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대속의 참 의미
왜 십자가가 필요하게 되었을까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서 또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요?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지 않고도 인간을 구속하실 수 있는 다른 계획을 생각해내실 수 없으셨을까요?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도로 얻기 위하여서 다른 댓가를 마련하실 수는 없으셨는가 말입니다. 천사가 인류를 대신하여 죽을 수는 없었을까요?
예수님께서 갈보리로 가신 것은 전혀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는 이 세상의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한 목적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사단 마귀와 싸우는 대우주적인 영적 전쟁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영적 전쟁은 십자가에서 최고도에 달하였었을 뿐 그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아니했습니다.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무기는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혹시 인간이 자유 의지의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을 반역하고 범죄하게 될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은혜를 통하여 다시 구속할 것에 대한 계획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있었습니다.
십자가가 생긴 이유
십자가가 세워진 이유는 사단이 하늘에서 반역을 일으키고 전쟁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원래 아름다운 그룹 천사 중 하나였습니다. 에스겔은 마귀의 타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청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 되었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겔 28:13-15).
또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사단의 타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Lucifer, 루스벨)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라” (사 14:12-15).
위의 말씀들을 미루어 보아 그의 타락은 자아몰입에서 나오는 교만에서부터 비롯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을 비기면서 하나님처럼 높아지겠다는 마음이 생겨서 다른 천사들을 유혹하면서 하늘에서 반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천사들 중 삼 분의 일 정도를 미혹하는 데 성공한 사실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데, 요한 계시록 12장의 말씀이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꼬리가 (용의 꼬리 – 필자 주) 하늘 별 삼 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으로 던지더라…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계 12:4,7-9). 여기에서 미가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과 싸우는 장면에서 그리스도는 항상 미가엘 군장(임금 중 하나)으로 묘사되고 있음) 용은 말씀 그대로 사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단의 도전장
이 전쟁에서 사단이 인류를 유혹한 수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실과를 따 먹어도 괜찮다고 미혹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소홀히 해도 별문제가 없는 것이며 영원히 살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다른 모든 실과들은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선악과 자체에 독이 들어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고 우주의 조화와 질서를 성립하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존중성을 위하여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이 세상의 평화와 생명을 영원히 아름답고 질서 있게 보존할 수 있습니다. 법이 없는 사회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미혹하고 기만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마귀는 하나님을 이기적인 분이라고 인류에게 이간하였습니다. 그 사실은 창세기 3장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되는데, 사단은 아담과 하와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아는 하나님이 그것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시키신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한 중상과 이간에 인류의 조상은 그만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불신이 이 세상을 이러한 파멸로 몰고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다시 회복되어 에덴동산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분의 율법을 존중하여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악하여지고 불순종에 익숙하여졌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7).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사단의 이러한 참소들을 합리적이고도 공정한 방법으로 침묵시키셔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이 아니고 인류의 평화와 영원한 행복을 원하시는 크신 사랑의 존재인 것을 증명해 주셔야만 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계명은 우주의 질서와 평화를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요, 그것을 무시하고 깨뜨리는 날에는 세상의 파멸과 슬픔이 온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응전, 십자가
바로 그러한 이유와 목적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시어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신 속죄의 의미에 더하여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이기적인 분이 아니라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참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하여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 버린 모든 인간들이 당신의 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율법은 폐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인류의 평화와 질서를 위하여 영원히 보존되어야 할 것을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결과가 어떠한지는 이 세상의 타락의 모습을 통하여서 지난 수천 년간 증명되어 온 바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에 하늘의 천사들과 거민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품성의 차이점을 너무도 명백하게 살펴볼 귀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사단의 본성이 얼마나 악한 것이며, 그의 주장들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가를 온 우주가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인간들을 충동질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는 악랄한 마귀의 성품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그의 주장을 인정하는 자들이 없어졌습니다. 십자가에서 악한 마귀의 본성과 용서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품성의 큰 대조가 드러난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히 서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사단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그는 영원히 패배자가 되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는 영원히 멸망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영원히 인류를 구원하는 표상이 된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를 십자가로 죽이려 했으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사랑을 통하여서 영원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어린 예수와 십자가
죄가 시작되기 이전, 멀고 먼 태고 때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께서는 만약 인간이 불신과 교만의 죄에 빠진다면 이 지구를 자아추구의 이기주의의 멸망 속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구속의 협정을 맺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이 자아추구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추구하여 하늘 보좌에 앉을 수 있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 깊이와 높이를 측량할 수 없는 십자가의 극적인 사랑의 표현을 죄짓지 않은 우주의 존재들에게 나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일에 그의 십자가를 지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든지, 만약 그리스도를 따르기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들만의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사제나, 수도승, 성직자, 선교사, 교회 직원, 종교 지도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죄된 세상에서 배양된 깊은 자아본위적 사상을 버리고 빈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기를 싫어하는 씨는 결국 잃어버림을 당할 것이고, 땅속에 들어가 죽는 씨는 많은 열매를 얻을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 안에 바로 하늘 나라가 세워진 창조적 원칙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정부의 깃발은 바로 십자가이며 마귀가 하나님의 정부를 뒤엎기 위하여 십자가를 없애려 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서 벌어지는 선악간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전략은 십자가의 깃대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십니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십자가를 선택합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만이 완전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시고 그의 독생자를 주시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그 길을, 인류를 위한 신성한 사랑으로, 따르기로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되신 것입니다(계 13:8, 참고). 어느 누구의 마음속에 들어가든지 신성한 사랑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역사를 시작합니다. 죄에 대항하는 여러분과 나의 싸움은 창조주께서 하시는 똑같은 원칙에 근거하여서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어린 예수와 십자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인생을 통하여 보여주신 진리의 십자가는 깊은 아름다움을 담고 있습니다. 비록 완전한 인간으로서 모든 종류의 시험을 당하셨지만 그의 마음은 죄 없으셨으며, 정결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놀라운 경이요, 사랑의 보고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이 세상의 모든 인간과의 다른 점입니다.
아기로서 태어나셨을 때에 예수께서는 그가 하늘에 계셨을 때를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처럼 태어나셔서 인간의 아기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알지 못하셨습니다.
그는 목자들의 숭배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박사들의 방문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큰 도시에 가보았던 운 좋은 아이처럼 시골 산 동네에 사는 친구들에게 하늘에서 천사들의 사령관이었던 때를 설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도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우리가 배웠던 방식으로 지식을 습득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라고 적고 있는 것입니다(눅 2: 40, 52).
예수님에 관한 신비는 바로 그의 태어나심에 있습니다. 신이 인간이 되시고 이 땅에 태어나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라나셔야 하시고, 죄 없이 사신 것은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태어나실 때에 그의 지식에는 어떠한 초자연적인 과거의 기억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을 하늘에 두고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아이가 12살이 되어 깊은 생각할 수 있는 때가 이르렀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장래의 일을 형성할 수 있는 어떠한 모형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유대 나라 명절이었던 유월절에 참석하였던 때는 12살 때였습니다. 처음으로 그는 유명한 사원들과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제사장들이 피 흘리는 희생 제물을 제단에 올려놓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어린 예수의 마음은 희생양이 가진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하였습니다. 제사장도, 어느 누구도 그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재갈 물린 말처럼 묵묵히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의식을 행할 뿐이었습니다. 4000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짐승의 피를 바쳐왔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왜 이러한 일을 행합니까?”라고 물으면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신비로운 그 희생의식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 예수는 아마 “소나 염소의 피가 정말로 죄를 없앨 수 있을까?”하고 의아해하였을 것입니다.
어린 예수는 다른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잡담과 놀이를 하지 아니하고, 심지어는 부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피를 뿌리는 그 장면이 그의 마음속 깊이 어른거렸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처음으로 짐승들의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 마음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시기 전 하늘에서뿐만 아니라, 이제 인간으로서도 무릎을 꿇고 깊은 심오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5-7).
“아버지여 당신에게는 이러한 짐승의 피가 필요 없나이다! 당신은 그 안에서 아무런 기쁨을 찾을 수 없으니, 그 이유는 이것들이 어떠한 인간의 죄도 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만드셨고, 내가 바로 그이오니 나는 줄 수 있는 몸이 있고, 나눌 수 있는 피가 있나이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아버지여.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게 하소서. 제가 세상 죄를 위하여 죽겠나이다. 제 피가 속죄제물이 되겠나이다. 제가 이사야가 말한 그 ‘고통받는 일꾼’이 되겠나이다. 저로 인간의 죄를 위하여 상처받게 하시고, 멍들게 하시고, 채찍질 받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따르리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예수께서 구약의 표상적인 봉사를 제하여 버리시고 자기 자신을 그 자리에 세우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9,10).
영원 전에 미리 존재하였던 과거의 기억이 유월절 의식의 신비를 대신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이 지구가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평화의 협정”은 “그 두 사람 사이에” 있었으며 (스가랴 6:13),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삼아 세상의 죄를 씻기로 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이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하신 그 계약을 기억해 내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더럽히지 않은 정결한 예수 마음은 유월절 의식을 통하여 본 상징들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 9:9).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히 10:1).
“이것은 모두 비유이지…” 예수께서는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죄하고, 순결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누군가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죽임을 당하여 잃어버린 인류를 대속해야 합니다… 이렇게 의미 없이 계속되고 있는 무의미한 의식은 이제 극적인 마지막을 맞게 함으로 의식의 실제적인 의미가 거룩한 희생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박사들과 제사장들이 수 천년간의 의식을 통하여서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보아왔던 상징을 단지 한번 봄으로서 12살짜리 어린 예수는 그 의미의 중심을 이해하였습니다. 그의 어린 마음은 강한 의지의 힘으로 감싸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 보려는 불쌍한 영혼들의 노력은 하나님의 은총의 자비 없이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 그 공평이 없는 것을 기뻐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사 59:15,16)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 9:14).
이 놀라운 사랑의 사업을 보세요! 그는 인간의 몸에 거하셨고, 영원 전의 모든 기억을 알지 못한 채 10년 동안 어린이로서, 단지 성경 말씀만 믿음으로써 사신 그리스도… 그는 영원 전 하늘의 사령관으로서 내리신 그 결정을 인간으로서도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시기를 선택하셨습니다.
2. 구원받을 수 있는 오직 한 길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 마음에 비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신 그 길, 또한 어린아이로서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결심하신 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십자가)을 품든지, 이 세상 신(마귀)의 마음(자아숭배)을 품을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이고 결과는 오직 십자가의 길만이 부활로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 12:25).
두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 그리스도를 선택한 강도가 졌던 그 십자가는 곧 우리들의 십자가입니다. 또한 갈보리에는 또 다른 세 번째의 십자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는 구원이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상의 또 다른 강도는 고통과 죽음 속에서도 그의 마음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반역적인 그의 정신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이 세상 신의 마음(자아숭배)을 선택하고 예수를 거절하고 저주하였습니다. 우리도 그 강도처럼 십자가의 사랑을 거절하고 그를 따라서 영원한 어둠으로 떨어질 것인가요?
우리의 거룩한 모본께서 보여주신 그 십자가는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기에 쉽게 하십니다. 그의 십자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고 또한 기쁨으로 이것을 지게 하는 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 대속의 참된 의미
우리는 베드로 전서 2장 24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어떻게 몸으로 타인의 죄를 질 수 있을까요?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의 경험을 이해하도록 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죄를 짓고 나면, 예를 들어서 거짓말을 하거나 물건을 훔치고 나면 어떠한 반응이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되는가요?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며, 두려운죄책감이 마음을 사로잡아 괴로움을 느끼게 되고, 얼굴이 빨개지며 식은땀이 몸을 적시게 됩니다. 그리고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고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사라지게 됩니다.이러한 것이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나타나는 신체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그러한 것이 우리가 우리 죄를 우리의 몸으로 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들을 당신의 몸에 대신 지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십자가의 대속이란, 우리의 죄를 마치 예수님의 자신의 잘못이나 예수님 자신의 죄처럼 인정하여대신 전가시키는 것 이상의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지셨다는 의미는 우리의부채를 은행의 구좌 모양으로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넘겨 버리는 것 이상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의미는, 우리의 죄로 인한 결과와 심판을 대신 경험하심으로써, 우리가 그러한대가를 다시 치러야 할 필요가 없도록 하셨다는 실제적인 맞바꿈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대하여 미리 예언한 말씀들 가운데 특히 시편 40편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합니다.
시편 40편 12절에서우리는 다음과 같은 부르짖음을 듣게 되는데, 그 부르짖음은 다름 아닌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고통에 대한 예언인 것을 보게 됩니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음으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죄가 전혀 없으시고 한 번도 죄를 범해 본 적이 없으신구세주께서 나의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다고 말씀하고 계신 사실을 보세요! 다시 말해서 인류의 모든죄악들이 십자가 위에 달려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한꺼번에 전가되어 내리 누르는 형편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조금전에 생각해 보았듯이 우리가 죄를 범할 때 느끼는 죄책감과 같은 신체적인 반응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몸에 실제적으로느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인류들의 모든 죄를 지금 자신의 몸으로 짊어지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느끼는 절망감, 자비가 섞이지 않은 심판의 두려움과 그 죄책감의뼈아픔을 순결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갑자기 마음에 그리고 당신의 몸에 느끼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멸망의 죽음을 당하심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부르짖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나를 버리시나이까?” 그것은 순교자의 부르짖음이 아니었습니다. 어느순교자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죽어 가면서 그러한 외침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 순교자들은 모두 다기쁨과 소망 속에서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다는 사실에 기뻐 찬미하면서화형대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 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순교자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그들이 받아야 할 죄의 결과를대신 받아 주시는 대속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한번도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된 경험이 없이 늘 아버지와하나이셨던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는 십자가에서 갑자기 하늘 아버지와 절연되는 느낌을 느끼신 것입니다. 죄는하나님과 그 인간과의 사이를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납하실 수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지신 예수께서 통렬하게 부르짖으신 이유는 죄가 예수님을 지옥 같은 어두운 심연의 절망으로 몰고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한 말씀으로 잘 알려진 이사야서 53장에서 우리는 더욱 명백한 말씀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실로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당한다 하였노라” (4절). 이 말씀에도 우리가 받을 죄의값을 예수께서 대신, 실재적으로 경험하여 주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여 주고 있지 않는가요? 예수께서 죄를 지신 것은 그 죄의 고통을 대신 경험하여 주신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를 대신 책임지기 위하여 전가시키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또한이사야서 53장 12절 중반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보게 됩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범죄하여 죽어가는 인류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러, 대신 완전히 죽어 없어져버리더라도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기를 택하겠다는 이해할 수 없는 강렬한 사랑을 나타내어 준 것입니다. 이엄청난 사랑이 인류를 살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영원토록 연구와 경외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바울은 예수께서우리를 대신하여서 죄 그 자체가 되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은 죄 그 자체가되셔서 형벌을 대신 받아주신 사실을 그렇게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그러한사실을 느끼셨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죄를 대신 몸에 지시는 경험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내 아버지여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탄원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과아니, 하늘 그 자체와 영원히 분리되어 죽어버릴 가능성을 내다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고뇌의 아픔을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죄의 고통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를 기억해 봅시다. 예수께서는 신음하시다가 서서히 서서히 돌아가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십자가의양편 강도들은 금요일 저녁까지 아직 죽지 아니했기 때문에 속히 죽게 하려고 다리를 꺾었지만 예수께서는 벌써 운명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가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큰 소리로 부르짖으시고는 갑자기 고개를 떨구시고 숨을거두셨다고 성경은 마지막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갑자기 파열되어 돌아가신증거입니다. 로마 군인이 죽었는지를 확인해 보기 위하여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흘렀다고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장이 작동하기를 멈추고 파열되었기 때문에 혈구와 혈청이 나뉘어서 물과 피가따로 흘러내린 것입니다. 인류의 죄를 지시면서 그 괴로움과 죄의식을 더 이상 견디실 수가 없으셔서 예수님의심장은 그만 터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못박힘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바로 우리들의 죄가 찌르는 아픔들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죄악들이 바로 예수님을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40편 12절은 예수님의 고통의 장면을 그린 예언에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영어로는 “Therefore my heart failed me”(그러므로 내 심장이 멈추었나이다-필자 번역)라고 번역하고 있어 예수께서 죄의 무게 때문에 심장이 멈추어 버린 표현의 감각을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의 어린 양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일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은 엄청난 의미가 그 속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사실을 각자 개인의 마음속으로 믿고, 정말로 감사하며 눈물겹게받아들이는 자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주께서 실제로 대신 져 주셨고 그래서 내가 죄에서자유를 얻고 그 정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위에서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아 심판당하시는 것으로 느끼셨습니다. 그것은 쇼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영혼은 떨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을위하여 죄를 대신 져 주시고 영원한 죽음을 받아야 할지, 아니면 그대를 포기하고 아름답고 고통이 없는하늘로 다시 올라가 버려야 할지를 선택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예수의 곁에서 주를 몹시 괴롭혔습니다. 감사치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는 인류들을 보여 주면서 예수님의 희생이 헛된 일이 될 것이요, 이제 이 대속의 죽음은 그를 영원히 멸망 당하게 만들 것이라는 절망적인 말들을 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선택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한 구속의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감당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다시는 무덤 속에서 나와 부활하지 못할 것처럼 영원한 멸망의 운명을 느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도 더 이상 보이지 아니하는 깜깜한 영혼의 그늘 아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고민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생명과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 자신의영생과의 사이의 선택에서 촛불처럼 떨고 계셨습니다. 드디어 예수께서 믿음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는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라고 소리치시며 고개를 떨구셨습니다. 선택은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너무나도 큰 사랑이 바로 여러분을 포기하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차라리당신이 죽어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분을 구하여 내시겠다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것은이미 인류가 범죄하였을 때부터 결정해 놓으신 사실입니다. 그러한 주님을 하늘 아버지께서는 삼 일 만에부활해 내시었습니다.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아들을 영원한 구세주가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그리고 그분은 또한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과연 누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다 이해할 수가 있을까요? 바다를 먹물로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 모든 풀들을 붓으로 만들어 기록하려 해도 그 사랑 다 기록할 수가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고 가슴 깊이 받아들여 감격해 하는 자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육신적인 고통 그 훨씬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것을이해할 때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려 가게 됩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신앙합니다. 2000여 년을 거듭해 오면서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원의 표상으로 삼고 믿으며 가르치며 전하여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고전2:2).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인류가 이렇게 은혜의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과 또한 주님의 구원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고 살고 있는 것은 갈보리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토록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기에 합당한 구속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그 죄 값을 갚으신 주님의 고통을 상징합니다. 인류가 당하여야 할 처참하고도 자비가 섞이지 아니한 영원한 멸망의 죽음을, 우리를대신하여 지불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놀라운 희생을 나타냅니다. 십자가는 멸망 당하는 인간들을 그대로내버려 두실 수가 없어서 절규하시며 돌아오라고 탄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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