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문 소논문

예수와 바울에 대한 소고 종말론을 중심으로-

하나님아들 2022. 10. 14. 15:48

 

        예수와 바울에 대한 소고    

 

          - 종말론을 중심으로-

 

                        백 유 현

 

                        목      차

                                                         

제 1 장   서  론.........................................................1

제 2 장   예수의 종말론 사상 .........................................3

   제1절  예수 당시 유대인들의 종말론 사상 ........................3

   제2절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종말론 사상 .....................5

       1. 종말론의 구조.................................................5

       2. 개인의 종말론.................................................9

제 3 장   바울의 종말론 사상.........................................11

   제1절  바울의 종말론 사상의 구조................................12

 

   제2절  바을의 개인 종말론.........................................14

       1. 중간상태......................................................14

       2. 그리스도의 재림.............................................15

       3. 부활과 심판..................................................18

제 4 장   결   론.......................................................20

참 고 문 헌...............................................................22

 

 

 

            제 1 장    서     론

 

흔히 '바울과 예수'라는 주제는 수십년 동안 신약 신학자들의 의제 역할을 해왔다.1) 그 결과 기독교 역사와 사상 가운데 가장 우뚝 솟아 있는 두 인물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형성되었다. 예수님은 후대에 세워질 기독교 교회를 위해 친히 사역하시고 돌아가신 설립자, 창설자였다. 이해 반해 바울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기독교 교회의 재섭립자이며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다.2) 그러므로 예수와 바울은 기독교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중심인물로서 예수와 바울의 관계에서 과연 바울은 자기의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12사도가 아닌 바울이 4복음서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신학사상으로 바울 서신을 독자적으로 기록했는가와 만약에 영향을 받았다면, 예수 신학에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점으로 모아진다.

 

 바울서신들이 신약에서 가장 먼저 쓰여졌음3)에 불구하고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메세지와 인격은 바울의 서신이나 바울의 신학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신학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메세지에 의존하고 있다. 물론 복음서가 단순히 예수의 전기나 혹은 예수의 메세지만을 기계적으로 옮겨 적은 역사적 전기 문헌이라고 생각치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서가 궁극적으로 복음서 저자나 혹은 초대 교회의 신앙적 전유물이라고 보지 않는다.4) 복음서가 분명히 초대교회나 복음서 저자의 신학을 갖고 있음에 불구하고 그들의 신학은 역사적 예수5)의 몌시지와 그분의 인격과 사역에 확고한 토대를 두고 있다6)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복음서와 역사적 예수와의 연속선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본 소고에서는 바울의 종말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히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예수의 메세지를 중심으로 예수의 종말사상을 살펴보아야 되며 예수의 종말사상 안에서 종말론사상을 전개한 바울 신학사상은 예수의 종말사상과 서로 같다는 점을 밝히는데 있다.

 

      제 2 장  예수의 종말론 사상

 

 

우리가 신약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종말관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복음서를 중심으로 예수 자신이 종말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쳤는가를 우선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7) 그렇다고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예수의 종말론 사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의 종말사상에 관한 깊은 이해가 선결적으로 요구된다. 예수 자신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예수의 주된 청중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서 뿐 만 아니라 종말에 대한 예수의 교훈 자체가 당시 유대인들의 종말언어와 구조를 통하여 형성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의 종말론을 붙잡기 위해서는 당시 유대 묵시문학8)과 세계관에 돌아가서 그 문맥에서 살펴보고나서 예수의 종말론을 살펴보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된다.

 

      제 1 절  예수 당시 유대인들의 종말 사상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고대의 그 어떤 민족들의 것9)과는 다른 독특한 종말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종말 사상이란,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전세계와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종국적인 목적과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종말사상이다. 이는 하나님에 하여 시작이 있었으며 하나님에 종말론적인 완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종말론적인 완성을 향하여 계속 나아가고 있는 현 세계의 역사를 '이 세상' 혹은 '현 세상'으로 표현하고, 반면에 궁국적인 완성이후의 역사를 '저 세상' 혹은 '오는 세상'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오는 세상으로 전환되는 단계를 '주의 날' 혹은 '메시야 시대'의 도래로 간주했고 그리고 이 날에 즈음하여 전세계사적인 종말론적 사건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였다.10) 유대인들은 이 현 세상은 궁극적으로 사탄과 그 추종세력에 지배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의인들, 곧 율법을 따라 살기을 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는 세상이 올 때까지 잠정적으로 핍박과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11) 그러나 오는 세상이 도래하면서 사탄과 그 추종세력들이 다 격파를 당하고 메시아가 지배하며 의인 곧 경건한 유대인들이 축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믿었다.12) 그들은 현 세상에서 오는 세상으로 전환되는 것은 진화론적인 과정이나 혹은 이 세상 자체의 혁명적인 과정을 통하여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주재자이신 하나님 자신의 특별한 역사적 개입,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 자신의 특별한 대리자인 메시아의 오심과 그의 사역을 통하여 전환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대리자는 '메시야'로서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때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때로는 '인자'로 표현되기도 하였다.13) 

 

 

      제 2 절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종말론 사상

 

 

 1. 종말론의 구조

위에서 살펴본 유대 종말 사상이 팽배해 있는 유대 사회에서 예수가 출생하시고 성장하시고 그 자신 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종말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고 있던 자들을 그의 제자로 부르시고, 그리고 종말사상의 영향 아래 있는 자들을 대상으로 예수께서 기르치셨다면 예수의 종말사상과 당시 유대인들의 종말사상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공통점이 있을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이해 할 수 없었던 독특한 종말론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양자 사이에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이 서로 다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공관복음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메세지의 중심 테마이다. 그런데 예수의 종말사상과 관련하여 복음서에서 발견하는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 하나님의 나라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막1:14-15)라는 선언이다. 만일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올 것이다' 라든지, 혹은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어느날에 올 것이다'라고 선언하셨다면,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미래에 도달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그러한 기대감 속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온다는 사실을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라고 선언하였다.15)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그 종말의 시간, '현 세상'에서 '오는 세상'으로 전환되어지는 그 결정적인 시간이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통해 현재의 시간을 오는 미래의 시간으로 바꾸는 그날에 이미 왔다라는 것이다.  오는 세상이 이미 현 세상에 미래에 올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의 시간 속에 의미 침투하였다는 것이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현재의 시간이 이미 종말의 시간이 되는 위대한 역사의 전환이 하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던 바 곧 장차 자신의 왕권을 세상에 나타내시겠다고 하신 그 말씀에 예수님오심과 그의 사역안에 이미 성취 되었다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미래적인 종말사상에 젖어있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으며 종말이 이미 현세계 안에 침투하였으며, 오는 세상이 이미 현세계 안에 침투하였다는 독특한 선언을 하셨다는 점을 부정 할 수가 없다.16)

 

예수의 독특한 선언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라는 것은 이 세상이 이제는 현 세상이 끝이나고 오는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선언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그 종말이 이미 왔다라는 선언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유대인들의 종말관에 비추어 볼때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종말론적인 사건들이 일어나야 했다. 여기서 말하는 여러가지 종말론적인 사건이란, 메시야를 통해 이스라엘을 괴롭게했던 모든 이방 세력들의 격퇴와 예루살렘과 성전의 회복,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지 귀환, 성지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 중심의 메시야 왕국 건설등이다. 이런 사건들이 이루어질 때 만이 오는 세상 곧 종말이 도래한 것으로 이해 될 수 있었지만 예수는 이러한 현상들의 아직 구체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아직도 현세상의 상태가 유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세계 안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종말론에 있어서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세상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함께 공존하는 시대가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두가지 큰 모멘트를 가지는데 역사 안의 성취와 역사 말의 완성이다.17) 

예수께서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도래를 선포하면서, 또 한편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기 때문에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18)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오심에 관하여는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야직 인격과 그의 독특한 사역 근거를 두고 말씀하신 반면에,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가 내림에 관하여는 그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과 관련을 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19)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의 오심이 그 자신의 수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 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일어날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자신이 수난, 죽음, 부활등의 사건을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결정적인 계기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 당시 유대인들의 종말 사상에 비추어 볼 때 독특한 점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저자들 중 특히 사도 바울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님의 위대한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해석하기 전에 즉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전 인류를 대표하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전 인류가 그들의 죄 때문에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심판인 종말론적인 죽음을 대신하는 종말론적인 죽음이며 예수의 부활이 예수 개인의 부활이 아니라 모든 구속받은 성도들의 역사의 마지막에 누리게 될 그 종말론적 부활을 대변하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된다는 사실을 말하기 전에, 이미 예수 자신이 구약에 나타난 고난의 메시야 사상과 관련하여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우연적인 개인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전 인류에게 영향을 즉 전 인류역사에 영향을 주는 다시 말해서 현 세상을 오는 세상으로, 전 인류의 역사를 종말의 역사로 전환시키는 위대한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20) 

 

우리가 예수의 종말론적 교훈에서 간과하지 않아야 할 사실은 전 인류와 전 우주의 종말론적인 완성은 예수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두고 있을지라도 전 인류와 전 세계와 전 우주에 종말의 실재와 종말의 역사는 예수의 재림 전에 이미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종말론적인 사건의 역사의 마지막 전세계와 우주의 궁극적인 끝에 가서 비로소 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미래적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적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사건 직후부터 전 인류와 전 세계와 전 우주에 종말의 실재를 이미 가능하게 하는 현재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불러워지는것은 그것이 미래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현재적인 의미에서라는 점이다. 종말이란 이 세상 끝에 가서 비로서 이루어지는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앞당겨져 일어난 종말론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미 앞당겨져 개인적으로 세계사적으로 현재화 되었다는 점이다.21) 

 

예수의 종말론의 구조에 관하여 지금까지 말한 교훈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예수님은 결국 종말에 관하여 3중적인 차원을 말씀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전까지 그 자신의 메시야적 자아계시와 그의 메시야적 사역,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과 약속된 메시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계시하고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든자를 고치고 죽은자를 살리는 그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이미 이스라엘 민족에게 미치는 종말론적인 나라와 둘째,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후 예수께서 친히 높아지신 부활의 주님이 되셔서 성령님을 파송하여 그의 구원역사와 왕권을 온 세상에 나타내심으로 현 세계 안에서 이루어져가는 영광스러운 종말론적인 나라와 마지막 셋째, 세상 끝날에 예수님께서 인자의 영광을 가지고 심판주로 오셔서 완성하게되는 영원한 종말론적인 나라이다. 이와같은 예수의 종말론의 교훈들에 관한 이해를 가지고 있을 때, 그리고 이와같은 예수의 종말사상이 초대교회와 바울을 위시하여 신약저자들의 종말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바울의 종말론의 핵심을 이해하게 된다.

 

 2.  개인의 종말론

예수는 개인의 종말 문제를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론 관점에서 언급하셨다. 신약은 하데스와 중간상태와 게헨나22)를 명확히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하데스는 구약의 스올23)과 같은데 여기에 대해 예수는 별다른 언급을 하시지 않았다. 예수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눅16:19-31) 사후의 문제를 밝히고 있는데, 이것을 여자적으로 해석해야 될는지 교훈적으로 해석해야 될는지는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십자기상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니라'(눅23:43)고 약속하신 말씀은 의롭게 죽은 자는 사후에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됨을 밝혀준다.

 

부활 문제에 대해서는 예수 자신이 죽은 자를 여러번 살리심으로 메시야 시대의 부활을 암시하였고,  또 예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인 것을 강조하셨다(요11:25).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부활에 대한 교훈은 미래의 객관적인 종말론적 사건과 현재의 영적 실재 두 사건을 말하고 있다. 양자는 모두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기인한다.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가 육체의 죽음을 당할지라도 다시 살 것이며, 그를 믿음으로 현재의 영적 생명을 소유한 자는 누구든지 또한 장래의 불변적 존재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요5:25, 26, 6:39, 44, 54).24) 

그리고 요한복음에서의 영생과 부활은 현재와 미래 양면을 다 포함하고 있다. 미래의 종말론적 심판에 대해서는 요14:48에 잘 나타나 있다. 미래의 심판은 본질적으로 현재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인간의 믿음에 관계 되어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 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는 것이라'. 이처럼 그리스도를 통한 현재의 심판은 미래의 심판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후자는 전자에 기준하고 동시에 후자는 전자의 완성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25)

 

 

 

 

         제 3 장  바울의 종말론의 사상

 

 

바울의 종말론은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이다.26) 그리고 바울의 종말론에 있어서 참으로 두드러지고 있는 요소는, 바울이 비록 그 자신에서 그 신학, 즉 종말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여러가지 전통적인 술어와 사상을 사용하고 있다 할찌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바울 동시대의 유대적 종말론적 기대의 모든 제 형식들과는 구분이 되어지는 완전히 독립된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 그 점에 있다.27) 이것은 말할 나위 없이 바울의 종말론이 어떤 전통적인 도식에 의해 결정되어지지 않고 예수 안에 나타난 종말론을 토대로한 종말론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종말론에 있어서 결정적인 기독론적 특성이다.28) 

         제 1 절  바울의 종말론 사상의 구조

 

바울 신학의 전체적 사상 구조를 살펴보면, 이 시대와 오는 시대의 종말론적 이원론으로 되어 있다.29) 이 사상은 바울 자신이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1세기경 유대교 내에 이 사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공관복음에서도 이 사상이 예수의 교훈의 기본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을 볼 수있기 때문이다.30) 그러나 우리는 바울을 현세적인 이원론에 근본적인 수정을 단행한 그리스도인으로 보아왔다. 하나님이 예수의 역사적인 사역을 통해 이루어 놓으신 일을 인하여 이 두 세대 사이의 구별은 완전 하지가 않다. 반면에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31) 그리고 성령의 강림32)을 통하여 인간에게 주신 구속적인 축복사건 즉 종말론적 사건으로 보았다. 이 사실은 바울의 종말론이 그의 전체적인 신학사상과 분리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33) 그리고 동시에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강림, 즉 이 세 사건들은 이미 역사 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구속사적 사건으로 미래성과 현재성 양면을 가진다고 한다. 예수의 죽음심을 통해 신자는 이미 종말론적 심판 아래 놓여 이 악한 현세로부터 해방되고(갈1:4), 어둠의 세력을 벗어나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졌다(골1:13).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신자는 역사의 마지막에 있는 부활을 현재에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론적 부활의 시작인 동시에 첫 열매이다.34) 따라서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의미있는 말로 자주 표현하였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죽음과 심판 및 부활을 참여하게 된 것이다.35) 하지만 신자는 여전히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삶은 오직 성령의 계속적인 도우심(牽引)을 통해서 유지 될 수 있다. 여기서 신자는 비록 그가 그리스도를 통해 현재 여기서 종말론적 구원을 일부 체험하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종말에 있는 완전한 구원을 또한 대망하고 있는 것이다.36) 이와같이 신자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긴장된 상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37) 

 

 

 

        제 2 절  바울의 개인 종말론 사상

 

 1. 중간 상태

바울의 종말론 교훈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해서 이다. 죽음과 부활의 중간상태에 대해서는 고후5:1-10에 약간 임시하고 있을 뿐 이것도 해석상에 많은 문제가 있다. 바울은 그리이스 철학의 영혼불별설에 대조해서 마지막 날 부활을 특히 강조한다. 마지막 날 부활한 몸은 단순히 죽기 전의 몸의 회복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새로운 하늘에서 오는 신령한 몸이다. 바울은 중간상태에서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는가하는 중간 상태에서의 인간의 존재양식에 대해서 구체적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중간상태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암시를 줄 뿐이다(빌1:23). 이것은 예수께서 죽어가는 강도에게 말씀하신 그 이상의 해석은 아니다(눅23:43).

R. H. Charles를 위시한 여러 학자들이 신자가 죽는 순간 즉시 불변의 몸을  소유한다38)고 주장하나 여기에 대한 확실한 성경적 증거가 없다. 오히려 이러한 견해는 마지막 날 부활의 몸에 대한 사상을 약화시킨다.  Oscar Cullmann은 중간 상태 즉 죽음과 부활사이의 영혼은 잠자는 상태라고 말하고있다.39) 최근 학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 바울도 종종 죽은 상태를 자는 것으로 말한 것은 사실이다(살전4:13, 고전15:10등). 그러나 잠자는 것은 그리이스나 히브리 문학에서 죽음에 대한 일반적 용어40)이기 때문에 바울은 이런 영향 속에서 문학적 표현으로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였으므로 특별히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잘못 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재림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다양한 표현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역상의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백성을 찾아 오시는 최후의 구속사적 방문이다. 이 방문을 통해 하나님은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로 각각 구분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영원한 저주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혹은 어쩌면 에배소서까지 제외한 바울의 모든 서신서들 가운데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급되고 있을 뿐 아니라, 기독교 복음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강조하고 있다.41)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기 위해 3가지 특징있는 용어 즉 '파루시아'(παρουσια), '아포칼립시스'(αποκαλυψιs), '에피파네이아'(επιπανεια)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을  G. E. Ladd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42) 

파루시아(παρουσια)는 '임재'(빌2:2), '도착'(고전16:17, 고후7:7)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특별히 왕이나 황제들의 지방방문 등, 고위계층들이 방문하는 의미로 사용된 전문 용어이다. 이와같이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에(마24:3)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고전15:23) 백성을 자신에게로 모이시고(살후2:1, 비교 마24:31) 악을 멸하기 위하여(살후2:8, 살전2:19, 3:13, 4:15, 5:23) 권능과 영광 중에(마24:27) 세상으로 다시 찾아오실 것이다.

아포칼립시스(αποκαλυψιs)는 '계시'(드러내는) 혹은, '노출'을 뜻한다. 부활 승천한(승귀)그리스도께서는 높아지신 주(主)로서(빌2:9) 지금 왕으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고 계신다(고전15:25). 그러나 그의 왕권과 주권은 지금 세상에 완전히 드러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왕권과 주권은 때가 될 때, 즉 그의 재림 때에 완전히 드러나고 효과를 발하게 될 것이다(살후1:7, 고전1:7). 그 때에는 모든 자들이 무릎을 그 앞에 꿇을 것이며 모든 입술이 그의 주(主)됨을 고백할 것이다(빌2:10,11).

 

 에피파네이아(επιφανεια)43)는 '나타냄'을 뚱하는데, 그리스도의 재림의 가견성(可見性)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주로 목회서신에 한정되어 사용되기는 하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그 입김으로 말미암아 불법의 사람을 죽이시고 파루시아 에피파네이아(by the parousia of epiphaneia)통하여 그를 폐하시리라고 말한다(살후2:8). 그리스도의 재림은 비밀이거나 숨겨진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역사 안에 침투하는 가시적인 것이다.44)

바울은 재림의 시기가 언제이냐 하는 문제에서 언제나 예수의 말씀을 반복하여 답변하고 있다. 즉 그날은 전혀 예상치 못한 시기에 '밤에 도적같이' 임할 것이라고 말한다(마24:43, 눅12:39, 살전5:1ff).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백성들에게 요청되는 바 그들은 '깨어 근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45)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바울의 교훈이나 사복음서에서 말씀하시는 예수의 교훈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양자가 한결같이 역사 안에 영광스럽게 임하는 그리스도의 인격적이고 역사적인 재림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가 재림함으로 하나님의 모든 구속경륜은 마지막 완성에 접어들 것이다.

 

3. 부활과 심판

 

바울은 신약의 어떤 저자보다도 부활에 대해 많이 취급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죽은 자가 부활이 없다(고전15:12)고 주장하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답변할 때 이 문제에 있어서 아주 큰 공헌을 하였다.46)  구원은 항상 전인격적이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의 몸의 부활을 거듭 강조했다.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당시 그리이스 철학의 영향 아래 있는 고린도 교회들에게 이 사실을 명확히 밝혔다. 그러나 그는 부활한 몸의 성질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다만 부활한 몸은 영광스럽고 불변적인 것 만을 밝혔다. 또한 그는 신자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밝혔다. 그리스도를 부활시킨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을 또한 부활케 할 것이다(고전6:14, 고후4:14) 실제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마지막 부활의 첫 행위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론적 부활 추수의 첫 열매인 것이다(고전15:20). 신자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있게 될 것이다.

심판에 대해서는 롬2:5,16,13:2, 고전11:32, 고전4:5, 살후2:12, 딤후4:1 등에서 말하고 있으나 가장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곳은 로마서 2장이다.여기서 바울은 그 날에 하나님께서 각자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시되(롬2:5),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롬2:7-8)하실 것을 밝힌다. 그리고 율법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유법으로 각각 심핀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심판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유대인이나 헬라이나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그들의 응답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인간에게 한편으로 구원을, 한편으로 심판을 가져다 주는 갈림길이다. 이 심판은 현재성과 미래성의 양면을 가진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마지막 완성은 죄와 악으로 혼란된 이 우주의 회복,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회복을 포함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재 회복을 위해 화목제물이 되셨다.  

 

 

 

 

 

 

 

 

 

 

             제 4 장   결  론

 

기독교의 모든 교리를 체계화한 인물은 사도 바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울이 그 자신의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독자적인 사상에 의해 전개하기보다는 전승과 계시로 받는 신학인데, 이는 예수의 신학사상에 철저히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의 종말론 사상이나 예수의 종말론 사상은 너무 비슷하다고 말 할 수 있다.

 

예수의 종말론 사상은 예수 당시의 종말론과 예수의 종말론 사상과는 많은 공통점이 있으나 서로 다른 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종말 사상은 매우 독특한 형태의 종말론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묵시적 종말론 사상인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로부터 서서히 와서 성장하는 형태보다는 완전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성과 속이 확연하게 구별될 종말 그리고  성지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 중심의 하나님의나라가 도래하는 사상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러한 현상들이 구체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아직도 현 세상의 상태가 유지되면서 현 세계 안에 하나님의 나라 안에 이미 도래하지만,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고 영광스럽게 강력하게 도래할 것을 선언하셨다. 다시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을  하나님의 나라 차원에서 현재적인 측면과 미래적인 측면을 말하면서 오순절 사건 이후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미래적인 종말론적인 나라가 이미 현재화(先取)되었으며, 주의 재림과 함께 주어질 그 완성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는 종말을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예수의 종말론 사상은 초대교회와 바울을 위시하여 신약성경저자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바울의 종말론의 사상은 어떤 전통적 특성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예수 안에 나타난 종말론 사상을 토대로 한 종말론 사상이다. 바울 역시 예수와 같이 유대적 종말론의 형식들과는 구분이 되어지는 완전히 독립된 독특한 종말론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의 종말론은 철저한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인데, 그 구조는 이 시대와 오는 시대의 종말론적 이원론으로 되었다. 그리고 이미와 아직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긴장된 상태 속에서 살아야 하는 종말론적인 성도의 삶을 있는 종말론 사상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종말론의 사상과 바울의 종말론의 사상은 서로 같은 구조 속에 있다. 이는 바울이 예수의 종말론의 사상을 토대로 그의 사상을 전개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바울을 보면, 그는 예수의 철저한 종이었고 사도였다. 그리고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의 가르치심의 본의(意)를 분명히 깨달았으며, 주의 본을 따라 외인에게 구원의 경륜을 선포한 자이다.  

 

 

 

 

 

 

 

 

 

 

 

 

 

 

 

 

 

 

 

               참  고  문  헌

1. 외국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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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사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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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사전편집위원회 편,  '신학사전',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3.

 

   

 

 

 

 

 

 

1   ) Herman Ridderbos, '바울과 예수', 이한수 역(서울:한국로고스연구원,1988),  P. 9. 이 문제의 역사에 대해서는 A. Schweitzer, 'Geschichte der Paulmshen Forschung'(1933), PP. 119ff. ; P. Feine, 'Der ni Apostel Paulus' (1927), PP. 158ff. ; R. Bultmann, 'Zur Geschite der Paulus-Forschung, Theol. Rundschau, N.F.(1929), PP.26-59; idem. Neuste Paulus- Forschung, Theol. Rundschau, N.F.(1936), PP.1-22 를 참고 할 것.

2   ) F. F Bruce, '바울과 예수', 이길상 역(서울:아가페출판사,1988), P.9.

3   ) 신약 성경의 저작시기는 다음과 같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직후 AD 49년에 기록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2차 전도 여행 중인 50-51년이고, 데살로니가후서는 연대를 알 수 없고, 고린도전서는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인 54년이며, 고린도후서도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인 55년이며, 로마서는 3차 전도여행 중인 55년이며 야고보서는 46-50년이며, 마가복음은 50년 후반에서 60년초에, 빌레몬서는 60년에, 골로새서는 60년에, 에베소서는 60년에, 누가복음은 60년에, 사도행전은 61년에 빌립보서는 61년에, 디모데전서는 62년에, 디도서는 62년에, 디모데후서는 63년에 베르로전서는 63년에, 베드로후서는 63-64년에, 마태복음은 60년대에, 히브리서는 60년대에, 유다서는 60년에 60년사이에, 요한복음은 80년후반에서 90년초반에, 요한일서 요한이서 계시록 요한삼서는 80년후반에서 90년초반에 기록되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사실 저작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대체적으로 보수적인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표적인 연대에 대해서는 다음의 저서를 참고하면 좋다. James L. Boyer, 'New Testament Chronological Chart'(Winona Lake, Ind,: James L Boyer, 1961); Robert G. Gromacki, 'New Testament Survey'(Grand Rapids: Baker, 1974);  Everett F. Harriso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Grand Rapids: Eerdmans,1964); Merrill C. Tenney, 'New Testament Survey'(Grand Rapids: Eerdmans,1961).

4   ) 비평적인 신약학자인 불트만(R. Bultmann)을 위시하여 적지않은 신약학자들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의 인격과 그의 사역, 그의 가르침등이 실제로 믿을 수 있는 예수 자신의 모습과 그분의 밀씀을 반영하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초대교회와 신약성경 저자들의 신앙과 신학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결국 우리가 신약에서 만나는 것은 예수 자신의 인격이나 그분의 말씀이 아니고 오히려 초대교회와 신약성경 저자들의 신앙과 신학이 된다. 그래서 결국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 사이의 연속선은 깨어지고 만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가장 과격하고 극단적인 신약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신약학자들은 예수 자신의 독특한 인격과 사역이 초대교회형성과 신학과 그리고 성경저자들의 신학의 뿌리가 되었으며 그리고 복음서가 믿을 수 있는 예수 전승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 전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R. Bultmann, 'Jesus and Word'(London: SCM Press, 1934,1958), PP.145ff;  E. P. Sanders, 'Jesus and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P. 2.

5   ) 여기는 역사 가운데 오셔서 사역하신 예수를 '역사적 예수'라 표현하였다. 이 용어는 '역사화된 예수'와 정반대의 의미로 쓰였다.

6   ) 마태, 마가, 누가, 요한등 네 정경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독특한 인격과 그분의 사역과 그 분의 말씀을 증거하는데 그 촛첨을 맞추고 있다. 만일 예수가 출생하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그분이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자시의 독특한 인격과 사역을 계시하시지 않으셨다면 초대교회도, 신약셩경도, 초대교회 신학의 발전도, 성경저자들의 신학의 부유성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의 독특한 인격과 사역이 바로 신약 성경의 중심 메세지와 신학이다.  N. B. Stonehouse, 'Origins of the Synoptic Gospel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9), PP.176-192.

7   ) 지난 10년 사이에 세계 신약학계에서 역사적 예수와 메세지에 관련하여 새롭게 일어난 변화는 오늘 우리에게 특별히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신약성경의 종말론도 결국 역사적 예수로부터 시작하였으며 그 분께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cf, M. Hengel, 'The Origin of the Christian Mission', "Between Jesus and Paul(Philadelphia Fortress Press,1983), PP. 61ff.

8   ) 묵시적이란 말은 요한이 마지막 책을 묘사하는 말 '아포칼립시스'에서 나왔다. 묵시적 책들은 역사 진행과정에 대한 비관주의, 하나님과 사단 지상세계와 하늘 세계, 현 세대와 오는 세대 사이의 이원론, 역사의 마지막을 임박한 것으로 보고 미래의 사건을 예시할 하나님의 최후 승리에 대한 신앙 부활과 최후 심판에 대한 믿음등을 그 내용으로 한다. cf. Stephen H. Travis, '종말론 해석', 김근수 역(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1988), .P. 32-51,.요약.

 

9   ) 고대 세계에서 두 다른 문화권을 대변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그리이스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의 문화와 그리고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양의 문화에서는 이 세계와 그리고 이 세계 속에 사는 인간의 운명은 궁극적인 종말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다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계속 순환되는 것 즉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계속  돌아가면서 반복된다는 순환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10) G. R. Beasley - Murray,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 박문재 역(서울: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1), PP. 32-120.

11) G. E. Ladd,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 , 이태웅 역(서울:엠마오, 1985), PP. 124-126.

12) G. E. Ladd, '신약신학', 이창우 역(서울:성광문화사, 1988), P. 87.

13) G. R Beasley - Murray, op cit., PP. 94-110.

14   ) Leonhard Goppelt, '신약신학Ⅰ', 박문재 역(서울: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2), P. 102.

15   ) 마가복음 1장 15절의 말씀을 헬라어 원전에 따라 살펴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미래에 도래한다는 사실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완료적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개역 성경 마가복음 1장 15절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  라가 가까왔다'라고 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전에는 '찼다'라는 동사와 '왔다'라는 두    동사를 다같이 완료형 동사를 사용하여 '때가 이미 찼으며, 그리고 그와 함께 하나   님의 나라도 이미 왔다'(πεπληρωται  ο  καιροσ  και  ηγγικεν  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6    ) 마태복음 12장 28절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라"라고 말씀한 것은 예수께서 귀신들려 소경되고 벙어리된 자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신 다음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인데, '여기 임하다' (εθασεσεν) 동사가 과거동사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마태복음 13장 비유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자신의 사역을 통해 현재 속에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cf. Leonhard Goppelt, '신약신학 Ⅰ', 박문재 역, op cit., PP. 108-111.

17   ) G. E. Ladd, 'A Theology of the N.T'(WM. B. Eerdmann: 1974), P. 91.

18   ) 소위 복음서의 묵시록이라고 불리워지는 마가복음 13장의 종말교훈과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세 바유들(열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미래의 약속된 나라에 관하여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19   ) N. B. Stonehouse, 'The Witness of Luke to Christ' (Grand Rapids:Baker Book House, 1979), PP. 133-154.

20   ) Joachim Jeremias, '신약신학', 정충하 역(서울: 새순출판사, 1990), PP. 398ff.

21   )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종말이 현재화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태도를 통하여 미래에 완성될 구원과 심판이 이미 개인적으로 현재화된다는 것이다. 인자의 재림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완성될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그 완성 전에 이미 부분적으로 이 세상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이루어진 그 종말론적인 사건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전우주적으로 완성되어지겠지만 그러나 재림 전에 이미 부분적으로 전 인류화되고 전 세계화돠고 전 우주화되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22   ) 게헨나(지옥)는 본래 구약성경의 힌놈에서 온 말인데,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것으로 악인들의 최후심판을 의미한다.

23   ) 스올은 일반적으로 내세를 총칭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이나 '지옥' 과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스올은 헬라어의 '하데스'와 방불한데, 죽은자들의 처소에 붙인  이름이다. 성경은 스올을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욥10:21), 적막한 곳으로(시115:7), 잊음의 곳으로(시88:12), 음부로(욥26:5), 악한자나 선한 자가 다 거기 있는 곳(욥14:23,24:19)등으로 말하고 있다. 이 스올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은 음부까지도 지배하신다(신32:32, 시139:8). cf. 신학사전편집위원회 편,  '신학사전'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3), P. 640.

24   ) G. E. Ladd, '신학신약', 이창우 역(서울: 성광문화사, 1988), P.428.

25   ) Ibid, PP. 429-432.

26   ) H. H. Wenland, 'Geschichtsanchauung und Geschichtsbewusstsein im Neuen  Testament'(1938), P. 26;  Herman Ridderbos, '바울신학', 박영희 역(서울:지혜문화사,1985), P. 59 재 인용.

27   ) H. Ridderbos, '바울신학', 박영희 역(서울:지혜문화사, 1985), P. 62.

28   ) H. Ridderbos는 이 독특한 바울의 종말론 사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울의 종말론 안에 있는 성위와 기대의 양상 사이에서 확인되어지는, 그리고 이미 바울의 종말론적 용어법에서 그 표현이 드러나고 있는 그 특수한 긴장 가운데서 가장 뚜렷하게 보여지고 있다. 바울은 한편으로 이미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때의 성숙과 이미 시작한 새로운 창조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그는 여전히 현 세상과 그와 함께 존속하는 현 세대(롬8:18,11:5,12:2)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유대 용법에서 앞으로 오는 세상을 가르리는 새 시대에 관해서는 바울은 특별히 미래적인 의미로 언급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교회가 살고 있는 현 세대를 '말세'(세대의 끝, 고전10:11)로 '후일'(딛전4:1)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종종 '마지막 날에' 란 표현은 아직 실현되어 지지 않고 있는 시대를 지칭한다(딛후3:1). 마지막으로 다른 예를 좀더 계속 언급한다면, 어떤 장소에서 바울은 '현재의 악한 세대를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세대(갈1:14)로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골2:21,엡2:2) 모든 종류의 계율에 예속하려는 것에 대해 교회를 책망할 수 있는 세대로 말하고 있는 반면, 또 다른 장소에서는 현세대와 세계를 신자들이 경건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딛2:12) 그리고 별처럼 빛을 비추어야만 하는(빌2:15) 장소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어떤 문맥에 있어서는 구원시대 이전의 불신자적 삶을 구원과 성취의 시대와 새로운 창조의 '이제는'과 대조하여(고후6:2, 엡2:13, 롬3:21), 지금 정복되고 있는 '그 때', '전에'의 삶으로 규정하고 있는가 하면 그러나 다른 어떤 곳에서 '현재는' 호은 '이제는' 이란 말은 계속 기다리고 있는 완성이 이루어질 '그 때'와 대조하여 현 세상에 처하여 있는 실존양식의 지속을 기리키고 있다(고전13:10,12). 이제는 대한 이러한 독특한 이중성, 곧 여전히 지속하고 있는 현 세대의 '아직의 이제'는 물론 이미 시작된 구원시대의 '이미와 이제'는 양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 '이제'가 바울의 종말론의 독특한 특징이다.  cf. Ibid., P. 63.

29   ) 신학사전편집위원회 편, op cit., P. 644.

  G. Vos 역시 바울의 종말론의 구조를 대조적 구조로 본다. 대조적 구조란 두세대(two ages) 혹은 두세상(two worlds)사이의 구분이다. 이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가능한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피한 것이 되는데, 현 세상이 존재하는 한 현 세상과 오는 세상이 중복된다. 이것은 반(半)종말론적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바울의 옥중서신인 에배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에 나타나는 특성이다. 종말론적 이면성(二面性)이 철학적 이분법과 다른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거주하는 하늘은 우주적인 하늘(the cosmic heaven) 아니라 철저한 구속적인 하늘로서 하나님의 사역에 의해 존재하는 하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하늘은 원칙상 축복하는 것이며 지금도 여전히 신자들을 그 최종 극치(consummation)로 부르는 것이다. 이 하늘은 그 자체에 시간과 역사를 가지게 된 하늘이다.  그리이스 철학의 근본은 형이상학적 사변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면성의 근본은 형이상학적 사변이 아닌 종말론적 계시이기 때문에 확실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두 영역의 병행 구조가 생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cf. G. Vos,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오광만 공역(서울:엠마오, 1990), PP. 13-70 요약.

30   ) 바울과 비슷한 언어로서 예수는 이 시대와 오는 시대에 관하여 말씀하셨다(마12:32, 막10:30, 눅20:34,35). 예수는 또한 이 시대를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 하였으며, 오는 시대를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로 동일시 하셨다(마13:41-43, 28:18). 그리고 이 시대의 진행에 있어서도 예수 역시 이중적인 구조를 논하셨다. 한쪽에는 전쟁,기근, 지진, 환난, 박해등이 죄악의 사랑의 황량한 신성모독으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한편 다른 한쪽으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셨다(마24:14.15). cf. Chester. K. Lehman, '성경신학', 김인환 역(서울:크리스챤 다이제스트,1994), PP. 381-382.

31   ) 예수의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첫 추수이다. 즉 개인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새 인류의 부활의 첫 열매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새 인류 전체의 부활의 확증되고 약석되어졌기 때문이다. 언약적 차원에서는 예수의 부활은 한 개인이 살아남이 아니고 언약백성의 머리로서, 몸의 머리로서 부활한 것이다. 따라서 머리가 부활하였으므로 몸의 부활은 필연적인 것이며 확실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세계, 새 창조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도입이다.

32   ) 성령의 강림 사건은 구약신자들이 큰 갈망을 가지고 바라다 본 미래의 지평선 위에 일어날 종말론적 사건이었다(욜2:28ff, 행2:17ff). 그래서 성령의 오심은 반복적인 것이 아니고 한번의 오심으로 영구적 오심이고 궁극적인 오심이였다. 그리고 베드로의 설명처럼 성령의 오심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성취와 완결이다(행2:31ff).

33   ) C. K. Barrett, N. Q. Hamilton 그리고 H. M. Shires등의 학자들이 바울신학의 종말론적 성격에 대하여 역설하고 있다. cf. G. E. Ladd, op.cit., P. 784.

34   )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법정적, 윤리적, 혹은 실존적 범주를 나타내지만 사실상 그 말은 사실적으로 구속사적 의미에서 새로운 시대에로 돌입을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앞서 죽은 자를 일으킨 것 같이 하나의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그 안에서 약속되어진 구원의 시대, 새로운 창조가 놀라운 방법을 통해 옛 세계로부터 새 세계에로의 결정적인 전환으로 나타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신학용어인 그리스도를 '처음난 자', '첫 열매', '근본'이라는 단어들을 이해할 수 있다.

35   ) 바울은 이런한 신학 사상 즉 종말론의 구조 상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이해한 상태에서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의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라고 고백하였다. 대개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예수를 믿으면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되는 것으로 이해하여 전도 혹은 새 신자들에게 사용되는데, 사실 바울은 한 개인에 적용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새로운 시대가 되었다는 우주적인 차원에서 말하고 있다.

36   ) cf. 골1:13, 고전15:50, 고후2:16, 갈6:8, 엡2:5, 롬13:11, 롬6:4, 고후5:4

37   ) '이미'(already)란 신자들이 향유하고 있는 것이며, '아직'(not yet)이란, 신자들이 아직 소유하지 못한 상태를 지칭한다. Oscar Cullmann은 이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란 종말론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사이, 다시말해서 결정적으로 '이미 성취됨'(alreagy fulfilled)과 '아직 완성되지 아니함'(not yet completed)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감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이다. 신약의 전체 신학 구조는 바로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cf. O. Cullmann, 'Salvation in History', trans. S. G. Sowers,(New York:Harper and Row, 1967), P. 172.

38   ) R. H. Charles, 'A Critical History of the Doctrine of a Future Life', (New York: Schocken, 1963), PP. 455-461.

39   ) Oscar Cullmann, 'Immortality of the Soul or Resurrection of the Dead'(New  York: Macmillan,1964)

40   ) R. Bultmann, TDNT Ⅲ, P. 14.

41   ) William Barclay, '바울신학개론', 박문재 역(서울: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3), P. 179.

42   ) G. E. Ladd, op cit., PP. 790-791.

43   ) 에피파네이아(επιφανεια)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재림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는 용법상에 이중적인 의미를 나타내므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나타내는 두 사건 사이에 분리될 수 없는 연관성이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 가운데 나타나심(επιφανεια)으로 사망의 권세를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 그러나 이것은 구속에 대한 최종적인 용어가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영광 중에 나타나심(επιφανεια)을 통하여 우리는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진다. 이런 이중적 용법이 에피파네이아(epiphaneia)에 들어 있다. 이는 히9:28 "그리스도...........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에 잘 표현되고 있다.

  44 ) 세대주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교회의 대환란 전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비밀스러운 임재와 환란 마지막에 영광 가운데 임재하여 이스라엘 구원하고 천년 왕국을 건설하는 임재 등 2 가지로 나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 왕국 사상을 연결시켜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재림의 직전에 혹은 재림 후에 그러한 왕국이 있을  것을 말한다. 천년 왕국 사상은 개혁주의 신학의 불가결한 부분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기울여지는 사상이다.  이들 중 천년 왕국 직전에 주의 재림을 믿는 자들을 '전천년주의자'라 부르며 그 반면의 경우를 '후천년주의자'라고  말한다. 그 외에성경은 천년 왕국을 기대할 만한 아무런 보증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무천년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이름 그대로 여기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현재의 하나님의 나라가 곧 바로 완성되어지고 영원한 형태의 하나님의 나라로 될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고 믿는다.

1. 전천년설

  이 종말관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해 있고 또 2가지 구별된 사건으로 이루어지는데 7년의 간격을 가진다. 첫 번째의 것이 '파루시아'인데 그리스도가 공중에 나타나 그의 성도들을 만날 것이다. 성도들은 공중에 올려져서 혼인잔치에 참여하는데,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지상에 없는 동안 성령도 계시지 않으므로 이 7년 동안 지상에서 몇 가지 큰 일이 일어난다. 7년의 후반부에 대환란이 있을 것이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진다. 7년 후에 그의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임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적그리스도를 멸망시키시고 사단을 천년동안 감금을 시키고서 천년왕국을 시작하신다.  천년 후에 사단이 잠시 풀어난 후에 다시 사단은 무저갱에 감금된다. 이후 악하게 죽은 자가 일어나게 되고 흰 보좌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새하늘과 새땅이 시작된다.  

2. 후천년설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 왕국 이후에 있을 것이라는 사상이며 복음적 세대 동안에 기대되어 왔던 것이다. 천년왕국 직후에 그리스도께서 만물에게 영원한 질서를 주실 것이라고 한다.

3. 무천년설

위의 두 천년설을 전혀 용납하지 않는 사상이다. 무천년설이란, 예수님이 현재 임재한 하나님의 나라와 미래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의 양면성을 말씀하신 것과 바울의 종말관등을 보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다른 중간상태를 거치지  않고 마지막 날 곧 바로 완전하고 영원한 형태의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주장하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성경에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나라로 묘사된 것과 미래의 나라에 들어가는 각 사람이 영원한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의 천년설 중에 무천년설이 지금까지 설명하고 있는 예수의 종말론 사상과 바울의 종말론 사상의 흐름에 가장 적합하고, 그리고 지금까지 가장 광범위하게 인정을 받아 왔고, 역사적으로 이름있는 교회의 고백들에 나타났으며, 개혁주의 교회의 가장 우세한 종말론적 사상이 되어 온 것이다. cf. Robert G. Clouse 편집, '천년왕국', 권호덕 역(서울:성광문화사,1985), PP. 25-259 요약 및 수정.

45   ) F. F. Bruce, '바울신학', 정원태 역(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1990), P.324.

46   )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