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스크랩]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 (3)

하나님아들 2012. 11. 21. 11:30

제 3 연재


자손언약의 성취

 


먼저 자손언약의 구체적 성취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거쳐 후에 야곱의 70인 식구가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하는 것을 시작으로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 언약식(출24:1-8)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돼 마침내 요단강 동편 모압 땅에 이르기까지의 모세 5경(창-신)의 내용을 통해 확인됩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아브라함 언약속에서 자손언약의 성취는 아브라함 언약의 맹세적 보증으로 주신 횃불 언약식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속에서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곧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해방돼 나오게 된다는 예언적 약속말입니다(창15:12-17). 이 구원사건은 본질에서 가나안 정복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이는 출애굽 사건과 아모리(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관영함으로 저들을 심판하시는 문제가 상호 내용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나라의 아들들을 그 나라에 인도하기 위한 계획이 아브라함에서 시작되여 다시 예수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들까지 그리고 재림전까지의 성도들도 다 포함될것이다. 



땅 언약의 성취

땅 언약은 여호수아서를 통해 성취과정이 소개됩니다.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삼아 요단강을 믿음으로 도하(渡河)하는 한편, 여리고 성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함락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믿음의 성전(聖戰, holy war)을 통해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 지경을 정복하기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가나안 지경 일부는 도면상으로 분할해 제비뽑는 방식으로 분배해 줍니다(수18:8-10). 그러나 이런 도면상의 분배마저도 여호수아서 기자는 실제적인 땅 분배 사건의 성취로 간주해 기술합니다(수21:43-45). 이는 신적 언약의 특성상(주권성과 은혜성 및 실현성) 필연적으로 성취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 근거한 표현입니다. 후에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속에 약속된 땅의 전(全) 지경을 온전히 정복하게 됩니다(창15:18, 왕상4:21, 14, 25절).


온 세상이 다 우리 주님의 것이고 우리는 그속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시민권을 받아 살아가는 것이고 의의 병기로 드려지는 사람들이고 이 세상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땅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영토를 분배하였듯이 믿음의 사람들이 발로 밟는 그 땅들을 다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고 그 곳에 우리를 천국의 자녀로 옮겨심은 것이다. 교회라고 부르는 성도들의 모임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이 땅에 남겨둔 하나님의 열린문들이다. 



왕 언약의 성취

왕 언약의 성취와 관련해서는 사사기서를 통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삿21:25)고 지적함으로 왕의 필요성이 우회적으로 암시되고(삿21:25), 룻기서에서는 유다의 계보를 다윗에게 연결시킴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다윗임을 묵계적으로 지목합니다(룻4:18-22). 사무엘서를 통해서 마침내 다윗이 최종적으로 신정왕국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하게 됨으로 마침내 왕 언약이 성취됩니다(삼상16:12-13, 삼하2:4, 5:3).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다윗과 솔로몬에 의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및 다윗언약이 구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인해 비록 예비적이긴 하지만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현시하고 있음을 후에 열왕기서 기자는 대내외적으로 명백히 천명합니다(왕상4:20-25). 이런 사실의 확증은 미가와 스가랴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도래하게 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상태를 언급하면서 열왕기서 기자가 비유적으로 묘사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다”(왕상4:25)는 표현을 동일하게 차용해 설명하고 있는 데서 확연히 확인됩니다(미4:4, 슥3:10). 끝으로 아브라함의 씨로 인해 열국이 복을 받게 된다는 내용(창12:3, 22:18)은 솔로몬이 하나님께 그 나라를 다스릴 지혜를 구하여 그 뜻대로 통치할때는 주변 나라들이 그 지혜를 듣고자 먼 거리를 마다하고 이스라엘로 모여들고 (조공을 바치며), 저들을 관할하게 됨으로 이 땋의 생명들을 돌보는 문화적 책임을 다하게 되면서 사방에 평화와 안녕이 도래하게 되었다는 설명을 통해 예비적인 성취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봅니다(왕상4:21, 24절). 이제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봅니다. 





⑧ 출애굽 사건으로 말미암는 시내산 언약(출24:1-8)

출애굽 구원사건은 아브라함 언약중 자손언약 부분, 특별히 횃불언약식(창15:12-18)을 통해 맹세적 보증으로 확증해 주신 자손언약이 무려 430년 만에 정확히 성취되는 사건입니다(출12:40-41).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의 성취는 우리 편에서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의 때가 찰 때에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실현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에 있어서 성도 편에서 믿음의 인내가 필요한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까지 인도하심에 있어서 굳이 우회(迂廻) 길을 택하게 하심으로 홍해 길로 인도하시고 광야여정 길로 몰아가십니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처사입니다. 430년간 애굽의 이방문화에 익숙해지고 체질화 돼 가히 노예집단과 방불한 저들을 명실공히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여호와 중심의 신본주의 신앙관을 재정립해 주시기 위한 계도(啓導)적이고 계몽(啓蒙)적인 교육적 차원에서 취해진 결과입니다.

마침내 모세는 이들을 시내산까지 인도합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피를 매개로 공식적인 언약식을 체결하십니다. 출애굽기 저자는 이를 일컬어 언약의 피라고 설명합니다(출24:1-8). 이 피의 언약식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구원에로 인(印)쳐 주시는 새 언약 속에서 실체화 됩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성찬식의 제정과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통해 구체적으로 예시(例示)해 줍니다(히10:1, 눅22:19-20). 이런 의미에서 시내산에 집결한 총회로서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교회로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역과 대속사역을 함의하고 있는 새 언약의 구체적 성취로 출현하게 될 신약의 교회공동체와 천상의 보편의 교회를 예표적으로 표상한다 하겠습니다(히12:18-23)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교훈을 얻게 된다. 총회적인 개념의 이스라엘민족을 교회라고 불렀던 방면에 지금의 교회적인 개념은 총회적인 개념이 아닌 개교회의 개념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본다. 하여 교회를 총회로 보아야 맞는 것인데 지금은 교파와 교단으로 많이 나뉘여 지다보니 총회적 개념에서 많이 벗어나게 되고 성경의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총회적개념과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된다. 그러다 보니 산산이 부서지고 나뉘여 져 있게 된다. 

이 언약식을 통해 하나님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됩니다(출19:5-8). 이런 사실의 보증으로 율법을 하사(下賜)하십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정왕국으로서 율법에 적극 순종하는 것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제사장 나라의 신분으로 진리를 설파하므로 주변의 이웃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이 이런 사실을 구체화시킬 현장으로 기능하게 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율법을 통해 계시되고 있는 순종을 담보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언약관계속에서 적극 통치해 가실 것입니다. 

울법하사와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성막(聖幕)에 대해 계시해 주십니다. 성막계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함께 거하시며 당신의 정권(正權)으로 친히 통치하신다는 임마누엘 신학의 정수(精髓)를 예표적으로 보여줍니다(출25:8-9). 이런 사실의 구체적 성취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요1:14)과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셔서 내주하신다는 방식을 통해 실체화되기에 이릅니다(고전3:16, 6:19). 레위기서에서는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지속적으로 교제와 교통을 나눌 수 있는 거룩의 관계를 각종 제사의 방식, 특별히 속죄제사를 통해 계시해 주십니다.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실질이 어떤 것인 지를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표상적 사건의 의미를 갖습니다. 민수기서는 가나안 정복의 성취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광야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다양한 사건의 경험을 통해 교훈해 줍니다. 동시에 불순종의 결과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언약적 심판에 처해질 수밖에 없음을 40년간에 걸친 광야의 유리방황을 통해 강력히 시사합니다. 가데스바네아 사건(민13-14장)과 불뱀사건(민21:4-9) 등은 이런 사실을 예시해 주시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신명기서에서는 출애굽 2세대를 향해 출애굽 사건의 역사적 사실과 구속사적 본의 및 율법의 재해석, 가나안 정복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믿음의 순종을 통해 반드시 성취해야 할 것을 다짐시키는 모세의 3편의 설교를 소개합니다. 

그렇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오직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당신의 언약백성들을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시는 가운데 친히 전쟁을 수행하심으로 마침내 최후의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가 이런 사실에 근거해 확증됩니다.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 분의 손길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며 믿음의 인내로 대처해 나가야 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서 나와집니다. 전3;5-6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⑨ 다윗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삼하7:11-17)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아브라함 언약에 약속된 자손언약은 출애굽사건과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가운데 다음 단계로 땅 언약의 성취를 향해 가나안 정복의 여정 길로 나아갑니다. 이는 출애굽 사건 속에 담긴 구원의 실질과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계시된 제사장 나라로서 신정왕국의 수립은 가나안 땅에 정착돼 평안과 안식의 삶이 보장되는 것을 통해 비로소 성취되기 때문입니다(수21:43-45). 다시 말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광야에서의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거나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늘 불안한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면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을 누리는 삶이라고 평가할 수 없기에 말입니다. 이로 인해 사실상 출애굽 사건으로 시작된 구원의 완성과 실제적 누림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표상하는 가나안 땅의 정복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것은 신약적 관점에서 성도가 소망하는 영적 본향인 천상의 도성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의 등장과 과도기적 통치를 통해 왕의 필요성을 시사합니다(삿21:25). 이는 곧바로 시내산 율법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신17:14-19)이 누구인 지를 룻기서를 통해 다윗을 지목하는 방식으로 보다 진전됩니다(룻4:18:22). 다윗의 공식적인 즉위에 앞서 사람의 마음에 합한 왕인 사울을 먼저 이스라엘의 왕으로 허락하십니다(삼상8:20). 이런 사실의 본의는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하나님의 생각에 반(反)하는지를 알게 하셔서 인간의 연약과 실패를 깨우쳐 주심으로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실패를 통해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적극 배울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무엘서 저자는 사울이 통치하는 동안 반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할 뿐 아니라(삼상13:8-15, 15:9, 12절), 그 때마다 변명 일변도로 처신하는 것(삼상13:11-12, 15:21)을 소상하게 기술함으로 사람의 마음에 합한 왕의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자격미달인 사실을 우회적으로 증거합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 다윗을 기름 부어 사울을 이어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왕을 삼을 것을 명령하십니다(삼상16:1, 11-13절). 이것이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기까지 세 번에 걸쳐 기름 부음을 받게 되는 첫 번째 경우입니다. 이때는 가족들만 모인 가운데 철저히 비공식적으로 예식이 치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은밀한 중에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을 이내 블레셋과의 전쟁터로 내 보내 골리앗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심으로(삼상17:45-49)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옮겨 놓으십니다. 다윗과 골리앗 싸움의 구속사적 의미가 이런 사실에 집중됩니다. 다윗을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세워주심으로 소위 상견례(相見禮)의 자리를 마련하시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주도면밀한 섭리역사 말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라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창화(唱和)하는 소리에 담긴 의미가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깊이 연관돼 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사건은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 곧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되는 현장이요 무대인 사실로 인해 철저히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실하게 제시해 줍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윗은 철저히 사울의 견제를 받으면서 집중적인 핍박과 고난의 기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사울을 통해 받는 시련을 통해 다윗을 연단하심으로 더욱 여호와 중심의 신앙관에 깊이 접촉시켜 주십니다. 마침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이 죽자 다윗은 유다 땅 헤브론으로 귀향합니다. 유다사람들이 헤브론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저들의 왕을 삼게 됩니다(삼하2:4). 이것이 두 번째 기름 부음입니다. 보다 공개적이고 공식적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섭리의 작정기간이 차게 됩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장로들이 헤브론에 모입니다. 저들이 한 마음으로 다윗을 기름 부어 명실 공히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으로 옹립(擁立)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세 번째 기름을 부음을 받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마침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통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다윗은 왕위에 오르자 이내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부터 운반해와 다윗성에 안치합니다(삼하6:12-15).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상징으로서 그것이 다윗성에 안치되었다는 사실은 다윗의 왕권이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재가와 인준을 받음으로 언약적 정통성을 보증 받는 동시에 다윗이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로서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했음을 확증한다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저 유명한 소위 다윗언약을 맺어 주십니다(삼하7:11-17). 다윗언약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셔서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약속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언약의 자식을 주심으로 다윗의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 자식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위해 거하실 집(성전)을 짓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넷째, 언약의 핵심관계인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확고부동하게 인(印)쳐 주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나단으로부터 이 언약의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감당키 어려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삼하7:8).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들이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을 통해 차착 없이 성취되는 것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든든히 세워질 것을 간절히 열망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그의 심정을 담은 고백적 기도의 내용이 다름 아닌 삼하7:29의 내용입니다.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이 기도의 내용을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해서 편의적(便宜的)으로 적용시키게 되면 다윗의 기도 속에 담긴 하나님의 본의(本意)와는 전혀 무관한 사사로운 기도의 내용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소위 말씀을 사욕의 수단으로 삼는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인 배도(背道)의 신앙관이 성립되게 됩니다(마7:21-23, 롬10:2-3, 딤전6:3-5). 결국 말씀의 도구화는 하나님을 인간의 유익을 위한 한낱 수종자로 삼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우상으로 매도하는 크나큰 범죄행위를 유발시킵니다. 만의 하나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신앙관이 자칫 이런 식으로 변질된다면 신앙의 본질이 처음부터 왜곡(歪曲)된 것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고도 지옥에 갈 수 있다’는 아이러니(irony)와 역설적 현상(paradoxical phenomenon)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준엄하게 경고합니다(마7:21-23).

이후 다윗언약은 그의 약속의 아들 솔로몬 왕의 초기 통치역사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 및 시내산 언약과 더불어 성취의 절정을 맞게 됩니다(왕상4:20-25). 특별히 열왕기서 기자는 솔로몬 통치하에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음을 “솔로몬의 사는 날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와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4:25)는 비유적 묘사를 통해 확고히 증거합니다. 이런 표현이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가리킨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은 미가와 스가랴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도래하게 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상태를 예언적으로 선포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표현을 차용해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명백히 확인됩니다(미4:4, 슥3:10).

한 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통치 속에서 발견되는 하나님 나라의 실질이 성격상 예비적이며 예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다윗언약 속에 담긴 언약성취의 이중성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솔로몬 통치역사 속에서 실현된 다윗언약은 실질에 있어서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성취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자체 속에서 미래지향적인 약속의 성취를 전망케 하는 종말론적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솔로몬 통치 말기에 율법에 대한 그의 불순종과 이방의 처첩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된 각종 우상숭배에 동조하는 것으로 인해 사실상 남북이 분열됨으로 다윗왕조는 중도하차하는 데서 이런 이중적 전망을 더욱 사실화 시킵니다(왕상11:1-13). 상황이 이럼에도 다윗언약의 예비적 성취와 중단은 신적언약의 특성상 다윗왕조를 아주 패(敗)하지 않으시고 불가피하게 다윗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향한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에로 독자들의 관심을 유도합니다(렘31:31-34, 겔36:26-28, 37:24-28, 사9:6-7, 11:1-2, 52:13-15. 53:4-6). 

이런 관점에서 비록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 건설의 당사자와 하나님 나라 몰락의 장본인이란 이중적 성격을 띤 불가사의한 인물로 평가될지라도 다윗언약 속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서의 집 곧 성전을 건축한 사실과 관련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예표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치세(治世)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성전을 짓는 일과 관련해,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진정한 아들의 신분으로 성육신하심으로 임마누엘 곧 성전의 실체가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마1:1, 22-23절, 요2:19-22).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행하신 각종 이적기사를 보면서도 자신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는 가운데 또 다른 표적을 보여 달라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함과 강퍅함을 질책하시면서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을 솔로몬의 실체로 친히 증거 하십니다(마12:42, 눅11:31). 

솔로몬의 불순종과 우상숭배는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르러 급기야 분열 이스라엘 왕국으로 전락돼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남유다는 르호보암이 통치하게 됩니다. 다윗언약에 명시된 대로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열된 이스라엘 왕국은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이 과정에서 북 이스라엘 왕국의 여로보암은 철저히 여호와의 종교를 수단화시켜 권력유지를 위한 정치적인 목적에 사사로이 이용합니다(왕상12:25-33). 열왕기서 기자는 이를 ‘여로보암의 길’로 묘사함으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악행의 표상으로 정죄합니다(왕상15:34. 여로보암의 죄는 이후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한결 같이 좇았던 패역한 범죄행위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켜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합니다(왕상14:16). 이런 사실은 BC722년 앗수르에 의해 북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는 것으로 현실화됩니다(왕하17:1-8). 

일반적으로 ‘여로보암의 길’로 표현되는 여로보암의 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왕상12:25-33). 첫째, 하나님의 도구화 및 우상화 작업입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해진 절기에 남쪽에 위치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칫 북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는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과 벧엘에 각각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의 신앙을 우상으로 대체하고자 시도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편으로 전락될 때 거기에는 진정한 의미의 여호와의 신앙은 실종됩니다. 대신 여호와의 신앙을 가장한 우상 숭배적 사이비 신앙이 성립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유익을 도모하는 한 낮 수종자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러 상황에서 열심을 내면 낼수록 불법적이며 불복종적인 자의적 숭배신앙만이 난무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경고입니다(롬10:2-3, 마7:21-23). 둘째, 자의적 숭배신앙의 조장으로 인한 무자격 신자의 양산입니다. 특별히 제사장을 임명하는 데 있어서 모세 율법에 정한 대로 레위지파 사람이 아닌 보통의 사람들을 임의대로 제사장에 봉직시킵니다(대하11:13-16).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뜻이 철저히 무시되는 패역한 범죄행위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한 현대적 적용이란 측면에서 접근해 본다면, 소명이나 구원의 확신과는 무관한 교세확장을 위한 무자격 목회자의 마구잡이식의 배출과 목회성공을 위한 무자격 세례교인의 양산에 비교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이들이 유유상종해 교회공동체를 이룬다고 할 때, 그 곳에 참 된 성경적 신앙과 교회와 목회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입니다. 셋째, 유사성(類似性)과 편의성(便宜性)의 문제입니다. 이는 본질에서 이탈한 형식주의 및 외식주의 신앙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거국적으로 정해서 드리는 절기를 임의대로 변경해 적용시킵니다. 특별히 7월 15일로 정해져 있는 초막 절기를 8월 15일로 변경해 드리도록 유도합니다. 겉으로 보면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날짜가 다른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고의적으로 거역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유사성과 편의성을 앞세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겉이 제아무리 기독교적으로 비슷하게 치장되었다 할지라도 내용과 본질에 있어서 성경이 말씀하는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게 되면 이미 기독교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를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인 신앙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됩니다. 모든 신앙적 열심이 허사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경종을 울립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란 ‘지식을 좇는 신앙’(롬10:2-3)을 가리키는 것으로 곧 말씀의 본의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계시의존 사색신앙과 섭리의존 순종신앙 자세를 일컫습니다. 

남왕국 유다 또한 본질에서 북왕국 이스라엘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왕의 경호원들로서 선지자들에 의해 부단히 불의와 불법과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의 메시지가 지속적으로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남유다 마저 바벨론의 3차(BC605년, 597년, 586년)에 걸친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패망하게 됩니다(렘25:1-9, 대하36:17-20). 그러나 남유다의 경우 북이스라엘과 다른 점이 있다면, 멸망과 포로의 기간을 70년으로 제한하심으로 70년이 마치는 날에 바벨론 포로로부터 다시 고토(古土) 가나안에로 귀향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렘25:8-13, 29:10-14, 30:1-3, 겔37:21-22, 사14:1-3). 이는 다윗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다윗의 왕위와 왕권의 영속적인 보장이 바벨론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남유다왕국을 통해 중단 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강력히 암시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10)라고 축복했던 야곱의 예언이 남유다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성취의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아울러 간파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면 다윗언약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출처와 배경이 야곱의 예언적 축복에서부터 유래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출처 : 그리스도와 함께
글쓴이 : 삶의 재미 솔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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