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기록 배경을 알고 올바로 해석하자
● 시작하는 글
오명현 목사(전주함께하는교회·총회이단대책위 총무)
16회 연재를 약속하고 시작한 글도 오늘로서 마지막이다. 잠언의 교훈에 의존하여(잠 10:4, 13:4), 석수장이가 정을 쪼는 심정으로 한 자 한 자 백지에 새겨보았다. 첫 글에서는 기독교 역사에 검은 반점처럼 새겨진 이단들의 족적을 통시적으로 살폈고, 두 번째 글에서는 한국교회사 안에 악성 종양처럼 영혼을 죽이는 사이비 집단들의 흐름을 짚어보았다. 시대마다 변종 바이러스가 나타나는 것처럼 사이비 집단들도 더욱 더 교묘해짐을 볼 수 있다. 도둑놈은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한다. 마찬가지로 사이비 집단들도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이단에 대한 최고의 예방 백신은 그들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하려면 지피지기(知彼知己)를 해야 한다. 필자는 지피지기의 관점으로 15회 동안 연재를 했다. 마지막 글은 각 교회가 이단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예방하는 길에 대해서 제시하고자 한다. 그 예방의 실재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1. 성경에 근거한 종교개혁의 유산들
기독교는 그 어떤 철학(사상)도 그 어떤 세상 권력도 그 어떤 종교도 무너뜨릴 수 없는 반석 위에 세워졌다. 기독교회는 형이상학적인 철학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존재 위에 세워졌다. 이방종교가 숭배하는 것들과 이단들이 추종하는 교주는 존재의 허상에 기대어 있기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부인하는 철학자들의 숱한 질문도 비록 타락한 인간이지만 그들 내면에 감출 수 없는 종교적 본성에서 나옴을 부인할 수 없다.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가 말한 것처럼 ‘무엇인가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옳다고 인정된다.
기독교는 영원부터 자존(自存)하신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고(시 93:2), 하나님의 존재에서 역사의 시작과 끝을 말할 수 있고 참과 거짓을 논할 수 있다. 그러기에 교회는 참을 말할 자신이 있고,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숱한 사상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왔다. 앞으로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휴머니즘의 철학으로, 사이비 이단들의 공격은 쉬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도전에 어떻게 응전해야 하는가?
이러한 도전에 교회는 근본적인 대처를 해야 한다. 그러하려면 무엇이 이단을 태동시켰고, 무엇이 거짓 이론과 종교들을 만들어 냈는가의 근본 원인을 찾아야 한다. 혹자는 “사실 때문에 분열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해석 때문에 분열된다”라고 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성경은 서로 맞닿을 수 없는 두 길을 가게 된 원인을 “사실에 대한 해석(왜곡)의 차이”임을 증명하고 있다. 선악과 명령에 대한 사탄의 해석과 제사에 대한 가인의 해석은 사실과 달랐다. 해석이 다르면 같은 길을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중세의 어두움도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대한 그릇된 해석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교리를 세웠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 의지했던 중세로마교회는 어두움의 더 깊은 질곡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왜 중세의 사제들은 사실(성경)을 외면하고 거짓된 해석을 내놓았는가? 한 마디로 말하자면 탐욕 때문이었다. 세속적인 권세, 거짓된 영광, 밤을 새우면서도 다 셀 수 없는 돈에 눈이 멀어 있는 그들에게 성경이 눈에 보일 리가 없었을 것이다.
칠흑 같은 시대에 여명의 빛이 비추어졌으니, 개혁 전 개혁자라고 일컫는 영국의 존 위클리프(1320~1384)와 보헤미아의 존 후스(1369~1415)의 성경 보급이었다. 그들은 11세기에 중세 로마교회가 성경보다도 교황의 교훈을 신앙의 기준으로 정한 그 허상을 보았던 것이다. 후스는 화형을 당하면서까지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보급했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개혁의 봉기를 들 때의 가장 큰 핵심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었다.
칼빈을 비롯한 그 후예들은 성경을 가르치는 데 사력을 다했다. 그 가르침의 결과물이 벨직신앙고백서(1561)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과 도르트신조(1619)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와 대소요리문답(1648) 등이다. 이런 고백서들을 만든 개혁의 선조들은 목숨과 맞바꾸면서까지 성경의 진리를 지켰던 것이다. 우리 교단은 칼빈주의 신학을 계승받은 장자교단이라고 자랑을 한다. 교회 숫자가 많은 것이 장자교단인가?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16세기의 종교개혁의 정신을 그대로 실현시키는 데 가장 앞장선 교단이기에 장자교단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에 개혁신앙의 유산들을 고서(古書) 취급하고, 교회 현장에서 개혁교회의 교리들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붕어 없는 붕어빵과 같을 것이다.
2. 이단 예방 교육(계시록)의 실재
한동안 잠잠했던 신천지가 요즈음 다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각 교회에 ‘유인물’을 보내고 있다. 그 유인물에는 요한계시록과 관련된 내용들을 질문하고 있다. 필자는 본 교회에서 신천지와 이단들을 대처하기 위해서 문답식 계시록을 강의하고 있다. 그 실재를 목회자들에게 제시하고자 한다.
제1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계 1:1~3) 제1문] 성경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와 요한계시록 시대, 이렇게 삼 시대로 나누어지는가요? 답] 아닙니다. 성경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로만 나눕니다. 사이비 집단들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와 요한계시록(종말시대) 시대로 나눕니다. 소위 삼 시대를 주장하여 구약은 여호와가 신약은 예수가 계시록 시대(종말)는 교주가 구원자 역할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은 언약을 두 시대로만 나누어서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으로만 구분합니다. 구약을 옛 언약이라고 말하고 신약을 새 언약이라고 말합니다.(히 1:1~2)
제2문] 요한계시록은 시대마다 나타난 어떤 사람(교주들)이 성령으로 받은 계시인가요? 답]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계 1:1) 계시(revelation)라는 말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 보여 준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인간들이 알 수 없었고, 알려지지도 않았던 구원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신자들에게 알려집니다. 요한계시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하는 것은 계시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도 있고, 계시의 주된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계시록은 사이비 교주들이 받은 계시가 아닙니다.
제3문] 요한계시록을 단순하게 계시라고 말하지 않고 다양하게 표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그것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어느 한 편으로만 오해하지 않게 하려고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계 1:2) 즉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자기가 본 것”이라는 관점을 종합적으로 표현함으로 요한계시록의 본 뜻을 왜곡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2과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배경(계 1:4~8) 제4문] 요한계시록은 이 말씀이 기록된 당시의 배경을 무시하고 오늘날 사이비교주가 설정한 거짓 시나리오에 맞추어서 해석해야 합니까? 답] 아닙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주신 말씀(계시)이지만 시대마다 믿음의 사람을 기록자로 삼으셨기에 자연스럽게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육하원칙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기록한 시간과 장소가 있고, 기록자가 있고, 계시록의 내용이 있고, 글의 형식(편지)이 있고, 기록목적이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알아야 요한계시록이 주는 메시지를 바르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3과 계시록의 수와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계 1:4~8) 제5문]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육육육, 십사만사천, 천 년 등의 숫자가 나옵니다. 이 숫자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데 문자적 해석이 옳은 것인가요? 답]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숫자는 대부분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은 절대(절대자)를 상징하고(17:17), 2는 증인의 진실성을 상징하고(11:3), 3은 삼위 하나님을 상징하고, 4는 동서남북 사방을 상징하고(7:1), 6은 불완전한 인간의 수를 상징하고(13:18), 7은 완전 수를 상징하고(1:4), 10은 만수(滿數)를 상징하고(12:3; 17:3), 12는 하나님의 선택과 섭리를 상징합니다.(21:12) 대체적으로 사이비(似而非) 집단들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수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이단(異端)들은 14만4000을 문자적으로 풀고 14만4000이 차면 지상천국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14만4000은 언약 백성 전체를 의미하는 상징적인 수(數)입니다.
● 맺는 글
지면의 한계 때문에 계시록 문답 공부의 실재를 더 제시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필자의 교회에서는 상당한 부분을 문답식으로 공부가 진행되었다. 전국에 있는 목회자들에게 문답식 요한계시록을 1~2주 집중적으로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난무한 이단들의 도전, 코로나19의 재앙, 사회적 지탄 등으로 한국기독교는 혼돈의 터널에 갇혀 있는 듯하다. 터널은 빨리 빠져 나가야 한다. 그러하려면 강단이 본래의 자리로 회복되어야 한다. 강단을 희화화 시키고, 설교를 코미디 수준으로 만들어 버린 목사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우리교단 헌법(예배모범 제6장 1~3항)에는 목사가 어떻게 설교를 해야 하는가를 잘 명시하고 있다. 부디 순전한 복음을 증거함으로 이단을 물리치고 세속주의를 걷어냄으로써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교단의 교회들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동안 졸필을 읽어주시고 격려와 조언을 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문서 선교의 사명을 다하는 <기독신문> 모든 관계자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끝>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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