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핵심으로서의 그 가치와 불변성
침례신학대학교 박홍규 교수(조직신학) 들어가는 말 21세기가 시작된 지도 이제 여섯 해를 지나고 있다. 그 동안 학자들은 다양하게 21세기를 이해하기 위한 학문적인 노력을 해왔고 복음주의 신학회에서도 나름대로 21세기의 정황 속에서 복음을 어떻게 전하고, 선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한 물음을 지속적으로 물어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은 21세기 정황 속에서 우리가 복음을 “어떻게” 전하는가 하는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 “어떤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복음주의 학자들은 서로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크게 볼 때 동일하다는 전제아래 모여 있다. 우리는 모두 비록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을 지라도 크게 볼 때 한 복음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고, 그 복음의 내용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변할지라도 바뀔 수 없는 고귀한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우리가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는 복음의 내용을 다시 점검하고 그것을 우리의 삶의 정황에 맞도록 표현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본고에서 필자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라는 문제보다는, 어떤 복음을 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변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변함없이 가르쳐주고, 우리가 오랜 역사를 통해 신앙의 선배들에게서 물려받은 복음의 핵심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John Calvin)은 “회개와 죄의 용서”가 복음의 전체라고 주장하였다. 청교도 신학자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는 복음은 “회개를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청교도 신학자들은 또한 복음의 핵심으로서 회개와 믿음을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회심(conversion)”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이름으로 자신들을 영성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문제로 다루었다. 그러나 이 단순한 복음이 오늘날 그다지 우리의 목회현장에서 담대하게 선포되고 있지 않은 듯하다. 오늘날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는가에 쏠려있다. 이러한 풍조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동안 강화되면 강화되었지 결코 약화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시대의 풍조 속에서 회개하고 예수 믿어야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복음의 선포는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더 설득력있는 복음은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얼마나 인생 살기에 각박하고 힘이 드십니까? 여기에 당신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라는 식의 메시지가 더 효과적인 것 같다. 물론 복음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상황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포기할 수도, 포기하지도 말아야할 중요한 복음의 핵심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19세기 침례교 목사였던 찰스 해돈 스펄젼(Charles Haddon Spurgeon)은 이 단순한 복음이 수천마디의 말이나 미사여구보다 사람들을 더 능력있게 변화시킨다고 주장했다. 그는 복음의 능력을 그것의 단순성(simplicity)에서 찾았다. 물론 복음은 성경의 다양한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상황에 맞게 다양하게 해석되고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면면에 흐르는 핵심으로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단순한 복음의 사실은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능력이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소위 복음적이라는 교회에서 조차 이 단순한 복음이 얼마나 선명하게 선포되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반성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우리가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복음의 핵심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복음의 핵심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타협하지 않고, 풍성하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 적용시켜 전파하느냐에 따라 심지어 교회의 존폐여부가 달려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회개와 믿음 - 복음의 핵심 그렇다면, 우리는 왜 “회개하고 예수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단순한 복음을 아무리 시대와 상황이 변해도 포기하지 않고 전해야 할까? 그 이유는 바로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신앙의 선배들이 전했던 복음의 핵심이었을 뿐 아니라,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에서 한 사람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번연의 글에서 주인공인 기독도는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울며 두려워 떨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내가 어찌하여야 하는가?”하고 탄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탄식은 여러 날 계속되고 그는 이런 과정에서 복음전도자를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을 받게 된다. 그는 전도자의 가르침에 따라 그 문으로 들어가게 되고 마침내 갈보리 언덕에서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비로소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 받게 된다. 그리고 그는 영원한 천국을 향한 신앙의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기독도의 모습에서 번연이 회개와 믿음을 인간의 실존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수단이요, 길로서 설정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청교도 신학자요 청교도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존 오웬(John Owen)은 자신의 칭의론에서 하나님과의 화해와 하나님으로부터의 용납의 수단인 칭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그들은 실질적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배교했으며, 자신들의 본성과 삶이 악하며, 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심판이 가져오는 무서운 결과에 대해 느끼면서” 어찌하여야 이 곤경에서 벗어나 수 있는 지 탄식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수단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갈망하게 되고”, “양심에 상처 입은 죄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확실한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인지를 부지런히 찾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칭의의 유일한 근거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고 죄의 용서를 얻게 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오웬의 논의에서 칭의의 대상이 자신의 죄와 처한 위험한 상태를 깨닫고 탄식하며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사람이라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사실 이러한 번연과 오웬의 구원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회개와 믿음 혹은 회심에 대한 이해는 성경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요한이 전한 첫 번째 메시지와 예수님이 전한 첫 번째 메시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다. 그는 당시 유대인들을 향해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쳤다(마 3:8). 이러한 요한의 외침은 메시아인 그리스도의 도래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에게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오실 메시아를 정결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요한의 침례(세례)와 더불어 자신의 3년간의 공적인 삶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놀랍게도 요한과 마찬가지로 “회개하라”는 말로 자신의 말씀을 시작하셨다(마 4:17). 요한의 회개는 그리스도의 도래를 준비하는 것이었던 반면에, 그리스도의 회개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누구나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라고 하는 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천국의 주인이요 왕이신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와 구주로 받아들여야 한다. 회개와 믿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유일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에서 베드로가 설교의 핵심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베드로의 설교에 마음이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탄식했으며, 이에 베드로는 담대하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외쳤다(행 2:37-38). 그리고 그는 이 약속은 “너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39절). 베드로가 말하는 이 약속의 대상은 당시 설교를 듣는 사람들과 그의 자녀들뿐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회개와 믿음의 복음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고, 시대가 바뀐다고 변하지 않고 여전히 선포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이어서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외쳤다(41절). 그리고 그의 말을 받은 사람들이 침례(세례)를 받았는데, 그 수가 삼천 명이나 되었다고 사도행전 기자는 기록하고 있다(42절).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리고 약 14년이 지난 후에 안디옥에서 사역을 하던 바나바의 부름을 받아 그의 동역자가 된다. 그리고 바울은 약 14년 동안 로마제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요 선교사요 목회자로서 활동을 했다. 그렇다면 그가 전했던 복음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것을 바울이 자신의 3차 전도여행을 마치면서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놓고 선교보고를 하는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그 동안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했다고 고백을 했다(행 20:21).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사역기간 동안 전한 복음의 핵심이 바로 회개와 믿음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 - 존재의 물음에 대한 해답 여기에서 우리는 회개와 믿음이 신앙의 선배들과 성경의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겨준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할 때, 그 단순한 내용이 그토록 능력이 있는 이유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제시할 수 있지만, 그 저변에 흐르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답하라면, 그것은 회개와 믿음이 우리의 존재의 물음에 대한 궁극적인 답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나 인간이 떨쳐버릴 수 없는 근본적인 물음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의 물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의 물음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행위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되어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바뀌어도 우리는 여전히 존재와 행위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됨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목마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과연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 복음적인 기독교가 제시하고 있는 답은 너무 단순하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복잡하고 심오한 존재의 대한 물음을 심각하게 묻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대답은 어리석은 대답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전도의 미련한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의 핵심이요, 인간의 존재의 문제와 심지어 행위의 문제까지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사실 회개와 믿음은 비록 단순한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지만, 복음적인 기독교가 제시하고 있는 신학의 핵심이다. 우리는 회개와 믿음이라는 수단을 통하지 않고는 나와 우리의 존재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회개와 믿음에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회개와 믿음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고, 인간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회개와 믿음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함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사실도,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도,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사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흥미롭게도 칼빈은 자신의 책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권 1장 1절에서 이 땅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참된 지식을 두 가지로 나누고,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다른 하나는 인간을 아는 지식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그는 이 두 가지 지식은 서로 떼래야 뗄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 때 비로소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를 아는 것에 선행해야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그의 논의는 이렇다. 피조물인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마침내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인지 알게 되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 놓으신 그리스도께로 우리 자신을 맡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청교도 신학자였던 번연의 논의도 다르지 않다. 그는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처해있는 심각한 상태와 십자가에서 달리신 그리스도의 보혈 이외에는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우리 자신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 구원에 이르는 길로서 회개와 믿음의 문제는 하나님이 누구이며, 우리는 누구인가와 같은 존재론적인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우리는, 아니 나는 누구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지 않은 채 회개, 믿음, 구원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와 믿음과 관련된 우리의 물음은 끊임없이 하나님은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가 하는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바울이 회개를 “하나님께 대한 회개”로, 믿음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그 대상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데서 발견할 수 있다. 회개는 단순히 막연한 후회나, 두려움이나, 탄식이나, 결단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회개이다. 회개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야 한다. 또한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은 막연한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인정이나, 동의가 아니다. 그것은 믿음의 대상으로서 구속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청교도 신학자였던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가 지적했듯이,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무지에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바뀌는 과정이다. 회개와 믿음은 창조주요, 섭리주요, 구속주로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지식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도록 하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신뢰하도록 하는 것이다.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죄 사함을 받는다는 복음적인 기독교의 단순한 복음이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변해도 효력이 있고 능력이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존재의 물음과 더불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행위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핵심적인 답변이기 때문이다. 회개와 믿음 - 인격과 삶의 변화 복음적인 기독교적 인간관의 특징을 두 단어로 요약한다면 인간은 인격적 피조물이며, 죄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함을 받은 인격적 피조물이다. 그런데 인간은 인격적 피조물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화해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분리된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 회개와 믿음이라는 강을 건너야 한다는 것이다. 회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이라면, 믿음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 우리의 상실된 인격과 삶을 회복하고, 믿음을 통해 우리와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화해한다. 회개와 믿음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특징은 인격적(personal)이며 삶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회개와 믿음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한 인격의 변화와 회복을 수반하는 사건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의 왜곡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이 되고, 우리의 삶은 변화되게 된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회개와 믿음의 가치가 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그 누구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격의 변화와 삶의 변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17세기 청교도 신학자 조셉 알라인(Joseph Alleine)은 회심(conversion)의 문제를 다룬 자신의 책 “천국에 이르는 확실한 안내(A Sure Guide to Heaven)”에서 회심을 인격적인 변화의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회심의 저자를 성령으로, 회심의 원인을 내적으로는 오직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중보로, 회심의 도구를 인격적인 차원에서는 말씀의 사역으로, 실질적인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심의 목적을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회심의 대상을 택한 죄인으로 서술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회심의 본성에서 그는 회심을 사람의 지적인 측면과 의지적인 측면과 감정적인 차원에서의 전인격적인 변화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회심에서 사람은 지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죄인으로서의 처절한 모습과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의 가치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며, 무뎌있던 의지가 바뀌어 자신을 죄악된 모습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며, 왜곡되었던 감정들이 바로 잡히고 바뀌어서 이 세상의 것을 싫어하고 하늘의 것을 좋아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격의 변화는 새 사람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한다. 한 마디로 회심은 인격의 변화이며, 결과적으로 그것을 통해 삶이 변화되는 것이다. 또 다른 청교도 신학자인 백스터는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어떤 신학자들보다도 회심과 관련된 글을 많이 남겼다. 그는 자신의 “회심에 대한 논문(A Treatise on Conversion)”에서 회심의 근원적 원인을 성령으로, 회심의 도구적 원인을 그리스도의 교리로, 회심의 대상을 사람으로, 회심의 내용을 피조물과 죄에서부터 돌이켜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것의 행위를 회개와 믿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특히 그는 회심의 본성과 관련하여 사람이 지성과 의지 혹은 마음과 삶이라는 차원에서 살펴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회심은 지적인 차원에서 구원하는 진리(saving truth), 곧 복음에 대한 무지에서 앎으로 바뀌는 것이며, 복음에 대해 주의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았던 상태에서 복음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며, 복음에 대한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바뀌는 것이며, 하나님과 그의 길과 구원의 방법에 대해 잘못 가졌던 생각에서 올바른 생각으로 바뀌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의지 혹은 마음과 관련하여 회심은 전에는 싫어했던 것을 좋아하게 되고, 전에는 좋아했던 것을 싫어하게 되며, 전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잘못 가졌던 목적을 수정하여 올바른 목적을 가지게 되며, 목적을 이루는 수단에 있어서도 전에 거절했던 것을 선택하고, 전에 선택했던 것을 거절하게 되며, 구원에 이르는 수단을 올바로 선택하게 되며, 사랑과 미움, 열망과 혐오, 즐거움과 슬픔, 희망과 절망, 용기와 두려움, 분노, 만족과 불만족과 같은 감정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오게 되며, 이러한 지적이며, 의지적이며, 감정적인 차원에서의 변화는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고 백스터는 지적한다. 우리는 이러한 회심에 대한 백스터의 이해에서 그가 회심을 인격과 삶의 변화의 문제로 알라인과 마찬가지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결국 회개와 믿음은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과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길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청교도 신학자들이 회개와 믿음의 문제를 인격적이며, 삶의 변화로 보았다는 것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쉽게 회개와 믿음의 문제를 비인격적인 맹목이나 혹은 삶과 분리된 종교적 행위로 취급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핵심으로서, 존재의 물음에 대한 유일한 기독교적 답으로서의 회개와 믿음은 그것인 단순히 지적인 앎이나, 감정적인 토로나, 맹목적인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인격의 변화이고 삶의 변화이다. 다시 말해서 회개와 믿음 존재의 물음에 대한 지적인 답변을 줄뿐 아니라, 존재의 변화 자체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존재의 물음에 대한 복음적인 기독교적 답변의 가치와 능력이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회개와 믿음의 정의에서도 보다 구체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회개 - 하나님께로 돌아감 회개와 믿음이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그 가치가 변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회개와 믿음은 진정으로 우리의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는 수단일 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해시키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한다. 성경은 이것 이외에 다른 어떤 길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이 사실은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바뀌어도 바뀔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회개와 믿음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먼저 회개와 관련해서 칼빈은 회개를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보고 있다. 첫째로, 회개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로 진정으로 돌아가는 것(turning)”이다. 우리는 회개할 때 거짓이 아니라 “진정으로”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본래 회개라는 단어가 의미하듯이 “돌아가는 것”이다. “돌아간다”는 말을 칼빈은 “전환(conversion)” 혹은 “귀환(return)”이라는 의미의 히브리 단어와 “마음 혹은 의도의 변화”를 의미하는 헬라어의 단어에서 찾고 있다. 그는 우리는 회개할 때 우리의 “마음”과 “영혼”과 “삶”이 돌아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삶 혹은 생명의 돌이킴은 “단순히 외적인 행위뿐 아니라, 영혼 그 자체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칼빈이 이해하는 회개는 생명의 변화, 곧 영혼의 변화와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 다음으로, 회개는 하나님을 순수하고 진지하게 두려워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의 죄와 그에 대한 심판에서부터 나온다. 그는 “우리가 날카롭게 찔리지 않으면, 우리의 육의 태만은 고쳐지지 않는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지팡이로 더 깊이 찌르지 않으셨다면 이러한 찔림은 목석같이 둔한 우리의 육에 아무런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칼빈에게 있어서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와 그것의 표현으로서 율법에 대한 분명한 지식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회개는 죽임(mortification)과 살림(vivification)이라는 두 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죽인다는 것은 육을 죽인다는 것이며, 살린다는 것은 영을 살린다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육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리의 본성으로 회개를 위해서 부정이 되어야 한다. 영을 살린다고 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감동시켜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부정을 통해서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죽이고, 하나님을 향해 사는 새로운 삶으로 바뀐다. 이러한 의미에서 칼빈은 회개를 중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는 회개를 단순히 외적인 전향이 아니라 영혼의 변화, 곧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으로 이해한다. 그에게 있어서 회개는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칼빈의 회개에 대한 이해에서 그가 제시하고 있는 회개는 단순히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변화일 뿐 아니라,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퍼킨스는 회개를 “자신의 모든 죄에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합당한 삶의 변화와 열매들을 맺히도록 하는 거룩한 슬픔에서부터 일어나는 은혜의 사역”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회개를 먼저 “은혜의 사역”이라고 지칭한다. 그가 이것을 은혜의 사역이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오직 은혜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만이 회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은혜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만이 회개를 할 수 있는 이유를 그는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로, 어떤 사람도 먼저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는데,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려면 먼저 거룩하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먼저 성령을 통해 변화되지 않고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없다. 둘째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에 의해서 돌이킴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돌이키지 아니하고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없다. 이러한 퍼킨스의 주장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변화시키는 중생의 역사를 베풀지 아니하고는 우리에게 참된 회개도 믿음도 있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부패했다는 그의 인간관에 따른 것이다. 그는 “중생은 나무표피 밑에 숨겨져 있는 수액과 같으며”, “회개는 꽃이 피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히기 전에 재빠르게 자신을 보여주는 새싹과 같다.”고 지적한다. 더 나아가서, 퍼킨스는 회개는 “마음속의 거룩한 슬픔(godly sorrow)”에서부터 나온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에 대한 근거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회개를 이루게 하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는 고린도후서 7장 10절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바로 그가 말하는 거룩한 슬픔이다. 그것은 세상적인 근심 혹은 슬픔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세상적인 근심 혹은 슬픔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건강이나 명예나 이름이나 재산과 같은 것을 잃었을 때 가지는 근심이나 슬픔인 반면에, 거룩한 슬픔 혹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어떤 것을 죄이기 때문에 죄로 여겨 슬퍼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사랑이시며, 자비이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 범죄한 것에 대해 겸비하는 것이며, 자신들의 죄로 인해서 무릎을 꿇는 것이다. 또한 퍼킨스는 칼빈과 마찬가지로 회개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것”임을 더한다. 그는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것을 죄로 인하여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회개는 “영혼의 본질이나 기능을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없애거나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부패를 제거하여 바로 잡아주고 수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자연적인 기능들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잘못을 바로 잡아줌으로써 그것들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퍼킨스에 따르면 회개는 또한 “모든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한 가지 죄에서 벗어나서 다른 죄를 범하는 것은 거짓된 회개이다. “참으로 회개한 사람은 모든 죄에서부터 돌이켜서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마지막으로, 퍼킨스는 회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서 삶의 변화가 있을 때에 신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회개한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손수 심으신 의의 나무들이며, 성소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물가에 자라는 나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열매를 맺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 하나님의 심판의 도끼에 잘릴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편 퍼킨스는 회개를 “죽이는 것(mortification)”과 “새로운 삶으로 일어나는 것(rising to newness to life”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해는 회개를 죽이는 것과 살리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칼빈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는 죽이는 것을 회개의 첫 번째 부분으로 간주하고, 그것은 죄에서부터 돌이키는 것과 관련해서 생각한다. 회개는 우리가 범하는 모든 실질적인 죄를 피할 뿐 아니라, 죄를 짓도록 하는 본성의 부패를 약화시키고 억눌러서 죄에서부터 돌이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환자를 수술할 때 아픈 부위를 마취시키고, 그 이후에 병든 부위를 잘라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렇게 죄를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죽여서 죄로부터 돌이키도록 하는 데는 세 가지 부분들이 있다. 먼저, 이성은 모든 죄에서부터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다음으로 의지는 이를 행하려는 경향을 소유하게 되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삶과 대화에서 노력으로 나타나게 된다. 다음으로 퍼킨스는 새로운 삶으로 일어나는 것을 회개의 두 번째 부분으로 여기면서,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신실하게 순종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이것 또한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이성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목적을 가지게 되고, 다음으로 의지는 이를 행하려는 경향이나 열망을 가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삶과 대화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노력이 따라 나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한 죄인은 자신이 율법을 순종함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퍼킨스는 더 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노력해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벽하신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에 의해 성취된 의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회개에 대한 퍼킨스의 이해에서 역시 회개는 우리의 인격과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리는 또한 회개와 관련해서 영국 청교도 신학자였던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에게서도 동일한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먼저 회개를 “죄인이 내면적으로 겸손해지고 가시적으로 개혁이 되도록 하는 성령의 은혜”로 정의한다. 그리고 난 후 그는 회개를 반드시 있어야 할 여섯 단계로 나누어 상세히 그것의 의미를 설명하는데, 그 중 어느 것 하라도 빠지면 회개는 효력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회개를 매우 쉽게 생각하거나, 혹은 회개 그 자체를 요청하기를 꺼려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다. 왓슨이 제시하는 회개의 첫 단계는 죄를 발견하는 것이다. 죄가 무엇인지, 그 죄와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자신이 죄인인지 아닌지 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회개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에 따르면 눈은 보는 것과 우는 것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한다. 그런데 보지 못한다면 울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죄에 대해 슬퍼하기 전에 먼저 죄를 발견해야 한다. 두 번째로, 죄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회개는 아니다. 얼마든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도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발견했다면, 그 죄에 대해 슬퍼해야 한다. 그렇다면 슬퍼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왓슨은 그것을 “영혼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결국 죄에 대해 슬퍼한다는 것은 십자의 못이 자기 옆구리에 박혀 있듯이 죄에 대해 아파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죄에 대한 슬픔을 아이를 낳기 위해 산통을 겪고 있는 산모에 비유한다. 세 번째 단계는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슬픔은 결렬한 감정으로 눈과 혀로 표출이 된다. 왓슨은 죄에 대한 고백을 일종의 자기 고발로 이해한다. 그것은 “내가 죄를 범하였다.”는 고백이다(삼하 24:17). 이러한 죄에 대한 고백은 양심의 가책에서부터 진심으로 나와야 한다. 네 번째로, 회개는 죄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슬퍼하고, 고백하면서 죄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하고 볼 수 없다. 집을 나갔던 아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자신이 아들이라고 불릴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눅 15:21). 회개에는 얼굴을 붉히는 것이 포함된다. 다섯 번째 단계는 죄에 대해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로 인해 우리 안에 있는 거룩과 온전함을 잃어 버렸다. 우리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왜곡되고 부패되었다. 그러므로 회개는 우리를 더럽히는 죄를 미워하고 혐오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 죄로부터, 모든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왓슨의 회개에 대한 이해에서 표현을 약간 차이가 있지만, 죽이고 살리는 것이라는 칼빈과 퍼킨스의 이해를 발견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왓슨은 죽이는 것과 관련하여 그 과정을 보다 세밀하게 제시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 다른 청교도 신학자인 번연에게도 거의 유사한 회개에 대한 이해를 발견할 수 있다. 번연은 회개를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마귀와 어두움에서부터 하나님께로, 하나님 안에 있는 선함과 은혜와 거룩을 돌아가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회개하라는 의미는 “자신의 모든 악에 대해서 자신을 혐오하고 싫어하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내가 나를 미워하고 티끌과 재를 무릅쓰고 회개 한다.”(욥 43:6)는 욥의 고백을 가장 대표적인 회개에 대한 고백으로 보았다. 그는 또한 참된 회개는 영혼에 과거의 죄의 혐오스러운 본성을 느끼도록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미래의 죄에 대해 거룩한 미움을 마음에 가득채운다고 말한다. 이러한 회개에 대한 그의 이해는 회개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일 뿐 아니라, 동시에 인격의 변화이며 삶의 변화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회개가 없는 구원, 그것은 인격과 삶의 변화가 없는 구원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우리는 포기할 수 없는 복음의 핵심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은 아무리 시대가 변하더라도 우리가 죄인인 한 회개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 우리가 놓칠 수 없는 복음주의 신학의 유산 중의 하나는 죄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소위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우리는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중보자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외에는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어떤 길도 없기 때문이다. 회개는 어떤 의미에서 믿음에서 나오지만, 믿음으로 인도하는 준비일 뿐이다. 앞에서 다루었듯이 회개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믿음은 그 하나님을 나의 주요 구세주로 굳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믿음의 사건에 의해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으며, 죄의 용서를 받게 되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된다. 우리가 만일 참으로 우리의 죄에 대해 회개했다면, 우리는 참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중보를 신뢰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와 구세주로 고백했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와 믿음 서로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회개가 인격과 삶의 변화이듯이 믿음 또한 진정으로 인격과 삶의 변화를 수반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믿음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칼빈은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에 기초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견고하고 분명한 지식이 성령을 통해 우리의 지성에 드러나고 우리의 마음에 인쳐진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에게 있어서 믿음은 맹목이나 무지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전제로 한다. 이것은 오늘날 진리에 대한 교리적 이해를 무시하려고하는 시대의 풍조에 경각심을 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가르침이 없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이 뿐 아니라, 칼빈에게 있어서 믿음은 성령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는 것에서 넘어서서 그 진리가 마음에 인쳐진 것이다. 마음에 인쳐졌다는 것은 그 진리가 이해(apprehension)를 넘어서서 신뢰(fiducia)요 확신(assurance)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칼빈에게 있어서 믿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인격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결국 마음의 변화요, 인격의 변화요,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수단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칼빈이 회개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전향으로 이해했던 것을 떠 올릴 필요가 있다. 회개가 성령의 역사를 통한 마음의 변화이듯이, 믿음 또한 성령의 역사를 통한 마음의 변화이다. 차이가 있다면 회개는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는 것이라면 믿음은 구속주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이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의 수단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돌이킴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께 자신을 맡길 수 있으며, 하나님께 자신을 맡긴다고 하면서 돌이킴이 없을 수 있는가?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아무리 진리가 혼탁해도 우리는 돌이킴과 신뢰라는 회개와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길로서 그 가치와 효력이 상실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은 청교도 신학자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발견할 수 있다. 퍼킨스는 믿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구원에 대한 약속과 이 약속과 관련된 모든 약속들을 붙잡도록 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선물”로 정의한다. 믿음은 곧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마음이 변화되어 구원의 약속을 붙잡는 것이다. 성령님은 먼저 우리로 하여금 지성을 통해 율법을 깨닫게 하시고 그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를 보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의와 영생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하신다. 그리고 난 다음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불태우셔서 우리의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어찌하여야 구원을 받을꼬?” 탄식하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구속을 붙잡도록 하시고, 우리의 마음에 인치셔서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화해와 구원을 확신하도록 하신다. 퍼킨스에게 있어서 믿음은 회개와 마찬가지로 마음과 인격의 변화이며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회개와 믿음에 대한 이해는 칼빈의 견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오웬은 믿음을 “복음에 약속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죄인들의 칭의와 구원의 방법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마음의 변화의 과정과 연결시켜서 설명한다. 먼저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인간의 이성은 자신이 처해있는 심각한 상태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자비와 은혜의 약속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이 약속에 신실하게 동의한다. 그리고 마음의 변화를 통해 이 구원의 방법을 신실하게 붙잡고 신뢰한다. 이 과정에는 의와 생명과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방법이외에 다른 모든 방법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계속해서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오웬의 믿음에 대한 이해에서 우리는 그 또한 칼빈과 퍼킨스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 그리스도예수에 대한 믿음을 구원의 유일한 수단으로 보고 있을 뿐 아니라, 회개와 더불어 믿음을 마음과 인격의 변화요 삶의 변화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왓슨은 참된 믿음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먼저, 믿음은 자신과 자신의 공로와 자신의 의를 버리는 것이다. 둘째는, 자신의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께 던지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속사역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셋째는,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이다. 약도 먹어야 효력이 나타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도 믿음으로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이렇게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께 자신에게 던지고, 그리스도를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믿음은 “은혜의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일어난다. 성령님께서는 죄인의 지성을 깨우치고, 의지를 정복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기꺼이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기도록 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결과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높이고, 우리의 양심을 정결케 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하며, 삶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한다. 우리는 이러한 왓슨의 믿음에 대한 정의와 믿음의 일어나는 과정과 결과에 대한 이해에서 그 또한 칼빈이나 퍼킨스, 오웬처럼 믿음을 구원의 유일한 방도로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며, 동시에 인격과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연은 믿음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를 붙잡은 은혜받은 영혼의 행위”라고 정의한다. 영혼이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영혼이 자신의 죄와 다가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며 슬피 울면서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붙잡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게 있어서 믿음은 자신이 “하나님의 칭의와 구원을 받기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는 데서부터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다.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사람의 지성과 의지와 감정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향해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죄인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번연은 그의 역작 「천로역정」에서 기독도가 십자가에서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오르막길에 오를 때까지 달려왔는데, 거기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고 조금 아래 밑바닥에는 무덤이 하나 있었다. 기독도가 십자가 가까이 나아가자 어깨에서 끈이 스스로 풀리더니 짐이 뚝 떨어져 무덤 문까지 데굴데굴 굴러 들어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기독도는 환희의 기쁨으로 뛰며 소리 질렀다. 그가 슬픔을 당하심으로 나에게 평안을 주었고, 그가 죽으심으로 내게 생명을 주셨도다. 그리고 그는 너무 기이하고 놀라와 잠시 서서 바라보았다.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했는데 그토록 쉽게 짐이 벗겨지다니. 그는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와 같은 번연의 믿음에 대한 이해에서 우리는 그가 믿음을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이해는 그의 회개에 대한 이해와 밀접히 관계가 있으며, 다른 청교도 신학자들의 견해와 동일한 것이었다. 나가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복음적인 기독교의 핵심적인 내용 중의 하나인 회개와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특히 필자는 회개와 믿음은 요한과 예수님과 사도들과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전했던 복음의 핵심이요, 존재의 물음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인격과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론적 변화의 길이요, 하나님을 향해 돌아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하나님과 화해하는 유일한 수단임을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의 성품이 바뀔 수 없듯이, 죄인이며 인격적 피조물로서의 우리의 모습이 바뀔 수 없다. 그리고 그 죄인이며 인격적인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것 이외에 다른 어떤 수단도 우리에게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복음조차도 시대와 정황에 따라 상황화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많다. 이러한 요구는 오늘날 교회 강단에서 하나님의 거룩과 죄에 대한 회개에 대한 설교의 약화를 가져오고 있다. 이러한 약화는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대한 강조 또한 자연스럽게 약화시키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참된 회개와 믿음은 오직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고려할 때, 오늘날 교회현장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21세기의 다양한 변화는 목회현장의 변화를 가져오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변화나 복음의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우리는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성경이 말하고 있고, 신앙의 선배들이 말한 회개하고 예수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핵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이 말한 전도의 미련한 것이 이 세상 어떤 지혜나 방식보다 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참고 문헌 Ames, Willi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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