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혼, 육신의 상관 관계
1.영(spirit)
영(spirit)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신약성경에 [프뉴마]라는 말이 370회 정도 나오는 데 그 중 대부분(260회 가량)은 하나님의 영(성령, 예수 그리스도의 영 포함)을 가리키고 있고, 사람의 영을 의미하는 것은 55회, 악령(귀신)이나 천사를 의미하는 것도 50회 가까히 됩니다. (정확한 분류는 쉽지 않음)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사람의 영인 고로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 [프뉴마]를 살펴본즉, [영](24회), [신령](18회), [마음](8회) 등으로 번역되어 있고, 그 외에도 [영혼], [정신], [기운], [바람]으로 한 번씩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프뉴마의 종류로는 성결의 영(롬1:4), 혼미의 영(롬11:8), 온유의 영(갈6:1), 거짓의 영(요일 4:6) 등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프뉴마의 속성으로는 살과 뼈가 없으며(눅24:39), 사람 속을 드나들 수 있으며(눅8:55), 몸과는 별도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으며(고전 5:3-4), 기도할 수 있고(고전14:14), 찬미할 수 있고(고전 14:15), 축복할 수 있고(고전 14:16), 예언하고(고전 14:32), 계시하고(엡1:17), 갈급해 하기도 하고(행18:25), 소원하고(마26:41), 기뻐하고(눅1:47), 강해지기도 하고(눅1:80), 피곤해지기도 하고(고후2:13), 더럽혀지기도 (고후7:1)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영이 혼과 혼돈될 우려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둘의 속성이나 하는 일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영이나 혼이나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2분설을 말하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습니다.
그러나 만일 같다면 바울이 "영과 혼과 몸이 주 예수의 강림하시기 까지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한다"(살전 5:23)는 식으로 각각 분리하여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예리한 칼로 비유하면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는 말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같은 것이라면 결코 찔러 쪼갤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과 혼뿐만 아니라 육체(flesh)도 사실 욕구하고, 희로애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 혼. 몸이 하는 일이 같거나 비슷하니까 모두를 하나의 통일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엄연히 몸이 죽어도 몸을 떠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통일체라면 떠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본래 인간에게는 영은 없는 것인데 성령을 받고 나서부터 영이 있게 된다고도 말하지만 성령과 인간의 영은 엄연히 구분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 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
다만 인간은 태어날 때 부터 영은 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죽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을 사랑하면서 온갖 육욕을 따라 사는 삶을 살아는 가되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예배하고, 순종하고, 헌신하는 등)이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너희를 ..."(엡2:1)
그러다가 성령이 오셔서 빛을 주시고, 깨닫게 하시므로써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의 거듭남, 곧 영의 구원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이 거듭났다고 해서 동시에 혼이 거듭난 것은 아니며 몸 역시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그 증거가 영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이 참되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여전히 불신자 시절과 똑 같은 분노가 나오고 욕심도 생기고 미움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도 혼이 구원받지 못한 증거입니다.
또 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몸으로는 병이들고, 넘어지고 깨지고, 늙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전혀 하나님의 아들다운 면이 보이질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몸으로는 아직 구원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이 살았으면 혼이 살아야 되는 것이고, 혼이 살면 몸이 또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과 성령을 따라 삶으로써 그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2.혼(soul)
'혼'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헬라어 신약성경에서는 [푸쉬케]란 말이 106회 정도 나오는데 영어(킹제임스)로는 soul(63회), life(38회), heart(3회), mind(2회) 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 말이 한국어로는 목숨(37회), 영혼(25회), 생명(11회), 마음(14회), 사람(4회), 뜻(2), 혼(2회), 영(2회), 수(2회) 등과 이외 "저" ,"누구", "심령", "생물" 등으로 각각 한 번씩 번역이 되었습니다.(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음)
그러므로 [푸쉬케]는 한국어 성경대로 하자면 [목숨]이라고 해야 합당하겠으나 영어의 [soul] 을 보편적으로 [혼]으로 번역하는 일반 사례들이 많기 때문에 신학자들도 성경에서는 겨우 2번 밖에 나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혼]이라는 표현을 쓴 것 같습니다.
성경과 신학이 상통하지를 못하고 따로 논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도 어쩔 수 없이 이미 잘 알려진 [혼]이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혼(soul)은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몸을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행20:10에 보면 유두고가 창문에 걸터앉아 말씀을 듣다가 떨어졌을 때 바울이 내려가서 "떠들지 말라. 생명(푸쉬케)이 저에게 있다"고 합니다. 생명이 있다는 말은 몸의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즉 숨을 쉬고, 걷고 달리고, 하는 모든 동작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혼(푸쉬케)이란 몸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혼이 없으면 사람은 금방 물질(시체)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든 동물들도 이것이 떠나면 흙덩어리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생령(네페쉬카야)이 된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네페쉬카야]가 영어 성경으로는 living soul 즉 [생혼](우리 성경에서는 '생령'으로 되어 있으나 오역임)인데, 그것이 바로 고전 15장 45절에서 "첫 사람 아담은 living soul (우리 성경에서는 산 영으로 되어 있어서 이것 역시 오역임. 생혼이라고 해야함.) 이 되었다 함과 같이"라 하여 인간은 애초에 흙덩어리에 불과한 존재였으나 하나님께서 숨(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써 [생혼]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로 이 [네페쉬카야]라는 단어는 각종 생물들을 일컫는데도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동물들에게도 [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혼(푸쉬케)은 몸을 움직이는 힘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것을 감안하여 우리 성경에서는 목숨.생명, 등으로 번역한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는 혼은 감정(느낌)과 의지와 결단, 또는 생각등을 일으키는 기능이라고 하겠습니다. (마12:18, 요12:27, 눅1:46, 막14:34, 골3:23.)
흔히 말하는 지.정.의를 가리킨다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성경에서는 마음, 뜻으로 번역한 것 같습니다.
(참고로 개인 의견을 말씀드린다면 원어는 통일된 개념을 만들어서 가급적 그대로 번역해주어야지 문맥이나 당시 문화 등을 지나치게 고려하여 의역을 해버리면 성경이 시대를 따라가는 사태가 되어 고유한 진리성을 훼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시대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시대를 초월해야 하는 진리이므로 번역 당시의 문화에 연연하지 말고 기록당시의 원뜻을 살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푸쉬케가 복음서에서는 대개 목숨, 생명 등으로 원뜻을 살려 번역이 되었으나 사도행전에서는 '저' '수' '사람' '누구' '뜻' 등으로 지나치게 의역한 것을 보면서 혼란스러워지기도 하고 원뜻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되는 것입니다.)
혼은 이처럼 희.로.애.락 등의 인간 정서와 사고, 결단과 같은 인간의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고 있는 '자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혼은 성경에서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파란색 단어는 모두 푸쉬케임)
언젠가는 육신을 떠나게 되는 존재이다;
"오늘밤 네 영혼을 찾으리니..."(눅 12:20)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려져 혼 이 떠나니..."(행5:5)
그러므로 육신은 죽어도 혼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음부나 지옥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10:28, 행2:27))
혼은 더럽거나 깨끗하거나 할 수 있다;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혼 을 깨끗케..."(벧전1:22)
혼은 더럽혀질 수 있으며 진리를 순종함으로 깨끗해 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혼은 미혹을 받을 수 있다;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 을 구원하며..."(약5:20)
여기서 말하는 미혹한 자라는 것은 이미 믿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믿을지라도 혼이 나약하거나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미혹되어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혼은 계속 구원을 받아야할 대상입니다;
" 믿음의 결국 곧 영혼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
"오직 영혼 을 구원할 바 믿음을 가진 자로다."(히10:39)
여기서도 혼은 구원의 대상임을 밝히고 있는데 불신자의 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의 혼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번 믿고 세례받았다고 해서 혼이 완전히 다 구원을 받았다면 이런 말씀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혼이 구원을 받아야 된다고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화를 냅니다. 셩경을 가지고 말을 해도 화를 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혼이 구원을 받았다면 진리 앞에서 화를 낼 수가 없습니다. "정말, 그런가?"라며 진지한 태도를 취할 것입니다.
오래된 신자라도 여전히 어린아이 같이 시기가 많고 다툴려고 하고, 자기만 알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세상 풍조를 벗어버리지 못했다면 아직 구원을 받아야 할 혼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다 가기 전에 빨리 자신의 혼을 구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어찌 입을 수 있다고 장담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비록 옛 사람의 성품을 가지고 살았다 할찌라도 죽자마자 금방 성화가 되어서 천국에 가서 변화된 모습으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이른바 <순간 성화론>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성화되기 위해 힘쓸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누릴 것 다 누리고, 즐길 것 다 즐기면서 살지요. 그런데 성경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나요?
그렇게 세상에서는 마귀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세상을 서방처럼 모시고 살았는데...천국에 가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시켜서 살게 하실까요?
착각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더 이상 성령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변화될 수 있는 기회는 없습니다. 살아 있을 때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셨고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혼이 가지고 있는 지.정.의 중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의지'라는 것입니다. 혼은 자결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으며, 순종과 불순종을 선택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 <영(spirit)을 따라 살것인가, 육체(flesh) 를 따라 살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혼의 역할이 참으로 귀중합니다. 그러므로 혼은 어느 누구의 말처럼 파쇄시켜야할 대상이 아니라 정화시켜야 할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의 정화(성화)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복입니다. 파쇄시켜야 할 대상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육체(flesh)> 입니다.
우리 모두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혼이 변화되어 주님의 형상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3.육체(flesh)
우리 말의 "육체(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소마]와 [사릌스]가 있다고 앞의 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소마]에 해당하는 적절한 말은 [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사릌스]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사릌스]에 대하여 필자가 직접 신약성경에서 찾아보니 130 여회 나오는 데, 영어성경에서는 flesh 로 거의 번역되고, 한번 carnal 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어로는 육체, 육신, 육, 몸, 육정, 살, 고기, 색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제일 많이 쓰인 단어는 66여 회 이상 사용된 [육체]입니다.
그래서 [사릌스]는 우리 말로는 "육체(flesh)"라고 통칭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러나 "육체"라고 쓰였다고 해서 반드시 사람의 "몸"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필자가 분석해본 결과 다음의 다섯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필자의 주관적인 분석이므로 객관성은 없음)
1."몸"과 비슷한 용도로 쓰인 경우.
2. 단순한 "사람"을 의미하는 경우.
3. "외모나 지위"등을 의미하는 경우.
4. "죄의 성향"을 의미하는 경우.
이 다섯 가지 중에서 1번 "몸"과 비슷한 용도"로 쓰인 경우(약 30 여회) 외 나머지 경우는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말을 하거나 죄와 관련되어진 것으로 사용되어졌으므로 [ 사릌스]의 의미는 다분히 부정적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몸"(body)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도덕적인 책임이 없는 단순한 물질인데 반하여 "육체"(flesh)는 도덕적으로 악한 것이며 물질이 아닌 어떤 유혹하거나 죄를 짓게 만드는 불가항력적인 세력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육체"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8장)
또한 "육체"는 성령과 배치되는 것으로써 그로 인해 맺혀지는 열매들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갈5:10-21)
그러므로 새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육체는 죽여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여야 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죽여야 할 대상인 "육체"는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물질인 "몸"과는 구분되는 어떤 죄를 짓게 만드는 "세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죽이기 위해서 "몸"을 학대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왕왕 기독교 역사를 보면 금욕 훈련이랍시고 자기의 몸을 많이 학대한 사실을 특히 중세기의 수도사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몸"과 "육체"를 구분하지 않은 잘못된 출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봅니다.
"몸"의 욕구가 그대로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몸은 먹고, 마시고, 쉬고, 잠자고, 배설하고, 신변 안전을 기본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욕구는 몸의 상태를 항상 정상적인 상태로 유지케 하려는 목적으로 창조주께서 배려하여 놓으신 장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욕구는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지 않았어도 위와 같은 욕구들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욕구들 자체를 죄악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릌스] 곧, "육체"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거스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이 "육체"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언행심사를 통하여 표출됩니다. 어떻게 표출되느냐 하면 "자기"로 표출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고집하고,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섬기고,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위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삶"이란 "자기중심적인 삶"인 것입니다.
그가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쓰든, 주의 일을 하려고 애을 쓰든, 교회를 개혁하려고 애를 쓰든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기를 위하여, "자기의 힘으로 " 하는 것은 다 육체적인 일이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아 아무리 신성해 보여도 그것은 육체의 일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육체에 속했다고 하는 증거는 그 열매들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 보려고 해도 나타나지는 열매가 육체의 열매이면 그는 육체를 따라 산 것입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같은 것들이니..."(갈5:19-20)
그러면 이것을 없앨 수 있을까요? 그것은 금식이나 고행으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방법들로써 자기를 다룬 후에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삼고 더 교만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자기를 더 왕성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들을 이기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다음 시간에 혼에 대해서 상고해 보면서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4.몸(body)
몸을 드러내는 계절이 왔습니다.
구태여 해수욕장이나 풀장에 가지 않더라도 거의 벗다시피한 젊은 여자들을 어디서든지 쉽사리 볼 수가 있습니다.
본래 에덴동산에서는 벌거벗고 살았던 것이니 벗는 사람들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마음 속에 번뇌가 쌓일까 생각하니 걱정은 됩니다.
성경에서는 몸이란 말이 헬라어로 두개의 단어가 쓰였는데 하나는 [소마]이고 또 하나는 [싸릌스] 입니다.
[소마]는 영어로 [body]로 번역이 되고, [사릌스]는 [flesh]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 글은 소마 즉 body 에 관한 것입니다.
소마는 한글로 몸, 육신, 육체, 살, 형체, ~자(者) 등으로 번역이 되었느나 가장 적합한 말은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머리털로 부터 시작하여 얼굴, 목, 가슴, 배. 팔과 다리, 그리고 발 까지를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인간의 구성 요소를 통틀어 [소마]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body]라고 합니다.
[소마]는 단순한 물질입니다.
물질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도덕적 책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은 옷과 같아서 내면에 있는 보이지 않는 속사람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고 속사람에 의해 활용될 뿐이지 자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행하는 것이 있지 아니합니다.
철저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속사람이 떠나면 시체가 됩니다. 영어성경에서는 시체를 지시하는 말에도 [body]라는 말을 썼습니다.(마27:58,눅24:3)
그 몸이란 것이 이렇듯 무위해 보여도 성경에서는 두 가지 상반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비천한 것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죄의 몸" (골2:11) 이라고 했습니다. 또 "죽을 몸"(롬8:11)이라고 했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런 평을 받고, 이런 운명에 떨어진 것이 몸으로써는 억울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속사람이 시키는 대로 했지만, 아니 그냥 이용당했지만 속사람과 운명을 같이해야할 팔자이고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마치 더러운 작업복을 입고 시궁창 속에서 일을 한 기사가 그 옷이 더럽혀졌다고 불에 벗어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인생의 몸이 그렇습니다. 속사람이 시켜서 선악과를 따먹었을 뿐인데 몸까지 "죄의 몸"이 되고, "죽을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몸을 존귀한 것으로 묘사한 부분도 있습니다. 성도의 몸에 대해 말하기를 "성령의 전"(고전6:19) 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우리 몸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몸을 성도의 공동체인 교회의 상징어로 사용하셨으며(엡1:23), 그리스도께서 만인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 취하셨던 영광스러운 도구로써(히10:5) 그 위상을 높여 놓으셨습니다. 다시말해 몸이 없으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실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몸은 언젠가는 "생명"을 얻게 되며(롬8:11), 변화함을 받아 영광스럽게 되며(고전 15:44),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고후4:10).바울은 살았을 때에도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앞으로 존귀함의 극치에 이를 몸이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제물이 되어야 하고(롬12: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사용해야 됩니다.(고전 6;20)
그러기 위해서는 몸은 "창기와 합하지 아니하여야" 하며(고전6:16), "음란을 위해 쓰여지지 않아야" 하고(고전6:13), 오직 "주를 위해야 하고"(고전6:13), 그 관할권은 배우자에게 있습니다.(고전7:4)
성도는 자기 몸, 특히 성적인 기관에 대한 주권이 자기에게나 타인에게 있지 아니하고 오직 배우자에게 있음을 명심해야 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일 그리하지 않고 다른 사람(자기든, 이성이든, 동성이든)에게 사용권을 준다면 그것은 배우자를 속이고 배신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영과 혼과 더불어 몸을 "흠없이 보존해야"합니다.(살전5:25) 왜냐하면 바로 그 몸의 모습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부활체로 교환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입고 살아야할 부활체로 말입니다.
"신부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 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계19:8)
5.영,혼, 육신의 상관 관계
지금까지 몸과 육신과 혼과 영- 이렇게 네 가지 요소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들 상호간의 관계와 역할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할 일은 이 네 가지 중에서 하나 즉 몸은 분리해서 논외로 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몸은 아직은 신학상의 문제라기 보다는 의학상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언젠가는 몸이 혼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이론이 나옴직도 하며 그로 인하여 관상학 등이 각광을 받을 때도 오리라고 봅니다. 신체의 모습이 혼의 상태를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에 관해서는 논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편의상 물질인 몸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혼.육신 이 세 가지의 관계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반지름이 각각 다른 원을 세 개를 포개서 그려 놓고는 제일 가운데 있는 작은 원을 "영"이라하고 가운데 있는 원을 "혼"하며, 제일 큰 바깥 원을 "몸"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렇게 그리다 보니 "육신"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지게 되고, 영은 인간의 내면 깊숙히 있는 것 처럼 오해를 하게 됩니다, 사실은 영이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내면은 오히려 허무와 고독, 절망, 사악함 등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의 속성들이 이렇단 말입니까? 이런 것들은 오히려 육신의 속성들입니다. 영의 속성은 하나님을 닮은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고 봅니다. 그렇게 볼 때 영을 제일 한 가운데 위치하도록 그려 넣는 것은 별로 바람직스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과 혼과 육신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세 칸으로 나누어진 직사각형 도형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칸은 "혼"으로 설정을 해 놓고, 혼의 좌측 칸은 "육신" 혼의 우측 칸은 "영"이렇게 구분을 해봅니다.
그리고 이 세 기관을 나누는 가운데의 두 수직선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좌우로 자유로히 움직이는 유동적인 선으로 이해합니다.
즉 영의 부분, 혼의 부분, 육신의 부분의 크기는 일정치 않고 항상 수시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영의 부분이 육신의 부분보다 월등히 커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육신의 부분이 영의 부분을 압도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면의 상태에 따라서 다릅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는 영의 부분이 커지고 죄악의 유혹에 넘어갈 때는 육신의 부분이 커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영의 부분을 극대화하고 반면 육신의 부분을 극소화할 수 있도록 영이 혼을 지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이 세 가지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이 세 가지는 각론에서 말씀드렸듯이 각각의 하는 일들이 비슷하거나 같거나 할 때가 많습니다. 그들 모두는 생각도 하고, 감정도 있으며, 의지도 행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 사람 안에 육신, 혼, 영이라는 세 인격이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다중인격으로 구성되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놓으시지 않았으니까요.
다만 다중 인격을 가진 것 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이유는 세 요소가 갈등할 때 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 인격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례를 들어 "기도한다"는 말이 고전 14:14에서는 [영]이 한다로 되어 있고, 계6:9에서는 [혼]이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찬양한다"는 말도 고전 14:15에서는 [영]이 한다고 했고, 눅1:46에서는 [혼]이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영도 기도하고 찬양하고, 혼도 기도하고 찬양한다고 해야할까요?
이렇게 본다면 한 사람안에 둘 내지는 세 인격이 존재한다고 봐야 되는데 이런 이론은 인정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이중 내지 삼중 인격자로 만드시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났건 거듭나지 못했건 이.삼중 인격자로 볼 것이 아니라 단일 인격으로 보되 영도 찬양하고, 혼도 찬양한다고 하는 이 말을 지혜롭게 이해해야할 것 같습니다.
즉 영이 찬양한다고 하는 말이나 혼이 찬양한다고 하는 말이나 다 같이 혼이 찬양한다는 말인데 영이 찬양한다고 말한 이유는 그 찬양의 주체가 영이고, 혼이 찬양한다는 말은 영으로 부터 나오지는 않고 혼만으로 찬양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해석이 왜 가능할까요?
혼으로 찬양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을 복중에 가지고 있었던 엘리사벳이었습니다. 영으로 찬양한 사람은 바울이었습니다. 엘리사벳과 바울의 상태가 똑같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아직 성령으로 인해 거듭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긴 했지만 아직은 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찬양을 하되 혼으로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으로 인해 거듭난 사람입니다. 영이 살아난 사람일 뿐만 아니라 혼이 성화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영으로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 있어서 기도와 찬양은 영이 하는 것인데 혼을 통해서 나오게 됩니다. 그 상태를 "영이 찬양한다"라고도 말할 수 있고 "혼이 찬양한다"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혼이 찬양한다"라고는 말할 수 있어도 "영이 찬양한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이 아직 살아나지 않은 상태이니까 찬양을 할리가 없는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일 인격체이지 다중 인격체는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있지 아니하냐? 그런데 십자가로 인해 옛 사람을 죽이면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마치 우리 내면에 두 인격이 살다가 하나는 죽게 되고 하나는 영원히 살게 되는 것 같이 말합니다. 저는 이런 경우를 많이 묵상해 보았지만 두 인격이 있다고 보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옛 사람이라는 것은 혼이 육신의 지배를 받아 사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고, 새 사람이라는 것은 혼이 영의 지배를 받아 사는 경우를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사람으로 사느냐 새 사람으로 사느냐 하는 것은 결국 영으로 사느냐, 육신으로 사느냐는 질문과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영으로 사는 것은 거듭난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해당될 수가 없는 현상입니다.
영이 살아 있어야 혼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지 영이 죽어 있으면 혼을 지배할 수가 없고 오히려 혼은 육신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혼이 인간의 주체입니다. 혼이 없으면 인간은 흙덩어리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이 혼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해야 인간 본연의 구실을 하여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수행할 수가 있는데 에덴 동산에서 타락하여 버리고 육신이라고 하는 세력에 붙잡혀 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할 혼이 오히려 사단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구조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세상에서 본능적으로 자아 중심적인 삶을 살므로써 사단의 명령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자아 중심적인 삶이 사단의 명령을 수행하는 삶이냐 하면 사단은 이미 인간 속에 들어와서 육신이라는 좌소에 앉아 있기 때문에 인간은 사단의 욕구를 자기 자신의 욕구로 오인을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뜻을 타자의 것으로 치부하고 자신의 뜻을 인간 본연의 뜻인양 착각하게 만들어 인간으로 하여금 별 저항없이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고 수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혼은 이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욕구인 줄로 알고 있다가 영이 살아났을 때에야 비로서 그 모든 육신의 욕구들이 배후에서 역사하는 사단의 소욕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기도 중에서 이 구절을 매우 좋아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주기도문 중에서 맨 처음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지요. 일반사람으로써는 이처럼 자기와 동떨어진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으로 사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욕구인 것입니다. 나의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 이것이 본래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웠던 본연의 모습이 사단이 들어와서 육신의 세력을 형성하고난 후 부터는 하나님의 뜻은 멀게만 느껴지게 되어지고 사단의 뜻은 자기의 것인 양 느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지고 난 후 죽었던 영이 살아나고 성령님의 조명을 받고 나면 진리가 이해되기 시작하여 마침내 육신의 소욕을 대적하기 시작하는 데 사실 극렬한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넘어 졌다 엎어졌다를 수없이 반복을 하면서 치열한 싸움을 싸우지요.
누구와 누구의 싸움일까요? 내 자신과의 싸움, 즉내 영과 내 육신의 싸움입니다.
이 둘의 싸움으로 인해 가운데서 곤비하여지는 것은 내 혼입니다.
내 혼은 아무래도 영이 죽었을 때는 무엇을 하든 육신에게 내 맡기고 육신에 의해 지배를 당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그외 어떠한 길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일이 잘못될 때는 팔자가 그러려니 하고 체념도 하고 또 가끔 육신이 주는 쾌락에 즐거워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인생이 슬프고 해답이 없는 것 같고 허무한 생각이 들어 자살까지 생각을 하고 하지만 영이 살아 난 뒤에는 영이 주는 평안을 맛보고 기쁨을 알았기 때문에 영이 가급적 지배해 주기를 바라고 영을 따라 살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영이 주는 달콤함, 평안함, 기쁨을 알고 나면 다시는 육신의 종이 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하게 됩니다. 육신이 주는 즐거움은 즐거움 같으나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십자가에 죽었다고 수십번씩 되뇌이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나니..."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
"나는 매일 죽노라."
그러나 여기에도 조심해야 할 부분은 있습니다. 여기서 죽었다고 말하는 "나"는 혼이 아니고 육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언뜻보면 "내가" "육체" "정과 욕심" "옛 사람" "나"등이 혼을 말하는 것 같이도 생각되지만 우리의 혼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육신이 죽은 것입니다. 사단의 좌소가 되어 있는 육신이 죽은 것이지 하나님께서 나의 진정한 자아로 만들어 주신 혼이 죽은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오해하여 자신의 정체성까지 잃어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혼을 파쇄하라" 는 말을 함으로써 혼까지 멸절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위험합니다.
혼을 파쇄하라는 말이 성경에 있지 아니합니다.
혼은 지.정.의를 가진 인격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생명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파쇄시키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인간의 본체는 없고, 영만 남겠습니다. 그러면 이미 사람이 아니지요. 그는 신입니다.
그래서 혼을 멸절하라고 부르짖는 사람들 보면 실성한 소리들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에 참으로 교회가 조심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혼을 파쇄하라는 소리는 위험한 소리라고 단정합니다.
따라서 "자기를 비우라"는 말도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혼의 기능인 정신이 온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살려고 해야합니다.
점점 더 영과의 교류는 확대하는 한편 육신과의 관계는 단절해야 합니다.
그러면 혼이 하나님을 닮아가게 될 것이고 사단의 모습은 사라질 것입니다
결론 삼아서 영,혼,육신의 역한 구조를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혼이 가운데 있습니다. 그 혼은 누구의 지배를 받느냐에 따라서 각기 다른 종류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한편에 있는 영의 지배를 받으면 영의 열매를, 또 다른 편에 있는 육신의 지배를 받으면 육신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영의 열매는 영생을 거두게 되고, 육신의 열매는 썩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배후 세력에 대하여 알아 두어야 합니다.
영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제구실을 합니다. 육신은 사단의 도움을 받아야 제 구실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사모하느냐, 사단을 사모하느냐에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성경은 말합니다. "육신은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이것을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영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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