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다른 복음은 없다.

하나님아들 2012. 7. 26. 23:08

다른 복음은 없다.
갈 1:1-2:21 요절 / 갈 1:11,12

글/이승창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에게 쓴 서신으로서, 주제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진리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들은 안디옥, 루스트라, 더베, 이고니온으로 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인 AD 47년경에 개척한 곳으로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가장 먼저 개척한 교회들로 남다른 애정이 있었습니다. 특히 루스드라에서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기절을 하기도 했지만, 또 다시 일어나서 성안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지 2, 3년이 지난 후에, 갈라디아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가지고 들어온 거짓교사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고, 할례도 받아야 하고, 구약의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둥 이상한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또한 바울이 전통 사도가 아니라며 비난하였습니다.  이로인해 연약한 갈라디아 성도들이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매우 안타까운 심정으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의 흔들리는 믿음을 바로 잡아주고자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주요 요절은 갈라디아서 5:1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자유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책임한 자유만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다. 갈5:13,16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게 된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적극적으로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갈라디아서 공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에 기초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자신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당시 갈라디아 성도들 가운데는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및 죽은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당시 사도라 함은 통상 예수님의 12제자들을 말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바울은 사도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도권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사람들로부터 말미암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도권은 바로 예수님과 그를 살리신 하나님께로 말미암습니다. 누구이든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믿고 또 이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자가 바로 사도입니다.  롬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우리의 부르심이 하늘로 부터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은 영적으로 죽은자와 같았던 바울 자신을 살렸습니다. 과거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그는 남다른 유대교의 열심히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무지한 열심으로 주믿는 자들을 멸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잔해 (destroy) 하던 자였습니다. 순교자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자와 같았던 사도 바울의 영적인 눈을 띄웠습니다. 그로 살게 하였습니다.

 

다마섹에서 예수믿는 자를 핍박하기 위해 쫓아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행9:4)." 바울은 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변화받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음성앞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죄인중의 괴수요 복음의 원수와 같은 자신의 모든 죄를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이때 죽었던 영혼이 살게 되었습니다. 영이 눈이 띄었습니다. 사도의 권세를 받았습니다.  새생명과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도 과거 죽은자와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거 어떤 면에서 죽어 있었습니까? 우리는 과거 죄로 인해서 죽은자와 같았습니다. 죄가 죄인줄 몰랐습니다.  그냥 죄가 주는 잔재미 속에 빠져 살다가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다가 결국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죄의 중독이 되어 죄가 없이는 살수 없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타일러도 듣지 않고 때려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죄가 주는 독소에 맞아 공허와 허무가운데 운명가운데 살았습니다. 일어날 힘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죄로 인해 양심이 마비되었습니다.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했습니다. 생명력을 잃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리셨습니다. 죽어버린 행실에서 죄악된 습관에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사도로 불러주셨습니다. 그의 증인들로 세우셨습니다. 무엇보다 악한 세대에서 건지셨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자기 몸을 드리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악한 세대는 죄가 판을 치는 죄악된 세상을 말합니다. 타락한 죄인들로 가득한 세대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세대를 말합니다. 이런 세대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악해져 가고 있습니다.

 

어제는 인터넷 뉴스에서 자기 미숙아 아들을 굶겨 죽인 후 농장에 방치하고 영양실조상태의 딸을 굶긴 비정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긴급 체포되었습니다. 얼마전에는 자신을 구박한다며 자신의 노모를 때려서 죽인 40대가 구속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잘못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패륜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성적 도덕적으로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 인기와 여론에 밀려 진리가 가리우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어두운 세대 악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악한 세대에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있을 수 있는 가! 생각합니다. 어디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악한세대에 우리를 건지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구원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자기 몸을 드리셨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루시고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로마군병들이 갖다주는 신 포도주까지도 거절하시고, 모든 고통을 다 겪으시므로, 완벽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 은혜를 생각할 때 3절처럼 우리도 비록 악한 세대이지만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려야 마땅합니다.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날마다 죄를 범하며 넘어지는 연약한 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 은혜를 생각할 때 가만히 있다가도 눈에서 감사의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이런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저희를 악한 세대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6절을 보십시오. 갈라디아 성도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은혜로 부르신 이를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쫓았습니다.  바울은 이를 이상히 여겼습니다. 이상히 여겼다는 표현은 그냥 이상히 여긴 것이 아니라 "I am astonished"로써 충격으로 인해서 얼마동안 움직일 힘을 잃고 멍하니 있었다. 는 뜻입니다.


그럼 이들이 쫓은 다른 복음이 무엇입니까? 당시에 갈라디아 교회에 거짓 교사가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을 가지고는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할례도 받고, 구약의 율법도 지켜야만 100% 완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불완전한 구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이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다른 복음은 없나니"  "이는 너희를 요란케 하여 복음을 변하게 하는 것이요 또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공포했습니다. 갈2:21절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의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율법을 쫓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면 이는 자기 스스로 노력으로 구원할 수 있다고 하는 큰 죄악입니다.  즉 율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은 일방적인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를 아직 모르는 이들입니다. 아니 자기 연약함도 모르는 이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들 밀려오는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는

 

다른 복음수준이 아닌 거짓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시전 무엇이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요19:30)  "다 이루었다"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친히 나무에 매달려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100% 다 치르다. 율법의 요건을 완전히 다 이루셨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사도 베드로가 성전 앞에 서서 뭐라고 외쳤습니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하였습니다. 다른 복음, 다른 구원자, 다른 구원의 도리는 없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이런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이를 볼 때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요, 사단적인가 알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는 갈라디아 사람들의 문제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유대인들 할례당들을 무서워하여 사람앞에 살았습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비유를 맞추고자 복음의 진리를 거슬렸습니다. 그들의 기쁨을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신앙도 편히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할례를 인정하는 것이 편해 좋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이 결단하기를 바랬습니다. 내가 사람에게 좋게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저희는 어떻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십자가의 공로를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이 오고 고난이 다가와도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같이 율법이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있는자 같이 없는 자들에게는 없는 것 같이 하였지만 어떤 경우에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복음진리를 사수했습니다.

 

이런 바울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의 종이요, 복음의 사도였습니다. 우리 초기 믿음의 선배들도 이 예수로 말미암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떤 고난을 받았습니까? 스데반은 복음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는 아픔을 감당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히11장)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저희들은 누구의 기쁨을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까? 저희들이 사람들에게 좀 욕을 먹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지 않을지라도, 좀 인기가 없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수호하고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럼 이 복음은 어디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계시'는 무엇입니까? '계시'는 'revelation'으로서 '드러낸다' '나타낸다'는 뜻입니다. 이는 성경의 말씀을 말합니다. 복음은 사람이 누가 억지로 꾸민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있던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서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창세기 3:15절에서부터 이 땅에 구원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죄지은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성경에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이 구속계획을 가지고 꾸준히 준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매 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서, 당신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들어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계시의 복음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구원은 바로 이 계시가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 계시는 바울에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바울을 이방인의 빛으로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바울이 누구 혈육과 의논해서 복음을 영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베드로와 야고보등 사도들을 만나서 교육을 받아서 복음전파자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를 은혜로 부르신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그 속에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그가 복음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나타내심이 전에 핍박자요 잔해자인 그를 변하게 했습니다. 그 변화로 말미암아 23,24절에서는 사람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정이 태초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부르심과 나타내심이 그 인생을 변하게 한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도 그 아들을 들어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내가 비록 죄인이라도 많은 잘못을 했더라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자라도 실수가 많아도 목자로써 치명적인 문제를 갖고 있더라도 그 아들을 주시고 그 속에 나타내시기를 들어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저희가 날마다 이 예수님을 우리 심령 깊이 영접하고 드러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모심으로 변화 받는 새 삶을 누리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인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장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14년 후에 디도를 데리고 게시를 인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가 이방 가운데서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복음을 제출하여 그의 달음질 하는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하였습니다. 그가 하는 이일이 하나님의 역사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임을 일일이 다니며 증거한것입니다. 이를 통해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기초를 사람들 가운데 놓았습니다. 그러나 3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그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를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않게 하였습니다. 사실 디도는 헬라인이기 때문에 할례는 해도 무방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도 있으니 할례를 해서 그들의 인정을 받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할례를 행치 않아도 복음을 통해 참 자유와 평강을 누리며 할례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임을 들어내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해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를 경계하고자 했습니다.  여기 거짓 형제가 바로 할례와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입니다. 저희의 들어옴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삼고자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일시라도 복음의 진리를 잃지 않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의 진리가 조금이라도 훼손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구원을 이런 사단같은 자들과 타협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구원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로 택하심을 입었습니다. 이런 그를 9절에서 다른 사도들도 악수함으로 인정했습니다. 이제 이를 통해 복음이 이방 세계에도 활발히 전파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조성되었습니다. 이제 복음을 열심히 전파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11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의 실수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가장 모범적으로 유대 크리스챤과 이방 크리스챤들이 주안에서 서로를 영접하고 잘 동역하는 교회였습니다. 베드로는 이곳에서 이방인들과 아무 거리낌없이 교제하며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전에는 짐승만도 못하게 생각했지만 이방인이라도 예수님을 영접하면 새 피조물인 것을 의인인 것을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에게서 보낸 사람들이 온다는 말을 듣자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 스스로 어떤 자이건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면 의롭다 말하던 그가, 율법주의자 할례자들의 눈을 의식해서 이들과 상종하지 않은 것처럼 이중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를 본 구원받은 이방인들은 베드로의 이중적인 모습에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는 그가 하나님보다도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데서 비롯된 결과였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악영향은 남은 유대인들에게도 퍼졌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로 인해 남은 유대인들도 외식하고 안디옥 교회의 최고 리더인 바나바까지도 외식에 유혹되었습니다. 그의 외식하는 행동으로 인해 이방 크리스챤들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뿐 아니라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확신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런 베드로를 모든 사람앞에서 심하게 책망하였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은 그를 책망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고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지키지 않을 때 죄와 타협할 때 사람들의 눈치를 살필 때 결국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상처를 주며 악영향을 끼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복음역사를 헛되게 하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분명한 종들로써 복음의 진리를 고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임에 특징이 있다면 성경대로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임은 다른 단체와는 달리 60년대 초부터 가난한 대학생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며 열심히 세계선교를 해왔습니다. 우리 모임에는 다른 복음이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가르치다가 핍박을 받고 오해받는 것을 당연히 여깁니다. 바로 이런 특징이 있기 때문에 이제 복음주의 교회나 지도자로부터 많은 기대를 받고있습니다. "'들소리" 신문이라는 기독교 신문에서는 UBF가 후기 종교개혁의 영향권 안에 들어갈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영향력이 점점 증대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임이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이라는 분명한 복음 신앙적 바탕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분명하면 영향력 있는 모임이 됩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복음의 진리를 분명히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뿐입니다.  누구든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을 육체가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17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우리가 아직 육신을 입고 있기에 육신의 연약함으로 죄의 유혹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육신의 연약함으로 때로 죄에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세상 죄와 유혹에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께서 죄를 짖게 하는 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육신을 입는 동안 잠시입니다. 그가 오시면 온전케 될 소망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은혜를 붙들 때 내 모든 죄의 소욕을 깨끗게 하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때 우리가 헐었던 것을 즉 율법을 다시 지키면 우리가 우리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말합니다.  

 

바울은 이제 내가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라 말합니다. 그럼 육신을 가진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삶이 어떠해야 합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모든 육신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그 잘난 체 하던 사울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자꾸 연애감정에 시달리던 나의 모습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었습니다. 열등감과 무기력함에 슬피 울던 나의 모습이 십자가에 못박혀 함께 죽었습니다. 원망과 미움으로 일관하던 무기력으로 일관하던 나의 모습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두려움가운데 살던 나의 모습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그럼으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인생을 이끌어 나가시고, 내 인생을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죄의 짐을 지시고 죄와 싸울 힘을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이제 우리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위하여 몸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 사는 것이라" 우리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 사는 것입니다. 히 12:1,2은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가 우리를 얽매이게 하고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모든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기를 기도합니다. 인내로써 믿음의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그 믿음안에 사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저희가 날마다 자신을 구원하신 그 은혜를 기억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겸손히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떠한 자인가?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보시기에 어떠한 자인데 구원하셨는가? 얼마나 예수님께서 나를 인내하시고 기다렸는가? 그리고 우리를 얽매이게 하는 무거운 짐과 죄를 벗어버리기를 기도합니다.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고 지키는 가운데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 믿음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가좋다오/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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