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무엇이관대의 책중에서> 천사와 인간의 죄의 기원 하나님을 힘써 알면 죄의 기원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습니다. 우주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것이므로 죄의 기원만은 하나님께 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죄를 미워하시는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사5;16).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가 아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신32:4, 사6:3, 약1:13, 시92:16, 5:4, 11;5, 슥8:17, 눅16:15). 죄의 원인을 하나님께 두는 것은 죄에 대한 사람의 책임성을 입증하고 있는 양심의 소리와 성경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는 모든 피조물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죄의 기원은 사탄 성경에는 최초의 죄가 에덴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죄는 최초로 하나님께 반항하는 천사들의 마음에서 시작되었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범죄한 천사들'이 먼저 존재했습니다.(벧후2:4,요일3:8,유6). 타락의 원인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교만과 불순종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딤전3:6, 유1:6). 그리고 그 범죄한 천사들의 두목인 사단이 에덴동산에 나타나서 사람을 유혹한 것입니다. 천사가 타락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예수님께서 마귀를 가리켜“처음부터 살인한 자요.....거짓말쟁이”(요8:44)로, 요한은“처음부터 범죄한자”(요일 3;8)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천사는 인간과 달리 혈연적 관계없이 개체로 창조 되었습니다(마22;30). 천사는 개체의 타락이지 전체의 타락이 아닙니다. 범죄한 사람의 후손이 혈연관계로 모두가 죄인된 것과 달리 천사는 개체로서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할 죄(벧후2;4)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천사에게는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예정하지 않았으며 범죄한 천사는 구원 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조물주로서 자신의 영광과 존귀와 권위와 영원한 위대하심을 나타내시며, 마귀는 피조물로서 오직 일념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존엄과 권위를 더럽히는 생각만하는 영물입니다. 죄의 기원에 대하여 설명 해주는 정보 자료는 성경 외에는 찾을 수 없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왜 하나님과의 언약을 무시하고 언약을 지킬 수 없었는지는 야고보서에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죄의 기원은 하나님의 허용된 섭리 안에 있는 죄의 허락입니다.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주님의 하신 일들은 그의 의지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크고 잘 숙고된 일이다. 기이하고도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뜻에 어긋나게 행해진 일이라 할지라도(contra eius voluntatem) 그의 뜻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praeter eius voluntatem)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뜻밖에 있거나 넘어서(praeter)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악으로부터라도 선을 가져오실 수 있고 그의 영광과 사랑을 더욱 확실히 보여줄 수 있으시기에 인간타락을 허락하셨습니다. 인간의 죄의 기원은 천사의 타락 현상과 형식상은 다르나 내용상은 동일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식상 다른 점은 인간 최초의 범죄는 언약을 파기한데 있습니다. 선악과는 언약의 상징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으며 선악과는 영혼을 죽이는 실제 효능이 없었습니다. 내용상 동일한 점은 모든 범죄와 마찬가지로 인류 최초의 범죄도 하나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 그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적인 면에서 거짓으로 인식하였고 사탄의 말이 사실일 것이라고 더 신뢰하였으며, 정적인 면에서 행위언약 보다 선악과가 더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다고 느꼈으며, 의지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거짓의 아비 사탄을 따라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결단하였습니다. 전인적인 파기행위입니다. 죄는 인격을 가진 내가 지었고 누구도 원망할 수 없으며 하나님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죄인은 사랑하신다는 진리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2) 유혹의 과정 모든 범죄의 배후에는 거짓의 아비 사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요8;44). 사단은 창조적인 능력이나 새로운 본성을 분여하는 능력은 없습니다. 다만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자기의 일을 해나갈 수는 있는 피조물입니다. 사탄은 여러 도구를 사용하여 인간을 유혹하고 있으며 처음에도 뱀을 사용한 것같이 돼지 속에도 들어가고(마8:30-32) 사람 속에도 들어갑니다(마8:29). 하와를 유혹하는 전술을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우리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의심케 하고(과장된 질문) 불신과 욕심의 씨를 추가합니다. 나무를 유심히 바라본 것 같이 탐심을 가지고 그 욕망을 키우게 됩니다. 다음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유혹하게 합니다. 사단은 악인의 꾀를 내게 하고(의심), 죄의 길에 서게 하며(교만),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합니다(타인유혹). 유혹의 과정은 예수님께도 똑같이 적용했으며 모든 사람에게 항상 동일합니다. 예수님 외에 이길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피가 마음의 인방과 문설주에 있는 사람은 유혹을 넘어갈 수 있습니다. 굳윈(Goodwin)은 "어떤 사람도 자기가 죄 지은 것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핑계할 수도 없고, 어떤 사람도 사단이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일 때문에 죄지었다고 구실을 댈 수도 없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사단은 사람의 결심에 힘을 주되 악한 경향으로 움직이도록 유혹합니다(갸롯 유다). 죄의 유혹은 사단이지만 죄를 지은 것은 사람입니다. 오늘날 문제는 그리스도인들마저 마귀의 속임수를 분별하지 못하고 죄 가운데 빠져 자기중심적이며 가장 불행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간다는데 있습니다. 결국 말씀으로 자신의 본성을 연단시키기를 싫어하므로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죄가 주는 괴로움도 수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종은 마귀의 종이며, 죄에 매인 사람은 마귀처럼 하나님조차도 자기 위에 있다는 생각을 좋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죄가 날마다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람 안에는 선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선은 전혀 없는 존재입니다. 목사가 그럴 수 있는가 장로가 그럴 수 있는가 지도자가 그럴 수 있는가... 그럴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가면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테러를 행하며 끔찍한 일을 행하는 인간들의 뉴스는 어쩌면 죄성을 가진 인간의 본질상 당연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인간은 형편없이 되고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말세의 고통은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더욱 농도가 높아질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전적 부패하였고 전적 무능력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도 완전하지 않고 무죄(sinless)하지도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육체 속에 죄의 잔재가 남아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천국에 갈수 없는 혈과 육은 죄의 성향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기중심적이고 그래서 자신은 다른 모든 사람들 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똑같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불협화음이 일어나고 혼돈과 갈등과 불행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전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영원하시고 죄를 지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유한하고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죄 지은 인생을 사람도 싫어하는데, 하나님은 전적 부패한 인간을 위해 아들을 십자가 속죄 양으로 왜 주셨는지 죄 많은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1)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전적 부패> 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전적 부패란 말은 인간 자신의 본질이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부패해 버렸다는 뜻으로, 무자비, 무정, 불의, 악독, 시기, 분쟁 등으로 인하여 처음 창조된 에덴동산의 사람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죄악의 덩어리의 사람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부패된(depraved)이란 말은 'depravatus'에서 파생되었고 어근은 'pravus'이며 꼬부라진, 악하다는 의미입니다. 전적부패는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능력이 나면서부터 없는 파산자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에 대하여 관심을 조금도 가지지 않는 존재가 됨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부패는 양심을 더럽게, 마음을 강팍케, 생각을 무질서하게 하였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심히 부패해 있으므로 우리의 지성은 심한 무지에 덮였고 감정은 비뚤어졌으며 의지는 무능하고 부정하여 성격은 전부 손상되어 "성한 곳은 하나도 없고(사1:6)", "선한 것이 조금도 없다(롬7:18)"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죄 짓는 것 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뉴스의 모든 죄들은 우리의 본성의 타락에 대한 일반적 진리를 확신케 해주고 있습니다. 전적 타락의 무서움은 어떠한 예외도 없이 보편적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부패는 결코 없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부패한 열매를 맺습니다. 죄는 우리의 성품을 썩게 하는 질병으로 우리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시51:5).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요3:6),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시140:3),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시36:1,롬3:10-16). 주의 자비를 받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롬3:2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기억될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은 부패한 인간의 타락의 실상이었습니다. 억울하게 양방향 지하철에 탑승한 모든 시민들이 전철 안에서 화장당한 것은 부패한 사고 즉 혼자 죽기 싫고 같이 죽자는 타락한 한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대형 참사 이었으며 인간이 얼마나 부패하고 허무한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 행위는 전적타락이 단순히 사람이 '행하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 속에 '있는 것'이 표현되었을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뉴욕의 9.11 테러도 자기들이 만든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악이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사람들 속에서 체험하신 멸시와 천대는 인간 본성의 타락을 매우 비참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수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유대인들의 역사는 계속된 배역과 하나님에게로부터 계속 떨어져나가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교회 안에도 진지함보다 위선이 더 많습니다(요12:6). 사람들의 존경 때문에 믿습니다(약2:1). 요나단 에드워즈의 체험은 마치 시체가 생명의 열기를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죄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서 한점의 사랑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펄젼은 ‘부패한 인간의 마음은 적극적인 기만이요 구체적인 악이요 본질적으로 죄다. 부패한 마음은 비열한 모든 것들의 진수요 정수다. 하나님께 어떠한 적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적대감을 행사 한다’ 하였습니다. 칼빈은 죄성을 가진 사람에게서 선을 찾기란 차돌에서 기름을 짜내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전적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을 싫어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사53:2-3). 오히려 "까닭 없이 하나님을 미워합니다(요15:25). 2)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전적 무능>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전적 무능이란 말은 눈이 멀고 날개가 부러진 새가 나무에 오를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 스스로 회개하거나 믿음을 가지거나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나아 올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을 말합니다. 비숍(G.H.Bishop)은 "죽은 사람이 제 발로 일어설 수 없음같이 사람은 하나님께 돌아갈 능력이 없다. 인간이 스스로 우주를 창조할 수 없는 것같이 바른 소원도 가질 수 없다. 성령께서만이 주권적으로 특별한 간섭을 통하여 죽은 죄인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그 죄인들 속에 그들 마음의 소원을 창조하신다. 그래야 비로소 거룩을 향해 아주 약한 첫 호흡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현대사상의 전반적인 추세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으며 갈수록 하나님 보다 사람의 위대성을 강조하는 강단이나 출판물이 독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본성에 위배되는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불이 아래로 탈수 없고 물이 위로 흘러가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전적 무능은 스스로는 죄에서 거룩으로 회전할 능력이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없으며 사람을 스스로 높이고 즐겁게 하는 것 외에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죄로 인한 전적 무능은 명백한 사실이요 반복적으로 학습되고 체험되고 확증된 것입니다. 욥은 "그들은 낮에도 캄캄함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욥5:14)". 이 어두움은 도덕적인 어둠이요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어둠입니다. 신약에서 바울은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엡4:18)"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기를 원하면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계3:18). 인간의 전적무능은"영원히 예비한 흑암(유13)"으로 깊이 들어가 빛이 있음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뜨거운 불로 끓이고 있는 유리병 안에서 따뜻하다고 느끼며 졸고 있는 개구리 모습 같이 무서운 위험 앞에서 아무런 반응도 걱정도 하지 않는 것이<전적 무능>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적 무능한 인간은 할 수 없이 악한 일을 했다는 핑계를 잘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무능이 너무나 크고 철저하여, 치료할 수 없고, 영적인 일을 분변할 수 없고(고전2:14), 믿을 수 없고(요8:47), 복종할 능력도 없고(롬8:7), 스스로 선한 생각을 가질 수 없고(고후3:5), 선한 말을 할 수 없으며,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요15:5). 전적으로 무능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킬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간곡한 은총을 저버렸고(창3:24)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었으며(엡2:12) 자기의 불의가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으로 여깁니다(호2:5,12). 그의 불의는 그의 머리털보다 더 많습니다(시40:12). 인간의 허물은 하늘까지 높이 쌓였습니다(스9:6). 인간의 전적 무능의 성경적 증거는 인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인류가 진보한다는 현대의 개념과 충돌합니다. 전적 무능한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죄 있는 사람들의 도덕적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13:23)" 성경은 계시하기를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 하시느니라(롬9:16-18)" 전적 부패하고 무능한 죄인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과 끝없는 절망의 넓은 길의 통로인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3) 너 자신을 알라는 의미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것은 인간의 전적부패와 전적무능을 보라는 말처럼 들리나 그런 뜻이 아니고, 인간의 가능성 내지 신적성품을 보라는 말로서 자율주의 사고에서 나온 철학으로서 인간의 타락을 말씀하고 있는 성경의 뜻과는 반대입니다. 너 자신(너의 신성)을 알라. 이 모토는 인간의 죄성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그 당시 소피스트들이 가진 자연 중심의 사상을 부정하면서 그들의 시선을 자연에서 인간 자신에게 향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지성을 가리켜 신성의 불꽃이라고 말한 것도 소크라테스의 자율사상의 반영이었습니다. 칸트의 4가지 중요한 철학적 질문은 유명합니다. what can I know ? what should I do ? what may I hope? what is man? 칸트는 인간 이성을 통해 인간을 인식할 수 있고, 윤리를 통하여 인간의 행동할 수 있으며, 종교를 통하여 인간이 결단함으로 소망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인식론을 발전시켰고 신의 문제보다 인간의 문제를 더 중요시 하면서 인간의 전적 무능을 피해갔습니다. 야스퍼스는 인간의 죽음과 투쟁과 고통과 역사의 불가피성의 한계상황에 처한 실존을 스스로 이해한다면 신의 자리에 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철학은 인간의 자율성에 호소하면서 자율성의 차원을 넘어 신격화하는 위험을 항상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전적 부패 전적 무능을 인정하지 않는 인본주의 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처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의 영광스러운 존재였으나 죄로 인하여 만물보다 더 부패한 인간 즉 전적 부패한 인간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17장 9절-"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시편 14장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 롬3장13절-- "너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뜻은, 본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름답게 창조되었으나 죄로 타락하여 전적 부패된 자신을 알라는 뜻입니다. 원죄를 가진 인간이 지닌 전적 부패, 전적 무능의 상태야말로 인류전체가 죄의 영향 아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찰학자들의 말처럼 인간은 자신의 이성으로 인간 자신의 세속적 본성과 육체적 심리적 구조의 깊이는 알 수 있으나 죄로 말미암아 인간 자신의 본질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차르녹(Charnock)은 "우리의 마귀적이고 뱀과 같은 본성과 습관이 우리 속에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마귀가 타락의 본성으로 강력하게 역사하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본성과 의지가 먼저 성령으로 변화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의 행동들이 하나님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게 된다. 또한 우리의 순종의 동기들을 사랑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라고 잘 설명하였습니다.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조2항~5항에 표현된 전적부패와 전적 무능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2 "이 죄(원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그들의 본래의 의와,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떨어졌고, 그래서 죄로 인하여 죽게 되었으며, 영혼과 몸의 모든 기능들과 부분들에 있어서 전적으로 더러워졌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3 "그들은 모든 인류의 뿌리이었으므로, 그들로부터 일반적 출생 법으로 태어나는 모든 후손들에게 이 죄의 죄책이 전가(轉嫁)되었고, 죄로 인한 그 동일한 죽음과 부패성이 전달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4 "우리로 모든 선에 대하여 전혀 싫증나며 무능력하며 반대하게 하고 모든 악으로 전적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이 본래의 부패성에서 모든 실제적 범죄들이 나온다"(6: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5 "본성의 이 부패성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중생한 자들 안에 남아 있고,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되고 극복된다 할지라도, 그것 자체와 그것의 모든 활동들은 참으로 그리고 정확히 죄다" 네델란드의 튜립(TULIP). 5) 칼빈의 5대 교리[Total corruption or Total inability of man]와 요한 복음 6장을 비교 (1) 인간의 전적 부패 전적 무능 (Total corruption or total inability of man). (요6;44)--"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전적 부패 전적무능 (2) 성부 하나님의 무조건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of God). (요6;37) --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무조건 선택. (3) 성자 하나님의 제한적 속죄 (Limited atonement of christ). (요6;39) --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은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 이니라"--제한적 속죄 (4) 성령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of holy spirit). (요6;63)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불가항력 (5) 성도의 궁극적 구원--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요6;54)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견인 영어로 외우기 위해 첫 글자를 따서 TULIP(튜립-꽃이름)이라고도 합니다. 이 5 대 교리는 알미니우스(화란 라이덴 대학 교수)의 제자들(알미니안 또는 레몬스트레이트라고함)이 제시한 5개 항목을 반박하는 교리의 요약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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