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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지도자론

하나님아들 2021. 12. 6. 20:57

성경적 지도자론



지구촌교회 담임목사 이동원 목사



Ⅰ. 시작하는 말

오늘날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비판받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 세기전만 해도 지도자가 베일(Veil) 뒤에 숨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사회가 급격하게 빠른 속도로 민주화(民主化)되어가고 모든 사람의 모든 것이 공개되는 정보시대가 되어가면서 우리는 이른바 지도자의 노출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근대 미국의 대통령 선거 매마다 후보들의 숨겨진 과거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자 한 미국의 코미디언은 앞으로 대통령감은 인간 속에서는 찾아낼 생각을 말아야 한다고 경고(?)아닌 경고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딤전3:1). 새로운 영어성서 번역(New English Bible)은 이 구절을 "지도자 됨을 열망하는 것은 명예로운 야망이다(To aspire to leadership is an honourable ambition)"라고 옮기고 있다. 그리스도인 지도자의 경우 우리는 특히 그를 가리켜 '영적인 지도자(spiritual leader)'라고 불러 지도력의 '존귀성(integrity)'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필자는 '영적 지도력(spiritual leadership)'과 '세속적 지도력(secular leadership) '의 이원적 구분을 본질적으로 거부한다. 우리가 지도력을 행사하는 영역에 따라 지도력의 영성(spiritual)이 결정된다고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가진 목사라는 신분이 곧 우리의 영작 지도자 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의 지도력을 행사하는 동기와 태도와 목표가 지도력의 영성을 드러낸다고 본다.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는 그 시대의 한 지도자에게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그것을 경영하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게 재앙을 내리리라"(렘 45:5)고 경고하지 않았는가! 시편 기자가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시 115:1)라고 기도한 이유를 알 만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적 지도자'임을 자긍하기에 앞서 우리가 소위 "영적 지도자 됨"을 인식하는 근거가 무엇임을 먼저 물어야만 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 "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사역의 자리에 설 때 비로소 우리의 지도력의 영성을 말할 수가 있다고 믿는다. 지나간 구약시대의 지도자 느헤미야는 설교자도 전도자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영적 지도력을 말할 때마다 그를 천거함은 왜일까? 그것은 분명 그가 종사한 사역의 유형(類型, Type)때문이 아니고 그의 사역의 동기와 태도, 목표 때문이었던것이다. 지도자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지도자의 물량적 과잉 공급시대에 오히려 지도자의 없음을 말해야 하는 이 혼돈의 시대에 느헤미야서를 여는 것은 가히 충격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한 시대를 살아간 분명한 역사적 인물이면서도 그의 모본(example)은 실로 시대를 초월한다. 그는 어제의 사람이면서 너무나 신선한 오늘의 사람으로 우리에게 걸어온다. 그의 투명하고 견고한 그림자에서 우리는 참된 영적 지도력을 만난다. 그리고 그가 살아있는 몸으로 시연(示演)한 역사의 무대 위에서 우리는 성경적 지도자론의 정체를 벗겨보기로 한다.



Ⅱ. 펼침

1. 기도의 사람

이 말은 단순히 그가 기도를 하는데 많은 시간을 바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물론 그는 기도를 많이 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말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를 지닌다. 기도는 "바라봄"이다. 진실로 느헤미야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선 세상을바라 본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자리에서 그 세상에 대한 해답을 바라보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우리가 표리적으로 기도하는 성자(聖者)를 생각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 눈을 감고, 귀를닫고, 산에 엎드린 고행의 수사(修士)를 연상한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기도 출발점은 그가 아침에 읽은 조간신문의 뉴스였다. 그는 그의 사랑하는 조국 예루살렘의 형편을 소식으로 "듣고", 훼파된 예루살렘의 참상을 "보고" 기도를시작한다(느 1:2∼4). 그는 닫힌 귀가 아닌 열린 귀의 소유자였고, 닫힌 눈이 아닌 열린 눈의 소유자였다. 우리는 흔히 기도할때 "이 세상일을 다 잊어버리게 하옵시고…"라고 말한다.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도피의 주문에 불과하다. 역사의 현장을 떠난 곳에 기도는 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기도는 곧 역사의식이라고 할수 있다. 우리가 처한 역사에 대한 올바른 상황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책임의 자리에 서게 한다. 여기서부터 기도는 출발한다. 기도의 사람은 우리가 처해 있는 '그 현실에 응답하는사람들(people responding to reality)'이다. 느혜미야의 기도의 눈물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지각(知覺)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며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라고 자복한다(느1:6). 존 화이트는 이것이 느헤미야의 "공동체적 책임감각(a sense of corporate responsibility)"이요, 우리가 기도할 때에 반드시 터득해야 할 "동일시의 원리(the identification principle)"라고 일컫는다(John White, Excellence In Leadership, p.23).

다니엘의 기도에서 우리는 같은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민족을 위하여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기도한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단9:5)라고 다니엘은 범죄와 유랑의 역사 한복판에 서서 민족의 수치를 연대화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도자일 수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이 책임이 다른 지도자, 혹은 다른 정당에만 있는 것처럼 절규하는 무책임한 지도자와는 얼마나 다른가. 역사적 책임을 떠맡기보다 떠맡기려 하는 자에게는 결코 지도자의 훈장을 달게 해서는 안된다. 왜 기도하는가?

내 책임임을 알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설명을 약하고 십자가의 의미를 물어보자.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심이라고 얼마나 우리는 자주 고백하여 왔는가. 그는 친히 우리의 책임을 자신의 책임으로 떠 맡으셨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주님, 우리의 지도자가 되신 것이 아닌가. 그의 십자가는 인류가 경험한 가장 처절하게 벌거벗은 "기도의 자리"였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기에 십자가의 사람일 수 있었다. 아니 십자가를 꿇어진 사람이기에 진실로 기도의 사람일 수 있었다. 오늘이 시대의 목자들인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인가? 우리의 머리에 비여져 있는 것은 가시 면류관일까? 황금의 면류관일까?


2. 사람을 움직일 줄 아는 사람

사람을 움직일 수 없었던 이를 지도자라고 부른 일은 없었다. 지도자(leader)라는 단어자체가 '인도한다(lead)'는 뜻이 아닌가. 그러면 마땅히 지도자는 사람을 리드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움직이느냐?"이다. 단순히 "내가', '내 뜻대로' 회중을 움직이고자 할 때 이는 종종 인간에 대한 조작(manipulation)이나 이용일 수 있다. 다시,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지도 동기(motives)와 결과 (results)라 할 수 있다. 제임스 번스(James M. Buns)는 지도자를 두가지의 형태로 나눈다. 하나는 "교환형의 지도자(the transacting leader)"요,

또 하나는 "감동형의 지도자(the transforming leader)"라고 말한다(Robert D. Dale, Ministers As Leaders, pp. 11∼12). 교환형의 지도자는 서로서로 '주고' '받는' 지도자이다. 그는 가치를 흥정하고 교환하는 자이다. 원색적으로 말하면 '이용하는 관계(quid pol quo), 즉 무엇인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관계(something for something-relationship)라 할 수 있겠다. 오늘날 대부분의 지도자와 피지도자의 관계가 이런 유형이라면 지나친 진단일까.

번스는 더욱 바람직한 새 시대의 지도자상으로 "감동형의 지도자"를 천거한다. 이 감동형의 지도자는 피지도자의 필요를 공급하여 그를 감동시켜 따라오게 함으로 피지도자와 지도자를 궁극적으로 함께 유익하게 하는 지도자이다. 그가 먼저 앞세울 관심은 자신의 필요이기보다 피지도자의 필요이어야한다. 피지도자의 필요가 지도의 최고선(最高善)으로 존재하는 '지도력의 스타일(leadership style)'을 의미한다. "교환형 지도자"는 대부분 공동체를 유지하는(maintain)자이나, "감동형의 지도자"는 공동체를 자라게(build)한다. 느헤미야의 최고 최대의 관심은 '지도자가 되는일'이 아니었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 이스라엘 백성의 보금자리인 예루살렘 성의 중건(重建)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것이 주 앞에 순수하고 투명한 목적일진대 하나님이 그 일을 축복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주에서 친히 그 일에 관계된 사람들을 주님 자신이 움직여 주십사고 기도하였다. 그는 자신이 사람을 움직이기보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을 움직이게 하신 것이다.

당시의 예루살렘성은 페르샤의 아닥사스다 왕 지배 속에 있었고 느헤미야는 마침 이 왕을 수종들며 국정을 말하는 '술장관'이었다. 그는 그가 가진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으로 얼마든지 왕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먼저 기도하였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아닥사스다 왕)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quot;(느 1:11). 이 기도를 한 뒤에도 그는 4개월을 기다린 다음 왕 앞에 나아갔다(2:1 참조).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나아간 그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정확한 응답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백성들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고자 함"(느2:18)을 볼 수 있었다. 이 얼마나 바람직한 지도자상인가.


3. 계획의 사람(비전의 사람)

계획없는 지도자의 성취를 본 적이 있는가? 계획(plan)에 관한한, 우리는 언제나 두가지의 서로 반대되는 양극단의 입장을 보게된다. 한 입장은 "기도없이 계?quot;하는 스타일이다. 그 결과는 종종 자기 야망의 성취일 뿐 하나님의 뜻의 실현은 아니다. 이는 대부분 인본주의적 지도력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입장은 "계획없는 기도"의 스타일이다. 그의 기도는 허공을 치는 기도일 수 밖에 없다. 무엇을 위해 기도했는지 모르는 자가 무엇을 응답받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교회사에 나타난 대부분의 신비주의자가 역사 안에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느헤미야는 2장에서 아닥사스다 왕이 그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즉각 그가 기대하고 있는 성취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득력있게 제시할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다(2:5∼8 참조).

씨릴. 바버(Cyril J. Barber)는 "느헤미야는 그가 백성들을 위해 설정한 목표가 성취 가능한 목표이어야 함을 알고 있었다"고 지적한다(Cyril J. Barber, Nehemiah, p. 42). 그런 의미에서 분명히 그는 지혜로운 지도자였다. 만일 그가 성취 불가능의 요구조건을 왕에게 제시했을 경우를 상상해 보자. 혹은 백성들이 도달하기 어려운 성취의 목표를 제시했을 경우 백성들의 실망과 낙담을 상상해 보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목표는 쩨쩨한 것도 아니었다. 거대한 도성 전체의 재건이라는 참신하고도 도전적인 과업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목표는 진실로 비전(Vision)일 수 있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지도자들이 이른바 "적극적 사고방식"의 이름으로 허영에 찬 바벨론왕국의 건설을 꿈꾸고 있는가. 그런가 하면 또 얼마나 많은 지도자들은 먹고 살고 즐기기에족한 쩨쩨한 밥그릇으로서의 목장(牧場)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영국의 설교자들이 "택한 백성"을 돌보는 교리적 양육에 몰두하고 있었을 때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수천, 수만의 인도의 영혼들의 방황을 바라 본 케리(Carey)의 선교비전은 실로 도전적이 아니었는가. 그러나 우리의 비전은 또한 양적인 수확에만 머물 수는 없다. 비전은 멀리 볼 뿐 아니라 안으로 깊이 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Vision includes insight as well as foresight).

바리새인이 바라 본 한사람 베드로는 무식한 갈릴리의 배우지 못한 어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가 바라 본 베드로 안에는 한 시대의 세계를 움직일 사람낚는 어부의 가능성이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한사람 안에서 하나님나라의 운동력과 폭발력을 보고 그를제자로 삼고자 계획하신 나사렛 예수야말로 오늘 이 시대가 기다리고 있는 참 지도자의 모형이 아닐 수 없다. 느헤미야는 선하신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을 믿고 담대한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형통케 하실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신뢰하였다‥‥‥하늘의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리라"(느2:20). 실로 자기의 시대를 가장 강력하게 그리고 영구하도륵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모두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멀리"볼 수 있었던 사람들"(seers)이었다(J. Oswald Sander, Spiritual Leadership, p. 48).


4. 협력하여 일할 줄 아는 사람

느헤미야 3장은 넘치는 예증들을 제시한다. 15개 이상의 다양한 직종을 지닌 75명 이상의 인물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완성한 이 성의 역사는 가히 압권이었다. 그들은 "함께" 일어나 건축하였다. 3장에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는 "그 다음은(Next him/them)"이라는 말이다. 저마다 자기의 위치를 지켜가며 어떻게 그 다음 사람과 훌륭한 협력과 조화의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낱말이다. 대제사장, 금장색, 정치인, 상고(상인) 등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이 한 목적앞에 한 마음으로 일하게 한사람이 누구인가? 그가 바로 지도자-느헤미야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철저하게 자기의 공적을 노출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동역자들의 성취에는 애써서 강조 위에 강조를 더하고 있음을 보라. 예컨대 3장 20절에는 "그다음은 삽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여…"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작은 성취를 크게 격려하며 기록으로 남기는 느헤미야의 섬세한 민감성을 대할 때마다 나는 나의 동역자들을 향한 무감각한 지나침을 부끄러워하고 자책한다. 75명의 이름의 나열 그 자체가가장 작은 동역자들까지도 놓치지 않고 격려하려는 느헤미야의 심성이 아니겠는가. 그런가운데서도 각 사람의 은사와 소명을 따라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에 일꾼들을 있게 하는 느헤미야야말로 리더쉽 천재성의 화육(化肉)인 듯 싶다.

그러나 중요한 전제는 리더쉽의 목표 그 자체를 지도자의 필요가 아닌, 피지도자와 공동체의 필요에 두는 일이다. 이 전제가 분명하다면 결국 이 지도자는 팀 빌딩(Team-building)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 동기가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렌스 리쳐드(Lawrence O. Richards)는 그의 유명한 저서 「교회 지도력의 신학」(A Theology of Church Leadership)에서 "리더쉽의 과제를 건강한 몸의 세움"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는 몸의 건강과 성장은 결국 몸에 속한 지체 하나하나가 제자리에서 건강하고 조화롭게 기능을 성취할 때에만 가능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사랑 안에서 움직이는 지도력으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이다(Lawrencc O. Rlchards and Clyde Hoeldtke, A Theology of Church Leadership, pp. 88∼93). 그때에만 교회는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진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교회지도자 지도력의 스타일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입는다. 리쳐드는 앞으로 교회가 영적으로 성숙해 갈수록 더욱 '세워주는 자(equipper)'로서의 지도자를 요구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독재자인 지도자들이 많을 수록 그 나라의 교회는 영적 퇴보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5. 장애물 극복의 의지와 결단력과 판단력을 가진 사람

신기하게도 느혜미야의 사역은 전적인 하나님의 인도이었음에도 처음부터 장애물은 존재하고 있었다. 장애물을 회피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지도력의 선한 야망도 버려야 한다. 처음 말에서 강조한 대로 지도자가 되는 것은 비판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 이 비판은 지도자 자신의 연약성에 기인하지만 또 여러 경우에는 지도자의 잘못과 상관없이 받은 비판일 수 있다. 느헤미야가 왕의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담대한 계획을 업신여기고 비웃는 산발랏, 도비야, 게셈 등의 도전이 동시에 시작되었다(느2:19).

그럼에도 그는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느2:20)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의 장애물 극복의 견고한 의지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런 의지는 원천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그의 부동의 신뢰 때문인 것은 물론이다. 이래서 그의 사역은 계속된다. 4장에 보면 느혜미야는 그들을 피하지도 않고, 맞서지도(일부러)않았다. 이 얼마나 절묘한 균형인가. 그는 감정의 에스컬레이션을 경험할 때마다 하나님께로 달려 온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느4:4). 이 얼마나 솔직한 감정의 분출인가!

그러나 이것은 이웃이나 적을 향하여 쏟아냄보다 얼마나 더 생산적인 카타르시스인가. 씨. 에스. 루이스(C.S. Lewis)가 그의 「시편묵상」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이 정도의 우리의 원한에 찬 분냄과 성냄쯤 넉넉히 받으실 수 있는 큰 가슴을 지닌 전능자임을 기억할 수있다면. 더욱 그는 이미 나의 분냄도, 성냄도 진작 벌써부터 알고 계신 전지자(全知者)이시기 때문이다. 위기의 시간이야말로 인기있는 지도자가 아닌 참된 예언자의 자리를 시험하는 때이다. 워렌. 위어스비(Warren W. Wiersbe)의 선언은 바로 이런 경우에 적중하는 진리라고 믿는다. "인기를 추구하는 지도자는 바람 속에 결국 넘어지지만, 예언자는 벽처럼 견고하게 선다.

그리고 그 때에 나라는 예언자를 의뢰하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Warren W. Wiersbe, The Integrity Crisis, p.67)" 이 얼마나 진리의 말인가. 비판은 지도력의 최대의 시험무대라고 할 수 있다. 비판을 통과한 다음 비로소 지도자는 한 사회 한 민족을 받침할 수있는 뿌리 깊은 거목(巨木)으로 선다.


6. 일마다 최선을 다한 사람

느헤미야는 이른바 '기도만' 하고 게으르게 누워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기도하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전념을 다한 것이다. 다시말하면 그는 기도하면서 현재의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4장 9절을 보자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그는 기도하면서 언제 적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므로 방비하는 일에 최선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4장 13절을 보자. '내가 성 뒤 낮고 넓은 곳에 백성으로 그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게 하고" 그는 성둘레의 어디가 취약지구인가를 발견해 내고 그 취약지구의 경계를 강화한 것이다.

4장 16절을 보도록 하자. "그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그는 백성의 일부분은 공사하는 사람으로, 다른 일부분은 경계하는 사람으로 나누어 놓았다. 4장 17절에는 일하는 자에게는 한 손에 연장을 한 손에 병기를 들게 했다고 기록돼 있다. 4장 18절에는 나팔부는 자를 배치해서 만일의 경우 경계조치를 취하게 하고 있다. 4장22절에 보면 밤에는 보초를 두어 순찰케 하고 있고, 4장 23절에 보면 밤중에 파수하는 자들은 옷을 벗지 아니하고 경계태세로 지내도록 조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얼마나 철저한 최선인가! 기도는 결코 인간의 노력을 배제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도했기 때문에 덜 일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했기 때문에 기도의 힘으로 더욱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Ⅲ. 마무리

유명한 해군 제독 리크오버(Rickover)에게 인터뷰를 받고 있었던 젊은 해군장교가 있었다. 시사문제, 전투함의 구조, 해군전략, 전자, 음악, 문학‥‥등 쏟아지는 곤란한 질문들에 이어 오랫만에 자신있는 영역에 대한 질문이 주어졌다.

"그대는 해군사관학교 졸업시 석차가 어떠했는가?"
"예. 820명 중 59등 했습니다."
이때 제독은 쏘아보는 눈으로 다시 질문을 했다.
"그 성적이 그대의 최선의 결과인가?"
"글쎄, 꼭 최선을 다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얼버무리는 그에게 다시 제독의 폭탄 질문이 명중했다.
"왜, 그대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Why not the best)"

이 때부터 이 해군장교의 도전적인 좌우명이 선택되었다. 그것이 바로 지미 카터(Jimnly Carter)전 미국 대통령의 삶의 모토인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였던 것이다(Gordon Mc Donald, Ordering Your Private World, pp.94∼95).

우리가 한날 주의 심판대에 서서 지도자로서의 일생을 결산하는 날, 이 질문이 주께로부터 던져진다면 우리의 대답은 무엇일까?" 그대는 지도자로서 최선을 다했는가?" "글쎄요, 주님, 항상 최선을 다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러면 왜 그대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Why not the best)"
비록 우리의 최선이 완전한 최선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최선을 다하기 위한 고뇌의 땀과,기도의 눈물과, 몸부림의 족적이 얼룩진 최선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음 세대의 충성된 또 한무리의 지도자의 일어남과 거룩한 모방이 있기 위하여.



참고 서적

Barber, Cyril J. NEHEMIAH. Neptune, New Jersey : Loizeaux Brothers, 1976
Dale, Robert D. MINISTERS AS LEADERS Nashville, Tenessee:Broadman Press, 1984
MacDonald, Gordon. Ordering Your Private World. Nashville, Tenessee:Thomas Nelson, Inco, 1984
Richards, Lawrence O. and Hoeldtke, Clyde. A Theology of Church Leadership. Grand Rapids. Michigan: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0
Sanders, Oswald J. Spiritual Leadership. Chicago: Moody Press, 1980
White, John, Excellence In Leadership. Downers Grove, Illinois:IVP, 1986.
Wiersbe, Warren W. The Integrity Crisis. Nashville, Tenessee:Thomas Nelson, Inc., 1988
이동원, 「역사에 새벽을 가져 온 사람(느혜미야)」 서울 : 나침반사,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