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2)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에녹을 통해 우리자신을 보는 지혜
본론 전개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하나님의 감추어진 지혜를 보여주시기를 원하신다. 창 1-2장 하나님과 인류를 포함한 이 세상과의 수직관계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
창 3: 15 사탄의 방해작전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가는 언약적 구속역사
가 시작되면서 모든 세대속에서 펼쳐져 가게 되고 계시록 20장까지
계 21-22 이 세상을 다시 하나님의 통치속으로 온전히 바꿔 가신 하나님의 계획성취
창세기 5장을 통해 첫 사람 아담에게 부여되였던 이 세상가운데서 제사장적인 직분적 계보는 이제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서부터 구별되고 가인은 제외되고 대신 아벨에게 옮겨졌고 또한 셋으로 연결됨을 기록합니다(5:1-5). 이는 여자의 후손언약(3:15)에 근거한 하나님의 나라백성으로서의 여자의 후손계보가 아담에게서 떠나 셋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시사함에 있습니다. 이는 앞서 창 4장에서 가인의 후손을 통해 뱀의 후손계보를 소개한 것(4:17-24)에 대비(對比)한 의도적인 기록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역사는 인류의 초기역사로부터 여자의 후손언약속으로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신 부르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장차 임하여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여 마귀의 멸하시는 메시야의 사명으로 언급된 여자의 후손계열과 뱀의 후손계열 간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 및 상호 치열한 투쟁의 구도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순종적역사속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과 함께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직분과 사명에 순종해 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육과 번성이라는 축복속에서 나름대로 잘 수행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여자의 후손으로서 셋의 계보
창 5장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아담의 아들 셋의 계보를 아담으로부터 시작해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나타내 보여주는 일정한 형태의 수사학(修辭學)적 표현을 의도적으로 첨가해 소개합니다. 곧 "누구는 몇 세에 누구를 낳고, 누구를 낳은 후 몇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몇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고 하는 동일한 방식의 서술적 양식을 따라서 말입니다. 이런 의미심장한 표현기법은 홍수후 노아의 세 아들중 셈의 계보를 통한 여자의 후손계열을 소개할 때(창 11:10-26)도 동일한 방식으로 반복돼 소개됩니다. 이는 창 4장에서 가인의 후손계보를 간단명료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한 대조를 보이고 있음을 통해 하나님의 관심적 역사가 인류역사보다는 구속역사라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에 의한 이런 두 계열간의 뚜렷한 대비는 그 자체로서 이미 하나님의 관심이 누구에게 편중돼 있는지의 여부를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 곧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 그처럼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를 땅에서 존귀한 자로 여겨 주십니다(시 16:3). 눈동자와도 같이 세밀하고 자상하게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시 17:8).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은혜를 깨닫았고 사도된 바울도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고백하였습니다(롬 8:38-39). 이는 죄가운데 갇혀있는 자신의 백성들을 그 죄속에서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가치의 피로 사신바 된 친 백성이 됨에 대한 감사입니다(고전 6:20, 행 20:28, 딛 2:14). 사탄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양자(養子)말입니다(롬 8:15). 악한 계열에서 선한 계열로 옮겨 갈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대속적인 구속으로 말미암은 개입에서 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성도의 천상적 신분상의 특징을 구속사의 연장선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연관시키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창 5장에서 여자의 후손계열로서 셋의 후손중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에녹과 노아입니다. 먼저 에녹의 삶이 보여주는 괄목할 만한 특징은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과, 이런 사실의 결과로 그가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채 데려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창 5:21-24).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무엇일가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신약의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을 통해 확인해 볼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복음의 빛안에서 에녹의 삶의 총체적 성격을 믿음의 삶으로 규정합니다. 여기서 믿음의 삶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그 자체로서(히 11:5), 창세기 저자의 해석적 관점을 종합해 본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믿음의 삶이야말로 다름 아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인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최선의 방편임을 시사합니다. 나아가 믿음의 내용은 보이는 현실속에서 편안 함보다는 선과 악에 대한 옳바른 확인이였다. 히 11:1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창조주, 진리, 행복, 가치 등 총체적인 세계관과 신앙관, 인생관을 선택하여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바로 보지 못하는 이 세상이지만 종국적인 미래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게 됨을 확정해 갈수 있었던 지혜의 사람들이였습니다. 하여 하나님의 나라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고 의지하여 이 세상가운데 현재적이며 실제적인 것 증거적인 삶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그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 갑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사탄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고난을 오히려 기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다 약속을 받았기에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앗어도 신실하신 분의 약속을 굳게 믿고 성취된 실체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며 거기에 최선의 가치와 궁극적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신앙적 삶이였습니다. 히 11장에 소개된 소위 구약시대의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주고 있는 한결같은 삶의 성격이 다름 아닌 믿음의 삶이었고 저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증거는 받았습니다. 나아가 저들의 이런 신앙적 삶의 모습은 어떤 형태의 열악한 환경가운데서도 결코 그런 요지부동의 신앙관을 포기하거나 외면함이 없이 시종일관하게 종말론적이며 미래지향적인 믿음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추구했었다는 사실의 지적입니다. 이는 당시 여러 모양의 신앙적 핍박과 고난에 직면해 있었던 1세기를 장식했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로 인도받아 성도로 불려지기기를 기쁘게 여기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는 하나님의 편지로, 메시지로 역할을 감당해었고, 세상을 이기는 세상이 감당못하는 이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모든 시대의 현실속에서도 동일하게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행인의 신분으로 살아갈지라도 천국백성답게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를 받은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자신을 보여 줄수 있습니가? 성경을 보면 우리의 열매로 즉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믿음적인 삶으 우리의 확신하는 바를 보여주게 되고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는 산 제사- 하나님을 받으시는 산 존재적인 삶이 중요합니다.
신약적 표현을 빌린다면 신령과 진정의 성격을 띠고 드린 계시 의존적인 예배적인 삶자체 말입니다(요 4:23-24). 이에 반해 가인은 자기의 타락한 종교심을 부추겨서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의 자의적 숭배제사를 드린 셈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분 냄을 지적하시면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 4:7)고 반문하신 배경속에서 이런 사실을 넉넉히 추론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벨의 제사가 더 나은 제사로서 열납 된 근거는 제물의 종류에 의해 좌우된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아벨의 의의 출처를 제물에 의한 하나님의 증거에 근거한 것'(히 11:4)이라는 지적은 제물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 제물로서의 예배자의 마음가짐과 정당성의 여부를 시사합니다(사 1:1-17). 이런 사실로 인해 에녹의 동행하는 삶의 성격은 여자의 후손들을 통한 하나님의 직접개입을 자신의 몸과 삶에 받아들이는 백성들임을 증거하는 것이였습니다.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구속계시를 철저히 의존하는 것으로 인해, 매사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섭리 의존적인 신앙관에 근거해 살았던 삶이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에녹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근거가 이런 사실에서 찾아집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결코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증언입니다(히 11:6). 그리고 이런 신앙적 생애의 결국은 영생으로 보증된 삶이란 사실입니다. 에녹의 생애가 이런 사실을 극명하게 예시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 가셨다는 사실(창 5:24)은 성도의 삶의 결국은 영생이라는 구속사적 명제를 구체적으로 예증(例證)해 주고 있습니다.(연재 2)
'하나님 나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 (3) (0) | 2012.11.21 |
---|---|
[스크랩]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 (3) (0) | 2012.11.21 |
[스크랩] 사람의 장막에 거하시는 하나님 (0) | 2012.11.21 |
[스크랩] 역대 고전에서 보는 잘못된 이해 (0) | 2012.11.21 |
[스크랩]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본 한국 교회 (0) | 2012.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