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신구약 중간사의 범위

하나님아들 2021. 3. 5. 23:54

신구약 중간사의 범위


1.신구약 중간사의 범위

 

구약성서에 대한 연구가 다각적으로진행되면서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구분은 점차 모호해졌습니다. 이제 신구약 중간사라는 개념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구약 중간사라는 제목으로 이 특집을 개진하는 이유는, 교회 내에서 신약성서의 배경 역사를 지칭하는 의미로 신구약 중간사라는 용어가 이미 사용되고 있어, 그에 따른 혼동을 줄여보자는 의도에서입니다. 신약성서의 배경 역사는 바로 유대교의 역사로서, 신약성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이 시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에서 풀려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때부터 서기 70년경의 유다전쟁까지로 한정하였고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구약시대가 끝나고 신약시대가 시작되기까지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사라 할 때, 그 시기의 이스라엘 역사를 신구약 중간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를 구약시대로 보고 어디서부터 신약시대가 시작되는가 하는 데에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릅니다. 유다인들이 마지막 예언자라 생각하는 말라기 예언자 시대 이후(기원전 460년)부터 예수 그리스도탄생까지를 신구약 중간사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구약성서의 마지막 부분인 마카베오 하권이 완성된 이후(기원전 160년 이후)부터 사도시대까지를 신구약 중간기라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 대한 여러 방면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구약성서 중 많은 책들은 바빌론 유배 시절 이후(기원전 538년) 오랜 기간에 걸쳐 수집. 재편집되거나 새로 씌어졌고, 12소예언자 중 다수 예언자들의 활동도 계속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형성된, 구약성서의 그리스어역본인 70인역까지 생각한다면 신구약 중간사는 모호해지거나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신약성서에서 만나게 되는 생소한 단어와 표현들로 인해 품게 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이며, 그리스도교에 대한 더 깊은 이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당시의 세계사적인 배경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일들을 겪게 되었는가를 알아야만 신약 성경시대를 바르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신구약 중간사 의미

 

흔히 성경의 역사를 신약의 역사와 구약의 역사 둘로 나누어 연구하고, 또 우리들도 그렇게 배워왔다. 하지만 신약과 구약의 역사가 가지는 비중만큼이나 중요한 역사적 시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약과 구약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는 신구약 중간기이다.

 

대부분 이 신구약의 중간기에 대해서는 "암흑기"나 "침묵기"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 이 중간기가 신약과 구약을 연결짓는 고리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나, 성지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신구약 중간기(Inter-testamental Period)는 대략 BC 400-500년 혹은 BC 400-100년 사이로 바벨론 포로시대(구약 성경의 끝)부터 신약 성경이 완성된 시기까지 약 400년의 기간을 말한다. 즉 성경의 말라기와 신약성경이 기록된 시점 중간에 약 400여 년의 갭이 있는데. 이 기간을 중간기(Inter-testamental Period)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신구약 중간기에 있어서의 괄목한 만한 사건을 시대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2-1. 포로귀환시대 (BC 722-400년)

 

먼저 북왕국으로 불리던 이스라엘의 멸망(BC 722년)을 들 수 있다. 계속하여 하나님께 악을 행하던 이스라엘 왕국은 결국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고야 만다. 그리고 이 앗시리아에 의해 혼혈정책이 시작되는데 이로써 이스라엘과 앗시리아 사람의 혼혈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하게 된다. 남왕국 유다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혼혈족이 된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하며 그들을 개라고 불렀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우물가의 대화가 전개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남왕국 유다가 BC 587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당한다. 이때 유대인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적인 딜레마에 빠져들게 되었다. 즉,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집인데 어떻게 파괴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란 말인가? 어떻게 이방인들에 의하여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이 파괴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어나게 된 것이다.

 

결국 이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등장한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능력이 모자라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한편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의 지배는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바로 페르시아의 등장으로 인해 장엄한 바벨론의 역사도 막을 드리우게 된 것이다.

 

성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페르시아(바사)의 등장이 무척 중요하다. BC 538년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한 후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은 칙령을 반포하여 유대인의 귀국을 허용했다. 그래서 성경은 고레스를 위대한 왕으로 언급하고 있다. 고레스의 칙령에 의한 예루살렘으로의 귀향은 3번에 걸쳐 이루어지게 되는데 1차 귀환은 스룹바벨에 의해서 이뤄졌으며(538년), 귀국 목적은 성전 재건이었다.

 

당시 페르시아에 잡혀가 있었던 유대인들의 총 숫자는 200만 혹은 300만으로 추정되는데 이중에서 49,897명이 귀환했다. 이 사람들은 헌신된 사람들이었다. 페르시아에서의 안락한 생활과 권리를 포기한 채 가난과 굶주림을 각오하고 조국으로 귀환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성전 건축이 쉽지는 않았다. 결국 기근과 가난으로 인해 성전 건축이 중단되고야 만다. BC 534-532년 사이에 스룹바벨에 의해 성전이 건축되다가 520년까지 중지되었다가 515년에 완공되었다.

 

이후 2차 귀환은 느헤미야(444년, 예루살렘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와 에스라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에스라는 학사(서기관, Scribe)였다. 이 에스라에 의해서 율법이 모아졌는데(자료모집)-대부분의 구약성경이 이때 모아지고 편집되어졌다-특히 구약의 대부분(22권)이 에스라에 의해서 편집되었다고 본다.

 

또한 서기관 제도(Scribes)도 에스라 때부터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탈무드의 일부인 미쉬나(Mishnah)가 구전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미쉬나는 모세 율법과 똑같은 비중으로 취급되어진다. 결국, 613개의 율법(미쉬나)의 비중이 기록된 말씀(모세율법)과 같은 비중을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율법의 무게에 백성들의 삶이 짓눌려 버리게 된 것이다. 이것의 좋은 예가 마 11: 28-30이다.

 

2-2. 그리스시대 ( BC 332-142년)

 

그리스제국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지중해 일대의 세력 판도는 또 한번 변하게 된다. 먼저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 2세는 페르시아를 공격하려다 암살 당하고 만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21세의 젊은 나이로 왕으로 등극한 알렉산더 대왕은 마케도니아를 정복하고 결국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이러한 알렉산더 대왕의 패권은 지중해 일대를 그리스 문화화하는 데 크게 공헌을 하게 된다. 즉 알렉산더 대왕은 가는 곳곳마다 헬레니즘 문화와 헬라(그리스)어를 보급하게 되는데,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된 일과 이스라엘과 지중해 곳곳에 헬라식 건축양식이나 헬라식 문화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영원하지 못한 법. 지중해 지역과 소아시아 일대를 평정한 알렉산더 대왕도 32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을 달리하고 그리스제국은 결국 분열의 길로 들어서고야 만다.

 

헬라제국은 세 나라로 분열되는데, 먼저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미 왕조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셀류크스 왕조, 그리고 마게도냐를 중심으로 한 안티고니드 왕조가 세우는 나라로 각각 나뉘게 된다.

 

유대 지방은 프톨레미 왕조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는데(BC 301-198년) 이들은 유대인들을 주로 온화하게 다스렸다.이러한 온건책으로 인해 디아스포라(Diaspora)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즉 비교적 살기 좋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많은 유대인들이 흘러 들어갔다. 그 영향으로 결국 헬라어 구약성경 "70인역"이 번역되게 된 것이다. 즉 프톨레미 2세의 요청으로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던 헬라-유대인들을 위하여 헬라어(그리스어)로 번역하게 된 것이다.

 

이후 유대지방은 다시 셀류크스 왕조의 지배(BC 198-142년)를 받게 된다. 셀류크스 왕국의 안티오커스 3세는 톨레미 왕국을 격파하고 팔레스타인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된다. 그의 후계자 안티오커스 4세는 유대인들이 결코 잊어버릴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인물로, 별명이 에피파네스("God Manifested" 신의 현현)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 안티오커스 4세는 헬레니즘을 전파하기 위해 유대종교를 말살하는 정책을 폈는데 우선 레위기에 나오는 희생제사 대신, 유대인들이 가장 불결하게 생각하는 돼지피로 제사토록 강요하였다. 또한 유대 종교의 중심지인 성전을 훼파하고 성전의 한복판에 주피터의 신상을 세웠다. 또한 이스라엘 지방 곳곳에 자신의 얼굴을 신상으로 세웠다. 한편 율법을 폐지하였고 성경 사본을 파괴하였으며, 안식일과 할례를 폐지했다.

 

이러한 조건과 시대적 배경 하에 "부활, 영생" 사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에피파네스라고 불린 안티오커스 4세의 폭정에 항거하기 위하여 BC 167- BC 142년 마카비혁명이 일어났다. 이 민중봉기는 Modein이라는 곳의 유대인 제사장 맛디아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제사장이며 용감한 애국자였던 맛디아는 네 명의 아들들과 함께 안티오커스 4세가 유대인들이 돼지 피로 희생제사를 드리는지를 감독하기 위해 보낸 사신을 다 죽이고 산 속으로 피신하여, 이미 피신한 신자들과 합류, 시리아 군인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외경인 마카비 2서 14:6에 이 유대 반란자들을 가리키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때 이들을 지칭하는 명칭이 "핫시딤"(Hasidim, 경건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핫시딤은 아직까지 유대인들의 한 종파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맛디아가 죽은 후에는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an) 가 등장하는데 그는 게릴라 전투의 명수로 BC 165년 엠마오전투를 승리로 장식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된다. 그가 첫 번째 로 한 일은 안티오커스에 의해서 더럽혀진 성전을 성결케 하고, 성전을 여호와께 다시 봉헌한 것이다(BC 164). 안티오커스의 박해시절 어떤 한 유대인이 Napten(성전의 불)을 꺼뜨리지 않고 살려두었다가 마카비가 성전을 회복한 후에 그 불로 성전을 다시 밝히게 되었는데, 이날을 기념하는 것이 바로 수전절(The Day of Purification)이다.

 

마카비는 이후 시리아 사람들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끝까지 싸우려고 부딪혔다가, 유대인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전투에서 전사하지만 그의 투쟁은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얻게 하였다. 즉, 성전을 다시 회복함으로써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미카비에게는 요나단(BC 152-BC 142)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탁월한 외교 능력으로 유대 총독이 되었다. 총독이 된 요나단 마카비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대제사장에 임명하게 된다. 이에 대해 강력하게 항거하는 그룹이 형성되었으니 그 사람들이 곧 에세네파로, 지금도 사해 지역에 가면 이 에세네파의 유적을 만날 수 있다.

 

어쨌든 요나단 마카비는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가 결국 발라스라는 추종자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는데, 그로부터 정통 대제사장이 아니라 불법 대제사장 Line이 시작되었다. 그가 대제사장에스스로 임명될 당시 정통 대제사장의 계열인 사독 계열의 제사장 온니아스(Onias)가 존재해 있었다.

 

이후 잠시 동안이었지만 로마의 통치가 있기 전까지 성서의 땅에도 독립이 찾아왔는데 이 독립기간(BC 142-BC 63)을 헤스모니안이라고 일컫는다. 헤스모님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제사장 맛디아의 가족을 일컬었으나, 나중에 유대인의 독립시대를 말할 때 사용하였다.

 

유다 마카비의 마지막 동생이었던 시므온(BC 142- BC135)도 대제사장 겸 총독으로 취임했다. 취임 이후 시리아에 내분(Civil War)이 일어나 시리아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다 빠져나가자 이스라엘은 어부지리로 정치적 회복을 가져오게 되었다.

 

즉 이때부터 유대인의 자주시대가 도래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자주 시대는 BC 63년까지 계속 되었다. 즉 종교적 자유는 유다 마카비에 의해, 정치적 자유는 시므온 마카비에 의해서 이뤄지게 된 것이다.

 

이후 존 하이라카누스(John Hyracanus, BC 135-BC 104)가 시리아군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몰아내고 사마리아(Samaria)와 이두매(Idumea)를 통합하게 된다. 그는 이두매인들을 핍박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두 종파가 등장하게 된다. 즉 헬레니즘에 반대하였던 바리새파와 비교적 헬라적 성향이 강하였던 사두개파이다.

 

바리새파 중에는 핫시딤(마카비가 게릴라전을 벌일 때 마카비를 따라다녔던 경건한 사람들을 지칭)의 후손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강력한 민족주의자들로서 나라의 위신을 보존하고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려고 했다. 한편 사두개인(Sadducees)들은 자신들을 사독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대제사장으로로서의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게 된다.

 

그후 아리스토블루스 1세(BC 104-BC 103)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에 의하여 정식으로 갈릴리 지역이 점령되면서 이 지역이 유대땅으로 영입되게 된다. 이 갈릴리 지역은 원래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땅이었으나 바벨론 포로 이후 이방인의 땅이 되었다가 그에 의해 다시 회복된 것이다. 이 아리스토불루스 때부터 왕이란 칭호가 사용되게 된다. 아리스토불루스의 형제였던 알렉산더 야네스(BC 103-BC 76)가 그후 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때 독립시대 중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즉 다윗, 솔로몬 시대에 차지했었던 영역까지 되찾은 시기인 것이다. 알렉산더 야네스는 바리새파와 결별하고 사두개파와 손을 잡았다.

 

그후 그의 부인인 알렉산더 살로메(BC 76-BC 67)에 의해 정권이 장악되는데 그녀에게 있어서 한 가지 문제는 여자의 신분이므로 대제사장 직분을 계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더 살로메는 두 아들 하이라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 중 동생이었던 아리스토불루스 2세에게 대제사장 직분을 맡겼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더 유능했기 때문이었다. 이때가 바리새파가 제일 득세했던 시기였다.

 

장자였던 하이라카누스 2세가 축출을 당하고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권력을 장악하자 상대적으로 힘이 부족하였던 하이라카누스 2세는 로마의 폼페이 장군(Pompeyus BC 63)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결국 폼페이 장군이 군대를 일으켜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비로소 이때부터 로마의 점령시대가 시작되게 되는 것이다.

 

2-3. 로마 점령시기 (BC 63-AD135)

 

하이라카누스 2세의 요청에 의해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교활한 정치꾼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안티파타란 인물이다. 원래 이두매사람인 그는 하이라카누스 2세 편에 기생하며 이두매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이후 로마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로마 정권에 붙어 폼페이와 손을 잡고, 폼페이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다스리도록 도와주었다. 후에 시이저가 더 강해지자 시이저와도 손을 잡았다. 이후 안티파타의 아들인 헤롯 대왕(Herod the Great, BC 40-BC 4)이 로마사람들에 의해 유다 왕으로 등극하게 되는데 그는 아버지 못지 않게 교묘하게 유대 사람들에게 세금을 받아들이고, 로마 사람들에게 종을 바친 사람으로 유대 사람들에게는 악명 높았으나, 로마사람들에게는 충직하다고 알려졌다.

 

그는 산헤드린의 자격을 격하시켰는데 그 이유는 산헤드린의 구성 요인이 대개 사두개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산헤드린뿐만 아니라 대 제사장의 직분까지 격하시키면서 한편으론 바리새인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개축하는 일을 단행하게 되는데 많은 이들은 이를 오해하여 헤롯 대왕에 의해 성전이 다시 지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성전을 개축했으나 결국 완성엔 이르지 못하였다. 그는 성격이 난폭하고 잔인하며, 열 명 정도의 부인을 두었다고 알려졌는데, 그의 잔인성은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모두 살해하는 끔찍한 일도 스스럼없이 자행한 것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을 통하여 바로 이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서 그들에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신약과 구약의 중간기 동안을 침묵으로만 일관하지 않으셨고 성서의 땅에 메시아가 오실 수 있는 배경과 환경을 조성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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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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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시대

400년간의 침묵기

구약 최후의 예언자 말라기(BC 400경) 이후 예수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정경형성의 필수적 요건이 되는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히브리 정경을 한정하고 완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AD 1세기 말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 일은 아닥사스다 1세(BC 465-424년) 통치하에서 이루어졌다.

1. 중간시대의 사건

 

 

2. 중간시대의 중요성

이 400년 기간의 많은 중요 사건 가운데 구약의 헬라어(당시의 상용어, BC 280-150년경. 70인역으로 부름)번역이 되었다. 이 일로 히브리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에게만 국한되었던 구약의 진리가 그리스-로마 세계에 전달되었다.

 

  • 외경(Apocrypha)

외경은 구약 정경이 편집된 이후 구약과 신약 중간시대에 기록된 14권의 책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 외경서들은 구약 히브리 정경에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 책들은 70인역과 불가타역에 수록되어 구약과 신약 사이에 놓여졌다. 로마가톨릭교회는 14권 가운데 11권을 소위 '제2의 정경'으로 인정하여 AD 1546년 트렌트공의회에서 성경의 한 부분으로 선포하였다. 신교에서는 내.외적증거로 하여 이 책들의 정경적 지위를 부정한다. 이 외경서들은 유대인들이나 예수, 신약에 의해서 또한 그 증거를 객관적으로 조사한 교부들 중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결코 성경으로 인정된 일이 없다. 외경에 속한 책들을 열거,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 제1에스드라서 이 책은 에스라, 느헤미야와 역대하 정경과 동일한 역사적 소재를 담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에는 들어 있지 않은 광범위한 부분(3:1∼5:6)이 수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대체로 전설적인 이야기로 그 내용은 참 지혜를 확증하기 위해 다리오 왕정에서 세 사람의 유대인 시동(侍童)이 벌이는 경연으로 되어 있으며 스룹바벨이 승리자였다. 그는 상으로서 유대인의 송환과 예루살렘 재건을 왕명으로 허락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책은 BC 100년경에 기록되었다.
  • 제2에스드라서 이 책은 AD 100년경에 완성된 몇 편의 예언적 성격을 띤 묵식자품이다. 1∼2장은 유대인 에스라의 묵시 원문인 3∼14장에 첨가되는 반유대적인 부분이다. 3∼15장까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① 살랫디엘 묵시 : 3∼10장은 악의 문제와 이것의 내세에서의 해결을 취급하고 있다. ② 독수리 환상 : 11∼12장은 로마제국과 메시야 도래를 취급하고 있다. ③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인간(메시야)의 환상 : 13장, ④ 에스라가 어떻게 성문학을 재기록하였느나를 설명하는 전설 : 14장. ⑤ 마지막 15∼16장은 신약과의 어구적인 일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다소 뒤늦게 기록한 것으로 AD 270년으로 추정된다.
  • 토비트서 이 이야기는 BC 150년경에 기록된 종교소설이다. 이것은 앗수르에 이주되어 살고 있는 경건한 유대인 토비트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다. 토비트는 앗수르치하에서 살해된 자기 동족을 격식을 갖추어 장사지내다가 사고로 눈이 멀게 된다. 비통 중에도 토비트는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한다. 그리고 자기 아들 토비아스를 보내서 도움을 간구한다. 그리고 자기 아들 토비아스를 보내서 가바엘이라는 친척에게 예치해 둔 돈 전부(약 2만 달러)를 찾아오게 한다. 천사 라파엘이 믿을 만한 친족으로 가장하여 토비아스와 함께 간다. 그것은 눈 먼 토비트의 기도에 응답해 줄 뿐만 아니라 엑바타나에 사는 라구엘과 에드나의 딸 사라를 도와 주기 위해서였다. 악신 아스모데오의 시기로, 사라와 결혼했던 일곱 남편이 모두 결혼 첫날 밤에 차례로 살해되었던 것이다. 토비아스는 티크리스강가에서 야영을 하다가 물고기 염통과 간을 태워서 악신을 쫓아버리고는 사라와 결혼한다. 라파엘은 그 사이에 라구엘에게 달려가서 돈을 찾고, 니느웨에 있는 토비트와 그의 처 안나에게로 토비아스와 갓 결혼한 아내를 인도하여 돌아온다. 토비아스의 여행이 오래 지체됨으로 그들은 비통에 잠기게 되었으나 사랑하는 아들과 그의 신부를 맞이하여 기쁨으로 가득 찬다. 그 돈으로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라파엘의 지시대로 토비아스가 연로한 아버지의 눈에 물고기의 쓸개를 얹어 놓음으로써 토비트는 시력을 회복한다. 천사 라파엘은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사라진다.
  • 유딧서 이것 또한 교훈적인 가치가 있는 소설적인 이야기로 BC 2세기에 기록되었다. 유딧은 용모가 아름답고 경건한 유대인으로 베툴리아(세겜의 가명)의 과부이다. 유딧의 용기는 홀로페르네스 휘하 느부갓네살 침략군으로부터 그녀가 속한 도시를 구해낸다. 그 도시의 장로들이 5일 이내로 아무런 도움도 오지 않으면 항복하기로 결정하자, 유딧은 당당하게 그 도시를 떠나 홀로페르네스 진영으로 들어가서 자기의 미모와 언약을 통하여 장군을 현혹하였으며 마침내 그의 머리를 잘라, 자루에 담아 가지고 베툴리아로 돌아온다. 이 결과 그 도시의 수비대는 진격하게 되고 홀로페르네스의 대군은 잇따른 혼란 속에서 도망하다 파멸된다. 대제사장 요아킴(Joakim)과 장로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여걸 유딧을 칭송하기 위하여 베툴리아로 온다.
  • 에스더의 추가서 이것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며 본문 가운데 '하나님'이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야기속에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 준다. 70인역에서는 정경 에스더서에 삽입되었다.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 ① 모르드개의 꿈과 그가 왕에 대한 모반을 사전에 막는 이야기. 히브리 정경 제1장의 앞에 17절이 포함디어 있다. ② 왕국의 모든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라는 왕의 조서. 이 부분은 모든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려는 와의 조서. 이 부분은 히브리 본문 3:13에 이어진다. ③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기도. 히브리 정경 4장에 이어진다. ④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을 극적으로 알현함. 5장에 8절이 추가된다. ⑤ 하만의 처형과 유대인을 칭송하고 자위적 방비를 허락하는 왕의 조서. 정경 8:12에 이어진다. ⑥ 모르드개의 꿈 해석과 부림절의 의미에 대한 끝맺음말. 이 부분은 히브리 정경 에스더의 마지막 장에 이어진다
  • 솔로몬의 지혜서 이 책은 매우 매력적이고 흥미있는 외경서 가운데 하나로 BC 50년경에 기록되었다. 첫부분(1:1∼6:8)은 '종말서'라고 불리는데, 의인과 악인의 운명을 비교함으로써 비도덕성의 진상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부분(6:9∼11:1)은 솔로몬의 입에서 나오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지혜의 찬사이다. 셋째부분(11:2∼19:22)은 앞 부분들보다는 못한데, 이 부분은 애굽과 광야의 이스라엘을 역사적으로 회고하면서 우상숭배(13∼15장)의 기원과 악함을 거론하며 끝맺는다. 복합적인 이책은 기록자 불명이다.
  • 집회서 51장으로 된 이 책은 「호크마」 또는 히브리 지혜문서에 속한다. 이것은 외경 가운데 저자가 알려진 유일한 책이다. 그는 예루살렘 시락의 아들 예수(50:27)로 BC 175년경에 기록하였다. 그의 손자는 머리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BC 132년 히브리 원문을 헬라어로 번역하였다. 집회서의 전통적인 라틴어 명칭은 외경 가운데 '가장 뛰어난' '교회서' 임을 보여 주며 '금언'이 지닌 높은 도덕성과 영적인 성격, 초기시대 이래 그리스도인 들에게 널리 호평을 받았음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 마카베오상 수준 높은 역사, 문학작품. 이 책은 134년 모데인반란(BC 167년)에서 시므온 마카베오의 살해(BC 134년)까지 마카베오 일가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그 후임자에 맞서 싸우는 모데인의 마따디아 아들들, 즉 유다.요나단.요한.엘르아살과 시므온의 전율어린 용솟음치는 애국심이 전편에 흐르고 있다.
  • 마카베오하 이 책은 부분적으로 마카베오상과 동시대(BC 175-160년)의 기록이나, 역사적인 가치면에서는 그것보다 떨어진다. 그리스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저항운동이 다소 신화적인 찬사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구레네 사람 야손의 작품을 요약한 이야기라고 하나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 바룩 예레미야의 서기 바룩이 바벨론에서 기록한 것으로 공언되는 작품이다. 전반부(1:1∼3:8)는 산문체로, 후반부(3:9∼5:9)는 시가체로 기록되었으며, 이사야.예레미야.다니엘 및 기타 예언서와 흡사하다. 이 책은 포로시대 유대인들의 기도와 신앙고백을 담고 있으며 회복의 약속을 언급하고 있다.
  • 세 젊은이의 노래 정경 다니엘서에 추가되는 이 외경은 풀무불 이야기(단 3:23) 다음에 삽입되었다. 이 책은 아자리아의 감동적인 기도, 기적적인 구원의 기사와 세 젊은이가 합창으로 드리는 찬양시로 되어 있다.
  • 수산나 이야기 정경 다니엘서에 추가되는 또 하나의 외경으로, 정숙한 바벨론 부인 수산나가 어린 소년 다니엘의 지혜로 어떻게 조작된 간음혐의에서 벗어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헬라어 역본에서는 제1장 앞에, 라틴어 불가타역에서는 제13장에 기록되어 있다.
  • 벨과 용 이 전설적인 이야기는 우상숭배를 조롱할 의도로 기록되었다. 이 책은 다니엘서의 세 번째 추가 외경을 형성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상 벨 신상은 살아 있는 신이어서 매일 밤 그 곁에 차려진 엄청난 양의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고 생각되었다. 다니엘은 신전 바닥에 재를 흩뿌려 놓아서 제물을 정작 먹어 없애는 것은 벨신 제사장이라고 왕에게 증언한다. 그 즉시 왕은 벨 신상을 파괴하며 그 제사장들을 처형한다.
    또 하나의 전설은 바벨론에서 숭배되는 용의 이야기다. 용에게 경배하라고 소환된 다니엘은 역청과 머리털과 비계를 섞어 용에게 먹임으로써 용의 숭배를 타파시킨다. 격노한 백성들은 사자굴 속에 다니엘을 던져 넣으라고 왕에게 강요한다. 이 속에서 그는 유다에서 추수꾼들에게 음식을 가져가는 길에 천사에 의해서 머리털을 휘어잡혀 바벨론으로 옮겨진 예언자 하박국의 도움으로 엿새 동안을 먹고 지내게 된다. 7일째 되는 날 왕은 다니엘을 건져내고 그를 해치려던 자들을 굶주린 사자굴에 집어넣는다.
  • 므낫세의 기도 이것은 의도적으로 기록된 므낫세의 참회기도다. 그는 유다의 사악한 왕으로 앗수르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었다. 대하 33:19 이하에 삽입되었으며, 대체로 BC 1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 위경(Pseudepigrapha)

외경 이외에도 위경('허위문서')이라고 불리우는 문서들이 있다. 이것들은 BC 2001년∼AD 200년에 걸쳐 기록된 종교적인 작품으로 아담.에녹.노아.모세.스바냐.바룩가 같이 훌륭한 구약인물들이 저작자라고 허위 주장한다. 외경(로마가톨릭교회는 1권 가운데 11권을 정경으로 인정함)과는 달리 위경 문헌들은 한 번도 정경의 위치에 오른 적이 없다. 이 책들은 주로 묵시서, 교훈집, 전설적인 이야기들이다. 일부 중요한 책들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모세 승천서 대율법 작성자인 모세가 임종 직전에 여호수아에게 전달하고 위임했던 예언들이라고 주장된다. 이 책은 그 당시 바리새파가 점차 세속화함에 따라 한 바리새인이 AD 15년경에 기록한 항변서다.
  • 이사야 승천서 이 책은 세 부분, 즉 이사야의 순교, 이사야의 환상, 히스기야의 유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랫동안 사멸되었던 히스기야의 유언 부분(2:13∼4:18)은 사도시대 말기 그리스도교회의 영적 상황을 살펴보는 데 유용하다. 이사야의 환상(6:1∼9:40)은 1세기 삼위일체, 성육신, 부활과 천국에 관한 신앙을 조명해 보는 데 그 가치가 있다. 이사야의 순교는 여러 부분에 나뉘어 있다(1:1, 2, 6∼13; 2:1-8, 10; 3:12; 5:1-14). 이것은 악독한 므낫세에 의해 톱으로 켜서 갈기갈기 찢겨진 이사야의 죽음을 재현해 주고 있다.
  • 에녹서 이 책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장차올 심판에 대하여 노아와 에녹에게 임했던 묵시서라는 평을 받는 단편 작품이다. 저자 불명으로 BC 1, 2세기에 기록되었다.
  • 회년서 50년 주기(레 25:8-12)의 회년기로 세계역사를 구분하면서 이 작품(BC 153-105년)을 기록한 바리새인은 비도덕화하는 헬레니즘의 영향에서 유대교를 구해내기 위해 율법을 격찬하며 히브리 족장들의 우수함을 기록하였다.
  • 시빌신탁서 이 신탁서는 마카베오시대의 것이다. 제국의 몰락과 메시야시대의 도래를 취급하면서 헬라인 시빌의 예언담을 모방하였다. 원작 쿠매의 시빌은 에베소의 헤라클리투스(BC 500년)가 최초로 언급하였다.
  • 솔로몬의 시편 이것은 BC 1세기 중엽부터 내려오는 18편의 시편으로 되어 있다. 익명의 바리새인이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며 메시야의 도래를 이야기하고 있다.
  • 십이족장 예언서 이 12유언서는 창세기 49장에 시사된 바와 같이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유언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의 자료는 BC 2세기 초에 이루어졌으나 대체로 책의 형성은 AD 250년 이후로 보고 있다.

 

  • 탈굼(Targums)

탈굼은 히브리성경을 후일 포로 후기시대팔레스타인의 일상용어가 되었던 아람어로 자유롭게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초기에 구전되었다가 히브리성경으로 읽혀졌으며 아람어 번역본에 이르게 되었다. 최초에 기록된 탈굼, 즉 온켈로스의 모세오경이나 요나단의 예언서 등은 그리스도 시대에 기록된 것이다.

 

  • 탈무드(Talmud)

이것은 모세 율법을 기초로 한 히브리 기본법과 민법의 모체다. 이는 BC 300년에서 AD 500년에 이르는 랍비사상의 결정체다. 탈무드('교훈')는 「미쉬나」, 즉 모세의 성문법 그 자체에서 연유한 전통 구전 율법과 「게마라」, 즉 이러한 전통적인 율법에 대한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게마라에는 아람어가 사용되어 있다. 탈무드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은 미드라쉬로서 이는 초기 회당에서 히브리 구약성경을 상세히 해설했던 히브리어 및 아람어 설교였다. 이 미드라시는 BC 100년-AD 300년에 성행하였다.

 

  • 회당(Synagogue)

회당(헬라어 「시나고게」<'모임'>은 최초 바벨론 포로시대의 가정(겔 8:1; 20:1-3)에서 기원된 것이 분명하다. 가정에서 모였던 초기 그리스도교회와 같이 이 '가정 회당'은 포로시대 이후 점차로 발전되어 교육과 공중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공식 회합이 되었다. 이 회합은 성전 예배를 대신하게 되었는데, 팔레스타인 밖에 멀리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에게는 성전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BC 300년∼AD 300년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에는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정착된 도시마다 율법과 예언서를 가르치며 예배를 드리는 회당(눅 4:16-30)을 세웠다. 이 회당에는 히브리성경이 안치 되어 있었다. 그리고 회당은 그리스도복음이 전파된 최초의 장소 중 하나였다(행 13:5, 14:14:1). 로마 통치시대에 유대인들은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회당은 그들의 일반적인 집회 장소였다.

 

  • 산헤드린(Sanhedrin)

산헤드린은 재판권을 가지고 있는 귀인의 집단으로 그 기원은 정확히 여호사밧 왕 시대로부터 유래되었음이 틀림없다(대하 19:5-11). 그것은 유대인의 국가 최고법정으로 발전하였고, 예루살렘이 멸망(AD 70년)하기까지 사회와 종교 분야의 일들을 처리하였다. 대(大)회당으로 알려져 있는 에스라-느헤미야시대(BC 450년-400년)의 공의회가 일반 전통에 반영되어 BC 250년경 대제사장을 의장으로 70명 회원의 산헤드린(헬라어「시네드리온」의 아람어의 형태 '함께 앉음. 회의')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추측된다.

 

  • 바리새파(Pharisees)

요한 히르카누스(BC 134-104년) 통치하의 마카베오시대에 유대교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와 같은 파당이 형성되었다. 바리새파는 대체로 하시됨('경건한 자들')의 계승자들로 BC 168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유대교 금지 당시에도 율법을 진실하게 지켰던 자들이다. 이들은 기도와 회개, 구제를 표어로 내걸었던 엄격한 율법 고수주의자들이었다. 마카베오 수난의 시련 가운데에서도 경이로운 출발을 보였던 이들은 점차 퇴폐하여 예수시대에는 유명무실하고 파렴치한 종교주의자들로 변하였다.

 

  • 사두개파(Sadducees)

솔로몬 당시 제사장 사독(왕상 2:35) 일파로 여겨지는 사두개파는 대개 귀족적이며 세속화된 제사장들로 구성되었고 문자적인 율법에 충실하였으며, 부활과 장차의 심판을 부인하였다. 이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이며 호전적인 책략과 교묘한 수완으로 세속적인 영달을 꾀하였다. 이들과 바리새파의 분열로 하스모네가 왕조가 몰락되었고 그 후에도 그들간의 격심한 알력은 예수 당시까지 계속되었다.

 

  • 서시관과 에세네파(Scribes and Essenes)

서기관들과 성경 필사본자로서 모세율법에 정통하였던 까닭에 율법학자라고도 불렸다. 성경 중간사시대에 이들의 영향력은 증대되어 예수 당시 괄목할 만한 모습을 나타내었다.

에세네파는 바리새파나 사두개파와 같은 파당이라기보다는 금욕적인 분파였다. 1947년 사해 두루마리가 발견되기까지는 피로.요세푸스.폴리니우스 등이 이 공동수도회에 대한 사실을 제공하는 유일한 출처였다. 사해북동 해안 쿰란에서 동일하지는 않으나 유사한 집단의 그 본부를 발굴하게 됨으로써 지금은 그들에 대해 더욱 잘알게 되어었다. 그들의 규율과 의식이 기록된 책을 발견하게 되어 고대 자료들에 대한 확증과 BC 200년∼AD70년사이의 유대교 분파에 대한 지식을 더해 주었다.

 

  • 헬라어 신약성경의 형성 여건

성경 중간시대의 헬라어 방언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사업으로 헬레니즘 세계의 공용어가 되었다. 이 공용어는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쳐 마침내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70인역)하기에 이르렀다. 이 번역은 신약성경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 이 번역본을 통하여 초기 기독교의 성경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헬라 학문과 문화, 로마법과 도로망, 유대 유일신교와 회당(후자는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고 인하여 확산됨) 그리고 유대인들의 묵시적인 메시야 소망 등이 그리스도의 강림과 기독교를 위해 세상을 준비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오랜 중간시대 동안에 하나님의 섭리는 어디서나 찾을 수 있었다. 그 정점은 구약에서 자주 예언되었던 대망의 메시야, 즉 세상의 구세주의 성육신의 탄생이었다. 앞서 전개된 세계의 모든 역사, 특히 유대 역사는 이 위대한 사건의 조짐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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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신학/신구약중간사

 

 

신구약중간사

신구약중간사 | 역사신학/신구약중간사

항공모함 2010. 9. 24. 08:09

http://blog.daum.net/esjk8030/7379405?category=560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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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중간사

 

구약성서에 대한 연구가 다각적으로 진행되면서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구분은 점차 모호해졌습니다. 이제 신구약 중간사라는 개념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구약 중간사라는 제목으로 이 특집을 개진하는 이유는, 교회 내에서 신약성서의 배경 역사를 지칭하는 의미로 신구약 중간사라는 용어가 이미 사용되고 있어, 그에 따른 혼동을 줄여보자는 의도에서입니다. 신약성서의 배경 역사는 바로 유대교의 역사로서, 신약성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이 시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에서 풀려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때부터 서기 70년경의 유다전쟁까지로 한정하였고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신구약 중간사란?


1. 신구약 중간사라면 언제부터 언제까지의 역사인가?

구약시대가 끝나고 신약시대가 시작되기까지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사라 할 때, 그 시기의 이스라엘 역사를 신구약 중간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를 구약시대로 보고 어디서부터 신약시대가 시작되는가 하는 데에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릅니다. 유다인들이 마지막 예언자라 생각하는 말라기 예언자 시대 이후(기원전 460년)부터 예수 그리스도 탄생까지를 신구약 중간사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구약성서의 마지막 부분인 마카베오 하권이 완성된 이후(기원전 160년 이후)부터 사도 시대까지를 신구약 중간기라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 대한 여러 방면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구약성서 중 많은 책들은 바빌론 유배 시절 이후(기원전 538년) 오랜 기간에 걸쳐 수집. 재편집되거나 새로 씌어졌고, 12소예언자 중 다수 예언자들의 활동도 계속 이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형성된, 구약성서의 그리스어역본인 70인역까지 생각한다면 신구약 중간사는 모호해지거나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신약성서에서 만나게 되는 생소한 단어와 표현들로 인해 품게 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이며, 그리스도교에 대한 더 깊은 이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신구약 중간사에 대한 개념과 시기의 결정에 대해서는 유보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구약 중간사라는 명칭으로 이것을 개진하는 이유는 이미 교회 내에 신약성서의 배경 역사를 가리키는 의미로 신구약 중간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에 혼란을 줄이자는 의도에서입니다.

우선, 신약성서 배경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유대교의 탄생을 거론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서는 유배 이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야겠지요. 신약성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유다교, 그리고 오늘날의 유다교 역시 이 시기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2. 유다교는 그때 시작된 게 아니고 우리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 때부터 있어온 종교가 아닌가요?

물론 넓은 의미에서 유다교라고 하면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등 족장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4천여 년에 걸친 유다민족의 종교현상 전부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보면 유다교는 바빌론 유배 이후에 비로소 뿌리를 내려서 오늘에 이른다고 할 수 있지요. 이렇게 유다교라는 종교사조가 부상하면서 이제 ‘이스라엘다운’ 이스라엘의 역사는 일단락 되었고 유다교의 역사로 탈바꿈하여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제로 끝난 것이 아니라 유다교와 유다인들을 통해 지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성서를 정독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유다인이라는 단어나 개념이 구약성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반면, 신약성서에서는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이는 바빌론 유배 이후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내외적으로 새로운 요인이 들어와 ‘유다인’ 즉, 유다 지파 출신들이 두드러지게 등장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새로운 요인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나요?

다윗 왕국의 몰락과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유다인들에게 단순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민족의 구심점이 없어져버린 것이었지요.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끊임없이 주변 강대국들의 침입과 지배가 이어졌고, 그들로부터 정치적, 종교적 자치권을 획득하려는 유다인들의 투쟁과 노력이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민족과 종교에 대한 동질성과 정체성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새로운 요인이란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파생된 복합적인 것들이지요.

 

4. 유다를 지배한 강대국들로는 어떤 나라들이 있었나요?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관심 있는 이라면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에 이어서 유다 왕국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에게 패망하여 바빌론으로 유배 갔었다는 것은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이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켜 유다인들은 고레스 황제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고레스는 이듬해 칙령을 내려 바빌론에 유배 와서 살고 있던 유다인들에게 귀향과 파괴된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처는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배척보다는 유다인의 민족성을 보존하고 장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유다지파, 즉 유다인들이 두드러지게 등장하게 됩니다.


5. 귀환 이후에는 유다인들을 통솔하는 지도자가 따로 있었습니까?

당시 단체로는 산헤드린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이란 유배시기 이후에 생긴 유다인의 최고회의인데 대사제를 포함한 71명의 원로들로 구성되었지요. 이것은 정부 의회의 기능을 지니면서 동시에 고등법원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산헤드린의 결정은 법적인 효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모든 종교적인 문제들과 율법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을 다루었고, 대제사장의 권한을 견제하는 역할도 수행하였습니다. 또한 페르시아 제국은 유다인을 팔레스티나 지역의 책임자인 총독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즈루빠벨, 느헤미야, 에즈라가 그 대표적 인물이지요. 그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즈루빠벨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하여(기원전 515년 3월) 다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하였고, 느헤미야율법준수와 이방인과의 결혼 금지를 명하여 순수혈통과 전통계보에 대해 강조하였습니다. 이어 제관이요, 율사인 에즈라가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세의 법전을 가지고 와서 본격적으로 율법을 가르쳤고, 그 역시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엄하게 다스려 이방인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내보내도록 명했어요.

이스라엘을 율법 중심의 공동체로 만든 이는 바로 에즈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아무리 그렇다고 이미 한 결혼을 파기할 만큼 순수혈통이 중요한 것이었나요?

그것은 이스라엘의 선민(選民)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기에 이방인들과는 엄연히 구분된 특별한 민족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사상은 바로 종교적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유다인들의 절대절명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패망 이후 이방민족과의 혼합으로 유명무실해져 버린 북왕국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그들은 굳이 분리를 고집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다인들의 인식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지요.

이스라엘 민족은 정결한 백성, 이방인들은 죄인이라는 인식은 신약성서에서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마태 5,46-47; 5,7; 18,17; 사도 2,23). 우리는 역사 속에서 유다인과 다른 민족들 간에 생긴 골 깊은 적대 의식을 찾아 볼 수 있고, 오늘날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이런 모습들을 접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악순환은 에즈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7. 그렇다면 사마리아인은 순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었나요?

이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출신들로서 바빌론 유배 기간동안 유다 인접지역에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인과 이방인의 혼혈민족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이 그들을 곱게 볼 수 없었던 것은 혼혈 그 자체라기보다 혼혈이 계기가 되어 이루어진 종교의 혼탁성 때문입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과 자신들이 이스라엘 후손임을 주장하는 사마리아 사람들 간에는 심각한 긴장 상태가 조성되었지요.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철저히 배척했고 사마리아인들은 유다인들의 예루살렘 성전복구를 방해했습니다.

이때부터 골 깊은 대립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 노예보다도 한 단계 낮춰 취급할 정도이며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은 유다인들 사이에 지독한 욕으로 통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민족적인 증오심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한 이웃사랑의 계명은 이런 배경을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요.


8. 페르시아 제국 다음으로 누가 팔레스티나를 지배했나요?

그 다음에 팔레스티나를 점령한(기원전 332년) 이는 마케도니아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이 시대에도 유다인들은 페르시아 지배하에서 누렸던 종교적인 자유를 그대로 누릴 수 있었지만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는 동부 지중해변에서부터 인도까지 자신이 정복하는 곳마다 그 헬레니즘 문화를 퍼뜨린 장본인이었습니다. 그후 알렉산더 대왕이 열병으로 사망하자 그 유언에 의해 영토는 막료장군들에게 나누어졌습니다. 그래서 팔레스티나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서게 되었고(기원전 323년),시리아에는 셀류코스 왕조가 서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에 대한 호의적인 상황과 헬레니즘 문화의 지속적인 영향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팔레스티나를 점령하게 된 시리아의 셀류코스 왕조 안티오쿠스 3세 지배하에서도 그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인에 대한 호의적인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9. 그렇다면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얘긴 가요?

안티오쿠스 3세가 로마와 전쟁을 벌여 참담하게 패하면서 그 호의적인 상황은 달라졌던 겁니다. 오늘날 미화 3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전쟁 배상금 5천 달란트를 로마 측에 지불해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채우기 위해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재산을 강제 압류했습니다. 그의 왕위를 이은 셀류코스 4세, 안티오쿠스 4세도 같은 방법을 사용하였지요.

아니, 오히려 더 심했다고 하는 표현이 어울릴 것입니다. 성전의 보물들을 약탈하고 인두세, 제왕세, 성전세와 같은 유다인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으며 세금을 납부하지 못하는 개인이나 마을 전체를 노예로 팔아 넘기기도 하고, 방화와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그리고 칙령을 발표하여 시리아의 법과 관습을 추종하게 하고, 그리스 신과 여신들을 숭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10. 그 당시 팔레스티나의 상황은 어떠하였나요?

유다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따르면, 지도층인 유다 제사장들은 제사장직을 소홀히 할뿐만 아니라 그리스식 경기장에서 세속적인 쾌락에 탐닉하였다고 합니다. 이제 성전 뜰은 술꾼들의 숙소가 되었고 성전에서는 유다인들이 보기에 불경스러운 이방 의식들이 행해졌습니다(1마카 1,44-50 참조). 또한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 3세의 동생인 요수아라는 인물은 형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왕의 마음에 들기 위해 그리스식 이름인 야손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대제사장직을 차지하는 조건으로 거액의 돈을 지불하여 대제사장직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통치자의 헬레니즘화 정책 추진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하겠다는 메넬리우스라는 자가 나타나 야손은 불과 3년만에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제사장직을 돈으로 사고 파는 행위까지도 거침없이 자행되었습니다. 셀류코스의 역대 왕들은, 이러한 대제사장들의 묵인 하에 유다인들을 박해하고 성전의 재산들을 약탈해갔습니다. 심지어 성전 전면에 붙여진 금박까지도 벗겨가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이런 반역의 모습들을 친일파 지도자들의 행위에서 볼 수 있지요. 헬레니즘 문화와 종교를 강요하는 통치자들은 팔레스티나 곳곳에 그리스식 경기장, 신전, 대중목욕탕을 세웠고, 유다인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금하고 할례를 행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한 떼의 돼지를 성전에 몰아넣고, 제우스 신에게 헌납된 제단 위에 돼지고기를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지요.


11. 유다인들은 그런 상황을 그냥 보고만 있었나요?

유다인들의 반응이 획일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부류는 헬레니즘화를 선호하고 받아들인 이들로서 왕의 칙령에 흔쾌히 호응하여 동참하였고, 또 한 부류는 자의든 타의든 스스로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신앙을 버리고 할 수 없이 그들을 따라갔고, 나머지 한 부류의 사람들은 추종을 강하게 거부하고 율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이들이었습니다. 마카베오서에는 이 마지막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꺾이지 않고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스라엘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부정한 것을 먹어서 몸을 더럽히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달게 받기로 결심하였고, 사실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다”(1마카 1,62-63).

이렇게 저항하는 이들에게 취해진 것은 전대미문의 박해였지요. 아기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사람들은 가족들과 함께 사형 당했고, 부정한 음식에 손대기를 거절한 많은 이들은 죽임을 당했으며, 그 외 여러 이유로 잔인한 고문을 당하여 죽어간 이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구약성서 중에 유일하게 묵시문학으로 분류되는 다니엘서는 바로 이렇게 안티오쿠스 박해가 한창일 때 엮어진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박해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신앙공동체의 결속과 반발이 더 심해진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지요. 드디어 일부 유다인들에 의해 무장봉기가 일어난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저자는 바로 이 무장봉기에 참여했던 하시딤파에 속한 사람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12. 그러면 하시딤파가 무장봉기를 일으켰나요?

하시딤파가 무장봉기를 처음 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무장봉기에 대해서는 요세푸스의 저술과 마카베오 상하권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맨 처음 하스모네 일가인 제사장 가문의 우두머리 마따디아에 의해 촉발되었고 후에 하시딤파 사람들과 합류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우선 하시딤파에 대해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하시딤’이라는 말은 ‘경건한 자들’ ‘율법에 충실한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종파는 여러 단체들의 필요에 따라서 형성된 하나의 공동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필요란 바로 헬레니즘 문화와 종교를 강요하는 이들에 대하여 타협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종교금지와 박해에서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였거나 그런 조치로 위협을 받았던 자들로 이루어진 숙명적인 결합체였습니다.

종말론적인 사상을 물려받았던 이들도 여기에 소속되어 있었고, 엄격하게 율법에 충실하려는 자들도 이 종파에 소속되어 있었지요. 이러한 복합적인 성격은 다니엘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시딤파 사람들은 호전적인 정치 집단이 아니라 종교를 우선으로 여기는 경건주의자들이지요. 이후에 등장하게 되는 바리사이파 에쎄네파라는 종파는 바로 하시딤에서 나왔답니다.

 

13. 하스모네 일가 사람들은 어떤 연유로 민중봉기를 일으켰나요?

앞에서 민중봉기를 촉발한 이가 하스모네 일가의 마따디아라는 사람이라고 했던 걸 기억할 것입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제사장 마따디아가 살고 있는 모데인이라는 마을에 악명 높은 칙령이 내려지면서 시작됩니다. 이 칙령을 선포하기 위해 마을에 도착한 관리는, 원로인 마따디아가 이방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는 데 앞장서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그는 이 명령을 단호히 거절했고, 이를 따르려는 한 유다인을 죽이고 그 관리마저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아들 다섯과 그를 따르는 열성적인 사람들을 데리고 어느 구릉지대로 피신을 했고 그곳에서 하시딤파 사람들을 만나 그들 모두는 함께 싸울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들의 규모가 매우 작았으나 점점 그 수효가 늘었습니다. 마카베오 상권에서는 그들의 활동상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군대를 조직하여 죄인들과 율법을 어긴 자들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리고 그들을 쳐부수었다. 이때 살아남은 적군들은 이방인들에게 도망쳐 가 피난처를 얻었다. 마따디아와 그의 동지들은 이교제단을 찾아다니면서 모두 헐어버리고 또 이스라엘 땅에 사는 어린이로서 할례를 받지 않은 아이들을 찾아내어 강제로 할례를 받게 하고 교만한 자들을 쫓아내었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왕의 손에서 율법을 구해내었고 죄인들에게 승리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2,44-48)라고 말합니다.

 

14. 그러면 마따디아 편이 이겼나요?

아직은 초반전에 불과합니다. 사태의 추이를 더 지켜보기로 하지요. 그들은 율법에 대한 열성만큼이나 열심히 싸웠고, 안식일에 적이 공격해올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대응하여 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봉기를 주도한 마따디아는 봉기 2-3개월만에 심한 과로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요한,시몬,유다,엘르아잘,요나단이라는 다섯 명의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임종 전에 셋째아들인 유다에게 자신의 영도권을 물려주었지요.

유다는 마카베오(쇠망치라는 뜻)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무모하리 만치 용감하였고, 영도력이 뛰어나 그 동안 산발적이었던 모든 게릴라 부대를 자신의 지휘하에 일원화시켰습니다. 결국 그는 이 유다인의 무장봉기를 전면적인 독립전쟁으로 전환시켜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전쟁의 이름을 그의 별명을 따라 ‘마카베오 항쟁’이라 부릅니다. 유다가 이끄는 이 게릴라 부대는 셀류코스 군대를 철저히 격파시켰고 다시 새로운 제단을 세워 성전이 모독된 달로부터 꼭 3년이 되는 기원전 164년 12월에 성전을 다시 봉헌하였습니다. 그후 유다인들은 이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해마다 ‘하누카’(봉헌이라는 뜻)축제를 지내게 되었지요.

 

15. 그렇다면 유다인들은 완전히 독립한 건가요?

종교적으로는 자유를 얻었다 할 수 있겠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렇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유다(마카베오)가 죽고 난 후 동생인 요나단이, 다시 그 형 시몬이 뒤를 이었으나 여전히 셀류코스 왕조의 간섭을 받는 상태에서 서로 밀고 밀리는 싸움은 계속되었지요.

또한 그들과 평화협상을 맺기도 했고, 셀류코스 왕은 하스모네 일가가 예루살렘에서 세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태가 시몬의 아들 유다와 요한이 셀류코스 군대를 대파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이 승전으로 인해 유다인들은 완전한 독립을 쟁취했다고 할 수 있지요. 거의 30년 동안이나 걸린 기나긴 과정이었습니다. 그 동안 하스모네 일가는 유다인들의 실제적 통치자 역할을 해왔습니다.

요나단은 독립군 사령관직에 만족하지 않고, 다윗 시대 이후 대대로 사독 가문이 맡아해 온 대제사장직까지 겸직하는 과욕을 부렸지요. 물론 셀류코스 왕조 쪽에서 수락하는 방법으로 말합니다. 그의 뒤를 이은 시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민중봉기 처음의 정신과는 달리 셀류코스 왕조를 섬기며, 유다인들에게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보하려고 고심하는 전략가로 변질돼버린 것입니다. 결국 마카베오 전쟁은 유다인들에게 독립이 아닌 하스모네 일가의 통치시대만을 등장시켰을 뿐이지요.

 

16. 유다인들의 반발이 심하지 않았나요? 처음 민중봉기에 합세했던 하시딤파는 어떻게 되었나요?

요나단과 시몬이 대제사장직까지 독식하고 정치적인 방향으로만 흐르자, 하시딤파 사람들은 점차 그들이 하는 일에서 관심을 잃고 손을 떼게 되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위해 모였던 하시딤파 사람들은 모이기 전에 자신들이 지녔던 고유한 특성대로 분리되었습니다. 여기서 생겨난 종파가 바리사이파와 에쎄네파이지요. 이때 이미 사두가이파가 있었으니 유다교 내에서 각기 다른 견해를 가진 세 개의 종파가 존재하게 된 셈이지요. 이들 세 종파는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보호하고 결국은 구원으로 이끌어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오직 율법의 권위 하에서 살아 갈 것을 다짐하고 있었지만, 하느님의 구원이 어떻게 실현되는가 하는 데 있어서는 각기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7. 그 견해들이 어떻게 달랐나요? 그리고 각 종파들에 대해 좀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어요.

우선 사두가이파에 대해 알아보죠.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기존의 귀족들과 예루살렘에서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는 고위 제사장들 그리고 부유한 재산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실리적인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현재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부류의 통치자건 상관없이 타협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숭상하고 하스모네 왕가 및 후에 등장하는 로마 정권과도 결탁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교란 상태나 변혁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기득권 층이 바라는 바와 다를 바 없었지요. 후에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를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여 배격한 것도 바로 변혁을 두려워했던 이유에서였습니다. 율법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상당히 보수적이었습니다. 단지 모세에게서 비롯된 율법, 즉 모세오경의 권위만을 인정하고 구전된 율법의 계율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죠.

또한 부활, 천사, 사후의 상벌문제, 묵시론적인 사변과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니 합법적인 성전기구의 감독 하에서 제사를 엄숙하게 드리는 것 그리고 의식과 제물봉헌에 관한 규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그들의 최대 관심사였지요. 이런 이유로 해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18.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어떤 이들이었기에 사두가이파와 적대관계가 되었나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철저히 배격하였다는 점에서 사두가이파와 구분됩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데 있어 어떤 종파보다도 지나치리만큼 엄격했지요. 그러나 사두가이파 사람들처럼 모세의 율법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구전된 율법을 그대로 전승하며 발전시켜나갔습니다. 후에 이것은 미쉬나로 편찬되었고, 결국에는 탈무드로 집대성되었습니다. 잠깐 미쉬나와 탈무드에 대해서 설명하면, 기원전 3백 년부터 서기 5백 년까지 유다교 랍비들에 의해 구두로 전해져 구전율법을 탈무드라고 하는데 중심 본문은 미쉬나, 이 본문의 몇 배 분량의 주석 부분은 게마라라고 합니다. 탈무드는 유다인의 종교 및 모든 생활 전반에 관한 가르침인데 성문율법인 구약성서와 함께 바리사이파에 의해 주도된 전통 유다교의 경전이라고 합니다. 바리사이파들은 사두가이파와 달리 부활신앙, 사후의 상벌, 천사와 같이 새로 도입된 개념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다른 점은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상류층에 속한 이들이라면 바리사이파는 주로 평신도들이었지요. 그러나 이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고, 도덕적으로 성실하였으므로 백성들로부터 선망과 존경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실제로 유다교를 이끌어 가는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후에 율법의 틀에 매여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모순을 야기시켰기에 예수께로부터 질책을 받았습니다.

 

19. 율법학자(랍비)들과 바리사이파는 동일한 사람들을 가리키는가요?

둘은 명확히 구분되는 말입니다. 단지 바리사이파 지도자들이 율법학자들이었고 많은 율법학자들이 바리사이파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런 오해가 생기기도 하지요.

당시 사두가이파 율법학자와 같은, 바리사이파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율법학자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사이파 구성원들을 보면, 소수의 율법학자와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상층계급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 외 대다수는 평민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라고 모두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그들은 비록 율법에 대한 지식은 없었다 할지라도 율법에 헌신적인 사람들로서 바리사이파적인 정결례와 십일조 의무를 철저히 지키는 이들이었으며, 이러한 규정을 지키지 않는 대다수의 민중들을 업신여겼습니다. 그와 같은 율법학자들의 허영심과 명예욕 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은 예수께로부터 맹렬히 비난을 받았지요.

 

20. 에쎄네파는 어떠했습니까?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기록들이 전해 내려오지만, 에쎄네파에 대한 기록은 얼마 전까지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1947년 이후 사해 근처 동굴에서 ‘꿈란 문헌’들이 발견되면서 에쎄네파에 대한 상당 부분들이 밝혀지기 시작했지요. 앞에서 언급한 하시딤파에 대한 내용과 대제사장직까지 독식한 요나단의 과욕은 에쎄네파의 출현과 관계가 있습니다. 에쎄네파의 지도자는 단지 ‘의로운 스승’이라는 별명만으로 전해지지만, 대대로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를 맡아 드려왔던 사독계열의 대제사장 출신이었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시딤파 일원으로 민중봉기에 참여했지만 요나단이 사독계열 가문도 아니면서 대제사장직을 차지한 것을 인정할 수 없어 극한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반발은 통치자의 가혹한 박해로 이루어졌지요. 결국 에쎄네파의 지도자는 박해를 피해 소수의 추종자를 데리고 사해 근처 꿈란으로 삶의 자리를 옮겨 은둔생활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들을 두고 ‘꿈란 수도자’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에쎄네파 사람들은 바리사이파보다 더 엄격히 율법을 지켰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세상과 분리된 채 극히 제한된 교류만을 유지했습니다. 묵시문학적인 종말론, 율법중심의 근본주의, 선민주의적 배타의식, 이런 점들이 당시 에쎄네파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특성이라 할 수 있지요.


21. 에쎄네파는 신앙적인 면에서도 다른 종파와 달리 특이했겠네요.

그들은 임박한 종말사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곧 종말전쟁이 일어나 미카엘이 조종하는 빛의 아들들과 벨리알이 조종하는 어둠의 아들들이 서로 치열하게 싸우게 되고 그 결과는 예정되어 있지 않지만 만일 빛의 아들들이 이긴다면 메시아를 모시고 종말잔치를 벌이게 될 것이라는, 이런 상상에 끊임없이 젖어 있었던 것이지요.

에쎄네파 사람들은 요나단 일파를 사악한 무리로 보고 그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을 사악한 도시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를 떠나 사막 한가운데 임박한 종말을 준비하게 된 것이지요. 원래 제관들이 지켜야 하는 정결례까지 철저하게 지켰던 이들은 율법과 수도원 규범에 충실한 자신들이야말로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 공동체’ 라고 인식했고, 종말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종말사상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성행했던 묵시문학의 일종이었습니다.

또한 자기종파의 사람들만이 선민이라 생각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철저하리 만치 배타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에쎄네파의 신심은 신약성서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22. 묵시문학은 그 무렵에 등장한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종말론을‘묵시’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여러 상황에 대한 심리가 그대로 표현된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성서에 수록되어 있는 묵시문학은 다니엘서와 요한 묵시록, 이렇게 두 권을 들 수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사야서 24-27장,34장, 즈가리야서 9-14장도 묵시문학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정경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에녹의 묵시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묵시문학의 특징은 이원론적 경향을 뚜렷이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지금 자신들이 겪고 있는 사건은 하느님과 사탄, 빛과 어둠이 벌이는 우주적 투쟁이 반영된 것이고, 죄악으로 더렵혀진 이 세상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 심판이야말로 머지않아, 하느님께서 친히 강림하시는 날 이루어지며, 그날 사탄의 무리들은 벌을 받게 되고 그분이 친히 선택하신 이들은 구원된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묵시문학의 표현은 오늘날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다소 엉뚱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 당시 유다인들의 절실한 신앙 표현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해 나가시며, 역사의 종말인 심판의 날에 엄정한 판결을 내리시고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종말론적 희망을 간직해 나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묵시적인 요소들이 오늘날에도 위급하고 불안한 상황이 재현될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 유행처럼 번지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23.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에쎄네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나요?

사실 유다인들 모두가 이 세 종파 중 어느 하나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세 종파가 유독 드러나 보였기에 유다인들 전부가 이들 중 한군데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낳게 됩니다. 세 종파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주로 무지한 시골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지 않았으며,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암 하렛즈’(땅의 백성이라는 뜻)라 불리며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 ‘땅의 백성’들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족보를 중요하게 여기는 순수 유다 혈통을 가진 이들이 있는가 하면, 천한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출생이 불분명한 사생아들, 도둑질을 하다 잡혀 노예가 되었거나 스스로 자신을 팔아 노예가 된 이들 그리고 개종자들이나 해방된 노예들, 그리고 이방인이면서 해방된 노예들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엄격한 위계 사회에서 억압과 불이익을 당했던 이들입니다. 세 종파에 속하지 않은 이들로 암 하렛즈라고 불리는 사람들 말고도 팔레스티나 지역이 아닌 외국에서 살고 있는 유다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들의 공동체를 두고 ‘디아스포라’(분산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나름대로 율법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에 5십만에서 7십만 정도의 유다인이 살고 있었던 반면, 디아스포라를 형성하여 살던 해외 유다인 수 는 2백만에서 5백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24. 이들은 이민을 자청해서 간 사람들인가요?

현재 일본과 사할린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교포들과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계속 정복당하면서 강제로 추방되거나 통치국에 포로로 잡혀간 이들 그리고 살길을 찾아 자청해서 본토를 떠난 이들이 모여 공동체를 하나 둘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후 일부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대다수는 그곳에 남아서 살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지역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엘레판틴 지역이 있지요. 이들은 대부분 해당 지역의 주민들과 동화되어 살기보다 자신들만의 율법을 지키며, 민족과 종교의 고유성을 고수하려 하였기에 그들로부터 미움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원래 유배 초기부터 이 해외 유다인들에게는 함께 율법을 읽고

기도를 바치는 모임 장소인 회당이 있었는데, 그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다인들에 의해서 팔레스티나에도 그런 회당들이 생겨났습니다. 사도행전 6장 9절에는 이 회당에 대한 언급이 잠깐 나옵니다. 회당은 바로 유배시기에 생긴 유다인의 독특한 신앙형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인들은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 ‘70인역’이라는 성서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72명 역자들이 각기 구약성서를 그 리스어로 번역하였는데 완료 후에 비교해보니 한 자도 다르지 않았다는 유명한 전설이 있지요. 그래서 70인역이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25. 당시 팔레스티나 여성들은 이런 민중봉기나 종교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나요?

공개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며 전쟁을 수행하고 평화를 지키는 공적인 삶은 순전히 남자들만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여성들은 단지 집을 지키고 규방에 유폐된 성(性)적인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여성들은 집밖을 나갈 때 반드시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나가야 했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까지 남성들의 수치로 여겨졌을 정도였지요.

경제적인 능력만 갖추고 있다면 일부다처가 허용되었고, 이혼을 요구할 권리는 남성 쪽에만 있었습니다.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과 여성의 뜰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여성들에게는 이곳에만 출입이 허용되었을 정도여서 종교적인 활동과 의무에서도 여성은 심한 제약을 받았던 것이지요. 후에 있었던 일이지만 예수의 여성관과 결혼관은 이스라엘 역사상 유래 없는 것이었습니다.

 

26. 마따디아, 유다 마카베오, 요나단, 시몬으로 이어진 하스모네 일가의 통치는 그후 어떻게 되었나요?

위에서 하스모네 일가의 시몬과 그의 두 아들이 셀류코스 왕조의 군대를 대파하여, 독립을 얻었다는 이야기까지 했었지요. 그후 시몬이 그의 사위에게 피살되자(기원전 134년),아들 아리스토불로 1세가 그 자리를 맡게 되면서 비로소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다음 왕위는 계속하여 동생, 그 아내, 동생의 큰아들, 둘째아들로 이어졌고, 대부분 왕위에 앉은 이들은 대제사장까지 겸직하였습니다. 기원전 64년에 로마 제국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시리아를 속주로 만들고 팔레스티나도 시리아 속주에 포함시켰지요. 이제 이스라엘 역사에서 로마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팔레스티나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면서 하스모네 왕가는 몰락하게 되고 헤로데 가문이 통치하게 됩니다. 신약성서에서 만나게 되는 헤로데도 바로 이때에 등장한 인물이고, 세리니 호구조사니 하는 용어들도 이 시대에 등장한 것들이지요.

 

27. 헤로데 가문은 유다 출신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되었나요?

그들은 이두매 출신이었습니다. 이두매인이란 유다 왕국 남쪽에 인접한 에돔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하스모네 왕가의 요한 히르카누스 치세 때(기원전 134-104년) 유다에 합병되면서 거의 유다 백성의 일부로 간주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순수 유다인이 아닌 ‘반쪽 유다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에서 실세로 등장할 즈음 헤로데의 아버지 안티파텔은 로마에 아부함으로써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지요. 당시 로마도 내란으로 어수선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통치자가 바뀔 때마다 안티파텔은 적절한 충성심을 보여 계속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황제 케사르에게서조차 로마시민권을 받았고, 총독으로 임명되었지요. 안티파텔은 이제 모든 정치적 영향력을 동원하여 로마의 편에 서서 공개적으로 팔레스티나에서 그들의 입지를 강화시켜나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두 아들 중 파사엘에게 유다와 베레아 지역의 통치권을, 헤로데에게 갈릴래아 지역의 통치권을 넘겨주었습니다. 그의 두 아들도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지요. 오히려 헤로데의 경우는 누구보다도 더욱 악독하게 로마의 정책을 앞장서서 수행해나갔습니다.

유다인들의 반발은 있었지만 자신의 정적을 가치없이 숙청, 살해하는 헤로데의 폭정 앞에서 그들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해나가기 위해 마사다와 같은 요새 건설과 식민시설 설치, 예루살렘 성전을 증축하면서 그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무자비하게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의 분노는 점점 높아져 극에 달할 수밖에요. 결국 안티파텔은 암살 당했으나 헤로데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어 그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고, 로마 제국의 원로원으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의 왕’이라는 존칭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헤로데 가문에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이 헤로데밖에 없었습니다.


28. 위의 헤로데가 바로 신약성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헤로데인가요?

신약성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헤로데는 바로 이 사람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잡아들였던 헤로데(마태 14,1-12; 마르 6,14-29; 루가 3,1-20), 예수를 심문했던 헤로데(루가 23,7-15)가 바로 헤로데 대왕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이지요. 헤로데 대왕이 죽으면서(기원전 4년) 그의 세 아들에게 모든 것을 상속해 주었는데, 아르켈라오에게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헤로데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필립보에게는 대부분의 북동부 지역을 물려주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복형제들이었습니다.

어쨌든, 아르켈라오는 십 년도 못되어 로마로부터 파면 당하고, 필립보는 서기 34년에 죽었으며, 헤로데 안티파스도 39년에 파직 당하여 모든 영지는 로마 총독 관할로 귀속되었습니다. 서기 41년부터 44년까지 헤로데 가문 출신 헤로데 아그리빠 1세(아르켈라오 아들)가 통치한 적도 있었지만 그 외는 로마인들이 팔레스티나를 직접 통치(서기 6-41년, 44-66년)했습니다.

 

29. 로마가 직접 통치하면서 달라진 점은 어떤 것이었나요?

로마 제국은 우선 세제 개혁을 목적으로 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주민의 수효와 그들의 자산 상태를 정확히 조사함으로써 세금을 확실하게 징수하겠다는 게 통치자의 의도인 동시에, 민족 전체를 얽어매어 통치하려는 기초작업이었습니다. 루가 복음 2장 1-7절에서는 예수의 탄생이 이 호구조사 때 이루어졌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에서 처음으로 호구 조사를 실시한 시기는 서기 6-7년경이고 예수는 헤로데 대왕의 치세 때(기원전 37-4년)에 태어난 것으로 미루어 호구조사와 예수의 탄생은 무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호구조사는 유다인들을 분노케 했고 호구조사에 따른 세금 정책과 징수를 맡은 세리들도 유다인들에게 혐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런 모습을 우리는 신약성서에서 자주 볼 수 있지요.

 

30. 유다인들의 분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었나요?

이것은 마카베오 항쟁에서 유다인들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다시 한번 유다인들의 민족주의적 감정에 불을 질렀습니다. 열혈당원(Zealots)의 출현은 그 대표적인 시발이라고 할 수 있지요. 출발은 이렇습니다. 호구조사에 의해 12세(또는 14세)부터 65세까지의 주민은 관할지역에 한 데나리온을 바쳐야 한다는 인두세 정책이 발표되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거부하고 나서서 바리사이파 사람 사독과 함께 동지들을 모아 열혈당을 조직했고, 공개적으로 투쟁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황제의 모습이 새겨진 은화 데나리온을 세금으로 바치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하느님만이 유일한 이스라엘의 통치자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들의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열혈당원들은 율법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과도 타협을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다져진 이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에게 긍정적이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폭력으로 대항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인들과 로마인들에게 굴복하는 유다인들이 열혈당원의 공격 대상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단도나 칼을 차고 다니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예수의 제자 시몬도 열혈당원이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31. 그러면 열혈당원의 사상은 이전에 마카베오 항쟁을 일으킨 마카베오일가의 사상과 비슷했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열혈당원들은 앞으로 하느님 통치 외에는 그 어떤 세상의 통치도 없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을 마지막 날 이 세상을 심판할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현재는 하느님의 진노와 채찍만이 있는 마지막 시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열혈당원들은 어느 누구와도 타협할 수 없었고 특히 로마에게는 맹세코 저항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여기서, 세상의 통치자들과 타협할 수도 있다고 인식한 마카베오 일가의 봉기와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열혈당원들은 위세에 몰렸을 때 과감히 자결을 할 수도 있었지요. 이들이 지닌 사상은 지극히 종말론적이고 묵시문학적이었습니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유다 전쟁에서도 열혈당원들은 주축이 되었답니다.

 

32. 그 유명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이어진 전쟁 말이군요. 어떻게 해서 처음 시작되었나요?

서기 66년에 플로루스 총독이 무자비하게 백성들을 착취하고 이에 반항하는 유다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에 처하자 그 동안 쌓였던 유다인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그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타올라 이젠 타협도 불가능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의 궁궐, 로마 사령관이 거주하는 안토니우스 성은 모두 불에 탔고, 로마의 보병대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유다인들에 의해 학살당하였습니다. 열혈당원들은 마사다 요새와 헤로디온 요새를 점령하였고, 후에 역사가로서 저서를 남겨 우리에게 그 시대의 사건들을 전해준 요세푸스도 당시 혈열당의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 네로는 상황이 긴박함을 알고 베스파시우스 장군에게 이 반역자들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로마군에 의해 대부분 쉽게 함락되었지만 예루살렘은 그리 만만치 않았지요.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과 합류하지 않고 베레아와 펠라로 피신한 상태였고, 바리사이파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서편 지중해 연안에 있는 얌니아로 피했으며 그곳에서 집회를 열며 상황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 서기 70년 6월, 안토니오 성 함락, 같은 해 9월에 예루살렘 성전도 함락되어 성전은 불타버렸습니다. 사해서안에 위치한 천연 요새 마사다에서는 열혈당원들이 서기 74년까지 치열하게 항거하다 끝내 모두 자결함으로써 이 유다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33. 그러면 이제 유다교 아니 이스라엘 역사는 끝나버린건가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유다 전쟁으로 열혈당원, 사두가이파, 에쎄네파는 모두 소멸되고 바리사이파만이 남았습니다. 유다인들은, 현상 유지만을 고집했던 사두가이파도, 호전적인 민족주의자들의 종말론적인 호기도 모두 꿈에 불과한 것임을 자각하게 되었지요. 이제 유다교는 종말론적인 사상에 매어 마냥 누군가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한길 바로 바리사이파가 강조한 율법 중심의 공동체만 이 자신들이 가야 할 길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유다인의 입장에서 구약을 바로 탈무드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과는 다른 점이지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막을 내렸고, 구약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였음이 증명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는 모두 한 분이신 같은 하느님을 숭배하고 동일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의 역사는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에게서, 또한 새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자각하며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말입니다.

 

34. 신약의 배경이 되는 이 초기 유다교의 역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구약과 신약성서의 무대는 지중해 연안의 근동 지역이라는 같은 장소이지만 사회적, 종교적 배경은 서로 다릅니다. 귀환 이후 유다교가 제 꼴을 갖추면서 신약의 분위기는 구약에 비해 사뭇 달라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기는 신약성서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이 시기 동안 중동은 세 차례나 판도가 바뀌었고 새로운 문화들이 출현하였습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산헤드린의 원로들을 만나고, 여러 종파들을 만나고, 세리를 만나고, 예수께서 회당에서 구약성서를 읽거나 기도하시는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시절에 팔레스티나는 유다와 사마리아, 갈릴래아로 나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전혀 구약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것이기에 놀람과 의문으로 신약을 일게 됩니다. 이 시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소중한 시기입니다.

 

신약성서 배경 역사에 관련된 각 시대별 자료모음

 

신약성서 배경 역사를, 유다인들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서기 70년경 유다 전쟁 때까지로 한정지어본다면 이 기간은 다음과 같이 세 시대로 구분해볼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 시대(기원전 538-333년),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33-63년), 로마시대(기원전 63-서기 70년경).

평소에 접할 기회가 흔치 않은,신약성서 배경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각각의 시대에 관련된 지도와 자료를 여기에 시대별로 모아 봅니다.

 

[1]페르시아 시대

☞ 주요 사건 일람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는 칙령을 내려 바빌론 유배중인 유다인들에게 귀향을 허락하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명함(2역대 36,22-23; 에즈 1,1-5 참조).

 

 

기원전 520년부터 515년까지. 예루살렘 성전 재건(즈루빠벨 총독과 여호수아 대제관의 활약이 큼). 이 시기에 예언자 하깨, 즈가리야가 활동.

 

기원전 445년. 느헤미야 총독이 예루살렘에 와 성벽 재건(1차 체류). 432년에는 안식일법 준수, 혼종혼 금지 등을 명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법질서를 바로잡음(2차 체류)

 

기원전 458? 428? 398?년. 에즈라가 아르닥사싸 황실 비서.제관.율사로서,1천 5백여 명의 이스라엘 동포와 함께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에서 귀환하여 번제를 바치고 (에즈 8장 참조)

모세의 법전을 읽으며 풀이하고 초막절을 지내게 함(느헤 8,1-18 참조)

 

기원전 350년경, 욥기,시편,요나,에즈라,느헤미야 등의 완성.

 

☞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

순서

연대

내용

파괴 및 파손

솔로몬의 성전건축

기원전

968

-

961년

솔로몬이 최초의 성전을 아브라함이 제사를 지냈다는 예루살렘 동쪽 모리야산에 세웠다. 그는 이 성전 건축을 위해 다윗이 준비해둔 자재 외에도 레바논으로부터 목재를 구입했고, 띠로 왕 히람이 보낸 건축기술자와 이스라엘 인부들을 동원하였다. 이 성전은 완성된 후 이스라엘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원전 587년바빌론 느브갓네살왕에 의해 파괴됨.

즈루빠벨의 성전 재건 (1차)

기원전

520?

-

516년

바빌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유다인들에게 귀향을 허락하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명했다. 당시 유다인들의 지도자였던 즈루빠벨은 옛 예루살렘 성전에 비해 규모가 매우 축소된 것이긴 했지만, 옛 성전 자리라고 짐작되는 곳에 성전을 재건하였다. 그렇지만 성전 안에 계약의 궤를 안치하지는 못했다 (2마카 2장).

기원전 169년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에 의해 파손됨.

마카베오의 성전 보수

기원전 164년

마따디아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는 파손된 성전을 보수했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다시 파손됨.

헤로데의 성전 재건 (2차)

기원전 20년경 시작

헤로데는 파손된 성전을 모두 헐고 새로운 양식으로 엄청나게 확장하여 다시 짓기 시작했다. 또한 성전 둘레에 거대한 장벽을 둘러쌓았다. 오늘날 이중 일부가 보존되어 ‘통곡의 벽’이라 불린다. 그러나 이 재건 작업은 예수 시대에도 완성되지 않았다(마르 13,2 참조). 역사가들에 의하면, 서기 64년경 헤로데 아그리빠 2세 때에 완성되었는데 매우 화려하고 웅장했다고 한다.

유다 전쟁이 있었던 서기 66-70년경에 폐허가 됨.

♣ 그후 남아 있는 성전터에는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주피터 신전을 지었고(서기 135년),

아랍인들에 의해 회교 대사원이 지어지기도 했으며(서기 687-691년),십자군에 의해 ‘주의 성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뒤 아랍인들에 의해 예루살렘이 다시 정복되면서 회교 사원으로 개조된 후 지금까지 이 지역은 이슬람교도들의 성지가 되었다.

[2]헬레니즘 시대

☞ 주요 꿈란 문헌들

 

1QS(수도원 규칙서)

지원자, 계약 갱신 축제, 선한 신령과 악한 신령 식별, 서열과 질서, 벌칙.

1QS(이스라엘 규칙서)

종말에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규범, 메시아 잔치에 관한 규법이 인상적이다(2,11-22).

1QM(종말 전쟁기)

종말에 20년간 치르게 될 전쟁과 전술을 다룬다. 이때 빛의 아들들은 미카엘과 선한 신령들의 지원을 받고, 어둠의 아들들은 벨리알과 악한 신령들의 지원을 받는다. 전쟁은 물론 전자의 승리로 끝난다.

IQH(시가)

시인은 자신의 곤경과 하느님의 구원을 서술하고, 깨달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을 간구하거나 섭리에 의탁하기도 한다. 시가 중에는 어떤 위대한 스승이 작시한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도 있다(예컨대 7,6-25).

11QPs(시편집성)

정경 시편 41편, 외경 시편 7편이 수록되어 있다.

1Q GenAp(창세기 전설)

노아의 탄생에서부터 창세기 15장 4절까지를 재미있는 이야기 형태로 엮었다.

1Qp Hab

(하바꾹 주석)

하바꾹 예언서 1-2장을 한 단원씩 해설했는데 꿈란 공동체 설립 과정과 관련된 해설이 있어 매우 중요하다. 사악한 제관과 그 동료 제관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혔다. 그래서 성서에 정통한 ‘의로운 스승’을 모시고 물러갔다고 한다.

4Qp Ps37

(시편 37주석)

시편 37장에서는 의인과 악인의 운명을 다룬다. 학자들은 의인을 ‘의로운 스승’과 동일시하고 악인을 ‘사악한 제관’과 동일시한다.

11Qt Job(아람어 욥)

히브리어로 욥을 당시 일상어인 아람어로 옮긴 것이다.

RT(성전 두루마리)

이상적인 성전 설계,성전 축제 규정,정결례,재판규정,가족법 형법 등 매우 다양한 내용이 들어 있다.

CD (다마스커스 문헌)

수도원 규칙서와는 달리,다마스커스 문헌에서는 결혼과 사유 재산을 허락한다. 그러므로 이 문헌은 도시나 마을에서 가정생활을 하면서 꿈란 수도원의 이념에 동조하는,광의의 에쎄네파를 상대로 씌어졌을 것이다.

☞ 기원전 190-41년 사이의 팔레스티나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

‘종교적’지도자들

(대사제들)

‘정치적’지도자들

(마카베오 가문과 하스모네 왕조)

셀류코스 왕조

오니아스 3세(190-174)

야손(174-171)

메넬라오스(171-164)

알키모스(164-159)

대사제직 공석(159-150)

마따디아(166년 사망)

유다(166-160)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175-164)

안티오쿠스 5세

유파톨(164-162)

데메드리우스 1세

소테르(162-150)

알렉산더 발라스(150-145)

데메드리우스 2세

니카토르(145-138)

안티오쿠스 6세

디오니시우스(145-142)

안티오쿠스 7세

시데테스(138-128)

데메드리우스 2세

니카토르(128-125)

기원전 63년부터 로마가

팔레스티나를 지배함.

요나단(160-143)

요나단(150-143); 대사제 겸 민족지도자

시몬(143-134); 142년부터 134년까지 대사제

요한히르카누스(134-104); 대사제 겸 민족지도자

아리스토불루스 1세(104-103); 대사제 겸 왕

알렉산더 얀네우스(103-76); 대사제 겸 왕

히르카누스2세(76-69);대사제

살로메 알렉산드라(76-69);여왕

아리스토불루스 2세(69-63) (대사제 겸 왕)

히르카누스 2세(63-41) (대사제 겸 왕)

 

 

※ 로마시대의 팔레스티나

☞ 헤로데 대왕:

기원전 40년경에 유다․이두매․베레아․갈릴래아 지방을 포함한 하스모네왕조의 영토를 로마로부터 얻어내어 유다의 왕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왕위를 안정시키고자 하스모네 가의 주도적 인물들과 자신의 혈족들을 과감히 살해하는가 하면, 문화적인 부흥을 위해서는 성전 건축과 그 외 헬레니즘적인 건축물들을 건설하여 예루살렘을 화려하고 위엄 있는 도시로 만들어놓기도 했다. 그에게는 10명의 아내에게서 얻은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사후 세 아들에게 영토가 분할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예수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베들레헴의 유아 대량학살 사건을 지시한 장본인이었다.

 

☞ 헤로데 안티파스:

헤로데 대왕의 아들로 기원전 4년에 갈릴래아와 베레아의 영주가 되었다. 이 헤로데가 신약성서에서 예수에 의해‘여우’라 불리어졌고 (루가 13,32) 이복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재혼한 인물로서 세례자 요한을 참수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일곱 도시를 건설하여 요새화하고 그중 하나인 티베리아를 새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서기 39년경에 아그리빠 1세의 득세로 파면되어 오늘날의 리용으로 유배를 가서 생애를 마쳤다.

☞ 헤로데 아그리빠:

서기 37년경 로마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고 글라우디우스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헌한 대가로 유다․이두매․사마리아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유다교의 율법을 철저히 시행하였으며, 유다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박해했다.(사도 12,3 참조). 6년간의 통치 후 그는 가이사리아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이 시기에 씌어진 문헌들 - 예루살렘 귀환에서 유다 전쟁까지

[1] 성서

(1) 페르시아 시대에 씌어진 것

하깨, 즈가리야, 이사야 40-50장, 말라기, 요엘, 역대기 상하, 에즈라, 느헤미야, 룻기, 요나, 잠언, 욥기, 시편, 아가.

 

(2) 헬레니즘 시대에 씌어진 것

바룩, 전도서, 토비트, 집회서, 다니엘, 유딧서, 에스델, 마카베오 상하, 지혜서.

 

[2] 외경

(1) 묵시문학류

* 에디오피아어 에녹서(The Ethiopic Book of Enoch): 기원전 170-46년경에 씌어진 이 문서는 외경 중 가장 중요한 문서의 하나로 꼽힌다. 일관된 사상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독립된 문서를 모아 편집한 것으로, 신약성서에서처럼 메시아를 ‘사람의 아들’ ‘선택된 자’라고 칭하며, 메시아에 의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이야기하고 있다.

 

* 슬라브어 에녹서(The Slavonic Book of Enoch): 이것은 초대교회에서 널리 인용된 흔적이 있으며, 내용은 에디오피아어 에녹서와 비슷하다. 저작 연대는 기원전 30년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 모세 승천기(The Assumption of Moses): 이 책은 서기 1-30년경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임종이 가까워진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식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안티오쿠스의 박해, 하스모네 왕가의 통치, 헤로데의 통치 등에 대해 서 언급하고 있다.

 

* 무녀의 신탁(Sibylline Oracles): 이 책은 기원전 140년경부터 기록되기 시작하여 약 400년간에 걸쳐 전수된 것들로, 내용은 집필 당시의 역사적 사건들과 관련이 있으며, 전체적으로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열망하는 종교적 역사관을 보여주고 있다.

 

(2) 교훈설화문학류

* 희년서 또는 소 창세기(The Book of Jubilees): 일명 ‘요벨의 책’이라고도 불리는 이 책은 기원전 1세기를 전후로 하여 씌어졌다. 내용은 창세기에서 출애굽기 12장까지에 대한 유다교적 해설이다. 저자는 유다교의 역사관에 입각해서 이른바 구세사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The Book of Adam and Eve): 서기 70년 이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에는 창세기에 없는 내용들이 많이 실려 있다.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상당히 많은 부분이 삽입되고 첨가되었다고 한다.

 

* 열두 족장의 유언집(Testaments of Twelve Partriarchs): 이 책은 야곱의 아들인 열두 지파 족장의 유언을 모은 것으로, 창세기 49장 1절부터 27절까지의 야곱의 유언과 비슷한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기원전 140-110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마카베오 3서(The Third Book of Maccabees): 기원전 25-24년경에 씌어진 이 책은 마카베오 상하권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마카베오 전쟁 이전에 일어난 유다인박해 이야기로, 전체적으로 허구적인 내용이 많은 책이다.

* 마카베오 4서(The Fourth Book of Maccabees): 서기 1세기경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은 제2경전인 마카베오 후서 6장 18절부터 7장 42절에 실려 있는 율사 엘르아잘과 그 밖의 사람들의 비참한 순교설화로 엮어진 설교풍의 교훈적 작품이다.

 

* 아리스테아 편지(The Letter of Aristeas):이 편지는 70인역이라고 불리는 구약성서 그리스어 역의 기원에 관한 전설을 엮은 것으로, 기원전 145-100년경에 씌어진 이 편지의 목적은 유다인의 율법이 그리스인의 지혜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 이사야의 순교(The Martyrdom of Isaiah): 기원전 1세기초에 씌어진 이 책에는 히즈키야 왕 치세 때 이사야가 자신의 순교를 예언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히브리인의 미드라쉬 유형으로서, 저자는 외국 신화의 영향을 받은 에쎄네파의 한 사람으로 추측되고 있다.

 

(3) 시문학류

* 솔로몬의 시편(The Psalms of Solomon): 이 책은 외경 가운데서 유일한 시편이며, 바리사이적 입장에서 씌어진 18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기원전 63-40년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추측된다.

 

* 위의 외경에 대한 문학적 분류와 저작연대는 학자마다 작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외에도 많은 외경 문헌들이 있으나 서기 70년(유다전쟁)이후에 씌어진 것들은 제외시켰음.

 

[3] 꿈란 문헌 → 앞의 도표 참조.

 

 

[4] 성서 번역본

70인역(LXX;Septuaginta):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2세기 사이에 씌어진 70인역은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는 그리스어 구약성서를 통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여기에는 히브리어 구약성서와는 달리 ‘제2경전’이라 불리는 7권의 성서가 더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예수 시대에 주로 사용된 성서라는 점이 중요하다. 예수뿐만 아니라 당시 사도들과 교회 공동체는 이 성서를 주로 사용했다고 추측된다. 이는 신약성서에 인용된 구약성서가 70인역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그리고 70인역은 알렉산드리아 유다인의 신학적․ 윤리적 입장을 이해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가 되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이의 공백을 메워주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문화사적, 역사학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5] 요세푸스의 역사서

*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서기 37-38년경 예루살렘의 유력한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그리고 에쎄네파에 각각 일정 기간 몸담으면서 그들의 사상에 대해 정통하게 되었으며, 19세 때에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바리사이파에서 공적인 생활을 시작했다. 유다인들의 폭동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그들에게 자제할 것을 충고했으나 결국 그들과 함께 이 전쟁에 참여했다가 로마에 투항하게 된다. 이후 요세푸스는 자신의 이름을 황제 가문의 이름을 따라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라 개명되었고, 황제로부터 로마의 시민권과 자유를 얻고 여러 가지 특혜를 누렸다. 그는 황제의 명에 따라 유다의 역사 외에도 여러 저서를 남겼다. 그의 저서들은 예수의 탄생 이전 세기와 그리스도교의 제1세기 동안에 걸친 팔레스티나와 디아스포라의 유다교 역사를 보다 넓게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아래 저서들은 서기 1세기말에 발간되었지만 신약성서 배경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이다.

 

(1) 유다 전쟁사:

안티오쿠스 4세 때부터 예루살렘의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사건을 기록한 일곱 권의 책으로, 유다인들의 불행은 결국 혁명당원들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하여 야기된 것이라는 점을 로마의 관점에서 밝히려고 했다.

 

(2) 유다 고대사:

전20권 중 처음 10권에서는 창조에서 바빌론 유배기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했다. 특히 15권에서 17권까지 에서는 헤로데의 통치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했고, 마지막 3권은 유다 전쟁의 발발까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3) 아피온 반박:

두 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유다이즘을 옹호하는 변증서라 할 수 있는데 유다인들의 전통적인 풍습과 오랜 역사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4) 자 서 전:

이 책은 갈릴래아에서의 옛 일을 회상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갈릴래아 전투와 관련하여 자신의 행위를 비난하는 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6]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기원전 20/15년경-서기 50년경)의 저술

필로는 그리스 문학에 조예가 깊은 알렉산드리아 출신 디아스포라 유다인 철학자로서 생애의 대부분을 관상적 생활과 저작활동에 바쳤다. 그는(우주의 창조에 관하여), (율법의 비유적 해설)등 모세오경 해설을 중심으로 한 저서 36권을 남겼다.

그의 사상은 히브리 사상과 그리스 사상을 조화시킨 것이었으며, 훗날 신플라톤주의, 영지주의, 초대교회 교부들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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