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신구약중간시대

하나님아들 2021. 3. 5. 23:53

신구약중간시대

-바벨론포로에서 바코크바 전쟁까지(587 B.C.- A.D.135)-

 

이종록(장로회대전신학교,구약학;선창교회협동목사)

I.들어가는 말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얼마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까? 그들이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한 주전 13세기부터 주전 6세기말까지는 아무리 어려움이 많았다고 해도, 그래도 국가는 존재했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유다가 멸망한 주전 587년 이후로 이스라엘 민족은 온전한 의미의 국가를 갖지 못했습니다. 더우기 세계역사의 주도권은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페르시아에서 메대로, 그리고 헬라로, 헬라에서 로마로 정신없이 바뀌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주권을 잃은 유다인들이 어떻게 살았을지 짐작이 됩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을 것 같습니까? 그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고 그것 을 후손들에게 전수하기 위해서 몸부림쳤습니다. 이들의 노력으로 이스라엘은 비록 주권국가는 없어도 민족과 종교는 유지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열심으로 신앙을 지키려고 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일이지요. 유다의 멸망 이후로 바 코크바전쟁까지의 유다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가 이 시간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이 시대를 보통 [신구약중간시대]라고 하지요. 이 시기에 유다인들은 자꾸만 변하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삶의 중심인 [야웨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변 여건을 창의적으로 수용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더욱 풍성하게 만 들었습니다.놀라운 일이지요. 우리는 유다인들의 이러한 모습을 더듬어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급변하는 시대에 신앙을 지켜가는 삶의 지혜를 그들에게서 배우게 될 것입니다.[구약시대의 사상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신약으로 전해졌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신구약중간시대]를 반드시 공부해야 합니다. [신구약중간시대]를 이해하지 않고는 [신약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II.유다교 역사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연 어떠한 상황에 처했으며, 어떻게 살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 주전 587년 이후부터 바 코크바 전쟁까지의 역사를 개관해보기로 하지요.


539 522 333 323 200 70.B.C.
--------+---------+-------+---+-----------+-----------+------------
바벨론 페르시아 메대 헬라 프톨레미 셀류시드 로마

(이집트) (시리아)

 

바벨론/바사/메대


587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 함락. 바벨론 치하에서 성전의식거행금지로 안식일, 할례준수에 치중.

종교적으로, 인종적으로 차별대우나 어려움을 받지 않음.
539 유다인들의 예루살렘 귀환 539 고레스(바사)-바벨론정복 고레스-민족의 독자성 인정/관습과 종교인정/아람어사용.
사마리아공동체와의 반목과 갈등.
515 제2성전건축 522 다리오(메대)
445 느헤미야,에스라귀환/유다교시작

 

헬라제국시대


333 헬라통치시작/헬라화 333 알렉산더의 승리
헬라어사용/헬라식으로 인명과 지명의 개명/헬라의 도시법적용/

헬라문명-헬라건축물 : 극장,목욕탕, 경기장/의술/질문과 대답에 의한 논의방법수용.
323 프톨레미의 팔레스타인 지배 323 알렉산더의 죽음
200 셀류시드의 팔레스타인 지배
셀류시드의 통치초기에는 유다인들에 대해서 호의적이었으나,

셀류시드의 통치자들은 철저한 헬라주의자들이어서, 강력한 헬라화추진 /경건한 유다인들의 반발.
175 대제사장 오니아스

175-164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요수아('야손'으로 개명)-오니아스를 축출하고 대제사장직탈취.
메넬라우스-시리아왕에게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 매매.
안티오쿠스의 거짓 사망소식에 야손의 대제사장직 복귀/메넬라우스추방
안티오쿠스의 분노와 메넬라우스의 복귀.
169 안티오쿠스-예루살렘성전약탈/강력한 헬라화추진/유다인들의 반발
167 안티오쿠스-예루살렘에서 제우스신숭배/다니엘서
모데인의 제사장 맛다디아의 반발로 인한 마카비혁명/하시딤들의 참여
164 안티오쿠스 사망


하스모니안왕가


164 유다 마카비-성전수복(12월25일:수전절[하누카]),예루살렘제의 회복, 대제사장 메넬라우스 제거
하시딤들과 하스모니안왕가와의 갈등
하시딤들은 시리아가 임명한 알키무스의 대제사장직 인정
유다 마카비는 시리아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을 원함
160 유다 마카베오 죽음
153 요나단-대제사장 겸임/하시딤들의 실망-바리새파출현
하스모니안왕가는 다윗의 혈통도 아니고, 대제사장 혈통도 아니었기에 대제사장직 겸임은 유다인들의 반발을 샀다.
143 요나단 피살됨
140 시몬-대제사장 겸임/하스모니안 왕조건설/평화로운 시대
하스모니안왕가의 세속적인 통치에 반발하는 무리들이 사해로 은둔
134 시몬 피살됨
134 요하네스 히르카누스즉위(~104)-대제사장직겸임/바리새파의 비판
128 히르카누스-사마리아 성전함락
107 사마리아의 멸망
104 아리스토불즉위/[왕]칭호사용-대제사장직겸임/바리새파의 비판
103 요나단([알렉산더 얀네우스]로 개명)즉위(~76)/대제사장직겸임
헬라주의자인 요나단의 대제사장직 계승에 유다인들은 공개적으로 반대했으며, 폭동이 일어났다.

요나단은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해서 800명을 체포해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에 처했다.
76 살로메 알렉산드리아 여왕(~67)/히르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에 임명
히르카누스2세와 아리스토불2세의 대결


헤롯왕가


37 대헤롯(~4) : 하스모니안왕가의 사위/하스모니안왕가계열제거/반대자제거
4 아켈라오(~A.D.6) : 유다,이두메, 사마리아의 분봉왕
아켈라오의 통치지역은 A.D.6부터 로마총독의 관할에 들어갔다.
4 헤롯 안티파스(~A.D.39):갈릴리,베뢰아의 분봉왕
4 필립(~A.D.34):북동 요르단의 분봉왕
41 헤롯 아그립파(~44):유다왕

 

로마총독의 통치


44 로마의 직접 통치
54 총독 펠릭스(~68)
60 총독 베스도(~62)
66 유다전쟁(~70) 52 네로(~68)
지방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의 착취와 입성하는 로마군대의 유다인멸시로 인해서 유다인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70 예루살렘 정복과 멸망 69 베스파시안(~79)
73 마사다 요새 함락
132 바 코크바 전쟁(~135) 117 하드리안(~138)
하드리안 황제는 예루살렘의 성전터에 쥬피터신전을 건축하도록 하고, 할례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유다인들이 이에 반발해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독립을 선포하고 독립을 기념하는 동전을 만들었다. 희생예배를 드리기 시작하고, 봉기를 일으킨 해를 기원으로 연대를 계산했다. 랍비 아키바는 봉기의 주도자인 바 코크바를 [별의 아들],즉 메시야로 인정하고,거부하는 사람들, 특히 유다 기독교인들을 체포해서 처형했다. 그러나 바 코크바는 체포되어서 처형되었고, 아키바도 처형되었다. 로마는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그 폐허 위에 로마식민지를 건설했으며, 쥬피터 신전을 건축하고,유다인들의 거주를 금지했다.


III.유다인들의 자세


A.국제정세수용


앞에서 말한 [유다교의 역사]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유다인들은 국제정세의 변화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열악한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그들을 점령하는 강대국들에 대항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 지 명확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강대국들에 저항하기보다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알렉산더가 세계를 정복할 때, 유다인들은 알렉산더에게 항거하는 대신, 오히려 그를 환영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유다인들은 많은 혜택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이후의 통치자들에게도 즉각적인 환영을 표함으로써, 여러가지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시대에는 유대인들의 병역이 면제되었고, 안식일에는 관청이나 재판에 출석하 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규칙을 제정하고 집행할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환영이 자의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각 정파별로 입장차가 드러나서 때로 내부적인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하고, 반감이 고조되고 전지역으로 확산되어서 유다전쟁이나 바 코크바 전쟁과 같은 유다독립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지요. 그러나 대체적으로 유다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국제정세 를 수용하는 현실적인 결단을 했습니다.

B.외국문물수용


유다인들은 강대국의 문물과 사상도 별 거부감없이 수용했습니다. 물론 안티오쿠스4세의 지나친 헬라화에 반대하기도 했지만, 헬라를 비롯한 강대국들의 통치자들이 유대인의 관습과 종교에 비교적 호의적이었고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크게 반발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통치시대에는 결정론적이고 이원론적인 사상을 수용했으며, 특히 페르시아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유다인들의 전통적인 사상과 결합시켜 [묵시]를 형성해냈습니다. 헬라시대에는 헬라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그것으로 야웨신앙을 표현했고, 율법학자들은 그들의 선조들의 교육방식을 개선하기 위해서 헬라인들의 [문답식 교육방법]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특히 디아스포라 유다인 공동체에서는 [필로]와 [요세푸스]와 같은 사람들이 스토아철학과 같은 헬라의 이성중시 사상을 받아들여서, 야웨신앙을 표현해 냈습니다. 그들의 노력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독특한 율법은 주변 세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인 윤리적인 규범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헬라의 사상은 유다인들의 성경연구도 촉진시켰습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유다인들이 야웨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는지를 보게 됩니다.
[알렉산더의 동양진출로 서구의 사상이 동양에 전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사상이 서구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원래 헬라에는 군주의 신권설이나 신국설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알렉산더의 동양진출로 이러한 사상이 서구에 알려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황제숭배사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동양의 신비종교들도 서양에 영향을 주었는데, 바벨론 사람들은 천체의 운행을 연구했고, 인간의 운명이 천체의 운행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 전에 알아냈지요. 신의 죽음과 부활, 황홀경 ,구원, 구세주, 신적 계시들의 개념들도 서양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C.야웨신앙고수
이방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사상을 수용하면서도,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유다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믿는 야웨 하나님이 참신이시고,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임을 역설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방의 문물에 동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보다 선진의 문물을 수용해서, 유다인들의 고유한 신앙을 표현해냈습니다. 이방의 철학을 빌어서, 유다인들의 독특한 신앙을 다른 세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필로는 로고스 개념을 빌어서 구약의 하나님을 설명했습니다. 말이 쉽지,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IV.유다공동체


그러면 이제는 유다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아보기로 하지요. 여기서는 그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것보다, 당시 유다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집단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A.팔레스타인 유다공동체

1.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율법학자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유다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주도적인 세력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다인 사회의 귀족들로서, 정치가들이었고, [산헤드린]의 회원이었습니다. 후대로 갈수록, 사두개인보다 바리새인이 더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1)사두개파
사두개파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습니다.[사두개]라는 말은 솔로몬의 제사장이었던 [사독]에게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들은 왕정 시대와 유배시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안티오쿠스 4세와 하스모니안왕가시대에는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이들은 매우 엄격한 율법주의자들이었으며, 성향은 보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이나 영혼불멸, 천사론에 대해서 거부하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극히 현실 타협적이어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는 국가에 충성을 맹세했으며, 유다공동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입장을 택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국가의 독립을 꾀하는 셀롯당의 사람들에게는 증오의 표적이 되었지요. 사두개파는 유다인들의 봉기를 막는데 힘을 썼지만, 결국 주후70년의 유다전쟁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이 전쟁에서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죽임을 당함으로써 사두개파는 괴멸되었으며, 그 이후로는 세력을 얻지 못했습니다.

2)바리새파


바리새파는 마카비혁명에서 유래합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유다 종교탄압에 반발해서 경건한 유다인들([하시딤])이 이 혁명에 동참했는데,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스모니안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 제의를 회복한 이후에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직을 겸임하고, 그것을 세습하게 되자, 이에 반대해서 그들과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파가 되었 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요. 이들은 사두개파와는 여러가지 면에서 입장차를 보였습니다.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는 달리 부활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어느 집단보다 바리새파는 유다인들에게 가장 강한 영향을 미쳤지요. 주전 2세기 이후의 유다인 사회는 이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제와 장로들이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는데, 나중에, 기원전1세기에는 서기관들이 들어오게 되고, 후에는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이 장악하게 됩니다. 예수도 그들을 비판하기는 했지만, 이 바리새파계열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사두개파처럼 현실 타협적인 정치관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셀롯당처럼 폭력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야웨신앙을 파기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자세를 [비폭력저항]으로 규정할 수 있겠지요. 바리새파는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서 힘을 기울였으며, 당시 6000여명의 바리새파 사람들이 있었다는군요. 이들은 공동체의 구성원끼리 교제를 했으며, 물건구매도 공동체 내에서 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파]하면 비난의 대상으로만 생각하지만, 강대국들의 지배하에서 이들이 야웨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2.셀롯당


셀롯당은 과격한 독립운동단체였습니다. 이들은 사두개파와는 달리 그들을 지배하는 국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하나님만을 왕으로 인정하고, 무력으로 독립을 얻고자 했습니다. 주후 6년 아켈라오 해임 후에 로마가 직접 유다를 통치했는데, 유다인들에게 호적을 등록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실상은 세금징수를 위한 것이었지요. 여기에 유다인들이 반발했는데, 바리새파에서 분파한 셀롯당(리 더:갈릴리 유다)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셀롯당이 있었지요(시몬).

3.엣세네파와 쿰란공동체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유다인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종교지도자들이면서 동시에 정치지도자들이었다면, 엣세네파와 쿰란공동체는 현실세계에서 뒤로 물러나 사해근처에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살았습니다.


1)엣세네파


대략 4000여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결을 강조하고, 재산을 공유했으며, 비밀유지를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영혼불멸과 운명론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는데, 몸은 영혼의 감옥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심판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2)쿰란공동체


쿰란공동체는 엣세네파의 핵심그룹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엣세네파와 공통점이 많습니다. 이들은 이름을 확인할 길이 없는 [의의 선생]에 의해서 창시되었으며, 다른 어느 공동체보다 성경필사와 성경연구, 주석작업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이 남긴 [사해문서]들은 너무나 유명하지요. 이들은 철저히 서열을 중시했는데, 사제들이 최상층이었습니다. 사제들은 사독의 후손들로 알려졌으며, 이들은 예루살렘의 사제들과는 달리 [쿰란축제력]을 사용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의 사제들과 반목하게 되었지요. 또 대제사장직을 겸임하고 있는 하스모니안왕가에 대해서도 반대했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의를 말합니다. 신자([빛의 자녀들])의 삶을 사탄과 어둠의 세력들([어둠의 자녀들])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보았고, 자신들이 그 투쟁의 전열에 서 있다고 생각했지요. 쿰란공동체는 부활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종말론적인 희망은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언자와 메시야적인 왕, 메시야적인 대제사장의 도래를 기다렸습니다.


B.팔레스타인 유다인과 디아스포라 유다인


유다인들은 팔레스타인에도 살았지만, 여러 국가들에 흩어져서 사는 디아스포라들도 많았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곳에서 강력한 유다인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물론 이들은 팔레스타인의 유다인공동체에 비해서 당시의 조류에 비교적 개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의 철학사조들도 쉽게 수용하고자 했으며,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보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헬라문물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자유로운 자세를 보였습니다. 팔레스 타인의 유대인들이 부활과 종말론, 메시야대림사상을 갖고 있었다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헬라의 영향을 받아서 영혼불멸과 윤리를 강조하고, 율법을 도덕적 계명으로 재해석해냈습니다. 정경형성에 있어서도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반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여러 책들을 포함시켰습니다. 마카비혁명이 일어나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다시 확립하기 시작했으며, 본질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유다인들과 다름없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야웨종교를 이방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다인들 가운데 필로는 헬라의 스토아철학(특히 로고스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야웨종교를 새롭게 해석해냈습니다. 요세푸스도 많은 저서를 통해서 유다교를 소개했습니다. 헬라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디아 스포라 유다인들은 헬라화 되어가고 또 헬라어를 사용함으로써 히브리어를 잊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야웨신앙을 확고히 가르치기 위해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셉튜아진타](LXX,칠십인역)이지요.칠십인역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라는 위경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칠십인역성경은 후에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더 많이 사용되어서,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유다인들은 다른 역본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아퀼라, 데오도션, 심마쿠스들의 헬라어 역본들이 만들어졌지요. 우리는 이러한 모습에서도 유다인들이 그들이 처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해내고, 또 전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C.사마리아공동체와 예루살렘 공동체


고레스의 칙령으로 바벨론의 유다인 포로들이 예루살렘에 귀환함으로써, 사마리아 공동체와 예루살렘 공동체의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민족성과 야웨신앙에 있어서 정통성시비가 벌어진 것이지요. 초기에는 사마리아 공동체가 더 강력했지만, 후대에 가면 예루살렘 공동체가 강해져서,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산에 세운 그들의 성소는 주전 127년에 히르카누스에 의해서 파괴되고 맙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데, 이것을 [사마리아오경]이라고 합니다. 이들도 자신들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V.유다교의 특징들

1.[예언]에서 [묵시]로


신구약중간시대에 유다인들은 많은 기록들을 남겼습니다. 이 기록들은 [외경]과 [위경]으로 분류되지요. 이 기록들 가운데 [묵시 문학]이 들어있습니다: 에녹서, 모세의 승천기, 에스라4서, 바룩의 묵시록, 12족장의 유언, 쿰란문서들. 묵시문학은 주전 2세기에서 주후 1세기 사이에 나타나는데, 페르시아와 헬라사상의 영향을 받았지요.[묵시](묵시를 가리키는 용어로는,[묵시적 종말론 ],[묵시문학],[묵시운동]들이 있습니다)는 이 세상을 악으로 가득찬 것으로 규정하고, 인간의 노력의 무위함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초월적이고 초역사적인 사역을 이야기합니다. 종말의 때에는 하나님의 군대와 악한 세력과의 싸움이 벌어지고, 우주적인 차원에서 종말의 징조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지만, 결국 하나님의 군대가 승리하고 의인들은 살아남게 되지요. 이런 시나리오를 갖는 [묵시]는 지상적인 메시야왕국을 말하는 [예언의 실패]로 인해서 나타났으며, 예언과는 달리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개방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측면도 있지요. 그리고 결정론적인 역사관을 보여줍니다. 유다 묵시사상은 기독교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바 코크바전쟁이 끝난 다음, 유다교는 묵시사상을 거부하고, 회당에서 묵시서를 읽지 못하게 하는데, 그래서 묵시사상은 유다교가 아닌 기독교로 이어지게 되지요 .묵시사상은 유다인들의 전통적인 희망이 성취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만들어낸 신앙형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유다인들의 투철한 신앙계승의 모습을 보게 되는군요.

2.[성전]에서 [회당]으로


예루살렘성전이 여러번 파괴되고, 또 유다인들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삶으로써, 제사드리는 것이 사실상 어렵게 되자, 유다인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곳에 회당을 짓고, 회당중심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회당에서는 제사를 드리는 대신,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쳤습니다. 회당은 유다인 자녀들의 교육의 장이었지요. 나중에는 팔레스타인에도 회당들이 세워졌습니다. 회당 은 바로 유다인들이 찾아낸 새로운 삶의 방식인 것이지요. 여기서 기독교도 나오지요.

3.[말씀선포]에서 [말씀기록과 연구]로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직접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가면 과거에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그것을 보존하고 정리해서 모으고, 모아진 것들을 연구하는 쪽으로 가게 됩니다.엄격한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들은 이 분야의 전문 가들이었지요.랍비들의 작업에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할라카]와 비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하가다]가 있습니다. 할라카는 후에 [미쉬나]로, 하가다는 [게마라]로 묶어지고, 할라카에 들지 못한 후대의 것들을 따로 모아서 이것을 [토셉타](증가분)로 부르게 되지요. 이것들을 모두 묶은 것이 바로 [탈무드]라는 것이지요. 탈무드는 [팔레스타인 탈무드]와 [바벨론 탈무드]가 있는데, 바벨론 탈무드가 후대의 것이고, 분량이 더 방대합니다. 이러한 유다 랍비들의 작업과 전승이 유다교를 풍성하게 만들어왔지요. 이것도 생 존의 요인이지요.

VI.나오는 말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신구약중간시대]의 유다인들의 삶은 바로 [이방문화와의 만남과 대결]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이방의 문물을 크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면서도, 본질적인 [야웨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방인들 속에 살면서, 이방의 문물을 수용해서, 자신들의 독특한 야웨 신앙을 주변 세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인 언어로 표현해 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과 그들의 신앙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시대가 변하면, 그에 따라 야웨신앙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함으로써, 자신들도 살리고, 야웨신앙도 지켜온 유다인들. 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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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모함 2010. 9. 29.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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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사
序 論

이천년 전의 기독교 역사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밑 바탕이 된 당시의 사회와 문화 또한 역사적 사실들이 매우 중요하게 나타난다. 즉 기독교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초기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전과 이후의 시대상을 바르게 이해하여야만 올바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헬레니즘이 유대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헬라문화는 이후 유럽세계를 이끌어 나가는 문화로 꽃피워 졌고 크리스트교는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에 접목되어 당시의 로마에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이에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제국의 성립과 분열 그 상황속에서의 유대의 상황을 알아보고자 한다.



本 論

A. 헬레니즘 세계의 형성

1. 알렉산더의 정복과 정책
a. 알렉산더의 통일제국
다니엘서 2장에는 느부갓 네살이 꾼 꿈에 큰 우상이 나오고(단2:31-35) 그에 대한 해석이 다니엘에 의하여 이루어 진다. 7장에는 다니엘이 꾼 꿈과 환상 중에 네 짐승이 나온다. 그런가 하면 8장에는 그 꿈과 그 해석 중에 여러 나라들이 나오는데 그 셋째가 헬라로(단8:21) 단10:2 에서는 헬라 군이 단11:2 에서는 헬라 국이 나온다.
주전 5세기 중엽부터 도시 국가간의 치열한 전쟁이 전개되어 오다가 서로 패하고 망하게 되었다. 그때에 북방의 야만족으로 알려진 마케도니아가 헬라 세계에 위협을 가하게 되었다. 그때의 마케도니아의 지도자는 필립 2세 (382-336 B.C)였는데 그는 정력적인 독재자 였다 그는 군제를 개혁하고 트라키아(Thrakia)해안의 광산 지구를 공략하여 재력을 얻었다(357 B.C). 그는 세계 정복을 꿈꾸어 왔으나 고도 아이기아(Aigia)에서 암살당했다.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자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둔 알렉산더 대왕이었다.
주전 336년에 약관의 나이 20세에 필립 2세의 뒤를 이어 마케도니아 왕이된 알렉산더는 헬라의 통일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는 주전 334년경 막강한 장비와 무기를 갖춘 정예 3만5천의 병력을 이끌고 페르시아로 진군하여 소아시아, 두로, 가사등 주요 지역을 단숨에 공략했다. 그가 정복한 곳곳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웠으며 나일강 멜타지역에 세운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시대의 이집트의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그 외 그의 정복 사업은 이오니아 바다로 부터 인도의 푼잡까지 그리고 코카사스 산맥으로부터 리비아 사막과 애굽 국경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즉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그리스 세계와 오리엔트 세계와의 통합이 이루어 졌으며 그리고 그의 동서 융합 정책으로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두 문화권의 융합을 가져오게 되었고 그래서 이 지역이 하나의 문명권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10여년이란 짧은 시일에 전무한 세계 최대 제국을 건설했던 알렉산더도 열병을 이기지 못하고 B.C 323년 33세로 별세하고 말았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로마가 그리스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시기까지의 약 3세기 동안의 역사를 헬레니즘 시대라고 구분한다. 알렉산더의 정복결과 이루어진 융합 정책으로 그리스와 동방의 여러 요소들이 혼합된 문명이 형성되었다. 이 문명을 고전적 그리스 문화와 구분하여 헬레니즘 문화라 구분한다.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의 탄생은 전적인 그의 융합 정책으로 이루어 졌는데 그 첫째로 결혼 정책으로 자신의 병사들로 하여금 원주민 여자들과 결혼 시킴으로써 융합 정책을 폈으며 둘째로 동서의 인종이 함께 거주하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또한 많은 교통로를 개척하고 통상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흠정화폐를 발행하여 그의 지배 영역에서 사용하게 하였다.

b. 알렉산더의 동서 융합정책
동서 문화가 융합 되는 가운데서도 정치, 경제, 풍속, 제도 등의 면에서는 동방의 전통이 견지 되었다. 알렉산더 자신도 동방의 제도를 답습하여 폐르시아식 의관을 사용 하였고 신하들에게 엎드려 절하게 하였다. 그러나 언어, 학문, 예술의 분야에서는 그리스의 영향이 압도적이었다. 특히 그리스어는(코이네 헬라어)는 그의 전 영역의 공통어로서 동방 세계 전역에 널리 보급되었다. 이 언어는 지중해(동부) 세계의 공용어가 되어 거의 6세기나 지속되었다.


2. 헬레니즘 세계의 주요 국가
알렉산더 대왕의 뜻하지 않은 죽음은 그가 이룩했던 대 제국의 붕괴를 초래했다. 그의 제국은 그의 장군들에 의해 크게 3분 되었다. 안티고누스의 후계자들은 마케도니아를 셀류커스의 후계자들은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에 그리고 프톨레미의 후계자들은 에집트를 지배하였다. 이들 국가중 가장 강력했고 직접적으로 유대에 영향을 미친 것은 에집트의 프톨레미 왕국과 시리아의 셀류커스 왕국이었다.

a 프톨레미 왕국 (에집트)
마케도니아의 장군들 중의 하나인 프톨레미 소테르 (Ptolemy I Soter B.C 367-282))는 알렉산더가 별세한 후에 에집트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헬레니즘 시대의 다른 통치자들보다 심리적으로 유리한 강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알렉산더의 시신(屍身)을 입수하여 알렉산드리아 시(市)에 안치 하였다는 것 때문이다. 그는 B.C 305년 자신을 왕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영토확장에 힘썼으며 이후 프톨레미 2세 3세 4세에 걸쳐 확장정책을 계속 추구하였다.
당시 에집트는 다수의 에집트 원주민과 자유로운 폴리스의 전통을 가진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 인들이 섞여 있어서 그 통치에 어려움이 있었다. 왕은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에집트인 통치에는 에집트 고대의 파라오 정책을 그리스 인들에게는 신성시된 군주로 행세하였다. 당시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문화적으로나 상업으로나 헬레니즘 세계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 였다.

b 셀류커스 왕국 (시리아)
시리아의 셀류커스 왕조는 알렉산더 휘하 장군들 중의 하나인 셀류커스 1세(Seleucus I Nicator B.C 258-280) 에 의해 창건되었다. 그는 바벨론 총독으로서 세력을 확장하여 동쪽으로 인더스까지 지배세력을 확장했으나 마우리아 왕조(Mauryan dynasty)의 찬드라굽타(Chandragupta)에 의해 저지 되었다. 이후 왕위 계승자들은 선대의 영토를 많이 잃었다. 6대인 안티오쿠스 3세(223-187 B.C)는 선왕대의 상실했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또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확장정책과 때 마추어 로마의 동방으로의 확장정책과 충돌을 일으켜 그 확장 정책은 위축되었고 국력은 쇠약해졌다. B.C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로마에 예속되기 까지 시리아 지역을 통치 하였다.




B 헬레니즘 세계의 사상과 종교

1. 사 상
알렉산더의 원정과 동서 융합정책으로 고양된 세계 동포주의 는 헬레니즘 시대의 모든 그리스 사상과 사회의 공통적 특징이었다. 폴리스의 공동체적 생활보다는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두드러졌다.
상대주의와 세계동포주의, 개인주의와 도피주의는 헬레니즘 시대의 모든 그리스 문화의 양상을 특징지었다. 철학사상에는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회의학파등이 있었는데 각각 그 주장의 차이는 있었으나 이러한 근본적인 특징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에피크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는 기독교 초기 로마세계의 상류사회를 지배하는 주된 사상이었다.

a 스토아 학파
에피크로스 학파와 나란히 나타난 헬레니즘-로마시대 즉 고대 그리스 시대 말기에서 로마 지배의 시대에 걸치는 당시의 대표적인 철학 유파로서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 초기 스토아 학파
B.C 3세기의 키프로스의 제논에 의해 시작되었고 뒤이어 크리시포스(ChrysipPos)를 대표자로 한다. 철학을 논리학, 자연학,윤리학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 그 중에서 윤리학에 중점을 두었다. 또 논리학의 역사에서는 명제 논리를 성립시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한다. 자연학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의 설을 계승하여 존재는 모두 영원히 생동하는 화기로 이루어 졌고 이것이 법칙(Logos)에 따라 생성 변화하면서 만물의 세계가 성립한다고 하는 유물론 적이면서 변증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철학대사전, ( 서울:한국이데아,1992),P.601
.
이 Logos는 우주와 인간을 함께 지배하는 보편적인 `세계이성'으로 해설된다. 그리고 이러한 견지에서 윤리학이 말해졌다. 인간의 본성(자연도 세계이성의 일부를 나누어 가진 것이므로 인간의 이성에 기초하여 사는 것 즉 그리스도인도, 이국인도, 노예의 주인도, 노예도 전체의 인간의 어떠한 차별도 없이 비 이성적인 욕망을 제거하고 인간 본성인 이성에 의해 평정,부동(平靜,不動)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유덕한 생활방식'이라 가르쳤다. 스토아 학파는 금욕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동시에 세계주의적 이기도한 사상인데 그것은 당시의 사회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세계이성의 지배라는 것으로부터 인간의 숙명이라는 견해도 신의 섭리에 대한 종교적 헌신의 사상도 생길 소지가 있다.
* 중기 스토아 학파
B.C 2세기의 로드스의 파나이티오스(Panaitios)와 포세이도니오스(Poseidonios)를 대표자로 하고 운명 그리고 사회적 억압에의 수동적인 인종이라는 지배계급의 뜻에 부합되는 사상이 만들어 졌다. 동시에 그 자연 법적 사상은 로마 법학의 철학적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로마에서는 철학이 정도가 높은 교양에는 필요부가결한 것으로 되었다. 스토아학파와 더불어 철학이 비로소 로마에 정착을 하게 된 것이다.
* 후기 스토아 학파
A.D 1세기에 제정로마에 이르고 이 제국의 세계 국가론의 기초가 되고 또 쇠퇴하고 있는 노예제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귀족들에게 자연과의 명상적 합일 내면적 자유에로의 침잠이라는 도피적인 정신적 위안을 주는 관념론으로 변질하고 기독교를 로마제국내에 보급하는 길을 닦았다. 그 대표자에는 세네카(L.A.Seneca), 에피크터트스(Epiktetos),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us)등이 있다 철학대사전, ( 서울:한국이데아,1992),P.601
.

b 에피크로스 학파
에피크로스 학파는 사상가들은 스토아 학파의 숙적(宿敵)들이었다. 이 두 진영간의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학파의 창시자는 사모스의 에피크로스(Epikuros B.C 341-270)이다. 그는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철학자이며 유물론자이다. 이 학파는 에피크로스가 기원전 306년 아테네의 자기 정원에서 시작했으며 학교를 세우고 이것을 정원학교라 불렀다. 그의 스승은 나우시파네스 였으며 그는 데모크리스토프학파의 인물이었다. 에피크로스 학파의 시조 헬레니즘 시대란 외세의 침입을 받아 그 지배하에 있던 시대로 그로 인하여 그리스 본래의 문화에 외국의 문화가 혼합되었으며 이 상태는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그리스의 고전적인 철학도 그 모습이 퇴색되어 주로 개인적인 인생문제가 주된 관심이었다. 그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계승하여 공허가운데서 운동하는 원자로 부터 만물이 생긴다고 하였지만 원자는 '직선운동에서 직선운동에서 빗나간' 자의성을 갖는다고 보고 데모크리토스의 기계적 결정론에 새로운 견해를 가했다 철학대사전, ( 서울:한국이데아,1992),P.678
. 이 학파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말해둬야 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거의 같은 시대의 사람인 람프사코스의 메트로도로스는 쾌락설을 한층 더 심화 시켰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속하는 아폴로도로스는 책을 많이 쓴 저술가이고 '정원의 창주'라는 별명을 얻었다. 시돈의 제논과 파이드로스는 키케로가 그들의 강의를 듣고 존경한 사람들이다. 시론은 베르길리우스의 스승이었으며, 마지막으로 가다라의 필로데모스를 들 수 있는데, 그의 저서들의 대부분은 '헤르쿨라네움 문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에피쿠로스주의에 관한 풍부한 사료(史料)로 되는 것은, 루크레씨우스 카루스( B.C 96-55)이다. 그의 교훈시 '자연에 관해서'는 에피크로스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혁신한 것을 글자 그대로 서술하려고 한다 요한네스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서울:이문출판사,1983),P.332
.
에피크로스학파는 당시의 다른 학파와 마찬가지로 수신처세(修身處世)의 윤리학(倫理學)을 주로 논(論)하였으며 특히 쾌락(快樂)을 중시하였다. 에피크로스는 쾌락을 선(善)으로 고통(苦痛)을 악으로 보았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아무런 쾌락이나 취하여 도리어 그 부작용으로 일어나는 고통에 빠지지 않고 쾌락과 고통을 비교하여 선택함으로 영속적인 쾌락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쾌락은 일시적 환락(歡樂)에 취함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욕망을 제어 함으로서 생기는 불만이 없는 생활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대섭,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서울:성광문화사,1986),PP.. 28-29
.

c 회의학파
당시의 여러 학파들이 각각 자신의 주장이 진리(眞理)라고 주장하는데다 정치적 도덕적 생활까지 혼란해지자 모든 기성 진리에 대한 회의가 다시 나타나게되었다 이 대섭,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서울:성광문화사,1986),P.30
. 회의학파(懷疑學派)의 창시자는 퓨론(Purrhon, 360-270 B.C)인데 침묵을 회의론자 다운 태도라 여겼기 때문에 아무런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사상은 티몬(Timon)과 같은 제자들의 저술에 의하여 또는 반대자들의 언급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퓨론에 있어서는 회의가 아카데미 학파에 있어서보다 약간 더 철저하다.그의 주장이 낳은 결과는 역시 판단중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퓨론에게 있어서도 회의는 긍정적인 뜻을 갖게 되는데 리런 회의는 윤리적인 회의로 된다. 그리고 이 윤리적인 회의는 <나>를 환경의 요구로 부터 해방시켜주며 따라서 <나>가 완전한 <나>로 되어, 한결같이 <나>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요하네스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강 성위,(서울:이문출판사,1983),P.350
.이러한 판단중지에서 영혼의 안정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체의 판단을 중지해 버리면 모든 사물에 대하여 무관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토아 학파에서 말하는 부동심(不動心), 에피크로스학파에서 말하는 마음의 안정(Ataraxie)을 얻을 수 있다.
아르케실라오스(Arkesilaos, 315-241 B.C)는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는 회의론자의 표어까지도 의심할 만큼 극단적인 회의가 였다. 카르네아데스(Karneades, 214-129 B.C)는 신(神)이나 진리(眞理)에 대하여 확정적인 이론을 내세워 논쟁을 일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실재로 생존하고 행동하기 위하여 “아마 그럴 것이다”하는 정도의 개연적 판단(蓋然的 判斷)은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 대섭,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서울:성광문화사,1986),P.32
.


2. 종 교
헬레니즘 시대에도 올림푸스의 신(神)들을 숭배하는 이들이 있었다. 대체로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와서 그리스의 다신교는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로 미약해 졌고 밀의 종교(密儀宗敎)가 활기를 띄게 되었는데 이들은 구속(球贖)과 영생을 약속하였다.

a 밀의 종교
비밀의식에 참여함으로 개인의 심령이 구제 된다고 하는 소위 밀의 종교(密議宗敎, Mystery Religion)가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교리나 의식이 고대 신화(神話)에 기초한 밀의 종교(密議宗敎)는 그들의 입회 의식에서 개종자에게 정죄와 정결의 관념을 일깨워 주었다. 밀의 종교(密議宗敎)는 정교한 의식의 순서와 윤리의 규범을 만들었고 신실한 신도들에게는 영광스러운 불멸의 보상을 약속했다. 데메테르(Demeter)신(神), 디오니수스(Dionisus)신(神)등의 그리스 적인 밀의 종교가 아직도 일부에서 신봉되오고 있었으나 동방에서 들어온 밀의 종교(密議宗敎)가 점점 그 세력을 확장 하였다.




C 헬레니즘 세계하의 유대

1. 프톨레미(Ptolemy)왕조 시대의 유대
알렉산더 대왕의 별세(別世)한 후 그의 장군들에 의하여 광대한 영토는 분할 통치 되었다. 주전 323-301년 사이에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커스왕조 두 나라는 팔레스틴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계속하여 이 지역은 다섯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 그러나 B.C 301년의 입수스(Ipsus)전투 이후 B.C 198년까지 팔레스틴 지역은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하에 있었다.
프톨레미 치세중 유대인들은 대채로 그들의 종교화 문화적 전통을 지키며 평화롭게 사는 것이 허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에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에게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팔레스틴 지역 유대인의 통치는 유대의 제사장에게 위임되었다. 프톨레미왕조는 예루살렘에 수비대를 주둔시켰으나 총독을 두지는 않았다. 내적(內的)인 행정은 유대인의 자치에 맡겨져서 대제사장의 지도하에 제사장과 평신도로 구성된 장로회의(Council of Elders)가 주장하였다.
프톨레미왕조 지배기간 중에 일어난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은 예루살렘 제사 공동체와 사마리아 공동체가 완전히 분리된 것이었다. 사마리아 주민들은 혈통적인 혼합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불결하다고 간주되어 성전의 재건이나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북부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인 베델, 길갈, 실로, 세겜 등지를 방문하였다. 토착 사마리아 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세겜의 옛 성소 가까이에 있는 그리심산 위에 새로운 제사의 터를 세웠다 이 대섭,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서울:성광문화사,1986),P.36
.
유대지역 즉 예루살렘시나 유대인이 거주하는 인접 지역은 그리스화한 헬레니즘 도시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이들 도시들은 상당수의 그리스인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거주 했는데 점점 그리스화 되었다. 이러한 연안도시는 아플로니아(Apollonia),욥바(Joppa), 아조터스(Azotus),가자(Gaza)등이 있으며 사마리아 지역도 사마리아시(市)와 스키도 폴리스(Scythopolis)에 상당수의 그리스인이 살고 있었다. 에집트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 하였다. 에집트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생활을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자의(自意)로 알렉산드리아, 아리스노우, 헤르모폴리스, 에드프 등지의 나머지 백성과 떨어진 특별한 구역에 살았다. 그러나 에집트 정부에서 그들을 강제로 따로 격리시키는 일은 없었다. 시민의 권리면에서도 유대인들은 개인적으로 마케도니아인들과 그리스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2. 셀류커스(Seleucus)왕조시대의 유대
에굽의 플레토미가(家)와 시리아의 셀류커가(家)의 수많은 전투가 있은 후 유대 지역은 드디어 플레토미가의 통치를 떠나 셀류커스 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즉 B.C 198년 셀류커스가의 안티오쿠스3세가 에집트인들과 싸워 승리하고 팔레스틴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안티오쿠스3세는 페르시아 제국때에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던 특권들을 다시 그들에게 부여하고 성전 제사에 필요한 경비를 부담하며 성전수리에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의 정책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B.C 190년 소아시아의 미그네시아 전투에서 안티오쿠스3세가 로마군에게 패함으로써 셀류커스왕조의 쇠퇴가 시작되었고 B.C 188년 그가 죽자 유대 역사상 문제가 많은 시기가 도래 하였다.
안티오쿠스3세의 사후(死後) 왕위 쟁탈전 끝에 안티오쿠스4세가 왕좌를 차지 하였다.그는 헬레니즘 찬양자로서 자기가 지배하는 지역을 헬레니즘화 하려고 결심 하였다. 이 시기에 셀류커스왕조는 외부로부터의 심한 위협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이유에서 셀류커스왕조는 재정적 필요를 더욱 절실히 느낀 안티오쿠스4세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직을 돈을 많이 내는 사람에게 팔았다. 그 결과 대제사장들이 자주 갈리게 되었다.
안티오쿠스4세의 통치 초기의 대제사장은 오니아스3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헬레니즘에 물든 유대인들은 오니아스를 배척하고 그의 동생 야손을 지지 하였다. 야손은 왕에게 더 많은 조공을 약속함으로서 대제사장으로 지명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대제사장직은 행정직인 동시에 유대의 최고의 성직(聖職)이었는데, 그와 같은 최고의 성직의 매매(賣買)는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 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야손은 헬라 파 유대인들의 협조로 예루살렘에 체육관을 세우고 유대 소년을 헬라 관습에 따라 나체로 운동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풍조에 대하여 하시딤(Hasidim, 경건한자들)을 중심으로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 대섭,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서울:성광문화사,1986),P.40
. 야손의 가까운 조력자인 메네라우스는 제사장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안티오쿠스에게 야손보다 더 많은 조공을 바침으로 야손대신 대제사장에 임명되었다. 하시딤은 자격 없는 메네라우스가 금전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된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안티오쿠스는 에집트를 복속 시킬 수 있었으나 로마의 간섭으로 실패하자 전략상 유대 지역을 장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아폴로니우스 장군을 보내어 예루살렘성을 점령하고 대적자들을 학살 하였으며 요세 아크라를 건설하고 군부대를 주둔 시켰다(B.C 167).할레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는 것 성경소유 등이 금지되었다. 메네라우스는 계속 대제사장으로 있었으나 이제 그는 야웨 하나님께 제사 드렸던 곳에서 쥬티퍼를 섬기게 되었다.




D 마카비 전쟁과 유대통치
1. 마카비 독립전쟁
아티오쿠스4세의 유대교 박해는 많은 순교자를 냈었다. 그는 특히 안식일에 유대인들을 학살함으로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아무 저항도 없이 순교해야 했다.
이러한 가운데도 경건한 하시딤외에 율법에 충실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루살렘 북서쪽 마데인(Modein) 마을의 제사장 마타디아는 왕의 관리로부터 이방의 희생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자 거부 하였다. 그러자 다른 유대인들이 앞으로 나와 희생제사를 드렸는데 그는 이것을보고 분노하여 왕의 관리를 죽이고 제사 드리는 자도 죽였다.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들은 마타디아 그의 다섯 아들들과 함께 뭉쳤고 하시딤도 그들에게 동조하였다.
마타디아가 죽자 (B.C 166) 마카비라 불리우는 그의 세째아들 유다가 저항 운동을 지휘하게 되었다. 매우 유능하고 과감한 유다는 저항운동을 전면적인 독립전쟁으로 바꾸어 놓았고 또 성공적으로 싸웠다. 이 유대인의 투쟁은 그의 별명에 따라 마카비 전쟁이라고 불리운다.
셀류커스왕조에서는 그들의 반란초기에 과소평가하여 하급 장군들에게 분견대를 보내었으나 마카비는 유격전으로 계속적인 승리를 하게 되었고 이에 심각성을 인식 했을 때에도 안티오쿠스 당시 파르디아의 반란을 진압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충분한 군대를 유대에 보낼 수 없었다. 이후 상당수의 시리아 군대가 유대에 파견되었으나 엠마오에서 유대의 마카비에게 대패하게 되었고 마카비는 승전여세를 몰아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였고 대제사장인 메네라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도주하였다. B.C 164년 12월 유다 마카비는 그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쥬티퍼의 제단을 허물고 새로운 제단을 쌓았다. 마카비는 시리아의 요세인 아크라를 공격하자 안오쿠스4세의 사망 후 실질적인 권한을 쥐게 된 리시아스가 직접 많은 군대를 끌고 진격해 왔다. 마카비는 그들에게 패하였고 그들은 권력투쟁의 문제로 귀국하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화해를 제의해 왔다. 유다 마카비는 종교적 자유와 더불어 정치적 자유의 획득도 목표로 하였으나 하시딤의 목적은 종교적 자유의 획득에 있었다. 결국 종교적 자유를 주장하던 하시딤의 의견이 관철되었다. 그러나 유다 마카비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의 추종자들과 계속적인 정치적 자유를 위한 전쟁을 해 나갔다. 결국 유다 마카비는 예루살렘을 다시 포위 하였다가 B.C 막강한 시리아 군대에 의해 B.C160년 사망하였다.



2. 하스몬왕조
유다 마카비의 전사후에 그의 동생 요나단이 저항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시리아군은 여러 차례 요나단의 유대 저항세력과 싸웠으나 그들을 완전히 진압할 수 없었다. B.C 153년 알렉산더 발라스가 안티오쿠스4세의 아들이라 주장하며 데메트리우스1세를 대적하였다. 권력투쟁에서 양자는 다같이 유대인의 도움을 청했는데 요나단은 발라스를 지지하였다. 여기에 대한 답례로 발라스는 요나단을 대제사장 및 유대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의 왕권과 제사장권한은 한사람에게 통합되었고 마치 옛날의 신정정치가 부활되는 듯 하였다. 요나단이 시리아 장군에 의해 살해된후 그의 현제인 시몬이 그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다. 당시 시리아는 또다시 내분 상태에 빠졌다. 이네 시몬은 데메트리우스를 지지함으로써 데메트리우스는 유대인들에게서 받던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이후 유대 국민들과 사재는 진정한 예언자가 나타날 때까지 시몬을 영구적인 영도자와 대제사장으로 삼을 것을 결정 하였다.이러한 결의에 의해 하스몬왕조가 합법화 되었다.
그러나 시몬은 B.C 134년 프톨레메호에 의해 살해되었고 두 아들마저 죽을뻔 했으나 요한만이 살아남아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정식으로 요한힐카누스1세라는 칭호로 시몬의 뒤를 이었다. 몇 개월후 프톨레미호의 요청에 의해 안티오쿠스7세는 그의 지배권을 재확인 하기위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였고 요한힐카누스는 항복하였다. 안티오쿠스는 유대의 자치권을 보장 했지만 예루살렘의 요세를 헐어버리고 시리아에 조공을 받치게 하였다.
마카비 일가는 마카비시대 초기에 하시딤과의 동맹을 맺었었다. 그러나 요나단의 통치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두개당파와 바리세당 그리고 에세네파등 세 당파가 있어 이들과 관계를 가졌다. 처음에 힐카누스는 바리세파와 좋은 관계를 가졌으나 그들 중에서 힐카누스에게 대제사장직을 내놓으라는 사람이 나타나자 그들과의 관계가 나빠지고 사두개파와 손을 잡게 되었다. B.C 104년 힐카누스가 죽자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가 권좌에 올라 일년간 다스렸다. 힐카누스는 자신의 아내가 여왕이 되는 것을 원하였으나 아리스토불루스가 권력을 빼앗았다.그는 어머니를 감옥에 가두어 굶겨 죽였고 자신의 동생들은 투옥시키고 한 동생은 암살했다. B.C 103년 아리스토불루스가 죽자 그의 처가 세 동생을 석방 시켰다. 그녀는 그중 큰 형제인 알렉산더얀네우스를 대제사장 자리에 앉히고 그와 결혼 하였다. 얀네우스는 하스몬가에서 최초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얀네우스는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으며 특히 바리세파와 분쟁하였다. 백성들은 바리세파의 편에 서 있었으며 시리아의 원조를 받아 얀네우스와 싸웠기 때문에 얀네우스는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그는 바리세인들에게 잔인한 복수를 하여 800명의 바리세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고 그들의 처자를 살해 하였다. 얀네우스의 사후 그의처 알렉산드라는 권자를 이어받고 대제사장직을 그의 맏아들 힐카누스2세에게 맡겼다. 알렉산드라는 죽은 남편의 충고에 따라 바리세파와 화해하였다. 알렉산드라가 죽은 다음(B.C 67년) 그녀의 아들인 힐카누스와 아리스도불루스와 권력문제로 싸우게 되었고 이 싸움을 이용하여 로마는 유대를 쉽게 정복하게 되었다(B.C 63년).




結 論

지금까지 헬라의 성립에서 시작하여 하스몬왕조의 몰락까지의 유대역사와 헬레니즘 문화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헬레니즘의 생성은 실로 유럽세계와 전세계에 주요한 사건이 된 것을 확인할 수 가있었다. 특히 헬레니즘세계는 당시유럽 지역과 지중해 지역의 문화를 동방의 문화와 접목시킴으로써 위대한 헬레니즘 문화를 만들어 냈으며 이 문화는 고대 유럽을 형성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와 역사는 초기 기독교와 유대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헬레니즘의 동서 융합정책으로 유대인들은 헬라군이되어 다른 지역에 이주하게 되었다. 이에 유대인들은 제사 드리기 위하여 서로 특별한 곳에 모여 살게 되었으며 프톨레미왕조하의 알렉산드리아 같은 곳에서는 히브리 성경을 당시의 세계 공통어인 헬라어로 번역하기까지 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70인경이다. 또한 언어적 통일로 로마시대에도 헬라어를 사용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상이 쉽게 전파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 물론 로마시대의 잘 닦여진 도로의 덕분도 있었지만 언어의 통일이야 말로 기독교 전파의 견인차적 역할을 하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유대인들은 프톨레미왕조의 통치 때 유대인과 사마리아의 분리가 있었고 셀류커스왕조의 시대에는 대제사장직이 매매되기도 하였으며 많은 박해가 있었다 특히 안티오쿠스4세의 박해는 가장 심한 박해였다. 이에 마카비전쟁이 시작되었고 유대는 하스몬왕조를 성립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역사가운데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하려고 애를 섰으며 한 때는 쥬티퍼가 섬겨지던 그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려고 힘을 썼다. 이러한 가운대 메시아 대망(大望)사상은 싹이 텄으며 오실 그리스도를 준비하였다. 물론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그리스도 대망사상이 없었다면 예수의 부활 후 그리스도의 전파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같이 유대는 바벨론으로부터 앗수르 헬라제국 프톨레미왕조 셀류커스왕조 헤롯가의 억압속에서 메시아 대망사상을 키워 왔으며 예수그리스도이후 로마의 박해를 받으며 기독교는 성장하였다.
이러한 타민족의 지배하 에서도 유대민족은 하나님과의 율법을 지키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며 마카비등 경건주의 자들에 의하여 유대가 하나님은 섬기기 위한 투쟁을 보았을 때 현재 우리의 현실속에 세상의 많은 문화와 세상풍조가 믿는 자들을 구속 시킬 때 우리의 모습은 경건한 자들로서 마카비와 같은 용기를 내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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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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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모함 2010. 9. 2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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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역사

지그프리트 헤르만

 

II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

 

1. 사울 왕국

 

개별적인 이스라엘 지파들이 이른바 사사들의 시대에 긴박한 위협의 압박 아래서 서로 단결하였다. 카리스마적인 지휘자들이 다스렸던 이스라엘 영토를 침해하는 이웃 적들의 공격들은 본질적으로 시대적으로나 지역적인 경계지었다.점차 제도적으로 조직정돈된

세력이 서쪽 해안지대에서부터 밀어들어와 전체 영토를 확장하려는 물결 속에서 이스라엘인들의 지역을 수축시켰다.따라서 절실하게 호소되었던것은 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의

장기 지도체제, 즉 종신집권 사사통치였다.이런 고찰들을 살펴볼때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처음에는 여전히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우선적으로 지파들을 동원하는 지도자였고 한 군대의 왕이였다. 이스라엘은 하나의 지파공동체였다.

삼상 11장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왕위에 오르는 길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사무엘의 중재자적인 기능만이 연결을 제공해 주는것으로 보인다. 중요한것은 사무엘이 ‘왕을 세우는 자로서’ 더분명하게 알려진 것이리라.

본질적인 면에서 왕국 형성은 첫째로 왕의 인물을 선택하는 이는 야웨이시다는 것과 백성들의 구두 동의 표결에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독자적인 힘의 완비로 왕이 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런 한계에서 설정된 지배자의 정신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있던 것이 아니라, 왕은 엄밀하게 야웨와 백성 중간에 서 있었으며 또 양쪽의 동등권을 가진 대리인들의 이념.정신. 가운데 존제한다.

사울은 왕위에 등극하는 순간 일련의 산적된 과업에 직면했던 사실이 틀림없다. 우선적으로 시급했던 일들은 외교정치의 일들이었다. 우선 암몬인들의 위협이 처리되었다. 사울 당시 진저리나게 오래 끄는 전투는 블레셋인들과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다윗이라는 젊은 소년의 등장하여 블레셋의 골리앗을 죽임으로 승리를 얻게 된다. 골리앗과의 싸움은 일련의 국지적인 관심에 해당된다. 그것은 사울 통치 아래 있는 이스라엘들을 블레셋인들에게 보내는 전렬(戰列)들이다. 그것은 서로 합심해서 얻었던 승리다.

이후 이스라엘의 숙적 아멜렉인들과의 교전은 삼상 15장에서 사울가문의 왕국 발전의 전기가 된다. 야웨몫을 생각하지 않고 이스라엘인들의 전리품을 횡령한 것을 사울이 요인했다. 사무엘은 사울의 왕국이 박탈당할 것이라고 일찍부터 언명했다. 그후 사울왕은 우울증에 빠지고 다윗을 병적으로 질투하며 괴롭힌다. 결국 사울은 블레셋인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죽는다.

사울은 모든 기도에서 다만 지파들의 군대에게만 원조를 받았다. 사울의 왕국이 초창기에 아무런 관리의 구성이 없이 불정확한 체제로 수축되었으며 단순히 지파들의 가결로 지지 받았고 전적으로 그들에게 의존되었지, 완전한 국가방어를 위한 기본적인 저력은 발전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것은 블레셋 힘의 수준을 따르지 못해 그의 제물이 되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투에서 사울은 패하고 그곳에서 자결한다. 새로운 발전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좌우 된다. 다윗은 유다왕이 된다. 그것이 새로운 가능성들을 열어 놓는다.

 

2. 다윗 제국

블레셋이 갈릴리 산맥의 도시들과 요르단 건너편을 장액했다고는 하지만 우선권을 요구할정도는 못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에브라임 산맥은 점령되지 못했으나, 동부 요르단의 남쪽 경우는 확실히 점령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사울의 사령관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중 한사람을 발견한다. 그아들은 분명히 블레셋을 공략하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고로 그는 패배의 파국을 모면하고 살아 남을수 있었다. 삼하2,9에따르면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에스바알이라 하고 길으앗과 므깃도 평지의 소도시에 군림하는 왕으로 삼았다. 에스바알도 그가 무엇인가를 성취하려고 했었다면 성취할 수도 있었을것이다. 서부 요르단 땅, 기드온 가까이 베냐민 지역에서 아브넬 휘하의 에스바알의 부대와 요압이 이끄는 다윗의 용사들 사이에 전초전이 벌어진다. 아브낼과 에스바알의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아브넬은 다윗과 협상을 취한다. 이때에 다윗은 이미 유다의 왕이었고 헤브론에 거하고 있었다. 아브넬은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표명한다. 그는 옛 사울의 국가인 이스라엘인들이 다윗과의 계약을 통해, 유다의 왕이 이스라엘도 통치하도록 움직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삼하 3,21절의 결정적인 귀절은 “그때 다윗은 아브넬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평안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브넬이 헤브론을 떠나기가 무섭게 요압이 전투를 마치고 돌아왔다. 요압에 의해 아브넬은 죽임을 당했다. 아브넬의 죽음은 에스바알과 그의 이스라엘에게 죽음을 갖다주어 맥이 풀리게 하였다.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에스바알이 들었을때 그의 손에 맥이 풀리고 전체 이스라엘이 경악했다”. 에스바알은 자기에게 중요한 인물을 잃었다. 이스라엘은 위기에 직면했고 그의 마지막 희망을 빼앗겼다. 사건들은 전도되었다. 사울 주위에 있던 용병들이 반역을 하였다. 이들은 에스바알을 살해한다.

다윗이 일찍부터 적절한 기회를 보아 사울의유업을 차지하려고 의도를 굳혔는지는 문제로 남아있다. 고대 사울의 통치 관할지역에 있던 이스라엘인들은 계속해서 삽시간에 패배를 당했다. 두 왕들이 죽고 그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이를 잃은 고통은 극도에 달했다. 성문 앞에는 계속해서 승리의 개가를 울리는 블레셋인들이 몰려 들고 있었다. 준비되었던 사건의 과정이 이제 성취되어 나갔다. 모든 지파들의 만장 일치에 따른 것이든 아니든 에브라임 지파의 북쪽은 자발적으로 그 당시 땅에서 가장 강한자였던 다윗의 보호 아래 종속하였다. 에브라임 지파 동맹과 유다 남부 지역과 통합의 순간은 그의 의미와 문제성이 언제나 과소평가 되어 왔다. 왜냐하면 유다가 언제나 이스라엘에 속했음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기서 전적으로 새로운 발전의 단계가 나타났다. 이스라엘이 ‘백성’이 되었다는 것, 다윗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군합국, 인격의 연합속에 통합시킨는 순간까지 걸었던 과정은 이제 그의 건국초기, 즉 사울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추구할 수 있다.

다윗은 음악 연주자로 있다가 사울의 경호원으로 발탁되어 승진한다. 다윗은 젊은 용사로서 전투부대 지휘관으오서 첫번 전과를 올린다. 사울은 천명이요, 그러나 다윗은 만명을 죽였다. 사울은 다윗의 우월성과 통솔력을 두려워 하게 되었다. 다윗이 거기서부터 자신을 위해서 전적으로 새로운 실존을 구축할 수 있었던것은, 다시 말해서 에브라임과 베냐민에서 가능성이 희박했던 그런 실존의 형성은 유다 남부의 독립성을 해롭게 입증한다.

유다 지역에서 다윗의 작전은 사울의 박해와 전승을 결속시킨다. 사울은 증오, 질투와 불신으로 가득찼다. 그에게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우는 동안 그에게 이스라엘을 대항해서 싸워야만 하는 것은 면제되었다. 길보아 산지 꼭대기에서 사울의 죽음은 새로운 정세를 만들었다. 다윗은 유다인들의 뜻대로 행동한다. 그는 실력자요, 그 땅의 무시할 수 없는 힘이다. 이러한 총체적인 회전에 대한 불충분한 전달사항에 첨부된 4절의 내용은 명백하게 효력을 나타낸다. “그때 유다의 사람들이 와서 헤브론에서 다윗을 유다 왕가의 왕이 되게 기름을 부었다” 다윗은 최종적으로 그것을 의도했던가? 그것은 부인되지 않는다. 다윗이 아말렉인들로부터 탈취한 물건을 나눌만큼 그는 의식적으로 친구들을 만들었다: 그들은 다윗이 블레셋인의 신뢰를 유지하고 블레셋인의 공포에 인격적인 보증을 나타낼것을 바라고 있었다. 내정과 외교 정치적으로 유다인들의 조치는 이해할 만하고 숙고되었으며, 시기 적절했다.

다윗이 계속 정치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데는 신뢰할 만한 몇가지 지시들이 있다. 그는 헤브론에서 기름 부음을 받지 않았다. 그는 예의 사절단과 함께 길르앗에 야베스로 사람들을 보냈다. 그 사절을 통해서 다윗은 야베스인들의 공적에 감사를 표한다. 삼하 3장에서 아브넬이 에스바알에게서 떨어지고 다윗과 첫번 접촉을 맺으려고 했을때 다윗은 갑자기 기대하지 못한 요구를 행한다. 아브넬은 사울의 딸 미갈을 데려오지 않고는 다윗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윗은 같은 요구를 에스바알에게도 직접 전한다.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중개의 시도와 마지막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왕위를 넘기는 결과와 함께 다윗 역사의 계속적인 설명이 중단되었던 점에 이른다. 다윗에게 넘긴 북쪽 지파들의 왕권은 한 인격통합 , 군합국의 설정을 뜻한다. 결코 철두철미 통일된 국가제도의 설립은 이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그들의 독자성을 유지한다. 예루살렘은 그들의 독자성을 지금까지 주장할 수 있으며,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특별한 계획들을 구상했다.

다윗이 전체로 칠년 반 동안 왕노릇했던 헤브론은 대 유다를 위해서 혁혁한 중심점을 이루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대신 아마도 왕도를 위해 세겜울 택하는 것이 자명했으리라. 세겜은 중부 팔레스틴 에브라임의 패권을 장악한 위치의 고대적인 중심지였다. 그러나 세겜은 유다에게는 너무 북쪽으로 나아가 있었다. 다윗은 그 도시를 유다인이나, 이스라엘인의 군대의 힘으로 정복하지 않았다. 단순히 그의 용병들을 동원하였다. 가나안인들 도시에서 곧잘 일어났던 경우와 같이 예루살렘 점령의 전열에 의해서 그곳에 거처하는 도시 왕이 제거된 사실이 전해지지는 않고 있다. 세겜의 경우에서처럼 그 도시의 귀족적인 법률제도는 배제되지 않는다. ‘다윗의 도시’ 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넘겨받은 이름을 그대로 두었다는 것은 더욱 중요한 입증이다. 그러나 한가지 점에서 다윗이 필요하다고 본 것은 예루살렘에다 이스라엘 지파들 눈에 특수위치, 특별한 품위와 비중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중에 군합국 ,인격연합이 분열된 후에 이스라엘 북왕국에 소속된 이들이 한번도 법궤의 요청을 명문화해서 주장하지 않고, 그의 자리를 예루살렘에다 궁극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과 유다와 이스라엘 분잔국들의 경계점에 왕의 거처를 위한 도시가 발전되었고, 다윗 시대후에도 계속해서 국가안에 사건들과 도시를 위해서 특별히 가장 중대성을 띄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다윗 국가 영토, 지역의 재구성을 인정하는 본래 기록 문서는 모든 무기를 다룰 수 있는 남자들의 수효와 관계를 맺은 국가 경계 기술이다. 민족적인 국가에서 영토적인 국가로 다소간 확고한 경계를 가진 ‘나라’로 국토, 영토(한 국가 통치자의)로 더 나아가서 한 지파들의 통일만이 아니라, 한 왕의 통치하에서 나타난 영토적인 국가의 단계가 사울에게서는 부정 되었으나 다윗에게서는 성취되었다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이제부터 블레셋 해안가 평지들은 정치적인 의지 형성의 독자적인 중심지들로서 분리되었다. 더욱이 앗수르 시대에는 재차 블레셋 도시 국가 군주들이 독립을 쟁취하면서 등장했다. 다윗 국가 동맹의 상은 다양하다. 그러나 이제 바로 윤곽적인 영토의 국가로만 제한되지 않았다. 다윗은 그의 경계를 훨씬 넘어갔으며, 그는 그것을 위해서 정식으로 속박당했다. 동부와 남동부의 이웃 나라들이 다윗에게 도발하여 왔다. 암몬인들과의 큰 대결은 잘 알려진 ‘암몬인-전쟁보고’ 삼하10,1-11+12,26-31절이다. 그안에 밧세바와의 사건과 나단과 다윗의 대화(네가 그 남자이다.)가 있으며, 동시에 장차 왕위 계승자의 선출에 대한 고차적인 희극적인 준비가 설명된다.

다윗의 대국 형성은 그의 개인적인 실적이다. 그런 형성은 남쪽의 대국 에집트가 국가적으로 안고 있던 위기때문에 유리해졌다. 즉 21왕조, 라메시스가 멸망당한 후에 북부와 남부의 세력의 구성이 균열 되었다. 다윗을 위협하던 위난들, 국명을 열거하자면 블레셋인, 암몬인, 모압인, 에돔인과 시리아 지역 아람인들 이었는데, 다윗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외교적으로 민활한 정책을 취하면서 그들을 추방했다. 다윗은 그의 외교정책을 위해서 충분한 내정의 배경, 그 자신이 점차로 만들어 놓았던 배후세력을 끌어들였기에 그의 대국을 꼴찌로 세우거나 차지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개인의 궁전을 세우고 독립적인 공무원 국가로 발전시킨다. 다윗은 행정부 책임을 일련의 전문직업 공무원들에게 담당시키고 나머지 고급 국가 공무원들 가운데 소페르(sõfẽr)(דעפ),본래는 서기관 마즈킬(דיכזט)의 직위가 눈에뜬다. 최상으로 말해서 그것은 ‘전령관’의 재연이다. 이런 모든 관직들은 예루살렘 왕의 측근에 있던 국가 공직자들이다. 그들은 국가 행정권 아래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왕은 한 특수한 위치를 굳혔다. 이러한 숙고들은 유다 왕의 의식완성에 관한 문제로서 중요하다. 왕에 의해서 의식적으로 이방의 모형들을 전수했고 동화시켰다. 그와 동시에 ‘암픽티오니’ 지파동맹의 협력 원칙들이 지파들의 질서있게 형성되었던 시대에서 부터 협력하고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이런 이유에서 부정되어서는 안된다.

구약 전승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한 그들의 국가적인 공동생활의 이와같은 새로운 종류의 형태에 직면해서 다윗의 예정된 후계자 문제가 특별한 문제였다는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즉 북쪽 이스라엘 국가의 불안정한 동인으로 인식되었다. 압살롬과 세바에 관한 이러한 기고들이 들어 있는 다윗의 왕위 계승의 역사는 내부에서 나타난, 더군다나 왕의 아들들의 즉위에서 생긴 위기로 말미암아 전체 국가 터전이 적지 않게 위기를 조성케 했음은 분명하다. 다윗의 계승의 문제는 점차적으로 치열하게 대두되었다. 우리는 다윗의 말년에 예루살램 궁전에서 벌어진 제 상황 관계들을 본다. 파당들이 형성되었다. 사태는 극적으로 절박하게 진전된다. 아도니야는 그의 파당들과 예루살렘에 아주 가까운 샘에서 희생제사를 올린다. 이러한 왕위 등극사는 개별적으로 여러가지 많은 문제를 갖게 한다. 왕위 등극사는 속임수로 부동하고 있다. 다윗과 같이, 유다인의 관습에 따르면 솔로몬도 역시 지도자급의 한 작은 그룹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는다. 왕조의 원리는 솔로몬의 계승으로써 증명되었다. 그것은 정치적인 필요성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다윗은 40년간 통치한 후에 죽었다고 한다. 솔로몬도 사십년을 통치했었다고 한다. 다윗통치 시대에 관한 확실히 여러 의도적인 개별적인 보고들을 제쳐 놓는다면, 그래도 정치적인 전체적인 형세, 유다와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시간 그 정황은 다윗에게 의심 없었던 탄력성 있는 인격성이었다. 필요한 것과 가능한 것을 해결하는 데에는 외교적으로 독창적인 사상을 지닌 천재적인 인품이었다. 새로운 자의식을 창조하는데 기여했다. 그의 계획의 대담성과 결단력은 놀랄 정도였다. 그는 국가적인 정치인의 지혜에서 모든것을 통달하였다. 그는 유다 뿐만아니라 마지막에는 반항하는 이스라엘까지도 승복시켰다.

솔로몬은 다윗이 이룩했던 복잡한 국가 구조를 그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상속받았다. 솔로몬은 내부기강을 엄격하게 바로 잡았다. 그런 질서는 나중에 철저하게 나타나겠지만, 그런 의도와 목적과는 반대로 국가 내부에서의 이방적인 경향들을 재촉하였던 것이다.

 

3.솔로몬 치하의 다윗제국

솔로몬은 평화의 왕으로 여겨진다. 솔로몬의 치적은 종교,경제와 문화적인 영역에 있다. 그는 예루살렘에 성전만 건축하고 봉헌한 것 뿐만 아니다. 성전의 건축, 화려함, 생활양식은 국제적인 규모와 형태를 띄었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솔로몬은 그의 전임자 다윗처럼 그렇게 폭넓게 창조성을 발휘했던 인물은 아니다. 따라서 그는 한번도 방어전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격연합은 지속되었다. 특히 세바의 폭동 후에 이스라엘의 군대는 눈에 띄게 약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솔로몬이 자기에게 넘겨진 왕국을 굳게 다질 수 있었던가 하는 것은 그의 계속적인 유능한 외교관계에 기인했다. 왕은 여러가지 수단을 동원해서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잘 유지해 나갔다. 그런것 가운데 한가지 수단은 후궁들이었다.

솔로몬 시대에 있어서 블레셋을 공략하는 에집트 왕의 전쟁행위의 가담은 구약의 증거에 의하면 극도로 소외되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에집트는 솔로몬의 대국에게 아직은 문제 삼을 만한 위험물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솔로몬과 페키니아, 그리고 더우기 티루스의 왕과의 관계이다. 그와 더불어 공고한 유대관계, 계약관계가 성립되었다.

솔로몬은 그의 외교적인 접촉이외에도 경제교역 관계들을 확장해 나갔다. 우선적으로 오빌 오피르라는 땅으로 취항된 항해가 언급된다. 돈벌이가 되는 말, 전마와 전차를 수출하는 중간상인 노릇을 솔로몬은 장려했다. 전차는 에집트에서 들여왔으며, 말들은 킬리키엔에서 수입해왔다. 솔로몬은 그런 말들과 병거들을 ‘헷족 왕들과’ ‘아람 왕들’에게 팔아 넘겼다. 아마도 그런 왕들은 시리아에 있던 약소국가들의 왕들로 이해될 수 있겠다. 이렇게 점증된 관계에서 스바 여왕의 방문이 있을 수 있다. 아마도 남부 아라비아에서부터, 현재의 예멘 지역에서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했다는 사실에 관한 역사적인 신빙성은 나오지 않고 있다.

솔로몬은 다윗이 이룩한 대국의 기반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으나, 정확하게 말해서 많은것을 상실하게 했음에 틀림없다. 하다드라는 에돔의 왕자는 다윗 시대에 에집트로 도망했다가 다윗이 죽은 후에 에돔 일부의 통치자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솔로몬 행정의 외교정치의 결산은 그의 부정적인 내역을 가질 수 있다. 예루살램에서 일어난 정권교체는 외부에 가장 빠르게 영향을 끼쳤다. 솔로몬은 이전과 같이 공략의 위험에 대처해서, 특별히 국경 변방에서 나타나는 위기에 대처하여 국가를 방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음에 틀림없다. 전초지 요새의 조직적인 건설은 모든 이런 규정의 실제적인 수행에 이바지한다. 아마도 왕은 여름철 동안 놀고 있는 사람들을 이용했었을 것이다. 이미 다윗이 임명했던 노동장관의 이름은 솔로몬 치하에서도 아도니람으로 나온다. 이 사람이 확실히 동일한 사람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행정지역들은 왕궁의 생활을 부양해야만 했다. 실제로 솔로몬은 예루살렘 도시를 현저하게 증축하고 확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전을 왕실과 결속시키는데 이르렀다. 그것들은 고고학적인 잔재의 부족으로 극도로 문헌적인 전승에 근거해서 조사되고 설명되도록 시도되어야 하겠다. 성전건축은 왕의 일이었다. 그는 그의 계획과 수행을 결정했다. 예루살렘 성전 건축설립이 지방에 있던 성소들의 효력을 제한시키거나 전적으로 파기시켰던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 없다. 그 곳에서 생활은 습관화된 진로를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이미 여기서 알수 있다고 보는 것은, 구약의 종교의 발전은 예루살렘에 결속된 야웨 예배가 왕의 결단에 의해서 실행된 흔적은 역력했다. 예루살렘 전통의 보호는 그의 전통의 생존과 영향을 재가했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적인 감각의 성전의 도시 예루살렘과 더불어 점차로 왕국시대 과정에서 관철되었던 것의 특징적인 것은 ‘시온산’ 개념이 보여지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산 언덕을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왕실 규모와의 결속이요, 새로 획득한 그의 야웨의 거처됨을 공언한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을 하나의 국제도시로 만들었다. 거의가 다윗의 공무관리들이 솔로몬 치하에서도 계숭하고 있음을 보인다. 그러나 역시 행정에 몇 개의 확장이 나타났다. 이런 모든 관리들은 지파동맹 조직에서 나온것이 아니었다. 부분적으로 그의 모형 범례들은 외국의 궁전들의 관례들을 취한다. 따라서 다윗의 극가는 솔로몬의 수중에서 행정적 기술이 더욱 완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군사와의 접촉은, 유다인들에게는 촉구되지 않았다. 유다에게는 솔로몬의 통치시대는 정말로 만족한 시대라고 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이 얼마나 매우 자기 독자적인 길로 독주했으며, 왕은 그 당시로서는 얼마나 ‘국제적인’ 면모를 갖추었는가 하는 것은 무조건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었던 일반 정신문화 생활의 참여를 알게 했던 기록들에서 드러난다. 이스라엘인의 배타적인 감수성에 비해 세계적이고 외적인 화려함은 보이기 위해서 결국 솔로몬은 이웃나라에서 여자들을 데려다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그들의 신들을 위해 감람동산 안에 신전들을 건립케 하였다.

여기에 장차 예언자들의 진노의 근거가 놓여졌다. 왕국시대가 지나는 동안 한 국가는 사라졌다.

솔로몬의 평화시기는 이와같이 기술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국제 세계에 연대했다.솔로몬의 ‘계몽사상’ 그리고 지혜는 궁전에서 효력을 나타냈다. 그 정신은 궁중의 역사기록의 형태에서 구약에 끼여들어 왔으며 왕의 명성은 증대되었다. 그때 솔로몬은 가능한한 부역, 강제노동을 북부 이스라엘인들에게 전가해서 억눌렀다. 소페르의 관직은 헛되이 이중적인 겸직을 하지 않았다. 국가의 문서를 작성했으며, 솔로몬의 요건들과 문제들을 실록으로 다루었다. 그것은 국가이념의 양상에서 역시 지파들의 자라나는 자의식의 양상에서도 초기 시대의 전승들을 수집하고, 그들의 본질적인 부분들을 고정하려는 양상에서 자리잡을 수 있었다.

 

4. 제국의 분열과 남북의 후계자들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단된 국가들 안에 왕권 교체에 대한 보고이며, 이스라엘 안에서 행해진 바알 제단과 엘리야 예언자의 투쟁에 관한 기록들이다. 원칙상 이런 전승사적인 전제들은 587\86년에 끝난 예루살렘 몰락까지의 이른바 왕국 시대에 적용된다. 전승의 뼈대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정권 교체에 관한 보고들로 이루어져 있다.

유다와 이스라엘 국가 사이에 인격 연합의 존속 문제는 행정 중심지 예루살렘과 함께 솔로몬 후계자의 통치 시기에서 나오는 첫 번째가 되는 주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대두이다. 이스라엘 북방 지파들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왕이 자동적으로 그들을 다스리는 주권을 갖게 되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상 12장에서 빚어진 전경에서 ‘국가 분단’이란 협정된 개념은 아주 객관적으로 일치될 수 있는 것이며, 여기서는 기구가 나누이고, 법칙에 어긋난 강제가 있었다는 감촉을 일깨워 주었다. 정말로 사건들은 거꾸로 뒤집혔다. 성장 발전된 질서 조직들의 한계에까지 돌아왔다. 강권 정치로 가능했고, 북방 지파들의 헌신적인 충성으로 이루어진 다윗과 솔로몬의 대국 정치는 일화(Episode)로 되어 버렸다.

유다를 향해 독자적인 정치를 펴나갈 왕을 지명하는 것이 세겜 회의에서 결렬되었을 때, 여로보암이 발견되었고, 이스라엘인들은 여로보암을 북왕국의 왕으로 추대했다. 한 예언자의 말씀이 마지막에 북방 이웃을 쳐들어가서 전쟁을 하려는 왕을 금지시켰다. 르호보암 통치 말년을(왕상 14:30) 요약하는 기록에서는 다르게 읽는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 있던 동안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는 내용이다.

여로보암의 제사, 종교, 정치는 이중적으로 정력적이고 그의 왕국과 국가의 안전을 위해 이바지했다. 역대기 12:2-12절에 자세한 보고의 기사들은 에집트인들이 점령했던 유다의 성곽들을 말하고 있다. 그 다음에 에집트왕은 예루살렘으로 간다. 거기서 르호보암은 항복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다 바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은 르호보암이 가가의 조공을 바쳐 그 도시를 건졌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다. 그러므로 성전보물을 바로왕이 노획한 것이 아니라 유다왕 자신이 도시와 행정을 안전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생전 동안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있었던 전쟁은 베냐민 지파의 땅을 가지려는 싸움이었다. 그 지역을 차지하려고 다음 왕들은 계속해서 같은 관점 아래서 싸웠다. 외교 정치적인 시각에서 이 두 왕국들은 손실만 있을 뿐이었다. 한 새왕국이 에돔에서 탄생되었다. 에돔은 이미 솔로몬 치하에서 독립을 취했던 나라이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집권 말기에는 열왕기 상에서 처음으로 양 국가들의 왕들의 집정 연수들이 동시대적으로 병렬되었다. 연대들을 산출하면, 르호보암은 932\31-916\15년대로 올라간다. 여로보암은 932\1-911\10년대로 여겨진다. 이스라엘의 왕이된 여로보암의 후계자는 그의 아들 나답이 되었으나, 블레셋과의 전투중에 바샤가 집돈에서 죽였다. 바샤가 왕이 되고 여로보암 왕가를 송두리째 뽑았다. 여로보암 가문의 재앙을 예언한자는 예후 벤 하나냐 예언자였다.

바샤 가문에 멸망을 예언한 예후 벤 하나냐는 동일한 예언자로 있었다. 바샤는 자연사를 했고, 아들 엘라가 왕위에 오른다. 시므리가 엘라를 살해하고 즉시 이스라엘 왕으로 행세하였다. 시므리는 오므리로부터 살해될 것을 알고, 전 가옥과 함께 불태워 자살했다. 오므리가 왕이 되어 12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오므리에게서 이스라엘은 제 1왕조가 시작했다. 그 왕조는 수십년간 지속할수 있었다. 또 오므리는 이스라엘에서 사마리아 도시를 영구적인 새 도읍지로 창건했다.

 

5.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

오므리 왕은 아무도 거주하지 않던 장소를 사들였다. 그는 그것을 사들였고, 그것이 이스라엘인들의 것이 아니라 가나안인들의 소유였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세메르는 이스라엘 주민이 정착하게 이전부터 있었다. 전체적인 조처와 방법은 다윗이 행했던 것과 매우 흡사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다윗의 도시라고 명칭을 바꿀 수 있었고 도 그렇게 했던 것처럼 오므리가 사마리아 도시를 ‘오므리의 도시’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는 정치사적으로 다윗과 솔로몬 이후로 제 일인자였다. 오므리는 죽어서 사마리아에 매장되고 이것은 그의 생애 마지막이었다. 그것은 한 프로그램의 확증이다. 오므리는 그의 도시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아들 아합이 후계자가 되어 오므리의 후광을 받았다. 아합은 적극적이고 성공적인 정치적 영향은 우리로 하여금 열왕기서의 신명기 기자적인 편집의 비판에 이해가 갈만큼 환기 시켰다. 그는 그의 조상들보다 야웨의 눈에 더욱 악하게 행하였다. 그는 두로의 잇도바알왕의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을 아내로 맞는다. 이러한 결혼은 아합에게 내정적으로 무엇보다도 제사적인 귀결들을 가졌다. 그는 바알에게 예배했다. 솔로론과 반대로

아합은 사마리아에 공적인 성소로서 바알신전 하나를 세웠다. 왕가를 위해서만 아니라 그의 독자적인 국가 동맹의 한 부분을 위해서도 세운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인정받은 공적인 바알 종교 성소였다. 그러자 야웨를 신봉하는 주위의 반대운동은 일어났고 중단될 수 없었다. 엘리야가 행하는 이스라엘 적에게 기름 부음, 나중에 실제로 엘리사의 제자에 의해서 수행된 예후의 기름 부음이 있다. 뒤에 나오는 열왕기 상 19:119-21절에 보고되는 예언자 제자를 위한 엘리사의 인정을 기름 부음으로써가 아니고 겉옷을 걸쳐줌으로 명료하게 하는데 이런 행위는 아합의 집의 종말이요, 그와 함께 공통적인 배경이 되는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이다. 왜냐하면 다메섹의 사마리아인들은 바로 가까운 장래에 항구적인 이스라엘의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엘리사는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주는 의식을 행하였을 것이다. 바로 엘리사가 마지막 오므리 왕가를 무너뜨린다. 이스라엘 오므리왕조 때에 아람 국가와 다메섹 관계는 점차적으로 약화 되었으며, 아람인들은 나날이 강력해지는 이스라엘을 남부의 강적으로서 경계 주시해야만 했다. 이스라엘과 두로와의 관계가 아합이 이세벨과 결혼을 하여 강조했고, 다메섹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침해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스라엘은 오므리와 아합 통치하에서 그의 이웃 민족들의 세력 놀음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을 주장할수 있었다. 블레셋인들과는 아무런 이렇다하게 내세울 만한 싸움이 없었다. 유다와의 관계는 놀라운 정도로 우호적인 관계를 발전되어 나아갔으며, 따라서 예루살렘의 왕은 거듭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군사 장비를 갖추었다.

아사의 후계자인 오사벳왕은 여러 번 이스라엘과의 동맹의 가담자로서 나타난다. 더욱이 그의 후계자가 된 요람왕은 아합은 딸 아달리야와 결혼을 하였다. 아합과 몇 명 그의 후계자와 함께 예루살렘과 유다에서는 평행하여 여호사밧이 통치했다. 여호사밧의 후계자 요람은 이스라엘 공주 아달랴와 결혼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유다간의 우호표시의 절정이었다. 요람의 후계자 아하시야는 겨우 1년 통치한 자로 그는 바로 이스라엘왕 요람을 예레스엘로 가서 방문했을 때 예후의 잔인한 행위에 제물이 되었다. 오므리는 이스라엘에서 하나의 새로운 전기를 열었다. 그는 왕국을 안정시켰고, 동시에 왕조의 전제들을 창제할 수 있었다.

 

6. 두 혁명들-이스라엘의 예후와

예루살렘의 아달랴

이스라엘의 예후

이스라엘의 모든 희망과 기대들은 예후라고 부르는 장교요 최고 지휘관에 의해서 성취된 것처럼 보였다. 사건은 예언자 엘리사의 한 생도에 의해서 사작된다. 예언자의 제자는 예후에게로 가서 기름부었다. 예후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이미 사망한 아하샤 왕의 형제들인 유대 왕자들의 그룹은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요람과 사마리아 왕궁을 알현하려고 가는 도중 예후는 즉석에서 살해하도록 한다. 이렇게 예후는 다윗왕조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예후는 바알 예배자들을 죽이고, 사마리아의 바알 성소를 제거했다. 이세벨이 죽은뒤에 이스라엘에 야웨 예배를 재흥 시키는데에 본질적으로 기여했다. 국가의 안정을 위해 기여했고, 이스라엘 새왕조의 기초자가 될 수 있었다.

 

예루살렘의 아달랴

아하샤의 어머니이며, 이스라엘왕의 딸이다. 오므리 왕조와 우호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요람왕과 결혼했던 이스라엘의 공주였다. 아들이 죽은후 성숙한 왕위 계승자가 전혀 없음으로 아달리야는 왕국을 자기에게 돌렸다. 그는 예루살렘 왕가의 모든 친족을 살해하고, 6년간 예루살렘에서 정권을 다스렸다. 요세바라고 하는 아하시야 왕의 누이에게 아하시야의 아들 젖먹이 요아스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것이 성취되고, 성전 경내에 숨겼다. 여호야다는 그에게 왕관을 씌운다. 왕의 조서를 헌정한다. 기름을 붓는다. 성전에서 왕의 환호는 아달랴를 자극했다. 왕을 보았고, 모반을 알아 차렸다. 성전 파숫꾼들은 그 여자를 밖으로 끌고 나가 그 여자는 살해를 당했다. 아달랴의 통치는 끝났고 다시 왕좌에는 다윗의 왕조가 앉았다. 통치를 위해 왕의 성소에서 활동하는 제사장의 중재가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7. 앗수르의 팽창 정치하의 이스라엘과 유다

이미 예후 시대에 있어서 앗수르의 팽창으로 말미암아 동부 요르단 땅 지역의 손실이 알려지고 있다. 그의 아들 시대인 요아하스의 후계자 통치 기간에도 아람인들도 북동쪽에서 이스라엘의 위험한 적수들이었다. 요아스는 요아하스를 따랐고, 아스라엘의 요아하스는 유다왕 아마지야를 향해 전쟁을 하였다. 예루살렘을 향해 돌진했고 성전과 궁전에서부터 보불들을 탈취해 갔고, 예루살렘이 북왕국에 의해서 침공당하여 약탈당한 것을 역사적으로 유일한 사건이었다. 요아스의 후계자는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인데 솔로몬의 후계 여로보암과 구별하느라고 여로보암 II세라고 불렸다. 이때에 아모스와 호세아 예언자가 등장했다. 여로보암 II세 이후 아들 스가리야가 계승했다. 스가리야를 죽였던 살룸이 불과 한달만에 므나헴이 그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그러므로서 이스라엘에는 혁명적인 국면이 돌발하였다. 왜냐하면 스가리야을 죽인 살룸이 이미 예후 왕조에 소속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예후 왕조에는 다만 다섯왕들 예후, 요아하스, 여로보암 II세, 스가리야만 속한다. 신흥 앗수르 정치의 목적은 아람화된 메소포타미야인의 재정복이었다. 신흥 앗수르 대국의 본래 설립자는 앗수르 낫시팔 II세(883-859)로 볼수 있다.

그는 정복자로서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혼합형의 존재들의 조각 형상들이 엄호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앗수르 예술의 상징이 되었다. 더 큰 대규모의 것은 그의 아들 샬 마낫사르 III세(859-824)의 계속된 전투였다. 그가 바로 9세기 중엽에 위대한 앗수르 정복자였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샬 마낫사르 III세가 다메섹에게 공략을 가했던 4회의 출정이다. 다메섹의 국가 전 영토를 향한 공략이었다.

역사의 의미와 장차의 사건의 막연한 예보를 이스라엘의 대예언자들이 그들 말씀의 계기와 자료로 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확실성, 공의의 감각, 미래의 기대와 그런 결속에서 이스라엘의 가장 본래적인 정신성이 있었다. 미래의 대망은 예언자의 예언의 본질을 이루게 하였고 저런 하나님의 사람들을 제시하였다. 자유 이스라엘 인들의 토지 소유 옆에 때때로 직위의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경작되는 국유지를 발전시키는 것을 확실하게 볼 수 있다. 전적으로 관리 행정은 왕실의 재판 관할권 지배하에 있었다. 즉, 왕국 세대의 이러한 경제-행정 구조의 재구성은 여러 관점에서 가설적으로 머물러야만 했고, 역시 그런 이유로 인해서 예언자의 말씀들의 배경의 명칭도 그렇게 머물고 있다. 국가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사이에 있는 분리, 또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힘의 정치와 영적인 사상간의 분리는 원래 이스라엘에게는 없었다. 이스라엘은 예언자들 앞에서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국가들은 내외적으로 가장 어려운 부담을 받은 후 중단되었으며, 그들 생존은 멸망 당했다. 팽창의 추진력들은 종전처럼 이스라엘과 유다의 문앞에서 결코 정지하지 않았다.

 

8. 앗수르의 팽창과 사마리아의 몰락

주전 745년에 칼라하 봉기 이후에 티클랏 필레세 III세는 앗수르 통치를 자기 수중에 넣는데에 성공했다. 그는 앗수르의 대국을 조직적으로 편성하였고 군사 제도는 무기 장비와 기술적, 전술적 자질에서도 다른 나라를 앞질렀다. 앗수르는 그 시대의 가장 두려운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앗수르 군사력의 특징은 자국민의 잘 훈련된 직업군인뿐만 아니라 여러 국가들의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 일차적인 전투는 738년이었고, 다메섹을 붕괴시킨 하맛의 북부와 중부 시리아를 굴복시켰다. 그후 수많은 시리아 국가들과 페니키아의 해변 도시들은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쳤다. 이들 국가들 중에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였던 왕은 다메섹의 라준스와 이스라엘의 므나헴이었다.

주전 733년부터는 약소 국가들 사이에 동맹 체제가 들어서게 되었고, 다메섹은 이를 이용하여 앗수르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다. 다만 유다만이 그 동맹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로 인하여 다메섹의 르으진 왕과 르말리아의 아들 페카는 유다를 공격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이 특이한 전쟁을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라 한다. 이것을 성경에서 보면 이사야 7:1-9절과 관계되며 10-17절이 연속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왜 아람인들과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도 예루살렘 공격이 성공하지 못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앗수르의 왕권 교체는 시리아와 팔레스틴에서 정치적으로 반잇스의 동맹체를 결성케 했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왕 페카의 다음인 호세아는 그의 조공을 중단했고, 이집트의 왕 소(So)와의 연결을 시도하였다. 이것은 왕하 17:1-6절에서 알 수 있다. 이로 인하여 호세아는 앗수르의 포로가 되었고, 사마리아의 왕도 포로가 되고 사마리아는 722년에 함락되었다.

 

9. 요시아 즉위 때까지의 유다

유다는 앗수르의 공격을 모면하려 했다. 그럼에도 동시대인이었던 이사야 선지자가 사마리아의 멸망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사마리아 멸망 후 주전 8세기 말까지의 시대는 일련의 반발 운동들이 연속되었던 때이요, 앗수르에 대항하는 동맹 운동으로 일관되었다. 그 결과 히스기야도 거기에 말려 들어가는 상황이 되었다. 주전 713-711년에는 블레셋 도시 아스돗에서 시작된 반앗수르 운동이 대규모의 반앗수르 운동이었다. 결국 아스돗이 패하기는 했지만 그 영향으로 앗수르의 사르곤 III세는 죽고 705년부터 산해립의 통치가 시작되었으며 유다의 히스기야는 조공을 중단했다. 이뿐만 아니라 히스기야는 “네후스탄”, 즉 구리뱀의 숭배를 중지시키는 등 많은 개혁을 시도하였고, 이를 사람들은 히스기야의 개혁이라고 부른다.

산해립의 집권후 블레셋의 아스칼론과 에크론 두 도시는 앗수르군에 반기를 들었으나 무의미했다. 산해립은 시리아와 페니키아 지역을 휩쓸고 남쪽의 이집트의 항복을 받았다. 산해립은 선왕들처럼 해안가에 머무르지 않았고, 유다의 산악 지대로 방향을 전환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유다를 장악했다. 701-622년의 여러 사건들은 본질적으로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유다는 국가 지역을 상실하였고 블레셋의 주권 밑에 귀속되었다. 7세기 동안의 앗수르 점령 기간은 유다에게 불행한 시대였다. 산해립이 죽고난 후 그의 아들 앗사르 핫돈은 이집트 정복을 수행했으나 저항운동으로 말미암아 실패했고, 앗사르 핫돈도 그때 죽었다. 그의 아들 앗수르 바니팔은 바벨론의 대항했고,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앗수르가 하향길에 접어들고 있었기에 이집트를 독립국으로 내어주고 말았다.

므낫세는 단기간의 통치를 했고, 그의 아들 요시아는 앗수르로부터 독립을 유지했으며 유다는 물론 이스라엘에게도 새로운 정책을 가지고 나아갔다.

 

10. 요시아의 중흥과 앗수르의 멸망

하향길로 접어든 앗수르는 국가적 붕괴로 치닫고 있었다. 중앙집권은 총독 관구 체제로 변환되었고, 총독 관구들은 저마다 독립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때를 맞추어 바벨론에서는 나봇 폴라사르가 바벨론의 권리를 강화시켰다. 메데와 움만만다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산악 지대에서 나왔던 스크트 정복자의 백성은 앗수르에 대하여 공격적인 태도를 강화하였다. 이집트는 북쪽의 새로운 이동 민족과 손을 잡고 앗수르에 대항했고, 결국 앗수르는 멸망했다. 이때 요시아는 이방인의 신들을 제거하는 개혁을 시도했고 벧엘 제단의 아세라상을 불태웠다. 이러한 개혁이 사마리아의 도시들에게도 효과를 나타냈고 유다와의 원대한 정책이 이스라엘 인들에게도 나타났다. 요시아는 그의 개혁을 야웨 예배에서 시작하였다. 최고의 제사장이였던 힐기아는 야웨의 집에서 ‘율법책’을 발견했고, 이것은 왕에게 중대한 행동을 하게 했던 것이다. 발견된 책에서는 신명기의 기본 논제들을 포함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결국 아주 세부적인 면까지도 상세하게 다루고 있었기에 요시아는 개혁 정치를 하나님 중심으로 설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시아는 하나님과 무관한 이방 종교인 제사 행위는 완전히 제거했고, 이를 합법화 하였다. 또 요시아는 이스라엘과의 통일론적 의지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것들은 유다의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고, 국내외적인 심각한 변형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의 역사적인 핵심은 의심할 나위없이 신명기의 전승의 기본적인 명령들이 대 이스라엘의 이념을 되찾는 시도가 되었고, 요시아의 개혁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요시아는 앗수르와 같은 정책으로 나가는 이집트에 대항했으나 패하고 요하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이것은 유다의 불행이었다.

11. 바벨론과 유다의 종말

이집트는 남쪽을 국가 영토의 확장지로 삼고 침공을 시작하였고, 시리아와 팔레스틴은 그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이집트의 정책은 예루살렘의 왕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요이하스는 요시아의 정책을 계속했다. 이로 인하여 이집트는 요이하스를 체포하고 조공을 부과시켰다. 요이하스는 유다로 돌아오지 못했고 이집트에서 죽었다. 그의 뒤를 이은자는 엘리아킴이었다. 그 후로 유다는 이집트의 무조건적인 통치로 들어간다.

605년 바벨론과 이집트는 전쟁이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바벨론이 승리하였다. 이로 인하여 바벨론은 이집트 정복을 계획하였다. 바벨론과 이집트는 장기간의 커다란 접전이 있었고, 서로의 피해는 아주 큰 것이었다. 결국 바벨론은 이집트 정복에 실패했고, 이를 구실삼아 유다를 공격했고, 여기서 유다는 참패했다. 그 결과로 엘리아킴은 사로잡히고 그의 삼촌 여호아킨의 아들 요시아가 왕위에 올랐다.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은 그에게 시드기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시드기아는 역사상 예루살렘의 마지막 왕으로 등극하였고, 바벨론은 예루살렘의 관리들과 핵심 인물들을 포로로 잡아갔고 그중에 에스겔도 있었다.

예레미아는 예루살렘은 구출된다고 부르짓는 거짓 예언자에 대항하면서 등장하였다. 예레미아는 바벨론의 포로들에게 그들의 멍에를 메고 그들에게 순종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살 수가 있기 때문이였다. 거짓 예언자들은 예레미아를 미워했고, 바벨론과 공모하는 자로 못미더워 했다. 시드기아가 집권한 9년 되던 해 시드기아는 바벨론왕에게 봉신관계의 끝을 선언했다. 그 결과로 바벨론은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했다. 이 공격은 3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예루살렘성은 함락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서 느브갓네살왕에게 끌려갔다. 지도급층에 있던 상부층은 가혹하게 징벌되었고, 예루살렘 시민의 대부분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끌려갔다. 이것이 바벨론의 2차 포로였다. 그러나 시골에는 노동에 종사하는 농부들이 남아 있었으며, 따라서 사골에는 토착민들의 넓은 층이 남아 잔존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다에게 독립 국가의 최후를 뜻하며 정치적 독립의 임시적인 종지부였다. 그 역사는 이제까지 가나안 땅을 점유한 이래로 발전되어 왔었다.

유다의 전체적인 파멸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써 어렵지 않게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의 판단을 위해서는 끝없이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야웨 신앙의 전통”이다.

 

5.프롤레미(프롤레메어) 통치와

안티오쿠스 4세까지의 셀로이키텐 통치

1. 알렉산더 대왕 사후의 정치적인 발전들을 연대적으로 개괄해 보자면, 여기서 프톨레메어의 통치와 셀로이키덴의 통치를 연대적인 전후 관계에서 읽을 수 있다(프톨레메어 왕가는 프톨레메우스 I . 라기(소테르)[323] - 프톨레메우스 VI . 필로메토스[145]까지(7명), 셀로이키덴 왕가는 셀로이쿠스 I . 나카토르[312] - 알렉산더 I . 발라스[145.(?)]까지(11명)). 페니키아-팔레스틴 지역에 돌입한 희랍사상의 쇄도는 우선 사마리아와 유대지방의 산맥에 위치한 고대 이스라엘의 중심지와 부분적으로 접촉하였고 있었다. 헬라화는 페니키아에서부터 시작되어, 점점 남쪽 해안지대로 뻗어 나갔다. 알렉산더 이후 1세기 동안 팔레스틴-페니키아 지경의 소유문제는 우선 준열하게 각축적을 벌였다. 알렉산더에 의해서 투항·정복된 전체적인 국가규모의 분배는 알렉산더 죽음후 개별적인 지방통치자들의 막중한 전투들의 결과로써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프톨레메우스 1세 소테르 에집트를 다스리고, 셀로이쿠스는 바빌론의 사트라피를 다스리고, 안티고누스는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다스렸고, 마케도니아와 희랍에는 안티파테르가 위임하였다.

2. 프톨레메우스는 320년에 성전에 재물을 드린다는 명목으로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나타나서 그 도시를 점령하고 많은 유태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안티고누스가 알렉산더의 모든 영토를 차지하려고 한다는 소문은 프톨레메우스로 하여금 안티고누스에 대항하는 셀로이쿠스와의 동맹을 맺게 하였다. 죄종결전은 입소스전투(주전301)였다. 안티고누스는 참패했고, 그후 셀로이쿠스는 시라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다. 그리고 남쪽 시리아. 고대 이스라엘-유대의 영토 영향 아래 있던 레바논 남쪽의 전체 지역은 계속 프톨레메어의 통치 아래 머물렀다. 이들 둘은 전체 시리아-팔레스틴의 궁극적인 차지를 도모하여 맹렬하게 싸웠다.

3. 셀로이키덴의 안티오쿠스 III세(223-187)가 들어섰을 때, 에집트를 남부 시리아(페니키아-팔레스틴)에서 축출하여 예루살렘\유대를 셀로이키덴의 통치에 소속케 하는데 성공한다. 안티오쿠스 III세는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이스라엘의 도시와 성전에 우선권을 갱신해 주었다. 이것은 특별한 칙령으로 나타나는데 이 칙령을 살펴보면 유대인들에게 세금의 3\1을 감면해 주고, 도시에서 노예로 끌려간 그들의 전체 후손들에게 자유를 허용해 주었으며, 그들에게 그들의 능력을 되돌려 주었다. 이런 속결 조처는 성전과 제단 예배의 약속으로 나타났다. 우선은 제단을 위해서 기부금이 책정되었으며, 성전이 마지막까지 완공될 수 있도록 물자들을 제공하였으며, 어떤 관세도 올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남쪽에서 그의 통치가 공고하게 되자 소아시아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여기서 로마인들이 동쪽으로 오게 됨에 따라 안티오쿠스와 격돌하게 된다. 희랍에서 안티오쿠스는 로마인들에게 패해 로마인들이 제시하는 대로 평화조약을 맺게 된다. 이 순간부터 셀로이키덴 통치의 절정은 내리막길이었다. 그는 주전 187년에 사망했다.

4. 부친의 조세 지불 의무를 그의 아들 셀로이쿠스 VI세 필로파토르(187-175)가 떠맡는다. 그의 막대한 세금정책은 유대와 쾰레시아에 미치고, 성전의 물품을 침탈하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오이아덴(Oniaden)과 토비아덴(Todiaden) 양 제사장의 가문들이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오이아덴에게서는 사독의 제사권이 취급되었던것에 비해, 토비아계통은 다만 성전 기관 내부에 행정관리들로서 머물렀다. 그러나 토비아계통은 유대에 파견된 에집트 행정부의 조세 징수인 위탁을 받고, 알렉산드리아와의 관계, 서부와 동부 요르단의 내적인 관계들에 미친 영향과 모든 재정 문제 처리의 수행 능력은 그들을 유대와 그 이외 경제밖에 있던 지역에 경제생활의 열쇠 구실을 감당케 하였다. 토비아 계통의 상승은 민감하게 최고 제사장의 영향을 제약하였다. 이들 두 제사장 계통은 서로 암투를 벌이는 관계에 있었다.

5. 이러한 알력 싸움으로 성전의 보물을 탈취하려던 셀로이쿠스 VI세가 살해되고, 안티오쿠스 VI세 에피파네스가 시리아의 왕위에 등극하였다. 그는 아파메아의 굴욕적인 태평을 잊게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사례없이 극성스럽게 전쟁을 수행하였다. 유대와 예루살렘에 안티오쿠스 VI세는 엄청난 방법으로 침입해 들어감으로 그곳에서 예측치 못했던 힘들을 자극했다. 유대 공동체는 안티오쿠스 VI세때까지는 수많은 전쟁의 소용돌이와 내적인 긴장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 이후 나라는 설령 한정지어진 번영이었다 해도 성장일로에 있었다. 시리아와 팔레스틴은 주변강대국의 정세로 인해서 경제적인 교통망 외에 군사적이요 행정적인 기술이 성장되었던 것이다.

6. 프톨레메어-셀로이키덴 시대의 문서와 제의는 모국의 유대 교도와 디아스포라를 위해서 있었다. 더군다나 프로셀뤼텐들(이방인들로서 유대교도로 개종한 이들)이 율법의 귀의하는 환경에서 매력을 끌고 영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을 위해서 주전 3세기 동안 알렉산드리아에서 오경 번역의 시작이 희랍어로 나타났다. 그리고 희랍어 역은 결국 전 작품에로 확대되었다(70인역). 점증하는 헬라화 시대에 정신적인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 가장 강력하게 뚫고 들어오는 헬라 영향을 이스라엘 백성은 종교적으로 거기에 맞섰다. 안티오쿠스 VI세의 예루살렘의 헬라화 시도는 결국 좌절되었으며, 마카베어의 투쟁 정신을 일으켜 놓았다.

 

6.안티오쿠스 VI세와 마카베어 형제들

1. 안티오쿠스 III세의 죽음 이후 이미 동쪽 지중해권은 전체적으로 희랍의 영향권에 들었으며 전기(轉機)를 이루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로마는 서부 지중해의 주역이 되고, 그 다음에 세력은 동쪽으로, 우선은 마케도니아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에집트와 로마의 연결은 직접 시리아의 셀로이키덴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안티오쿠스 VI가 있어 이제까지 어느 셀로이키덴 통치자도 감행하지 못했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정치적-군사적인 힘을 응용하여 예루살렘과 유대에도 헬레니즘을 관철시키려고 시도했고, 동시에 유대인들을 가장 가혹한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그곳에서 사상들은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새롭게 상승하는 대규모적인 압력속에 유대교도의 일부는 전적으로 헬라적인 영향의 아래 들어가지만, 율법고수자들은 도전감을 느끼며 결정적인 저항을 결의하였다.

마카베어 형제들은 이런 저항을 수행했으며 전 시대에 화해할 줄 모르는 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물론 상존하는 세력관계들에 직면하여 모든 결과에도 불구하고 긴장과 새로운 부류들을 조성했던 투쟁 대열이었다.

2. 안티오쿠스 III세는 예루살렘 성전에 자립권을 주었으나, 안티오쿠스 VI세는 주저하지 않고 전혀 다른 수단을 썼다. 그는 로마가 부과시킨 비정상적인 군세(軍稅)를 지불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최고 제사장 직위를 그에게 가장 많은 것을 바치는 후보자에게 팔았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는 최고 제사장들이 자주 바뀌었다. 먼저 오니아스 III세가 실각되고, 그의 형제 야손이 임명되었으나, 얼마 후에는 토비아덴 소속의 메델라우스가 최고 제사상이 되었다.

3. 안티오쿠스 VI세는 주전 170년 이후 에집트와 막중한 전투를 벌였다. 여기서 그는 막대한 성과를 거두고 멤피스에서 바라오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개입으로 에집트를 떠나야만 했다. 169년에 안티오쿠스가 첫 번 에집트 출정에서 돌이켰을 때, 군대를 풀어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게 하였다. 그는 2차 에집트를 원정하였으나 로마의 개입으로 에집트를 떠나야만 했을때, 예루살렘에서는 소요가 일어났다. 그러나 폭동은 진압되었다. 그는 도시를 완전히 헬라화시켰고, 예루살렘에 성곽 모형의 요세인 ‘아크라’가 점령군에 의해 세워졌다. 이 점령군들에 의해 사실상 안티오쿠스 III세가 예루살렘에 베풀었던 모든 특혜들이 지양되었다. 안티오쿠스는 ‘아크라’ 수축후 몇 달간 일련의 성전 제물 예배의 규정을 금지시켰다. 그는 할례를 금했고, 다른 제사 규정을 금했고, 그리고 성소 자체에 제우스 올림푸스 상을 들여놓았다. 그는 유대 제단과 조상들 종교를 지키는 자들은 사형을 시켰으며, 주로 안식일 성수와 다른 축제를 지키면 벌하였다.

4. 안티오쿠스 VI세 집권 이후 일어났던 사건들을 외적으로 설명할 때 셀로이키덴이 조직적으로 헬라화를 수행함으로써 첨예화되었다. 예루살렘 안에서와 그 주위에 살던 유대인은 셀로이키덴 왕을 거부하고 박해를 받아 쫓기던지, 아니면 조상들 신앙을 멸시하고 배신을 하던지 양자택일의 결단만이 있었다. 유대인 생활 감정의 특성과 긴장의 이해도 없이 셀로이키덴 통치자의 폭력적인 동화정책은 많은 이들을 몰아 붙였으며, 동시에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이것은 작은 도시인 모데인(Modein)에서 폭발했다.

5. 마타티야(Mattatja=Mattathias)라 부르는 제사장 가문 출신의 맛타타아스는 그의 아들들과 함께 이방 제사에 참여하라고 하는 관리를 죽이고, 셀로이키덴이 지정해 놓은 제단을 때려부수고, 헬라 정신에 물들고 이방 제단에 참여한 자들을 죽여 버렸다. 맛타티아스가 죽자 그의 아들 마카비란 별명을 가진 마카베어 유다스가 전투를 계속하였고, 역사에 등장하였다. 그의 별명은 율법 수호자들의 봉기를 “마카베어 운동”으로 불리게 하였다. 마카베어는 벧-호론에서 첫번 승리를 거두었으며, 벧-주르에서 또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마카베어의 명백한 입장에 직면하여 안티오쿠스 VI세는 마음을 바꾸게 된다. 유대인들은 생업에 종사하여 먹고 살수 있으며, 전과 같이 그들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명문상 규정했다. 그것은 사실상 박해의 종식을 의미한다. 마카베어는 예루살렘에서 헬라화된 제사장들을 무력으로 직위 해제할 것을 결의하고, 주전 164년 도시를 점령하고 모든 헬라화된 요소들과 개조된 것들을 치워버렸다. 성전은 이스라엘 하나님을 위해 정결케된 제단과 함께 새로이 축성되었다.

성전 축성후 며칠 못가서 안티오쿠스 VI세는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의 8살된 아들 안티오쿠스 V세가 왕이 되나 통치 능력이 없었다. 그를 호위하던 뤼지아스는 성전터를 율법보존자들에게 이양하고, 조상들의 종교를 지키는 허락을 한다. 그러나 그는 협정을 준수치 않고 성전보물의 성곽을 헐게 한다. 그리고 최고 제사장 직위를 받은 메넬라우스를 처형시키고, 최고 제사장으로 사독계열의 알키무스를 세웠다. 알키무스는 원래 시리아 총독 바키데스에게 지원을 받은 이로서 마카베어와 그의 파당들에게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원조를 청하고 마카베어는 대항하여 전투를 벌이나 최후의 종말을 보게 된다.

6. 유다스의 자리에 그의 막내동생 요나단이 들어섰다. 알키무스는 159년에 사망했다. 바키데스는 요나단과 평화조약을 맺고, 셀로이키덴의 인가를 받은 요나단은 믹마스에 거주한다. 데메트리우스 I세는 153년에 알렉산더 바라스, 이른바 안티오쿠스 VI세의 아들이 왕위 계승 요구를 하자 요나단에게 동맹체제를 신청하였다. 요나단은 알렉산더 바라스의 편이 되었고, 알렉산더는 승리하여 새로운 지배체제가 형성된다. 그는 유대 지방을 다스리는 군사적-시민적인 전권을 가진 지방 총독으로 성공하였다.

데메트리우스 II세가 다시 정권을 차지하여 요나단이 어려운 상황에 빠지나 외교의 성공으로 그의 정권유지에 성공한다. 그후 요나단과 그의 형제 시몬은 여러번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주변국들에 의해 제지를 당하게 된다. 요나단은 프톨레마이스에 의해 인질로 잡혔다가 죽게된다.

요나단은 확실히 유다스 마카베우스와는 다른 인물이었다. 그러나 양인들에게서 한가지로 공통된 것이 있었다: 결단력과 엄격성, 저항력, 결단력을 가지고 세워진 목표를 따르는 점, 시간의 유리한 면을 이용하고 가장 불리한 형세에서 자신을 모면하는 가능성으로 전환시키는 능력들이다. 동시에 요나단은 유다스보다 좀더 담대하게 그의 적수들과 어울려서 외교적인 자리를 펼칠 줄 알았다.

 

7. 하스몬(하스모네어)왕조

예루살렘과 유대에서의 로마통치 시작

1.요나단의 형제 시몬과 함께 새로운 시기가 시작된다. 그는 마타티야 가문과 마카베우스가 거두지 못하였던 것을 이룩하였다. 그는 예루살렘과 유대를 위해서 거의 제약을 받지 않는 독립성을 쟁취하였다. 그는 결국 주전 1세기까지 지속되었던 왕조 통치의 건립자가 될 수 있었다. 하스모네어 등장의 첫 번째 전제는 셀로이키덴과 프톨레미어 세력의 점차적인 쇠퇴에 기인한다. 시리아와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유대에 가장 강력한 위험들이었지만 그들 스스로 분열을 일삼아 저항 세력에 의해서 미비되었고, 동시에 로마의 시종일관하는 확장앞에서 떨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대는 폼페이우스가 침공할 때까지 그리고 셀로이키덴과 하스모네어의 독립이 종국에 이를 때까지 정권 다툼이 전개되었다. 시몬은 주변국들의 이해관계속에서 데메트리우스로부터 독립의 약속을 쟁취하고 유대에 부과된 조공의 면제를 받는다. 그리고 주전 142\1년에 예루살렘에서 ‘최고의 제사장, 군사령관이요, 유대의 지도자’로 공인되어, 그의 연호의 첫해가 된다. 141년에 아크라를 정복할 수 있었고, 제사장들과 민족의 최고 지도자들은 그에게 세습적인 후계자권을 가진 한 제사장적 군주의 품위를 부여하였다. 그럼으로서 140년에 왕조노선에 하스모네어 통치권의 기초를 이루는 대본이 놓여졌다. 그리고 여러번의 전투를 거처 새로이 유대의 독립성을 확실하게 다졌다. 시몬은 134년에 그의 아들 마타티야와 유다스와 함께 그의 사위 프톨레메우스에게 암살 당한다. 그리고 다른 아들 요하네스도 죽이려 하지만 요하네스는 포톨레메우스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백성들은 그를 부친의 권한에 임명한다.

2. 시몬의 아들 요하네스는 집권자의 명칭으로 요한네스 히루카누스(Johnanes Hyrka-

nus) I세라고 붙이고 그의 부친의 권한에 임명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에 유대는 견고하게 지켜졌다. 히루카누스의 장기 집권은 대개 성공적으로 안전하였는데 그가 직접적으로 이웃나라들을 굴복시켰던 까닭이 손꼽힌다. 그는 남쪽 깊숙이 침투하여 옛 에돔지역을 공격하였고, 헤브론 남쪽지역에 있던 도시들 아도라와 마리사를 정벌하였다. 계속 이두메아라고 불리던 지역에서 할례와 율법의 준수를 강요했고 그럼으로서 이두메아를 이스라엘의 제사 공동체로 병합시켰다. 이스라엘 지역의 북부에서는 그리심산에 있던 사마라아인의 성소를 파괴해 버렸다. 내적으로 미친 히르칸의 군사적인 성공의 영향을 측정하기는 어렵다. 그는 그의 통치 말년에 주화를 만드는데, 그 주화에는 ‘최고 제사장’ 요하네스와 유대인의 공동체 등등이 칭해졌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제사장으로서의 자기천명은 바리새인들과의 알력의 계기가 되었다. 즉 그는 처음에는 바리새인들에게 동조했으나 마지막에는 사두개인들 쪽으로 가까이 치우쳐 정치를 수행하였다. 요하네스 히르카누스 I세는 주전 104년에 죽었다.

3. 그의 장자 아스토리불 I세는 일년동안 통치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역사에 잔인하고 명예심이 높은 이로 나온다. 그는 그의 모친을 감옥에서 굶어죽게 한다. 그의 형제들도 감옥에 가두고, 마음에 드는 안티고누스만 자유롭게 해 주었지만 나중에 모살한다. 그는 1년만에 갑작스럽게 죽는다

4. 아스토리불 I세의 죽음후에 그의 부인은 감금되어 있던 형제들을 풀어주고, 그들중 하나를 왕으로 세우고, 그와 결혼하였다. 그가 알렉산더 얀나이(주전 103-76)였다. 그는 변덕이 심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럼에도 수많은 전투에서 고대 유대-이스라엘의 영토를 완전하게 정복하였고, 그의 적들에 대항하여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승복시켰다. 그러나 알렉산더 얀나이는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으로 인해 주변국들과의 싸움에 휘말려, 적잖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중에 나바테어의 왕 오보다트에 패해 예루살렘에 도망했을 때, 그의 자만심, 그의 전투 수행과 그의 종교적 무관심이 그를 증오의 대상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그를 배척한다. 거기에 대해 그는 박해와 살해로서 복수를 감행한다. 이에 격분한 예루살렘인들은 셀로이키덴의 왕 데메트리우스 III세에게 도움을 청하여 그의 군대는 세겜에서 알렉산더를 섬멸하였다. 그러나 데메트리우스가 철수한 뒤 그는 다시 복수를 감행한다. 알렉산더 얀나이는 주전 76년 49세의 나이로 죽는다.

5. 하스모네어 왕가의 실추는 알렉산더 얀나이에게서 최하점을 이루었다. 그의 후계는 살로메 알렉산드리아 여왕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권위를 안전하게 했으며 그 나라를 평정시켰다. 여왕은 그녀의 장자 히르칸(II)에게 최고 제사장직을 넘겼다. 그녀가 73세로 죽자 하스모네어 국가의 지배를 둘러싼 아들들의 싸움은 불가피하였다. 동시에 외부세력의 위험이 점증되었다. 남쪽에서는 나바테어인들이 새로이 공격해 왔다. 서부와 북부에서는 로마인들이 왔다. 폼페이우스와 함께 소아시아 지방을 궁극적으로 서쪽 강대국에 넘겨질 때가 왔던 것이다.

6. 살로메 알렉산드리아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최고 제사장 히르칸 II세에게 왕의 품위는 머물러 있었으나, 그의 정력적인 형제 아스토리불은 그를 예루살렘 포위 직후에 사두개인들의 도움으로 왕위를 포기하게 할 수 있었다. 히르칸은 도피처를 찾았다가 나바테어인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에 나타났다. 그러나 성문밖의 나바테어인들이 무언가 예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면서 히르칸과 아스토리불은 다메섹에서 폼페이우스로부터 위임받은 로마의 장군 스카우루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로마는 아스토리불의 돕기로 결정하여 나바테어인들을 철수시켰다. 그후로 아스토리불은 더 이상 1인체제를 굳히지 못하였다. 그는 로마에 의존하게 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직접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입하였다. 도시의 주민층은 그 도에 달한 위험에 직면하여 성문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성전지역은 강력한 반대의 힘을 가지고 저항하였다. 그러나 3개월 포위당한 끝에 성전도 로마인의 손에 함락되었다.

7. 그럼으로서 주전 63년에 예루살렘에서 로마 통치가 시작된다. 로마인들은 항복한 지역들을 재정비하고 동시에 행정 지역들도 만들었다. 유대는 남부 사마리아 지구들 영향 아래 예루살렘에 소속되었다. 사마리아는 시리아에 설치되었던 로마의 지방행정부에 직접 예속되었다. 이럼으로서 사실상 옛 셀로이키덴 국가동맹의 서쪽 부분을 종결지었던 전체적인 시리아 ‘팔레스틴’지역은 시리아 지방으로서 한 총독밑에 종속되었다.

고대 이스라엘-유대 국가영역에 침입한 로마의 등장과 시리아의 지방으로 편입됨에 따라 이스라엘 역사는 구약 시대의 한계의 극한점에 도달했다. 유대 관계들의 새로운 영향권 주위에 아리스토불과 그의 아들들의 싸움들은 때때로 로마 세력가들과 결탁한 최고 제사장과 싸움, 그리고 헤롯과 그의 후예들의 등장은 완전히 새로운 역사의 단면을 형성한다. 로마 통치는 가장 부담스러운 억압중에 하나였는데, 그런 억압에 이스라엘이 넘겨졌다. 로마는 서부의 군사력이었다. 그 세력은 동방에게 아무것도 줄 수가 없었다.

8. 예루살렘-유대의 공존적인 존재가 적어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시대 이후에 중지되었던 부담들을 정치적인 힘과 정신적인 대결들의 교차에서 개별적으로 상상하기는 어렵다. 요르단 서부와 동쪽에 비교적 작은 영토에 외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침해와 연속된 힘들은 백성 전체의 연이은 심적인 손실뿐 아니라, 저항 의지의 마비와 그의 정신적인 전제들의 마비를 초래하여야만 했다. 그럼에도 어떤 규모로 이런 저항 세력이 성장되었으며 모든 면에서 받은 위협 속에 공동존재에서 계속된 삶을 위한 전투가 인도되었는지 놀랄만하다. 이러한 가운데 문학적인 표현들은 새로운 형식들을 창안하였다.

9. 소위 묵시록적인 문학 형태에서 적어도 주전 2세기 중엽이후 하나의 새로운 이스라엘 정신의 형성이 나타난다. 그것은 유대 백성의 일각에서부터 새로운 세계 정치의 체험들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묵시록은 그의 커다란 가시적인 표상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정신적으로 신학적으로 현재와 미래를 파악하려는 독특한 시도들에 속한다. 다니엘의 묵시록은 거의 절대적으로 커다란 세계사건을 숙고하고 있다. 다니엘 7장에 보면 상징적으로 네 짐승들의 형상이 혼돈의 바다에서 일어나서 네 개의 강대국가들을 구현시키는 것을 유도하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특징을 가진 세계 강대국들을 겹쳐 놓은 도식이 가공되어 있다. 다니엘서의 네 짐승들은 네 개의 마지막 세계 강대국들을 암시한다. 다니엘 7장은 다만 짐승의 형상으로 알려진대로 그의 세계정치적-가시적인 상징으로써 묵시록적인 문학의 한 원형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천상적인 장면의 간략한 표현들로써, 장엄한 규모로 초월적인 세계를 묘사하는 세계는 후기 이스라엘의 영적인 것과 일치하고 있으며 결국에는 요한 계시록 1장에까지 계속 영향을 남기었다. ①‘묵시록 기자들’의 기대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의 의지를 지상에 실행하실 것이며 지상의 나라들은 그들이 이룩한 결과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②묵시록 기자들의 비판은 절대적으로 현재에 있었으며 그들의 희망은 전적으로 미래에 있었다. ③묵시록 기자들의 질문은 어떤 규모로 ‘하나님의 통치’가 세계역사와 그 자체로 보면 복잡 다난하게 분열된 이스라엘 자체의 운명에 있어서 표준적이며 혹은 새롭게 될 수 있는가 이다. 이런 통치의 주권자는 누구이며, 그의 선택된 증인들은 누군가, 그런 선발의 판단표준은, 그리고 하나님 통치의 침투에 특별히 수반되는 상태들에 관한 질문을 생ㄴ생하게 하는 것들이다. 이렇게 한 “종말적인 희곡”의 요소들의 형성되었다. 그런 희곡은 하나님을 원수시하는 세력들의 멸망에서부터 불경자들의 심판과 그 다음 메시야의 등장과 완전한 이상적인 구원시기에 이르기까지 포함하고 있다.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인자(Menschensoh)의 상징적 형상은 독립적인 종말론적인 구원의 인물로 발전되었다. 그런 방법으로 “메시야”의 기능들은 강한 수축을 경험하여 왔다.

10.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유대종교와 기독교 사상의 이해를 위한 전제를 이룬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그의 역사의 과정에서 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은 유대인과 기독교에 공통적인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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