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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영성
1. 서론: 왜 ‘영성’인가?
약 반세기 동안 서구 문화는 ‘영성’이 더 이상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게 된 변화 속에 있다. 사회주의와 실존주의, 전혀 동일하지 않은 이 두 정신이 문학과 사회를 지배하는 한에 있어서 ‘영성’과 같은 종교적인 단어들은 하잘 것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지금 이루어지는 변화는 위대한 이상들과 ‘**주의들(-isms)’이 영향력과 의미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비록 대부분 ‘냉전’기간에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원칙적으로 서로 전쟁상태에 있는 몇몇 메가 파워들에 의해서 세계가 나누어 질 수는 없게 되었다. 이런 관찰은 정치를 넘어서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유엔(UN)이 인류의 하나 되는 이상을 구체화시킨 것이라고 스스로를 묘사할 때 이것은 정치적인 함의들을 가지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정황 속에서 영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뚜렷해지고 있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유엔 안에서 로마교의 교황과 불교도인 달라이 라마가 중요한 영적인 지도자들로서 환영받는다. 테러리즘을 반대하고 다른 종류의 영성의 대표하는 한에 있어서 모슬림 지도자들조차도 유엔과 같은 국제적인 무대에서 상당히 환영 받을 수 있다는 것 또한 확실하다. 이런 모든 것들이 세계 평화와 하나 됨을 위해서 봉사하게 될 것이다.
직전 교황인 요한 바울 2세는 이탈리아 아씨시에서 대규모 종교다원적인 기도 페스티벌을 몇 차례 개최한 바 있다. 그는 영성은 서로 대립하는 종교와 철학적인 신념들이 일치를 경험할 수 있는 만남의 공간을 제공한다면서, 이것은 단지 ‘기독교’안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이 될 것으로 보았다.
우리 시대에 상당히 다양한 영적인 테크닉, 조언, 방법들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은 놀란 만한 것인데 그것들은 의미를 찾는 일에 해답을 주고자 하는 시장에 제공된다. 세상의 문화-혹은 문화들-는 여기까지 이르렀다.
인터넷에서 ‘영성’을 검색하면 거기에 빠져 익사할 정도의 너무나 다양한 웹 사이트와 책들을 만나게 된다. 검색결과 5,650,000,000개 정도의 항목이 나온다.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숫자지만 이 모든 것들이 한 방향성을 향하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오늘 내 강의가 이 주제에 해당한다고 당신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받아들여야 하겠다. 비록 그 의미가 모호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제목에서 나온 믿음이라는 단어가 아마도 이런 정황에서는 불편하게 보일 것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영성’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크리스챤들 가운데서도 이미 이 단어가 내적인 경험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크리스챤들의 삶의 방식을 설명하는 일상적인 표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말씀의 빛과 우리가 가진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크리스챤 ‘영성’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이 이해될만 할 것이다.
내 강의는 주로 칼빈의 신학, 특별히 그의 믿음의 개념을 다루는 것으로 제한될 것이다. 그것이 영성이 무엇인가를 잘 그려주고 동시에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영성이 가지는 경향들과 비교할 때 어떤 식의 차별성을 알게 해 주기 때문이다.
칼빈을 고른 것은 물론 2009년 칼빈 탄생 500주년을 맞아서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진 모임들, 책, 전시회가 있었던 사실과 관련이 있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이 선택이 또한 21세기 개혁주의가 가지는 위치와 우리 주님을 아는 지식의 중요성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2. 개혁주의의 새로운 관점
칼빈이 가진 많은 통찰력들이 개혁교회의 특징으로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칼빈으로 돌아간다. 이럴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본질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칼빈이 마틴 루터와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사람은 로마교뿐 아니라 재세례파나 당시 신령파들과도 씨름해야 했다. 루터에게는 믿음의 확실성을 말할 때 신자의 경험이 중요한 특징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판 스파이커 교수가 바르게 지적하듯, 루터의 신학은 신자의 경험이 믿음의 기초나 목적이 된다는 점을 말하는 식의 경험의 신학은 아니다.1) 루터의 가장 중요한 발견은, 구원이 하나님 곧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는 것과 복음 안에서 구원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직 믿음’(sola fide)은 구원이 우리 밖에서 곧 예수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이고, 모든 경험들 없이도 혹은 필요하다 할지라도 그 경험들에 반대되는 곳에 있다는 것이다.2)
루터뿐 아니라 칼빈도 그의 영성 때문에 영향력을 미쳐왔다. 때로 칼빈이 말하는 신앙이 경험과는 거의 관계없는 것으로 이 인물이 그려지기도 하지만, 그런 그림은 잘못되었다. 그는 신학적 이론가가 아니었다. 경험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3) 우리가 칼빈을 ‘말씀의 신학자’4)로 부를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이 영성이 부재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워필드(B. B. Warfield)를 따르자면 많은 연구들이 칼빈이 ‘성령의 신학자’로 불릴 수 있음을 증거 해 준다.5)
3. 믿음과 그리스도와 연합
정의-지식으로서의 믿음
『기독교강요』 1559년 마지막 판에서 믿음은 cognitio 곧 지식으로 정의되었다.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신실성을 근거로 삼은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고 우리의 마음에 인친 바가 된다.”6)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이것이 믿음을 지적으로 정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7) 지식에 관한 것이지만 확고하고 확실한 지식에 대한 것이다.8) 심령을 강화하고 마음의 깨달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약속들을 아는 지식은 실재적인 믿음이 될 수 없다.9) 때문에 믿음에 대한 이 정의에서 신뢰라는 요소를 놓칠 수 없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21에서 ‘확실한 지식과 굳은 신뢰’라고 이중적 정의를 사용하는 것은 칼빈-또한 루터도-이 가진 정신과 같은 것이다.10) 믿음의 지식은 이해보다는 확실성에 의해 정의된다. 바로 이 확실성 때문에 믿음은 어떤 견해(opinion)를 가지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11)
그래서 칼빈에게서 신자들의 ‘믿음의 눈’, ‘감각하다’ 그리고 ‘맛보다’ 같은 표현까지 사용하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달다’고 말하는 것 또한 믿음의 실존적인 성격에 속한 것이지 우연한 것은 아니다.12) 그리스도와 복음의 약속에 대한 믿음은 사람의 전인격에 이르는 것이다.
칼빈에게 확신이라는 요소가 지식이라는 요소만큼이나 중요하다.13) 확신은 우리가 의뢰하는 바로 그 분을 아는 것 위에 정초된다고 할 수 있겠다.14) 논리적인 지식이 먼저 오지만 믿음이 향하고 있는 그 분을 마음에 모실 때 그 지식은 분명해 지는 것이다. 믿음은 절대적으로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한 것이다. 확신이 없이 어떻게 그 분을 알 수 있겠는가?15) 지식은 우리가 신뢰하는 바로 그 분과의 관계를 암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과 확신은 함께 가는 것이다. 믿음의 성격이 그 믿음이 향하는 대상과 언제나 관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16)
『기독교강요』 3권에서 이 믿음의 정의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유익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하는 질문 후에 있다는 것을 본다. 뒤이어 나오는 설명의 주제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관련해서 적절하게 정의 될 수 있다.17) 그분이 우리의 것이 되기 전에는 우리는 어떤 은혜의 선물들도 소유할 수 없다. 택하신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산으로 주신다. 그분을 가지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다. 바로 이 틀 안에서 우리는 믿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는 것이고 성령께서 일하신 결과이다.18) 믿음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은혜로우신 약속에 대한 지식이라고 한다면 주된 주체는 신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예수 없이 믿음은 생각될 수 없다. 그것은 빈 접시에 다름 아니다.19)
믿음과 그리스도
칼빈에게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실현하는 것이다. 칼빈은 unio mystica, 신비한 연합이라는 표현을 거듭거듭 사용하는데 지체와 머리이신 예수님 사이에 한 몸이 되는 매우 밀착된 연합을 말한다. ‘실체들 사이의 섞임’을 표현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리스도와 그 분의 소유인 믿는 자들 사이의 구분은 언제나 존재한다. 오시안더와 벌인 칼빈의 논쟁에서 이 점은 분명해진다. 오시안더도 신비한 연합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오시안더에게는 이 구분(그리스도와 신자사이의)이 사라져 버린다. 그는 믿음에 의한 신비한 연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이 우리의 그것과 혼합되는 것 곧 그 연합 안에서 우리가 실체적으로 그 분처럼 되는 것을 말했다. 칼빈에게 신비한 연합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 연합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20) 칼빈이 오시안더에게서 발견한 우둔한 혼합(crassa mixtura) 같은 것이 될 수 없다.21)
신비주의는 칼빈에 의해서 거부되었지만22)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가장 중심적인 주제이다. 『기독교강요』 3권 11장 10에서 그는 다양한 표현들을 사용한다. ‘머리와 지체들의 결합, 우리의 심령에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심-말하자면 신비한 연합-’ 이런 이슈들이 칼빈에게는 믿음에 관해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이런 생각들이 칼빈 신학에서 근본적인 화두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23)
칼빈이 성령의 사역을 언급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말하지 않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성령 없이는 그리스도는 이를 테면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분이 되고 만다.24) 기독론 없이 성령론이 없는 것처럼, (오늘날에 영성론자들에 반대해서) 그리스도 없는 성령론은 있을 수 없다.25)
믿음을 언급하지 않고 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실현되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끈이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믿음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가장 높은 단계라고 본다. 이것이 바로 신비에서 신비한 연합이 표현되는 방식이다.26) 물론 우리는 믿음과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후자는 전자를 따른다. 그러나 시간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다는 의미하지는 않는다.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27)
믿음이 항상 믿음의 대상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이 믿음이 가진 성격인데 이것이 함의하는 것은 칼빈이 신자 자신에게 가장 주목하는 어떤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이 대면하는 어떤 대상이 있다는 것은 필수적이다. 물론 이것은 믿음의 경험이 이해되는 어떤 방식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신자자신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되는 그 분이 전체 그림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28) 콜프하우스(Kolfhaus)가 맞게 보았듯이 칼빈은 하나님과 그의 관계가 가진 진정성과 깊이가 그의 경건한 감정의 온도계로 측정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29) 인간중심주의와 거리가 멀었던 믿음에 대한 칼빈의 이런 언설은 매우 특징적인 것이다.30) 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혹은 그리스도께 이식되는 것을 다루는데 이것이 그의 주제인 ‘그리스도-신비주의’이다.31)
믿음은 경험을 암시한다
칼빈이 성찬에서 그리스도가 내주하심을 말할 때, 또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시지만 동시에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할 때 그는 이 신비를 도무지 설명할 수 없음을 밝힌다. 우리의 이해력과 우리의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 때 그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이해하기 보다는 차라리 경험한다’고 말한다.32) 그는 심지어 ‘하나님을 즐거워한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신비와는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다. 그는 결코 즉각성을 암시하지 않는다. 그를 즐거워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즐김이고 믿음의 지식위에 기초한 것이다. 우리의 경건함이 믿음에 정초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암중모색을 할 뿐이다.33)
제네바 신앙고백(1537)에서 칼빈은 믿음을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머물게 하는 심령의 굳고 확고한 신뢰‘라고 서술할 수 있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냉담한 동의에 만족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열망하고 맹렬하고 과감한 모험가운데 그 분에게까지 침범해 들어가는 것이다.34)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더 이상 참된 믿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다. 그러나 칼빈에게 일관되게 분명한 것은 이 경험이 최종적으로 여전히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시작부터 최종적인 성취까지 믿음의 연합이다.’35) 믿음이 의심에 의해서 어지럽혀지고 불안정하고 확신이 결여되더라도 한 번 주어진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신뢰를 여전히 지켜갈 것이다.36) 우리는 믿음에 있어서 사람이 전적으로 또 실존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경험은 언제나 믿음의 법을 통한(modo fidei) 경험이다.37)
성령의 증언
이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칼빈이 말하는 성령의 증언을 다루어야 한다. S. P. 데이는 칼빈의 믿음의 개념에 대한 그의 박사논문에서 성령의 증언은 믿음에 대한 칼빈의 견해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밝힌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도록 납득되는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인데 성령의 증언은 경험 밖에서, 우리 의식에 뭔가를 더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처럼, 증언의 내용도 그것의 대상에 놓여있다. 이 증언이 경험을 낳는다; 사람의 전 실존이 곧 그의 마음과 감정과 의지 안에서 증언에 의해서 터치된다. 마치 믿음이 경험의 순간에 (그 대상인 하나님에 의해서) 붙들리는 것처럼 성령의 증언도 마찬가지이다.38)
칼빈의 사상과 같은 선상에서 후크마는 로마서 8:16에 등장하는, 성령의 증언을 의미하는 동사가 현재로 쓰인 것을 지적한다. 그래서 이 동사는 결과적으로 지속적인 증언을 가리키는데 이 증언을 통해서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말하는 우리 영의 증언을 굳게 하신다. ‘그러나 성령의 증거에 대한 확신은 단 한번, 갑자기, 극적인 순간이나 혹은 무아경에 빠지는 감정적인 경험에서 오는 어떤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39)
성령의 증거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증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내세울 경우 양자를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는 말씀에 의한 (per verbum), 그리고 말씀과 더불어(cum verbo) 이루어지는 증거인데 칼빈은 양자 모두를 강조한다.40) 성령의 증거를 이렇게 다루는 것은 칼빈이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경험에 대해서 경계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발크(W. Balke)는 경험이 검증되고 시험될 수 있는 것이므로 칼빈이 경험을 다루는 방식을 객관적이라고 평가한다. 칼빈의 사고는 사실상 신학에 있어서 인간중심적 경향을 막는 댐(dam)과 같은 역할을 한다.41)
4.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
말씀을 통해 연결된 신앙과 경험
칼빈의 글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경험은 신앙에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신앙과 신앙의 체험은 하나님의 말씀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경험은 말씀을 확증함에 있어서 결코 이에 앞서지 않으며 단지 이를 뒤따른다.42) 시편 27편 주석에서 칼빈은 분명히 우선권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주어져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은혜에서 비롯되는 경험적 지식과 말씀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찾아야 하는데 이는 그 분께서 임재를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자 하기 때문이다.43) 신앙이 그리스도에 기초해 있으며 그 분 안에 생명을 지니고 있으므로 신앙의 확신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말씀없이 성립될 수 없다. 판 스파이커(Van't Spijker)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신앙에 포함되는데 그리스도는 자신의 약속을 통해서 자신을 제공하신다”44)고 올바르게 결론을 내린다.
신앙과 말씀은 상호 관련성을 통해서 함께 속한다. 그리스도는 복음의 옷(evangelio vestitus)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 오신다.45)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의 객관적 대상이며 목적이며 토대이다.46) 단지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게 된다. 성경의 빛이 없이는 신자는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으며 한 순간도 확신이 있을 수 없다.47)
칼빈이 이렇게 놀랄만한 정도의 솔직함으로 신자의 경험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때로 경험이 정보에 관한 독립된 출처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나는 개별 신자들이 그들 안에서 경험하는 것 외에는 말하지 않는다”48)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우리의 스승으로서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선언한 것처럼 그 분을 발견하게 된다.”49) 이것이 바로 경험의 한계에 해당된다. ‘있는 그대로의 경험’(nuda experientia)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조명을 떠나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말씀에 대한 신뢰가 경험에 선행한다. 만약 성경이 우리를 깨우치지 않는다면, 경험을 통한 지식의 충만함은 우리에게 감추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경험은 항상 귀납적이다(a posteriori).50)
루니아(K. Runia)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에 나타난 이 주제와 관련된 칼빈의 영향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경험은 실천적 논법(practical syllogism)의 형태(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제86문)와 신비적 논법(mystical syllogism)의 형태(도르트신경 I, 12 & III/IV, 13)로 신앙고백서에 등장한다. 루니아가 칼빈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앙고백서 사이에 발견한 유사점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경험이 단지 귀납적인 차원에서 말씀의 신뢰성을 확증한다는 사실이다.51) 도르트신경 III/IV, 12에서 루니아는 인간 내면에 대한 정당한 관심을 발견한다. 그러나 도르트신경 I, 12에서 그는 신경이 칼빈으로부터 인간중심적 방향으로 전환하였음을 발견한다. 여기에서 확신의 기초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대한 인식에서 추구된다.52)
그러나 루니아가 도르트신경을 이렇게 해석한 것은 정당하지 않다. 여기에 언급된 선택의 열매는 정확히 신앙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 열매를 통해서 신앙의 비인간중심적(non-anthropocentric)인 성격이 인식된다. 도르트신경 I,12에 언급된 내용이 결코 견인에 대한 확신이 특별한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V,5 (오류에 대한 반박)에 나타난 내용과 상치되지 않는다. 로마 가톨릭 교리의 일부로서 확신을 위해서 개별적 계시를 받아야 한다는 인간중심적 견해를 거부하는 것은 도르트신경을 포함한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이 이 문제와 관련해서 어떤 경계를 설정했는가를 완전하게 보여준다.
동일한 문제가 하르트벨트(G. P. Hartvelt)에 의해 제기되었다.53) 은사주의 운동의 도전이라는 배경을 고려하면서 그는 벨직신앙고백서(the Belgic Confession) 제5항(“눈 먼 자들이 그들에게 전해졌던 것이 성취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과 제9항(“성경의 증거와 그 활동으로부터, 그리고 우리 안에서 느끼는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안다”)에 나타난 경험적 표현들을 다룬다. 그는 어떤 종류의 역사적 발전이 고려되어야 할 것인가를 인식하면서 신앙고백서의 이 조항들이 그리스도와 성령, 신앙과 경험 사이의 관계가 다소 균형을 잃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우에 성경을 떠나서 계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성령의 증거가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되었다는 사실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말씀을 떠난 계시는 없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제1권에서 성경에 주어진 말씀이 계시로서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계시를 추구하는 자들을 부인하기 위해서 한 장(chapter)을 할애한다.54)
성경을 제외한 계시는 사탄의 영 또는 하나님의 영과 관련된다. 성령은 말씀과 관련 없이 독립적으로 사역하시지 않는다.55)
칼빈은 자신이 신비주의자(mystics)나 영론주의자(spiritualists)로 간주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성령이 새로운 계시의 저자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성령은 자신을 말씀에 묶으신다: “마치 서명하는 것과 같이 복음의 영은 복음을 확증한다.”56)
신앙이 없이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이라는 수단 없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나아간다는 신비주의를 칼빈은 전심으로 거부한다.57) 성령이 단지 성경을 확증한다고 우리가 가르친다면 하나님의 영에 대하여 잘못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 16:13이하를 주석하면서 칼빈은 심지어 어떤 사람이 성경과 관계없이 새로운 내용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한다면 이는 성령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는 그의 사역인 성경을 불충분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단지 성경에서만 우리는 최종적이며 압도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한다.58) 이러한 칼빈의 견해는 베르너 크루쉬(Werner Krusche)의 칼빈의 성령론에 대한 분석에 잘 요약되어 있다:
말씀을 언급하지 않은 채 스스로를 나타내는 영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거짓의 영이다. 또한 영을 동반하지 아니하는 말씀은 구원에 이르는 효력을 상실한 말씀이다. 그러나 영을 동반하는 말씀은 신적 구원의 효력을 지닌 수단이다. 이러한 결정적 행위는 성령에게 돌려진다.59)
성령의 인도하심에 관해서 논의할 때 칼빈은 결코 성령에 의해 수용된 특별한 행위들에 호소하지 않는다.60) 사도행전 23:11을 주석하면서 그는 감각적이고 비정상적인 경험을 통한 인도를 추구하기를 거절한다. 우리는 꿈, 환상 또는 오라클(oracle)을 기대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오히려 성령의 인도하심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명령과 함께 일어나며 성경을 통해서 훈계한다. 성령은 신자들을 구체적인 상황에서 그의 명령에 순종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인도하신다.61)
5. 결론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에 의하면 영성이라는 분야에 있어서 칼빈은 신뢰할 만한 안내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영성을 세상의 것과는 다른 것으로 인식하며 이것이 우리의 창조주이며 구속자이신 분을 아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게 된다. 이제 우리가 발견한 것을 여섯 가지로 나누어서 정리해보자.
1)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실존적인 개념이다.
루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칼빈에게 신앙은 가장 실존적인 개념에 해당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아는 것은 그 분과 살아있는 교제를 갖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교제 속에 사람의 모든 것이 - 그의 감정과 인식을 포함하여 - 포괄된다. 결과적으로 신자의 전체적 실존이 신앙과 믿는다는 용어로 묘사될 수 있다.
2) 신앙은 그리스도에게 몰입하는 것을 뜻한다.
신앙의 경험론적 차원은 신자 자신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항상 그 대상에 몰입하는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신앙은 인간 중심적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중심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이다. 이는 또한 신앙의 도구적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종교적 경험은 이러한 신앙의 성격에 의해 검증되어야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기독교적 신앙의 경험에 있어서 핵심임을 뜻한다.
3) 신앙은 신비주의가 아니라 신비적 연합에서 비롯된다.
칼빈이 사용하는 용어 ‘신비적 연합’(unio mystica)은 신비주의적이라고 불리워질 수 없다.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상호성을 지니는 신앙에 의한 교제에 해당된다. 하나님 안에서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상실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앙은 신자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몰입하도록 이끈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결코 신앙에 부차적(extra)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전적으로 신앙의 경험에 해당된다.
4)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
성령의 증거로 나타난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향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신앙과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 인간의 존재 전체에 관여함, 특정한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실재성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부분으로서의 경험
5) 경험 - 신앙 - 말씀
신앙이 경험을 함의하듯이 단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라는 차원에서만 경험은 적합성을 지니게 된다. 신앙과 경험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배된다. 어떤 경험이 적합성을 판단 여부는 이러한 차원 외에 성경 말씀에 얼마나 충실한지가 그 관건에 해당된다.
6) 더 이상의 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칼빈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계시는 변호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계시들은 원리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저하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마도 이 정리는 최종적으로 다음의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의 영성은 신앙의 영성으로서 이는 살아있는 신앙, 즉 생명으로 가득 찬 신앙과 신앙으로 가득 찬 생명을 가리킨다.
주
1) W. van ‘t Spijker, Luther–belofte en ervaring(약속과 경험), Goes, 1983, 192.
2) Spijker, Luther–belofte en ervaring, Goes, 1983, 195f.
3) W. Balke, ‘The Word of God and Experientia according to Calvin,’ in W.H. Neuser (ed.), Calvinus Ecclesiae Doctor, Kampenn.y, (19-32), 20. ‘우리는 칼빈이 그의 신학에서 현실적인 실재 너머 어딘가에서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리를 실재와 관련시키기 위해서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Cf. S. van der Linde, De leer van den Heiligen Geestbij Calvijn(칼빈에게서 성령론), Wageningen 1943, 1f.; J. van Genderen, ‘Calvijns dogmatisch werk,’ in J. van Genderen e.a., Zicht op Calvijn, Amsterdam, 1966, 43ff.
5) Van Genderen, 'Calvijns dogmatisch werk’, 40.
6) 『기독교강요』 3.2.7.
7) On this reproach see Van Genderen, ‘Calvijns dogmatisch werk,’ 7. Cf W. Kolfhaus, Christusgemeinschaft bei Johannes Calvin, Neukirchen, 1939, 47f; A.A.Hoekema, Savedbygrace (GrandRapids : Exeter, 1989), 139-142.
8) See W. Krusche, 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Göttingen, 1957, 261f.
9) 『기독교강요』 3.2.7.
10) 『기독교강요』 3.2.15.; also 『기독교강요』 3.2.16 and 33. Cf. H. Schützeichel, Die Glaubenstheologie Calvins, München, 1972, 128.
11) ‘opinio’. See Schützeichel, Die Glaubenstheologie Calvins, 130f.; Van der Linde, De leer van den Heiligen Geestbij Calvijn, 141f.
12) See Schützeichel, Die Glaubenstheologie Calvins,133.
13) See 『기독교강요』 3.2.33. ‘이로 보아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인간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화되고 지원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조명을 받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See also S.P. Dee, Het geloofsbegrip van Calvijn(칼빈에게서 믿음의 개념), Kampen, 1918, 36f.; Krusche, 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263.
14) Cf. 『기독교강요』 3.2.2. ‘그리스도를 통해서 화목이 성립되었기 때문에(고린도후서 5:18-1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비로운 아버지시며 그리스도를 의와 성결과 생명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구원을 얻는다.’ See for broader reading in Calvin Dee, Het geloofsbegrip van Calvijn, 24.
15) Krusche, 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264.
16) die Gegenstandbezogenheit des Glaubens’; see Krusche, 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264.
17) Krusche, 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264.
18) See Niesel, Die Theologie Calvins, München, 1938, 115-17.
19) Niesel, Die Theologie Calvins, 118. Cf. Belgic Confession, art 22.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해서 우리는 이것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우리를 의롭다 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 우리의 의를 받아 안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0) 오시안더에게 이것은 결과적으로 의롭다 하심의 분석적인 교리를 가져오게 되는데 그 안에는 믿음이 독특한 성격이 사라져 버린다. Cf. Kolfhaus, Christusgemeinschaft beiJ ohannes Calvin, 61. On Osiander’s theology see also M.J.Arntzen, Mystieke rechtvaardigingsleer, Kampen, 1956.
21) Cf. Kolfhaus, Christusgemeinschaft bei Johannes Calvin, 24-28.
22) Niesel, Die Theologie Calvins, 119, writes:신실한 자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어느 곳에서도 칼빈에 의해서 이렇게 가르쳐 지지 않았다; 경건한 자가 신비한 방법으로 신적인 존재의 영역으로 흡수 동화된다고’ Cf. J. van Genderen, Geloofskennis en geloofsverwachting, (Apeldoornse Studie17), Kampen, 1982, 21; ookH.W.de Knijff, ‘Mystiek en Schrift’, in RhW. 15, 2(1973), 17-25; W.Stanford Reid, ‘Bernard van Clairvaux in the thought of John Calvin’ in WThJXLI, 1(1978), 127-145.
23) W. van ‘t Spijker,’ ‘Extra nos’ en ‘in nobis’ bij Calvijn in pneumatologisch licht’, in ThRef 31(1988),[271-291],272(ook in: idem, Geest, Woord en kerk, 114-132). Cf. Schützeichel, Die Glaubenstheologie Calvins, 164f., who indicates that with Calvin Christ is the object as well as the scope of faith. Krusche,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266, also speaks of a central doctrine(‘Zentrallehre’).
24) 『기독교강요』 3.1.3.
25) Van ‘t Spijker, “Extra nos’ en ‘in nobis”, 279f., 282f.
26) See Kolfhaus, Christusgemeinschaft bei Johannes Calvin, 37. We should also compare the expressions in the Heidelberg Catechism: ‘I am a member of Chris t by faith’(answer 32);‘implanted into Christ by a true faith’(answer 64).
27) 칼빈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이 믿음의 효과라고 본다. 동시에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실존적인 연합인데 그의 영에 의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믿음과 내주는 이처럼 거의 동일화될 수 있을 정도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See Kolfhaus, Christusgemeinschaft bei Johannes Calvin, 39f; Van‘t Spijker, “Extra nos’en ‘in nobis”, 283.
28) Krusche, 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265.
29) Kolfhaus, Christusgemeinschaft bei Johannes Calvin, 133f.
30) Van Genderen, ‘Geloofskennis’, 24, says: ‘칼빈에게서 인간과 인간이 가진 경험이 중심에 위치한 적은 없다. 그것은 그의 깊은 의도와는 대립하는 것이다.’ Kolfhaus, Christusgemeinschaft, 133, ‘칼빈과 클레어보의 버나드의 차이를 이 관점에서 말한다. 칼빈에게는 경건한 영혼과 그의 경험이 중심에 서 있지 않고 그리스도와 그 분에게서 지체들이 받은 생명이 중심에 있다.’
31) Kolfhaus, Christusgemeinschaft, 139
32) 『기독교강요』 4.17.32.
33) See Kolfhaus, Christusgemeinschaft, 130; cf. Schützeichel, Die Glaubenstheologie Calvins, 133f.
34) Cf. Kolfhaus,Christusgemeinschaft,143.
35) Kolfhaus, Christusgemeinschaft,147.
36) 『기독교강요』 3.2.17-21.
37) See also Schützeichel, Die Glaubenstheologie Calvins, 144-146; W.Balke, ‘Kanmen bij Calvijn spreken van bevindelijke prediking?’, in A.G. Knevel (red.), Bevindelijke prediking, (27-37) 34ff.
38) See S.P. Dee, Het geloofsbegrip van Calvijn, Kampen 1918, 114-177, and specifically 133-135; W.Balke, ‘The Word of God and Experientia according to Calvin,’ in W.H.Neuser(ed.), Calvinus Ecclesiae Doctor, Kampenn.y., (19-32) 27f.; Krusche, 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204-222. In Krusche, 213, weread: ‘성령의 증언은 확실성에 작용하는 원천이다. 이 원인은 그 작용들 안에서 경험될 수 있는 것인데 도출된 확실성안에서 또 그 자체 안에서 경험될 수 있다.’ See also K. Exalto, De zekerheid des geloofs bij Calvijn, Apeldoorn 1978, 33-36.
39) A.A. Hoekema, SavedbyGrace,GrandRapids/Exeter1989,149f.
40) E.g. Institutes 3.2.34; Comm. on 2 Cor. 4,6. See also Van Genderen, Het getuigenis van de Heilige Geest, 18. C. Graafland, ‘Waarheid in het binnenste’. Geloofszekerheid bij Calvijn en de Nadere Reformatie’ in Een vaste Burcht voor de Kerk der eeuwen (Festschrift K. Exalto), Kampen 1989, 53-81, emphasizes the distinction.
41) Balke, ‘Calvijn en de pinksterprediking’, 30, writes: ‘Here Calvin throws up a dam against an oncoming wave of anthropocentric subjectivism and individualism already felt in the Renaissance.’
42) Cf. van ‘t Spijker, ‘Experientia in reformatorisch licht’, in ThRef 19 (1976), (241-267) 249f.
43) Comm. Psalm 27,8-9.
44) Van ‘t Spijker, ‘’Extra nos’ en in ‘nobis’ in pneumatologisch licht’, 283.
45) Cf. Kolfhaus, Christusgemeinschaft,40, 42, 53, 128, 135f.
46) Schützeichel, Die Glaubenstheologie Calvins, 125, 137.
47) Kolfhaus, Christusgemeinschaft, 141
48) Institutes 1.7.5.
49) Institutes 1.10.2.
50) Balke, ‘The Word of God and Experientia according to Calvin’, 23-26; see also K. Runia, ‘Bevinding en ervaring’, in Tussen openbaring en ervaring (Festschrift G.P. Hartvelt), Kampen 1986 (133-145), 139.
51) Runia, ‘Bevinding en ervaring’, 139.
52) Runia, ‘Bevinding en ervaring’, 141.
53) G.P. Hartvelt, ‘IJle balans’, in idem (ed.), Op het spoor van de Geest. Theologische opstellen. Vragen aan en kanttekeningen bij de charismatische beweging, Kampen 1978, 31-53.
54) Institutes 1.9.
55) Institutes 1.9.2. See W. Balke, Calvijnen de doperse radikalen, Amsterdam 1973, 98f. Krusche, 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213f.; Dee, Het geloofsbegrip van Calvijn, 134f. The same argument is to be found in a lecture by L.H. van der Meiden, De bijzondere Geesteswerking met het Woord, Dordrecht 1949, 17-21. He poses, that de Holy Spirit does not give new revelations, and he warns for ‘the great danger that we consider revelations of our own spirit as the work of the Holy Spirit. It is even possible that a spirit of Satan would creep up on us under the name of the Holy Spirit.’ He emphasizes that the Spirit is not absorbed in the Word. We have to recognize the special operation of the Spirit, however, ‘with the Word’.
56) ‘Spiritus evangelii quasi subscriptor confirmat.’ CalviniOpera(C.O.)47,335.
57) Cf. Kolfhaus, Christusgemeinschaft,126f.
58) Comm. on John 16,13-14. C.O.
59) Krusche, 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255.
60) Krusche, 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293. See also P.F. Jensen, ‘Calvin, Charismatics and Miracles’ in EvangelicalQuarterly Vol. LI (1979), 131-144; K. Exalto, De zekerheid des geloofs bij Calvijn, Apeldoorn 1978, 32f.
61) See Krusche, 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293-294. Calvin’s reserved attitude toward any revelation or guidance of God without being connected to the Word must be discounted, when we see a tendency in his writings to consider the charismata as not being restricted to the believers, but also applied in all knowledge in the field of human society and its needs. He connects these gifts to the kingship of Christ, that is extended to the entire creation. See Krusche, 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122-124. A criticism of Calvin’s view in this respect was given by J. Douma, Algemene genade, Goes 1966, 325, who rightly remarks that this thought comes short of the Christocentric nature of grace. See on Calvin’s doctrine on the prophetic charisma also H.-J.Kraus, ‘Charisma prophetikon’, in Biblisch-theologische Aufsätze, Neukirchen/Vluyn 1972 (235-257), 249-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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