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 사도신경!! 십계명!신앙고백

주기도문(主祈禱文)과 사도신경(使徒信經)에 대해

하나님아들 2021. 5. 19. 16:07

주기도문(主祈禱文)과 사도신경(使徒信經)에 대해

 


 주기도문에 대한 고정 관념

죄에 매여 가책과 두려움 속에 있던 많은 분들이 죄 사함을 받고 나면 “이제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교회에서는 예배 때 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죄를 사해 달라는 기도가 기도의 대부분이었는데, 어떤 분들은 죄 사함을 받고 나니까 무엇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를 모르겠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워낙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에 대해 굳어진 고정관념과 종교적인 관습에 젖어 있던 분들은 예배 시간에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을 하지 않으면 혹시 잘못된 교회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갖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람들이 소위 ‘주기도문’이라고 일컫는 기도를 가르쳐 주신 배경이나 사도신경의 배경이나 참 뜻을 정확히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용어의 문제점

먼저 소위 ‘주기도문(主祈禱文)’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선 ‘주기도문(The Lord's Prayer)’이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된 용어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성경에 ‘기도’는 있어도 ‘기도문’은 없다는 사실도 아셔야 합니다. ‘기도문’이라는 것은 이방 종교에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9절 이하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은 ‘주님의 기도문’이 아닙니다. 즉 기도의 주체가 주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주(님의) 기도’라 칭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배경

주님께서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배경은 누가복음 11장 1절 이하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기도의 내용은 주님 편에서 먼저 정하여 제자들에게 그렇게 기도하라고 명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자 제자 중 하나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같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해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하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굳이 이 기도에 대해 어떤 이름을 붙이려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 정도로 명명(命名)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지만, 마태복음 6장 9절 이하에 기록된 기도의 내용과 누가복음 11장 2절 이하에 기록된 기도의 내용이 꼭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꼭 마태복음 6장에 기록된 문장대로 기도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기도는 보이지 않게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전달하여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복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우리의 사정과 마음을 아뢰기도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세밀하게 더듬어 보고, 하나님과 사귐을 갖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와 듣지 않으시는 기도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기도는 듣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9:31) 예수님은 죄인에게서 떠나 계십니다.(히브리서 7:26)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수 없는 유일한 이유는 오직 죄 때문입니다.(이사야 59:1~2) 마음에 죄가 있으면 많이 기도할지라도 듣지 않으신다고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사1:15 및 59:1~2)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면 먼저 죄 사함부터 받아야 합니다. 의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잠15:29)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할 때 들으십니다.


기도의 자세

마태복음 6장 5절과 7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시기 전에 먼저 기도의 자세 두 가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소위 ‘주기도문’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할 때 가져야 할 두 가지 태도를 말씀하시고 기도해야 할 내용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 번째 가르쳐 주신 기도의 태도는 기도할 때에 외식(外食)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외식’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듣고 계시는데, 사람을 의식하여 형식적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님이 약속을 믿는 마음,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는 마음 없이 형식적인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겠습니까?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 교회를 한번도 다녀보지 않았던 분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목사님이 대표 기도를 한번 시키셨답니다. 그 형제님은 기도하는 걸 많이 보지도 못했고, 당황이 좀 되었는데, 그냥 하나님 앞에서 마음에 있는 대로 기도하면 모든 걸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께서 들으시겠다 싶어서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를 구원하시느라고 그 동안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그럼 다음 이 시간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아멘”하고 기도를 마쳤답니다. 형제 자매들이 너무 우스워서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먹었다는데, 저는 ‘하나님께서 그 형제님의 순수한 기도를 얼마나 기쁘게 들으셨겠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말이 좀 매끄럽지 못해도 마음으로 하는 기도라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두 번째로 가르쳐 주신 기도의 태도는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중언부언(重言復言)’이란 이미 한 말을 자꾸 되풀이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온 교회 교인들이 예배 때마다 항상 이 ‘기도문’으로 기도한다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말씀에 위배가 됩니까, 안 됩니까? 그러면 이 기도는 언제 누가 응답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기도는 응답이 될 때까지는 믿음으로 구하고, 응답을 받았으면 감사를 드리고, 또 주님께서 구하게 하시는 다른 제목들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그리고 마6:9절을 보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라(After this manner therefore pray ye)”는 말과 “이 기도를 하라”는 말은 구별해야 합니다. 전자는 ‘이와 같은 태도와 내용으로 하라.’는 말이라면, 후자는 ‘이 기도를 그대로 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기도를 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도 자주 기도하셨고 제자들도 기도했지만, 사실 성경에는 예배 때마다 이 기도문으로 기도했다는 근거가 전혀 없고, 이 기도문으로 기도해야 된다는 계명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의 내용 말고도 많은 사람들을 위해, 많은 일들을 위해, 많은 제목을 두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응답을 받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 보면 뜻이 두 번 이루어지는데, 한번은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졌고, 또 한번은 땅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죠? 여기서 말하는 뜻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사단에게 속아 죄에 빠져 있는 인간들, 멸망으로 가는 인간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와 사랑을 가리키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려는 뜻을 세우시고, 우리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마음 안에는 -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도 전에 - 이미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시기도 전에 하늘에서 먼저 우리를 향해 마음을 여셨고, 하늘에 계신 그분의 마음 안에서는 이미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뜻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마음 안에 이미 디자인(design)된 인류 구원의 뜻이 이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이 땅에 오셨고, 그 뜻을 따라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값을 치르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우리를 영원히 의롭게 했습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서10:10)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고자 하셨으니”(골1:22)

그분의 죽으심은 하늘에서 이룬 뜻을 이 땅에서 그대로 이룬 것입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1:10)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 이미 이루어져 있던 뜻이 이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 죄를 사하시기 전까지는 이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도를 해야 했지만, 십자가 이후로는 이 기도를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베드로전서4: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日用)할 양식(daily bread)’이란 날마다 쓸 양식, 매일매일 필요한 양식을 가리킵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간구는, 자기 집에 그 날 그 날 먹을 양식이 부족함 없이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입에 발린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오늘날 의식주에 문제가 없는 우리들과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보내지 못하겠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마15:32)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으니”(마12:1)

이런 형편 속에서는 날마다 그날그날 필요한 양식을 하나님께 구해야 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끼니를 잇기 어려운 나라에서 선교를 하시는 선교사님들이나 열악한 여건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성도들은 이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에 끼니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의식주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면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입에 발린 기도인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실리지 않은 거짓된 기도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이구동성으로 이 기도를 한다면, 그 교회에는 전부 양식이 바닥난 사람들만 있다는 말밖에 안 될 것입니다. 정말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들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만, 이미 양식이 넉넉하게 있는 사람은 풍족한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드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눅1:77)의 복음을 모르는 분들이 죄 사함을 받고 나면, 이 대목에 와서 혼돈스러워합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바는, 우리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인으로 태어났고, 우리는 그 죄 때문에 저주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케 하셨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값을 지불하심으로써 아담 안에 속한 모든 인류의 죄를 영원히 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은 영원히 종료되었고, 더 이상 우리에게는 벌받을 죄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은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 즉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값을 온전히 갚으셨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는 우리를 영원히 의롭게 했다는 하나님의 보증이 되었습니다.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로마서5:9)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2:13)

그런데 왜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은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는가?

자, 성경을 다시 한번 잘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태복음6:12)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는 대목을 잘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는데, 내가 아무 조건 없이 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주었다고 해 봅시다.

“자, 이제 당신의 허물과 죄를 다 용서하겠습니다. 이제 지금부터 다시는 그 죄를 탓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당신이 저지른 잘못을 다 용서하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이제 당신도 그 문제 잊어버리십시오.”라고 약속을 했다고 합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이지요? 그래 놓고 내가 다음에 그 사람을 만났을 때 또 “당신 그 때 나한테 잘못한 것 알고 있지요? 내가 그것 그냥 묵과할 줄 알아요? 내가 반드시 짚고 넘어갈 거예요. 당신은 잊어도 난 절대로 잊을 수 없어요.”라고 한다면 그건 사해준 게 아니지요?

사람도 일단 죄를 사하여 주고 나면 두 번 다시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아야 온전히 사해준 것이지, 사해주었다고 해놓고 또 들먹거리고, 만날 때마다 또 그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건 사해준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실 때 분명히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으셨고,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또 우리의 죄 문제를 끄집어 내신다면 그건 사해주신 게 아니고, 십자가의 공로를 무효로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또 그 사람을 만날 때마다 “당신 나한테 빚진 거 있지요? 그거 빨리 안 갚습니까?”라고 한다면 그건 탕감해 준 게 아닌 것입니다. 내가 정말 탕감해 준다고 약속했다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영원히 끝을 내버리고, 그 문제는 종결지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구절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실 때도 일단 사하고 나면 다시는 그 문제를 두 번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도록 그렇게 온전히 사하여 달라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법에도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사하셨고,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저희 죄와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10:17~18)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에 친히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사귐을 갖고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도 없는 ‘대개’

얼마 전 어떤 분이 이메일로 신앙 상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분은 성경(마6:13)에 있는 주기도문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 나라의 찬송가 표지에 있는 ‘주기도문’에는 “(대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대개’라는 말이 왜 들어갔느냐고 질문을 해왔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성경과 아무 상관없는 단어를 멋대로 삽입시킨 것인데, 모든 것이 온전히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격하시키는 표현이므로 마땅히 삭제가 되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역대상 29장 11절에 보면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주께 속하였사오니”라고 하셨는데,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면 ‘(100%는 아니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대체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없을 때도 있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 전능하심을 격하시킨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국의 대다수의 교인들은 성경도 제대로 모르는 목회자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며, 그래도 자기들이 말씀 중심이네, 정통이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사람들이 예배 때마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고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는데, 그 내용에 대한 무지도 문제이지만, 실제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그런 것들이 공염불처럼 형식화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신경

 

사도신경에 대해서도 한번 살펴봅시다.

‘사도신경'을 영어로는 The Apostles' Creed라 하는데, 우리말의 ‘사도신경(使徒信經)’은 문자적으로는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의 내용을 정리하여 경(經, 즉 경전, 성경)처럼 만든 것’이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입니다. 그러나 본래 ‘경(經)’은 종교의 경전을 의미하는 말이며, 야고보서2:8과 23절, 베드로후서1:20 등에서는 ‘성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인간들이 만든 하나의 신조(信條)일 뿐이지, 결코 예수님의 사도들이 만든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성경과 같은 위치에 둘 수 없는 것이며, ‘경(經)’으로 불러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사도의 이름을 빙자한 신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형성 배경

로마 카톨릭의 전승에 의하면, 12개 항목으로 되어 있는 사도신경은 12사도가 예루살렘에 모여서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인데, 베드로가 처음 한 구절을 기록하자 사도들이 한 구절씩 쓴 것을 모아서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A.D 4세기에 루피너스(Lufinus)라는 사람이 “사도신조 주석”을 쓰면서 주장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입니다. 만일 사도신경이 정말 영감을 받은 사도들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성경과 같이 보존하셨을 것이며, 그 내용이 삭제되거나 추가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소위 ‘사도신경(이하 記述의 편의상 ‘사도신경’이라 칭함)은 모든 사도들이 이 세상을 떠난 지 수세기 뒤에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조이며, 수백 년 동안 그 내용이 첨삭(添削)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것을 신앙 고백의 신조로 받아들이지 않는 기독교 종파들도 있으며, 교파마다 예배 때마다 외며 고백하는 문장의 내용에도 차이가 있고, 내용도 자세히 보면 성경과 너무 다른 부분들이 많습니다.

 

개신교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천주교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밑줄 부분에서 고개를 깊이 숙인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성공회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하느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나시고
본티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묻히셨으며,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
사흘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오른편에 앉아계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다시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公敎會)와 모든 성도의 상통(相通)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몸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예장통합 새 사도신경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 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라틴어 원문(Credo)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Creatorem caeli et terrae,

et in Iesum Christum, Filium Eius unicum, Dominum nostrum, qui conceptus est de Spiritu Sancto, natus ex Maria Virgine, passus sub Pontio Pilato, crucifixus, mortuus, et sepultus, descendit ad inferos, tertia die resurrexit a mortuis, ascendit ad caelos, sedet ad dexteram Patris omnipotentis, inde venturus est iudicare vivos et mortuos.

Credo in Spiritum Sanctum,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sanctorum communionem, remissionem peccatorum, carnis resurrectionem, vitam aeternam.

Amen

 

영어(Apostles' Creed)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creator of heaven and earth.I believe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He was conceived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and born of the Virgin Mary.He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was crucified, died, and was buried.He descended into hell / to the dead.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He ascended into heaven.He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and He will come again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I believe in the Holy Spirit,the holy catholic Church,the communion of saints,the forgiveness of sins,the resurrection of the body,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기독교 역사가들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는 4세기경에 “로마교회 구신조”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도신경의 모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1991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출판국에서 발행한 ‘세계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에 의하면 사도신경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해 전수되었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초기 사도신경은 아주 짧았고,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도신경과 유사한 형태의 사도신경은 6~7세기에 가서야 나타납니다. 거기에는 초기에는 발견되지 않는 구절과 단어들이 추가되어 8세기에 와서 비로소 현재와 같은 형태로 거의 고정되고, 12세기 이르면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인준됩니다.

 
한국교계 사도신경의 문제점

그럼 한국 교계의 사도신경에서 성경적이지 않은 부분들이나 원문과 다른 부분들 중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초기 우리말 찬송가에 실린 사도신경을 보면 1894년 언더우드가 번역한 찬양가에는 “나는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참신 성부를 믿으며.....지옥에 내리사 사흘날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심을 믿으며....성인이 서로 통공함을 믿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1905년 장로교회에서 발행한 찬송가에 실린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리셨더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날 천주교의 사도신경을 보면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고성소(古聖所)에 내리시어.....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을 믿으며...”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제가 가진 국어사전에 ‘고성소’란 “지옥과 천당 사이에 있어, 기독교에 접할 기회가 없었던 이나 성세(聖洗)를 받지 못한 어린이, 이교도, 백치들의 영혼이 사는 곳”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 이런 말이 있습니까?

A.D 750년 경에는 사도신경의 라틴어 본문에 원래 없었던 “그(예수님)는 음부에 내려가셨다.(He descended into hell)”는 내용이 첨가되었습니다. 그것이 세계 모든 나라 사도신경에는 다 그대로 남아 있는데, 한국 장로교 찬송가 안표지에서는 그 내용을 넣었다가 나중에 만든 찬송가 안표지에서는 빼버렸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만 이 구절이 삭제되어 있는데, 여기에 대해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은 한 마디의 해명도 없습니다.

또 A.D 650년 경에는 ‘거룩한 공회’라는 말이 부가되었는데,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영어로는 ‘거룩한 공회’가 ‘The Holy Catholic Church'(거룩한 카톨릭 교회)’라는 뜻입니다. ‘공회(公會,assembly)’라는 말은 ‘공중의 모임’이라는 말인데, 우리가 ‘공중의 모임을 믿는다’는 것을 신앙의 내용으로 고백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또한 성경에서 ‘공회’에 관한 대목들을 찾아봅시다.“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마26:59)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막15:1)

‘공회’라는 말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의미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의미할 때도 있는데, 어찌 공회를 믿는다는 게 참된 신앙 고백이며, 그 고백을 하지 않으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까? 오히려 이런 공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이단입니다.

알고 보면 이 표현은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catholic’이라는 뜻이 ‘보편적, 세계적’이란 뜻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쓸 경우에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래 ‘로마교회 구신조’에는 ‘거룩한 교회를 믿사오며’ 라고 되어 있었는데, 약 8세시 경에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사오며’란 말을 추가시켰습니다. 성경에는 어디에도 ‘카톨릭’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당시 카톨릭 교회가 이 땅 위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며, 거기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처참하게 죽이고 핍박했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 부분이 추가 삽입된 점을 감안하면, 이런 고백은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또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도 성경적으로 잘 알아야 할 부분입니다. 원래 성도를 의미하는 단어 ‘saints’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를 씻고 거듭나 거룩해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Saints'라는 말은 카톨릭에서 ‘죽은 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뒤 특별 심의를 거쳐 서품되는 특별한 사람’에게 주는 칭호(성인)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그런 성인에게 하는 기도문이 있고, 그 기도를 통하여 죽은 자와도 교통할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본래 사도신경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것’은 거듭난 성도들 간의 영적 교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성인들과의 교통(交通)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카톨릭의 사도신경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내용도 성경과 맞지 않는 내용입니다. 사실 빌라도는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했고, 그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대제사장들과 무리 앞에서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19:4)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눅23:14) 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성경은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눅23:20)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죽이려 했던 장본인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다만 빌라도는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가는 민란이 일어날 것 같으니까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막15:15) 예수님을 그들의 손에 넘겨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행3:13)

한국 교회에서도 이제서야 문제점을 느끼고 최근 재번역 논의와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데, 번역에 앞서 기성교회가 지금까지 얼마나 교인들을 잘못 인도해 왔으며, 참된 교회를 비방하고 대적하도록 해 왔는지를 솔직하게 시인하고 참으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복음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참으로 어떤 말씀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어떤 교회가 참된 하나님의 교회인지를 밝히 알아 거짓된 교회와 교리에서 단호히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이한규 목사

 

[출처] 주기도문(主祈禱文)과 사도신경(使徒信經)에 대해|작성자 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