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롯의 때
(눅 17:26-37, 창 19:1-29)
복습
우리는 전강에서 노아의 때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하신 말씀을 상고 했습니다. 노아 때의 특성은, 본문에 기록된 대로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간다는 것입니다. 무슨 특별히 어려운 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평범하게 언제든지 있는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또 롯의 때의 특성도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그들이 하는 이 생활 과정 가운데의 일들이 가진 의미와, 결국 그것들이 무엇에 도달할 것인가를 다 아시고, 생각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대로도 먹고 마시며,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것이 하나도 이상한 것이 없습니다. 한가지라도 그 자체가 죄되는 것이 없습니다. 노아 때의 경우에는 먹고 마시고 그 다음에 혼인한다는 것이 중요한 이야기이지만, 롯의 때에는 혼인한다는 말은 없고 먹고 마시고 매매를 한다는 것, 그 다음에는 심는다는 것과 집을 짓는다는 것이 더 있습니다. 물론 그 어느 것도 죄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는 이러한 일상의 항다반의 일 가운데 나타난 작위나 행동이 특별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다 생각 하시면서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시는 것입니다.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다”는 의미
그러면 우리가 이번에는 롯의 경우, 즉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다 하는 말로써 표현된 그 의의와 가치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미 배운 바와 같이, 노아 때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간 것은 인류 사회의 일반 생활 행동으로서 그 자체에 아무런 죄악성이 없고 어떤 사회에서든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롯의 때가 됐든지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됐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먹고 마시도록 피조된 까닭에 먹고 마셔야 합니다.
다음으로, 사고 판다는 것은 원시 농산 사회로서 일체 아무런 물자의 교환을 하지 않는 사회는 별 문제입니다만, 적어도 그것이 하나의 조직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사회라면 소위 교역이라는 형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달리 화폐가 없던 시대에도 물물교환이라는 방식으로 교역을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이조시대, 지금부터 약 300년 전만 해도 특별히 화폐라고 할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물건을 사고 팔 때에는 무명을 짜서 필로 가지고 다니면서, “그것 얼마요?”하면, “이것은 두 끝이요. 세 끝으리요.”하는 이런 말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무명 세 끝으리”란 비싼 것은 그렇다는 말입니다. 또는 “그것 얼마요?”하면, “대자요”합니다.-무명 다섯자를 끊어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소? 조금 덜 합시다.” 그러면 “에누리는 안 돼요” “돼요” 하다가 “그러면 넉자 반만 주시요”하면 가져왔던 무명을 넉자 반만 딱 끊어서 주고 물건을 사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야 화폐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도 원 화폐이외에 보조화폐라는 것이 있어서 이것을 우리가 통화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령 금본위 제도라면 그을 중앙은행에 적치해 놓고 거기에 해당한 액면의 화폐를 발행하여 통용시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남발하면 인플레이숀이 된다든지 하는 금융 통화 상의 법칙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아뭏든 롯의 시대에 벌써 사람들이 사고 파는 일, 즉 교역을 한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교역의 방법으로는 물물교환을 했든지 혹은 물건 가운데 어떤 특정한 것을 하나 지정해서 그것을 가지고 서로 주고 받았든 간에 좌우간 교역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이 별로 기이할 것이 없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발달한 사회상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또 산업 구조에 있어서 상당한 발전을 이룬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 심는다는 것은, 그들이 단순히 상업 사회, 즉 교역 사회로서만 발전하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원시 사회의 발전 단계로서 도시는 그러했지만, 그 도시 주변에는 역시 정착 농민들이 있으면서 농사를 지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고로 얼른 산업 구조로 보면 이 시대는 농업과 상업을 병영하는 시대인 것입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굉장히 발전한 것을 우리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을 짓는다 하는 것은 또한 상당한 건축 내지는 건설을 해 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문화 난숙하고 경제 발달한 소돔.고모라
그러면 산업 구조에서 볼 때 그들은 생존만 할 뿐 아니라 한개의 교역 사회를 건설하고 거기에 농산 사회를 곁들이는 경제 사회를 건설하고, 또 건축을 해 나가는 문화 사회를 발전시켰습니다.우리 주님은 이렇듯 우리에게 섬광과 같이 암시하는 말들을 골라서 쓰신 것입니다. 롯의 시대, 아브라함의 시대는 기원 전 1900년 때이니까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3,800년 내지 3,900년 전의 옛 시대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시대인 것은, 우리 나라의 전 삼국이 처음으로 펼쳐질 때가 기원 전 56년이나 기원 전 1세기 이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벌써 기원전 1800년이나 1900년이 되는 시대인 것입니다. 오늘날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해서도 아브라함 시대에 그만한 산업상의 구조나 또 생활상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는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브라함 시대에는 문화가 상당히 발전해서 사람들이 단지 말로서만 의사 소통을 한 것이 아니라 문자를 가지고도 의사 소통을 했다는 증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석판에 글을 써서 그것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교역도 하며 계약서도 작성하고 명령도 내렸습니다. 여러분은 하무라비 법전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요즈음의 사람들 가운데는 소돔 고모라 때의 시날왕 아므라벨(창 14:1,9)을 하무라비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물론 그것은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뿐이고 그렇지 않다는 증거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날왕 아므라벨이 곧 하무라비올시다.”하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이런 것은 별로 유식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무라비는 적어도 아브라함의 시대나 혹은 그 선후해서 있던 사람으로 벌써 위대한 법전을 만들었으며, 그 법전의 씰린더(원통 모양의 석인)가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도 그런 씰린더를 여러개 보았고 그것을 판독한 것을 가서 찾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것이 지금부터 거의 4,000년 전의 것이라고 하지만 바로 불과 한 백년이나 이백년 전의 것같이 아주 가깝고 친근하게 생각이 됩니다.
“여호와의 동산 같았던” 소돔. 고모라
이와 같이 소돔. 고모라는 문화가 아주 난숙했고 또 경제상의 발전이 훌륭해서 생활이 유여 했습니다. 그래서 롯이 자기의 숙부인 아브라함의 제안에 따라 산업을 서로 나누려고 할 때, 즉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할 때, 그가 요단 동편 들을 바라보니 소알까지의 온 땅, 곧 소돔. 고모라의 땅이 여호와께서 멸하시기 전이라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아서” 그곳을 취택하여 갔던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가 경제상, 물질 문명 상으로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우리는 이 말씀으로도 주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부요롭고 윤택하고 그리고 문화를 충분히 수립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근거를 가진 도시였습니다. 그곳은, 브엘세바(창 21:14, 26:23)와 같이 베두인들이 우-하니 모여서 물건을 서로 교환한 다음, 휙-하니 떠나고 나면 금방 쓸쓸해지는 그런 땅이 아니고, 사람들이 정착해 살면서 교역을 하고 또 부근에다 곡식을 충분히 심어 수확을 하며 그리고 건설을 자꾸 해나가는 도시였습니다. 그런고로 단순히 물질 문명이 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훌륭하다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다른 지역보다도 우수하고 월등하게 발전한 것입니다.
소돔의 죄악성
이와 같은 산업 형태와 구조 가운데 소돔과 고모라는 부하고 먹을 것이 많고 생활이 유족하니까 사람들이 인간의 그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에 맡겨져서, 요족한 사람들이 빠져들어가는 음일과 사치와 향락 가운데, 곧 관능적인 감각의 향락 가운데 빠져들어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돔, 고모라의 죄악은 잠간 동안만 저질러진 것이 아닙니다. 장기간에 걸쳐서 죄를 늘 범하고 범해서 나중에는 그 죄가 감각 생활의 전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음풍이 가득한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롯의 집에 온 천사들에게 행한 일들로 드러납니다. “....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으며 문밖의 무리로 무론 대소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곤비하였더라”(창 19:9-11)
그들은 문을 뚜드려 부숴 가면서 천사를 끌어내려 하였고, 눈을 어둡게 했는데도 무론노소하고 와-하니 덤볐습니다. 관능의 향락이 극도로 변태적으로 화해서 이상 상태에까지 빠진 까닭에, 혈기가 방장한 젊은이든 혈기가 비교적 적은 노인이든지 무론 노소하고 덤볐습니다. 롯이 애걸하며 자기의 시집 가지 아니한 두 딸을 제공하리라고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변태적으로, 악질적으로 착도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롯을 밀치고 문을 깨치려고 했습니다. 정욕을 위해서는 어떤 난폭이라도 감행하려는, 짐승과 같이 포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눈을 어둡게 한즉, “눈이 어두워서 큰일났다”하며 송구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갔느냐 하면, 오히려 어두운 눈을 가지고라도 문을 찾느라고 곤비하였습니다. 타오르는 정욕은 눈이 어두 울망정 문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형태로든 간단하게 임했을 때, 암매한 속에서 무서워할 줄 모르고 거기서도 일보 더 나아가 타오르는 정욕으로 그런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덤볐습니다. 이것이 무서운 죄악의 현상입니다.
소돔의 죄악에 끌려 들어간 롯
이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무서운 죄악에 롯 자신이 젖어 들어간 상황을 살펴 보십시다. 창세기 13장 10절 이하를 보면,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소돔을 멸하시기까지는 그 땅이 애굽땅과 같이 물이 넉넉하고 넘쳐서 거기에 사람들이 정착하고 문화를 충분히 발전시키면서 살던 곳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그리고 13절에는,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롯이 소돔성을 선택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롯이 소돔성을 선택하여 들어간 다음에는, 그가 언제 혼인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좌우간 거기서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커서 정혼할 나이가 되었다면, 벌써 한 20년은 거기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몇 년을 살았다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좌우간 오래 산 것은 틀림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몇 살 때에 롯과 헤어졌는지 우리가 자세히 알 수 없고, 또 아브라함이 나중에 소돔성을 멸하러 가는 하나님과 두 천사들을 만나서 소돔성을 위하여 도고를 할 때 그의 나이가 얼마였는지를 확정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롯의 소돔성 우거 기간이 몇십 년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상당히 장기간이라고 상상할 수는 있습니다. 만일 롯이 거기에 들어간 후 혼인을 해서 자식을 낳았다면, 그 자식들은 거기서 커서 시집 갈 만큼 되어 정혼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몇살에 정혼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혹은 롯이 그 이전에 벌써 장가를 갔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지 거기서 자식들이 큰 것은 사실입니다. 또 롯이 어디서 아내를 얻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롯이 처음부터 아람의 자기 본족에서 아내를 데리고 내려왔는지 그것도 도저히 알 도리가 없습니다 - 만약 그랬다면 적어도 롯이 가진 신앙의 방향을 향해서 갔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소돔 고모라성에 있는 물건들이 아까 와서, 그 재앙이 뒤에서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돌아보고 돌이킨 것을 생각하면 그가 소돔의 여자일지도 모릅니다. 그 마음, 그 정신은 소돔에 속한 여자였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롯이 그곳에 장기간 유했음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돔 사람은, 롯이 들어간 그 때 이미 괴악한 백성이어서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다.”(창 13:13)고 했습니다. 롯은 소돔 사람이 큰 죄인인 것을 모르고 택했다고 할지라도 곧 죄인인 것을 발견은 했을 것입니다. 발견은 했을 터이지만 롯은 그곳을 떠나지 않고 그냥 주저앉은 것입니다.
증거를 상실한 롯의 말로
여기에 롯이 증거를 상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롯은 적극적으로 증거하러 들어간 것이 아니라 거기에 붙어서 거기의 부를 나누어 가지려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롯은 거기에 가서 치부하고 살았을는지는 몰라도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곳은 멸망시킬 때, - 그러나 아브라함의 도고를 생각하시고 롯을 건져내실 때 그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고 자기의 가족까지라도 한 쪽은 잃어버리고 자기와 두 딸만 나왔습니다. 나중에 소알로부터 산으로 올라가 어떤 굴에 살면서 두 딸이 저희의 아비를 좇아 암몬, 모압 족속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오늘날의 도덕적 판단으로 볼 때는 대단히 해괴한 일입니다.
그때에는 근족 상혼을 한 까닭에 -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그의 아내 사라가 분명히 그의 이복 누이라고 했고 그것이 무슨 큰 흉이 되지 않는 시대인 까닭에 - 그것을 오늘날의 판단으로 찬부를 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감화에 의해서 정당하게 자식을 얻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그것은 육신의 정욕 때문에만 반드시 그랬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암몬 자손이나 모압 자손이 나온 것은 정욕 때문에 그랬다는 것보다는 천하에 사람이 다 죽었으니 자식을 얻어야겠다는 기본적인 요구에서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풍습상, 자식이 하나도 없으면 불쌍하게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일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관점 하에서 전적으로 악하다, 불의하다 할 것은 아니고, 그 때의 도덕적인 표준으로는 어떻게 볼 것인가를 또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문제는 롯의 두 딸이 어떻게 저희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었느냐가 아니고 소돔, 고모라가 가지고 있는 특성, 먹고 마시고 사고 팔며 심고 집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멸망으로 맥진하기 위하여 먹고 마신 소돔 사람들
그러면 이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먹고 마셨습니까? 그들은 계속적으로 죄악을 범해서 여호와의 진노를 불러들여 전적으로 멸망할 큰 심판에 도달하기 위하여 먹고 마시는 형국이었습니다. 주께서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의 의의가 이런 것이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아의 경우에 혼인의 문제를 제시하실 때, ”멸망을 일으킬 장본들과 원인들을 만들기 위해서 혼인을 한다는 말이냐?“하신 것과 같습니다.
”저들이 심어서 농산 산업을 일으켜 수확을 많이 하고 이를 사고 팔아 경제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먹을 것이 넉넉하고 많은 여유를 가지고 감각적 향락 가운데 빠져들어가 극단적으로, 변태적으로 전도된 환장한 인간들이 되지 않았느냐? 이것이 바로 그들이 가진 경제 생활의 윤택의 결과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 버릇하는 사람은 틈만 있으면 죄를 짓습니다. 단속을 엄히 하면 그때는 무서워서 못하다가도, 자유와 안정이 주어지고 평안해져서 무슨 특별한 걱정이 없을 때는 죄 가운데로 먼저 들어갑니다.
이것의 대표로서, 가장 악질적이고 가장 극단적으로 나간 것이 소돔 백성들입니다. 그들의 건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이 집을 짓고 물질문명을 발달시킨 외양적인 건설은 그들의 멸망을 막아내기는 커녕 오히려 멸망의 원인들을 뒤에서 보강해 주었습니다. 거대한 건설을 아무리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인류의 죄가 일푼이라도 없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이렇게 소돔 백성은 그들의 멸망을 그 건설로도 경감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멸망을 향해서 맥진하였습니다. 돌진했다는 말입니다. 결국 소돔이 가지고 있던 전시대의 성격이, 먹고 마시는 것이 윤택함으로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가 도적이 횡행하고 불의가 창궐하여 살기가 어렵다고 할 때, 사람들은,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그렇다고 이론을 세웁니다. 그러나 먹고 살기가 넉넉하던 소돔, “여호와의 동산” 같은 그곳의 백성은 먹고 살기가 넉넉해서 더 죄를 짓고 나갔습니다.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이 없으면 그 없다는 핑계로 죄를 짓고, 있으면 또 있어서 죄를 짓습니다. 사람이 가진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경제적인 유여는, 방향 전환없이 죄를 짓고 멸망을 향해서 가는 역사의 진행 위에다 기름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멸망을 향해서 막 뛰놀고 있는 소돔 백성에게, 농사가 잘되어 먹고 마시는 것이 유여하고 건설을 자꾸 해서 있을 곳이 유여한 것은 마치 불 타는 집에 기름을 부어 더욱 맹렬하게 타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역사의 종국에도 세상은 소돔과 같이 멸망을 향해 돌진할 것임
주께서는, 인자의 임하는 날도, 마치 소돔 백성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멸망을 향해 가는 역사의 진행을 조금도 변경못하고 맥진한 것같이 달려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시대, 이 역사의 종국도, 예수님이 오셔서 심판하시는 그날까지라도 변경없이 맥진할 것이다. 이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소돔 백성이 먹고 마셨던 것은 무엇 때문이냐 -죄를 짓기 위해서 한 것같이 됐습니다. 소돔 백성이 사고 판 것은 무엇 때문이냐?-치부하고 그로 인하여 윤택하여져서 자기를 살찌게 하며, 그 살찌게 하는 에너지와 평안한 환경을 만들고서는 그 다음에 결국 죄를 짓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심어 넉넉히 수확하면 무엇을 했는가? 곳간을 크게 지어 잔뜩 모아 놓고 “이제는 넉넉하다. 얼마든지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기자.”하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짓을 했습니다(눅 12:16-21). 그들이 집을 짓고 무엇을 했는가 하면, 가면 갈수록 죄를 짓는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더럽히는 장소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소돔 백성의 중요한 건설사업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죄악의 모습, 그 추악상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소돔적인 성경의 문화 형태입니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유여한 사회입니다. 그것은 화폐의 회전과 경제의 유통이 활발한 사회입니다. 그것은 또한 유여한 물질의 힘을 빌어 외양을 꾸미고 건설해 나가는 사회요,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는 사회요, 그것으로 걱정이 없다는 사회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가더니 그 역사의 방향을 그대로 밀고 가지 않았느냐, 어디까지 밀고 갔느냐, 멸망에 부딪치는 그 시간까지 밀고 갔다. 그리고 인자의 오시는 그 시간에도 세상은 또한 그렇게 하고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롯과 같은 신자를 경계하심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롯과 같은 신자를 경계하셨습니다.“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사를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벧후 2:6-8). 심령이 상했다는 것은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늘 슬퍼하고 괴로워했다는 의미도 되고, 이렇게 하고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신기하기보다 괴이한 것은- 롯이 그곳을 떠나지 않고 그냥 주저 앉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떠나기는 커녕 소돔성에 있는 사람으로 사위를 삼아 자기의 계대를 하려고 정혼을 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롯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은 아니고 롯의 날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롯은 롯대로 특이한 타입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자가 많습니다. 그가 소돔성에 처음 들어가 보니 해괴하고 망측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도 물질이 유여하니까 그대로 눌러 살면서 감화를 주기보다는 차츰차츰 감화를 받았습니다. 거룩한 교회로 존재해야 할 그의 가정이 교회의 성격을 다 상실했습니다. 다만, 자기 혼자서만 전통적으로 받은 그 신앙 때문에 혹은 자기 숙부 아브라함에게서 받은 교훈이 마침내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으로 거룩 되이 싹튼 까닭에 마음으로 괴로워한 것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점점 무디어 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괴롭지만 나중에는 점점 거기에 대해서 일종의 면역성이 생깁니다. 이것은 정말로 상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상실되어 가는 것입니다. 양심이 무디어진다는 말입니다. 전에는 죄로 알고 몹시 아프게 느끼던 것에 대해서 “세상이 다 그렇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걸.....”하면서 그런 문제를 덮어놓기 시작해서, 차츰차츰 자기도 부지불식간에 그런 생활에 침륜되어 들어갑니다. 주께서는, 그도 이렇게 해서 완전히 부패하고 멸망해 버리기 전에 건져 내신 것입니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벧후 2:9-10) 이런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든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일에 대해서 엄격히 경계하는 것입니다.
증거 상실한 교회-교회 부재와 같음
그러면 이러한 괴악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항상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어떤 역사의 방향이 주님의 심판을 받기에 현저한 조건들을 자꾸 갖추어 나갈 때 단지 마음을 상하는 것으로 그쳐서도 안 되고, 그 사회에 섞여서 그 비익을 같이 나누려 해도 안 되며, 롯과 같이 거룩한 교회의 성격을 상실 해서도 안 됩니다. 끝까지 증거자로서의 자기의 증거를 고지하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한 중요히 가르치는 것은 롯의 날과 같은, 시대의 종국이 되면 증거자들의 증거를 들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사고 팔며 그리고 심고 집을 세웁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시지 아니하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들의 집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런 것 때문에 죄악이 일푼이라도 감해지지도 않고 잘못이 없어지거나 뒤로 물러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타매할 거룩한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명백하게 존재하지 아니했습니다. 롯이 거기에 있었지만 증거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식구 하나도 -딸도 아내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혼자 외톨이로 남았습니다. 그런고로 거룩한 교회로 존재할 단위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증거를 상실한 교회는 실질상 교회 부재의 현실을 나타내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자의 오시는 그날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수많은 교회가 증거를 상실해서 교회 부재의 현실을 역사 위에 드러낼 것입니다. 만일 거기에 교회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창해 일속과 같은 존재라면 대해의 불결뿐이지 사실상 물질 부재입니다. 이물이 부재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롯의 날의 현상은, 도도한 탁류가 대해의 물결같이 흐르는 배교의 현실 속에 증거를 명확하게 하는 교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날에는 그래도 노아의 식구들이 증거자로 최후까지 남아서 방주를 만들었고, 그것이 구원의 확실한 증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롯의 날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증거의 부재 현실이 역사 위에 나타난 것입니다. 인자가 언제 오시려는지 알 수 없지만, 오시기 전에 적 그리스도가 있겠고 적 그리스도가 있기 전에 배교의 현실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즉, 교회 부재라는 현실이 생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수많은 교회가 교회로서 자기 자신을 다 증시하고 있을지라도, 그것들이 배교한즉 사람들은 다시 교회가 없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물론 성경의 바른 가르침은 어느 시대든지 참 교회는 남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경우에서 우리가 특별히 배워야 할 중요한 사실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참 교회란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증거자로서 명확히 서있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 이교적 바알이 가득할 때 - 그중 어떤 것에는 이스라엘이 자기네의 신 개념을 불어넣기도 했지만, 시돈과 두로의 바알은 전연 이교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몇 사람의 증거자가 서 있었느냐 하면, 엘리야 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칠천명이 있다고 했지만 증거는 주재했던 것입니다(왕상 19:18). 칠천인이나 있었으면서도 증거자로서의 의의는 갖지 못했습니다.
다만 엘리야 혼자서 앞에 나가 싸워 가면서 증거를 했습니다(왕상 18:15-46). 시대에 따라서는 그렇게 숨어있는 교회가 있을 수 있으나, 그렇게 되면 증거하는 교회가 점점 상실되어서 증거 부재라는 사실이 있게 됩니다. 롯도 분명히 교회의 거룩한 한 분자입니다. 분자일지라도 증거는 부재했습니다. 이것이 역사 위에서 현실적인 교회 부재인 것입니다. 역사 위에서 작용하고 있는 교회가 부재하다는 말입니다. 있다면, 숨어서 은둔한, 도피한 교회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이 장차 온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서 우리는 항상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정신적, 물질적 재산도 멸망으로 맥진시키는 중요한 자료가 됨
다시 롯의 날의 현실을 보십시다. 그 때의 소위 산업 활동이나 경제 활동 또는 부의 축적이 역사의 방향을 거룩한 목적으로 전환시켜 나가기 위해 쓰이는 것이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 때는 그것 자체의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즉, 돈을 쌓아서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기 위하여 썼다면 의미가 있겠지만, 죄를 짓기 위하여 썼다면 멸망을 자취하는 재료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무서운 현실을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소돔,고모라가 여호와의 동신 같았지만 그 풍부한 산업과 풍성한 산물과 윤택한 부를 가지고 멸망을 자취해 나갔습니다. 이렇게 그 자체의 목적이 불분명할 때는 그것이 아무 의의도 갖지 못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부나 우리에게 조직되어 있는 사회 제도나 또는 그 제도가 잘 윤전되어 생산된 여러가지 축적될 만한 소위 문화의 유물도, 그 목적과 방향이 명확하지 않고 그릇되었을 때는 멸망을 자취해 가는 중요한 보조 수단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소돔 사람들이 다른 도시와 같이 가난하고 어려워서 먹고 살기에 급급하고 정신이 없었다면 이렇게 괴악하게는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베두인이었더면, 즉 유목민으로 사방에 흩어져 살 뿐 집단적으로 도시를 이루어 정착하여 사지 않았다면 소돔이 이렇게 집단적인 죄악의 소굴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 형태는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선히 사용되지 못할 때는 그것이 유능하고 유효한 만큼 또한 악을 향해 맥진시키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것이 소돔.고모라가 가지는 중요한 특성의 하나입니다.
이 마지막 세대에 있어서 사람이 가진 여러가지 과학적 방법이나 문화적인 발달은 인간에게 거대한 결과를 내게 합니다. 오늘날의 과학 기계는 옛날의 기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파괴의 무기만해도 옛날보다 더욱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대하고 대규모적이고 큰 결과를 내게끔 방법들이 모두 다 우수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생산하는 두뇌들이 주의 영광을 위한 역사의 방향으로 바로 나간다면 하나님 나라의 큰 역군 노릇을 하지만, 반대로 소돔 고모라적인 방향을 위해 그 역사의 성격을 바로 비판하지 못하고, 또 잘못된 것을 시정하여 바른 길로 나가려는 거룩한 회개의 생활의 길을 취하지 못하는 동안에는 그들은 마지막의 가장 무서운 심판과 멸망으로 맥진시키는 중요하고 유효한 방법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물질적인 부 뿐만이 아니라 사람이 가진 정신적인 재산이나 우수한 두뇌나 기능, 또는 우수한 과학적인 문명의 이기까지도 그렇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그러한 것들도 어떠한 방향으로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멸망을 신속하게 취하든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형태를 드러내서 이 멸망할 사회와 더불어 싸워 가면서, 멸망할 사회를 유지하든지 하는 것입니다.
증거하는 교회 있어야 그 사회가 유지됨
소돔 고모라의 문제 가운데서 우리가 또 한가지 배워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곳을 위해 도고를 할 때 그의 기도는 의인 50인, 45인, 40인, 30인 20인, 그리고 10인으로 끝났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같이 이것은 거룩한 교회가 늘 존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숨어있는 교회, 즉 역사적으로 현실화해서 현실적으로 한 사회적 형태를 취해서 증시할 만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교회는 의미가 없습니다. 숨어 있는 교회는 취해지나 그 사회는 멸망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가 유지되려면 그 사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의인들이 모여서 구체적으로 그 믿음을 증거하고 있어야 합니다. 증거하지 못할 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즉, 실존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 있겠지만, 그것이 아무런 실질적 형태나 능력이나 실존이 없을 때는 없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큰 교회에 들어가 보고, ‘이것이 교회인가 교회의 참된 속성과 참된 능력과 사명에 대한 각성이 있는가?’할 때 그것이 없다면 교회 부재입니다. 예배당 짓고 사람은 모여 있으며 정통이라고 스스로 떠들어도 교회 부재인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이 바로 롯의 날의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 열 명도 없으니 멸망시키려던 것을 중단할 수가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 이상은 어떻게 더 빌 수가 없었습니다.“의인 열 명도 없대서야 어떻게 할 수 있느냐?” 그것은 최소 한도의 사회적 단위로서 소위 교회로서 무엇을 작용 할 수 있는 단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만한 단위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의인 열 명이라고 하면 대가족 시대 같으면 가족 하나입니다. 아버지, 어머니하고 자식 여덟이면 됩니다. 손자까지 3대를 본다면 열 명은 금방 됩니다. 롯의 가족이 주께 다 의자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곧게 섰으면 그의 가족 하나 때문에 소돔 고모라가 살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었습니다. 롯이 그렇게 할 뻔도 했지만 그렇게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볼 때, 이 암흑과 같은 역사의 진행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증거하는 교회, 즉 교회의 속성을 명확하게 가지고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그 교회에 가보니까 교회로서의 사명감도 있고 자기의 서 있는 자리를 알고 교회의 속성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며 그리고 교회로서의 코이노니아의 실체를 나타내고 살더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나타나고 바로 전달되어야 하겠고 서로의 교제가 거룩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명확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확실한 증표입니다. 다 같이 기도하십시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롯의 시대와 노아의 시대와 같이 인자의 임하는 날에도 그러하리라 하신 이 말씀을 생각하며 저희들 스스로가 처해 있는 시대와 세계를 바라볼 때, 탄식할 만한 여러가지 사실이 있고, 실지로 롯의 시대와 노아의 시대의 성격이 각각 격렬하게 있음을 깨닫나이다. 그러한 속에서 저희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했사오니, 주께서 사랑을 베푸사 저희 교회가 진정으로 주님 앞에 받으실 만한 거룩한 교회로서의 확실한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여, 이 시대의 여러가지 패괴한 것과 괴악한 것을 주께서 그대로 지나쳐 버리시지 않을 것을 아나이다. 또한 모든 문물의 발달과 산업의 융성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않거나, 사람들의 노력이 공의와 자비를 나타내는 거룩한 사회의 성격을 조금이라도 더 드러내려는 방향을 취하지 않는 한 주님의 싫어버림을 당한다는 이 큰 진리를 여기서 배웠사옵니다.
저희로 하여금, 거룩한 교회로서 항상 모든 점에 있어서 명확한 사상을 가지고 주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가를 바로 알아서 살게 하여 줍소서. 주님, 저희들이 시대의 여러가지 징조들을 바로 식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합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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