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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한국기독교사연구소(소장 박용규 교수)가 2012년 11월 26일 서울 잠원동 신반포중앙교회에서 개최한 ‘한국교회 이단사이비운동 비평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논문입니다. 저자인 김성봉 교수(대신총회신학연구원 조직신학)는 논문에서 신성종 목사를 ‘S목사’로, 김종원 목사를 ‘K목사’로 표기하였으나 독자들의 많은 상담과 문의에 비추어 실명을 검색할 수 있도록 편집인이 임의로 수정하였음을 밝힙니다.<편집자주>
김성봉 교수 / 예장대신 총회신학연구원 조직신학, 신반포중앙교회 담임
문제 제기
오늘날 천국 지옥 방문 이야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또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 그런 이야기들과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대조해 볼 때 그런 이야기의 공과가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 먼저 천국 지옥 방문 이야기의 계보와 실상을 살피고, 다음으로 그런 내용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비판하며, 마지막으로 우리 시대에 바른 신앙자세로 살아갈 것을 촉구하고자 한다.
1. 천국·지옥 방문 이야기의 계보
18세기 스웨덴의 천재과학자였던 엠마누엘 스베덴 보리의 천상여행기는 이 방면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그는 뉴톤과 같은 최고의 과학자 반열에 있었지만 57세에 아주 특별한 체험을 통해 영계를 왕래하며 30년간을 살았다고 한다. 이후 조지 H. 갤럽이 만든 천국과 지옥이란 비디오도 이 방면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의 천국 지옥 방문 이야기는 분명히 퍼시 콜레의 <내가 본 천국>(1986)이 그 기원을 이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퍼시 콜레가 천국을 보았다는 내용을 단테의 신곡처럼 알리는 내용이다. 퍼시 콜레의 책을 홍의봉이란 사람이 번역해서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하였는데, 그는 미국에서 유행하였던 휴거 이야기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입장을 가져서 후에 <휴거>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 책의 내용은 퍼시 콜레가 천국에서 솔로몬, 다윗은 물론이요 JFK까지 보았다고 하는 것인데, 이후에 퍼시 콜레는 한국을 방문하여 독특한 외모와 설교로 상당한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언급할 인물은 한 때 1992년 재림설로 한국 교계와 사회를 시끄럽게 하였던 다미선교회의 이장림이다. 이원규의 논문에 따르면 이장림이 본격적으로 휴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6년 퍼시 콜레 목사의 저서 <내가 본 천국>을 읽은 후부터라고 한다.
최근 유수한 보수신학교의 교수였던 신성종 목사가 <내가 본 천국과 지옥>(2009)이란 책을 펴냄으로 이런 유의 이야기가 더욱 기세를 부리게 된듯하며 이 시기를 전후하여 마치 막아놓았던 봇물이 터지듯이 이런 이야기에 대한 광고가 기독교계의 신문지상을 뒤덮고 있는데, 그 가운데 바로 P목사의 간증과 김종원 목사의 <뷰티풀 천국 쇼킹 지옥>이 있다.
2. 천국·지옥 방문 이야기에 대한 성경적인 비판
1) 일반적인 비판
천국에 혹은 지옥에 갔다 왔다는 데 거기 대해서 왈가왈부할 성질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특이한 경험을 했음에 틀림없다. 물론 그들 중에 어떤 일들은 괜히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지어낸 이야기를 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유의 책들 가운데 가장 합리적일 것 같은 신성종 교수의 책에도 그 머리말에 “나의 지식과 함께 기도 중에 내가 본 환상과 나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 글을 쓰기로 한 것”이라고 한 것이나 “필자가 꿈과 상상의 세계를 통해서 본 천국과 지옥을 함께 여행해 보자”고 한 것을 보면, 이런 유의 책이 갖는 어느 정도의 픽션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책의 마지막 부분인 종막에서도 “내가 본 것을 소설 형식으로 기록하기로 했다”고 쓰고 있다.
논자가 짐작하기에 신성종 교수는 단테의 신곡을 읽다가 자극을 받아 그에 방불한 책을 쓰고 싶어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그의 책 제 1장 연옥편에서 “그가 쓴 천국과 지옥이 내가 꿈속에서 본 것과 너무도 달라 나는 내가 읽고 듣고 본 것을 기록하기로 하고 펜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서두 같기도 하고, 요한 계시록의 서두 같기도 한 이런 투의 글이 픽션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꿈에서 본 것을 대단한 신빙성을 가지고 말하는데 그러한 자세 자체가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가 가져야 할 기본에서 벗어나 있는 듯이 보인다. 일찍이 성경은 그 백성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였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삼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신 13:1~3a).
예레미야 당시에도 꿈 이야기가 유행하였던 듯하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경고하였다.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그들이 서로 꿈 꾼 것을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렘 23:25~28).
많은 사람들이 이들이 행하는 이적과 기사 때문에라도 믿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도대체 성경의 교훈은 어디에 두고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인지…. 바울 사도는 이런 시대가 있을 것을 미리 말씀하시고 경고하셨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 2:9~12).
2) 성경본문의 이해를 통한 비판
①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 혹은 하나님의 나라
성경에서의 천국에 대한 언급은 지금 논의되고 있는 이런 의미에서의 언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나라 관점에서의 천국이다. 이 경우에는 지난 세기 동안 연구되어진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 관점이 강조되어져야 한다.
△ 바실라이아 : 마 4:23, 9:35, 13:19, 38, 24:14; 딤후 4:18
△ 헤 바실라이아 톤 우리논 : 마 3:2, 5:3, 10, 19, 20, 7:21, 8:11, 10:7, 11:11, 12, 13:11, 24, 31, 33, 44, 45, 47, 52, 16:19, 18:1, 3, 4, 23, 19:12, 14, 23, 19:12, 14, 23, 20:1, 22:2, 23:13, 25:1 *전부 마태복음에 나오는 사례들이다.
△ 헤 바실라이아 투 데우 : 마 12:28(눅 11:20), 19:24, 21:31, 43; 막 1:15, 4:11, 26, 30, 9:1, 47, 10:14, 15, 23, 25, 12:34, 14;25, 15:43; 눅 4:43, 6:20, 7:28, 8:1, 10, 9:2, 11, 27, 60, 62, 10:9, 13:18, 28, 29, 14;15, 16:16, 17:20, 21, 18:29, 19:11, 21:31, 22:16, 18, 23:51, 요 3:3, 5, 행 1:3, 8:12, 14:22, 19:8, 28:23, 31, 롬 14:17, 고전 4:20, 6:9, 15:50, 갈 5:21, 골 4:11, 살후 1:5 *주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많이 언급되어 있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이런 의미에서의 언급은 아마도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내용이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그런 물질적인 것일까 하는 문제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에 해당한다.
② 지옥에 대한 성경에서의 언급
지옥에 대한 언급은 보다 구체적이다. 마 5:22, 29, 30, 10:28, 18:9, 23:15, 33, 막 9:43, 45, 47, 눅 12:5, 약 3:6, 벧후 2:4 등. 지옥과 불을 연결시켜 지옥불이라고 칭하는 구절도 있다(마 5:22, 18:9, 막 9:43, 약 3:6).
③ 우리 주님의 말씀 가운데(마 25장)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천국과 관련하여서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라고 표현되어 있고, 지옥과 관련하여서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로 묘사되어 있다(마 25:34, 41).
④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에서(눅 16장)
이 단락에서 천국과 관련하여서는 죽은 후에 천사에 의해 받들려 들어간 아브라함의 품(눅 16:22), 위로(25)로 표현되어 있는데 비하여, 지옥과 관련하여서는 음부(눅 16:23), 고통 중에(23), 불꽃 가운데(24), 괴로움(25), 고통 받는 곳(28)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둘 사이에 큰 구렁텅이(26)가 놓여 있어서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되어 있다(26).
이 본문에서 이미 죽은 나사로를 지상에 보내어 자기 형제들에게 증언하게 해 달라고 부자가 요청하지만 거절을 당한다.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이런 간청에 대하여 아브라함의 대답은 분명하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부자는 효과 면에서 다르다고 하며 간청한다.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런 말에 대한 대답은 예상 외로 단호하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며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여기에 시대의 풍조를 비판하는 우리 신앙의 중요한 핵심이 보인다. 우리 생각에는 천국 지옥 이야기가 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여겨질지 모르나 신앙의 정로는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는 말이다.
3) 신성종 목사의 자체 비판
신성종 목사는 그의 책 말미에서 오늘날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이런 유의 현상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지금 한국과 외국에서 천국과 지옥을 갔다 왔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책과 간증이 판을 치고 있어서 사실은 이 간증을 하고 싶지 않았다. 같은 부류로 여겨질까 두렵다. 가장 유명한 것이 안젤리카의 23시간이라는 내용이고, 국내에서는 구순연 전도사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간증하는 것은 잘못된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이다.”
그가 보기에 이런 유의 간증들이 잘못되었다는 표현이다. 결국 그도 이렇게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통해서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 자체 모순적인 표현을 보게 된다. 그의 책 앞부분인 지옥과 천국 편에서 수많은 실명을 거명하면서 그들을 천국과 지옥에서 본 것으로 말해놓고는 후록에 가서는 “그러면 천국에는 언제 가는가? 낙원에서 잠깐 머물다가 주님이 부활할 때 육체가 부활해서 간다”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아직 부활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천국에 가지 않았다는 말인데, 그들을 천국에서 본 것으로 기록한 것은 자체모순이 아닌가?
4) 신학적인 비판
신앙생활에서 천국과 지옥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죄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의미에서나 믿음이 없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받도록 하는 면에서 천국과 지옥의 실재성을 말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강조가 구원 이후에 이르게 될 실제로 존재하는 곳에 대한 사실 자체를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신앙정신을 왜곡시킬 수 있는 어떤 의도들 속에서 신자들을 자극시키려는 목적을 가지는 것은 신학적인 문제를 필연적으로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 이미 이러한 사실은 앞서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다고 하여 간증을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바 있기 때문이다. 성경 기록과 체험 사이에 발생하는 차이점으로 인하여 성경론, 구원론, 종말론 등에 있어서 심각한 오해나 오류를 가져오게 된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성경 기록과 천국과 지옥에 관한 체험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는 차이점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 사실, 이러한 성경 기록과 체험 사이에서 발생한 차이점을 논하는 것은 오늘날 처음 발생한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아주 오래된 논쟁이었고, 이 때문에 교회는 교회/교리사적인 면에서 성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신앙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여러 종교적 현상이나 체험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을 신앙고백적 내용으로 정리해 왔다. 즉, 어떤 종교적 현상이나 체험에 앞서 성경 해석이나 이해와 관련하여 긴 교회의 역사 속에서 공적 고백으로 정리된 신조(신앙고백)나 교리에 대한 내용을 살피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한 진지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와 성경에서도 기록된 사단의 미혹(살후 2:9~11) 사이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교회사 속에서 교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 문제를 확증하였다:
사단은 이적을 통해서 진리를 확증하거나 선을 촉진시키는 일에 참여하지 못한다. 반면에, 하나님은 이적을 통해 거짓을 확증하거나 악을 촉진시키는 일에 참여하지 못하실 것이다. 이는 “표적이나 기사가 아무리 위대하거나 무수하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성경에 대해 신앙고백적인 면에서 객관적으로 정리한 공적인 교리에 반하여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적 체험이 성경의 기록을 넘어서 충돌할 때 온 교회가 공적으로 고백한 역사적 신앙고백이나 교리보다 선행할 수 없고, 그것이 하나님의 공적인 진리에 상반되면 어떤 가치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참된 체험이라고 할 때, 그것을 경험하는 자는 교회의 질서를 존중하고, 성경의 계시정신을 넘어서지 않으며, 공적으로 고백된 교리의 내용을 모두 존중하여 스스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신앙적 체험 때문에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호기심 속에서 성경이 말하는 것 이상을 말하고, 공적인 교리를 훼손시키면서, 결국에 신앙의 내용을 공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정신과 분리하여 사적인 내용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 자체로 미혹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신앙적 체험이든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기록인 성경이 서술하고 있는 것 더 이상의 것을 말한다고 하면 성경의 권위는 사라질 것이다. 성경의 내용이 어떤 신앙적 체험들에 의해 추가되거나 보충될 수 있다고 믿어지면, 이미 성경은 더 이상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볼 수 없다. 우리가 소유한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지 못하는 불안전한 책일 뿐이다. 또한, 그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단들의 오류를 방어하기 위해 공적으로 정리한 신앙고백(교리)을 넘어서 신앙적 체험을 주장한다면, 신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 주는 진리의 객관성도 더 이상 언급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경험적인 것들은 어떤 면에서 사람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성경을 호기심으로 읽게 되고, 그 안에 기록된 것 이상의 것들을 첨가시킬 수 있는 경향에 깊은 주의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객관적 신앙고백보다는 신앙적 체험에 신앙의 기준을 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경도, 교리도, 역사 속에서 논의되어 온 바른 신학도 의미가 없게 된다. 이는 교회의 미혹이며, 교회를 무너뜨리는 재앙이다. 이 결과는 전혀 다른 거짓된 신앙의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3. 구체적인 사례와 비판
1) P 목사의 경우
수년 전에 돌아가신 분의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 간증 글이 다시금 읽혀지고 있는 것은 종말론에 대한 강조보다는 현실 교회들의 침체를 극복하고자 하는 데 그 원인이 있는 것 같다. P 목사의 간증은 소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는 신자들에 대한 협박용’이다. 혹, 쓰러졌을 때 꿈을 통해서 천국과 지옥을 경험했든 하지 않았든, 간증하고 있는 내용은 그분 자신이 읽고, 이해한 성경 내용을 설명하며 자신이 인생 속에서 경험한 다양한 일들과 지식들을 첨부하여 설명된 것이다. 천국과 지옥을 증언하기 전에 성경에 나온 기록들을 먼저 설명하는데, 그분의 경험은 그 성경 내용을 거의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 위에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좋은 내용으로 천국과 가장 끔직한 내용으로 지옥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전체 내용은 아마도 그분이 목회하실 때 신자들에게 언급하였고, 또한 강조하고 싶어 했던 내용에 근거하여 설명되고 있다. 즉, 교회생활 열심, 목사에게 충성, 헌금(십일조, 재산납부) 강조, 신앙생활과 현실생활의 일치성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더욱이 천국에서 주님이 질문했다는 칭찬 내용 역시도 이를 대변한다: “너는 땅에서 성경을 얼마나 읽었느냐?, 너는 헌금을 얼마나 했느냐?, 너는 땅에서 전도를 얼마나 했느냐?, 너는 십일조를 어떻게 했느냐?, 너는 기도 생활을 얼마나 하였느냐?” 이러한 내용은 오늘날 현실 목회를 하는 목사들이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관련하여 늘 강조하고 싶어 하는 것들이다. 이분은 이를 천국과 지옥의 경험을 통해서 두려움을 조장하며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분의 언급은, 이미 한국 사회(역사)를 경험하고, 친히 다양한 신앙인물들에 대한 전기를 쓴 분으로서, 대부분 자신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건들이나 인물들을 토대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면에서 쓰러졌을 당시 꿈을 통해서 천국을 경험했을지라도, 그 내용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성경지식, 자신의 경험 그리고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지식 이상을 담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과 함께 여러 교회들의 간증을 위해 일반적으로 시중에 떠도는 내용들이 첨가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특별히 IMF 시절 금란교회의 교회건축과 관련한 간증에는 그 교회가 요구하는 것이 강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분의 증언에 나타난 구원에 대한 이해와 천국-지옥 증언을 몇 가지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구원과 상급을 분리하고 있다. 구원과 상급을 분리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그분의 공로주의적 신앙관 때문인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제대로 믿지 못하면 지옥을 간다는 표현이나 봉사를 많이 하지 않으면 상급을 받지 못한다는 식의 증언이 이를 분명하게 대변한다. 그리고 천국을 언급할 때, 공로가 있는 신자들의 천국, 공로가 없는 신자들의 천국 그리고 공로가 없는 어린아이들의 천국을 구분하는 것 역시 그분이 가진 공로주의적 신앙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구원을 이야기할 때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구원을 얻은 부끄러운 구원과 예수를 믿고 봉사를 많이 할 때 주어지는 상급을 분리하고 있다.
상급은 성경에 언급된 내용이기는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그 상급이 구원과 분리되어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더욱이 천국에서의 상급은 바빙크가 언급한 대로 다양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하지만 그 상급을 ‘모두가 받는 축복의 빛남이나 영광의 차이’로써가 아니라(바빙크, <종말론>, p.261), 오직 물질적으로 집 건축과 관련하여 이해되고 있는 것 역시 성경의 문자적인 이해와 현실 속에서의 자신의 경험 이상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좋은 집, 초라한 집, 큰 집, 높은 빌딩 등으로 상급을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열심이 없는 신자들이 천국의 변두리에서 산다는 것이나 아이들은 공로가 없기 때문에 집이 없이 시들지 않는 꽃밭에서 산다는 증언은 로마 가톨릭이 말하는 (유아)림보적 사고를 벗어나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근거하지도 않는 기존 한국 부흥사들 사이에서 통용된 내용일 뿐이다.
셋째로, 지옥을 말할 때도, 그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 속의 유명 인사들이다. 간혹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는 몇몇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내용 역시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그분이 지옥에 간 대상들을 언급한 것은 교회를 믿지 않는 사람들(우상숭배자들) 이외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 진실 되게 살지 않는 사람들, 헌금 열심히 내지 않고 떼먹은 신자들, 교회에 봉사하지 않고 헌금생활하지 않는 현실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신앙적 열심을 강조함으로써 구원을 공로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넷째로, P 목사는 지옥도 두 종류로 나누고 있다. 한 곳은 불못(유황불)이고, 다른 한 곳은 어둠(어두운 곳)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한 것 이상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대신 그곳들에서 고통들을 이야기할 때는 죄의 종류에 따라 형벌이 다름을 이야기하고 있다. 매우 일반적이고, 흔히 듣는 이야기를 각색해서 강조할 뿐이다.
앞서 언급하였지만, P 목사가 증언하고 있는 천국과 지옥의 경험은 그것 자체의 존재성을 강조하는 것과 성도들에게 열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 이외에 별다른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결국, 논자의 개인적인 평가로는, 그분의 꿈을 통한 천국과 지옥의 경험을 사실로 믿어준다고 해도, 그분의 증언은 자신의 꿈에 여러 다양한 것들이 첨가된 것으로(첨가되어 조작된 것으로) 성경적(교리적)으로 무지한 신자들의 열심을 끌어내기 위한 협박용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한국 교회에서 다시 이러한 종말론적 이해가 강조되고 있는 것은 신자들에게 더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강조하기 위한 의도와 맞물려 있는 것 같다. 최근 신성종 목사의 천국과 지옥에 대한 경험 역시도 간증으로 인터넷에 떠 있는데, 주안장로교회에서 간증한 내용인데, 이분은 ‘학자’답게 성경적이고, 교리적인 토대를 가지고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고 있다. 즉, 이분은 P 목사와 달리 더 체계적이고, 단순히 문자적인 것을 넘어서, 신학적인 설득력으로 매우 세련되게 증언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P 목사나 신성종 목사의 천국과 지옥의 경험이 일치하고 있는 강조점은 앞서 말한 것처럼, 신자들의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극복하고 더욱 열심 있는 신앙생활(전도, 선교, 헌금, 봉사 등)을 독려하기 위한 의도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다시 천국과 지옥에 대한 경험이 강조되고 있는 종말론적 현상들은 목사들이 신자들의 열심을 설교 그 이상의 것(내용)으로 이끌어 내고자 하는 시대적 흐름인 것 같다.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러한 간증이 조만간 한국교회를 다시 한 번 휩쓸고 지나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목사들은 한국교회의 침체나 신자들의 열심이 점점 식어가는 현상에 대한 불안감을 갖기 이전에 참된 구원의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해 더욱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 대신에 이런 식의 간증을 통해서 신자들을 설득하려고 하게 되면 이후 또 다른 신앙적인 문제를 낳게 될 것이 자명하다. 시대의 어순선한 분위기와 함께 잘못된 종말론이 한국교회를 시끄럽게 하지 않기를 기대할 뿐이다.
2) 김종원 목사의 경우
김종원 목사의 천국과 지옥 간증에 대한 신학적 평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특별히, 여기에서는 핵심적으로 성경론, 구원론, 종말론에 대한 세 신학적 주제에 근거하여 그 간증이 가지고 있는 오류가 무엇인가를 살필 것이다.
① 성경관
김종원 목사의 간증에 이러한 표현이 있다:
“천국 소망을 갖고 영적인 세계를 사모하며 믿음으로 살고자 애쓰는 신실한 종들에게 더 많이 열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종이 전하는 이 천국과 지옥의 복음을 듣고 여기에 동참되어 천국과 지옥을 전하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복을 주시고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며 1000대까지 후손들에게도 복을 주신다 하셨습니다.”
먼저, 김종원 목사의 전체 간증의 요지뿐만 아니라 특히 “신실한 종들에게 더 많이 열어주신다”고 하는 표현과 관련하여, 성경의 내용만으로 천국과 지옥의 실체를 아는 것이 부족한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들의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 성경의 내용에 더 많은 보충적 설명이 필요할까? 분명히, 이러한 표현은 성경관에 있어서 심각한 오류를 가지고 있다. 특별계시 기록으로서 성경의 완전성과 충족성을 부정하는 이해이다. 영적인 체험에 신앙의 객관성을 호소하는 신비주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면서도, 성경을 불완전한 것으로 생각하여 어떤 내용들이 더 보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체험의 내용이 성경의 내용을 넘어서면 신비주의자들은 성경보다는 영적인 체험에 더 많은 신앙적 의존성을 두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교회사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분명히, 이러한 생각은 성경 자체와 정면으로 모순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신앙의 객관성을 증명함에 있어서 언제나 접할 수 있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아직 기록되었든 기록되지 않았든, 그 말씀 외에 결코 다른 어떤 것에 주시하지 않았다. 교회의 전통, 영적인 체험, 인간의 숙고에 근거하여 신앙의 객관성을 확보하지 않았고, 오직 계시기록인 성경에서만 찾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결국, 이 기준을 잃게 되면 성경은 더 이상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와 기록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다음으로, “천국과 지옥의 복음을 듣고 여기에 동참되어 천국과 지옥을 전하는 자에게”라는 표현은 복음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그 초점을 모호하게 한다. 복음이라는 것이 천국과 지옥을 알리는 것에 목적이 있는가? 천국과 지옥의 증거를 위해서 복음이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것이요, 그분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한다고 할 때, 한 내용으로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잘 전달하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을 믿는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고백이 없으면, 그 신앙은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천국과 지옥만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게 하는 것은 복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더욱이 성경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목적도 망각한 것이다.
② 구원론
김종원 목사의 간증은 구원론에 심각한 오류를 가지고 있다. 구원론의 오류는 신론의 오류와도 연결되는데, 즉 신론에 있어서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을 불안전한 것으로 의심하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더욱이, 그 간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완전성을 파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의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획득한 구원의 모든 은택들이 불안전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도록 하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 사죄, 칭의, 형벌의 면제, 영원한 생명을 받는다. “이미와 아직”에 대한 긴장관계가 남아있을지라도, 이는 삶과 죽음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상태적 구분일 뿐, 구원의 본질적인 면에서 발생하는 구분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표현이 구원론을 왜곡시키고 있는 실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집을 보았는데 이 집은 외부공사가 끝나고 내부공사까지 마치고 우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살림살이가 다 준비되었는데 집이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패가 떼진 자국이 보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집주인은 마지막에 데마같이 세상이 좋아서 주님을 버리고 타락해서 결국 지옥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구원은 완성이 아니라 미완성이기 때문에 천국 갈 때까지 예수를 잘 믿어야 합니다.”
즉, 이러한 표현이 정당하다고 하면 우리는 다음의 심각한 질문들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구원이 행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구원이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의한 것인가? 창조 전에 하나님의 예정(엡 1:3)하심 같은 것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시는 분인가, 아니면 성경이 잘못 기록된 것인가?”
성도는 공로에 의해서 영생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에 근거하여 믿음을 통해서 영생에 이른다. 그리고 성도의 선행이라는 것 역시도 자신의 의지적 노력이나 산물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영생의 원리에 기초하여 성령에 의해서 발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도의 선행은 천국을 가기 위한, 혹은 천국에서 집을 짓기 위한 준비나 완성이 아니라, (성화의 열매로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원리에 근거한 구원받은 삶의 열매일 뿐이다.
아직 남아있는 죄성으로 인하여 때로 심각한 죄를 짓는다고 해도, 이를 통해서 구원이 취소되거나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교훈, 훈계, 그리고 고난(징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회개하게 하시고, 다시 회복되도록 하신다. 왜냐하면 구원은 인간의 의지적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요 우리 안에서 계시는 성령의 불가항력적 역사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사람과 그리스도의 관계가 영원한 화와 복을 결정한다. 심판의 주된 문제는 신앙 혹은 불신앙인 것이다.
③ 종말론
“천국은 빛 되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이며, 하나님의 빛에 지배 받기 때문에 어둠은 조금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천국에는 악한 영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악한 말, 악한 생각, 악한 행동을 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으며 죽음도 눈물도 근심도 없는 나라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성경 곳곳에 표현된 천국에 대한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물과 보물창고를 언급한 것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보물 창고 안에는 벽옥, 남보석, 옥수, 녹보석, 담황옥, 비취옥, 청옥, 자수정 등 온갖 황금보석들이 빛을 발하는데 눈을 뜨고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천국에는 온갖 보물이 묻혀 있는 보물광산이 있는데…믿음의 행위를 통해 이 보물 창고들을 열어 각자의 하늘나라 황금집을 짓는다고 하셨으며, 또 이 모든 보물들을 사람들에게 내려주기도 한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의 보물은 어떤 의미인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보석이 물질적인 보석을 의미할까? 더욱이, 천국에서도 물질적인 보물이 필요한가? 물질적인 속성으로 천국의 영광을 묘사하는 것은 이방적 사고요, 세대주의적 천년설주의자들의 입장일 뿐이다. 우리는 요한이 묘사하고 있는 천국의 영광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요한은 천국의 영광을 우리에게 온전히 이해시키기 위해서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의식에 투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들로 해석하여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즉, 천국의 영광을 문자적인 이해 속에서 물질적으로 좋은 상태로만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이지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천국의 영광은 물질적인 것을 누리는 것에 그 본질이 있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한 성도가 하나님을 알고 향유하는 것이다. 죄나 어떤 요소들로도 방해받지 않고, 자연이나 성경으로도 중재되지 않는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교제이다. 그 교제 속에서 성도는 영혼과 육체, 지성과 의지에 따른 천국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좋은 집이나 온갖 보물을 소유하는 것과 비교될 수 없다. 물질적으로만 천국의 영광을 논하는 것은 현세적이고, 구원과 그 구원이 주는 영광이 어떠한가를 이해하지 못한 지극히 문자적인 사고의 산물이다.
성도들은 천국에서 동일한 영생, 새 예루살렘에서 동일한 거처, 하나님과의 동일한 교제, 동일한 복 등을 받는다. 다만, 이러한 천국의 영광의 본질적인 면에서 차이는 없지만, 그 누림(상급)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는 성도들의 공로에 의해서 주어지는 차이가 아니다. 그 차이는 오직 언약,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 그리고 은혜의 섭리에 근거한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리이자 은혜의 선물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다 성취했는데, 형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율법을 완수함으로써 모든 구원의 은택들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차이는 성도들 사이의 계급이나 차이를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한 성도의 순종에 대한 합당한 위로와 하나님의 덕성을 다양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를 통해서 성도들은 하나님, 천사, 그리고 다른 성도들과 더 깊고 풍성한 교제를 누리며, 천국에서 자신들만의 고유한 자리와 임무를 갖게 된다. 성도들은 천국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한 자들로서 하나님에 대한 찬미로써 각자의 고유한 역할들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섬길 때, 보상을 바라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 감사, 그리고 그분의 뜻을 성취하는 아들로서 섬긴다. 어떤 보상 때문에 선행을 하고, 그리스도를 열심히 믿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다음의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
바울은 왜 자신이 “셋째 하늘”에 들려 올라갔다가 온 후에 “사람이 가히 말할 수 없는 형용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면서 더 이상의 언급을 하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금했을까? 이와 연계하여, 천국을 경험한 바울이 로마서, 고린도 전후서, 에베소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등을 기록했고, 그 기록에서 주님의 다시 오심과 하나님의 주권에 근거한 구원을 표명하면서 자신의 체험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특별한 예정을 말하며, 인간의 의지나 공로주의와 상관없는 구원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와 관련하여 천국과 지옥을 체험했다고 하는 김종원 목사는 다른 신학적인 사안들은 차치하고서라도 특별히 성경과 자신의 체험 사이에 발생하고 있는 구원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에 대해서 만이라도 바른 성경적 답변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4.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
① 신성종 목사가 이런 분위기에 대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통해서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비판적으로 말한 것처럼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정도의 단순한 내용과 믿음으로 족한 줄 알고 살아야 하겠다.
② 성경을 발판 삼아 성경이 말하지 않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장황하게 말하는 것에 대하여는 항상 경계를 놓치지 않는 것이 신앙적으로 안전하다.
③ 특히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목회자 혹은 설교자로서는 우리가 단상에서 성경 외의 내용을 말하고 가르칠 권리가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특히 개혁교회 목회자 혹은 설교자로서는 그 선이 너무나 분명하다는 것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④ 바울 시대에 제자 디모데와 디도에게 끝없는 신화와 족보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도 그와 유사한 당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 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딤전 3, 4)
⑤ 특히 개혁교회에 속한 목회자로서는 그 자세를 분명히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혁교회 강단의 특징은 말씀이 가는 데까지 가고 말씀이 멈추는 데서 멈추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라는 것은 성경의 처음 부분인 신명기와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에서 거듭거듭 경고하는 말씀이다. 말씀에 무엇을 더하면 재앙을 더할 것이요, 말씀에서 무엇을 빼면 복에서 제할 것이라고 하셨다. 오늘날 마치 유행처럼 천국 혹은 지옥을 다녀온 이야기들을 강단에서 하는 일은 개혁교회임을 자처하는 교회의 강단에서는 도무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여겨진다.
이 글은 <교회와신앙>(www.amennews.com) 11월 27일에 게재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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