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론의 역사적 고찰
초대교회의 성령론
성령의 교리는 삼위일체 교리의 형성과 더불어 잡히기 시작하였다. 4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말하게 되었다.
신학자들은 성령의 일하심이나 역할에 대한 관심보다는 성령의 신성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다. 그것이 당시에는 의문점이고 선결과제였다. 성령의 일하심이나 역할에 관한 언급이 더러 있기는 하나 그것은 성령의 신성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니케아신조에서는 하나님의 삼위의 동질성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아들 뿐 아니라 성령에 관하여도 언급하고 있으나 단순히“성령을 믿는다.”는 한마디밖에 없다.
저스틴 (Justin Martyr, ~165)은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 될 것이고 그의 은사와 은혜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어주실 말씀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성령은 기독교를 최고의 철학이 되게 하는 조명의 원천이라고 했다.
이레니우스는 성령과 아들은 “하나님의 손”으로서 창조와 계시에서 긴밀히 함께 일하신다고 한다. 사람은 먼저 성령께, 다음으로 아들에게, 그다음으로 아버지께로 다가간다고 한다. 아버지는 결정하시고 아들은 집행하시면 성령은 계속 수행하신다고 한다. “ 만유 위에 계신 아버지가”, “만유를 통하여 말씀이”, “만유 안에 성령”이라고도 표현한다.
나지안주스의 고레고리는, 정통을 표방하는 현자들 가운데도 성령을 그냥 ‘활동’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냥 피조물로 이해하는 사람, 혹은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령을 예배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그의 영광에 손상이 되게 대하지도 않고 중립적 입장을 취할 뿐이라고 한다. 심지어 성령을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마음으로만 정통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입술로만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레고리는 말한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라고 논증하면서 성령이 아들에 대한 관계에서 ‘동일본질’이시라고 말한 것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성령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에 속하였으며 그 한 분이시다. 피조물은 무에서부터 앗으며, 성화와 생명을 받아 누리는 자이고 가변적이며 제한되고 불어나는 존재이지만, 성령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시며 성화와 생명을 주시고 불변하시며 유일하신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동일하시며 분할됨이 없으시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분이시므로 성부와 성자와 동일본질이시다.
성령은 성자와 밀접한 관계에 거하시며 성자가 성부에게 속하듯이 성령은 본질적으로 성자에게 속한다 .성령은 아들의 영이시며, 우리를 성화시키시고 깨닫게 하시며 생동하는 활동이시오 은사이시다. 성령은 성자와 함께 참여하시며(시104:29, 33:6), 선지자들에게 영감을 주시고 성육하시는 일에 함께 역사하신다. 아타나시우스는 또한 성삼위가 다 하나이시며, 같은 활동을 가지시므로 “성부는 말씀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을 성취하신다.”고 말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성령과 하나님의 관계는 고린도전서 2:11의 말씀,“사람의 일을 사람 속에 있는 영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하는 말씀을 인용하여 인간의 영과 인간 자신의 관계와 같다는 유추로 설명한다.
성령을 하나님에게서 오시는 분으로 서술하는 것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라고 말할 때 와같이 성령이 피조물이란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에게서”라고 할 때,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나심을 가리켜 말함 같이 성령의 경우도 그러하다고 한다. 아들의 경우는 나셨음(탄생)을 뜻하지만, 성령의 경우는 요한복음 15:26절에 있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나오신다’고 현재형의 단어를 사용한다.
디디무스는 성령은 하나님이 모든 좋은 은사로 충만하시므로 성령은 그러한 초월적인 원천으로 인식되어야 하며, 따라서 육체를 가진 피조물과는 다르신 분, 즉 하나님이심이 틀림없다고 한다.
교부들은 또 구원론적으로는 세례를 들어 성령론에 접근하였다. 니케아신조를 변호하려는 이들은 일찍이 아리우스주의를 공박하기 위하여 마태복음 29:19의 세례의식의 말씀을 인용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의 삼위일체론에 근거하여 말한다. 세례가 행해지면 아버지가 세례하시는 자를 아들이 세례하시며, 아들이 세례하시는 그 사람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받는다고 한다.
서방에서는 힐라리우스가 동방에 체류하면서 아타나시우스와 협력하여 유사본질을 주장하는 자들을 설득하는 한편 시벨리우스주의를 거부하면서 삼위의 인격을 분명히 구별함과 동시에 삼위의 동실체를 주장하였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그의 독특한 형식은 “삼위는 하나이시니 인격의 합일이 아니고 실체의 하나이심이다.”
동. 서 교회의 ‘필리오케 논의
‘필리오케, 즉 “그리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는 서방의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한마디로 표형하는 말이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삼위일체론에서’그리고 아들에게서‘를 대단히 중요한 교리로 생각한다.
어거스틴은 삼위의 본질은 공통적이지만 삼위는 한분이 다른 두 분과의 관계에서 가지시는 임무에 따라 구별된다고 하며, 하나님의 내적인 본질 안에서 갖는 성령의 특별한 속성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삼위일체 안에서 시간의 차가 없지만, 성령의 나오심은 아들의 나심 후에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성경이 성령을 일컬어 아들의 영이며 또한 아버지의 영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며,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과의 관계에서는 한 ‘원리’라고 한다. 어거스틴은 성령이 아들의 영이시기도 한데 왜 아들에게서도 나오신다는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후에 동, 서 교회 간에 ‘필리오케’ 논쟁이 있을 을 때 서방측 학자들은 어거스틴의 이러한 논증을 많이 인용하였다.
동서 교회 간에 균열을 가져온 가장 중요한 교리적인 이견은 ‘필리오케’에 대한 것이다. 서방교회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다고 하는 반면에 동방교회에서는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고 주장하였다.
서방은 ‘필리오케’교리가 삼위일체의 하나이심과 능력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믿으며, 반드시 ‘필리오케’교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삼위일체의 하나이심에는 손상이 없다고 여기는 반면에, 동방에서는 헬라철학에서 말하듯이 제일 원리는 단일하다는 개념에 근거하여 성부께서 삼위일체의 유일한 원천이 되신다는 생각에서 ‘필리오케’를 반대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용한다.
동방신학과 서방신학의 현저한 차이점은 신론에서 볼 수 있다. 동방에서는 하나님의 본체를 따라 논하는 반면에, 서방에서는 삼위의 관계를 따라서 논하였다. 삼위일체를 논하면서 어거스틴은 성령을 “성부와 성자가 서로 사랑을 주고받게 하는 상호간의 사랑”으로 본다. 성령을 사랑으로 보는 것은 서방의 정통적인 삼위일체론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므로 자신을 나오게 하시는 성부 및 성자와 연합하려 하시기 때문에 성령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옳다고 본다.
중세교회의 성령론
교회는 451년 칼케돈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오 참 사람이시며, 그의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거나 혼동되는 일이 없으며, 그렇다고 분리되는 것도 아니라는 소위 칼케돈 신조를 채택하게 되었다. 그 이후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의지가 신적이냐, 신적인 의지와 인간적인 의지와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는 사변적인 논의를 벌였다.
성령에 관해서는 삼위일체 교리를 논하거나 기독론을 말하면서 언급하는 정도였지만 차츰 구원을 다루면서, 또 은혜의 수단으로 이해하는 성례를 다루면서 성령의 역할에 관하여 기술하게 된 것을 보게 된다. 베르나르드 클래보(1091-1153)는 삼위일체 교리가 사변적 구상이나 교묘한 논리적 연습의 산물이 아니고 구원론적 필연이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에는 물론이요, 그리스도인의 삶에 불가결한 것이라고 말한다.
성례를 논함에서도 성례가 유효한 것은 집례자의 공로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한다. 마이쯔의 대주교 라비누스 마루스(~856)가 지은 찬송 “창조주 영이이 오소서”에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중세의 전통적 이해를 일곱 가지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중세 교회의 기독론과 성령론을 대표하는 신학은 아니었다. 성례와 은혜의 수단에 대한 사변으로 인하여 마리아 숭배, 성자 숭배, 연옥설 등이 발전하는 바람에 예수그리스도께서 구세주가 되시고 중보자 되신다는 신앙이 오히려 가려지게 되었다.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가 교회는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는다고 역설했으나, 교계주의의 발전으로 교회는 성직자단과 평신도 무리로 구성된 이층구조로 이분된 교회로 이해하게 되었다.
13세기 초에는 성찬의 화체설과 교직자의 제사장설이 교의화 됨으로 말미암아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계주의 교회로 확립되었다.
13,14세기 신비주의는 소위 영성과 경건을 강조하엿으나, 그들은 초대교회의 삼위일체론에 근거하여 성령을 이해하지 않고, 유출설에 근거한 불건전한 성령관을 가지고 있었다.(p326참조)
종교 개혁과 그 이후의 성령론
칼빈은 성령께서 교회를 다스리신다는 로마 카톨릭의 견해에 동의하는 한편, 성령께서는 말씀과 함께 역사하심을 강조하면서, 말씀 없이 성령을 강조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요, 성령 없이 말씀만 앞세우는 것도 불합리 하다고 말한다. 쯔빙글리 역시 같은 말을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성례를 가시적인 말씀이라고도 하고 성찬을 예수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가리키는 표지 혹은 징표로 이해한다. 칼빈은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성례를 하나님의 언약의 징표로 이해한다. 성례는 하나의 외적인 징표인데, 주님께서 그것을 가지고 우리 마음에 약속하신 언약을 인 치셔서 우리 신앙이 연약하게 될 때 보호하신다고 한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에 있어서 ‘효력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징표일 뿐이지만, ‘효력을 발생하는 징표’라고 한다. 성례는 성령을 돕는 도구에 불과하다. 성령은 성례에 의해 매이지 않으며, 세례의식 밖에서도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을 이루실 수 있다고 말한다.
종교 개혁시대에 나온 개혁주의 신앙고백서 가운데 벨기에 신앙고백(1561년)과 성공회의 39개 신조(1563)에는 성령에 대하여 고백하는 조항을 따로 두고 있으나, 그 밖의 신앙고백서에서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있으나 성령에 대한 고백은 따로 두지 않고 그냥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에서만 하고 있다.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에서도 마찬가지다. 성령에 대한 본체론적 고백 없이 성도의 구원의 서정에서 말씀과 함께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산발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종교개혁이후 약 백년간을 정통주의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대에 개신교 신학자들은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개신교의 신앙을 변증하다 보니 기독교의 객관적 교리확립에 치중하였다. 17세기 계몽사조가 일어나면서 교회에는 이에 부흥하는 계몽신학이 성행하게 되었다.(p332)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계몽주의 신학에서 그 유산을 이어받은 것이다.
17세기 후반에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은 객관적인 교리 변증에 치중한 정통주의에 반발하여 일어난 운동으로 성령의 주관적 역사를 강조함과 동시게 신자의 내적인 신앙 경험, 즉 회개와 중생, 새 사람이 되고 새 사람으로 사는 일을 강조하였다.
18,19세기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신앙의 부흥운동, 즉 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자유의 신학이 성령론을 거의 망각한 상태에 있음에 반하여, 경건주의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그 만큼 더 대조적으로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정치와 문화영역에 더 널리 적용하고 실천한 소위 신칼빈주의를 대표하는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는 성령의 사역을 더 넓은 의미로 이해한다.
종래에는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주로 교회론과 구원론에 관련시켜 논의해 왔으나, 카이퍼는 성령의 사역을 더 확대하여 천지를 창조하고 만물을 운행하고 보존하시는 일과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인류의 전 역사와 그리스도의 성육과 그 전후의 전 구속 역사를 주관하시는 일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기술한다.
카이퍼의 성령론은 구원을 중심한 성령의 사역을 강조함과 더불어 일어난 당신의 부흥운동과 부흥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성령론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합리성에 근거하여 체계를 갖춘 정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은 합리주의적인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정통신학을 변증하는 일에 충실했으며, 정치와 문화에도 신학적 관심을 보였다. 방대한 체계를 갖춘 개혁주의 세계관은 부흥주의 신학의 편협한 세계관을 압도하는 한편, 자유주의 신학과 기타의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대치하여 기독교 진리를 변증한다. 그래서 그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의 선교적인 부흥에는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 아마도 전체적으로 조화를 갖춘 체계 있는 신학과 교회부흥과 선교에 관심을 집중하는 신학과의 차이가 그런 면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일어난 오순절 성령운동은, 오순절파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부흥운동에서 보다 진전된 운동이라고 하지만, 시각에 따라서는 미국의 제2차 각성 운동 이후에 일어난 종파 운동처럼 부흥운동에서 파생된 과격한 부정적인 운동으로도 볼 수 있다.
완전한 성화, 제2의 축복, 완전주의, 천년왕국신앙, 시한부종말론, 만인 구원론, 신흥종교의 운동이 미국의 제2차 각성운동 이후에 일어난 운동들이다.
부흥운동이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는 운동이며 그들에게 생활의 성결을 촉구하는 운동임에 반하여, 오순절 성령운동은 방언과 병 고치는 은사를 강조하고 오순절의 성령강림이 재현되는 것을 역설하는 운동이다. 교회사적으로는 오순절 운동 역시 19세기 후반부터 신학의 좌경화가 심화된 역사적 상황에서 그것에 대한 역반응으로 성령의 일하심을 강조하고 과시하게 된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20세기 후반에 와서 오순절 성령운동의 확산으로 성령에 관한 교리를 재점검하고 새롭게 연구하는 일이 중요한 신학적 과제의 하나가 되었다. 오순절 교회가 ‘오순절 성령 강림’의 재현을 말하며, ‘성령세례’와 ‘성령의 은사’를 ‘제2의 축복’ 사상과 연결시켜 새로운 견해를 피력하므로, 이러한 주제들이 오늘의 성령론 연구의 초점이 되었다.
김영재 기독교교리사 강의
필리오케 논쟁
니케야-콘스탄티노플신조 (주후381년)/러시아 정교회 신앙고백문.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 그는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시다. 그리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모든 시대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낳으신 자이시고,빛으로부터 나온 빛이시며,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참 하나님이시다.그는 피조되지 않았고,낳으셨고,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그분을 통하여 만물은 존재하게 되었음을 믿는다.그는 우리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셨고,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육신하시어 인간이 되셨고,본디오 빌라도 밑에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고난받으시고,묻히셨다가 성경대로 제3일만에 일어나셨으며,하늘에 오르셨고,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믿는다.그는 주이시며,생명의 수여자이시며,아버지로부터 발출된 자이시고,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받으시고 영광받으실 분이시며,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분이다.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우리는 죄를 사면하는 하나의 세례를 고백한다.우리는 장차 올 세계에서 죽은자가 생명으로 부활할 것을 기대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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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신조는 2000년 기독교회사에 있어서 모든 교회가(동방교회,천주교,개신교) 공동으로 그 권위를 인정하는 가장 훌륭한 신앙고백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조가 천주교회와 개신교 예배시간에 자주 고백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필리오케(filioque:그리고 아들로부터) 문제 때문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381년 니케야-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하여 이러한 신조가 공식 책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를 중심한 서방교회에서는 7-11세기 사이에 이 신조에다가 -필리오케-라는 귀절을 제멋대로 첨가하는 교회지도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이들은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따라서 "성령은 사랑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결속되어 있다는 확신에 기초하여,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한다-라고 표현하고 고백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가르치고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이러한 여론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확신으로 굳어져 갔다.
그러던 중 로마천주교회의 교황 베네딕트8세가 1014년에 공식적으로 이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에다가 -필리오케-라는 귀절을 삽입하였다.동방교회는 교회공의회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채택되고 공표된 신조문을 로마대교구 총대주교(교황)가 제멋대로 바꾸었다고 몹씨 분개하였다.
이후 천주교회는 자신의 행동을 여러가지로 변호하였으며,요한복음 15:26절이 자신의 행동을 지지한다고 항변했다. 이후 불행하게도 1054년 동,서방교회가 공식적으로 대분열을 선언한 이후,이 문제에 대하여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최근 1982년에 페루의 리마에서 모인 WCC 산하 기관인 "신앙과 직제"위원회에서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야말로 세계기독교회 일치를 이루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신조임을 선언하고,다른 모든 기독교회들도 이 신조를 공식 인정하도록 촉구하였다.
이러한 촉구에 귀를 기울여서 개신교회와 천주교 신학자들은 오랜 토론과 연구 끝에 이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를 -필리오케-라는 귀절을 삭제하고 원래모양 그대로의 형태를 사용하기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따라서 이 신조는 앞으로 온 세계에 있는 기독교회들의 일치를 이루기 위한 기초석으로 작용할 것이기에 이 신조가 지니는 가치와 의의는 매우 크다 하겠다.
(참고자료:장로교 신조/신앙고백 안내서,간추린 신앙선언,잭로저스 지음,차종순 옮김,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1995. pp.58-63, 남정우,개혁교회와 동방정교회 에큐메니칼 대화에 관한고찰(서울: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 미간행 석사논문(교회사부분),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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