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하나님의 나라’1)는 신약 성경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로서 자주 나타나는 개념이다. 세례 요한이 전파한 메시지의 핵심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2)이며(마 3:2), 예수님이 전파한 메시지도 똑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이다(마 4:17; 막 1:15 참조).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도 “천국이 가까웠다.”고 전파하였다(마10:7, 눅 10:9).
이를 보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전한 메시지의 중심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복음을 전하며 활동한 것을 누가는 사도행전 마지막에서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쳤다”고 요약하고 있다(행 28:31). 따라서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 곧 하나님의 나라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서신과 기타 서신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지 아니한다. 이것은 아마도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께서 이미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몸된 ‘교회’에 더 많은 관심이 기울여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생각할 때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 즉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오는 것일까? 하나님 나라의 주요 특징은 무엇일까? 이런 것들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한국 교회가 그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를 살펴보자.
I. 한국 교회의 하나님 나라 이해
우리나라 교회의 초창기에는 천국 하면 대개 ‘내세 천국’을 생각했다. 소위 ‘천당(天堂)’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이 생각하는 일반적 천국 개념이었다. 이는 최봉석
1) hJ basileiva tou' Qeou'. 다르게는 ‘하늘 나라, 천국(hJ basileiva tw'n oujranw'n)’으로 불리며, 또는 ‘그 나라(hJbasileiva)’, ‘아버지의 나라(hJ basileiva tou' Patrov")’, ‘그리스도의 나라(hJ basileiva tou' Cristou')’, ‘아들의 나라(hJ basileiva tou' UiJou')’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2) Metanoei'te, h[ggiken ga;r hJ basileiva tw'n oujranw'n.목사의 예수 천당 이라는 전도 메시지에 무엇보다 잘 표현되어 있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 - 이것이 우리 한국 교회가 그 동안 가졌던 천국관이요 복음 이해였으며, 이런 이해는 대략 197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70/80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천국 이해에 약간의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알지 못하나 일부 교회의 식견 있는 목사와 성도들을 중심으로 여태까지 너무 내세 천국만을 강조해 왔던 것에 대한 반성과 반작용으로 ‘현세 천국’을 이야기하는 소리들이 조용히 퍼져 나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도 각 개인의 마음이 천국이라는 ‘심령 천국론’에서부터 성도의 가정을 중요시 여기는 ‘가정 천국론’,나아가서 ‘교회 천국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교회에서 고개를 들었으며 이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반응을 얻어 갔다.
이러한 와중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개혁주의 또는 보수주의 신학에서 하나님나라를 더 이상 ‘장소적’ 개념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reign of God)’ 또는 ‘하나님의주권(sovereignty of God)’으로 보려고 한 시도들이다(G. Vos, G. E.Ladd,H.N.Ridderbos 등). 이 중에서도 미국의 게할더스 보스의 「하나님의 나라」라는 책3)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G. Vos는 그의 책 The Kingdom and the Church, 2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Inthe Old Testament) God's kingdom is always his reign, his rule, never his domain.”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In so far it is undoubtedly correct when modern writersinsist that in interpreting our Lord’s saying the meaning ‘reign,’ ‘kingship,’ shall be our point of departure, and warn against the misleading associations of the English word ‘kingdom,’ which in modern usage practically always means the territory or realm.”(p.22) 물론 그는 모든 곳에서 항상 “sovereignty of God”으로 번역하는 것은 부적절 하다고 바로 지적하고 있기는 하지만(p.23), 전체적으로 볼 때 그의 강조점은 역시 “reign,rule” 또는 “sovereignty”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G. E. Ladd도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나라’라고 할 때 그것은 ‘영역(realm)’, ‘유산(inheritance)’을 뜻할 수도 있다고 한편으로는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malkuth 또는 basileiva의 primary meaning은 여전히“rank, authority and sovereignty excercized by a king”이라고 말한다.4) 또한 그는 다른곳에서, 히브리어 단어 malkuth의 개념은 “reign,” “rule” 또는 “dominion”이라고 말하며,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basileiva의 개념은 “reign” 또는 “rule”이라고 말한다.5) 또한 Herman Ridderbos는 구약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하나님의 ‘왕 되심(koningschap)’ 또는 ‘주권(heerschappij)’으로 본다.6) 이러한 배경에서 그는 신약의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라는 메시지를 ‘모든 것을 포괄하는 구속사적 사실의 선포(de aankondiging van een 3) G. Vos, The Kingdom and the Church, 1903(reissued by Grand Rapids: Eerdmans, 1951). 이 책은 1971년에 정정숙 씨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우리나라에 영향을 많이 끼친 것은 원본보다 이 번역본으로 생각되는데, 특히 박윤선 박사가 이 책의 “머리말”을 쓰면서 Vos의 천국 개념을 ‘그이상 정확할 수 없는’ 올바른 것이라고 추천함으로써 더욱 무게가 실린 것으로 생각된다.
4) G. E. Ladd, The Gospel of the Kingdom (Grand Rapids: Eerdmans, 1959), 16-23.5) G. E. Ladd,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rev. ed. (Grand Rapids:Eerdmans, 1993), 60f.6) H. Ridderbos, De komst van het koninkrijk (Kampen: J. H. Kok, 1950), 25, 28.allesomvattende, heilshistorische werkelijkheid)’로 본다.
7)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주된 개념을 ‘주권’ 또는 ‘통치’로 보는 것은 장점과 아울러 단점을 가지고 있다. 먼저 장점으로는 1) 하나님 나라의 여러 측면들 중에서 영적, 비가시적 측면을 잘설명해 준다(마 12:28, 눅 17:20-21 등). 2) 따라서 이것은 현재의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주권’ 또는 ‘통치’로 볼 때 또한 단점도 있다. 1) 이렇게 될 경우 하나님의 나라가 추상화되고 구체성이 결여되는 단점이 있다.2)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갈망이 약화될 위험성이 있다. 예를 들어 병상에 누워서 죽어 가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통치를 뜻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그 사람에게 과연 위로가 되겠는가? 3) 이것은 또한 저 세상과 미래의 하나님나라(낙원 및 새 하늘과 새 땅)의 장소성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주권’ 또는 ‘통치’ 개념은 현재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는 데만 유용할 따름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 전체를 설명하는 데는 부족한 ‘좁은 개념’이다. 4) 더욱 중요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는 꼭 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도 있다는 사실이다(시 139:7-10). 만일 지옥에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벌 받는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제멋대로 놀고 있는 ‘난장판’이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는 사실로는 천국이 되기에 부족하고 하나님의 ‘의의 통치’, ‘축복의 통치’가 있는 곳,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곳이라야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치우친 경향을 인식하고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좀 더 균형 잡힌 이해를 하고자 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대개 basileiva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reign)’뿐만 아니라 ‘영역(realm, sphere)’까지 인정하는 점에 있어서 옳은 방향으로 진일보하였으나,8) 그러나 아직 하나님 나라의 ‘영토(territory)’ 또는 ‘공간(space)’적 측면을 충분히 인정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9)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대략 80년대 이후에 내세 천국뿐만 아니라 현세 천국도 강조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기여한 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너무 내세의 소망에만 치우쳐 현세 천국을 간과7) Ridderbos, De komst, 33. 이러한 Ridderbos의 견해는 그에게 있어 특징적인 ‘구속사적 해석(heilshistorische uitlegging)’에서 나온 것으로 ‘성취(vervulling)’의 측면과 ‘집합적 인간(corporate personality)’을 강조하는 해석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의 Paulus. Ontwerp van zijn theologie, 5e dr.(Kampen: J. H. Kok, 1978; 초판: 1966), 34-39를 보라. 또한 변종길, “헤르만 리덜보스의 「바울 신학」에 나타난 주요 문제점”, 「개혁신학과 교회」5(1995), 39-70을 보라.8) 예를 들어 정훈택 교수는 “하나님의 통치와 왕권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의미이나 이것들은 하나님 나라의 공간적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한다(H. T. Chung, Aan hun vruchten zult gij hen kennen(Kampen: J. H. Kok, 1989), 110). 그래서 그는 하나님 나라의 공간적 의미를 충분히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는 이것을 ‘영토(territorium)’로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는 ‘범위, 영역(sfeer)’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경우는 예수님에 의해 주로 구원의 상태와 축복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해는 물론 ‘현재의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데는 아주 훌륭한 역할을 하지만, 문제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와 ‘현재 저 세상의 하나님 나라’(소위 낙원, 천당)를 설명하는 데는 부족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의 하나님 나라뿐만 아니라 미래의 하나님 나라와 낙원까지 다 포함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에는 그 ‘나라’의 개념에 ‘범위(sphere)’ 또는 ‘영역(realm)’ 개념뿐만 아니라 또한 ‘영토(territory)’ 개념까지 포함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시각을 크게 넓혀야 한다.9) 오병세 박사도 현금의 하나님의 나라 논의에 있어서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新約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고신대학 논문집」제14집, 1986), 125를 보라. 세 도피적 경향을 띠었던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고, 현재 이 세상에서 이루어 나가야 할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사명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80년대 이후의 경제적 풍요와 함께 이 세상도 살 만하다는 ‘현세안주적 사고’ 내지는 내세의 소망을 망각하고 현세의 안락함을 누리려는 ‘현세 향락적 시대 풍조’와맞물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크다.
II. 하나님 나라의 요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생각할 때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하나님나라의 여러 요소들을 고루 다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무리 없이 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네 가지를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다.
1) 왕‘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때 ‘나라(basileiva)’란 왕(basileuv")이 다스리는 ‘왕국(kingdom)’을 뜻한다.10)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대표를 뽑아서 나라를 다스리게 하는 제도가 ‘민주공화국’이라면 왕이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나라가 곧 ‘왕국’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왕 되신 ‘하나님’ 또는 ‘예수님’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이야기는 늘 왕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볼 수 있다. 천국에 대한 비유 중에서 “천국은 ···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 22:2), “천국은 마치 ··· 집주인과 같으니”(마 20:1) 또는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마 13:2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마 13:44; 골 2:3 참조) 등이 모두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또 ‘예수를 전파하다’와 거의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다’라고 말하고 있는 사실(행 8:12, 20:25, 28:23, 31 등)에서 이러한 면을 볼 수 있다.
2) 백성하나님 나라에는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 만약 백성이 없으면 그 나라는 텅 빈 나라가 될 것이요, 신하와 백성이 없이 혼자서는 왕 노릇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왕에 백성이 있을 바에야 많을수록 좋다. 그래서 옛날엔 그 나라에 아기가 태어나면 왕이 기뻐하였다. 잠언 14:28에 보면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요”라고 했다. 이 이치는 하나님의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많아지면 무엇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10) basileiva라는 단어가 basileuv"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으며 따라서 우선적으로 “das Sein, das Wesen, der Zustand des Königs”를 가리킴에 대해서는 K. L. Schmidt, “basileiva,” in: TWNT, I, 579f.를 보라.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곧 성도들이며 이는 출생함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거듭남으로, 즉 회개하고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요 1:12,13, 3:3,5).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 방법은 전도를 통해 되는 것이고 말씀 전파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뜻하는 의미로 자연스럽게 쓰여질 수 있음은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증거하고 있다. 구약에서 중요한 구절은 출애굽기 19:6로서 여기서 ‘제사장 나라(mameleketh kohanim)’는 분명히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을 가리킨다.11) 신약에서는 예수의 비유 중에서 “천국은 마치 ··· 겨자씨 한 알 같으니”(마 13:31)라고 한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뜻한 것이라면 이는 아무래도 하나님나라 ‘백성’의 증가에 초점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마 13:38 참조), 또한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마 21:43)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요소들 중 ‘백성’의 요소가 부각되었다고볼 수 있다.12)
3) 땅(영토)그 다음으로 우리가 고려할 요소는 ‘영토(territory)’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장소적 또는 공간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만약 하나님 나라에 영토(공간, 처소)가 없다면 왕과 백성들이 거할 처소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신앙은 공중에 뜨게 되며 우리가 바라는 소망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monaiv)’이 많다고 하였으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처소(tovpo")’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다(요14:2). 그리고 베드로는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고 하였다(벧후3:13). 게할더스 보스와 조지 엘든 래드, 헤르만 리덜보스 등이 하나님 나라의 ‘주권’ 또는 ‘통치’를 강조한 것은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으나, 그것이 가지고 있는 약점은 하나님 나라의 장소적 측면을 많이 약화시키고 말았다는 점이다.13) 그들은 그들의 주장의 근거로 신약의 basileiva의 배경이 되는 구약의 malkuth, mamelakah 또는 mamelakuth는 장소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나, 그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며 사실이 아니다.14)
11) LXX에는 basivleion iJeravteuma로 의역되었으며 이 표현이 벧전 2:9에도 나타난다. 어느 곳에서든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가리킴에는 변화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이 이 중요한 구절을 예외로 취급하고서(예를 들면 G. Vos, The Kingdom and the Church, 21), 구약에서의 malkuth 또는 mamelakah의 주된 개념은 ‘주권’ 또는 ‘통치’라고 한 것은 편파적이다.12) 물론 이 두 구절에서 ‘나라’는 ‘백성’보다는 넓은 개념이다. ‘나라’는 여러 요소들을 포함한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 여러 요소들 가운데서 여기서는 아무래도 ‘백성’의 요소가 좀 더 부각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외에 ‘세상 나라’에 대해서 ‘백성’ 개념이 부각된 예로는 마 12:25, 24:7; 눅 11:17 등이 있다.13) 이런 부작용을 고려해 본다면 우리 한국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져왔던 내세 천국 사상도 상당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들은 최소한 내세의 소망을 확실히 붙들고서 어려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았으며, 그 중에 어떤 성도들은 일제하의 모진 고난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것이다.14) 단 11:4에서는 malkuth가 영토적 측면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으며, 에 5:3,6, 7:2은 분명히 영토로서의 나라를 가리킨다. 민 32:33의 mamelakah도 분명히 영토로서의 나라를 가리킨다. 또한 삼상 15:28에서의 mamelakuth도 영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Gesenius의 사전에는 tWkl]m'의 영토적 의미가 별로 나타나지 않으나, F. Brown, S. R. Driver, Ch. A. Briggs가 편집한 Hebrew and English Lexicon(Oxford, 1952, s.v.)에는 tWkl]m'가 영토를 나타내는 많은 성경 구절이 제시되어 있다. 또한 L. 물론 하나님 나라의 장소적 측면은 종말에 이루어질 ‘미래 천국’(새 하늘과 새 땅)과 지금성도의 영혼이 안식하고 있는 ‘낙원’ 곧 ‘내세 천국’(눅 23:43; 빌 1:23; 계 14:13 참조)에서는 분명하지만, 현재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세 천국’에서는 좀 불분명한 것이 사실이다. 아마 이 사실이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영토’ 대신에 ‘주권’이나 ‘통치’라는 개념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도록 만든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의 ‘현세천국’에서 어떤 고정된 ‘장소’를 지정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현세 천국’이 전부 다가 아니며 우리는 현재 이 순간에도 성도들의 영혼이 쉬고 있는 ‘낙원’과 의(義)의 거하는 바 ‘새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그리고 현재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전혀장소 없이 공중에 떠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쨌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땅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으며, 이 세상의 자녀들과 섞여 살고 있다(마 13:24-30 참조).
하나님 나라가 장소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마 7:21,19:24, 21:31; 행 14:22)15)라든지 “하나님 나라를 빼앗긴다”(마 21:43)16)는 표현에서 알수 있으며, 또한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마신다”(마 26:29; 눅 22:30)는 표현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나아가서 이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가라지 비유’ 설명에서도 알 수 있는데, 예수님은 여기서 ‘밭은 세상’이라고 하시고(마 13:38), 이어서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41절)라고 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장소적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17) 뿐만 아니라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18)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의 장소성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19)
4) 주권(지배, 통치 또는 원리)Koehler와 W. Baumgartner가 편찬한 Lexicon in Veteris Testamenti Libros(Leiden: E. J. Brill, 1958)에는 tWkl]m'의 여러 다양한 의미가 잘 정리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물론 영토적 의미도 포함되어 있으며 그런 의미로 사용된 많은 구절이 제시되어 있다.
15) 어쩌면 이 표현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상태, 또는 축복의 영역에 들어간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라 할지라도 이 표현에서 하나님 나라의 장소적 의미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표현이 현재의 하나님 나라의 축복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또한 완전한 구원과 축복의 장소인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후자가 예수님의 말씀에서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16) 앞의 표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특히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2. 참조: 22:13, 25:30)는 표현에서는 장소적 의미가 분명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17) 뿐만 아니라 마 21:43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문맥에서 볼 때, ‘포도원’으로 비유된 장소적 의미임이 분명하다.18) 세상 나라에 대한 말에서 살펴보면, 헤롯왕이 자기 딸에게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겠노라”(마 6:23)에서 basileiva란 말이 일반적으로 영토적 의미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19) 제2차 세계대전 후 이스라엘 국가 건설 후 다른 각도에서 땅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기독교 신학계에 일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D. E. Holwerda, Jesus and Israel. One Covenant or Two? (Grand Rapids:Eerdmans, 1995), 85-112를 보라.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유대주의적 또는 천년왕국적 입장에서 나온 것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어느 한편으로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저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낙원)와 미래에 종국적으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까지 다 고려하고자 함이요, 또한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총괄적인 이해, 다차원적 이해를 모색하고자 함이다.
한 나라를 유지하고 다스리는 데에는 주권이 있듯이 하나님 나라에도 주권이 있으며 통치와 지배 원리가 있다 이 통치 원리는 곧 .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요체는 십계명에 제시되어 있으며, 또한 산상보훈에도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 원리가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곳, 곧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주권이 회복되는 영역이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은 게할더스 보스와 조지 엘든 래드, 헤르만 리덜보스 등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 또는 주권 개념은 현재의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데 아주 유용하다. 현재의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할수도 없다(눅 17:20,21). 왜냐하면 현재의 하나님 나라는 완전하지 못하고 또 가시적인 장소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하나님 나라는 ‘유동적(流動的)’이며 ‘비장소적(非場所的)’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된 곳이 곧 현재의 하나님 나라이다(마 12:28).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곧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의 역사로 사단의 권세가 물러가면 그곳에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가 서로 싸우고 있는 전투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표현인 이 세상의 교회는 곧 ‘전투적 교회(ecclesia militans)’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주권(통치, 원리)적 요소는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막9:1)든지 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또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말씀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최소한 위 네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어느 하나라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나타나는 곳마다 이 네 가지 요소가 항상 나타난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의 그 곳에서 어느 측면을 말하고자 하느냐에 따라 어떤 요소는 부각되고 다른 요소들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현재의 이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에는 영토적 요소가 분명히 드러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주권, 통치적 측면이 강하게 부각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들)이 원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고 할 때 ‘현재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현재 저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소위 ‘낙원’)와 ‘미래의 하나님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도 동시에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대해 말할 때에는 늘 위 네 가지 요소의 가능성을 생각하고서 포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본문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나타날 때, 그 ‘나라’라는 단어가 위의 네 가지 요소 중 어느 것을 주로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는지, 아니면 둘 이상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종합적으로, 포괄적으로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III. 하나님 나라의 종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생각할 때 다음 세 종류의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해야 한다. 현재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현세 천국)와 현재 저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천당,낙원)와 미래에 종국적으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신천신지)이 그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현재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만 생각하거나, 아니면 현재의 하나님 나라와 미래의 하나님 정도로 생각하고 만다. 이렇게 될 경우 현재 저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소위 천당)와 새 하늘과 새 땅 사이의 관계가 분명치 않으며, 성도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그 곳에서의 상황은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모호하게 되고 만다. 이런 것들은 현대 신학이 하나님의 나라를 대개 추상적으로 다루는 데서 오는 현상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구체적인 삶의 문제로, 내 자신의 운명이 달려 있는 중대한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 이렇게 함에 있어서 우리는 철학적 사변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 기초하여 성경이 말하는 대로 생각하여야 한다.
먼저 ‘현재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 곧 ‘현세 천국’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것은 지금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부분적이고 불완전하다. 죄와 악이 침투해 들어와서 완전한 의와 거룩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그래서 현세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으며, 성령의 완전한 충만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현세 천국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늘 애통함과 탄식이 있으며, 하나님의 온전한 의가 이루어지기를 늘 기도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현세 천국은 전도를 통해 확장되고 있으며,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적극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성도의 노력을 귀하게 보시고 축복하신다.
그 다음으로 ‘현재 저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것은 우리가 보통 ‘천당’ 또는 ‘낙원’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내세 천국’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내세 천국’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죽은 후에 가는 곳이라는 의미에서는 ‘내세(來世)’ 천국이지만, 존재 측면에서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장소이다. 이 낙원(천당)은 구약 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따라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또 구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이 이곳에서 안식하고 있다(cf. 눅 16:19-31).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같이 달린 한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가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대답하셨다(눅 23:43). 따라서 ‘낙원(oJparavdeiso")’은 성도가 죽으면 그 영혼이 즉각 들어가는 천국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곳이며(롬 8:34, 히 10:12,13; cf. 골 3:1), 구원받은 성도들의 영혼(yuchv)이 쉬고 있는 곳이다(계 6:9, 14:13, 20:4). 그러나 이 영혼들이 무의식 상태로 지내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과 더불어 친밀한 교제를 누리며 즐거움으로 안식한다(빌 1:23). 이곳에는 더 이상 죄와 악이 없으며, 하나님의 의가 완전히 실현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졌으며, 성령의 100% 충만한 지배가 실현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곳 천당에서는 더 이상 전도가 없으며 중생도 없다. 오직 새로운 거듭난 영혼들을 지상에서부터 영입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따름이다. 따라서 성도의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남아 있는 죄들의 소멸이며, 영생에 들어가는 관문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제42문의 답).
마지막으로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이 종국적으로 거할 곳은 ‘새 하늘과 새 땅’ 곧 ‘신천신지’이다(계 21:1).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원한 복락의 장소이며, 모든 눈물과 저주가 사라지고 완전한 의가 실현되는 곳이다(계 21:4, 벧후 3:13). 이 점에 있어서는 현재 존재하는 낙원과 차이가 없지만, 다른 점은 낙원에는 성도들의 영혼이 들어가 쉬는 곳이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성도들의 ‘영혼’뿐만 아니라 부활한 ‘육체’가 함께 거하는 장소라는 점이다.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 세상에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헤어졌던 영혼과 육체의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 만남은 단순한 옛 모습 그대로의 재회가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성숙한 두 요소의 극적인 상봉이다. 곧 이제는 완전히 죄에서 해방된 의롭고 거룩한 영혼과 다시는 병들지 않고 썩지 않고 약하지 않고 죽지 아니하는 영광스런 육체의 재결합이다. 이제는 죄로 말미암은 별거가 다시 없을 것이며,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헤어지지 않는 완전한 사랑의 결합이 마침내 실현될 것이다. 이 신천신지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동거동락하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복락을 누릴것이다(계 21:3).
이상의 세 종류의 하나님의 나라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백성 수의증감하나님의뜻의 성취교회와세상인간 존재의구성 요소성령 충만의정도현세 천국 확장중 불완전 혼재영과 육(죽을몸)부분적내세 천국 영입중 완전 분리영/영혼(몸은부활을 기다림)완전 충만미래 천국 정지 완전 분리영과 육(부활의 몸)완전 충만
Ⅳ.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 측면과 미래적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미래에는 장소로서의 천국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거기에는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고 저주도 없으며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계 21:3-4). 그러나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하였으며 계속해서 확장, 발전되어 가고 있다(마 11:12). 아직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현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
신학자들 가운데는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때 이 둘 중의 어느 한쪽 면만을 강조하고 다른 면을 무시하거나 부인한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만을 철저히 고집한 사람의 대표자는 보통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라고 알려져 있는데,20) 그는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의 나라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믿고 살다가 오지 않자 좌절하여 결국 십자가를 지고 말았다고 주장했다.21)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소위 ‘철저종말론(consequent or consistent eschatology)’이라고 불린다. 이에 반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만을 강조하는 대표적 견해로는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실존론적 해석(existential interpretation)’과 C. H. 다드(Dodd)의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 과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의 ‘실현되어 가는 종말론(sich realisierende Eschatologie)’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가 현재 실현된 것, 또는 되어 가고 있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미래적 측면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그래서 위와 같은 일면적 치우침을 지양하고 양쪽 측면을 다 강조하는 견해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스위스의 신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의 견해로 알려져 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측면 곧 ‘이미 [성취됨](schon [erfüllt])’과 미래적 측면 곧 ‘아직 아니 [완성됨](noch nicht [vollendet])’ 사이의 ‘긴장’을 강조하는 학설로서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으며,22) 또한 한국에서도 대개 ‘(가장) 올바른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견해의 장점은 하나님 나라의 양 측면을 다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한다.23) 그러나 문제는 이 둘 사이의 관계를 ‘긴장(Spannung)’으로 본 점이다. 쿨만 자신도 여기서 ‘긴장’이 이 문제에 대한 자기의 구도에서 가장 특징적임을 말하였다.24)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은 과연 그렇게 긴장적 관계에 있는 것일까? 동일한 예수께서 ‘왕’으로 계시며 동일한 사람들이 ‘백성’으로 있으며, 동일한 ‘원리’에 의해 통치되며 유지되는데 ‘긴장’이라기보다 오히려 ‘조화’의 관계가 아닐까? 우리는 날마다 “나라20) A. Schweitzer, Von Reimarus zu Wrede, 1906; An English translation by W. Montgomery, The Questof the Historical Jesus. A Critical Study of its Progress from Reimarus to Wrede, New York:MacMillan Publishing Co., 1968.21) Schweitzer의 연구 결과는 역사적 예수를 부인하는 과격한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오직 예수의 영적 감화력 정도이다. 그의 다음 말들을 참조하라: “The Jesus of Nazareth who came forward publicly as the messiah, who preached the ethic of the Kingdom of God, who founded the Kingdom of Heaven upon earth, and died to give His work its final consecration, never had any existence.”(위영역, p.398); “Jesus means something to our world because a mighty spiritual force streams forth from Him and flows through our time also.”(p.399); “Jesus as a concrete historical personality remains a stranger to our time, but His spirit, which lies hidden in His words, is known in simplicity, and its influence is direct.”(p.401).22) 예를 들자면 H. Ridderbos의 Paulus(1966)란 책의 기본 구도도 기본적으로 O. Cullmann의 ‘이미’와 ‘아직아니’라는 구도의 영향을 받은 바 크다. Ridderbos는자신의 해석 방법이 ‘구속사적 해석(heilshistorischeuitlegging)’이라 규정짓고, 이는 예를 들자면 O. Cullmann의 Christus und die Zeit에 ‘매우 전형적인 방법으로(op een zeer representatieve wijze)’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이 방법의 장점으로는 첫째, ‘성취의 요소(vervullingselement)’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과 둘째로, 바울 종말론의 핵심 요소인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의 ‘상호 의존(wederzijdse afhankelijkheid)’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Ridderbos가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23) 물론 나중에 지적하겠지만, 보통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양 측면을 충분히 다 인정하고있는 것은 아니다.
24) O. Cullmann, Christus und die Zeit, 3. Aufl. (Zürich: EVZ-Verlag, 1962), 12, 15, 19, 21, 특히 27과 기타 여러 곳 참조. 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25)라고 기도하고 있지 않는가 ? 즉,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것처럼 또한(wJ" ··· kaiv)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있지 않은가?26) 여기서 우리는 하늘과 땅 사이에 ‘역접’이 아니라 ‘순접’의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미래의 하나님 나라가 아직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의 하나님 나라 안에는 긴장과 갈등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이미 성취됨과 아직 아니 완성됨 사이의 긴장(Spannung zwischen ,,schon erfüllt“ und ,,noch nicht vollendet“)’ 또는 ‘현재와 미래 사이의 긴장(Spannung zwischen Gegenwart und Zukunft)’27)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현재의 하나님 나라’와 ‘미래의 하나님 나라’ 사이에, 그리고 ‘현재’와 ‘미래’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 둘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 긴장과 갈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두 측면 자체에는 어디까지나 ‘조화(調和)’와 ‘순연(順然)’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28)
뿐만 아니라 이미 실현된 구원과 앞으로 실현될 구원의 관계에 대해서도 성경은 오히려 ‘보증’(ajrrabwvn, 고후 1:22; 엡 1:14)과 ‘인침’(sfragivzomai, 엡 1:13; 고후 1:22), 또는 ‘확신’(pevpeismai, 롬 8:38-39)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현재의 자녀됨과 장래의 구원을 보증해 주시고 연결시켜 주시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그러므로 우리는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린다(ajpekdevcomai)’(롬 8:23).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살전 1:8) 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9절)과 예수의 강림을 기다리는 ‘소망’(10절)으로 인하여 주위로부터 칭찬을 받았는데, 사도 바울은 이 사이의 관계를 모두 ‘그리고(kaiv)’로 연결시키고 있다.
만약 우리에게 ‘긴장’이 있다면 그 주된 것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사이의 긴장이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 사이의 긴장일 것이다. 선하고 의롭고 완전한 ‘하나님의 계명’과 그것이 선한 줄 알면서도 다 지키지 못하는 인간의 ‘육신의 연약함’ 사이의 갈등이다(롬 7장 참조).뿐만 아니라 쿨만에게 있어서는 시작과 끝, 곧 창조와 종말은 모호한 것으로 희석되고 말며 그 역사적 진실성이 의심되고 있다.29) 그러다 보니 남는 것은 ‘중간(Mitte)’ 곧 현재성 25) ejlqevtw hJ basileiva sou, genhqhvtw to; qevlhmav sou, wJ" ejn oujranw/' kai; ejpi; gh'". 26) 여기서 헬라어 ejlqevtw와 genhqhvtw가 아오리스트(aorist)로 되어 있다고 해서 미래의 종말에 갑자기 단번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 곧 예수의 재림을 대망하는 기도로 이해하는 것은 문법적으로 속단이다. 왜냐하면 헬라어의 기도문에서는 기원의 ‘단호성’, ‘간절성’ 또는 ‘결의성’(決意性, definiteness)을 나타내기 위해 아오리스트(不定時相)가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Cf. Zerwick, Biblical Greek, §255. 27) Cullmann, Christus und die Zeit, 12. 28) 구약의 하나님 나라와 신약의 하나님 나라 사이에 동일성이 존재하듯이 신약의 하나님 나라와 미래의 하나님 나라 사이에도 본질적인 동일성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29) Cullmann은 기원과 종말에 대한 이야기들을 ‘단지 예언(nur Prophetie)’이라고 부른다. 그것들은 객관적으로는 ‘단지 계시의 대상(nur Gegenstand der Offenbarung)’일 따름이며, 주관적으로는 ‘단지 신앙의 대상(nurGegenstand des Glaubens)’일 따름이다. 거기에는‘인간의 역사적 증명을 통한 확증(Eine Bestätigung durch menschliche historische Feststellung)’이 없다. 이것들은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사실들(historisch feststellbare Tatsachen)’이아니다.Cf. Cullmann, Christus und die Zeit, 97.한편 1963년에 발표한 그의 논문“Die Verbindung von Ur- und Endgeschehen mit der neutestamentlichen Heilsgeschichte”(그의 65세 생일을 기념하여 K. Fröhlich가 편집 출판한 책, Oscar Cullmann. Vorträge 뿐이며 그가 말한 아직 아니 , ‘ (noch nicht)’란 것도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현재의 ‘아직 아니’일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그가 강조한 ‘긴장’이란 것도 사실은 현재의 ‘긴장’이니, 결국 전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측면이 상당히 약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30) 따라서 쿨만의 위 구도는 성경보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신학적 구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마땅히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31) 이상에서 살펴볼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가감 없이 그대로 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는 ‘긴장’의 관계라기보다는 차라리 ‘조화’의 관계이며 동질성과 공통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 물론 이 둘 사이엔 차이가 있다. 현재의 하나님 나라에는 아직 주님의 통치가 온전히, 100%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따라서 죄와 연약함이 있으며 이로 인한 고통과 갈등이 있다. 이에 반해 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고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으며 죄와 고통이 없고 갈등이 없다. 또한 현재의 하나님 나라가 미래의 하나님 나라로 넘어갈 때에 급작스러운 불연속이 존재한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현 세상은 갑작스럽게 종말을 고할 것이며 성도들은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할 것이나 불신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이 세상은 불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연속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확장, 발전과 완성 사이에는 많은 동질성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32)
V. 하나님 나라의 임함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임하는가? 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단번에 오는 것이 분명하지만 현재의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어떻게 오는 것일까? 이 문제는 옛날의 바리새인들에게도 궁금한 문제였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날 예수님께 나아가 물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33)(눅 17:20상). 이 질문을 보면 바리새인들 und Aufsätze 1925-1962 (Tübingen/Zürich: J. C. B. Mohr/Zwingli Verlag, 1966), 159-165에 수록되어있음)에서 Cullmann은 창조 이야기는 ‘신화들(Mythen)’에 속한다고 분명히 전하고 있으며(p.160), 또한 아담은 ‘역사적 인물(eine historische Persönlichkeit)’이 아니라고 한다(p.164). 이뿐 아니라 역사의 ‘중간 부분(Mittelstück)’에 있는 것들 중에도 ‘역사적으로 대체로 확증할 수 없는(historisch überhaupt unfeststellbar)’ 부분들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예수의 ‘동정녀 탄생’ 같은 것들인데 그는 이런 것들을 “blosse Prophetie”라고 부르며, 시작과 끝의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본다(Christus und die Zeit, 98). 이상에서 우리는 Cullmann이 인간의 이성으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을 신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아직도 서구의 역사주의, 과학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0) 박윤선 박사도 이러한 단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성경 신학」(서울: 영음사, 1987, 11판), 160을 참조하라.31) 그리고 Cullmann이 Bultmann의 양식사 비평 방법을 옹호하고 지지하였음을 Cullmann 자신이 지적하고 있다(Christus und die Zeit, 45). 그리고 Cullmann이 22세(1925)에 발표한 논문 “Die neuen Arbeiten zur Geschichte der Evangelientradition”(K. Fröhlich, Oscar Cullmann, 41-89)에서 ‘양식사 비평 방법’을 적극 옹호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Bultmann으로부터 칭찬받았다(Ibid., Vorwort, 9).32) Versteeg 교수도 ‘현재’와 ‘미래’ 사이의 연속성에 대해 논하였다. 그는 이 연속성이 ‘피조물’, ‘신자 개인’,그리고 ‘신자의 사역’과 관련하여 존재한다고 논증하였다. 그리고 이 연속성은 삼위일체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믿음에 의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O. Cullmann의 구도의 문제점을 보지는 못하였다.
Cf. J. P. Versteeg, “De continuiteit van heden en toekomst volgens het Nieuwe Testament,” in: idem, Geest, ambt en uitzicht, Kampen: J. H. Kok, 1989. 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당히 가시적 (可視的)인 것으로 생각했으며 또 언젠가 단번에 오는 것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이들은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을 중심으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생각했던 것 같다.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런 바리새인들의 의중을 파악하고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34)(눅 17:20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있게, 관찰할 수 있도록 가시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어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35)라고 하셨다(21상). 왜냐하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도록 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시적, 장소적 영역 설정이 어렵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36)고 하셨다(21하). 그런데 여기서 “너희 안에(ejnto;" uJmw'n)” 있다고 하신 말씀이 어렵고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어떻게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 안에’ 있다고 말할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난점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여기의 “너희 안에”란 말을 “너희 가운데(among you, in your midst)”로 해석한다.37)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전치사 ejntov"는 “among, in the midst of ”의 뜻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리고서 그들은 이구절을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38) 그러나 이 해석도 문제가 많다. 왜냐하면 첫째로, ejnto;" uJmw'n이란 단순히 ‘현재적 측면’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 무엇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현재적 측면’을 가리키는 것은 오히려 ejstin이고 ejnto;" uJmw'n은 그 이상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둘째로, 헬라어 원어 ejntov"의 주된 뜻은 아무래도 “within, inside”이지 “among”은 아니라는 점이다.39) 물론 “among”의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기는 있지만 드물고,40) 주로 ‘안에, 내부에’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신약 성경에서는 이곳과 마태복음 23:26의 단 두 곳에만 사용되고 있는데, 마태복음 23:26에서도 “··· 먼저 잔의 안을 깨끗이 하라”고 해서 역시 ‘안에, 내부에’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1)
33) povte e[rcetai hJ basileiva tou' qeou';34) Oujk e[rcetai hJ basileiva tou' qeou' meta; parathrhvsew".35) oujde; ejrou'sin, !Idou; w|de: h[, !Ekei':36) ijdou; ga;r hJ basileiva tou' qeou' ejnto;" uJmw'n ejstin.37) W. Bauer, Griechisch-Deutsches Wörterbuch, 5. Aufl. (Berlin: W. de Gruyter, 1971), s.v. ejntov". 그리고 거기에 제시된 문헌들을 참조하라.38) G. Vos, 34; G. E. Ladd, 17f.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한 대답이 없다. G. Vos는 같은 곳에서 주님께서 “··· instead of a future thing to be fixed by apocalyptic speculation, the coming of the kingdom is a present thing, present in the very midst of those who are curious about the day and the hour of its sometime appearance”를 뜻하셨다고 하면서, 이것이 “miraculous works as one form of the manifestation of God's royal power”나 또는 “the establishment of God's rule in the midst of Israel through the spiritual results of his labors”를 뜻할 수도 있겠다고 한다. 그리고 W. Bauer는 “그것이 현재 이미 도래했든, 어느 날 갑자기 올 것이든 간에(sei es jetzt schon, sei es plötzlich einmal)” ‘너희 가운데에(in eurer Mitte)’를 뜻한다고 한다(op. cit.).
39) Liddell-Scott의 A Greek-English Lexicon(1968)에 보면 ejntov"의 뜻으로 “within, inside”만 제시하고 있으며 “among”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눅 17:21의 ejnto;" uJmw'n을 “in your hearts”로 번역하고 있다.40) Bauer, Wörterbuch, s.v.에서 제시하고 있는 몇몇 예들 참조.41) 같은 이유로 W. Hendriksen도 여기서 ejntov"를 “among”으로 번역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일축한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에서 너희 17:21 ‘ 안에’ 있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이것은 바로 앞의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때 아무래도 하나님 나라의 ‘내적 성격’을 가리킨다고 밖에 볼 수 없을 것 같다. 하나님 나라는 가시적, 외적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오직 ‘너희 안에’, ‘너희 마음속에’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믿지 않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처음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많은 학자들의 오류가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바리새인들 안에 있다는 뜻으로 결코 말씀하시지 않았다. 예수께서 여기서 말한 ‘너희’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너희’인 것이다. 비록 바리새인들이 이 질문을 하기는 했지만 예수님 둘레에는 많은 제자들이 둘러 있으며 또 섬기는 여자들과 따르는 사람들, 많은 무리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런 질문을 계기로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일반적 의미에서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여기서 중요한 말은 ‘너희’가 아니라 ‘안에’이며, ‘너희’란 말은 그냥 따라오는 말로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너희’(따지자면 ‘(믿는) 너희’)를 뜻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42)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내적(內的) 성격, 곧 영적(靈的) 성격을 가리킨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외적, 물적 요소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에 그런 요소가 물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는 ‘백성’의 요소와 또한 내세/미래 천국에서는 ‘영토적’ 요소도 분명히 있다. 따라서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영적 측면’뿐만 아니라 ‘물적 측면’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죄와 연약함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밖에 실현되지 않으며, 게다가 실현되는 부분에서조차 불완전하다. 특히 인간 생활의 외적 부분, 사회적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 매우 부진하며, 온갖 악이 횡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구체적으로 우리의 현실 속에 실현되도록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여야 한다. 즉,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의 의(義)가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학문 등 전 영역에서 실현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성격은 역시 내적인 것, 영적인 것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현세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세상의 자식들이 서로 섞여 있으며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감추어져 있으며 비밀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
(그의 The Gospel of Luke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9), 810을 보라).42) G. Vos도 1948년에 출판된 Biblical Theology. Old and New Testaments (Grand Rapids: Eerdmans,1948), 382에서 종전의 자기 견해를 바꿔 눅 17:21에서는 천국의 ‘내면성(inwardness)’이 표현된 것으로 본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누가가 “in the midst of”를 나타내고자 할 때에는 항상 ejn mevsw/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지적하면서, 누가와 70인역에서는 interiority의 개념을 나타낼 때에는 항상 ejntov"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in the midst of”의 의미를 지지하기 위해 인용된 본문들은 모두 고대 헬라어에서 취한 것이며 Hellenistic 시대의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G. Vos가 그의 견해를 바꾼 것에 대하여는 박형용 박사의 “하나님 나라의 實現”, 「神學正論」1(1983.3), 132 註38을 보라.
VI. 하나님의 나라와 성령(마 12:28)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도래하였으며, 복음전파와 더불어 확장되고 있다. 물론 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불완전하고 연약하지만, 지금 이 땅에 상륙하여 활발하게 역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그의 귀신 쫓아내시는 사역을 비방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가운데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여기서 “너희에게 임하였다(e[fqasen ejf! uJma'")”는 말은 “너희 위에 당도하였다, 임하였다”는 뜻이다. 이것은 이미 ‘너희’ 위에 임한, 곧 ‘너희’ 안에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내시면, 그 사람에게서 귀신의 통치가 물러가고 성령의 통치가 실현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서 귀신이 쫓겨났다면, 이미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것을 어릴 때 어린아이들의 ‘땅 따먹기’ 놀이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다. 두 아이가 큰 사각형 안에서 사이다 병뚜껑 같은 것을 퉁겨서 상대방의 진지 안에 들어가면 한 뼘 그리고, 상대방도 그렇게 해서 한 뼘 그리고, 그렇게 해서 다 그리고 나면 드디어 땅 따먹기가 시작된다. 내가 한 뼘을 그려서 땅을 따면, 상대방은 한 뼘을 잃게 되고, 상대방이 한 뼘을 따면 나는 그만큼을 잃게 된다. 이처럼 이 세상은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각축장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사단의 어떤 영역을 빼앗아 오면 그만큼 사단의 나라는 줄어들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지금 사단이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다(엡 2:2).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하므로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오직 성령의 감동 감화와 역사로말미암아 가능하다. 아무리 사람이 말로 권하고 손으로 끈다고 해도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신다면, 그는 주께로 나올 수 없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때에 먼저 그의 마음에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그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으로 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고전 2:4).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건설을 위해 주력해야 할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주로 복음 전파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로 진행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회복되고 실현되면 그것은 단지 내적인 것에만 머물지 아니하고 바깥으로 나타나며 우리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 가운데서 여전히 그 모든 추진의 원동력은 성령의 감동, 감화와 역사이다. 이것은 우리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주된 은혜의 방편으로 삼으며, 우리의 기도와 사랑을 통해 역사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 것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파하며, 또한 그 말씀을 좇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삶 속에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참고 문헌
1. 국내 문헌박윤선, 「성경 신학」, 서울: 영음사, 1987(11판)(초판은 1971년).박형용, “하나님 나라의 實現”, 「神學正論」제1집(1983.3), pp.106-135.오병세, “新約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고신대학 논문집」제14집(1986.10), pp.123-141.2. 국외 문헌Bauer, W., Griechisch-Deutsches Wörterbuch, 5. Aufl., Berlin: W. de Gruyter,1971.Brown, F.-Driver, S. R.-Briggs, Ch. A., Hebrew and English Lexicon, Oxford,1952.Chung, H. T., Aan hun vruchten zult gij hen kennen, Kampen: J. H. Kok, 1989.Cullmann, O., Christus und die Zeit, 3. Aufl., Zürich: EVZ-Verlag, 1962.Cullmann, O., “Die neuen Arbeiten zur Geschichte der Evangelientradition”, in:K. Fröhlich(hrsg.), Oscar Cullmann. Vorträge und Aufsätze 1925-1962,Tübingen: J. C. B. Mohr (Zürich: Zwingli Verlag), 1966, pp.41-89.Cullmann, O., “Die Verbindung von Ur- und Endgeschehen mit derneutestamentlichen Heilsgeschichte”, in: K. Fröhlich(hrsg.), Oscar Cullmann.Vorträge und Aufsätze 1925-1962, Tübingen: J. C. B. Mohr (Zürich: ZwingliVerlag), 1966, pp.159-165.Hendriksen, W., The Gospel of Luke(New Testament Commentary), Edinburgh:Banner of Truth, 1979.Holwerda, D. E., Jesus and Israel. One Covenant or Two?, Grand Rapids:Eerdmans, 1995Koehler, L.-Baumgartner, W., Lexicon in Veteris Testamenti Libros(Leiden: E.J. Brill, 1958)Ladd, G. E., The Gospel of the Kingdom, Grand Rapids: Eerdmans, 1959.Ladd, G. E.,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rev. ed. Grand Rapids:Eerdmans, 1993.Liddell, H. G.- Scott, R., A Greek-English Lexicon, revised and augmented byH. G. Jones and R. McKenzie, with a Supplement, Oxford: Clarendon Press,1968.Ridderbos, H. N., De komst van het koninkrijk, Kampen: J. H. Kok, 1950.Ridderbos, H. N., Paulus. Ontwerp van zijn theologie, 5e dr., Kampen: J. H.Kok, 1978(초판: 1966).Schmidt, K. L., “basileiva,” in: Theologisches Wörterbuch zum NeuenTestament, I, hrsg. von G. Kittel, Stuttgart: W. Kohlhammer, pp.579-592.Schweitzer, A., Von Reimarus zu Wrede, 1906; English translation by W.Montgomery,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A Critical Study of itsProgress from Reimarus to Wrede, with an introduction by J. M.Robinson, New York: MacMillan, 1961.Versteeg, J. P., “De continuiteit van heden en toekomst volgens het NieuweTestament,” in: idem, Geest, ambt en uitzicht, Kampen: J. H. Kok, 1989.Vos, G., Biblical Theology. Old and New Testaments, Grand Rapids:Eerdmans, 1948.Vos, G., The Kingdom and the Church, 1903 (reissued by Grand Rapids:Eerdmans, 1951).Vos, G., 「하나님의 나라」, 정정숙 역,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71.Zerwick, M., Biblical Greek, English edition by J. Smith, Rome: PontificioIstituto Biblico,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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