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스크랩]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본 한국 교회

하나님아들 2012. 11. 21. 11:26

‘장신원보’ 게재 원고 2,000년 7월 20일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본 한국 교회

 

최 충산 목사.

 

들어가는 말

1.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1)구약의 하나님 나라

  2)신약의 하나님 나라

  3)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

2.하나님 나라와 교회

  1)교회란 무엇인가?

  2)교회가 하나님 나라인가?

  3)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련성

3.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특성

  1)하나님 중심성

  2)관계 중심성

  3)도덕적 성결성

  4)유기체적 통일성

4.하나님 나라와 한국교회

  1)산업화 과정에서의 교회관의 변화

  2)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반성

마감하는 말

 

 

들어가는 말

오늘 날 우리 한국 교회에 가해지는 비판의 소리는 신선한 것이 없다. 우리 교회에 대한 애정과 고통을 동반하지 않은 비판의 소리는 들을 것이 없다. 우리는 세상의 잣대에 의하여 우리를 보는 관점을 지양하고,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겸허히 우리 자신을 보는 일을 시작해야겠다. 이제까지 우리는 세상의 기준에 따라 평가하는 비판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표류하였다. 더 이상은 세상의 소리에 귀기우리지 말고, 진리로 우리 자신을 재보아야한다.

다시금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는 것은 우리의 교회가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현시하는 교회여야 하기 때문이다. 천년이 오고, 다시 새 천년이 와도 교회는 그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 교회의 주인이 변하지 않고, 그분의 다스림의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에 대한 그분의 요구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변하지 않는 진리 위에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먼저 우리가 서있는 근거인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살펴보자.

 

1.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1) 구약의 하나님 나라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문자적 표현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나라와 일치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구약은 창조와 하나님의 세계를 향한 뜻으로 시작하여 인간의 타락과 죄악을 보여주고(창 1-11장), 세계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속경륜 가운데서 아브라함의 소명과 이스라엘의 형성과 신정국가건설로 이어지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선다.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세상에 하나님의 증거가 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실패한다. 이러한 반복되는 실패와 심판으로써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잡혀간다. 그 후 바벨론의 포로에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회복의 약속을 주신 하나님은 구원의 믿음과 소망을 불러일으킨다(대하 36:22,23; 사40-66; 겔36-37장). 그리고, 이 회복은 새롭게 세워질 새언약과 새로운 창조를 가져오실 하나님의 우주적인  목적의 실현으로 넓게 열려진다.

 이러한 역사 가운데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세계를 향하신 큰 목적과 뜻을 예언한다. 즉,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의 회복과 구원, 하나님께서 악을 없애고 구원과 평화와 의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리라는 역사의 최종적 결산을 예언한다.

메시야는 사탄을 멸하실 여인의 후손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죄와 사망의 노예로부터 종말론적인 출애굽을 가져오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세울 종말론적인 모세로, 유다지파의 자손, 어두움의 권세를 멸망시키고 사람들을 죄와 사망의 위협에서 구원하고 안식과 평화를 가져오며,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직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여 온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할 다윗의 자손으로 구체화해 간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만유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표현해 주는 개념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연을 다스리시고,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며, 모든 민족의 삶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역사하여 세상을 다스린다. 하나님이 만유를 새롭게 하실 시간이 도래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 나라가 하나님의 특별한 대리자를 통해 하나의 현실로 임한다. 이 인물은 때로 왕, 목자, 또는 종이라 불리며 인간적 특성과 신적 특성을 겸비한다. 그가 “땅 위에 공의와 평화를 세울” 것이다. 이 일이 발생할 때 완전한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을 대망하였다.  그런데, 그 나라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국이 가지지 못한 네 가지 특징이 있다고 존 스토트는 설명한다.

 

 첫째는, 그 나라는 보편적인 것이다. 원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이 보편적인 나라였는데, 문자적으로 결코 성취되지 않았다. 이스라엘도 조금 밖에는 소유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통치지역은 “땅 끝까지 이를 것”(슥9:10)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 나라는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 작은 나라 이스라엘과 유다는 파도 위의 낙옆처럼 흔들였다.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러나, 메시야의 나라만 끝없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사9:7).

 셋째, 그 나라는 의로운 나라일 것이다. 선지자들은 메시야가 오셔서 공의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예언했다.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9:7,11:5).

 네째로,그 나라는 평화의 나라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약소의 땅에서 계속되는 전쟁으로 삶의 안정을 찾지 못했다. 남, 북의 강대국 사이에서 탁구공과 같은 신세였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평안하게 각 사람이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사2:4,미4:1-4) 평화의 나라를 고대하였다. 메시야는 “평화의 주”라 불릴 것이다(시9:6).

 

 하나님 나라의 4가지 특징 모두가 이상적 왕이신 하나님을 고대하는 노래가 시편 72편에 함께 흐르고 있다.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저기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5,6,7절).

 또한 사9:6-7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한 아기가 났으니 그 정서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고 했다. 그 빛나는 네가 이름 즉 “기묘자”(모사 혹은 공의로운 통치자), “전능하신 하나님”(범세계성), “영존하시는 아버지”(영원성), “평강의 왕”(평화)에는 하나님의 성격이 참으로 잘 나타나 있다.

 

2)신약의 하나님 나라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1:15)고 선포하셨다. 나중에 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고 하셨다. 예수님은 또한 행동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자신을 통해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새 세계와 대립되는 삶의 모든 측면을 역전시켰다. 질병, 귀신들림, 의식적인 속이 빈 종교, 식량의 부족(주님은 굶주린 무리를 먹이셨다). 적대적인 자연력(폭풍을 잠잠케 하심), 심지어 죽음까지도 역전시켰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매우 좋게” 창조하신 것을 손상 또는 파괴시키는 모든 것의 종말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가 있는 곳에는 완전한 화해가 있다. 그 나라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과, 서로와, 자연과 완전한 화해를 이루게 된다. 두려움, 침략, 이기심, 거짓, 고통이 거기에는 없다. 피조물 자체가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된다’(롬8:21)..

‘하나님 나라’는 신약성경 중 복음서 이외에서는 하나의 용어로 자주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재창조라는 개념과 아주 유사하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인식하고 실행하는 곳은 어디나 하나님의 새질서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세상 역사의 끝에 그 새질서가 완성될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의 적들, 즉 사망과 사단 등이 최종적으로 멸망할 것이다. 모든 자와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실 것이다(빌2:11).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18:36). 완력에 의존하는 인간의 힘으로 그 나라를 세울 수 없다. 인간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소유할 수 없다. 인간은 그 나라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로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을 주는 사랑,공의,긍휼과 자비, 섬김, 불가침, 남을 위한 자발적 고난으로 그 나라의 가치 기준에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순응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헬라어에서 “왕”과 “왕국”은 “바실레우스”와 “바실레이아”이다. 바실레이아는 히브리어로 말쿠트이다. 그 말은 “왕국”, “왕적 통치” 또는 그와 관련된 개념들을 언급할 수 있는 단어이다. 하나님은 오직 한번 예수님에 의하여 왕이라고 일컬어 졌다(마5:35,사48:2,마18:23,22:2-14).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사복음에서 거의 사십 여 회나 왕이라고 일컬어 졌다. 여기에서 그 의미는 항상 약속된 메시야이며, 다윗의 후손이요, 예언된 유대인의 왕이다. 예를 들면, 마태 2:2, 21:5, 25:34, 25:40, 27:11, 29, 37, 42. 막15:2, 9, 12, 18, 26, 32, 눅19:38, 23:2, 3, 37, 38. 요1:49, 12:13, 15, 18:37, 39, 19:3, 12-14, 19, 21을 보라.

마태복음에서 “하늘나라”라는 표현은 33회가 나타난다. 반면에 “왕국” 혹은 “하나님의 왕국”은 17회가 나타난다. “하늘나라”나 “하나님의 나라”란 같은 말이다. 마가복음에서 “하나님 나라나 “나라”는 14회가 나타난다. 누가복음에서는 39회가 나타난다.

 

 신약에 하나님의 나라가 구약의 언급했던 네 가지 성격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나타났는지 살펴보자.

 

 첫째, 보편적인 성격으로 그 나라가 나타났다. 이방인들이 동, 서에서 몰려와 그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식탁에 앉을 것이다(마8:11).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이 그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 물었을 때, 그 대답 대신 전 세계적인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대답하셨다. 그 나라는 땅끝까지 전파될 것이고, 제자들은 권능으로 그 나라를 증거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담대히 거리낌없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행28:28,30)했다. 이제 이방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도 “외인”도 “손”도 아니다. 오히려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엡2:12-19)이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의 두 번째 특징은 영원성이다. 주님은 탄생 전부터 이미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눅1:33)라고 예언되었다. 그 나라는 땅끝까지 미치는 나라일 뿐 아니라, 시간의 끝, 후에도 존속하는 나라이다. 제자들에게 주님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약속하셨다. 벧후1:11에는 “우리 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했다. 히12:28에는 “우리가 진동치 못한 나라를 받았다”고 했다.

셋째, 공의는 신, 구약 전체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명백한 특징이다.

 도덕적인 회개가 그 나라에 들어가는 첫째 조건인데(막1:15), 이것은 말이 아닌 실생활의 순종을 의미한다(마7:21등). 그 백성들의 의는 분명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인 보다 훌륭해야하며, 주님께서 주신 ‘새 생명’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급을 결정할 것이다(마5:17-20). 에베소서 5:5,6에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네째,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평화이다. 샬롬은 논쟁과 전쟁을 그치는 것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샬롬은 사회복지, 올바른 정치질서, 인간 상호간의 화해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샬롬은 예수가 주님과 구세주로 인정되는 곳에서만 존재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거역하던 인간의 기세가 꺽이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 회개하고 믿고, 중생의 역사가 있는 곳에서만 하나님의 나라는 존재한다(마18:1.막10:13-16,요3:3-7). 하나님의 샬롬의 영역은 세상이 아니고, 교회이다. 이 화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많은 희생으로 얻어졌고,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왜냐하면 그 분은 우리의 평화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화해는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과의 화해이다(엡2:13-23).

 

3)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

 

 게할더스 보스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예수에게 있어서는 그 핵심이 하나님 중심의 개념이다. 이 나라는 모든 시대와 환경에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그 분에게 대항하는 모든 권세에 대하여 초자연적으로 깨뜨리시는 나라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의적인 인정으로 이러한 통치 하에 놓이게 된다. 또, 그 나라는 모든 것의 최고선이신 하나님을 위하여 애쓰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하나님을 희생시켜 인간을 영화롭게 하는 모든 세상의 세계관과 종교에 섞여져 있다. 그래서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는 상태의 개념은 아니다.”라고 했다.

 

 피터 툰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여섯 가지 논제로 말했다. ①하나님께서는 지금 활동하시며, 그의 구원의 통치는 인간들 가운데서 시행되고 있다. ② 이 구원의 통치는 예수님과 그의 사역 안에서 현존한다. ③하나님의 구원적 통치는 새로운 관계와 더불어 새로운 생활형태를 가져온다. ④하나님은 항상 이니시어티브를 가지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구원적 통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응답을 요청하신다. ⑤하나님의 역사의 종국에 충만하게 실행될 것이다. ⑥하나님의 현재적 구원의 통치를 안다는 것은 비밀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하나님 나라를 정의한다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따라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현존하며, 우리의 새로운 삶과 문화의 형태를 요구하면서,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지금 여기에서 현재적으로 시행하는, 종국에 완성될 것을 향하여 가고 있는 실제적인 나라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 종말론적인 통치이다.

 

2.하나님 나라와 교회

 1)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의 결과요, 그 나라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 복을 누린 자들의 모임이다. 그 나라는 교회의 시작이요, 기초이지만 ,또한 교회의 목적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다는 것은 땅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가장 가까운 표현인 유기적이며, 믿을만한 공동체의 한 구성 요소가 된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고, 그분에 의해 다스려지는, 바로 그분 교회의 한 일원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그분의 주권이 행사되고, 그분의 법도가 존중되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 혹은 하나님의 통치의 현시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우리 시대에 지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의 형태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심령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구체적 표현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한 가지 표현의 형태일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유지시키는 하나님의 행위이며 통치이다. 천국 안에 있다는 것은 세상의 악한 세력으로부터 벗어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어두움의 지배로부터 건지사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것이니라”(골1:13). 그러므로 교회는 사탄의 세력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곧, 그들은 장차 올 시대의의 능력을 맛보는 것이며(6:5) 새로운 창조의 첫열매이다.

 

2)교회가 하나님 나라인가?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점에서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분리할 수 없다. 교회가 메시야를 믿는 메시야의 공동체라는 점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는 분리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교회가 동일하다고 막상 결정해 버릴 수는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보다 훨씬 더 크고 포괄적인 내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3)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련성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와는 분명히 구별되면서도 분리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조지 래드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동일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네 가지 관계성을 주장했다. ①하나님 나라가 교회를 창출한다. ②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한다. ③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이다. ④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관리자이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 불가분의 관계가 존재하지만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고 그 교회는 사람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의 통치이며 그의 통치의 축복이 경험되는 영역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그 축복을 누리는 자들의 교제이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창출하고 교회를 통해 일하며 교회에 세상에 전파된다. 교회-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자들-없이 하나님 나라가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 나라 없이 교회가 있을 수 없다.”

존 스토트도 조지 래드의 주장을 의존하면서, ①교회는 하나님의 특징, 즉 그 나라의 증표이어야 한다. ②교회는 천국의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③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선경험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존 스토트는 교회를 “현재적이며, 부분적인 그리고 불완전한 모습”의 천국이라고 불렀다. 피터 쿠츠믹도 천국과 교회를 관련하여, ①과거의 그리스도의 사건과 관계하여,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결과이며, ②현재의 그리스도의 사건과 관계하여 교회는 천국을 경험하며, ③미래의 그리스도의 강림과 관련하여 천국을 기다린다고 정리하였다. 피터 툰도 말하기를, ①하나님 나라는 항상 교회보다 우선한다. ②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증거자요, 전파자다. ③교회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탄의 왕국에 대립한다. 그리고 툰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교회는 각기 다른 개념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아들(성자)을 통하여 시행되는 아버지(성부)의 은혜로우신 통치라고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적 통치아래서 사는 백성들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이 통치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사람은 당연히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에 우선한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할 때 마땅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3.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특성

1)하나님 중심성

 하나님 나라는 그 강조점이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할 때, 그 ‘나라’가 ‘하나님’의 왕적인 능력과 통치, 그 분이 구속적 행위와 주권적인 권위에 속해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라는 구절의 능동적 단어는 하나님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고 증거자인 교회에도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강조되어야 한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중심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실제로 교회에서 인정되지 않을 때에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효과있게 현시하지 못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주권적 통치의 질서를 종말론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2)관계 중심성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바른 관계를 중심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완전히 회복된 관계이다. 그래서 그 관계성은 아주 중요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체적 공동체 질서를 드러내는 것이 교회이며, 그런 교회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는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 나라는 먹는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이라고 했다. 바울은 부름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 삶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엡4:3) 삶인 것이다. 그래서 그 나라에 속한 성도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기”(롬12:8)를 힘써야하는 것이다.

 

3)도덕적 성결성

하나님 나라의 의는 예수의 제자들이 최우선으로 추구했던 최고선이었다(마5:6,10,20,6:33). 엡 5:6,7에도 바울은 “너희도 정녕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하는 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화목제물로 내어놓으신 목적도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3:26)라고 했다. 교회는 이러한 구속의 역사를 기초로 도덕적으로 성결하여야 한다. 그렇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통치를 자기 속에서 실현하면서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는 공동체인 만큼 그 자체 내에 의의 질서를 구축하여야 한다.

 

4)유기체적 통일성

이러한 하나님 중심적 의의 질서는 교회의 유기체적 통일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을 초월하여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영적 교통의 질서이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유기체적 통일성을 바탕으로 하는 질서이다. 이 고급한 질서가 교회 안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화평의 질서이다. 바울의 서신서는 그것을 지역 교회의 성숙한 삶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평화는 장차 궁극적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최종 목표인 동시에 오늘날 교회 공동체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다.

 

4.하나님 나라와 한국교회

한국 교회는 과연 하나님 나라를 스스로의 질서에 실현하고, 그것을 한국 사회에 현시하였는가? 그 나라의 보편적 성격, 그 나라의 의로운 성격, 그 나라의 영원하고 화평의 질서를 보여 주었는가?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적용하여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하나님 중심성, 관계 중심성, 도덕적 성결성, 유기체적 통일성이라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서 나오는 그 속성을 나타냈는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한국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그대로 잘 드러냈다기 보다는 한국교회가 속한 한국사회에 너무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한국 사회의 변동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1)산업화 과정에서의 교회관의 변화

 한국교회를 논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한국 사회의 변동과 연관지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60년대 이후의 한국사회의 변동과 축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한국 사회의 특징이 그대로 한국 교회의 외면을 결정했을 뿐 아니라, 그 내면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0년대 이후의 한국 사회의 변동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두 가지 커다란 축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경제제일주의이다. 두 번째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사회재개편이다. 우리 사회는 근대화가 유일한 살길이라고 보고, 열심히 추진해 왔다. 그것은 서구화 운동이고, 공업화 운동이고, 동시에 물질우선주의적 운동이었다. 이것은 경제 우선주의이며, 동시에 경제단본주의적 낙관론이 숨어있었다. 즉, 경제만능주의적 사고를 사회에 만연시켰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 사회는 사회 재개편이 이루어졌다. 사회재개편은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한 도시화시책으로 유휴농업인구의 도시집중을 유도했다. 그러니까, 근대화 운동으로 물질적 안정을 가장 최우선의 가치로 추구했기 때문에, 전통적 삶의 방식과 연대가 깨어지면서 사회적인 변화가 급격하게 일게 되었던 것이다. 인구대이동으로 인한 농촌경제의 몰락, 전통적 도덕과 인습의 변화, 생활안정과 계급이동을 위한 부단한 물질 추구 등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아왔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사회의 떠받쳐 주는 도덕적 기초가 무너지고 말았다.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게 되니까,경제만능,목표지상,능률극대화,속도우선적 물질추구로 인간성은 황폐되어졌다. 더욱이 그것을 순화하고 통제할 수 있는 설득력있는 사회 지도력이 사회에 가해지지 않았다. 이러한 물질지상, 성장지상주의는 물신숭배의 종교를 낳았고,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한 고상한 정신가치는 아주 거추장스런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는 각종 편법주의가 생겨났다.

이렇게 60년대 이후는 윤리규범적 기초없이 안정, 성장 지상의 물질가치를 최우선으로 추구함으로 한국사회의 외면적인 형태를 결정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인들의 가치의식을 결정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 교회의 외면적인 형태와 그 내면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첫째: 한국교회의 세속화

이제 한국사회를 결정한 60년대 이후의 한국인들이 한국교회를 이루었다. 이것은,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결정적인 영향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를 그대로 반영했다. 한국사회의 부정적 특징들이 그대로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면으로 나타났다. 교회는 사회에 대하여 바른 가치와 진리를 외쳐야하고, 그 사회의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여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사회 변동의 영향으로 비대해졌지만,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세속의 풍파 앞에 자기 정체성을 흐트러뜨리고 말았다. 심지어 사회의 물질적 목표와 가치의식이 그대로 교회의 실질적인 목표와 가치로 전치되어 나타나게 되어 교회의 내면도 사회의 그것과 같이 타락하게 되었다.

60년대 이후 교회 수적 성장의 특색은 사회의 물질적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이루어 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사회의 물질적 외양주의의 가치는 그대로 교회에 적용되었다. 사회의 가치의식이었던 물질적인 규모의 확대는 교회의 목표로 전치되어 나타나났다. 더 많은 재화를 창출해야 된다는 물질적 규모주의는 그 시대를 사는 한국 교회 교인에게는 자연스런 것이였고, 따라서 교회가 물질적 규모주의를 목표로 잡고 나가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물질적 외양, 규모, 거대화를 추구하는 자세는 내면적 진실성을 기반한 교회체질을 형성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한국교회의 물질가치 채용은 교회관에 영향미쳐 외면적 규모와 재정, 자본축적 여부 등으로 교회를 판단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종교성에도 영향미쳐 은혜=물질, 신앙=부자라는 등식을 기능하게 했고, 물질적 가치를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사회에서의 성공이 곧 신앙 승리의 결과라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경제활동의 결과가 교회 안에 유입되고 교회는 물질화되어 갔던 것이다. 이로써, 한국사회의 최대 목표였던 물질 우선적 목표와 그 추구의 결과가 교회의 물질적 토대를 결정하고, 교회의 실질적인 목표와 신앙의 내면까지 결정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물질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개인적 신앙의 목표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교회 내의 도덕적 내면이 와해되고, 여러 가지 갈등이 야기되었다. ①교회의 계층화로 인한 있는 교회와 없는 교회간의 갈등과 계급갈등, ②신앙의 내면적인 질과 성향의 차이에서 오는 단절과 갈등, ③권징의 권위가 무너진 교회 내 무질서의 갈등, ④물질주의적이고, 패권적인 교권간의 갈등, ⑤신앙과 교회의 이기성으로 인한 교회간의 교통의 갈등(개교회주의)이 나타났다.

이렇게 사회와 교회의 동질적 가치추구가 7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일어난 교회의 동반자적 과오가 아닐 수 없다. 교회는 세속사회의 현실적주의적 삶의 태도에 신앙적 합법성을 제공해 주었다. 이 때에 신앙의 물질전환이라는 과제를 만족시켜는 신학적 수단이 나타났는데, 그것이 축복과 성장과 성공의 신학이고, 완전구원론이다. 이것은 현실의 물질추구욕구를 신앙적으로 정당화시켜주는 논리이다. 이러한 논리는 한창 사회 속에서 물질 우선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그 가운데 사는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시기적절한 신앙적 이데오르기로 선택되었다. 그래서 민간에 선풍적인 인기 속에서 수용되고, 교회가 앞 다투어 채용했던 것입니다.

 결국, 한국교회는 사회의 물질우선 추구의 가치의식을 신앙의 내면성에 질적 요소와 교환될 수 있는 것으로 타락시켰다. 신앙한 것만큼 물질로 돌아온다는 진리의 중대한 왜곡을 낳고 말았다. 신앙의 주된 관심을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중심의 현세적 소원성취로 전도시켰으며, 부자가 되거나, 출세하거나, 병의 치료와 같은 지엽적인 것에 집중하게 하는 신앙 본질에서의 일탈을 낳고 말았다.

 

둘째:“성령 운동”과 그 문제점

 특히,60년대 이후의 교회 현상은 심령부흥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 초신자들을 효과있게 가르칠 만한 교육적인 역량이 부족했던 한국교회는 심령부흥회를 통하여 초신자를 교육하고, 기성 신자들의 신앙을 자극하는 좋은 기회를 삼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심령부흥회의 역기능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①부흥사의 인격과 자질, 그리고 신학의 빈곤. ②감정위주의 호소와 신앙의 체험적 확인 ③개인적이고 이기적인 현실충족 욕구에 영합한 메시지의 타락 ④은사 체험적인 중심분위기 등으로 심령부흥회는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70년대 이후 80년대 중반까지 한국교회는 현실적 가치를 추구하는 물질욕구와 주로 체험과 은사, 치병, 예언들을 주로 추구하는 감각적 체험주의가 적절하게 적합된 신앙양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국교회의 성장의 현상을 살펴보면, 주로 현실적인 축복과 성공, 동시에 체험, 은사, 치병, 방언, 예언 등을 강조하는 교단이 높은 성장률을 보였던 것은 그것을 반증한다.

 

 이 때의 한국교회의 신앙의 질을 분석한다면,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볼 수 있다.

①교리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 ②체험과 이적 질병치유, 방언, 은사들을 강조, 신앙내용 중 어떤 특수한 분야만 강조. ③내면적이고, 직접적인 주관계시를 강조, 상대적으로 성경계시의 권위를 실질적으로 경시. ④교회론적인 인식이 없고, 은사체험 동질집단을 형성하여 교회의 내적 영적 통일을 저해하고, 교회의 정당한 치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음. ⑤사회윤리의식이 결여되어 있고, 기독교 문화에 관심이 없음. ⑥도덕적 성화가 보이지 않으며, 자기 반성적 성찰과 역사적 책임의식이 희박. ⑦현실적이고 이기적이며, 가족 중심적이고, 현세적 제액초복에 실질적인 신앙의 목적을 둔다. 따라서 모든 종교적 행위를 이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

 우리는 이제까지 한국사회와 그 축을 같이 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신앙의 면 중 부정적인 일면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가치의식을 그대로 신앙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결국 이러한 점은,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산업화 과정에서 목적한 사회지표를 그대로 따라갔다는 의미이며, 그런 결과로 신앙의 한 양태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곧 사회적으로 물질가치를 추구하는 민간의 욕구를 종교적으로 수용하면서, 적극적으로 신앙적 논리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 교인들은 도덕적 결단을 위한 깊은 해석과 고려없이 자기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신앙적 논리를 자연스럽게 따랐다. 우리는 이러한 한국교회에 부정적인 일면으로 체질화되어 있는 현실주의적이고, 동시에 감각주의적인 신앙의 양태를 ‘물질주의 기복적 신앙’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한국교회가 속하여 있는 한국사회의 결정적인 영향을 받아 그 외형적 형태 뿐 만 아니라 그 내면의 질적인 구조까지 또는 신앙의 성향까지 영향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인가? 그것은 한국교회가 하나님 중심적 질서의 실현으로서 교회의 체질을 형성하는데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닌가?

 

2)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반성

 ① 공리적, 도구적 교회관

교회는 결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단체는 아니다. 오히려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자기를 희생하여 던져 넣은 희생의 코이노니아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교회가 계속적으로 개인에게 영적, 감정적 충족을 시켜 주어야하는 구조로 바꿨다. 희생이 없이는 참된 기쁨이 없는 것인데, 교회를 기복적 이익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마이클 그리피스는 “교회는 단지 은혜의 수단이 아니다”라는 말하면서, 교회 출석의 가치를 ’영의 양식을 얻기 위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종종 자기 합리화의 수단이 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항상 자기를 유익하게 하는 별미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은혜의 수단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도록 하나님이 의도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만 할 것이라고 했다. 에밀 브룬너가 말한 대로 교회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교회를 어떤 개인의 영적, 종교 감정적 충족을 위한 공리적, 도구적으로 인식되는 일이 많다.

 

 ② 기복적 교회관

특별히, 60년대 이후 사회의 최고가치로 추구된 물질주의의 물결과 그 욕구의 사회적 분출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똑같이 물질 안정과 성장을 추구하는 한국 교인들은 자연적 욕망을 수용해 신앙 논리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였던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속에는 단순한 물질적 안정과 현세적 복지만이 아니고, 종교 체험적인 요소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즉, 신비적 체험 요구와 물질적 요구가 잘 결합되어 있다.

즉, 이러한 양상을 나타낸다는 것이 종교적으로는 신령과의 교통의 측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목적이 아니고, 신령의 덕으로 제액초복하려는 무속의 기복적인 성격과 패턴이 같다. 그러니까, 60년대에서부터 나타난 현세복지적 신앙은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는데, 한 면은 종교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기복적인 측면이다. 이것은 무속이 고도한 종교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기복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60년대 이후의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신앙으로 지적되고 있는 현세복지적 신앙을 무속적 기복신앙이라고 하는 것이다.

교회를 인식함에 있어서도 이러한 무속적 기복성을 만족시킬 수 있는 교회를 실제적으로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할 때, 기복적 교회관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③ 인간적 연고성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아 동시에 그리스도 중심적인 관계로 이루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상 우리 교회는 너무나 인간 중심적 관계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지연, 학연, 혈연 등 아직도 인간적 연고성으로 주님의 교회가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본다. 그래서, 지방주의가 교회에도 그 중심에 가로 놓어있다. 교권적 교회 정치의 측면에서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한국 사회의 연고 중심적 인간관계의 고리가 그대로 교회의 가장 깨기 힘든 인간적 관계로 남아있는 것이다. 의와 말씀의 질서를 깨닫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이익과 지분을 인간 중심적 연고성에 기초해서 배분 받으려는 의식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④ 이기적 주관성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도는 각 지체이다. 이러한 깨닫음은 이기적 주관주의를 초월하게 한다. 우리는 공동으로 드리는 예배에서도 개인적인 에크시타시를 추구하는 주관주의에 익숙해 있다. 우리의 행동이 공동체적으로 어떤 공적 유익이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영적 청맹과니가 많다. 자기의 이기적 종교감정을 충족시켜면 무엇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이 없다. 공동체적 유익에 관심할 수 있는 감각 촉수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은 교회 자체로 마찬가지이다. 한국교회는 연합운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모두 개교회주의로 나가고 있다. 하나님의 일을 연합하여 이루어 나아가야 하는 측면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⑤ 상호의존성의 결여

 상호의존은 개인주의와 정반대의 말이다. 우리는 화평과 의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고전12:21의 말씀대로, “너는 내게 소용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 12지파 모두가 제 구실을 해야 이스라엘은 살 수 하나님 나라로 광야생활 속에서 임마누엘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오늘 날 한국 교회는 자기 중심성 주관주의와 기복적 신앙체질에 익숙한 나머지 상호의존성이 아주 부족하다. 서로 존중할 뿐만 아니라,서로 서로를 책임지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갈6:1-2을 보면,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서로를 영적으로 감찰하는 것이 바른 성도의 자세이다. 이렇게 하여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영적 성장과 그들의 은사를 극대화 시켜주고, 어려움을 같이 동참하여 끝까지 사랑을 이루는 상호연대의식이 희박이다.  이러한 상호의존성의 결여는 교회와 교회의 연대를 가로막고 있다. 또한, 사이즈가 큰 교회와 적은 교회와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주종적, 수직선적 관계로 의식하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목사와 교인간의 연대는 있어도 교인과 교인간의 참된 영적 교통은 없는 이상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⑥ 자기 부정적 도덕성의 결여

의로운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와 자기 부정의 세계이다. 교회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가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임이다. 이러할 때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을 확고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중심적 욕구를 부정해야한다. 그런데, 회개가 없는 예배가 드려지고, 가나안적인 세속적 삶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 없이 교회는 그런 삶을 묵과하면서 나아가고 있다. 더러운 과정을 통하여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인을 처주었다. 교회 스스로 도덕성을 운운할 수 없게 끔 하였다.

 

 ⑦ 역사의식의 결여

 하나님 나라 자체가 역사철학적 실재인 것이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자기 자체의 수적 외양적 성장에 치중하다보니, 그가 속한 구속사의 큰 흐름과 켄택스트를 잊어버렸다. 과연 오늘 여기의 한국적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가 어디로 갈 것이지, 어떤 모습으로 그 문맥에 충실할 것인지 좌표를 잃어버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신앙 중심적, 자기 교회 중심적인 세계 안에서 안주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 사회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의와 영원성, 그리고 보편성과 화평을 능력있게 드러낼 것인가를 생각하고, 자신을 사회적 차원에서 효과적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의의 체질을 가지지 못한 채 표준을 잊어버려 사회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말았다. 오히려 사회의 부정적인 이데오르기와 지도이념이나, 사회적 가치를 그대로 수용하고 말았다. 그것이 70년대 이후의 물질적, 교회성장 중심적 교회론이다.

 

마감하는 말

2,000년대를 살아가는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교회가 될 때 진정한 구원의 방주가 될 것이다. 새로운 천년이 와도 교회가 진리 위에 바로 서면 새로운 시대의 등불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현시하는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며, 사명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의와 능력과 화평으로 우리 교회를 구조하지 않으면 우리 교회는 ①세속화 현상이 가속될 것이다. ②모든 종교적 행위는 급속히 형식화 할 것이다. ③   따라서 사회적으로 능력을 잃고 역동적 변화력을 잃고 무력화될 것이다. 이미 이런 현상이 깊어지고 있다. 오늘 날 우리는 과연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의 주시해야 한다. 우리부터 반성,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가장 빠른 회복과 개혁의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한국교회를 생각해 보았다. 한국교회는 주님의 교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비록 부족한 모습이 있어도 하나님 나라에 속한 실체이며, 그 실현이며, 그 과정이고, 그 도구이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한국교회와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

 

여기에 몇 가지 대책을 생각하며 글을 마감한다.

 ① 복음을 하나님 나라 중심적으로 폭넓게 제시한다.

 하나님 나라 관계 개념으로 복음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복음을 제시함에 있어서 인간론 중심적으로 제시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타락과 구속으로 진행하고 결국 종말의 완성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사적인 차원에서 복음을 제시해야한다.

 

 ② 개인적 주관주의를 타개를 위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성격을 적극 교육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존재와 경륜의 차원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새로운 회복된 관계로 맺어진 공동체이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인 성격을 잘 드러내는 교회관을 가르쳐야 한다.

 

 ③ 지도자를 철저하고, 바르게 교육하여 교회에 배출한다.

신학적으로 바르고 분별있는 지도자의 배출이 시급하다. 인격적으로 진실한 사역자의 배출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진실하고, 실력있는 지도자의 배출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④ 모든 종교적 행사의 참된 연합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기적 기복성은 개교회주의를 낳았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중심적 공동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교회나 같은 총회나 노회 산하 교회는 연합행사에 적극 참여하여 상호연계성의 수준을 높이고, 그것을 확인해야 한다.

 

 ⑤ 기독교 진리를 균형있게 제시하고, 효과있게 교육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균형있는 사상 체계를 가지고 있다. 계시론에서부터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균형있게 진리를 제시하여, 교인들이 신앙사상을 체계있게 정립해야 한다.

 

 ⑥ 사회적 윤리를 제시하고 복음적 규범 문화를 창조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그 실체를 도덕적으로 드러낸다. 이 세상의 규범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의의 수준에서 세상 속에 나타난다. 교회와 그 나라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도덕적 능력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세상의 더러운 문화를 이기고 그것을 변혁시켜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나는 문화를 형성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한다.

 

 ⑦ 한국의 정신사적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보다 의롭게 살아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교회는 이 사회를 향도해 왔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세속화 현상은 세상의 존경을 잃게 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한다. 교회가 진리 위에서는 것만큼 능력있는 것은 없다. 다른 대안은 없다. 교회가 교회될 때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나라가 준동할 것이다.

출처 : 모두가 쉬었다 갈 수 있는 곳
글쓴이 : 고인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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