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로마 전성기 시대

하나님아들 2021. 3. 5. 23:50

로마의전성기 시대

 

이 시대는 일반적으로 그레고리우스 7세가 등장한 1073년경부터 보니파키우스 8세가 죽은 1303년까지의 기간에 해당하는데 로마교회가 최고의 영화와 번영을 누리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사상면에서나 제도면에서 교회지상주의가 구가되었고 십자군 전쟁 등으로 유럽 역사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1.서임권 논쟁

(그레고리 7세의 교황권 회복 투쟁)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세기의 교회정치가 퇴폐 일로를 걷고 있을 때 등장하여 교황권과 로마교회를 개혁한 인물이다. 그는 중세 교황 중에서는 가장 탁월한 인물이었다. 당시 교회 상황을 보면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매우 복잡하고 암담했던 상황이었다. 외부 사정을 볼 것 같으면, 독일 황제는 권력을 이용하여 로마 교회의 내정을 간섭하였으며, 교황 및 감독의 임명을 좌우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국내 정세는 카를 대제의 사후 국왕의 권력이 약화되어서 사실상 대제후(영주)들이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교회는 영주의 손에서 그 흥망이 결정되었다.

 

또한 교회의 내부 사정을 볼 것 같으면, 교회는 부패하여 탐욕과 모략과 음모가 끊이지 않았고 폭력과 암살이 난무했다. 축첩 시대에 잇달아 일어난 교황 폐위 사건 등으로 인해 11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교황청의 권위가 완전히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1044년에서 1046년 간에는 대단히 보잘것없는 세 사람의 교황 베네딕트 9세, 실베스터 3세, 그레고리우스 6세가 동시에 교황이 되어 서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교회의 부흥과 교황권의 회복을 위한 개혁파가 일어났는데 그 대표자가 나중에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이 된 힐데브란트(1015-1085)였다. 그의 등장을 기준으로 로마교회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로 그는 로마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획기적으로 올려놓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세 명의 교황이 서로 다투다가 황제의 간섭으로 세 사람 모두 교황직에서 쫓겨났을 때 힐데브란트는 그 중 한 명인 그레고리우스 6세를 따라서 독일로 추방되었다. 그레고리우스 6세가 죽자 그의 백부가 원장으로 있었던 클뤼니 수도원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각지를 순회하며 교황권 확립을 위해 힘썼는데, 투르의 감독 부르노가 황제 하인리히의 간청으로 교황직에 오르려고 로마로 가게 되자 그도 함께 가게 되었다. 로마인들의 환영 속에서 부르노가 로마에서 교황직에 오르자 헬데브란트는 교황청 부집사가 되었다. 그 자리는 외형적으로는 크게 유력한 자리는 아니었으나 힐데브란트는 그의 인격과 수완으로 교황과 다름없는 실질적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1054년 교황 레오가 죽은 후 몇대의 교황을 모두 그가 선정하다가 드디어 1073년에 힐데브란트는 자신이 직접 교황이 되어 그레고리우스 7세라 칭하였다.

 

교황에 취임하자 힐데브란트는 교회의 지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혁명적 조치를 취하였다. 그는 교황인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리고 베드로의 대표로서 제국과 왕국, 공국(公國), 후작령, 심지어 모든 사람의 소유까지도 다 취할 수 있으며 다시 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땅에 사는 사람이면 황제로부터 비천한 농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권위에 순종하도록 만들려고 하였다.

 

또한 모든 성직자로 하여금 독신 생활을 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성직자들이 누리던 모든 세습적 특권을 빼앗고 오직 모든 것을 교황에게 의지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 횡행하고 있던 성직 매매를 엄금하였다. 당시 파렴치한 고위 성직자들은 영적 자격 유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최고 입찰자에게 성직을 팔아버리는 일을 빈번히 행하였다.

 

그러나 힐데브란트의 최대 싸움은 평신도의 성직자 임명권(Lay Investitue)을 둘러싼 것이었다. 봉건법에 따르면 봉신(封臣, 騎士)은 토지를 소유하는 대가로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법률적 권리를 인정받는 의식을 행했는데 이것을 서임식(敍任式)이라 하였다. 이런 원칙은 성직자에게도 적용되어 고위 성직자가 땅이나 영토를 취득할 때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서임식의 절차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힐데브란트는 클뤼니 수도원의 원칙에 따라 교회 일에 대해 세속 권력이 간섭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여, 성직자는 세속 통치자의 재가 없이(즉 서임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취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는 성직자를 임명하거나 교회에 속하는 토지나 재산을 감독하는 권한을 국왕이나 제후에게서 빼앗아 교황의 권한 아래에 둔 것이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는 교황은 국왕을 지배할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태양과 달이라는 두 빛을 세우신 것처럼 땅에도 교황과 국왕이라는 두 권세를 세우셨는데 그 중 교황은 태양과 같고 황제는 달과 같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그는 당시 독일 황제(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독일 왕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황권 확장 정책을 크게 반대했다. 만일 그레고리우스의 뜻대로 모든 교회 재산 감독권이 교황에게로 넘어가게 되면 당시 독일 제국 토지의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던 교회 감독들과 신부들의 땅은 교황 수중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이는 곧 황제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하며 독일 제국의 주권은 크게 침해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는 교황의 반대파와 결탁하여 보름스 종교 회의(1076년)에서 교황의 폐위를 결정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 역시 그해 6월에 회의를 소집하여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폐위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파문을 당한 황제를 돕는 자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이렇게 되자 영원한 형벌을 두려워한 민중들이 아무도 황제를 섬기려 하지 않았으며 음식이나 피난처조차 제공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어려움과 아울러 제후들의 권고 등으로 인해 하인리히 4세는 결국 굴욕을 참고 일년 이내에 교황과 화해하기 위해 그해 겨울 부하들을 거느리고 알프스를 넘어 교황이 머무르고 있는 카놋사로 찾아갔다. 황제는 맨발과 참회자의 초라한 복장을 하고 눈덮힌 궁전 뜰에 3일을 서 있어야 했다. 4일째 되는 날에 비로소 교황은 그를 받아주었다. 황제는 교황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며 자비를 구하여 사면을 받았다. 이것이 소위 {카놋사의 굴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카놋사의 굴욕은 표면상으로는 교황의 승리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하인리히 황제의 정치적 승리였다. 황제는 독일의 정적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교황이 주재할 아우스부르그 회의를 못하도록 막아버렸고 교황의 다른 계획도 좌절시켰다. 그러나 이 카놋사 사건은 독일 제국이 교회의 권위 앞에 심한 굴욕을 받았다는 인상을 남겨주게 되었다. 교회의 출교 해제가 있자 황제의 정적들은 1077년 3월에 루돌프 공을 세워 내란을 일으켰으나 하인리히 4세는 루돌프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황제에게 반대했던 제후들에게 보복을 가했다. 그러자 교황은 1080년 3월에 로마 회의에서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에 처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독일 국민의 동정이 국왕에게로 쏠려 파문이 효과를 내지 못했고 황제는 이 기회를 타서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하고 클레멘트 3세를 교황에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아예 교황을 죽일 생각으로 이탈리아를 침략하여 3년이나 걸려서 로마를 점령했고 1085년 5월 남부 이탈리아 살레르노의 한 산성에 숨어 있던 교황을 찾아내어 살해하였다.

 

2.교회와 국가의 관계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교회사 초기부터 늘 논쟁과 다툼의 관계였다. 교회와 국가의 세력과 권위는 항상 균형을 유지한 것은 아니고 그 지도자의 인품과 능력에 따라 때로는 국가쪽으로 때로는 교회쪽으로 기울었다. 이처럼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소위 세속적 권위라고 일컬어진 정치적 권위와 교회가 지닌 종교적 권위간의 다툼으로 결정되었다. 중세기에 있어서 지도권과 지상권(至上權)을 가지고 싸우던 이 두 개의 세력은 각각 신성 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교회라는 두 실체로 드러났다. 중세의 역사 대부분은 실제로 이 두 세력이 서로 권세를 잡으려고 다투고 싸운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논쟁과 충돌은 대체로 교황과 황제 두 사람 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때로는 외부적 상황에 의해서 때로는 지도자의 민첩한 행동에 의해 그 패권이 결정되었다.

 

1.칼릭스티우스와 하인리히 5세의 협약 체결

 

감독의 임명권에 관한 문제는 하인리히 4세 재위 기간에 교황 자리에 있던 빅토르 3세와 우르반 2세, 파스카리우스 2세를 거치기까지 해결을 보지 못한 채로 있다가 하인리히 5세가 황제 자리에 오르고 칼릭스티우스가 교황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해결이 되었다.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는 등 두 사람은 항상 다투었는데 양편 모두 싸움에 지쳐서 타협의 기회가 오자 1122년 보름스 협약을 맺고 타협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감독으로서 영지를 받게 될 때는 황제가 영주의 자격으로 홀을 주어서 이를 임명하고 감독의 자격으로는 교황이 반지를 주어서 임명하도록 하였다. 전에는 황제가 반지를 주어서 마음대로 감독을 임명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 권한이 교회로 옮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② 그러나 감독을 선택하여 임명할 때는 황제 또는 그 대리자가 임석해야 하며 임직식을 거행할 때는 황제가 앞서고 교황이 그 뒤를 따르는 순서로 되었다. 그러므로 인물 선택의 권한은 교회에 있더라도 황제가 제후의 권세로 그의 임직을 거부할 때는 감독으로 세워질 수 없었고 영토도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황제의 권한이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2.알렉산더 3세와 프리드리히 1세의 관계

 

알렉산더 3세(1159-1181년)는 탁월한 교황이었고 그 시대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도 중세 독일 제국의 영광이 가장 찬란했던 시대의 뛰어난 황제였다. 프리드리히는 왕권의 근거를 분명히 해두기 위해 볼로냐 대학 교수 4명에게 부탁하여 그 근거를 조사케 했는데 그 결과 원래 왕권은 현재 영위되고 있는 것보다 훨씬 광대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황제는 국왕의 권위를 다시 떨치기 위해 옛날의 로마법을 들고 나와 교황과 싸우게 되었고 교황은 카논법을 방패로 하여 황제와 맞서 싸웠다. 이로 인해 독일은 교황과 교황을 지원하는 여러 이탈리아의 도시 동맹과 전쟁을 치렀으나 끝내 로마를 정복하지 못하고 결국 1177년 교황과 강화 조약을 맺게 되었다.

 

3.켄터베리 대주교와 헨리 2세의 관계

 

영국에서는 왕인 헨리 2세(1154-1189년)와 켄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킷 사이에 유명한 싸움이 있었다. 헨리는 왕권을 강화하고 통일을 도모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토마스 대주교는 그를 반대하여 싸웠다. 이 때문에 헨리는 1164년에 클래런던에서 감독과 귀족을 소집하고 회의를 열어 {클래런던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의 내용은 성직자와 관련된 종교 사건도 국가재판소가 관할하며, 성직자는 국왕의 허락 없이 해외 출입을 못한다. 대감독과 감독사원장 선거는 국왕의 명에 따라 시행하며 국왕 회당에서 행할 것, 상고(上告)는 국왕에게 하며 국왕에게 충성을 다할 것 등이었는데 이 법의 취지는 감독과 그밖의 성직을 국가의 주권 밑에 두고 교황의 권위에서 오는 압박을 막자는데 있었다. 그러나 켄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킷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5년 후 그는 왕과 화해하여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결국 1170년 12월에 피살당했다. 그런 후 1172년에는 클래런던법이 폐지되었다.

 

4.인노센트 3세와 국가의 관계

 

알렉산더 3세가 죽은 후 로마교회의 세력과 명예는 일시 쇠퇴하였으나 인노센트 3세가 교화의 위(1198-1216)에 오르자 다시 권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교황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의 통치권은 세계를 포괄하는 것이며 왕중왕이므로 군왕의 심판자가 된다. 교황은 태양이고 제국은 그 빛을 받아서 빛나는 달과 같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는 자기 사상을 실천에 옮기려고 애를 썼으며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우선 그는 프랑스 왕 필립 2세가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를 취한 일을 승인하지 않고 다시 본처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영국 왕 존이 교황의 명에 따라 켄터베리 대감독으로 취임한 스티븐 랭톤을 승인하지 않자 인노센트 3세는 영국 왕을 파문에 처하고 그의 영토를 몰수하여 프랑스 왕에 준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영국 왕은 굴복하고 사죄했다.

 

인노센트 3세는 남프랑스의 이단파로 알려진 알비파를 박멸하기 위해 제4차 십자군(1202-1204)을 일으켰으며, 역사상 큰 오점을 남긴 악명 높은 종교재판제도가 그의 시대에 시작되었고 고해성사제도 또한 그의 시대에 시작되었다.

 

5.보니파키우스 8세와 필립 4세의 관계

 

프리드리히 2세 이후 독일 제국은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하였고 로마 교황의 전성시대도 역시 지나갔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높은 이상을 지녔으나 이전의 교황들의 힘에 못 미치었다. 그리하여 그는 프랑스 왕 필립 4세와 권력 다툼이 벌어졌을 그 싸움에서 패하고 말았다. 필립 4세는 교황이 1296년에 선포한 법령 즉 국왕 제후는 교황의 허가없이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령에 반대하고 또한 왕의 비준 없이 금은을 국외로 반출함을 금지하였다. 이에 교황은 프랑스 왕을 파문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낙심 끝에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은 교황청의 권위가 크게 실추해 있음을 보여주었다. 교황의 교만과 권력 추구는 교황청이 가지고 있어야 할 영적 권위를 추락시켰으며 거기에 더하여 여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던 민족주의 사상은 교황의 국제적 지배권 행사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3.십자군 운동

 

1.십자군 운동이 일어나게 된 근본 동기

 

중세 기독교의 십자군 운동은 매우 특이한 사건으로서 신앙적 정치적 경제적 원인이 복합되어 일어난 것이다.

 

우선 신앙적 원인을 살펴보면, 이전부터 기독교 신자들은 신앙적 돌파구를 찾고자 할 때 그 한 수단으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등의 성지를 순례하였는데 638년 예루살렘이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점령된 후로는 그 순례를 자유롭게 할 수 없었고 1071년 터키군이 소아시아의 대부분과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부터는 아예 성지 순례가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불만이 고조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정치적 원인을 살펴보면, 이전에 동방에서 이슬람교도에게 패했던 기독교인들은 그 무렵 이슬람교도들과 싸워서 이기는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1060-1090년 간에 남부 이탈리아이 노르만족은 시실리아를 빼앗았고 페르디난드 1세는 이슬람교도들에게서 스페인을 되찾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서유럽 국가들의 국민들 간에는 이슬람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게 되었으며 그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험심과 약탈 욕망, 영토 확장욕 등의 세속적 충동과 합쳐져서 십자군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경제적 원인을 살펴보면, 11세기 유럽의 곤고한 상황을 주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970-1040년 간의 48년이 흉년이었고 1085-1095년 간에는 사정이 더 악화되어 사회적으로 불안과 참상이 널리 퍼졌다. 이런 상태를 벗어나 보려는 욕망이 민중들 가운데서 팽창하게 되었으며 또한 그러한 경제적 곤란은 종교적 열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수도 생활과 금욕 생활을 추구하였고 현세보다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간절히 가지게 되었으며 그 종교적 열정으로 교황청을 개혁하고 성직 매매와 성직자의 결혼 등과 같은 타락을 제거하고 교회와 국가 간의 권력 싸움에는 교회 쪽에 힘을 불어넣는 작용을 하였으며 더 나아가 십자군 운동과 같은 명분 있는 신앙적 투쟁에 기꺼이 몸을 바칠 수 있도록 만들었다.

 

2.십자군 운동의 직접적 발생 동기

 

동로마 황제 미카엘 7세(1067-1078)는 셀주크 투르크족의 소아시아 점령을 두려워하여 로마의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당시 로마 교황권 확장에 열중이었던 그레고리우스는 이것이 동방교회(헬라 정교회)가 서방교회(카톨릭)와 연합하려는 시도인 줄 알고 1074년에 하인리히 4세에게 파병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서로의 임직식 관계로 좌절되었고 나중에 교황 우르반 2세가 시행했다. 그는 동방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터키 군대의 위협을 감당할 능력이 없음을 자인하고 원조를 요청했을 때 원조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1095년 3월 북부 이탈리아의 피아쎈짜에서 회의를 소집했고 그해 11월에 클레르몽에서 다시 회의를 열어 십자군 원정을 호소했다. 이에 신자들은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참여키로 했고 교황은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자의 모든 죄를 사면해 준다고 선언했다.

 

3.십자군 운동의 진행

 

제1차 원정 때는 어느 나라도 왕은 직접 가지 않았다. 은둔자 베드로가 인솔한 오합지졸이 먼저 출발하고 브와롱의 고드프리, 뚤루즈의 레이몽 백작, 노르만디의 로베르, 벨망드와의 위고 같은 지도자들이 30만의 십자군을 이끌고 큰스탄티노플을 거쳐서 1097년 6월에 니케아를 함락시켰고 에뎃사와 안디옥을 점령했다. 그리고 1099년 6월에는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격전 끝에 7월 15일 드디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8월 12일에는 이집트의 이슬람교 원정군을 격퇴시키고 성지 회복에 성공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장기적 방어를 위해 일종의 신정 국가 형태의 예루살렘 왕국을 수립하고 보와롱의 고드프리(Godefroy of Bouilon)를 성묘보호자(聖廟保護者;Protector of the Holy Sepulachre)라는 이름의 왕좌에 앉혔다. 고드프리는 1100년 7월에 죽고 그의 동생 볼드윈이 예루살렘 라틴 왕국의 공식적 첫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1146년 에뎃사가 이슬람군에 의해 함락되었으므로 예루살렘 왕국은 매우 위험하게 되었다.

 

제2차 십자군은 당시 명성 높던 베르나드(St. Bernard)가 모집하고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드 3세의 협조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1147년 원정을 떠났으나 전과 같은 열정이 없는 대부분의 군인들은 소아시아에서 죽고 소수의 남은 십자군은 1148년 다메섹을 공격했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그들은 이 참패가 동로마제국의 제후들 탓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동방에 대한 서방의 감정만 악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왕국은 약 40년간 명맥만이라도 유지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슬람교도들 간의 내분 때문이었다. 그러나 1171년 아시아 남서부의 쿠르드 출신 이슬람 장군인 살라딘이 일어나서 1174년 다메섹을 점령하고 1183년에는 그의 영토가 예루살렘 라틴 왕국의 동쪽과 북쪽, 남쪽을 두르게 되었다. 그리고는 1187년 7월 드디어 하틴에서 라틴 군대를 격파하고 예루살렘과 성지 대부분을 점령하고 말았다. 이 재난의 흉보를 들은 유럽인들은 민심이 크게 흥분되어 제3차 십자군을 일으키게 되었다.

 

제3차 십자군은 1189년에 조성되었다. 3차 십자군은 이전의 어느 십자군보다 많은 준비를 하였다. 당시 용맹한 군인 출신의 독일 황제 프레드리히 1세(1152-1190 재위)와 프랑스 왕 필립(1179-1223), 그리고 영국 왕 리차드(1189-1199)가 대군을 거느리고 성지를 향해 떠났는데 독일 황제는 소아시아까지 가서 이코니엄 강에서 목욕을 하다가 익사를 하고 말았다. 가장 용맹한 지휘관을 잃은 군대는 사기가 떨어졌고 기타의 문제들로 인해 군대는 예루살렘에 도달하지도 못했다. 프랑스와 영국 왕은 서로 점령지에 대한 분쟁 문제로 싸웠고 그러던 중 프랑스 왕은 본국에서 자기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도중에 돌아가 버렸다. 그런 가운데서 영국 왕은 살라딘과 싸우다가 3년간 휴전 협정을 맺었고 살라딘으로부터 성지 순례자는 괴롭히지 않는다는 약조를 받아내고는 전쟁을 끝내고 말았다.

 

제4차 십자군은 1202년에 있었는데 그 병력의 숫자는 보잘것없었지만 그 정치적 종교적 결과는 중요하였다. 이 십자군은 인노센트 3세가 주장하여 프랑스 북부 샴페인, 블로와, 프랑드르 지방에서 모집되었는데 그들은 예루살렘 점령의 첩경은 이집트 정복이라고 확신하고 베니스 상인들과 그곳으로의 군대 수송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 운임을 조달할 길이 없어서 교활한 베니스 상인들의 제안대로 도중에서 헝가리로부터 짜라라는 도시를 빼앗아 베니스인들에게 주게 되었다. 그 후에도 십자군은 동방 제국의 왕위 찬탈에 개입하여 알렉시우스 3세를 폐위시키는 등 성지 회복이라는 본연의 목적과 거리가 먼 정치적 술책에 휘말리게 되었다.

 

제4차 십자군은 엉뚱하게도 동방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교회의 보물을 탈취하여 서방으로 가져왔으며 거기에 라틴제국을 세워 볼드윈을 왕으로 삼았고 큰스탄티노플 대주교를 로마 교회 계통으로 세워서 로마 교회에 예속시켰다. 이로 인해 동서방제국과 교회간에는 증오감만 쌓이게 되었다.

 

제5차 십자군 운동은 소위 [소년 십자군]으로서 매우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목동 스테반과 독일 소년 니콜라스가 수만명의 소년들을 모아 출전했으나 이슬람군대에 의해 크게 참패하고 이탈리아로 흩어졌으며 많은 숫자가 기아로 죽거나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다.

 

제6차 십자군은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 때 독일 황제 프레드리히 2세가 인솔하여 원정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원정을 계속 미루다가 마지못해 잠시 떠났다가 금방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이에 교황은 황제를 파문했으나 그는 1228년 다시 출전하였고 이슬람군대와는 싸우지 않고 이집트의 술탄과의 협상을 통해 향후 10년간 휴전한다는 약속을 받았고 예루살렘과 나사렛, 베들레헴을 얻고 1229년 귀환했다.

 

그러나 잠시 기독교도 손에 들어왔던 예루살렘은 1244년 다시 이슬람교도 손으로 돌아갔고 이 때문에 프랑스왕 루이 9세는 제7차 십자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군사들 대부분은 살해되고 루이 자신은 많은 속전을 내고 살아 돌아오는 신세가 되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온 루이는 1270년 다시 군대를 이끌고 튜니스로 향했으나 그곳에서 전염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와 동시에 영국의 에드워드 1세(1272-1307년 재위)가 아직 황태자 시절인 1271-1272년 사이에 원정을 하여 아크레(Acre)로 진군하고 나사렛을 점령하였다. 그는 협상으로 약 10년간의 휴전을 얻어내고 돌아왔다. 그후 십자군 운동은 없어지고 결국 기독교는 성지를 회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1291년 예루살렘은 완전히 이슬람교도들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그후에도 십자군 운동에 대한 약간의 거론이 있었으나 십자군 운동은 완전히 포기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교황을 제외한) 모든 유럽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수한 열정으로 이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불순하고 복합적인 이유로 이 운동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이 운동은 그럴듯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갖은 부도덕과 약탈과 살육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 운동은 분명한 성령의 인도를 따른 것이 아닌 것으로 증명되고 말았다. 이 일은 영적 일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일이었으며 종교적 일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4.십자군 운동이 실패한 원인들

 

첫째,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일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일어난 순리적이고 영적인 일이 아니라 당시 유럽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세속적 요인들로 말미암아 일어난 정치적 사회적 운동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실패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십자군 운동을 일으키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교황에서 군사통솔권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 일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주도한 일이었는데 그 책임자인 교황에게 군대와 군사권과 지략과 같은 전쟁 수행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병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도 없었고 이해가 상반된 각 나라의 군대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할 수도 없었다.

 

셋째, 출전한 귀족들과 기사들 간에 전쟁 참여 목적이 다르고 이해 관계가 상반되었기 때문에 온전한 원정이 될 수 없었다.

 

넷째, 복음을 위한 헌신적 정신으로 성지 회복을 주장했던 초기의 종교적 열정은 곧 식어버리고 계속적인 내분과 재물을 약탈하고자 하는 불순한 동기, 거칠고 저속한 군대의 행동들로 인해 군대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다섯째, 소년들로 구성된 5차 십자군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십자군 병력이 마음만 있을 뿐 훈련은 거의 되지 않은 오합지졸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잘 훈련된 기병과 지리에 익숙한 원주민들로 구성된 이슬람 군대를 근본적으로 상대할 수 없었다.

 

5.십자군 운동이 남긴 것

 

십자군 운동은 처음 목표와 관련하여서는 실패한 운동에 지나지 않았으나 중세 유럽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첫째, 이 운동은 유럽 각 국민의 단결을 촉진시켰고 기독교회가 하나의 목적 아래 단합과 통일이 되는 기회를 가지게 만들었다.

 

둘째, 십자군 운동은 적어도 이슬람교가 더 이상 서방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셋째, 이 전쟁으로 인해 많은 귀족들이 죽거나 재산을 잃음으로써 봉건제도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대신 중산 사회가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재정적 정신적 인적 손실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었다.

 

넷째, 대규모의 군대와 물자를 장기간에 걸쳐 수송하는 가운데서 해운의 발달이 촉진되고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와 지중해 연안 도시가 번영하게 되었다.

 

다섯째, 서방 출신 십자군이 동방으로 왕래하는 가운데서 유럽 사회가 동방 문화에 깊이 접촉하게 되었고 서방 세계의 정신적 지적 시야가 크게 넓어지게 되었다.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야만인들이 동방의 고대 문화와 훌륭한 도시들을 보고 크게 각성함으로써 서구의 정신 문화와 물질 문화의 발전 계기가 마련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전후하여 중세기 신학의 최고봉인 스콜라신학이 나오게 되었다.

 

여섯째, 십자군 운동의 결과 로마 교회의 수입이 증가하게 되었다. 그것은 상공업이 발달하게 됨으로써 도시 상인 계급들이 점점 부유하게 되어 교회를 위해 많은 헌금과 그릇, 책, 비단, 금은을 기증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십자군 원정 때 교회가 면죄부를 많이 팔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교회는 부해졌고 교황권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세속권을 많이 흡수하여 이전보다 많이 강화되었다.

 

일곱째, 십자군운동은 후대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에 의하지 않고 인간의 정치적 세속적 필요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한 종교적 명분으로 포장되어 있고 부수적 유익을 준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은 가져오지 못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십자군 운동은 이교도로부터 하나님의 세계를 지켜 보호하자는 기치 아래 일어났으나 실제로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유지나 확장에는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으며 신자들의 영적 각성과 진보에도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사탄이 요소 요소에 개입하여 살육과 협잡과 혼란을 일으키도록 만든 점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4.스콜라 철학

 

중세 신학은 흔히 스콜라 신학이라고 부른다. 중세의 철학은 곧 신학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스콜라 철학이라고도 불린다. 중세에 있어서 철학의 본분은 이미 정해진 교회의 교의(dogma)를 철학적 방식으로 설명하고 변증하고 조직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스콜라(Scholar)라는 말은 샤를마뉴 황제 시절의 궁정 학교를 가리키던 이름인데 변증학적 방법을 적용하여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학교와 강단을 중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을 스콜라주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스콜라 신학 또는 스콜라 철학은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과 신앙 체계를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스콜라 철학의 전개 시기

 

스콜라 신학의 역사는 세 단계로 구분되는데 제1기는 발생기로서 9-12세기의 기간이고 제2기는 전성기로서 13세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제3기는 쇠퇴기로서 14-15세기의 기간이다.

 

① 초기(발생기)

 

샤를마뉴 대제 시대(9세기)에서 12세기까지이며 신플라톤학파의 철학을 도입하고 거짓 디오니시우스의 번역에 의해 큰 영향을 받은 J.S.에리우게나와,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명확하게 한정하고 스콜라 철학의 방법을 확립하여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가 대표자이다. 신의 존재에 관한 안셀무스의 증명은 유명하다.

 

② 전성기

 

스콜라철학의 전성기는 13세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서에서 아라비아철학을 이입(移入)함에 따라 재래의 신학과 독립된 지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새로운 연구를 대폭 채용하면서 그것을 전통적 스콜라 철학의 체계 속에 하나로 융화시킨 것이 아퀴나스이다. 신학에 대한 철학의 원리적인 독립성이 유지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신학의 체계로 종합되어 있다. 이에 대해 보나벤투라는 전통적인 아우구스티누스적, 신비주의적 경향을 지켰다.

 

③ 말기(쇠퇴기)

 

말기인 14세기에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가 차츰 약화되었다. 유명론자(唯名論者) W.오컴, 신비주의자 M.에크하르트가 있다.

 

1.스콜라 철학의 발생기

 

스콜라 철학은 교양과 지성의 조화, 즉 종교와 철학의 유기적인 조화를 강조했다. 이 철학은 사실 고대 헬라 철학을 기독교에 혼합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스콜라 철학의 종류는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곧 이상론(理想論), 실재론(實在論), 유명론(唯名論)이 그것이다. 이상론은 플라톤 철학에, 실재론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유명론은 스토아 철학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들 고대 철학자들의 사상은 중세 교회 지도자들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중세 후기 교회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논증하는데 크게 작용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초기의 교부들은 대체로 플라톤 철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세 초기의 스콜라 학자들은 신플라톤 철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스콜라 학파 학자들의 중요 논점은 실재론과 유명론 철학 중 어느 것을 취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중세 후반기의 철학이 되었으며 그 후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의 신학이 되었다.

 

1.스콜라 철학의 특징

 

스콜라 학파는 성경 진리(교의)와 이성(理性)을 조정함으로써 교회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소위 [가장 완전한 신학](Summa Theologia)이라는 것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완전한 신학이란 계시와 이성 곧 하나님의 빛과 인간의 생각을 절충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교의 신학을 그 시대 사조에 맞게 재조정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교의와 이성을 조정하려고 한 것은 이성을 신앙의 근거로 삼기 위해서였으며, 교회 교리를 정리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모든 지식을 정리함으로써 세상이 보다 쉽게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성경을 학문의 기본으로 삼았고 성경 해석을 위해 교회의 전통도 참고하였다. 그리고 스콜라 철학자들은 교부들로부터 계승받은 교의의 전달자였다. 이들은 성경 해석이나 성경 신학에 새롭고 근본적인 공헌을 하려고 힘쓰기보다도 조상들로부터 계승받은 교의를 확인시키기에 힘썼다.

 

스콜라 철학의 가치는 그 지적 구조가 대단히 광대했으며 신학 방법에 일대 진보를 이룩하였다는 점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기독교의 진리와 신학을 합리적이고도 철학적으로 논증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진리를 해석하는데 무리를 하거나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애썼다.

 

그러나 스콜라 철학에는 큰 약점이 있었는데 우선 그들은 역사적 평론을 무시하고 터무니없는 철학의 기초 위에 신학 체계를 수립했으며 그들이 행하였던 성경 해석 또한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전설(전통)에 지나치게 의존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그들은 형식적 논리를 너무 과도하게 구사한 나머지 궤변으로 흐르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한편 그들은 성경이나 교회 역사에 근거가 없는 이론을 도입함으로써 '이단을 뒤집어 놓은 것이 정통'이라는 터무니없는 독단을 낳기도 했다.

 

스콜라 철학의 특징 요약

 

① 중세의 학문 연구는 먼저 성경과 교부(敎父)의 저서, 고대 그리스·로마의 철학자와 기타 저술가가 쓴 저서의 문헌적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그 저서들의 독해·주석·해독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이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서 가장 중시되었다.

 

②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신앙에 의해 인간에게 받아들여지는데 '신앙'은 곧 인간이 거기에 내포된 하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여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라는 것이 스콜라 철학이 지향하는 목표였다. 이때 신앙과 이해(이성)는 서로 한 쪽이 다른 쪽을 요구하면서도 한 쪽이 다른 쪽에 용해되어 없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긴장 관계에 있으며 이것은 중세 철학을 구성하는 이대(二大) 요인이다. 한 쪽이 다른 쪽에 예속되면 스콜라 철학은 없어지며, 신앙과 이해가 긴장 관계에 있으면서도 종합될 때 스콜라 철학이 성립하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의 다양성은 바로 이 종합의 다양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③ 교부와 철학자의 저서는 이것을 위해 사용되었다. 각 문제점에 따라 참조할 만한 전거(典據)들 곧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여러 학설들이 수집, 정리되었던 것이다. 12세기 초의 P.롬바르두스의 [명제론집]은 이런 종류의 저서 중 대표적인 것이다. 아벨라르는 이 여러 견해를 각 논점에 대하여 긍정측과 부정측의 대립하는 양 쪽으로 분류하는 방법('이다'와 '아니다'의 방법)을 도입하였다. 13세기의 [숨마](Summa; 완전하게 정리된 결정적 신학)는 이 대립하는 여러 견해 사이에 조화와 종합을 이루려고 한 시도의 집대성이다. T.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은 그 가운데 가장 저명한 것이다.

 

2.이 시기의 대표적 학자들

 

1.스코투스 에리게나(Scotus Erigena)

 

에리우게나라고도 불리는 에리게나는 아일랜드 사람으로 중세 초기의 가장 탁월한 사상가였다. 그는 845년 샤를 황제의 궁정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거짓 디오니시우스]라는 책을 불어로 번역하고 [자연의 구분]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의 사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벗어나 범신론적 입장을 띠었다. 그는 '하나님은 어떤 거룩한 신적 본질이며 연속적인 본질의 유출로 말미암아 우주 가운데 편만하신 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말하기를 '우주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우주 안에 있어서 그 본질과 정신과 생명이 되시며 그의 창조는 영원하며 영속적이어서 처음도 없고 끝도 없다'고 했다. 그는 또 주장하기를 '우주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자연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것은 그가 철학과 신학, 이성과 신학은 동일한 목적을 가지나 다만 형식만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에리게나 이후에 나타난 그와 비슷한 철학자로는 중세의 에크하르트(Eckart)와 근대의 헤겔(Hegel)이 있다.

 

2.안셀무스(Anselmus, 1033-1109)

 

스콜라 철학은 안셀무스에서 시작하여 토마스 아퀴나스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고 그 후에 몰락하였다. 안셀무스는 이탈리아 피드몬트의 아오스타에서 태어나서 프랑스 노르망디의 베크 수도원에서 수도하였다. 1093년에는 켄터베리의 대감독이 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유명한 [독백](Monologia), [대화],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심]이 있다. 안셀무스가 기독교 사상에 공헌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실재론적 입장이었다. 그는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서 극단적인 실재론자였는데, 개념은 실물을 떠나 있으며 실물 이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변증법을 가지고 기독교의 교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저서 [대화]에 나오는 논리를 보면, '신은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다. 신은 생각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만일 신이 사고(思考)에서만 존재한다면 그보다 더 높은 존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했다. 이것은 신앙과 이성의 접촉점을 찾으려는 스콜라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의 [대화] 제1장 마지막 글에서 그가 한 말 곧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는 말은 신앙은 이성에 앞선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그러나 신앙은 계시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연구해야 완전하게 되고 완성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안셀무스의 실재론적 입장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의 '속죄론'이다. 그의 속죄론은 [말씀이 육신이 되심](Cur Deus Homo)이라는 책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속죄론은 최초의 체계적 속죄론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속죄론은 하나님의 영광에서 출발한다.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유지하며 마귀를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약하며 마귀의 유혹에 싸여 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죄를 이기기만 한다면 사람보다 강한 것은 없으며 아무도 사람을 유혹할 수 없다. 그렇게 하여 타락한 마귀를 부끄럽게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친히 사람이 되시고 사람들의 죄를 지고 죽으심으로써 구원의 길을 얻었다. 인류의 죄는 한없이 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모든 죄를 덮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스도는 그에게서 태어난 모든 인류보다 크시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원본이 수많은 사본보다 더 크고 중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전 세계 인류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러한 안셀무스의 속죄론의 영향을 입은 사람은 후에 나타나는 마그누스와 그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3.아벨라르(Abelard, 1079-1142)

 

안셀무스보다 조금 후에 등장한 아벨라르는 많은 점에서 안셀무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프랑스의 브르따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인격이 고매한 교수로서, 탁월한 철학과 신학 강사로서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학자였다. 그가 1115년 노트르담에 있을 때 그의 재능과 대담한 이론을 접한 많은 학생들로 인해 그의 사상과 생애는 널리 퍼지게 되었다.

 

아벨라르는 안셀무스의 제자였으나 그의 사상을 공허한 것으로 여기고 그와 대립하였다. 그 무렵 그는 파리에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알게 된 여제자 엘루아즈(Heloise)와 사랑에 빠져서 비밀 결혼 생활을 했으나 그녀의 숙부에게 거세를 당하고 서로 헤어지게 되는 비극적 결말로 끝났다. 그 후 아벨라르는 1119년부터 1136년까지 수도원에 있었다. 그가 수도원장으로 있을 때도 그의 인기는 계속 높아져서 문하생이 수천명이나 되었다.

 

아벨라르의 탁월한 재능은 많은 적대자를 낳아서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에 관한 논문이 공의회에서 소각되는 등 많은 박해를 받았다. 특히 그는 비평적인 사상으로 인해 한 때 그를 존경했던 기욤과 그의 제자로서 당시 가장 유력한 사상가요 신비주의자였던 베르나르두스(Bernardus)의 거센 반대를 받아 1140년 이단으로 선고를 받았고 2년 후 클루니 수도원에서 쓸쓸히 죽었다.

 

아벨라르는 중세에 있어서 가장 대담한 사상가였다. 그의 신학 사상은 진보적인 면이 강했다. 그는 신학 연구의 자유를 주장하였으며 성령의 영감에 대해 자유로운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성령의 계시는 신앙과 소망과 사랑과 성례에만 관계되는 것이고 다른 일에까지 확대시켜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선지자나 사도도 잘못될 수 있다고 했다. 원죄설에 대해서 그는 '죄는 각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기인하는 것이므로 죄를 원죄와 너무 연관시켜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속죄설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은 죄인들의 영혼을 감화시키기 위해 행해진 것일 뿐이라고 가르쳤다. 이런 점에서 그는 근세의 도덕감화설(道德感化說)의 시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중세를 초월하여 근대 사상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다만 그의 사상은 논리로부터 출발하였을 뿐 신앙적 체험에서 나온 것이 적다는 점이 약점이다.

 

2.스콜라 철학의 전성기와 쇠퇴기

 

1.대학의 설립

 

초기 스콜라 철학은 12세기 중엽으로 끝나고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는 13세기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는 유럽 각지에서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대학은 처음에 교회나 수도원 부설의 교육 기관이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이름난 학자들이 그런 교육 기관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게 되자 많은 학생들이 몰려 들어 전문적 교육 기관인 대학을 이루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볼로냐(1158년 설립)는 교회법과 민법으로, 프랑스의 파리(1186) 대학과 영국의 옥스포드(1200)는 신학으로, 이탈리아의 살레르노(1200)는 의학으로 이름이 났다. 당시 대학은 교사와 학생들이 상업조합(trade guild) 같은 단체를 만들어 상호 보호와 질서 유지 및 효과적인 지도 운영을 도모했으며 교수의 직업 규정도 만들었다. 그리하여 학생과 선생의 universitas scholarium(University of Scholars)이라 이름했다. 이런 대학교 조직은 1200년 경에 형성되었다.

 

중세 유럽의 대학들은 학문의 도장으로서 국가나 교회가 간섭하지 않았으며, 세금과 병역 의무가 면제되는 등 특권이 부여되었다.

 

2.이 시기의 대표적 학자들

 

1.알렉산더(Alexander of Hales, 1170?∼1245)

 

영국의 신학자요 철학자인 알렉산더는 헤일스에서 나서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했다. 그는 박식하여 '불가항박사'(不可抗博士), '신학자의 왕자'라고 일컬어졌으며 스콜라 철학과 프란시스코회 학파를 창시하였다. 주요 저서인 {신학대전(神學大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형이상학 및 아라비아, 특히 아비켄나의 사상을 받아들인 최초의 대전이었다. 그러나 그의 견해가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받은 어거스틴·빅토르학파 설과 대립될 때에는 그들(어거스틴·빅토르학파)의 의견을 우선한다는 방법을 취하여 13세기 프란시스코회 신학 기초를 쌓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통달하였고 그것을 사용하여 신학의 계통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궁극적 진리는 성경뿐이라고 하면서 온건한 실재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세속적인 일에는 지식이 믿음보다 앞서며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믿음이 지식보다 앞선다'고 했다. 그러므로 "신학은 지혜를 모아놓은 것이지 과학이 아니다. 신학은 경험을 통하여 얻는 지식처럼 연구를 통해 얻게 되는 지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사상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계승하였다.

 

2.보나벤투라(Bonaventura, 1221∼1274)

 

중세 이탈리아 신학자·철학자로서 토스카나 지방의 바뇨레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알렉산더의 제자로서 1257년 T.아퀴나스와 함께 탁발수도회 수사로서는 처음으로 파리대학 신학박사 칭호를 얻었다. 그의 신학은 어거스틴에게서 시작되어 안셀무스가 확인한 전승적인 것이었다. 아퀴나스에 비해 그는 시간에서의 세상 창조를 이성의 빛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을 인지하고 하나님의 존재와 무한 선을 이해함으로써 풍요로워지며 명상은 기도, 묵상, 덕성, 사랑이 요구되는 바 하나님의 은혜로 추진되어야 완성이 된다고 하였다.

 

3.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1200?∼1280)

 

독일의 신비주의자로서 도미니코 단원이었던 그는 당대에 가장 유명한 신학자였다. 이탈리아 파도바대학 재학중 도미니크회에 들어가 풍부한 학식으로 <보편적 박사>라는 별명을 얻었고, 생전에도 Magnus(위대한 사람)이라고 존칭될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는 쾰른에서 18년간 교수하였으며 경험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동·식물과 광물계의 관찰과 천문학적 연구를 하였는데, 이 영역에서는 경험만이 확실성을 부여한다고 주장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관찰 결과에 근거하여 주저 없이 정정하였다. 그는 신학자였으나 신학 연구와 교육을 위해서는 세계와 인간에 관한 학문, 즉 철학이 불가결하며 이와 같은 세속적 학문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선의 교사라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견지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모든 부분을 라틴세계 인간에게 이해 가능한 것이 되게 하자'고 계획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주요 저서의 주석을 씀으로써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처럼 그는 누구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여 그것을 이용하여 교회의 교리를 세우려 하였다. 그의 체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 뿐 아니라 신플라톤 철학이나 이슬람의 아비켄나에서 유래하는 요소도 섞여 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있어서 신학을 하나의 과학으로 정의한 사람이었으며 매우 많은 저서를 낸 대학자요 주석가였다.

 

4.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이탈리아 출신의 아퀴나스는 중세 스콜라 철학을 완성한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카톨릭 세계관에 도입하여 체계화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어거스틴, 칼빈과 함께 서방에 있어서의 세 가지 주요 신학 정신을 형성한 인물로 꼽힌다.

 

① 생애와 저술

 

아퀴나는 로마 황제령과 프리드리히 2세 영역의 경계에 있는 로카세카 성주의 아들로 출생하여 5살 때부터 몬테카시노에 있는 베네딕트회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15세 경 전화(戰禍)를 피해 몬테카시노를 떠나 나폴리대학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학문연구를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탁발수도회인 도미니크회를 접하게 되었다. 가족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도미니크회에 들어간 그는 파리를 경유하여 쾰른으로 건너가 거기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지도를 받았다. 과묵하고 큰 체격을 가진 아퀴나스는 마그누스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파리대학 교수의 후보자로 추천되었다. [명제논집]의 해설 강의를 마친 아퀴나스는 1256년에 교수자격을 획득하였으나 탁발수도회원을 배격하던 파리대학의 규정에 따라 강의의 시작은 1년 뒤로 미루어졌다.

 

신학과 교수의 주요한 직무는 성경 강의 및 학문적 논점에 대한 토론의 주재(主宰)와 설교였으며, 이 시기의 대표직 저서로는 [유(有)의 본질에 관해서]와 소수의 성경 주석 외에, 당시의 철학·신학의 주류였던 어거스틴주의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바탕을 두는 진리에 따라서 보완하려고 시도했던, 정기토론집 [진리에 대하여]가 있다.

 

아퀴나스는 관례에 따라 3년간 교수로 재직한 뒤, 이탈리아로 돌아가 약 10년 동안 교황청 및 도미니크회 부속학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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