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人間論)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 이해는 3단계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첫 째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처음으로 인류를 창조하셨을 때의 모습이 며, 둘째는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범죄 한 이후의 인류의 모습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새롭게 회 복된 인류의 모습인 것이다.
1. 에덴동산의 최초 인간
하나님의 은총과 복(福) 안에서의 인간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하나 님이 최초 인류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과 축복의 삶이 소개된 다. 창세기 1:28에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말씀은 인간들에게도 하나님과 같이 창조의 특권을 맛볼 수 있 게 해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차원의 창조는 아니지만 인간도 자신과 같은 모습의 존재를 잉태하고 낳아 기를 수 있 는 특권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창세기 1:29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동산의 모든 채소와 과실을 식물로 주셨다고 말한다. 아담이 범죄 한 이후에는 종신토록 수고 하여 야땅의소산을먹을수있게된사실을(창3:17) 고려해볼때창세기1장에서의 상황은 심판의 노동이 아닌 즐거운 근로를 통한 식물의 획득이 고, 그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의 선물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또 창세기 2:3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안식일의 복을 주셨다. 6일 간의 성실한 근로의 시간을 마친 후 한 주에 하루씩은 육체적으로도 안식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분께 경배와 찬송으로 나아가는 영적 안식 의 날을 허락하심도 하나님의 복 된 배려일 것이다.
창세기 2:8-15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주시고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는 일터로 허락하셨다. 좋은 환경에서 보람을 느끼 며 일하고 살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해주신 것이다.
창세기 2:16,17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음을 말해준다.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을 수 있는 자 유를 주셨다. 그런데 그 자유는 예외가 있는 자유였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예외규정으로 주어졌다. 여기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자유 는 세속적인 자유와는 다른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의 자유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자유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자 유이다. 자신의 위치를 벗어난 자유란 사실상 방종이며, 물을 떠난 물고 기처럼, 철로를 벗어난 기차처럼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한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의 자유만이 인간에게 주어진 참 자유며 인간이 참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주는 자유인 것이다.
창세기 2:18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신다. 아담이 독 처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못하다고 하시며 하나님은 아담에 게돕는배필로하와를주셨다.인간은홀로살아가는존재가아니라서 로 교제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 지음 받았다. 인간은 하나님 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하나님께서 삼위 간에 서로 교제하며 존재하시 듯이 서로 관계하며 사랑하고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다.
2. 인류의 대표 아담의 타락과 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주셨던 크고도 많은 이 같은 복들을 최초 의 인류는 잘 소화해내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 을 어기고 타락의 수렁으로 떨어졌다.
(1) 아담의 타락의 배경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 다. 즉 모든 만물들은 선하게 지음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 이후부터 인간의 타락의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그 사이 기간에 천사의 타락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까지의 내용 속에서 천사들의 타락의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찾아볼 수 없지만 인간의 타락이 제시되는 창세기 3장에서는 이미 타락한 천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바로 그 타락한 천사의 유혹으로부터 시작되었 다. 물론 그러한 사탄의 존재가 아담의 타락의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원 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탄의 유혹을 거부할 수 있는 도덕적인 자유로운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타락한 사탄의 존재와 그의 유혹이 아담의 타락의 배경이기 는하지만결정적인요인이라고할수없는이유는아담은자신의의지 적인결정으로그유혹을뿌리칠수있었기때문이다.그는 스스로 자신의 의지적 결단으로 하나님의 계명보다 사탄의 말을 따랐고 그렇게 함으로 스스로범죄했던것이다.따라서범죄의책임을면할수없었다.
(2) 아담의 타락사건에서 사탄의 전략
아담이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범죄 하였으나 그러한 결정을 하기까지 사탄은 치밀하게 그 타락의 길을 준비하여 접근했었다고 볼 수 있다.
의심을 불러일으킨 단계(창 3:1)
사탄은 하와에게 접근할 때 처음부터 강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의심하도록 유도하는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이 참으로 그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물어봄으로서 하 와가 아담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하나님의 명령의 내용에 대해서 의심하 게 만들었다. 또한 사탄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 라 다 먹되 한 가지 나무의 실과만을 금하셨다. 그러나 사탄의 질문을 생각 없이 부주의하게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이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들 을 먹지 말라고 하시는 옹졸한 신으로 오해하게 된다. 이처럼 사탄의 질 문은 마치 하나님이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못하게 하신 너그럽 지 못한 신으로 오해하게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 자체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했던 것이다.
노골적인 거짓말(창 3:4)
일차적인 접근에서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못한 하와에게 사탄은 좀 더 노골적인 거짓말로 접근했다. 어쩌면 하와의 마음속에서 싹트게 된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에 대한 의심을 사탄은 파악했을 것이다. 이제 흔 들리기 시작한 하와의 마음속에 사탄은 좀 더 강력한 불신을 불어넣으려 한것같다.하나님께서는선악과를먹는날에는정녕죽을것이라고말 씀 하셨지만 사탄은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뒤집어서 ‘정녕 죽 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성(信實性)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말을 한 것이다.
하와는 이때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각을 고쳐먹고 사탄의 유혹에 대항해야 했다. 그러나 하와는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훈련이 부족했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나 결국 사탄의 거짓 된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다.
외적인 유혹(창 3:6)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마음을 가진 하와에게 사탄은 그 유 혹의 마무리 단계로 들어간다. 사탄의 말을 듣고 보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즉 하나님이 금하신 나무는 왠지 더욱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 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다. 사탄의 말을 더욱 따라갈 수 있 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이로써 사탄은 최초의 인류를 타락의 구렁텅 이로 빠뜨리는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었고 인류는 그 이후로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 운명으로 전락되고 말았던 것이다.
아담의 타락하여 범죄 한 결과는 죽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육체적인 생애를 살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죽음을 향해가는 인생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러한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 인 간’의 모습을 성경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조명해준다
죄의식 /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 인간에게 찾아온 첫 번째 현상은 죄 의식에 사로잡인 삶이었다.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느끼며 죄의식 에 사로잡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으로 전락된 것이 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벌써 자신들의 수치를 깨닫고 무화과나 무 잎으로 가리고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다.
하나님이 구체적인 책망으로 꾸짖지 않았어도 그들은 이미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가 지게 되는 두려움(Awesome)이 아니라 범죄 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 에서 느끼게 되는 공포의 두려움(Fear)이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에게 마음 저변 깊숙이에서 그러한 두려움을 지니고 살아가게 된 것이다.
사회적 불화와 갈등의 삶(창 3:11-13) /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사 람에게 그것은 또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갈등으로 표출되어갔다.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었느냐 라고 물어보 시자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그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변명했다. 인류 최초의 가정불화가 시작된 것이다. 하 나님은 계속해서 하와를 문책하시자 하와도 또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 지 않고 도리어 뱀이 꾀므로 내가 먹게 되었다고 변명했다.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갈등의 관계가 시작되는 모 습을보게된다.하나님과의근본적인관계가왜곡될때인간과인간그 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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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체적임 심판(창 3:14-19) / 위에서 언급한 죽음의 권세의 간접적인 그림자 외에도 하나님은 죽음의 권세가 어떻게 직접적으로 인생 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를 구체적인 심판으로 알려주셨다. 아담에게 는 노동의 수고를 하와에게는 해산의 고통과 남편의 다스림을 그리고 인
간은 결국에는 정녕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심 판으로 임한 죽음은 영적 죽음과 육적 죽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로마 서 3:10-12에서 영적 죽음의 상태는 세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그것은 타락 후의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 는 어떠한 의(義)도 소유하지 못하게 된 것을 의미 한다.(10절) 물론 이 세상에는 선량한 시민으로 또 덕망 있는 인격자로 살아갈 수 있으나 하 나님과의 영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인정할 만한 어떠한 의(義)도 소유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둘째, 지적인 영역에서도 인간들은 불구가 되고 말았다. 본문이 ‘깨닫 는 자도 없고’라고 표현한 것은 타락한 인간이 어떠한 지적 활동도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도 그 의미는 하나님과의 영 적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하나님 나라의 일들에 있어서 그들의 지적인 활 동은 전혀 무능한 상태가 되었음을 말한다.(noetic effect of sin)
셋째, 타락한 인간은 의지적인 영역에서도 불구가 되었다. 인간 스스 로의 의지로는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게 된 것이다. 죄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이 이끌어주시기 전에는 아무라도 스스로 주께로 나아올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요 6:65)
이처럼 육신적으로는 살아있다 하더라도 그는 영원한 형벌의 심판을 향해 나아가는 운명의 인생으로 전락되고 만 것이다. 육신의 죽음은 에 덴동산에서 범죄 한 아담에게 즉시 찾아오지는 않았다. 선악과를 먹는 즉시 죽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차원의 인 생이 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가 죽음을 맞았고 그의 모든 후손들 도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 죽게 되었다.(롬 5:12)
결국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개입이 없이는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 인생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정녕 죽을 수밖에 없 게 된 ‘허무한 인생’들을 하나님은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다. 창세기3:15에서의 원시복음의 내용과 같이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실 것이라는 복된 소식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의 성취를 통하여 인류의 회복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3) 죄의 전가교리(아담의 죄와 인류의 죄 사이의 관계)
죄의 전가교리(원죄)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그의 후손들인 나머지 인류와 독특한 관계 속에서 살았다. 일차적으로는 모든 인류의 혈통적 조상이었지만 동시에 그는행위 언약의 대표였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 설정하셨던 행위 언약에 있어서 인류의 대표자로서 아담이 세움을 입었 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언약적 대표의 위치 때문에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고 또 죽음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되었 다고 성경은 가르친다.(롬 5:12-21 고전 15:21,22)
원죄(原罪)란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어려운 상황이다.그런데 어떻게 어린 아이가 죄인일 수 있는가? 성경은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죄에서 부터 그 원인을 찾아낸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범죄 한 후에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형벌은 그가 저지른 범죄로 말미암아 야기된 결과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아담의 범죄는 자신에 게 죽음을 가져온 결과 외에도 그것과 함께 모든 인류의 인생 속에 심각 한 문제를 가져왔다고 성경은 가르치는 것이다.
오늘 모든 인류는 자신이 스스로 지은 죄 때문에도 하나님 앞에서 죄 인으로 판명된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는 이미 아담 안에서 원죄(原罪)를 이어받아 부패한 성품으로 태어난 죄인인 것이다. 그러한 현상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행정원리가 바로 언약의 대표자인 아담의 존재의 성격이 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 으므로 그 대표의 범죄는 그가 대표하고 있는 모든 인류의 구성원들에게 도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로마서 5:12 이하의 내용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행정 원리를 행위 언약의 관점으로 설명해 준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 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 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12절) “한 사람의 범 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 즉”(15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 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18절)
원죄(原罪)와 자범죄(自犯罪)
그러나 아담의 죄 때문에만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아니다. 날마 다 우리도하나님의거룩한모습앞에서죄악된마음과행동들을보이 며 살아가고 있으므로 죄인인 것이다. 즉 원죄(Original sin) 뿐만 아니라,자범죄(Actual sin) 때문에 죄인인 것이다.
원죄는 모든 자범죄의 내적 원천이 된다. / 사과나무에서 사과 열매 가 맺히듯이 원죄의 영향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죄악 된 생각과 행동의 열매들이 맺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한 원죄는 하나이지만 / 자범죄는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로마서5:18에 보면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라고 말해준 다. 아담이 선악과의 범죄로 타락한 후에도 여러 가지 죄를 지었을 것이 지만 성경은 처음에 타락케 한 그 한 범죄의 행동에서 인류의 원죄의 원 인을 찾고 있다. 그러나 그 원죄의 영향 아래서 인류가 저지르는 자범죄 는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죄인
끝으로 원죄는 일반 사람들 혹은 복음주의자들 안에서도 반대를 받기 도 하지만 자범죄는 큰 어려움 없이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심지어 불 신자들까지도 자신이 저지르는 죄에 대해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 나 원죄란 수천 년 혹은 수억 년 전에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여겨 지는 그리고 만나서 얘기해본 적도 없는 한 아저씨(아담)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자기에게 그 범죄의 책임을 묻는 것과 같은 경우이기 때문에 일 반적으로는 수용되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르침들은 우리가 다 이해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이 될 때 받아들이는 것이다.창조,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부활, 재림 등 그 어떠한 기독교 교리의 가 르침들도 그러한 믿음의 관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신적(神的) 권위를 수용하는 신앙인에게는 아담 안에서 죄인 되었 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나의 이성적 판단 보다 더 정확한 진리적 가르침 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그리 힘든 문제는 아닌 것이다.
(4) 자유의지론
행위언약의 행정 안에서 아담의 범죄가 가져온 인류의 타락의 교리를 생각할 때 그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질문들 중의 하나는‘인간의 자유의지’ 문제이다. 개혁신학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는 달리 인간의 타락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전적 타락과 전적 부패를 말하게 된다.
과연 인간의 타락이 어느 정도까지인가? 전적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 의 말씀을 순종하기에 전적으로 무능력하다면 구원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 긍정적으로 응답할 수 없다는 말이 되고, 그렇다면 그 책임을 인간에 게 돌릴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성경도 “아버지께 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요 6:44)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자유의지에 관한 최초의 신학적 논쟁의 대표적인 사례는 4,5세기경에 전개되었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사이의 논쟁이 다. 펠라기우스는 인류에게 퍼져있는 죄의 우주성은 인정하면서도 죄의 문제에서 인간의 책임을 정당하게 지적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 가 주어진 것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 한 관점에서 아담의 타락 이후의 인간들의 의지는 죄에 속박되어 있지 않으며 단지 중립적인 상태에 있다고 보았다.
펠라기우스는 원죄의 결과도 아담의 죄는 아담 자신에게만 그 영향이 미쳐졌고, 그의 후손들까지 죄인으로 만드는 원죄라는 것은 없다고 했다.아담의 후손들도 에덴동산에서 범죄 하기 전의 아담과 같은 상태로 태어 나며 그러한 상태에서 자유의지를 바르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거룩한 삶 을 살고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라기보다는 오히려 구원의 궁극적인 결정은 복음을 받아들 이거나 혹은 거부하는 인간의 개인적인 의지에 달려있다고 본 것이다.
반면에 어거스틴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력의 가르침을 확립한 신학자였다. 물론 어거스틴도 그의 생애 초기에는 펠라기우스와 비슷한 관점을 지녔었다. 구원의 은총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먼저 믿음으로 반응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처럼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은총을 주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어거스틴은 타락 이후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심판의 결과로 전적으로 부패해 있으며 따라서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가 되었고 인간의 의지도 죄의 노예상태에 놓이게 되어 스스로 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선택할 능력이 전혀 없게 되었다고 했다.
Christian View of Salvation(구원의 은총)
Human Monergism(인간단독)Synergism(신인협동) Divine Monergism(신단독)
A : Pelagianism
B : Semi Pelagianism
C : Semi Augustinism
D : Augustinism
즉 인간이 가지게 되는 믿음조차도 사실은 하나님의 선물일 뿐(엡2:8), 인간 편에서 우리가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전혀 없다고 보 았던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적 필요성을 지적했던 것이 다. 그럼에도 어거스틴은 인간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하는 인격체임을 지적했다.즉인간은죄의노예상태에서결국죄를짓지만억지로범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인격적인 결정 속에서 죄를 짓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에드워즈의 관점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사이의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이 종교개혁시대 에는 종교개혁자 루터와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 사이에서 계속되었다.대체적으로 루터는 어거스틴의 입장에서 ‘노예 의지론’을 주장했고 에라 스무스는 펠라기우스의 입장에서 자유의지를 주장했다.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거스틴과 루터 혹은 칼빈으로이어지는 정통신학은 ‘노예의지론’을 성경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였지만 복음전도와 부흥운동의 상황 속에서 ‘노예 의지론’은 그렇게 환영받는 교리가 되지 못했다.
복음전도의 상황에서는 복음을 듣는 자가 믿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 하게 된다. 따라서 스스로 믿을 수 있는 마음을 회복할 수 없다는 무능 력의 교리는 불필요한 말로 간주되기 쉽다. 미국의 대각성운동의 시기에 이러한 교리는 환영받지 못했었고 그럼에도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정통 신학자들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과제로 여겨졌었다. 그러한 고민을 했던 인물 중에 미국의 청교도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를 들 수 있다.
에드워즈는 타락 이후 인간 상태를 ‘자연적 능력’(natural ability)과 ‘영 적, 도덕적 무능력’(spiritual, moral inability)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려 했다.인간의 의지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의지는 중립적이지만 그 의지를 사 용하는 인간의 주체로서 마음(heart)이 부패되어 있으므로 결국 범죄에 이르게 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인간의 의지에 관한 한 그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거부하 였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할 책임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그는 부패한 마음의 영향 아래에서 의지를 죄의 방향으로 사용하게 됨으로서 복음을 거부하고 죄의 길로 가게 된다고 본 것이다.
찰스 피니의 부흥 방법론
위에서 살펴본 에드워즈의 구분법이 후대의 ‘신 학파’(new school)에 의해서 확대 해석됨으로서 자연적 능력은 점차 더 확대되고 영적 무능력 의 영역은 더욱 축소되는 방향으로 나아가 칼빈주의 신학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에드워즈가 말했던 ‘자연적인 능력’과 ‘영적 무능력’의 구분은 인 간의 의지의 자유를 말하면서도 결국 칼빈주의 신학이 말하는 전적부패 와 무능력을 말하기 위함이었으나 그 이후 신 학파에서의 설명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알미니안 신학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았다.
그런 신학적 성향은 제 2차 대각성운동의 신학자였던 찰스 피니에게 서 확인된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교리를 강조하는 구 학파의 칼빈주의 를 꺼려했던 피니는 특히 대부흥운동이 전개되던 19세기 미국 상황 속 에서 ‘부흥 방법’의 개발을 강조했다. ‘참회자 지정석’과 같은 방법을 개발하여 집회 시간에 그 자리로 나오는 행위들을 통해서 회심을 유도하는 실용주의적 기법들을 사용했다. 인간의 방법들을 하나님의 영적 부흥과 동일시하는 ‘부흥주의’의 오류에 빠질 위험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자연적 능력을 강조하는 알미니안적 인본주의가 강조되고 하나님의 주권적 부흥역사를 인간의 기술로 유도해내는 부흥으로 전락시키는 위험을 안게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초자연적인 역사로 말미암는 부흥이 아닌 정해진 수단과 방법들을 사용하면 발생되는 인본주의적인 부흥을 말하게 될 때 그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을 의존해서 인간의 계획과 노력의 결과로서 이해되는 부흥으로 전락될 수 있는 것이다.
개혁신학의 입장(개혁신학이 가르치는 전적 부패와 무능력 교리의 중요성)
신자의 구원과 복음전도의 주제 속에서 전적부패와 무능력의 교리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의지는 죄의 노예가 되었으므로 스스로의 노력이나 계획에 의해서 영적인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자신의 상태가 완전히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적 필요성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도 대상자들 중에 “나중에 믿겠다.”는 반응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은 나중에 언제든지 자신이 의지적으로 결정하기만 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전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이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영적 세계를 볼 수도 없고 찾으려 할 마음도 생길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 재들인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에 만이 인간은 눈을 뜰 수 있고 어두움을 깨치고 빛으로 나아올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진정한 부흥이란 인간의 계획과 열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베푸심 으로 말미암아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일 들을 진행해야할 것이나 중생과 구원과 부흥의 역사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물론 인간의 방법들을 사용하시는 가운데)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다.
김광열 교수(총신대 신대원 조직신학)/http://www.thetruthlighthouse.org/wp-content/uploa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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