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목양 자료들
(01) 고난 주간이란
(02) 고난주간 예수님의 생활 일람
(03) 고난주간 일주일 행적
(04) 가상칠언이란?
(05) 고난주간과 가상칠언
(06) 고난주간-그발자취를 따라-새끼나귀 타고 예루살렘 고난속으로
(07) 고난주간설교/십자가의 길/ 조성근목사
(08) 고난주간설교/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황영준목사
(09) 고난주간설교/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신 그리스도/조용목목사
(10) 고난주간설교/억지로 짊어진 십자가
(11) 고난찬송설교/왠 말인가 날 위하여
(01)
고난 주간 이란
1.시 기 - 사순절의 마지막 한 주에 해당하는 고난 주간은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신 종려 주일로부터 시작하여 부활 주일 전까지의 기간 즉, 주일에서부터 토요일까지를 말하다. 대속 사역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고난받으심을 기리는 사순절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서 대적들에게 잡혀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장사당하신, 성자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절정기인 고난 주간내에는 종려 주일, 세족 목요일, 성 금요일, 성 토요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희랍정교에서는 종려 주일 다음날인 월요일부터를 고난 주간으로 지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동,서로마 교회에서는 보편적으로 종려 주일부터를 고난 주간에 포함시켜 기념하고 있다.
2.의 미 - 주께서 3년간의 공생애 끝에 이제 스스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 위하여 나귀를 타시고 군중들의 환호속에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종려 주일로부터 주님이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신 부활 주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수난의 노고와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가 바로 고난 주간이다.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이었던 이 고난 주간에는 예루살렘 입성, 성전 숙청, 감람산 강화, 성만찬 제정,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체포와 심문, 십자가 처형과 장사 등 그야말로 예수 공생애의 절정을 이루는 사건이요 전 우주적 사건이기도 했던 대사건들이 숨막히게 전개 되었다. 이에 성도들은 주님의 사역의 모든 것이 응축적으로 담겨 있는 이 주간의 각 요일마다 그 요일에 있었던 사건들을 각각 기억하여 한 주간을 내내 엄숙한 절기로 보내게 된다.
'고난 주간'(Passion week) 또는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 등으로 불리는 고난 주간의 원래 명칭은 큰 주간, 즉 하나의 큰 일주일이라는 뜻의 '대주간'(Great week)이었다. 이 명칭은 동로마 교회의 고난 주간 행사를 기록한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 속에 언급되어 있으며, 서로마 교회에서도 이 주일을 대주간이라고 불렀다. 로마 교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 주간의 공식 명칭으로, 대주간을 의미하는 'Hebdomada Magna)' 또는 'Hebdomada Major' 등을 사용한다. 이러한 '대주간'이라는 명치은 12세기에 이미 보편화되어 각종 기독교 전례 문서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한 의로운 인간의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워진 구속(救贖)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 구속주가 당하신 전 우주적 고난이었다. 태초에 인간은 선악과를 두고 맺은 언약을 어기고 범죄했다. 그리하여 원래의 규정대로 죽어 영벌을 받아야 했다. 더욱이 하나님은 절대 거룩한 공의(公義)의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이 세운 법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Love)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단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공의의 원칙대로 처벌하시면서도 끝없는 사랑으로 죄를 지은 인간 자체에게는 구원받을 새로운 기회까지 주신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믿고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는 법을 궁극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대속 희생으로서의 고난이셨던 것이다.
한편 주님은 이런 구속의 법을 가장 처절한 사형수단이었던 십자가(the Cross)위에서 마침내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은 영육간의 처절한 고난을 통하여 성취하셨다. 고로 우리는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영광과 주권을 버리고 죄인을 구하기 위하여 수난(the Crucifixion)을 당하신 주님의 사역에 담긴 공의와 사랑을 마음 속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창 3:15; 사 53:1-12).
3.유 래 - 사순절은 부활절에 있을 성만찬과 세례식을 준비하기 위한 기간으로 교회 성립 초기부터 행해졌었다(사순절, 2.유래 참조). 고난 주간은 이 사순절 절기 내에 포함된 절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겪으신 고난을 생각하며 지내는 주간이다.
이러한 고난 주간이 언제부터 지켜지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롬 6:3-5, 고전 11:23-26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가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난 주간이 전교인의 공식적인 절기로 공개적으로 지켜진 것은 A.D.313년 콘스타티누스 대제의 신앙 자유령이 포고된 이후였다.
그 밖에 고난 주간과 관련된 오래된 자료로는 에게리아(Egeria)가 집필한 순례집이 있다. 이는 385년 경의 자료로 다양한 절기와 그 전례의식을 수록하고 있으며, 수난절 기간에 포함된 절기로서의 고난 주간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고난 주간을 대주간(大主間)이란 명칭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동로마 교회의 하나임 에루살렘 교회에서는 부활 주일 전인 고난 주간 기간에 종려 주일 행진과 같은 엄숙한 경축 행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책이 집필될 당시인 4세기까지 어러한 동로마 교회의 풍습은 서로마 교회에는 생소한 것이었으나, 5세기 이후에 서방 교회에도 유입되기 시작했다.
고난 주간의 금식은 동,서방 교회에서 모두 행해졌는데, 고난 주간의 금식은 다른 절기 때의 금식보다 더 엄격하게 행해졌다. 그러나 사순절에서도 이미 언급된 바 있듯이 금식 기간과 정도는 교회마다 일정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일주일 내내 금식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4일이나 3일 혹은 성 금요일과 성 토요일 2일만 금식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밖에도 고난 주간에는 철야 기도회, 세족식과 성만찬등 많은 기념 행사들이 진행되었다. 또한 인간적 유희를 목적으로 한 모든 오락이 금지되었다(사순절, 2. 유래 참조).
중세에 있어 고난 주간의 금식을 비롯한 여러 의식들은 교회의 중요한 행사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은 이러한 의식들은 형식화되어 그 본래의 의미에 대해서는 소홀해졌다. 이러한 연유로 1517년 루터의 종교 개혁 후 많은 형식적인 종교 행사들이 폐지되었는데, 이때 고난 주간의 많은 행사들도 축소, 혹은 폐지되었다. 이는 루터가 카톨릭 교회에 몸담고 있을 당시 깨달은 교회 의식과 관련된 많은 악영향을 근절하기 위한 조처의 하나였다. 이러한 의식의 축소화, 또는 폐지로 인해 루터가 살았던 비텐베르그에서는 일찍부터 고난 주간과 관련된 풍습이 사라졌었다. 그러나 예식에 대한 단호한 폐지와 축소에도 불구하고 종교 개혁 후 20여년간은 고난 주간 행사가 통일되지 않은 여러 형태로 계속 지켜졌다.
한편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고난 주간 절기를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과거의 고난 주간 의식은 거의 행하지 않고 있다. 단지 몇몇 교파에서 성 금요일에 특별 예배 등을 드리고 있을 뿐이다.
(02) 고난주간 예수님의 생활 일람
일요일
예수가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 입성(마 21 : 1 - 11, 막 11 : 1 - 11).
월요일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마 21. 18 - 19, 막 11 : 12 - 14).
(세금의 질문에 설명) 성전 청결케 함(마 21 : 12 - 13, 막 11 : 15 - 19).
화요일
무화과나무 마름(마 21 : 19 - 22, 막 11 : 20 - 25).
제사장 바리새인의 질문(막 11 : 27 - 33, 눅 20 : 1 - 8).
경고의 세 가지 비유, 포도원 비유(마 21 : 28 - 22 : 14, 막 12 : 1 - 12).
바리새인과 헤롯 왕이 예수께 질문(마 22 : 15 - 40).
메시야에 대한 예수의 질문(눅 20 : 41 - 44).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책망(막 12 : 38 - 40).
과부연보에 대하여 칭찬함(막 12 : 41 - 44, 눅 21 : 1 - 4)
유대인이 예수를 배척함. 예루살렘 멸망과 말세를 예언함(눅 21 : 5 - 38, 요 12 : 37 - 50).
수요일
예수가 밤마다 베다니에 나가시니 이 날은 거기서 기도했을 것임.(성경에 수요일은 기록이 없음.)
목요일
최후 성만찬, 예수 그리스도의 고별사(마 26 : 31 - 35, 막 14 : 12 - 26, 눅 22 : 31 - 38).
금요일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반역과 예수의 포박(마 26 : 36 - 47, 막 14 : 32 - 52).
안나스와 가야바의 심문(막 14 : 53 - 72, 요 18 : 13 - 27).
빌라도의 심문(마 27 : 2 - 11, 31, 요 18 : 13 - 29).
십자가의 고난(마 27 : 32 - 56, 눅 23 : 26 - 45).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장사함(마27 : 57 - 61, 막 15 : 43-47).
토요일
무덤을 파수군이 굳게 지킴(마 27 : 62 - 66).
일요일
부활의 새벽(마 28 : 1 - 10, 막 16 : 1 - 17).
파수군이 부활의 사건을 제사장에게 보고(마 28 : 11 - 15, 눅 24 : 13 - 35).
엠마오 도상의 예수(눅 24 : 13 - 35).
도마와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 나타남(막 16 : 14, 요 20 : 19 - 25).
(03)
고난주간 일주일 행적
I. 주일
*예루살렘에서의 승리의 입성(마21:1-11, 막11:1-11, 눅19:29-44, 요12:12-19)
주님의 고난은 예루살렘의 입성과 함께 시작된다. 유월절을 며칠 앞두고 예루살렘의 거리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유월절 양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구해온 어린양을 타고 감람산 쪽에서 들어 오셨다. 전에 갈릴리에 계실 때에 그의 교훈을 듣고 도움을 받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떡을 얻어 먹었던 사람들은 이 기회에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호산나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승리의 표시인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예수님을 호위하고 어떤 사람들은 옷을 벗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가에 펴기도 하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며 외치었다. 예루살렘의 거리는 예수님의 입성으로 진동하였다.
예수님은 스가랴 9:9에 있는 말씀대로 왕으로 그의 도성에 입성하신 것이다. 그러나 군중이 원하는 왕과 예수님의 왕되심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군중들은 제한된 한 민족의 왕, 육체의 왕(로마의 압제에서 해방과 빵문제를 해결)으로 생각하였으나 예수님의 왕되심은 우주의 왕이요, 영원한 왕으로 입성하신 것이다.
II. 월요일
*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 (마 21:18-20,막11:12-14,20,21)
성밖 베다니에서 하루 저녁을 쉬신 예수님은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향하시었다. 도중에 시장기를 느끼신 예수님을 때마침 길 가에 있는 무화과나무 밑으로 가셨다. 그러나 잎만 무성했지 열매를 얻을 수 없었다. 실망하신 예수님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다.
* 성전을 정결케 하시다(마 21:12,13,막11:15-17,눅19:45,46)
성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을 그 길로 곧 성전에 가시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사람들이 돈을 바꾸고 짐승을 파느라고 소란한 것을 보셨다. 채찍을 들지 않을수 없으셨다. 짐승을 내몰고 장사하는 사람을 내 쫒았다. 돈 바꾸는 상도 뒤집어 엎으셨다. 그리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고 꾸짖으셨다. 그러나 책망을 듣는 자들의 눈길은 회개의 빛대신에 시기와 원망의 눈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어디 두고 보자”식의 노기였다. 예수님은 해가 저물어 전과 같이 쉬시기 위하여 성 밖으로 나가셨다.
III. 화요일
* 무화과나무의 교훈을 하시다 (막 11:20)
그 이튿날 제자들은 성으로 들어오는 도중 놀라운 것을 보았다. 어제 예수님께로 저주를 받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말라 죽었다. 성급한 베드로는 놀라운 얼굴로 “선생님,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하면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믿음의 교훈을 해 주시었다.
* 성전 안에서 힐란을 받으시다(마21:23-27,막 11:27-33,눅20:1-8)
성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어제의 그 성전으로 가시었다. 책망을 듣고 회개할 줄 모르는 서기관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힐란한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시기에 찬 질문이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는 무지에 찬 질문이었다. 예수님은 이들의 악함을 안타까이 여기시고 여러가지 비유로 저들을 깨우치려 말씀하셨다.
말 안 듣는 맏아들의 비유(마 21:28-32),
사악한 농부의 비유(마 21:33-41,마12:1-9,눅20:9-16),
왕자의 잔치를 거절한 악한 사람들의 소행(마22:1-14)등을 말씀하시었다.
그러나 저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질문을 하였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까,불가하니이까”
“부활때 일곱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어떻게 해서든지 넘어뜨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운 지혜로 답변하시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에수님은 말세에 되어질 일들(마 24장,막13장, 눅21장)과 주의 재림의 때에 되어질 일들(마25장)을 교훈하여 주시었다.
IV. 수요일
* 유다가 배반하다(마 26:14-16,막14:110,111,눅22:1-6)
예수님은 아직 성밖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고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교훈하고 계실 때 한편 성안 가야바 대제사장 아문에서는 예수님을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자중 하나인 가룟유다는 제자들 사애에서 빠져 나와 대제사장의 회의장으로 달려가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협상한다. 제사장들은 기회가 왔다는 듯이 은 30을 달아 가룟 유다에게 주었다. 유다는 이때부터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를 노리고 있게 된다.
V. 목요일
* 제자들의 발의 씻기다(요13:1-17)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되었다. 저녁이 되자 예수님을 제자들이 미리 준비한 성내의 한 여성도의 집 이층 다락방으로 가시었다. 거기에는 유대인의 법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누룩없는 떡과 포도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상가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하셧다. 식사를 하시던 예수님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 오시어 그 물로 제자들의 발을 하나 하나 씻기기 시작하셨다.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다. 베드로의 차례가 왔을때 베드로는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리이다” 그때에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답하시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겸손에 대하여 교훈해 주시었다.
* 반역자를 지목하시다(마26:21-25,막14:18-21,눅22:21-23,요13:21-30)
예수님은 “서로 발을 씻기라”는 말씀을 하신 후에 심히 민망한 표정으로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여 누구오니이까?”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하시며 가룟 유다에게 떡을 주셨다. 이 말을 들은 가룟 유다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나가 버렸다. 자기의 할 일을 하기 위하여 나간 것이다. 이제 사단은 완전히 유다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이다.
* 마지막 만찬이 베풀어지다(마26:26-29,막14:22-25,눅22:19)
이와같은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저희 가운데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받아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다 이것을 마시라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첫번 성만찬식을 베풀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려 가노라”고 제자들을 위로하시었다.
*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다(마 26:36-46,막14:32-42,눅22:39-46,요18:1)
모든 말씀을 마치신 에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가셨다. 이 산 서쪽 기슭 아래에는 겟세마네라는 동산이 있었고 예수님은 이곳에서 최후의 고난의 쓴 잔을 마시기 위하여 기도하셨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있으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돌던질만한 거리로 나가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그의 이마에서는 피와 같은 땀이 떨어졌다.
VI. 금요일
* 예수님이 잡히시다.(마26:47-56,막14:43-52,눅22:47-53,요18: 3-13)
예수님은 기도중 대제사장이 보낸 사람들이 가까이 온 것을 느끼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때가 온 것을 환기시키고 있을때 무리들은 몽치와 검을 가지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가 있었다.
그가 예수님께 다가서더니 “랍비여 안녕하십니까?”하고 입을 맞추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을 넘겨주기 위한 군호의 간사한 입맞춤이었다. 이로써 예수님은 악당들에게 잡히셨고 제자들은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 심문을 받으시다(마26:57-27:26,30,막14:53,15:15,눅22:54,23:24,요18:13,19:1-6)
예수님을 잡아 결박한 유대인의 하속들은 먼저 예수님을 안나스와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끌고 갔다. 거기에는 이미 많은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모여 있었다. 저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고 있었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는 예수님 자신의 증거가 있을 때 저들은 분을 내며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렸다.
그러나 재판권이 없는 저들은 당시의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 갔다. 저들은 여러 말로 예수님을 고소하였으나 역시 죄를 찾지 못하였다. 빌라도는 저들이 시기하여 예수님을 자기에게 넘겨준 줄 알고 석방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저들의 소리는 한층 높아졌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의 자손에게 돌리소서” 저들은 너무도 무지하고 끔찍한 말을 한다. 빌라도는 민란이 날까하여 자기 신변을 위하여 의인을 죄인들에게 넘겨 주었다.
*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마27:31-53,막15:20-38,눅23:26-45,요19:16-30)
저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갖은 희롱을 다한 후에 예수님께 큰 십자가를 지워 골고다란 언덕으로 끌고 갔다. 십자가를 지고 힘이 없어 쓰러지면 저들은 채찍질한다. 그러나 말이 없으셨다. 양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함 같았다.
누구를 위한 채찍인가? 곧 예수님은 강도 두 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양손과 양발에 큰 못이 사정없이 들어갔다. 피가 이마에서 양손과 양발에서 흐른다. 너무도 고통스러운 장면이다. 누구를 위한 십자가인가?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 올지어다” 지금이라고 하늘에서 열 두영되는 천군 천사로 저들을 멸할 수 있으나 예수님은 “그같이 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겠는가”고 하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는 정오였으나 지상은 어두움으로 덮혀진다. 그것이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이 큰 소리로 외치셨다. 다시 한번 외치실 때는 성전 휘장이 둘로 갈라지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진다. 그리고 무덤들이 열리어 죽은 성도들이 일어났다. 예수님이 운명하신 것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백부장과 다른 로마군인들이 말하였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04)
가상칠언이란?
A.D. 33년 4월 초순 금요일 일기 화창한 어떤 봄날 예루살렘성 밖으로
세 사람의 십자가의 죽음 행렬이 엄숙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목적지는 히브리말로 골고다요, 아람어로 된 말을 해석하면 해골이란
동산인데 여기까지 와서 각자가 메고 온 십자가에 이 세 사람을 달았습니다.
그 중에 중앙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가상칠언
"이라고 합니다.
제 1언의 말씀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23:34)
예수님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입니다. 구약에는 아버지란 말이 없으나
예수님은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우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주기도문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도는 아버지가 두 분이십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은 사랑의 인격적 참여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게
될 때 내 모든 문제는 해결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① 죄 많은 여인의 죄를 속죄하여 주실 때 그는 구원을 받고 평안히 돌아갔습니다. (눅7:36-50)
② 중풍병자의 죄를 사죄하여 주실 때 곧 건강하여 졌습니다. (마9:1-8, 요5:14)
③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만 속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26:28)
2. 예수님은 원수들의 죄까지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모든 인간들을 위한 죽음 이셨습니다.
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눅23:34)
② 빌라도와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요19:6-23)
③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마26:15-69)
3. 우리에게도 용서하라고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①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골3:13)
② 주기도문에서 명령 하셨습니다. (마6:12) ③ 일흔 번씩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마18:21-22)
제 2언의 말씀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23:43)
우리는 양쪽에 달린 두 강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양쪽에 십자가에 달리고서도 그 죄를 깨닫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림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진심이면 얼마나 다행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면 비방하였다고 했습니다. 객관적이요, 비판적이요,
야욕적인 말이었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현재도 십자가를 신앙적으로, 주관적으로,
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강도처럼 비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지금도 강도처럼 죽어가면서도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비방하는 자가 많습니다. 고난과 십자가에서는
선한 말이 나오기 힘든 모양입니다만 중앙에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구세주임을 알았다면 구원을 호소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1. 예수님은 낙원의 주인이심을 의미합니다.
① 낙원을 예비하러 가셨습니다. (요14:1-6) ② 영원한 천국의 주인이십니다. (계22:1-6)
③ 하나님이 지으신 집은 세상의 집과는 다릅니다. (고후5:1-3)
2. 낙원에 제일 먼저 간 사람은 강도입니다.
① 회개와 기도함으로 낙원에 갔습니다 (눅23:41-42)
②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눅23:40)
③ 예수가 의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함으로 낙원에 갔습니다. (눅23:42)
3. 주님이 가시고 우리가 갈 낙원입니다.
① 거기서 세세토록 왕노릇 합니다. (계22:5) ② 세상 끝까지 함께 계십니다. (마28:20)
③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삽니다 (요14:3)
제 3언의 말씀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19:26-27)
세 번째 주님의 눈동자가 집중된 것은 여기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계신 곳입니다.
25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 네 여인이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울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부탁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격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게 되어
남편에게 송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제 예수님을 먼저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한없는 슬픔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친히 효도의 계명을 지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어려서는 부모님과 함께 성전에 예배하러 갔습니다. (눅2:41-51)
② 예수님이 효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엡6:1)
③ 십자가상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셨습니다. (요19:26-27)
2.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① 십계명 중에 인간에게 주신 첫 계명이 효도입니다. (출20:12)
② 고르반의 진리를 설명하셨습니다. (막7:11)
③ 효도하는 자에게 장수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신5:16)
3. 가상칠언중에 3언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산 교훈입니다.
① 부모님에게 순종을 해야 합니다. (마21:28-31)
② 부모는 타락과 실패의 자식이라도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눅15:11-24)
③ 스승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요, 성도는 주 안에서
한 형제요, 부모입니다. (막3:31)
제 4언의 말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27:46)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고뇌에서 비롯된 절규였습니다.
죄 없는 자가 정죄를 당하고 허물없는 자가 박해를 받으며 은혜 베푸는 자가
잔인하게 죽어가는 일이 역사상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홀로 지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시는 순간 주님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세 시간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주님은 세상에 대하여는 더 할 말씀이 없고 성경에 응하기 위한 말씀을
하실 뿐이었습니다. 이런 절규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
1. 예수님의 이 순간은
① 흑암의 권세가 잠깐 이기는 모습입니다 (마27:46)
② 하나님이 얼굴을 돌이키신 순간입니다 (시22:1)
③ 하나님과 인간의 담을 허시는 순간입니다. (엡2:14-18)
2. 4언의 산 교훈
① 버림받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십자가의 최고봉의 순간입니다. (딤전2:4)
② 죄인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다는 산 교훈입니다. (계21:8)
③ 예수님이 인간 대신 버림을 받으시는 순간입니다. --- (사53:4-6)
3. 엘리, 엘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요8:29)
② 예수님의 전폭을 하나님께 맡기시는 고백입니다. (대하20:20)
③ 충성과 봉사의 순종으로 끝까지 맡기시는 모습입니다. (사53:7)
제 5언의 말씀 : "내가 목마르다!" (요19:28)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입증하고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심은 곧 목마른 인생을
부르시는 뜻도 있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무슨 물을 마셔도 그 심한 갈증을 해소할 길
없으나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한 갈증을 해소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 : 1).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 13-14)
고 말씀하셨습니다.
1. 목마른 우리 인생을 위하여 주님이 목말라 주셨습니다.
① 우리의 심령이 목마릅니다 (사55:1) ② 우리의 애정이 목마르고 있습니다. (요일3:16)
③ 경제적으로 목마르고 있습니다. --- (신28:15-19)
2. 목마름을 해갈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① 하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사55:1-3) ② 예수님을 철저히 믿어야 합니다. (요4:14)
③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 (행2:1-4)
3. 세상엔 목마른 사람이 많습니다.
① 생명수를 주어야 합니다. (마10:40-42) ② 사모하게 해야 합니다 (마5:6)
③ 예수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요7:37-38)
제 6언의 말씀 : "다 이루었다!" (요19:30)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가죽 채찍으로 서른 아홉 대의 매를 맞으셨습니다.
가죽 채찍 끝에는 다섯 갈래의 가지가 있고 그 가지마다 낚시와 같은 쇠고리가
달려 있어서 가죽 채찍이 살에 닿을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터져 엉켜 붙었습니다.
또한, 가시관을 쓰신 머리와 대못에 박힌 양손과 양발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무지한 군병의 창에 옆구리를 찔리셔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의 옷은
군병들이 제비 뽑아서 나누어 가졌고, 벗기운 채로 주님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계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죄도 없으시면서 가장 죄 많은 자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입니다.
그가 하실 일을 이제 다 이루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완성자 이십니다.
① 순종을 완성하셨습니다. (빌2:6)
②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마5:44)
③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 (요19:30)
2. 인간은 다 이루고 갈 수가 없습니다.
① 자기의 계획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② 자녀나 부부가 가진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③ 교회나 국가의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3. 못다 이루는 우리 인생은 다 이루신 주님을 믿고 가야 합니다.(벧전2:24)
① 마귀는 우리의 완성을 방해합니다. (마4:1-10)
② 예수님은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다 이루셨습니다. (요16:33)
③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와 확신의 말씀이 됩니다. - (계20:1-3)
제 7언의 말씀 :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23:46)
예수님은 아버지란 말씀을 즐겨 사용하셨으니 산상설교 가운데서 17번,
유월절 다락방에서 45번(요 14, 16장), 요한복음 17장에서 6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에서 마지막 말씀을 아버지로 끝맺으셨습니다.
아버지란 명칭은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자신을 갖게 하는 이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들은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해도 아버지 손에 맡기고 부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체로부터 분리되려는 찰나에 있는 그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1. 사람은 세 가지 형태로 창조되었습니다(육, 혼, 영).
① 육으로 지어진 몸은 물질과 교제하고 (갈5:19-21)
② 혼은 사람의 정신으로 자기를 담고 있습니다. (살전5:23)
③ 영은 하나님이 임하시매 신령한 세계에서만이 통합니다. --- (롬8:10-11)
2.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① 예수님의 아버지이십니다 (눅23:46)
②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엡1:3)
③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아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롬8:15-17)
3.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내 영혼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① 천하보다 귀한 것은 생명(영혼)입니다 (마16:26)
②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성도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요1:12)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요14:6)
(06)
고난주간과 가상칠언
고난주간
부활주일 전 한 주간을 고난주간 또는 수난주간이라 하며, 이 주간은 수난절의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주간임을 말합니다. 고난주간은 종려주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종려주일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축하하는 주일(마21:1-11,막11:1-10, 눅19:28-40, 요12:12-19)이며, 고난 주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이 주간에는 더욱 뜻 있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합니다. 종려주일은 사순절의 여섯 번째 주일이 됩니다. 한때 이 주일은 "호산나 주일"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이 주일이 종려주일과 관련되기 이전에 고대 교회에서는 "세례 지원자 주일" 이라고 불렀는데 이 명칭은 부활절에 세례를 받기 위하여 행하는 지원자들의 준비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례 지원자들은 이 주일에 처음으로 기독교 신조와 주님의 기도를 배웠고 그것을 비밀로서 간직하였습니다. 이날은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며 또한 예수님의 고난 시작과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며 정결하게 일주일을 시작해야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고난주간 예수님의 행적 요일
일요일 개선의 날 1. 예루살렘에 입성하심 2. 무리의 반응과 예수님 우심 눅19:28-40 월요일 권위의 날 1.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 2. 두 번째 성전을 깨끗이 하심 마21:18-19, 막11:12-14 마21:12-17, 눅19:45-48
화요일 변론의 날
1.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 2. 경고의 세 가지 비유 (두 아들, 악한농부, 혼인잔치)
3. 지도자들과 논쟁 4.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경고 5. 유다의 반역 마21:23-27, 눅20:1-8 마21:28-32, 마21:33-46, 마22:1-14 마22:41, 눅20:41-44 마24:25, 막13장, 눅21:5-38 마26:14-16, 막14:10-11
수요일 음모의 날 1.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음모 마26:3-5, 막14:1-2, 눅22:1-2
목요일 준비의 날 1. 유월절 식사 2. 최후의 성만찬 3. 예수님의 고별설교와 중보기도 마26:17-25, 요13:1-7 마26:26-29, 막14:22-25 요17장, 요13:31-35
금요일 수난의 날 1. 배반당하고 잡히신 예수님 2. 공회앞에 서신 예수님 3.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심 4. 십자가의 죽으심 마26:3036-56, 막14:2632-52 마26:57-58, 눅22:54-마27:21-31, 눅23:1-25 마27:31-50, 막15:20-46, 눅23:26-54
토요일 예비의 날 1. 로마병정 예수님의 무덤을 지킴 마27:62-66
가상칠언이란? (架上七言)
A.D. 33년 4월 초순 금요일 일기 화창한 어떤 봄날 예루살렘성 밖으로 세 사람의 십자가의 죽음 행렬이 엄숙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목적지는 히브리말로 골고다요, 아람어로 된 말을 해석하면 해골이란 동산인데 여기까지 와서 각자가 메고 온 십자가에 이 세 사람을 달았습니다. 그 중에 중앙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제 1언의 말씀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예수님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입니다. 구약에는 아버지란 말이 없으나 예수님은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우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주기도문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도는 아버지가 두 분이십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은 사랑의 인격적 참여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게 될 때 내 모든 문제는 해결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① 죄 많은 여인의 죄를 속죄하여 주실 때 그는 구원을 받고 평안히 돌아갔습니다. (눅7:36-50) ② 중풍병자의 죄를 사죄하여 주실 때 곧 건강하여 졌습니다. (마9:1-8, 요5:14) ③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만 속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26:28)
2. 예수님은 원수들의 죄까지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모든 인간들을 위한 죽음 이셨습니다.
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눅23:34) ② 빌라도와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요19:6-23) ③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마26:15-69)
3. 우리에게도 용서하라고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①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골3:13) ② 주기도문에서 명령 하셨습니다. (마6:12) ③ 일흔 번씩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마18:21-22)
제 2언의 말씀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우리는 양쪽에 달린 두 강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양쪽에 십자가에 달리고서도 그 죄를 깨닫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림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진심이면 얼마나 다행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면 비방하였다고 했습니다. 객관적이요, 비판적이요, 야욕적인 말이었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현재도 십자가를 신앙적으로, 주관적으로, 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강도처럼 비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지금도 강도처럼 죽어가면서도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비방하는 자가 많습니다. 고난과 십자가에서는 선한 말이 나오기 힘든 모양입니다만 중앙에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구세주임을 알았다면 구원을 호소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1. 예수님은 낙원의 주인이심을 의미합니다.
① 낙원을 예비하러 가셨습니다. (요14:1-6) ② 영원한 천국의 주인이십니다. (계22:1-6)
③ 하나님이 지으신 집은 세상의 집과는 다릅니다. (고후5:1-3)
2. 낙원에 제일 먼저 간 사람은 강도입니다.
① 회개와 기도함으로 낙원에 갔습니다 (눅23:41-42) ②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눅23:40)
③ 예수가 의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함으로 낙원에 갔습니다. (눅23:42)
3. 주님이 가시고 우리가 갈 낙원입니다.
① 거기서 세세토록 왕노릇 합니다. (계22:5) ② 세상 끝까지 함께 계십니다. (마28:20)
③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삽니다 (요14:3)
제 3언의 말씀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27)
세 번째 주님의 눈동자가 집중된 것은 여기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계신 곳입니다. 25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 네 여인이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울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부탁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격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게 되어 남편에게 송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제 예수님을 먼저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한없는 슬픔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친히 효도의 계명을 지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어려서는 부모님과 함께 성전에 예배하러 갔습니다. (눅2:41-51) ② 예수님이 효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엡6:1) ③ 십자가상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셨습니다. (요19:26-27)
2.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① 십계명 중에 인간에게 주신 첫 계명이 효도입니다. (출20:12) ② 고르반의 진리를 설명하셨습니다. (막7:11) ③ 효도하는 자에게 장수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신5:16)
3. 가상칠언중에 3언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산 교훈입니다.
① 부모님에게 순종을 해야 합니다. (마21:28-31) ② 부모는 타락과 실패의 자식이라도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눅15:11-24) ③ 스승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요, 성도는 주 안에서
한 형제요, 부모입니다. (막3:31)
제 4언의 말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고뇌에서 비롯된 절규였습니다. 죄 없는 자가 정죄를 당하고 허물없는 자가 박해를 받으며 은혜 베푸는 자가 잔인하게 죽어가는 일이 역사상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홀로 지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시는 순간 주님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세 시간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주님은 세상에 대하여는 더 할 말씀이 없고 성경에 응하기 위한 말씀을 하실 뿐이었습니다. 이런 절규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
1. 예수님의 이 순간은
① 흑암의 권세가 잠깐 이기는 모습입니다 (마27:46) ② 하나님이 얼굴을 돌이키신 순간입니다 (시22:1) ③ 하나님과 인간의 담을 허시는 순간입니다. (엡2:14-18)
2. 4언의 산 교훈
① 버림받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십자가의 최고봉의 순간입니다. (딤전2:4) ② 죄인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다는 산 교훈입니다. (계21:8) ③ 예수님이 인간 대신 버림을 받으시는 순간입니다. --------------- (사53:4-6)
3. 엘리, 엘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요8:29) ② 예수님의 전폭을 하나님께 맡기시는 고백입니다. (대하20:20) ③ 충성과 봉사의 순종으로 끝까지 맡기시는 모습입니다. (사53:7)
제 5언의 말씀 : "내가 목마르다!"(요19:28)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입증하고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심은 곧 목마른 인생을 부르시는 뜻도 있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무슨 물을 마셔도 그 심한 갈증을 해소할 길 없으나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한 갈증을 해소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 : 1).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 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1. 목마른 우리 인생을 위하여 주님이 목말라 주셨습니다.
① 우리의 심령이 목마릅니다 (사55:1) ② 우리의 애정이 목마르고 있습니다. (요일3:16)
③ 경제적으로 목마르고 있습니다. ----------------------- (신28:15-19)
2. 목마름을 해갈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① 하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사55:1-3) ② 예수님을 철저히 믿어야 합니다. (요4:14)
③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 (행2:1-4)
3. 세상엔 목마른 사람이 많습니다.
① 생명수를 주어야 합니다. (마10:40-42) ② 사모하게 해야 합니다 (마5:6)
③ 예수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 (요7:37-38)
제 6언의 말씀 : "다 이루었다!"(요19:30)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가죽 채찍으로 서른 아홉 대의 매를 맞으셨습니다. 가죽 채찍 끝에는 다섯 갈래의 가지가 있고 그 가지마다 낚시와 같은 쇠고리가 달려 있어서 가죽 채찍이 살에 닿을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터져 엉켜 붙었습니다. 또한, 가시관을 쓰신 머리와 대못에 박힌 양손과 양발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무지한 군병의 창에 옆구리를 찔리셔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의 옷은 군병들이 제비 뽑아서 나누어 가졌고, 벗기운 채로 주님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계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죄도 없으시면서 가장 죄 많은 자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입니다. 그가 하실 일을 이제 다 이루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완성자 이십니다.
① 순종을 완성하셨습니다. (빌2:6) ②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마5:44)
③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 (요19:30)
2. 인간은 다 이루고 갈 수가 없습니다.
① 자기의 계획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② 자녀나 부부가 가진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③ 교회나 국가의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3. 못다 이루는 우리 인생은 다 이루신 주님을 믿고 가야 합니다.(벧전2:24)
① 마귀는 우리의 완성을 방해합니다. (마4:1-10) ② 예수님은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다 이루셨습니다. (요16:33) ③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와 확신의 말씀이 됩니다. - (계20:1-3)
제 7언의 말씀 :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예수님은 아버지란 말씀을 즐겨 사용하셨으니 산상설교 가운데서 17번, 유월절 다락방에서 45번(요 14, 16장), 요한복음 17장에서 6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에서 마지막 말씀을 아버지로 끝맺으셨습니다. 아버지란 명칭은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자신을 갖게 하는 이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들은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해도 아버지 손에 맡기고 부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체로부터 분리되려는 찰나에 있는 그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1. 사람은 세 가지 형태로 창조되었습니다(육, 혼, 영). ① 육으로 지어진 몸은 물질과 교제하고 (갈5:19-21) ② 혼은 사람의 정신으로 자기를 담고 있습니다. (살전5:23) ③ 영은 하나님이 임하시매 신령한 세계에서만이 통합니다. --- (롬8:10-11)
2.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① 예수님의 아버지이십니다 (눅23:46) ②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엡1:3)
③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아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 (롬8:15-17)
3.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내 영혼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① 천하보다 귀한 것은 생명(영혼)입니다 (마16:26) ②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성도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요1:12)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 (요14:6)
(06)
고난주간,
그발자취를 따라-새끼나귀 타고 예루살렘 고난속으로
20일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성전을 청소하고 21일부터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25일까지 수난과 고난을 당하십니다.
본보는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맞아 예수님의 고난을 상기하면서 그리스도의 행적을 따라가는 시리즈를 6회에 걸쳐 싣습니다.
이 시리즈는 서울신대 권혁승 교수가 집필합니다.
<편집자>종려주일은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이다.
예수님의 종려주일 첫 행적은 감람산 벳바게에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때 사람들은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길위에 펴면서 “호산나,다윗의 자손이여”를 외쳤다.
‘호산나’는 히브리어로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벳바게는 감람산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히브리어로는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으로 무화과나무가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벳바게에는 비잔틴 및 십자군시대에 두 차례 기념교회가 세워졌었다.
현재의 기념교회는 1883년 십자군시대의 교회터 위에 세운 것이다.
벳바게 교회의 제단 정면에는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모습의 벽화가 있다.
나귀를 타신 예수께서는 벳바게에서 감람산 정상으로 올라가셨다.
감람산은 예루살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해발 810m 높이의 감람산은 예루살렘 성전보다 110m 정도 더 높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걸으셨던 그 길은 당시 유대인들이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오르는 길이었다.
여리고에서 유다광야를 거친 다음 마지막 여정으로 감람산을 넘게 된다.
긴 여행에 지친 유대인들이 감람산 정상에 올라서면 두 가지 기분 좋은 일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것은 서쪽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예루살렘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전자가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면 후자는 하나님을 찾는 그들 영혼에게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런데 그날 예수께서는 그런 즐거움이 전혀 없으셨다.
오히려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눅 19:41∼44). 견고하게 지어진 예루살렘 성이었지만 돌 하나 남지 않는 파멸이 곧 닥쳐올 것을 내다보신 것이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신 일과 관련해 현재 감람산 중턱에 작은 교회가 세워져 있다.
교회 이름은 ‘도니누스 플레비트’(Dominus Flevit)라고 하는데 ‘주께서 우셨다’는 뜻의 라틴어이다.
이곳에는 5세기 비잔틴시대에 첫 기념교회가 세워졌었다.
현재의 교회는 1881년에 세운 것을 1995년 개축한 것이다.
예수께서 흘리신 눈물을 상징하기 위하여 지붕 네 귀퉁이는 눈물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2000년전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의 군중은 예수께서 왕이 되어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줄 것을 기대하며 열렬히 그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호산나 환호가 곧 십자가 처형의 고발로 바뀔 것을 이미 아셨다.
정복자의 건장한 말 대신에 보잘 것 없는 나귀를 타신 것도 그 때문이었다.
군중의 환호 속에서 예수께서는 묵묵히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외로운 길을 걸으셨다.
감람산 위에서도 눈앞에 보이는 예루살렘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앞으로 닥칠 멸망을 내다보며 애국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다.
종려주일은 마냥 들뜬 분위기로 보낼 수는 없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우리의 결단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걸으셨던 고난의 현장으로 들어가 한 주간을 경건하게 말씀 묵상과 기도로 보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부활하신 영광의 주를 맞이할 수 있다.
(07) 고난주간 설교
십자가의 길
본문 눅22:39-46 /조성근목사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예수께서 십가자에 달리사 고난당하시고 돌아가신 주간입니다. 마지막 한 주간 동안 예수님이 행하신 행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첫 날이 되는 오늘은 고난주일,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옷을 벗어 그 행렬 앞에 깔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호산나" 한데에 기인합니다. 당시 백성들은 예수님을 주(主)로, 임금으로, 메시아로 환영했던 것입니다.
고난주간 둘째 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셨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심하게 부패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상업주의 신앙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양과 염소, 비둘기를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어 있었는데 당시 제사장들은 일부의 장사하는 이들과 특별한 계약을 맺고 성전 안에서 구입한 것만을 제물로 인정했다고 합니다. 그 안에 농간이 있었던 것이지요. 또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성전에 들어와서는 일반 화폐를 사용치 못하게 하고 오직 성전화폐만 사용토록 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전 바꾸는 이들과도 결탁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현실을 목도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에서 장사하던 이들을 내어 쫒음으로 성전척결을 실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날 예수님은 유대교의 부패와 잘못된 사람들에 대한 분노하심으로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셋째 날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30-40년 후 아름다운 이 성전이 멸망당하게 될 것을 미리 아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은 여전히 영적으로 죽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이 예루살렘 성전은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이 이끈 군사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유대 백성 1백10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로마 원정군들은 예루살렘 성전 돌과 돌 사이에는 보석과 금이 들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성전전체를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부수어 버렸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그를 울며 뒤따르던 예루살렘 여인들을 향해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후손을 위해 울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이런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넷째 날에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쉬셨습니다. 그리고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 흥정을 벌인 날이기도 합니다.
다섯째 날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세족 목요일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신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땀방울을 핏방울처럼 흘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여섯째 날 성금요일 새벽, 제사장들이 보낸 사병들에게 붙잡힌 예수님은 가야바와 총독 빌라도 앞에 끌려가 신문을 받고 사형언도를 받으셨습니다. 병사들은 예수님께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히며 조롱했습니다. 재판은 속전 속결로 진행되어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6시간만에 운명하셨습니다.
일곱째 날, 죽으신 주님은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안식 후 첫날 사망 권세와, 마귀의 세력,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 고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첫째, 십자가는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고통당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고통은 악과 사망, 저주의 대가를 치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 했습니다. 죄로 인한 고통과 죽음,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고 물리치기 위해 주님이 고통당하셨던 것입니다.
둘째, 사랑의 희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백성이 당할 고통을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사랑, 모든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해 주께서 대신 고통을 지신 것입니다. 이로서 멸망과 저주, 절망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우리가 이제는 하늘의 소망, 영적인 생명, 그리고 참자유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옷을 입고 참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는 '엘리엘리 라마 사막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외침 속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고통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침묵이었을 것입니다. 이 침묵은 하나님의 눈물의 침묵 혹은 고통의 침묵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해석하기를 "피 흘림이 없은 즉 죄 사함이 없느니라.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15:3),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히9:26),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었고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고"(히9:28)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정치적, 종교적, 사상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죄의 대속, 죄사함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십자가를 통해 성령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39절은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더라" 하였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임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임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확실하게 증명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주셨는데 아들과 함께 모든 은사를 주시지 않겠느냐"(롬8:32)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를 통해 은사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를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죄악과 싸운다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잘못 행해 만들어진 그런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는 죄가 있고, 사탄의 도전이 있기 때문에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진리로 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권사님 한 분이 남편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너무나 컸습니다. 이 권사님은 늘 자기가 십자가를 지고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 십자가를 바꿔 달라고 간청했다 합니다. 그날 밤 권사님이 꿈을 꾸었는데 자기가 십자가를 맨 채 큰 언덕을 올라가고 있더랍니다. 한참을 힘들게 올라가는데 한 곳에 '여기서 쉬어 가시오'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더랍니다. 그리고 또 '여기에 십자가가 있으니 바꿔 가고 싶은 사람은 바꿔 가시오'라는 팻말도 세워져 있었답니다. 권사님은 자기가 지고 있던 십자가를 내려놓고 먼저 황금으로 된 큰 십자가를 져보려고 했지만 너무나 무거워 포기하고, 이번에는 장미로 된 다른 십자가를 져보려고 했지만 맺힌 가시가 송곳처럼 찔러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남은 십자가 하나도 가볍게 생기긴 했지만 길이가 길어 질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결국 그 권사님은 내려 놓았던 본래의 십자가를 다시 지고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진 십자가는 편한 것 같고 내가 진 십자가만 힘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가 내게 제일 편한 것임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이겨 나갈 때 주님이 도와주십니다.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면 변화와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구경하던 구레네 시몬은 본의 아니게 억지로 그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던 시몬은 자기를 바라보시며 위로하시는 예수님의 눈과 마주쳤을 때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처형당하시는 장면을 끝까지 지켜본 그는 그후 예루살렘으로 이사를 와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이 루퍼라고 전해지는데 이 사람은 초대교회의 지도자인 감독이 된 인물입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퍼와 그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이 일로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위대한 신앙인들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때는 사명 때문에, 어떤 때는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도우시고 변화와 큰 축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고난주간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님들의 삶 속에서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08) 설교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본문 마26:36-46 /황영준목사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고통을 결단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인간적인 연약함을 극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하고 준비하였고, 십자가를 맞을 힘을 얻으셨습니다. 이 십자가 고난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 만찬을 마친 후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였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
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 내용이 어떻습니까? 연약한 인간의 고뇌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하는 내용이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기를 당하면
그 어려움을 피해 가기를 원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는 순탄한 길을
가기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죄도 아닙니다. 그러나 높은 산 깊은 골짜
기 같은 어려움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두번째 나아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42)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두 번째 기도부
터는 자신의 사명을 깊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깊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길로 결심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
을 생각하고 죽기까지 순종하기로 작정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를 낮
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려고 이미 마음으로부터 그 일
을 시작하고 계셨습니다.
또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마26:44)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무슨 내용입니까?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결단을 하는 기도는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
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을 단단히 먹고 결심할 수 있습니다. 더욱 힘쓰고 애써서 간절히 기도해야 확신
이 서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고통을 감당할 결심을 할 때
성령의 위로와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인간입니다. 마리아의 태중에서 나왔습니다. 어린 소년 시
절이 있고 청년기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피곤하고 지쳤으며 배고팠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
성을 가진 예수님이셨다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십자가의 고통을 헤아려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
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주기철 목사님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영문밖에 비치누나
연약하온 두 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 밖의 길이라네
예수님은 잠시 후에 당하게 될 여러 가지 고초와 죽음 앞에서 "고민하고 슬퍼"(마 26:37)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십자가 고난은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감당하시는 이 사망의 고통과 죽음은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는 세 번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채찍에 맞고 멸시와
천대를 당할 것을 결정한 것입니다. 능욕과 침 뱉음을 당할 것을 작정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를 지시고 온 몸이 찢기고 상하실 것을 이미 결심한 것입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실 것을
결심하신 것입니다. 억만 죄인을 위하여 자신이 그 죄짐을 대신 지실 것을 결정한 것이었습
니다.
예수님의 기도 모습을 깊이 살펴보십시오. 경건하고 겸손한 기도입니다. 간절한 기도입니
다. "무릎을 꿇고 기도" 하였습니다(눅22:41).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
니다(히5:7).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눅
22:44) 되었습니다.
아버지, 이 십자가가 아버지의 뜻입니까? 아버지, 이 십자가가 제 몫입니까? 내가 지겠나이
다. 지금 그 길로 갑니다. 이것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보낸 천사
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눅22:43)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
습니다. 십자가 없는 승리와 영광의 부활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성도들은 십자
가 없는 영광의 자리에 앉으려 하고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마산 문창교회를 떠나서 평안 산정현 교회로 올라갔습니다. 한국의 예루
살렘 평양에서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의 정절을 지켜 죽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문둥병자들을 섬기는 일에 예수님을 대신하였습니다.
언더우드 청년의 귀에 쟁쟁하게 들려 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한국은 어떻게
하겠느냐? 한국은 어떻게 하겠느냐?"하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어둠과 절망의 땅 한국으로
올 것을 작정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묻은 복음을 가지고 사망의 땅에 들어왔습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 없는 영광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성전을 지은 자 없이 예배 처소가 있을 수 없습니
다. 섬기는 자 없이 교회가 사랑이 충만할 수 없습니다. 시간과 재물과 재능을 드림 없이 하
나님 나라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고 교회의
부흥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하였습니다. 이것은 2천년 전 12제자에게만 하
신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365장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뉘게 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 늘지고 가리다
그 면류관을 쓰려고 저 천국 가겠네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에 "일어나라 함께 가자"(마26:46)하시고 십자가를 향하여 승리의 행
진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도 함께 가야 합니다. 이미 구원받은 우리들은 천성을 향하여 가
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길도 함께 갑시다. 헌신과 충성의 길도 함께 갑시다. 나만이 짊
어진 내 몫의 십자가를 피하지만 맙시다. 감당합시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둡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천
국 길도 함께 갑시다. 이 길은 나 혼자 가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이 동행하시는 길입니다. 주
님께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하십
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나라가 망하였으므로 다른 청년들과 함께 원수의 나라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궁중 교육을 받고 이름까지 벨드사살이라고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믿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빼앗을 수도 없었습니다.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 불에 던짐을 받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생명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
기로 했습니다. 저들은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
이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7-18)
성도들도 하나님께 기도하되 본성적인 불순종이나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자신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2. 베드로는 깨어 기도하지 못하더니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6:38)하셨지만 저들은 졸
고 있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26:41)하였지만 슬퍼하여 잠들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피땀 흘려 기도하는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제자들은 마땅히 기도로 준비하여야 하는 때에 잠을 자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가 주
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5)하던 베드로와 제자들이 어떻게 되
었습니까?
주님을 내버려두고 도망을 쳤습니다. 일찍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과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습니다(마17:3). 그러므로 저들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
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하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하
였습니다.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큰소리
치는 사람도 어쩔 수 없습니다. 불신자같이 되고 맙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성도들이 어려운 때에 기도하지 않으면 근심 걱정을 이기지 못하고 절망에 빠집니다. 주님
과 멀어집니다. 그리고 주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성경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
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
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생각하면서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시다.
(09)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신 그리스도
벧전2:19-21 /조용목목사
전통적으로 교회는 부활절 주일 이전 한 주간을 고난 주간으로 지킵니다. 이는 예수님의 공
생애 기간에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로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입니다. 예수님
이 받으신 고난은 이 주간의 마지막 이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과 겟세마네 동
산에서의 고뇌, 대제사장이 보낸 무리들에게 체포됨, 대제사장과 빌라도에 의한 심문과 재
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 그리고 무덤에 장사되는 것으로 연속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예
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늘 생각하면서 생활하지만 고난 주간을 통하여 더욱 마음
속 깊이 그 뜻을 새겨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하려고 하는 성경 본문에 기록되기를 그리스도는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말씀의 뜻을 두 가지 방면에서 살펴보겠습
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은 죄인을 위한 것입니다.
대체로 세계적인 종교는 그 창시자가 슬픔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를 해소하고
극복하는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려고 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사람들이 온갖 욕망으로 인해
고민하고 불행해지므로 이 욕망에서 해탈하도록 가르칩니다. 유교는 공자를 시조로 하는 중
국 고대의 대표적 사상입니다. 공자는 난세를 구하는 것이 법률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인간
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유교에서는 수신제가후 치국평천하라고 합니다.
삼강오륜을 통해 수양하고 덕을 닦음으로 가정과 사회에 평안을 가져오고 참 행복에 이르고
자 합니다. 유교를 집대성한 주자는 인간의 정욕이 이성을 가리울 때 악이 생긴다고 하며
정욕을 끊고 이성으로 돌아가라는 금욕주의적 윤리를 강조했습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종교
와 다릅니다. 물론 기독교에도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과 윤리적인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고난과 희생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토대로 하고 있
으며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으로 인하여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고 참된 행복
에 이르게 됨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새로운 윤리를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고난을 받고 죽으
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
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고난을 통해서, 희생의 죽음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
에게 생명을 나눠주시고자 한다는 말씀입니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으며 존귀한 지위를 얻었고 또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타락하여 그 권세와 지위를 상실하고 마귀의 종노
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구원의 주를 이 세상에
보내실 것을 작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
내셔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로마 시대에 죄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처형 방법은 가장 잔인하고 혹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우 극악한 죄인을 처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
야 했습니다. 더욱이 옷을 벗기우시고 강도들과 함께 처형을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그 수치
와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를 우리는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한 괴로움
은 인간의 추악한 모든 죄를 담당하여 심판을 받으신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받게 된 복에 대해 말씀하고 있
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
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
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
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그가 자
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
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사 53:11)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께서 받으신 고난은 죄인 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구
원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죄 사함과 영생을 얻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
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말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됩니다. 그리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받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고난받으사
우리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십자가에
못박혀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외쳤습니다. 이로 인해서 핍박을 많이 받았
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하였고 빌립보에서는 매를 맞고 깊은 감옥
에 갇혔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폭도들에게 살해당할 위험도 겪었으며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여 결국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므로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복
음을 전하면 반드시 고난이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나 전도하다가 핍박받는 것은 영광된 일
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으면 이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고린
도후서 4장 17절, 18절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하였습니다. 고난은 잠깐 받
으나 영광은 영원하며 지극히 큽니다.
또한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는 사람의 고난을 함께 나누십시오. 그리스
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가정에서 박대를 당하고 내어 쫓
기기도 하고, 사업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있으며 직장을 잃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들을 돕고 위로하며 격려해 줌으로 고난을 함께 나누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 당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크고 영원한 영광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
러므로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을 피하여 안일하게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다른 사람이 당하는 고난을 함께 나누십시오. 그리하여 주님 앞에 설 때 천
사의 환영과 갈채를 받으시고 세상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받으시기 바랍니
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형언할 수 없는 큰 고난을 스스로 취하셨습니다. 예수님
께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
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치며 멸시와 조롱으로 희롱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빌라도의 관정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총독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
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침 뱉으며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고 등허리를
채찍질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로마 군병
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말미
암아 그를 믿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입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토록 크고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예수님으로 인
해 당하는 고난을 기쁘게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받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고난받으셨으며 또
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받는 자에게 그와 함께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고난받
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묵상하며 고난받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또한
고난받으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을 수 있음에 대하여 그 은혜에 감격하게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0)
억지로 짊어진 십자가
마태복음 27장 32절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예수님이 짊어진 십자가는 무게가 약 20kg으로 장정이라면 쉽게 짊어질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전날 너무도 심한 고문을 당하여 몸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기에 끝까지 십자가를 질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오르신 길은 "고난의 길"-비아 돌로롯사(Via dolorossa)라고 불리우는데, 예수님은 이 길을 걸으시면서 14번이나 걸음을 멈추셨고 다섯 번 째 멈추신 곳에서부터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졌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바로 구레네 시몬입니다.
예수님께서 더 이상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를 오를 수 없게 되었을 때 군병들은 구레네사람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지게 했고 억지로 같이 가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눈과 귀를 본문의 '억지로'라는 말에 집중시키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기쁜마음으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말씀을 들어오셨는데, 본문의 구레네시몬을 보니, 자의와는 관계없이 억지로 임하는 은혜도 있음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다시말하면 나 자신은 전혀 생각하지도, 하려고 하지도 아니했는데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게하심으로 복을 주시는 섭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중에 타의에 의해서 교회에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체면 때문에 주의 일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지기 싫은 십자가라고 할지라도 지십시오. 순종이 아니면 복종이라도 하십시오. 여러분이 직장에 나가기 싫다고, 일하기 싫다고, 공부하기 싫다고, 사업하기 싫다고, 자녀 기르기 힘들다고 집어치워 버리십니까? 아니지요. 하기 싫고, 나가기 싫고, 양육하기 힘들어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기 싫고 오기 싫어도 교회에 나오시고, 갈등이 일어나고 주저하는 마음이 생길지라도 주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내가 원치 아니한다할지라도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면 결국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길이요, 나 자신이 복을 받는 삶을 누리는 인생길이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내키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일이라면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구레네시몬은 그때 억지로진 십자가였으나 주님을 도와드린 십자가였기에 그에게 온 결과는 영광스러운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이 아침에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라면 억지로라도 져야하는 이유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억지로 짊어진 십자가는 축복을 받게 하는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구레네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진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유월절절기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온 시몬은 원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길거리에서 골고다로 향하시는 예수님과 군병들의 일행을 만나게되었고 그때 시몬은 느닷없이 군병들에게 붙들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재수 없게 걸려들었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순간부터 억세게 재수없는 사나이가 아니라 억세게 축복받는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내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어떠한 상황속에서 주님의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바로 자신에게 복이 됨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연히 믿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도 마시고, 어쩌다가 하기싫은 직분을 맡게되어 고생한다고 원망하지도 마시고, 누구 때문에 교회에 끌려와 들로 산으로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따분하게 앉아있다고 후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도 모르게 축복의 삶으로 들어서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래전에 어떤 장로님의 아들이 서울에서 자취를 하며 공부를 하다가 연탄가스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주변사람들은 장로의 아들이 연탄가스로 죽었다고 '예수믿어 뭣해'라면서 비난과 조롱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이때 장로님은 자기를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들이 죽은 일로 말미암아 세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첫째는 내가 기도할 때마다 나의 아들을 하나님께 맡긴다고 했더니 정말 하나님이 맡아 데려가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아들이 살아있을 때 좀더 잘해주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아들이 살아가면서 했어야할 구제사업과 복음전파사업등 많은 일들을 내가 대신 열심히 해야겠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이 죽은 고통을 축복의 기회로 바꾸어 생각하고 그대로 더욱 아름답고 보람있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구레네시몬이 짊어진 십자가는 억지로 짊어진 십자가였지만 시몬은 그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둘째로, 억지로 짊어진 십자가는 가족구원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구레네시몬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가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그후 부활의 예수님을 보면서 그는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간 사건을 통하여 주님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만 믿은 것이 아니고 온 가족을 복음화시켰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보면 시몬을 초대교회 당시 잘믿는 교인중 대표적인물이었던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로마서 16장13절에 "주안에서 택함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
사도바울이 구레네사람 시몬의 아내를 향하여, 루포의 어머니를 향하여 내 어머니와 같다고 했을 때 그녀가 얼마나 독실한 믿음의 아내가 되었겠는가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온 가족이 구원받게 된 구레시몬의 억지로 짊어진 십자가는 은총의 십자가였습니다. 억지로 짊어진 십자가는 그의 후손과 가문까지도 축복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A.D.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구레네 시몬의 12대손이었음이 역사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억지로라도 주님의 뜻을 수행하면 후손들이 복을 받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억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골고다 형장으로 향한 구레네 시몬이었지만 그의 후손들이 복음서에, 바울서신에, 믿음좋은 성도로서 높임을 받으며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알려지고 있습니다. 가족구원인 인가귀도를 원하십니까? 오늘 주님의 귀한 사명을 억지로라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로 인해 구원의 역사가 시작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억지로 짊어진 십자가는 우리가 짊어져야할 사명입니다
이스라엘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동물의 창조를 끝냈을 때 새들이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짐승에게는 이런 무거운 것을 달아주지 않았는데 우리에게는 왜 이런 무거운 짐을 달아주었는가?" 잠시후 용기있는 독수리가 먼저 어깨에 붙어있는 그 무거운 것을 움직여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고 자기가 공중에 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무거운 짐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오히려 몸을 가볍게하는 날개였던 것입니다.
미국이 낳은 유명한 달리기 선수 '칼 루이스'는 모터사이클을 타고 출퇴근을 하였는데 도적을 맞자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녔으나 또 도적을 맞았지요. 화가 난 그는 "내 다리만큼은 도적질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결심하여 왕복 24km을 매일같이 억지로 참고 달리며 출퇴근을 한 결과 세계적인 달리기 선수가 되었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날마다 십자가 지는 연습을 하시고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필경 그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명예와 축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현대교회들이 종각에 높이 세우는 십자가가 장식품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본질은 십자가입니다. 까닭에 십자가정신으로 교회가 세워져야하며 그리스도인들은 그 십자가속에서 주님쓰신 가시면류관을, 옆구리의 찔린 창자국을, 쇠못박힌 손과 발을 보시고 만나셔야만 합니다. 십자가는 구경하는 관람용이나 장식용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십자가정신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교회는 십자가를 말하는 목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목사가 필요하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말하며 듣기만 하는 교인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지고 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우리교회에서 말없이 교회를 위하여 봉사와 헌신을 아끼지 아니하는 많은 교인들을 살펴보게 됩니다. 주방에서 수고하시는 성도님들, 청소하느라고 수고하는 성도님들, 꽃꽂이하느라고 수고하는 권사님, 남달리 고생하는 성가대원들, 찬양단원들, 교회학교 교사들이 그들입니다. 때로는 아픔고 있고 피곤함도 있고 말할 수 없는 힘든 일도 있지만 항상 변함없이 봉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짊어질 십자가를 주님이 대신 지셨으니 나는 주님의 기쁨을 위하여 오늘의 사명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뿐입니다. 울타리를 넘어갈 때 머리와 어깨가 잘 넘어갔으면 다리정도 걸린 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까짓것쯤은 얼마든지 빠져 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담대하게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가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저들 대답하였다"찬송처럼 주님께서 오늘 이시간 우리에게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고 물어보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음이 불편하고 갈등이 생겨도 그 자리에서 도망하지 말고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주님과 만나는 축복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상태, 어떠한 마음이라도 주님의 십자가곁에 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십시오. 지기 싫어도 억지라도 십자가를 지십시오. 지금 사명감당하는 일이 힘들다고 느끼십니까? 사명의 십자가를 벗었으면 하십니까? 벗으시면 안됩니다. 포기해서도 안됩니다. 억지로라도 사명의 십자가를 메야 그것이 구레네 시몬처럼 축복의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오늘도 내일도 우리 모두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모두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1) 찬송설교
왠 말인가 날 위하여
찬송 ;141장 ♬
말씀 :눅23:44-46,
주님의 고난을 묵상할 때 더없이 싱금을 울리는 141장 '왠 말인가 날 위하여'의 찬송은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상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기 전까지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그린 찬송으로 우리에게 구절 구절마다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특별히 1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2절은 ' 주님은 나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그토록 험한 고통과 아픔을 당하셨으니 그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엄청나다는 것이다.' 3절은 '주님의 죽음이 얼마나 가엽고 한이 없으면 낮의 해도 빛을 잃고 캄캄해졌을까? 자연도 예수님의 죽음에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는 것이다.' 4절은 '주님께서 날 위하여 피흘려 죽으심을 생각할 때 우리는 눈물 없이는 그 십자가를 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5절 '주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놀랍고 감사하여 늘 울어도 갚을 길이 없어 이 몸 받친다는 것이다.'
이같이 귀한 가사를 쓴 사람은 '영국 찬송가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아이작 왓츠(Isac Watts;1674-1748) 목사가 1707년에 작시하여 그의 「찬송가와 성가」에 실었다. 그가 지은 찬송가는 우리 찬송가에도 많이 수록되었는데, 8장, 41장, 52장, 58장, 115장, 138장, 141장, 227장, 237장, 249장, 387장, 391장, 401장, 438장 등이 있다.
찬송 곡은 1800년 경에 '휴즈 윌슨'(Hugh Wilson;1766-1824)이 만들었다.
1절)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의 30년 사생활과 3년 간의 공생애가 전부 고난의 생애이다. 더구나 만찬회 석상에서 무덤에 묻히시기까지의 과정은 고난의 일관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고난이 벌레와 같은 나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이 같은 사실을 들으면서 어떠한 느낌을 받게됩니까?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할 일도 대게 없다 어떻게 보잘것없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하나뿐인 생명을 십자가에 버리셨다 말인가? 하며 이상한 사람으로 또는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로 지어낸 일이라고 여기십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갈1:4)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고자 채찍에 맞으시고 옷 벗김과 침 뱉음과 못 박힘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왜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 쓰셔야 마땅하실 예수님께서 이 같은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거스르는 '불순종'을 말합니다. 우리들의 불순종! 우리들의 어리석음! 그리고, 양처럼 제 고집만 부리는 우리들의 '자아'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아직도 버리지 못한- 아집과 고집, 어리석음과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순종, 이러한 옛 모습들을 완전히 털어 버려야만 됩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충성된 하나님의 일꾼들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절) 내 지은 죄 다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이렇듯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 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5:13절에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요한일서 4:9절에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 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 이니라."
이사야 53: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으며"
이사야 53:3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간고(艱苦)를 많이 겪었습니다.."
갈보리산 위에 우뚝 서있는 십자가의 예수를 생각해보십시오. 먼저 예수님의 얼굴을 보십시오. 종이처럼 창백해져가는 얼굴과 머리에 얹혀진 가시 면류관으로 인해 붉은 피가 주룩 주룩 흘러 내렸습니다. 손을 보십시오. 손바닥을 꿰뚫은 큰못이 예수님의 부드러운 살을 찢고 뼈를 뚫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육중한 몸이 늘어질수록 살이 점점 찢어지고 선지빛깔 같은 붉은 피가 연속해서 쏟아집니다. 두 발을 보십시오. 역시 큰못으로 나무에까지 깊이 박히고 선혈이 줄줄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옆구리를 보시렵니까. 무지한 로마 군병들이 날선 창으로 찌르고 예수님의 부드러운 가슴도 창으로 찔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고통을 한 시간 동안 겪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자그마치 여섯 시간동안을 그렇게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러한 고통이 얼마나 심하였던지 예수님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며 절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고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고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시고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절규의 십자가 고난의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496장)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은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프랑스 한 성당에 하루를 빼지 아니하고 찾아오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강대상 쪽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그냥 갑니다. 어느 날 예배당 사찰이 물었습니다. "왜 형제는 하루도 빠지지 아니하고 십자가만 바라보고 갑니까?" "십자가만 바라만 보아도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141장) 정말 저와 여러분 속에 예수 십자가만 보아도 은혜가 넘치는 기쁨이 넘치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144장)가 나의 간증이 되어지고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지금 무엇을 보려고 예배당에 나왔습니까? 화려한 옷 입은 자입니까? 솔로몬의 궁정으로 가십시오. 해박한 지식인입니까? 애굽이나 바벨론으로 가십시오. 나의 주홍같이 붉은 죄, 먹장같이 검은 죄를 씻으실 분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나야합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184장)
오늘은 종려주일이자 고난주간의 첫날입니다. 우리 함께 예수님 지신 십자가로 가까이 가까이 가보십시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 하옵소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496장)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더러운 죄가 깨끗해 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절) 주 십자가 못 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것은 때가 제 육 시쯤 되어 해가 빛을 읽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더니만 그것이 제 고시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마27:45,눅23:44)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한 가운데가 찢어지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눅23:45)
예수님은 이런 기적을 일으키시며 십자가 위에서 큰 소리로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셨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백부장과 그 외 많은 사람들이 "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23:47-49)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갔다.
십자가는 실로 큰사랑의 능력이 터져 나오는 자리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매어 달리신 주님의 십자가는 용서와 기도와 소망의 약속으로 넘치고 있다. 어찌 우리 벌레 같은 인생들이 상상할 수 있는 단어들인가? 그러기에 십자가는 사랑의 능력이 폭발한 곳이다.
하나님 사랑의 위대한 빛이 비쳐진 곳이다. 그러기에 햇빛도 이 사랑의 빛 앞에 빛을 잃었다. 44절 말씀대로 하늘의 해가 빛을 잃은 사건이 십자가의 사건이다. 해가 빛을 잃으니 피조물의 세계는 어두워졌다. 땅은 어두움으로 들어찼다. 우주공간에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창조자 하나님이 십자가에 매어 달리는 시간이었기에 피조물도 빛을 잃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십자가에 매어 달린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순간이었기에 햇빛도 빛을 잃었다. 십자가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능력이었으면 천지가 요동을 하는가? 이는 십자가가 우주의 원리의 중심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태복음 27:51절에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하였으니 십자가는 실로 우주적인 사건이다. 십자가는 성도의 몸을 무덤에서 일으키는 능력이고 멸망 받는 영혼을 건져낸 사랑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보여주는 사랑, 이 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 실로 십자가는 우주적 사건의 중심으로서 능력이다.
여러분들은 이런 기적과 장면을 보시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조작한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하였다고 여기십니까?
십자가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능력이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길이요. 제자가 되는 길이요 참 능력을 나타내는 길이다. 고난주간에 십자가의 길에 조금이라도 참여하며 묵상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4절)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와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싫어하고 멸시를 하는 것일까요? 더욱이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아직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왜 이 모양입니까? 우선 불신앙 때문입니다.
사53:1절에 보면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예수님을 증거 했고 사도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1절에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했는데 여기 여호와의 팔은 하나님의 이적 적인 능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없이 나타났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에도 아말렉과의 전쟁 때, 5.18, IMF때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멸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볼 수 있는 눈이 없고 들을 수 있는 귀가 없고 믿을 수 있는 마음이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우리의 편견 때문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의 탄생을 보십시오.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뉴욕에서 나신 것 아닙니다. 유대 땅 작은 고을 게다가 말구유에서 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장하실 때 왕궁에서 모세처럼 성장하신 것 아니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자란 솔로몬처럼 성장한 것도 아닙니다.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가난을 먹고 노동을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외모로도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서 준수하였고 다윗은 얼굴빛이 붉고 눈이 빼어났다 했는데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대로 풍채가 없고 매력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대학은커녕 초등학교 졸업장 하나도 없었습니다.
본문에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했는데 이러한 표현은 당시에 있었던 문둥병 자들에 적합한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은 문둥병자가 나타나면 저마다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병자 취급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멸시를 당하고 있었습니까? 우리의 불신앙 때문이요, 우리의 잘못된 편견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물론 연한 순 같은 종교입니다. 그러나 순 없이 거목(巨木)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까.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고난 없이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고함치는 소리가 무엇이었습니까?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그러나 그랬던 유대인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님 품으로 돌아오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마치 요셉이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싫어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들어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삼으신 것과 같고 사울에게서 배척을 당한 다윗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 같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교회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좇으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외형을 봅니다. 옷, 풍채, 재물, 학력, 권세, 출세를 봅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십자가 외에 다른 것 자랑할 것이 없다" 했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려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에 고난 당하신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그 의미가 어디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부활의 영광을 위해 꼭 필요한 주님의 죽으심의 자리요. 영혼이 참 하늘에 들어가는 출발점이다. 은혜의 보좌가 있는 참 하늘로 나아가는 길이기에 능력이다. 십자가는 능력중의 능력이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다. 부활의 시작이다. 십자가는 죽으심이 아니다. 생명이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다. 성공이다.
참 하늘로 들어가는 길이다.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거기에 나타난 영광을 본 자가 누가23:47∼49의 백부장이다. 무리들과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온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의 능력, 속죄의 능력, 소망의 능력을 보았는가?
고통의 십자가에 담겨진 하나님의 능력!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신 십자가 길을 걸어가셨다. 그 십자가 위의 ①그리스도만 알려고 하며 ②십자가를 자랑하자. ③나의 십자가,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성도가 되자.
히13: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하였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신앙생활,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아는 교인들만 결단할 수 있는 길이다. 세상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기 이하여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놓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죄인처럼 취급된 예수, 그 십자가의 능력을 보며 우리도 마침내 자신을 희생하고 마침내 자기를 죽음에 내어놓는 신앙으로 나아가자. 그것이 신앙의 마지막 목표다.
5절)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아멘
5절은 141장 "왠 말인가 날 위하여"의 클라이막스이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은 우리들이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베드로가 성령 충만함을 받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담대하게 증거 하였듯이 " 사도 바울이 "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주를 좇으며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하며 복음 증거자로 나섰듯이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딤후4:2)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0-21)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십자가의 희생의 정신으로 살아야 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그 종점이 자기 희생의 길이다. 사도가 그러하였고, 오늘까지의 수많은 순교자가 그러하였고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여 살아온 많은 성도가 그러하였다.
예수 믿으면 성공과 축복만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희생과 고달픔이 먼저 올 때가 많으며 괴로움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그 언덕너머에 영원한 안식과 영생이 있습니다.
십자가 지고 따르는 전도인이 마지막 주님 앞에 가서 받을 상은 의의 면류관입니다. 딤후4:8절에 보면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했습니다. 의의 면류관은 의인으로 인정된 자에게 주시는 면류관이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 면류관입니다. 의의 면류관은 열심과 충성에 대한 상급으로 받는 인격적 영광입니다.
우리 모두 이 귀한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그 날까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롬12:1)
(12)
고난주간 관련 성경자료
(1)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묘사
침밷음을 당하심(마 26:67)
채찍에 맞으심(마 27:26)
옷벗기우심을 당하심(요 19:23,24)
멸시를 당하심(막 15:29-30)
비웃음을 당하심(마 9:24)
귀신 들렸다함(요 10:20)
행악자라 불리움(요 18:30,31)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거절당하심(마 27:16-21)
가시관을 쓰심(마 27:29)
강도와 함께 못박히심(요 19:18)
(2) 그리스도의 고난의 목적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위함(롬 5:1-21)
죄사함으로 새 피조물이 되게 함(마 26:28)
구속받은 자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함(벧전 3:18)
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함(빌 3:10)
완전한 상태에서 영생하게 함(계 21:3,4)
(3) 그리스도의 고난의 성격
출생부터 죽음까지 전생애의 수난(마 27:46)
영육간의 전인적 수난(히 5:7)
사단의 시험으로 인한 수난(마 4:1-3)
신적 계획에 의한 수난(창 3:19)
신적 진노에 의한 수난(롬 5:8)
수치와 저주로 인한 수난(갈 3:13)
인간을 대신하여 받은 수난(롬 4:25)
(4)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음(고후 1:5)
죽기까지 순종하심(빌 2:10)
인간과 같이 시험을 받으심(히 4:15)
묵묵히 고난을 받으심(벧전 2:23)
의인으로 불의한 자를 대신함(벧전 3:18)
(5) 고난 주간 동안의 예수의 행적
일요일 - 예루살렘 성 입성(마 21:1-11)
월요일 - 무화과 나무 저주 및 성전 숙청(막 11:12-18)
화요일 - 메시야 논쟁 및 종말 강론(마 21:23-25,46)
수요일 - 기록 없음
목요일 - 최후의 만찬 및 겟세마네 기도(마 26:17-46)
금요일 - 십자가에서 죽으심(마 27:1-61
토요일 - 무덤에 머무심(마 27:57-66)
일요일 - 부활하심(마 28:1-15)
(6) 성찬의 의미
예수님과의 일치된 관계를 나타냄(눅 24:30)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짐(눅 22:19,20)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함(고전 11:26)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함(마 26:29
(7)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의 특징
마음의 짐을 토로하심(마 26:38)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심(마 26:39)
자신의 뜻을 내세우지 않으심(마 26:39)
확신을 위해 거듭 기도하심(마 26:39-44)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구하심(마 26:42)
자신을 낮추며 겸손히 구하심(막 14:35)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하심(막 14:36)
혼자 외로이 기도하심(눅 22:41)
힘써 간절히 기도하심(눅 22:44)
하나님께 기도 응답받으심(눅 22:43)
(8) 예수의 재판 순서
안나스의 예비 심문(요 18:12-14)
산헤드린 공회에서의 비공식 재판(마 26:57-68)
산헤드린 공회에서의 공식 재판(마 27:1,2)
빌라도의 1차 심문(마 27:11-14)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눅 23:8-12)
빌라도의 2차 심문 및 최종 판결(마 27:15-26)
(9) 그리스도의 가상 칠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24)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내가 목마르다(요 19:28)
다 이루었다(요 19:30)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10)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후의 사건들
지진과 성전 휘장이 찢어짐(마 27:51)
무덤이 열림(마 27:52)
백부장의 신앙 고백(마 27:54)
무리들이 뉘우침(눅 23:48)
강도들의 다리를 꺽음(요 19:38-42))
예수의 옆구리를 찌름(요 19:34)
무덤에 장사함(요 19:38-42)
무덤을 봉하고 파숫꾼을 세움(마 27:66)
(11)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
대속의 죽으심(롬 4:25)
옛사람을 멸함(롬 6:6)
사단의 권세를 이기심(히 2:14,15)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은 죽음(갈 6:14)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만든 죽음(히 10:19,20)
많은 생명을 낳기 위한 죽음(요 12:24,25)
성도들의 옛사람을 못박은 죽음(갈 2:20)
(12)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마 1:21)
성령과 불로 세례 주시기 위함(마 3:11,12)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함(마 5:17)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함(마 9:10-13)
하나님 아버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함(마 11:27)
이방인들에게까지 구원과 심판을 알리시기 위함(마 12:18)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함(마 16:18)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함(마 20:28)
새 언약을 세우시기 위함(마 26:28)
(13) 고난 주간에 임하는 성도의 자세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빌 4:14)
자신의 죄를 깨달음(욥 36:8,9)
겸손하게 회개함(벧전 5:5)
자신의 고난을 인내함(살전 3:3)
절제하는 생활을 함(고전 9:25)
말씀을 깊이 묵상함(시 1:1,2)
경건한 생활이 되도록 힘씀(딤전 4:7)
(14) 예수를 쫓는 자가 본받아야 할 그리스도의 성품
그리스도의 이타심(막 10:45)
그리스도의 부모에 대한 순종(눅 2:51)
그리스도의 성도에 대한 사랑(요 13:34)
그리스도의 영성과 거룩(요 17:19)
그리스도의 원수에 대한 사랑(롬 5:10)
그리스도의 겸손과 자기 부인(否認, 고후 8:9; 빌 2:7)
그리스도의 성부께 대한 순종(빌 2:8)
그리스도의 순결과 인내와 온전하심(히 4:15; 12:2)
(15) 성도의 고난의 목적
겸손하게 함(신 8:3,16)
죄를 깨닫게 함(욥 36:8,9)
하나님을 찾게 함(시 78:31-34)
말씀을 깨달음(시 119:71)
주의 사랑의 확증이 됨(잠 3:11,12)
진실을 시험하기 위함(잠언 17:3)
기도하도록 함(사 19:20,22)
성화의 과정임(시 66:10
하나님 곁에 있게 함(겔 14:11)
정죄를 당치 않게 함(고전 11:32)
주의 능력을 알게 함(고후 4:8-11)
주의 고난에 동참케 함(빌 3:10)
순종을 알게 함(빌 2:5-8)
평강의 열매를 맺음(히 12:10,11)
상급 받을 기회가 됨(약 1:12)
믿음이 연단됨(벧전 1:7)
은헤를 더 받게 됨(벧전 5:9,10)
마침내 천국에 이르게 함(마 10:22)
(16) 성도가 기뻐해야 할 고난
의를 이루기 위하여 받는 고난(베전 3:14)
교회를 위하여 받는 고난(골 1:24)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딤후 1:8)
연단을 위하여 받는 고난(살전 3:3)
영광을 얻기 위하여 받는 고난(롬 8:17)
[출처] 고난주간 목양 자료들|작성자 성경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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