이 ‘산상수훈’의 목적에 대하여 너무나 널리 퍼져 있는 한 가지 견해에 대해서 경고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강화를 가리켜 예수님의 메시지의 간단한 요약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기독교의 정상이라고 하고, 우리 종교의 본질적인 것을 가늠하는 시금석이라고들 합니다. 이 강화에 나타나지 않는 것들은 무시해도 별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가르침의 형태를 성경 전체를 표준으로 판단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말씀 전체의 권위로 판단하는 것도 아니고, 이 강화 하나의 내용으로 판단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오류가 생기는 원인은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진리가 너무나 아름답고 영광스럽기 때문에 신약의 다른 곳에 나타나는 진리는 모두가 이것과 비교할 때에 그 가치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갖게 되기가 쉬운 것도 한 가지 원인일 것입니다.
두 번째 원인은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신앙의 문제에서 자기들의 절제되지 못한 취향과 느낌에 자기 자신들을 전적으로 내어맡긴다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어렵고 딱딱한 신앙과 실천의 규칙은 모조리 경멸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무차별적인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신앙의 모든 (p.133)역사적 결속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이들은 산상수훈처럼 아주 고귀하게 보이는 복음서의 몇몇 부분을 위하고서 마치 신조라는 의복 가운데 마지막 남은 조각을 부여잡듯이 그것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기들의 주관적인 사고의 벌거벗은 모습을 가리려고 애를 씁니다. 이렇게 해서 산상수훈은 신조가 없는 자들의 신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드는 가장 영향력 있는 힘은 그런 생각이 자연인에게 주는 아첨에서 나옵니다. 그런 견해는 그로서는 이러한 높은 이상을 드러내 보이기만 하면 그만이며, 또한 예수께서도 그가 자기의 자연적인 선한 본성으로 그것을 이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아첨을 떱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산상수훈을 탁월한 것이라고 찬양해마지 않는 것은 산상수훈 속에 나타나는 내용 때문이 아니라 거기 나타나지 않는 내용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로 말미암아 어찌할 수 없는 처참한 상태에 빠진 이야기를 싫어합니다.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철저하게 가증스런 존재가 되었다는 것도, 십자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도, 모두 싫습니다. 사람들이 산상수훈을 자기들의 고귀한 신조로 삼기를 그렇게 염원하는 것은 바로 그런 혐오스런 내용들이 거기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과 복음서 기자가 산상수훈을 분명히 제자들을 위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으며, 따라서 제자가 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나 구원의 역사와 그에 응답하는 믿음의 역사의 그 풍성한 관계나 부르심과 회개와 죄용서와 예수를 영접하고 그를 따르는 일 등, 사람들을 그런 제자들로 만들어 주고 예수님을 그의 다른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그런 주님이요 구주로 만들어주는 모든 내용들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교의가 여기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 교의는 예수님 자신으로, 성육신하신 살아 있는 교의로서 여기에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이 육체로 계시던 시절에는 신약 서신서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에 관한 명확한 가르침이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 시절 참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사람들 가운데 다니시고, 죄인들과 어울리(p.134)시면서 구원의 그 과정을 그 어떤 개념적인 교의보다도 훨씬 더 인상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볼 수 있는 눈만 있으면,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나는 바깥의 장면들 속에서도 로마서의 교실 속에서와 못지 않게 우리 구주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에서도 구주를 찾게 될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여기서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이 구원이 필요한 죄인들로서 예수님과 관련을 맺었다는 것과 그들의 삶 전체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기반으로 사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 초두에 팔복에 대한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정문에 박힌 금으로 새긴 문구와도 같아서 예수께서 우리를 윤리 학교에 입학시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속의 나라에 영접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만들어줍니다. 이 팔복의 말씀에서는 바로 복된 상태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복되다는 낱말은 하나의 정신적인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를 영원토록 평안하고 안정되게 해주는 그 위대한 완성과 만족의 영역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팔복 가운데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헛됨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람의 절대적인 의존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마치 복음의 역사의 벽두에서 마리아가 찬양한 것처럼(“그가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1:52-53). 여기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와 온유한 자,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스스로 만족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의 부르심은 무언가를 힘써 행하라는 부르심이 아닙니다. 거룩함으로 애를 쓰라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무언가를 받으라는 초청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한 것입니다. 사실 주님의 부르심은 절대로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진정으로 의식하는 것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풍성한 것을 받는 구체적인 보증이라는 선언과도 같은 것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편에서 주시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 구원에 가장 합당한 자들은 바로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가 완전하게 역사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p.135)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바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그 구원의 은혜에 합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여기서 무한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 손에 영원의 보배들을 쥐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팔복의 두 번째 절들을 잠시 살펴봅시다. 여기서 말씀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현재의 삶 속에서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위로를 받는 것이나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나 하나님을 보는 것이나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은 이 땅에서 순례의 여정을 보내는 동안에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여기서는 이것들을 상대적인 상태가 아니라 절대적인 상태로 얻게 될 것을 예상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며,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게 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의로 만족을 얻게 되는 일은 완성된 생명을 누릴 때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팔복의 약속이 이처럼 절대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은 산상수훈의 얼굴에 구속의 원리를 크게 새겨 넣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피조물의 공허함과 하나님의 축복의 풍성함을 이런 식으로 한데 합치는 것은 바로 구주 하나님만이 지니신 특권입니다. 이러한 팔복의 음성이 분명하게 울려 퍼지는 한, 여기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종교 이외의 다른 어떠한 종교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p.136) 의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는 것으로서 전가를 통해서 우리의 것으로 바뀌어진 것이라는 바울 사도의 교의를 현재의 본문에 집어 넣어서 이해하는 것은 좀 투박하고 너무 단도직입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의 의의 관념과 사도 바울의 의의 관념이 원칙상 서로 다른 것이며 동일한 뿌리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훨씬 더 심각한 잘못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고 사실상 그 이전의 모든 계시가, 이 더할 나위 없는 바울 사도의 계시의 구조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p.138)산상수훈이 요구하는 율법 준수의 내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많은 설교가 있었고 많은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과연 그 말씀은, 마치 손을 뻗어서 남을 때리기 전에 마음속에 화가 일어났을 때에 이미 죄를 범한 것이듯이 의도 외형적인 행동이 아니라 그 의도와 기질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힘있게 강조해줍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이처럼 내적인 것을 강조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째서 선하고 악한 것을 그렇게 집요하게 속마음의 문제로 돌립니까?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사람이 하나님과 대면한다는 데 있습니다. 속 사람의 깊고도 깊은 곳에서 율법을 주신 분과 피조물이 얼굴과 얼굴을 대하게 되는데, 바로 거기서 만이 의의 문제와 죄의 문제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하나님의 뜻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다는 그런 뜻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하나님의 뜻 이면에 자리하고 있으며, 피조물은 바로 그 빛 속에서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속 사람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내적인 법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하나님이 그의 뜻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물론 그의 도덕적인 본성에 합당하게 행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p.142)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죄에 대한 확신이 생김과 동시에 시작됩니다. 사실 이런 요소가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참되고 깊은 회개를 죄의 이차적인 결과들에 대한 기타 다른 얄팍한 후회와 구별시켜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에게서 우연적인 모든 것들을 벗겨냅니다. 그것은 마치 아무도 아무 것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과 죄인과 그의 죄만이 들어가 있는 내실(內室)과도 같습니다. 다윗과 바울과 어거스틴과 루터 등 모든 위대한 회개자들도 그 내실에 들어가서 그 영혼의 처절한 고뇌 속에서 시편 기자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빌어서 자기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51:4)......
자신을 깨달은 죄인에게 주는 하나님의 첫 번째 은혜가 바로 여기에 나타납니다. 곧 깨끗이 씻겨주는 이 도덕적 진리를 홍수같이 그 영혼에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런 체험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통해서도 그 회개하는 자는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원칙상 다시 회복되었으며, 회개의 슬픔이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슬픔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믿음이 없이는 회개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요소 때문에 회개는 아무런 (p.143)소망도 없이 망연자실한 상태에 있는 잃어버린 자의 회한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구원의 회개로부터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하나님의 의의 요구 사항들이 가장 넓은 범위에서 만족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렇게 회개한 사람에게는 속죄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더 이상 과실이나 어리석은 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 본래부터 내재한 공의 때문에 그런 생각을 계속 하도록 격려를 받습니다. 만족의 교의는 종교적 사상가들이 그것을 정교하게 제시하기 훨씬 전부터 쓰라린 회개의 신학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변증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사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도록 저질러진 일입니다만 그러나 죄책 만큼은 반드시 풀어져야 하나님이 죄인들의 하나님으로 남아 계실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진리가 곧바로 바울의 속죄와 칭의의 교의로 이끌어갑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산상수훈이 그 자체를 해석하도록 한 사람들에게는 바울이 안식처로 삼은 십자가 이외에 다른 해결책과 피난처가 없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는 과연 인자의 살이 음식이요 그의 피가 음료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 있는 원리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주림과 목마름에는 또한 거룩한 삶을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주림과 목마름에는 또한 거룩한 삶을 통해서 제자로서의 의를 드러내 보이려는 열망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중심을 두는 것입니다......
(p.144)우리의 영혼 속에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은 그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 사람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하나님을 따라 창조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의 목적이 자기 속에서 좌절되지 않고 영광스러운 열매를 맺도록 합니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끊임없이 의지하여 그 일을 행합니다. 믿음의 영역을 칭의에만 제한시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거룩함 속에서 자라나는 모든 것이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인이 사는 환경이며, 그리스도인의 행함에 희생 제물의 성격을 부여하여 그것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감사하게도 그것이 그의 가장 깊은 죄라도 그는 절망하지 않고, 완전히 버린 바 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증거가 그에게 언제나 남아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베드로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p.145)여기서 우리 주님은 한 마디로 선지자들과 시편 기자들이 멀리서 보았던 것이 현실이 되는 시점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가 이제 곧 시작되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팔복의 말씀은 과거 기나긴 세월(p.146)동안의 예언들에 대해서 답변을 주는 복음입니다. 그 말씀은 절박한 백성에게 위로와 부와 긍휼히 여김과 아들이 되는 것과 하나님을 보는 것과 함께 의가 풍성히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그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과연 애통하는 자에게 무엇이 위로를 줄 것인가를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신 것처럼, 그는 의가 어떻게 죄를 도말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의를 주시겠다고 미리 말씀하셨다는 바로 그 사실이, 주님이 그 자신 속에 이 모든 것들의 근원과 골자를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 의식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뒤이어서 곧바로 율법을 해석하시면서 하나님의 계명과 함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자신의 권위를 제시하신 바로 그 예수께서는, 여기서 예언의 모든 풍성한 것들을 몸소 손에 쥐시고(이는 오직 예언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권위있는 선물로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임이요.”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
제 3 장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함
p.156.
과거 성육신하셨을 때에 인류를 찾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이 땅에 임하셨듯이, 주님은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조용히 임하시고 그 개개의 영혼을 찾으시며, 그리하여 방탕과 어리석은 길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때로는 거의 멸망 직전에까지 가 있는 그 영혼들 하나하나를 그의 은혜로 구원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전지하심만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주권과 전능하신 능력을 보게 됩니다. 삭개오를 찾으신 주께서는 그를 불러내십니다. 앉으뱅이를 뛰놀게 하며, 소경을 보게 하며, 귀머거리를 듣게 하며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낸 그 부르심으로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 부르심은 마치 처음 창조 때에 “빛이 있으라”라 하신 하나님의 음성과도 같습니다. 그 말씀이 있자마자 빛이 생겨나지 않았습니까?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 부르심으로 어떤 결과가 즉각적으로 일어나는지를 보십시다. 전에 주님을 만나본 일이 없는 이 삭개오, 감히 예수께 가까이 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이 삭개오는 주님의 말씀 한 마디에 그의 제자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는 목자의 음성을 즉시 알아듣고서 속히 나무에서 내려와서 바뀌고 있습니다. 그는 목자의 음성을 즉시 알아듣고서 속히 나무에서 내려와서 주님을 기쁨으로 영접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유효적 소명입니다. 이러한 유효적 소명은 죄인이 구원을 얻을 때마다 일어나며, 언제나 여기서처럼 갑작스럽게 그리고 놀라운 상황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서든 똑같이 초자연적인 성격을 지니며 또한 즉각적으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이 일어날 때에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날 뿐 아니라 그 효과를 통해서 그 속에 하나님의 전능하신 의지가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말씀으로만 결과를 일으키는 것이야말로 오직 하나님만의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존재하지 않는 사물들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부르십니다. 이리하여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부르심을 받았고, 삭개오도 그 음성을 통하여 목자의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제 5 장 더욱 귀한 직분
p.188.
구약의 구속의 명단에서는 모세보다 더 큰 이름은 없습니다. 선지자와 제사장과 동시에 율법 제정자로서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 위에 우뚝 솟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인 바울로서는 이스라엘의 우두머리 모세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 신성한 이야기의 풍성함을 오늘날 우리들보다는 천 배나 더 감동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스스로 모세보다도 더 크다는 생각을 감히 했다면 바울이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가진 의식은 그보다 얼마나 더 컸겠습니까!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고후3:10-11).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귀한 의식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흥분에 가득찬 상태에서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사역이 어떤 점에서 모세의 사역보다도 탁월한지를 조심스럽게 말씀합니다. 첫째로, 잠깐 있다가 사라질 것과 영원한 것을 서로 대조시킵니다. 바울은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옛 언약의 (p.189)영광은 사라질 것이요, 그에 반하여 새 언약의 영광은 계속해서 남아 있는 것임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 가까이에서 잠시나마 거한 다음 산에서 내려왔을 때에 그의 얼굴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빛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의 그런 광채는 오래가지를 못했습니다. 곧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로 의미하는 그것은 영광스럽긴 했지만 영구성을 지니지를 못했습니다. 그 광채가 사라질 날이 오고야 만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새 언약은 최종적이며 영구적인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 그것이 다하는 때가 오는 것도 아니고 역사가 발전하여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새 언약은 그 영원성에 대한 보증을 그 자체 속에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차이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모세와 바울은 모두가 각자 그런 상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얼굴에서 그 영광이 사라지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수건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도 그 사실을 알고 위해서 수건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보세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이렇게 당당하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고후3:13). 바울의 사고에 있어서는 모세의 사역은 그렇게도 속히 폐기되어 언약의 종으로서의 그의 영광이 사라질 수 밖에 없었고, 또한 바울 자신의 사역은 영광과 존귀를 입어서 그것으로 만족을 얻게 되며 또한 그 사역은 영원토록 지속되는 성격을 지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p.193)그 다음으로, 새 언약의 직분의 더 큰 차별성은 바로 그것이 주님과 그의 사역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경륜입니다. 새 언약이 소유한 것은 그저 일반적인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모세는 산 위에서 위대한 이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보다 더 위대한 이상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달리 표현하자면 거울에서 반사되어 오는 형태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울의 임무는, 그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자신이 받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반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그의 사역의 핵심인 것입니다.
제 8 장 그리스도인의 소망
p.239.
2. 이처럼 소망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나타나는 필수적인 결과는 현재의 이 땅의 삶을 하나의 여정으로, 순례의 행진으로, 마지막 목표를 위해서 필요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가치도 없고 매력도 없는 그런 것으로 여기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베드로전서를 뒤덮고 있는 사상입니다. 베드로는 이 서신서의 첫머리에서 독자들을 흩어진 나그네로 칭하고 있습니다. 이 낱말은 그들이 고향에서 떠나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표현해줍니다. 흩어진 유대인들이 거룩한 땅 가나안과 예루살렘에서 떠나 있는 디아스포라였던 것처럼, 독자들은 하늘과 관련하여 낯선 땅에 흩어져 있는 나그네들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여행자가 여행을 다닐 때에 하듯이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다시,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17)고 말씀하고, 또 말씀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로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합니다(2:11). 이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않고서는, 다른 세계에 마음을 둘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현재의 삶 속에 있으면 소망이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잘못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여기서 두 가지를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i) 세상과 이처럼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문제가 아니며, 또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내적인 성향의 문제입니다. 이 땅의 (p.240)세속적인 소유들을 스스로 부인하여야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들을 부인하면서도 그의 마음이 나그네와 행인의 마음과 거리가 멀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그것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음으로써 사도의 권면을 내적으로 순종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ii) 세상을 향한 그런 내적인 자세는 그저 우리들 스스로 현재의 삶을 사랑하지 말도록 강요해서 인위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건전한 정신 자세가 되기 위해서는 다가올 삶에 대하여 최고의 관심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소극적인 면은 적극적인 면의 결과로 나타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대한 사랑이 이 땅에 속한 것에 대한 무질서한 사랑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제 11 장 기독교의 본질
p.282.
마지막으로, 우리 주님이 자기 부인의 의무를 전하신 것은 자아가 죄와 동일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특별한 상황에서 자연적인 본능들이 하나님과 우리 이웃을 향한 사랑이라는 더 고상하고 중요한 관심사와 충동을 일으킬 경우에 그 본능들을 억제하여야 한다는 사실만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에는 악한 욕망과 육욕이 상존하는데, 영혼의 더 높은 생명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든 또 어떠한 희생을 치르든지 이런 욕망을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에게도,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그리스도인에게도, 두 가지 본성이, 두 가지 원리가, 두 자아가 있어서 서로 지배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하신, 다음과 같은 가장 날카롭고도 타협이 없는 말씀은 바로 이 천하고 죄악된 자기를 부인하는 의무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만일 (p.283)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30). 이 말씀은 곧, 본성적인 자아가 죄를 위하여 작용해서 영혼이 그것 때문에 위험에 처하게 될 경우, 제자는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이 든다 할지라도 자기를 거기서 끊어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경우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그야말로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죄가 나를 지배하려 하는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말씀은 죄의 행위에 빠지기를 거부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그런 외형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어디서도, 겉으로 드러난 죄의 결과들을 공격하면 그것으로 죄를 효과적으로 정복할 것이라는 식의 견해를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죄의 그 뿌리깊은 본질과 그 내적인 근원에 대해서 너무나도 깊은 견해를 가지셨기 때문에 절대로 그런 외형적인 치료법에 의존하지 않으셨습니다. 육체를 아무리 철저하게 죽인다해도, 그것으로 마음속에 있는 단 한가지의 악한 욕망의 뿌리도 뽑을 수가 없습니다. 고행으로 몸을 죽일 수는 있으나, 죄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내적인 것입니다. 오직 참된 하나님의 자녀만이 실천할 수 있는 그런 내적인 것, 곧 영혼의 고행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죄는 심지어 불신자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도 의지의 힘으로 스스로 제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더 깊은 영적인 자기 부인은, 곧 중생자의 의식이 스스로 천한 본성의 선동을 대적하여 그 욕망을 잠잠케 하고 굴복하게 하는 그런 일은, 불신자로서는 절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것을 가능케 해주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 속에 더 순결하고 더 고상한 자아가 형성되어서 그것이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대의를 일깨워주는 상태가 되지 않고서는, 죄악된 자기를 억제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나 성화의 과정 전체는 바로 자기 부인을 시종일관 계속해서 시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에서 이런 요소를 가장 깊이 간파했고 그것을 가장 일관성 있게 발전시킨 (p.284)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것은 회심, 곧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서 시작하며 육체의 삶 전체를 통하여 계속됩니다. 날마다 부인할 것이 있습니다. 날마다 억눌러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 자신이 버린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나의 육체를 치고 그것을 계속해서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넓은 의미에서 십자가를 진다고 부른 그것- 어려움과 역경을 견디는 일-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이끌어서 이런 죄악된 자아를 부인하고 억누르게 하는 그런 주요 형식 가운데 하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련과 십자가를 주셔서 지게 하실 때에는 언제나 우리의 개별적인 상태에 맞추셔서,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를 우리 스스로 정결케 하도록 도움을 주십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외형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시는 은혜로운 결과가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그저 그의 십자가를 지시기만 한 것이 아니고, 그 십자가의 정신을 지니시고 그것을 인정하시고 순종과 굴복으로 속죄를 위하여 효력을 드러내도록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스스로 주의 징계를 지고 가야9혹은 다른 구절에 나타나듯이,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살펴서 그 징계를 우리에게 보내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여야 하며, 또한 그 목적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도록 의도적으로 우리 자신을 이끌어 가야 할 것입니다.
제 14 장 은혜로운 양식
p.320.
그러나 절기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의 특징은 특별히 유월절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유월절은 무엇보다도 역사적인 절기였습니다. 그것은 애굽에서 그 백성을 구원한 사건을 기리는 것입니다. 그 구원은 희생을 통한 구원이요, 죽이는 천사로부터의 구원이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과 그들의 압제자들을 분명히 구분한 그런 구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이 절기를 지킬 때마다, 이 절기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적인 선택으로 말미암은 피를 통한 구속이 이스라엘의 역사적 존재의 기초가 되며, 이스라엘의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위대한 사건이었음을 새롭게 선포했습니다. 이 위대한 절기에 바로 이어서 무교절이 계속 이어져서 신앙적 성별에 땅의 경작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번영이 바로 이것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절기를 연결하여 지킴으로써 하늘의 축복 아래에서 사람들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모든 은총들이 해마다 새롭게 피로 말미암은 구속의 열매로서 새롭게 제시되었으며, 언약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초로 하는 것임이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처럼 우리가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 상 앞에 앉아있는 때에는, 주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잊어비리기 잘하는 속성과, 경건에 속한 가장 핵심적인 것을 보지 못하고 무수한 표면적인 임무와 표면적인 경험들에게로 쏠리는 우리의 경향을 잘 아시고서) 은혜롭게도 성찬을 제정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무엇이 중심이며 핵심인지를 지각하게 하시고, 그리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과 활동의 모든 문제가 걸려 있는 복음의 진수와의 접촉을 잃지 않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살펴보는 것이 우리에게 아주 유익하리(p.320)라 여겨집니다. 절기들이 이스라엘에게 한 역할을 성례들이 우리들에게 하는 것이며, 특히 성찬을 통해서는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마땅합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이 희생으로 드려졌으며, 우리가 성찬 예식을 행할 때마다, 주님 자신이 우리로 하여금 신자로서의 우리의 생명 자체가 의존하는 그것, 바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을 묵상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례는 우리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사실을 지적해줄 뿐만 아니라, 다른 점에서도 유월절과 같습니다. 즉, 성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압축된 형태로 우리의 정신 앞에 가져다 놓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사신 구원의 모든 범위를, 그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다 우리 앞에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성례를 통해서 기념하는 그것이 너무도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포괄적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속의 뿌리에 이 구속이 포괄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 규례를 주신 우리 주님의 지혜를 찬양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지혜가 임하여 우리의 인간적인 연약함을 채워주며, 또한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과 그의 은혜를 우리의 감각의 범위 내에 가져오고, 그리하여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 생명의 말씀을 우리의 눈으로 보며 우리의 손으로 만지며 입으로 맛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성례로 말미암아 우리가 복음의 중심에 사로잡힌 바 되도록 이끌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시대를 막론하고 어디서든 우리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규례를 지키는 곳에서는 성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위대하고도 전 포괄적인 원리를 영구히 선포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에게,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고 부탁하신 것은 그저 개인적인 감상에 젖어서 그렇게 하신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훗날 교회의 역사 속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 자신은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그의 사역과 그 절정에 다다라서 일어나게 될 그 최종적인 십자가의 죽으심의 진정한 의미를 잊어버리는 일이 얼마나 비근하게 일어날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복음의 정신이 흐려질 때마다 성찬은 그것을 대신해서 탁월한 증인의 역할을 계속해 왔습니다. 어떤 경우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는 유(p.322)일한 증인이기도 했습니다(이 성례의 사역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영혼이 구원받았겠는지 누구가 과연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성례를 이처럼 구속의 복음의 극치로서 이해하게 되면, 이와 비슷한 사도의 말씀-“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이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것입니다.
또한 현재에는 말씀의 사역을 통해서 언제나 어디서나 복음의 중심 진리를 분명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성례의 증거는 이제 필요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성례의 증거가 필요 없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가 무엇보다도 성례의 교회이듯이(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거기서는 말씀의 사역이 언제나 뒤에 감추어져 있습니다)개혁 교회는 무엇보다 말씀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다른 훌륭한 것들을 들을 수 있지만 정작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수단으로써의 십자가를 선포하는 명확한 가르침을 들을 수 없는 교회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설교자의 말씀도 설교자의 기도도 은혜의 복음의 요소를 담고 있지 못하고 겨우 찬송에만 그 요소가 담겨 있고, 거기서만 겨우 참된 복음적인 경건의 정신이 숨쉬고 있는 그런 교회에 출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교회에서는 과거의 전통이 현재의 사역이 행하지 못하는 그 기능을 대신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교회에서는 찬송 소리와 강단의 말씀 사이에 크나큰 괴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설교와 교회의 분위기와 목회 사역이 서로 어긋나서 주의 성찬을 진정으로 지키는데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요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구주 예수의 목숨을 주시는 사랑을 기념하는 성례에서 당연히 내어야 할 영적이며 복음적인 높은 음을 그것들이 정확하게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경우에서 복음 진리에 대한 노골적이고도 직접적인 부인이 있어야 거짓 교리를 전파한다고 볼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설교자의 의도와 실제의 설교 모두 교회의 역사적 신앙에서 이탈하는 면이 전혀 없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복음의 지적인 전달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것을 강조하지 못함으로써, 복음의 원리들과 정면으로 위배되며 그것들을 부인하는 경우와 거의 똑같은 결과를 낳게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p.323)것입니다. 무언(無言)으로 은혜의 복음을 배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지키도록 주께서 맡겨주신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반대함으로써 그리스도께 불충성할 수도 있지만, 그런 메시지를 전하지 않음으로써 불충성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비진리라고 말할 수 없고 그 적절한 위치만 지키면 그 나름대로 중요할 수도 있는 그런 것들을 주일마다, 해마다 설교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용서함 받고 죄로부터 구원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사람들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그럴 필요성에 대한 구체적인 인상을 주지도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저는 진리를 제시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적절한 비중에 대한 감각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복음의 중력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감각을 새로이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바울의 이상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행하는 설교 하나 하나가 전부 소위 전도 설교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전혀 시의적절하지 못하고 오히려 윤리적인 주제나 변증적인 주제 혹은 사회적인 주제를 다루는 말씀을 할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주제를 설교하고 어떠한 본문을 택하더라도, 설교의 시작부터 끝까지 청중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그들의 영혼이 얻은 영원한 구원의 결과로서 그런 모든 주제가 그 구원과 상호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아무런 인상을 전해 주지 않는 그런 설교가 여러분의 설교 가운데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죄악된 세상에서 솔직하게 제시할 수 있는 치료책이 바로 그것밖에는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과연 이를 행하고 있는가, 여러분이 설교가 이런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설교의 목적을 성례의 목적과 자주 비교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성례는 은혜의 수단으로서 서로 하나에 속합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동일한 수단의 두 가지 면과도 같습니다. 물론 서로 다른 감각 기관들에 전달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두 가지 수단은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p.324)는 의도로 주어진 것으로서 서로서로를 해석하며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의 개인적인 영적 생활에서 성찬이 아주 어색하고 거북한 것으로 느껴지고, 자신의 수준으로는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그런 특별한 영적 정신 상태를 요하는 것으로 느껴지고, 자신의 일상적인 종교적 경험의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서 성찬을 대할 때에 움츠러드는 것을 느낀다면, 그럴 경우,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그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구주 예수와 갖는 관계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들 자신이 그런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저 평범한 신자들로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서 우리에게 그 비슷한 경험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성찬 예식을 주관하는 자로서 생명의 떡을 나누어주기 위하여 성찬 상 앞에 설 때에 갖는 것과 동일한 기조를 우리의 설교에서도 그대로 유지하도록 조심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성찬 때에 행하는 것이 주일마다 강단에서 지금까지 행하여온 그것의 총체요 절정이라는 느낌을 일반 교인들이 받도록 합시다.
물론 시간이 있기는 합니다만, 여기서는 주의 성찬의 상징적 예식 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큰 지침들을 열거하는 것으로 족하리라 여겨집니다. 설교자는 항상 이 지침들을 염두에 두어서 설교를 통해서 바람직한 결과들이 나타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 지침들은 다음 네 가지입니다:
(i) 죄의 사실에 대한 분명하고도 힘있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특수한, 이따끔 나타나는 죄의 형태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생활에 근본 요소가 되어버린 가장 넓고도 일반적인 의미의 죄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목회 사역을 통해서 돌보는 사람들이 모두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죄인들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 일에 대해서 거짓으로 미묘하게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이 그들을 성찬 예식에서 받으시는 근거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ii)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적인 고난과 죽으심을, 그의 찢겨진 몸을 쏟아 부어진 그의 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죄의 씻음과 양심의 평안과 영(p.325)생을 얻는 유일하고도 충족한 수단이라는 사실에 대한 적극적이고도 분명한 확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구주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게 되면, 사람들에게 그 이외의 다른 것에 소망을 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이 점을 지적하셨고, 이것만이 주님의 사역에서 유일한 위대한 구원의 요인으로 역사했던 것입니다.
(iii) 그리스도와 함께 인격적으로 연합하는 효과를 내는 그런 믿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에서 나오는 공적들에 진정으로 참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그런 믿음만이 아니라 지금 하늘에 계시는 그에게 산 제사를 드리며, 신비하게 그를 기쁘게 하는 그런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그저 우리 힘으로 따를 만한 하나의 모범적인 인물로 기리고, 결국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배제해버린다면, 주의 만찬석상에서 우리에게 주신 주님 자신의 말씀이 이런 태도를 소리 없이 교정시켜 주지 않습니까: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느니라”?
(iv)그리스도를 그의 제물로 받아들이며 그의 거룩한 생명과의 교제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에게 죄를 버리고 거룩함에 행하여야 할 엄숙한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말씀-“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은 바로 이 네 번째 원칙을 특별히 염두에 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는 또한 이 원칙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는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그러므로 주의 성찬은 기독교 신앙의 전체를 다 포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강화시키는 수단이 된다는 주요 목적 이외에도, 성찬은 우리 자신을 점검하는 기회가 되는 부수적인 기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성찬은 우리에게 하나의 영적 이상을 제시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측정하도록 하며,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제시하신 정상적인 표준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나 개인신자로서 어떤 점에서나 미치지 못했는가를 점검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제 15 장 그리스도께서 의도적으로 행하신 일
p.338.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섬기는 일을 할 때에, 어리석게 이 세상의 악의 변두리만을 다루는 그런 일에 이리저리 규모 없이 우리의 정력을 소비하지 않도록 유념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일은 그 (p.339)광활한 슬픔의 바다에 순간적으로 잔물결을 냈다가 사라지게 하는 일조차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정력을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토록 더 나은 상태로 만들어주는 그런 일에 쏟아 붓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서 노력합시다. 그 일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하고 정결케 하는 다른 효과들이 우리의 섬김의 일에 연이어서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속죄에서 드러난 대로 한 사람의 역사가 많은 사람에게 파급되는 법칙이 우리의 경험에서도 반복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영혼의 노고를 보며 만족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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