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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5대 교리에 대한 성경적 이해

하나님아들 2020. 8. 31. 15:05

칼빈주의 5대 교리에 대한 성경적 이해

 

1.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왜 전적 부패 교리가 먼저인가?


전적부패 교리는 칼빈주의 5대 교리(The Five Points of Calvinism)를 기억하기 쉽게 나타내주는 TULIP 중에서 첫 번째 글자에 해당하는 T(Total Depravity)의 내용이다. 원래 도르트 총회의에서 결정한 신조(the Cannon of Dordt)에는 TULIP중 U자에 해당하는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이 첫 번째 내용으로 제시되어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무조건적 선택 교리는 다른 교리들에 비해 신랄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 교리에 대한 충분한 성경적 설명과 확신을 갖기도 전에 부정하거나 매도해 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먼저 전적 부패의 교리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인간의 죄된 성질과 상태를 정확하게 묘사해 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에 대해 잘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이 구원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처한 영적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진단하는 일이다. 

 

여타의 4가지 교리들(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제한 속죄 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처방전(the remedy)과 같다. 처방전을 통해 약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먼저 정밀한 진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전적 부패 교리는 다른 4가지 교리들보다 먼저 설명되어질 필요가 있다.

인간 부패와 타락(Depravity)에 관한 부패한 주장들


‘Depravity'라는 말은 우리말로 ‘부패’ 혹은 ‘타락’이라는 말로 번역되어진다. 인간의 ‘부패’와 ‘타락’과 관련된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들은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던 시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사회적 관심사인 동시에 가장 해결하기 힘든 난제중 하나로 남아 있다. 

아무리 자신의 부패와 타락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라해도 자신의 삶 전반에 드리워져 있는 어두운 악의 세력과 죄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할 것이다. 세상에 악과 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은 종교와 인종과 학식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인류가 갖고 있는 공통된 생각이다. 하지만 인간의 부패와 타락을 바라보는 관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異見)들이 있다. 

 

오늘날 세속 사회에서도 인간의 부패와 타락으로 인해 야기되는 심각한 사회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수많은 병폐들의 원인이 되는 인간의 근원적 부패의 속성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부패되어가는 세상에 대해서는 염려하지면서도 이미 부패되어있는 양심에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한편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마찬가지로 이 중대한 사안에 대해 많은 주장들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펠라기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인간의 부패와 타락에 관한 어거스틴주의와 칼빈주의로 이어지는 정통 교회의 입장을 처절하게 반대했거나 교묘하게 왜곡하였다. 과거 진리의 은혜가 풍성하게 드러났던 시대에 이단적 사상으로 정죄되었던 주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교회의 보편적 사고인양 득세하고 있으니 더욱 주의가 요망된다.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과 달리 인간의 부패와 타락의 문제를 개별적인 의지의 선택 문제로 보았다. 이 말은 아담의 죄의 결과는 아담 개인의 자의적 선택에 국한됨으로 아담 이후의 인간들은 아담의 원죄의 죄책과 오염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날 때부터 죄를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는 문제에 있어서 완전히 중립적 존재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럼에도 세상에 죄가 보편적이게 나타나는 것은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죄를 모방하고자 하는 습관 때문이라고 하였다. 

엄격히 말한다면, 펠라기우스에게는 원초적인 죄인이란 없으며, 설사 누군가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죄인으로서 정죄 받는 것이 아니라 죄의 행위만을 판단 받게 된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입장이 세미 펠라기안주의자들에 의해 수정, 보완되었다. 세미 펠라기안주의자들은 아담의 원죄와 원죄의 전이(轉移)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펠라기우스의 입장을 수정하여 아담과 그 이후의 모든 사람들의 타락을 인정함과 동시에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세미 펠라기안주의자들은 타락과 은혜의 균형감을 하나님과 죄인사이에서 벌어지는 구원의 거래로 변질시켰다. 타락한 사람이라도 예수를 믿게 되면 구원에 합당한 선을 행할 수 있게 되므로, 하나님과 더불어 구원을 이루는 책임 있는 존재로서 서게 된다고 하였다. 17세기 이후 개신교회의 주류로 행세하고 있는 알미니안주의는 이러한 펠라기안주의와 세미 펠라기안주의의 주장을 좀 더 복잡하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체계화한 이론에 불과하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입장을 견지하는 정통 개혁주의자들은 토르트 회의를 통해 성경적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설정함으로써 이들의 반성경적 주장을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근원적인 면에서 볼 때, 펠라기안에서 세미 세미펠라기안 그리고 알미니안에 이르는 일련의 공통적인 사상은 인간의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력에 대해 의심하고 부정하는 일반 자연 종교의 주장과 맥이 닿아 있음을 보게 된다. 그뿐 아니라 인간의 부패성을 정욕이라는 애매한 낱말로 표현하여 공로주의 구원관을 정당화한 가톨릭의 입장과 일맥상통하다는 점에서 이들에게서 공통된 목적으로서의 잘못된 성경 이해의 모습을 보게 된다.

부패에 관한 성경적 개념


인간의 부패성에 대해 근원적인 고찰을 위해서는 인간이 어떤 상태와 조건에서 태어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두 개의 성경구절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 5:12-14)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이 말씀들은 아담의 부패와 타락은 아담 개인으로서의 일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자의 성격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나타난다. 즉 아담이 범했던 죄와 그 결과는 그 자신의 삶과 인격에만 제한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 인류 안에서 똑 같은 방식으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아담을 포함한 전 인류는 그 전체에 있어서나 그 개개 일원에 있어서나 동일하게 죄를 범한 상태에 있고, 또한 범죄한 조건아래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이렇게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이 죄악된 상태와 조건 안에서 태어나는 것을 가리켜, 신학적으로 ‘원죄’(original sin)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가리켜, 시편 기자는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고백하는가 하면, 바울은 에베소서 2:1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원죄의 영향아래 있다. 한마디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음’가운데 있었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진술이다. 이처럼 원죄는 모든 인류가 죄악 중에 날 수 밖에 없음을 증거하는 죄의 내적 뿌리요, 근원적으로 모든 사람이 ‘죽음’의 상태에 처해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따라서 모든 인류는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러한 원죄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원시적 죄책(original guilt)과 원시적 오염(original pollution)이다. 전자가 아담이 범한 죄에 대한 책임이 그의 모든 후손에게 전가되었다는 의미라면, 후자는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이 죄에 대해 갖는 자세 혹은 성질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아담의 죄성을 그대로 전가 받은 인류는 죄에 대해 의도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날 때부터 타락한 인류가 죄에 대해 보인 반응은 어떠하며, 그 결과는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가? 우리는 이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전적 부패’ 교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전적’이란 말의 의미와 정통 신앙고백서의 입장


우리는 앞서 부패에 관한 성경적인 개념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도르트 신조의 작성자들뿐 아니라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늘 ‘부패’라는 용어 앞에 ‘전적’(total)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서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때때로 ‘타락’이라는 낱말 앞에 붙어 있는 ‘전적’이라는 단어는 인간을 악행만을 일삼는 악의 화신(化身)이나 심지어 마귀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해는 ‘전적’(total)이라는 낱말을 ‘절대적’(absolute)이라는 말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언어적 뉘앙스의 혼동인데, 성경은 인간의 타락을 ‘전적’이라고 표현하지만, ‘절대적’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아담이 타락을 했다고 해서 마귀나 동물로 존재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니다. 아담은 타락했지만 여전히 다른 피조물과 근원적으로 다른 존재로서 인간의 특질을 유지하였다. 즉 전적 부패라는 것이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내적인 지식이나 선과 악을 분별하는 양심이 없어졌거나 다른 피조물과 차별되는 인간으로서의 독특성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아담의 원죄아래 있는 모든 사람이 절대적으로 온갖 유형의 죄악에 빠진다는 의미역시 아니다.
 
성경은 거듭나지 않은 자도 선을 행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심지어 율법없는 이방인도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롬 2:14). 그러나 이방인과 같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행하는 선은 본질적으로 상대적 개념에서의 선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이것으로 정치와 윤리, 복지와 문화, 과학과 예술의 증진에 이바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상대적 선을 통해서는 결코 인간의 내적 본성을 새롭게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원과 관련된 그 어떠한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상대적 선은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유지하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근거는 될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 선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구원에 관하여 전적으로 부패하며 전적으로 무능력하다. 우리는 이 부분을 정통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관하여 이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을 배격하는 바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죄의 노예일 뿐이며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요3:27)없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결코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이끌지 있으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임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 누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성경은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약한다면우리는 어떤 생각조차도 감히 우리 것으로 내놓을 수 없는데, 이는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후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따라서 우리는 사도가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말한 바를 확실하게 붙잡고 나가야 할 것이다. 주께서 (요15:5)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외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또한 하나님의뜻을 따를 수도 없는 것이다.” (벨직 신앙고백서 14장, 인간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참된 선을 행함에 있어서 인간의 무능력 중에서)


62문 “왜 선행을 통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으며, 왜 선행은 의로워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답 :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며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그것은 불완전하며 여전히 죄로 더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62문과 답변)

‘전적 부패’ 교리 관한 5가지 의미와 성경적 진술

 

1. 아담이 범죄한 결과 인간은 죄 가운데 출생하게 되었고 자연히 영적으로 죽게 되었다. 따라서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엡 2:1-3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요 3:5-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2.  타락의 결과 인간은 영적 진리에 관하여 눈이 어두워졌고 귀가 멀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지성은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졌고 그들의 마음은 부패했고 악하게 되었다.

• 창 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 렘 4: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 렘 17:9,10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 요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 엡 4:17-19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 딛 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3. 죄인이 성령의 중생하시는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새롭게 나아가기 전까지 그들은 마귀의 자녀들이고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죄의 종이다.

• 요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딤후 2:25,26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 요일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 딛 3: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 죄의 통치는 보편적이다. 즉 모든 인간은 죄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다. 결국 의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다.

• 대하 6:36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그들이 주께 범죄하므로 주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적국에게 넘기시매 적국이 그들을 사로잡아 땅의 원근을 막론하고 끌고 간 후에”
• 욥 15:14-16 “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
• 전 7: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 롬 3:9-12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요일 1:8,10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중략) …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예정 교리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모순


무조건적 선택 교리는 일명 TULIP 교리라고 부르는 칼빈주의 5대 가르침(The Five Points of Calvinism) 중에서 U자(字)에 해당하는 두 번째 내용이다. 앞서 진술한 바와 같이 도르트 총회(1618-9)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항변에 대한 칼빈주의자들의 반항변적 성격을 가지는데, 이 회의의 전체적인 논점은 예정교리(론)와 관련되어있다. 예정 교리는 교회 역사 가운데 정통 교회의 사상적 맥을 이어가는 믿음의 선진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인 신앙고백이다. 루터뿐 아니라 칼빈 그리고 그 이후에 나타난 무수히 많은 종교개혁자들은 예정교리를 성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이며 중요한 내용으로 삼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예정교리는 성도들을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고약한 주장처럼 인식되었다. 예정의 예자만 들어도 골치가 아프고, 예정교리하면 쓸데없는 논쟁이 연상된다. 목회자들은 더 이상 강단에서 예정 교리를 가르치지 않고, 성도들은 전혀 예정교리에 대해 관심이 없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예정 교리가 개신 교회에서마저 눈총을 받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예정이라는 말에 대한 선입견과 오해 때문이다. 

예정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정 사상은 숙명론이나 운명론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예정을 이러한 절망적인 생각과 연결짓는 사람들은 예정 교리를 말할수록 인간은 한낱 무의미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고 단정한다. 또한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인생의 결론이 이미 결정되어진 것이라면 생에 대한 어떤 종류의 선한 의욕이나 도전은 의미 없는 일이며,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은 결코 공평하지도 자비롭지 않는 변덕스런 폭군 같은 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정 교리를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조차 일치된 견해를 갖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다. 교회 역사 가운데 예정 교리는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었으며, 이 논쟁을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오늘날 기독교 거장이라고 존경받는 인물(예를 들어, 알미니우스, 멜랑크톤, 웨슬레, 찰스 피니, 빌리그레이함등)이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더구나 근대에 들어서 선교의 세계화와 더불어 교회의 외적 성장과 부흥이 교회의 중심 이슈로 떠오르면서 예정 교리는 더욱 애물단지처럼 취급되고 있다. 

예정 교리는 오히려 교회와 선교의 확장에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예정교리를 배척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실을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 교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개인적인 학구열이나 자존심 때문이 아니다. 더구나 예정 교리를 칼빈주의자들이 강조했던 신학 사상이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예정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정에 관한 많은 증거 구절들이 있지만, 우선 다음의 세 가지 성경 구절을 살펴보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였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위의 성경 구절은 성경을 단순한 인간의 사색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왜 예정 교리를 피해갈 수 없는지, 아니 왜 예정 교리를 의심해서는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예정 교리는 결코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예정 교리는 성경에서 가장 일관되게 강조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진술이다. 

그래도 의심이 남는다면 바울 사도가 기록한 서신서들의 앞부분을 보라. 바울의 거의 모든 서신들은 복음을 위해 선택(택정함)을 입은 고백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철저한 예정론자였으며, 이에 따라 그가 쓴 대부분의 서신서들의 문두에는 예정 사상이 드러나 있다. 바울이 쓴 서신서들을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역으로 말한다면 예정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곧 바울의 서신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예정과 하나님의 주권


예정(predestination)이라는 단어는 ‘사전에’(beforehand)라는 의미를 지닌 시간 접두사 ‘pre’라는 말과 ‘목적지'라는 뜻의 ‘destination'라는 말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였다. 즉 예정이란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그 목적지에 관한 어떤 일을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성경은 모든 인생이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오직 두 곳, 천국과 지옥뿐이라고 증거한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사후에 천국과 지옥 사이에 중간 단계로서 연옥이라는 제3의 거처를 말하지만 이것은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아주 기본적인 형태로 볼 때, 예정교리란 인생의 최종 목적지인 천국과 지옥에 가게 되는 일이 인생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정하심 가운데 놓여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신자의 구원에 관한 예정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가운데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 사상은 언제나 해결하기 쉽지 않은 많은 물음들을 야기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유의 주권자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 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장차 될 일을 미리 정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너무나 필연적인 결과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무언가를 미리 정하실 수 없다는 그는 진정한 주권자가 아니며, 모든 것을 자신의 주권대로 행사할 수 없는 분이라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기 전에 그 사람에 관한 구원 문제를 이미 결정하셨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자이시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만약 어떤 사람의 구원 문제가 당사자의 의지와 조건에 의해 결정되어진다면 하나님은 결코 모든 피조물에 대해 완전한 주권을 가지신 분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을 가장 정직하게 인정하는 신앙고백이다.
 
예정과 하나님의 주권의 상관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악(죄)의 문제에 대해 성경적인 답을 얻어야 한다. 과연 악은 어디에서 왔는가? 하나님은 악이나 죄의 그림자조차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악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될 수 없다. 그러나 악조차 하나님의 주권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악이 들어오는 것을 사전에 완전히 차단하지 않으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 악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다는 사실이다. 사실 악이 하나님으로부터 연유한 것이 아니라면 악한 일의 결과에 대해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필요가 없다. 

즉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타락한 사람이 악한 결과를 맞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일에 대해 하나님은 그 어떤 연대 책임을 지실 필요가 없으시다. 왜냐하면 악의 발생과 참여는 하나님의 뜻을 배제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타락한 사람에게 공의를 적용하실 의무가 있을지언정 긍휼이나 사랑을 베푸셔야 할 도덕적 책임이 전혀 없으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스스로 타락한 결과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의 책임인양 생각하는 것은 살인범이 중한 형벌을 선고 받은 것을 두고 마치 재판장이 사랑이 없는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세상에서도 범죄한 사람에게는 마땅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린 중대한 범죄에 대한 타당한 처벌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심판받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풀기로 하셨다면 하나님께서 비난받아야 할 내용인가?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과 타락한 세상과의 관계를 다음의 네 가지 주장을 생각해 보자.
 
1.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시지 않기로 결정하실 수도 있으셨다.
2.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실 수도 있으셨다.
3.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확보할 수도 있으셨다.
4.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일부 사람들의 구원을 확보할 수도 있으셨다.
 
일단 첫 번째와 세 번째의 주장은 배제되어야 한다. 두 주장은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 

 

이에 반해 사람들이 가장 호감을 갖는 주장은 단연 두 번째이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을 전제로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그 대상이 모든 사람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공평성이 잘 접목된 주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대상이 모든 사람이라는 점에서 만민 구원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주장은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기회인만큼 구원을 위한 궁극적인 결정권은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기회를 주셨다고 언급하지도 않거니와 구원이란 것이 사람편에서 결정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두 번째 주장 역시 성경적이지 않다. 

 

여기서 네 번째 주장은 칼빈주의자들이 받아들이는 내용으로 성경적인 진술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나 왜 하나님께서 일부의 사람만에게만 구원을 주시기로 예정하셨는지에 대해 불만을 나타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이러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직접적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며, 이 사건에 동참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들로 한정되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하나님께서 일부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로 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에서 볼때, 하등의 문제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들에게는 긍휼을 베풀지 않기로 결정하신 일은 부당한 처사인가? 그렇지 않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겪어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대가다. 어떠한 죄의 티끌이라고 연루되지 않은 하나님 편에서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는 결코 불의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죗값을 묻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에게는 죄를 심판하시는권리가 있는 동시에 죄를 제거하실 권리도 있다. 하나님에게는 에서의 죄악된 행동을 심판하실 권리도 있지만 야곱의 죄악을 긍휼로써 덮으실 권세가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다. 따라서 예정교리는 피조물(특히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행사하심을 전적으로 인정하게 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이러한 인식으로부터시작된다.
 
무조건적 선택의 의미

종교개혁자들은 예정을 말할 때에, ‘이중예정’(double predestina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즉 하나님의 예정의 범주 안에는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ion)로서의 예정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택함 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택과 같이 유기 역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기초해 있으며,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이루어진다. 유기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으로서의 심판에 대한 예정이라면 선택은 죄에 대해 간과하시는 은혜에 관한 예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개혁교회의 예정 교리의 핵심은 유기의 예정을 강조하고 확인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주어진 구원이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부터 기인된 오직 은혜의 산물임을 강조하는데 있다. 그런 점에서 ‘무조건적’(unconditional)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가장 적절하게 묘사해주는 단어이다.
 
사실 알미니안주의자들도 창세전 예정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치는 예정이란 조건적(conditional) 예정이다. 즉 하나님께서 미래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지 혹은 믿음을 선택할지를 미리 알고서 그들을 예정하시기로 하셨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선택을 전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서 옳고 그름을 선택할 수 있는 중립적 존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래적으로 의지를 결정하는 마음, 동기, 지향성 자체가 죄로 인해 부패하고 오염되었다. 나쁜 나무에게서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듯이 타락한 죄인은 행위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선택해서 얻은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선택하셨기 때문에 얻게 된 선물이다. 따라서 알미니안적 예정교리는 성경적 구원론과 배치되는 사설(邪說)이다.
 
한편 무조건적 선택 교리는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 오직 은혜에 기초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곧 목적에 따라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구원에 관한 한 그 충분한 의미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사역임을 인정하게 된다. 간혹 이 말을 오해하거나 남용하는 사람들은 구원의 조건이 없으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자신의 불의한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조건들이 있다. 예를 들어,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어쩌면 성도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행위면에서 강조되어지는 내용들조차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제대로 된 열매를 맺기란 불가능하다. 여기서 무조건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는 데 있어서 우리와 관련된 어떤 것을 조건으로 삼지 않으셨다는 개념이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할만한 그 어떤 조건도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직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를 조건 없이 선택하신다.
 
예정교리가 주는 실제적 효과

이 교리가 성경의 내용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며, 교육적으로 가르쳐야 할 당위성을 가진 것인가? 하는 점에서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에서는 몇 가지 목적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적 가르침으로서 교육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런 점에서 먼저 인식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일반 사람들이 이 교리를 이상스럽고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그들의 일반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초월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칼빈은 “(예정교리를 부인하는) 그러한 자들은 선지자, 사도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의 입을 통하여 그 교리를 가르쳐 주신 성령을 통제하는 사람들이다. … (중략) … 이 교리를 침묵케 하기보다는 차리라 온 세상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눈앞에 무한한 자비의 보화를 펼쳐 놓으셨는데,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 보화를 발밑으로 던져 버린다면, 그것이 과연 정상적인 행동이겠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극히 겸손한 태도로 성경을 대한다면 이 교리는 로레인 베트너(Loraine Boettner)의 표현대로, 바다의 고기처럼, 숲의 나무처럼 진리를 더욱 풍성하게 하며, 하나님에 대한 바른 앎을 추구하는 신앙 교육을 위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엡 1:4-6).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정으로 그 분의 뜻을 찾고 깨달은 사람들은 누구나 예정교리속에서 하나님의 깊고도 부요한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될 뿐 아니라 실제적인 신앙의 유익을 얻는다(롬 11:33). 여기서는 이 교리로 인해 얻게 되는 실질적인 세 가지 유익을 생각해보자.
 
첫째, 예정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만 하는 이유를 깨닫게 해 준다.

 하나님의 선택 사상은 구원의 전 과정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 삼위 하나님의 통일성 있는 역사가 그 원인이라고 설명될 때에,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성(전적타락)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이 교리는 구원에 대한 확신에 도움을 준다.
이 교리는 성도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인 위로를 준다. 심지어 신앙으로 인해 박해를 받거나 순교의 자리에 있을 때에라도 불만이나 불신을 갖기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신앙의 책무를 끝까지 감당하게
한다. 이 교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성도는 모든 일 중에서도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시는 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셋째, 이 교리는 선교에 바른 확신을 갖게 한다.
예정교리에 대해 확실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설령 자신의 계획대로 선교가 되어 지지 않는다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에 대한 궁극적인 구원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말씀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하시는 은혜를 힘입어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음을 증거하는 수단으로 삼아주실지라도 그 복음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모든 역사는 전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예정교리를 지지하는 성경 구절들
 
1. 구약 성경
 
•신 7:6,7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왕상 3:8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시 105:6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의 행하신 기사와 그 이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찌어다” 
•시 132:13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잠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사 41: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사 45:4 “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찌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2. 신약 성경
 
•마 11:25,26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
다”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24: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막 13:20 “만일 주께서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셨느니라”
•눅 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 13: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롬 8:28-30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9:11-13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11:5, 7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엡 1:3-5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2:8, 10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고전 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살전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살후 2: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딤후 2:10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딛 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히 5: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벧전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벧후 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유 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계 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3.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속죄의 필요성과 의미
 
칼빈주의의 5가지 교리(The Five Point of Calvinism)중 세 번째(TULIP 중 L자(字)에 해당하는 제한속죄 교리는 ‘복음의 정수’라고 불린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부패되었다. 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 철저하게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가 된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죄에 대해 전적으로 반대이신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의와 거룩함으로 인해 죄를 묵과하실 수도 없거니와 죄를 반드시 처벌하셔야만 했다. 죄인된 사람은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요구를 만족케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절대적 의를 만족시킬 분은 절대적인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쁘신 뜻가운데 하나님의 절대 요구를 완성하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나실때부터 인간의 본성을 취하심으로 자신을 죄인들과 동등하게 하셨고, 그들의 법적인 대표자, 혹은 대리인으로서 대속적인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요구를 완벽하게 성취하셨다. 

그 결과 사람들은 모든 죄와 정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구원을 얻게 되었다. 이처럼 구원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속죄교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의 근간을 이루는 내용이다.
 
‘속죄’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히브리어로는 ‘키페르’라는 말로 ‘죄나 죄인을 가림’(covering)을 의미하고 헬라어로는 ‘힐라스모스’라는 말로 ‘진정시키는 수단이나 도구’를 뜻한다. 즉 ‘속죄’라는 말은 두 가지 중요한 성경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첫째는 인간의 ‘죄’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만족’이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지만, 의에 대하여는 만족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죄와 의에 대한 절대적인 요구를 만족하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전통적으로 ‘속죄’라는 말의 영어식 표현으로 ‘atonement'라는 단어지만 동일한 의미를 지닌 다양한 표현들이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random’(속죄), ‘reconciliation’(화해), ‘propitiation’(속죄), ‘satisfaction'(만족), 'redemption'(구속)이다. 이러한 영어식 표현들은 ‘속죄’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다양하고 풍성하게 전달하며, 무엇보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가능해졌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해준다.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나?
 
아마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치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대해서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는 성경적인 구원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말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진 특별한 의미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은 누구의 죄에 대한 속전을 지불한 것인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된 자는 누구인가?”하는 것이다. 이 질문들을 한마디로 종합한다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모든 사람(all man)을 위한 일이었는가 아니면 일부 사람(some people)을 위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물음들이 지닌 성경적 함의의 중요성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케케묵은 신학적 논쟁처럼 들리겠지만 이러한 물음들은 교회가 세워진 이후 한 번 도 중단된 적이 없으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정통 교회(참된 교회)와 비정통 교회(거짓된 교회)를 구분하는 기준점이 되어 왔다.
 
대개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상이한 답변이 있어 왔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의 입장차이다. 알미니안주의자는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하는 한편 칼빈주의자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택한 일부의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해 왔다. 두 진영 모두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필요성(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서는 공감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가 미치는 범위와 대상에 대해서는 현격한 이해차를 드러내고 있다. 알미니안주의자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모든 사람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보편 속죄를 강조하는 반면 칼빈주의자는 오직 믿음으로 거듭난 택자들을 위한 것으로서 제한 속죄를 주장한다.
 
얼핏 보면 칼빈주의보다 알미니안주의의 견해가 일반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심각하게 여겨야 할 문제는 성경 진술과 알미니안의 견해가 정반대라는 사실이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만약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다면 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개인의 죄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이루고자 행하셨던 십자가 사건이 개별적인 사람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던 말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시고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다면 죄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란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럼에도 누군가 구원을 받지 못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자체에 결정적인 한계가 있거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한 보다 못한(less than) 하나님이거나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닐 확률이 높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이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알미니안의 주장은 귀에는 솔깃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논리면에서도 일관성이 없으며, 결정적으로 성경의 진술과도 배치된다. 그러나 한 가지 염두해 두어야 하는 사실은 알미니안의 보편 속죄 교리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성경 해석에서 비롯되어졌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들은 성경에 나타난 ‘세상’(요 1:9,29; 3:16; 4:42; 고후 5:19; 요일 2:1,2; 4:14등)이나 ‘모든’(롬 5:18; 고후 5:14,15; 딤전 2:4-6; 히 2:9; 벧후 3:9등)이라는 용어를 근거로 자신들의 보편 속죄 교리를 옹호한다. 혹자들 가운데는 이 점 때문에 당혹스러워할 수도 있다. 어떻게 같은 성경을 기반으로 전혀 다른 이질적인 주장이 가능한 것인가를 되묻곤 한다. 하지만 교회 역사는 같은 성경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이해를 가질 수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성경 이해의 핵심은 누가 성경을 소유하고 있는가 혹은 성경을 읽고 있는가라는 것보다도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있는가, 성경을 하나님의 뜻으로 제대로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이 말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바른 지식과 이해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본의(本意)를 드러내는 바른 해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며 순종하고자 하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알미니안과 칼빈주의의 성경 해석의 차이점을 살펴보고, 둘 중 어느 편이 정말 성경적인 해석인지를 확인해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제한(Limited)이라는 말의 의미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칼빈주의자들은 ‘속죄’라는 말 앞에 ‘제한(된)’이라는 용어를 덧붙였다. 이 말은 칼빈주의자들이 창안한 단어가 아니다. 다만 보편 속죄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알미니안, 카톨릭등)의 주장을 엄밀하게 구별하고 차단해야 할 필요성에 의해 첨가된 단어이다. 하지만 혹자는 이 단어를 부담스러워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그 구원하는 능력에서 한정되었음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칼빈주의자들이 이 단어를 사용할 때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능력이라는 초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속죄하시는 대상과 범위에 관하여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은 그 무엇으로도 제한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구원의 능력을 발휘하심에 후회나 부족함이 없으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악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셨다. 이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적 은혜가 무제한적인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서 드러난 표상이다.
 
그러나 성경(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조차도)은 그리스도의 무제한적 속죄의 능력이 제한된 사람에게만 적용되어진다고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창세전에 택정함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무제한적으로 적용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무제한적 속죄의 능력이 제한된 특정인들 즉 선택함을 받은 신자들에게만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제한 속죄’라는 용어는 ‘특별 속죄’(Particular Atonement) 혹은 ‘한정 속죄’(Definite Atonement)라고 불릴 수 있다. 

이 의미만 명심하고 있다면 ‘제한(된)’(limited)이든 ‘특별(특정한)’(particular)이든 ‘한정(된)’(definite)이라는 말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경적 의미를 정확하게 명시해준다.

옮음과 그름을 위한 변증과 해명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보편 속죄’ 교리와 ‘제한 속죄’ 교리는 내용적으로 상반된 주장이다. 성경은 이질적인 두 가지 교리를 동시에 말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은 자체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며, 성도들은 혼동에 빠질 것이다. 보편 속죄‘와 ’제한 속죄‘는 양보나 이해의 선에서 적절하게 타협할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으로서 분별해야 할 사안이다. 

이 일에 대한 변증과 해명을 목적으로 먼저는 성경에 광범위하면서도 일관되게 언급되고 있는 제한 속죄 근거 구절들중 대표적인 내용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 후에 반(反) 혹은 비(非)칼빈주의자들이 내세우고 있는 보편 속죄 교리에 관한 근거 구절들의 타당성을 검토하면서 바른 성경 해석을 기초로 한 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제한 속죄 교리를 지지하는 성경 구절
 
•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 눅 1: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 눅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 사 53: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 암 3: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 요 6:37-39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 요 10:14,15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요 10:26-28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요 15:13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 요 17:24-26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 롬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엡 1:3-5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엡 5:25-27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어려운 구절들 그러나 확실한 구절들
 
•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 딤전 2:4-6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딛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 히 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일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 요일 4: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 고후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 딤후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은혜의 본질 VS 은혜에 대한 왜곡된 시선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란 칼빈주의 5대 교리의 영어식 이니셜 TULIP 중에서 네 번째 두문자 I자(字)에 해당되는 교리이다. 이 교리 역시 앞서 언급했던 T(전적 타락), U(무조건적 은혜), L(제한 속죄) 교리 뿐만 아니라, 다음 주에 언급하게 될 P(성도의 견인) 교리와도 전적으로 일치한다. T와 U가 사실이라면 L, I, P 역시 사실이다. 하나가 옳으면 다같이 옳은 것이지 일부만 옳거나 틀리거나 할 수 없다. 성경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 일부 성경 구절만 천착하거나 또는 일부 구절을 의도적으로 거부 혹은 은폐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성경은 부분(적) 복음 혹은 부분(적) 진리가 아니다. 66권 성경 전체의 각 구절 말씀은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구원의 계시이며, 완전한 진리이다. 따라서 부분 복음이나 부분 진리란 있을 수 없다. 있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부분 복음이나 부분 진리가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경고를 두려운 마음으로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 1:7-9)
 
지금까지 언급해 온 칼빈주의 교리가 성경 전체의 국면을 거짓됨 없이 진술한 내용이라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이 교리들이 성경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음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복음으로 취급하는 불경(不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인이라면 은혜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은혜라는 말만큼 자주 사용되는 단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 단어는 교회의 보편적인 용어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독교 역사를 돌아볼 때, 이 용어만큼 잘못 이해되고 있는 단어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은혜란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조건없이 베풀어주는 호의(好意)와 긍휼을 가리킨다.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 하나님의 구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믿음이전에 은혜가 선행되어야 한다. 즉 은혜는 믿음을 가능케 하는 선(先) 조건이며 믿음은 은혜를 증명하는 후(後) 결과인 셈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그의 은혜로서만 가능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을 전제로 한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자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증언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위의 성경 구절들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첫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둘째, 사람은 구원에 관한 한 철저하게 무능력하다. 그런데 이 명백한 진술을 반대하거나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는 사실에 회의적이다. 오직 은혜라는 말이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선택과 배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 역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은혜의 상호 관계를 인정한다. 

그러나 이들은 은혜라는 말에다 전적 혹은 오직이라는 단어보다는 부분 혹은 일반적이라는 단어를 붙이기를 좋아했다. 이로써 이들은 사람은 타락을 했으나 구원에 있어서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을만큼 부패한 것은 아니며,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중요한 측면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의지나 선택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으신다는 소위 협력적 구원설을 주장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하나님이 제시한 조건에 사람이 얼마나 적절하며, 충실하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편에서의 행위에 있다. 인간의 의지와 선택의 결과로서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본 것이다. 만약 이들의 주장이 맞다만 방금 언급한 성경 구절들은 거짓된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의 주장을 저주받아 마땅한 다른 복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구원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조건적, 협력적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 성경의 진정성과 진실성을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결단코 이들의 주장을 성경적인 것 인 양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선물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단독 사역
 
흔히 구원에 있어서 오직 은혜 교리를 반대하거나 불신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두 종류의 예화가 있다. 

첫 번째는 중병에 고통당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죄인은 심각한 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있다는 것이다. 죄인의 병을 고쳐 줄 의사도 없고, 자연적으로 나을 희망도 없다.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치려고 하셔도 입을 열어 약을 받아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낫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알약을 받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을 주시는데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사람은 결코 살아날 수 없다고 한다.
 
두 번째 예화는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 비유이다

죄로 인해 타락한 사람을 수영을 못하는 물에 빠진 사람으로 묘사한다. 죽어가는 그에게 유일한 희망은 누군가 그에게 구명대를 던져 주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 구명대를 준비하셔서 그것을 그에게 던지셨다고 한다. 이제 죽고 사는 문제는 그에게 달린 것이다. 그가 비록 죽어가는 처지지만 구명대를 붙잡으면 살 것이고, 끝내 제 손으로 구명대를 잡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종류의 예화들은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에 관한 모든 준비를 다 하셨다고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과의 협력적 관계를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식의 예화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중대한 책임과 직각적인 결단을 촉구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어디에도 이러한 식의 유추와 교훈을 증거하지 않는다. 성경은 타락한 사람에 관해 죽을 병에 걸린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더구나 천국 문턱에서 자기 구원을 확정지을만한 능력을 소유한 존재로 절대 보지 않는다. 성경은 타락한 사람에 관해 이미 영적으로 죽었다고 선포한다. 사탄의 영에 속해 육체를 의지하여 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지적하고 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주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성경은 타락한 사람은 죄 가운데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자로 묘사한다. 죽은 자는 아무리 좋은 약이 있어도 입을 벌리지 못하며 구명대를 잡을 수 없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사람들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이처럼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는 죄인의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죽은 자에게 어떤 사실에 대해 명확한 판단과 선택을 기대하는 것은 지렁이에게서 인생 철학을 전해듣는 일보다 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믿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타락한 인생, 즉 영적으로 죽은 사람의 자유의지는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가? 이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타락한 자라 할지라도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상실한 것은 아니다. 죄인들도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타락과 함께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원과 지식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지를 움직이는 원인으로서의 마음이 스스로의 행위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절대적인 선을 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도르트 신조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은 했지만 이성과 의지를 부여받은 피조물임에도 변함이 없으며, 또한 인류에게 번진 죄악이 인간의 본성조차 빼앗아간 것은 아니고 파멸과 영적인 죽음을 초래한 것뿐이다. 이처럼 이 중생의 은혜는 인간을 무감각한 사물로 여기거나 인간의 의지나 그 본성조차 모두 무시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적으로 소생시키고 바르게 해주고, 동시에 그 은혜에 힘있게 따르도록 해주며, 전에는 영적인 반역과 저항이 가득 찬 곳에 기꺼이 신실한 마음으로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참되고 영적인 의지로는 이 타락에서 재생할 아무런 소망도 얻지 못하고 죄에 빠져들어갈 뿐이다.” - (도르트 신조 Ⅲ & Ⅳ, 16절)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오직 악한 욕망을 품을 뿐이다(창 6:5). 타락으로 인한 도덕적 본성의 변질은 결국 의지의 부패를 가져왔다. 성경은 이러한 상태를 영적인 죽음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 완전한 죽음의 상태로부터 다시 살리시는 일이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은 여전히 죽어 있다. 죽은 자는 구원의 필요성을 자각할 수도 없거니 구원을 성취할 그 어떤 반응도 할 수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죽은 자를 살리셔야했던 이유이다.
 
흔히 거듭남 혹은 중생이라는 말은 ‘다시 낳는다’(generating again)는 의미를 가진다. 즉 중생은 영적 생명의 시작 동시에 생명의 새로운 시작이다. 그런데 성경은 영적 죽음으로부터 살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고 못 박고 있다. 죄인은 스스로 자신들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죽은 자의 영을 살리시며, 거듭나게 하신다. 성도는 이 거듭남(중생)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성향과 성품을 가지게 된다. 거듭남(중생)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에 관한 바르고 정당한 신앙과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단독 사역’(monergism)이라고 부를 수 있다. 'monergism'이라는 말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역할을 압축적으로 소개하는 신학적인 용어이다. 이 말은 ‘하나’라는 의미의 ‘mono'와 ‘독점’이라는 뜻을 가진 ‘monopoly'의 합성어로서 구원은 하나님의 독점적 사역임을 나타낸다. 곧 구원은 한 분 하나님 편에서의 독점적인 일인 것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거들거나 방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그 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절대적 주권가운데 이루어진다.
 
불가항력이란 의미와 유효적 부르심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혜라는 표현앞에 불가항력적이란 수식어를 붙였다. 이 표현 역시 칼빈주의자들에게는 구원의 본의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지만, 오직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여간 부담스러운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칼빈주의자들 중에서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왜냐하면 불가항력적이란 말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하게 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들은 이 단어속에서 힘센 사람의 강요에 의해 어린 아이가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시키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은혜라는 말에다 이 표현을 덧붙인 진정한 이유를 잘못 파악한 데서 오는 오해이다. 불가항력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심에 있어서 하나님을 대적할 대상이 아무도 없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와 의미를 모르는 이방인들은 복음을 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설령 현상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택한 자를 향해 구원의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며 확실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그가 원하시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남(중생)을 경험한 사람은 불가항력적 은혜로서 반드시 구원함을 얻는다. 택함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효과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가항력적 은혜를 가리켜, ‘유효적 은혜’(effectual grace)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은혜는 택함 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이 어떻게 구원(복음)에 대해 반응하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조건이나 상황가운데 복음을 들은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자연스럽게 복음에 받아들이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복음을 냉대하며 저주하기까지 할 때, 우리는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된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묻게 된다. 다시 말해, 타락한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복음)에 대해 각기 상반된 반응을 보이게 되었는가에 대해 궁금해 한다. 복음의 메시지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다. 복음은 그 메시지를 듣는 모든 사람을 구원에로 초대한다.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약속되어 있음을 알린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적인 부르심으로서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정상적으로 반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떤 자들은 복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합당하신 부르심에 응하며,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복음의 외적인 부르심에 더하여 특별한 내적 부르심(interanl calling)이 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이 특별한 소명을 통하여 죄인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영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신다. 새롭게 살아난 생명은 하나님에 대해 거부할 수 없는 흠모와 갈망하게 된다. 이렇게 성령안에서 새로워진 의지는 자발적인 선택으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가며, 그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이렇듯 중생과 신앙과 회개에 이르는 구원의 과정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혹은 유효적 은혜로서 성취된다. 이 점에 관해 장로교회 표준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하고 있다.
 
“하나님이 생명에 대해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은(오직 그들만을) 그가 약속하시고 정하신 시간에,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죄인들이 본질적으로 처해 있는 죄와 죽음의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지는 은혜와 구원을 향해 효과적으로 부르시기를 기쁘게 여기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지성을 영적으로 밝히시고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이해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돌과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새로운 마음을 주신다. 그리고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선한 것을 결정하게 하시며,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인도하신다. 그것은 그들이 자유롭게 나아오는 것이지만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장 1절)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말씀과 설교
 
효과적 부르심이란 죄인의 마음속에서 저항할 수 없는 성령의 은혜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내적 부르심(또는 내적 소명)을 가리킨다. 내적 소명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복음은 차별없이 모든 자들에게 들려지지만 복음에 대해 누구나 똑같이 반응하지는 않는다. 택함 받지 않은 자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아도 알지 못한다(마 13:13,14; 사6: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을 증거하신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말씀(설교)을 하나님의 은혜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서 구원의 은혜를 성도들에게 적용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이 바르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이 은혜의 수단(media gratiae, means of grace)으로서 작용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말씀이 구속의 은혜의 수단으로서 역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 말씀 증거하도록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고 공급되고 또 바르게 적용되는 일이 없이는 구원의 은혜가 바르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하시는 계획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8-17)
 
택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은 반드시 그의 말씀을 통하여 증거되고 역사한다. 주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가운데 머무르셨을 때, 그에게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부르셨다(요 11:43). 이 말씀을 들은 후에야 나사로는 무덤밖으로 걸어나왔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사로를 살리는 은혜의 수단으로서 작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주님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서 각성시키시며, 살리신다. 주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말씀이 증거되는 역사를 통해 그의 백성을 불러모으신다. 이 귀한 사명을 교회에 위임하셨다. 주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땅 끝까지 이르러 말씀을 증거하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 10:18)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을 이루시는 은혜의 수단으로 바르게 활용될 때에 그곳에서는 반드시 구원의 능력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는 곳에는 반드시 구원을 효과적으로 이루시는 성령의 역사가 동반되어진다. 이것이 구원을 이루는 십자가 복음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물음 155 말씀이 어떻게 구원을 효력있게 합니까?
답 : 하나님의 영이 말씀을 읽는 것, 특히 말씀의 전파를 효력있는 방편으로 삼아 죄인들을 깨닫게 하시고, 확신시키고, 겸손하게 하시며, 그들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몰아내어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이끄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며, 그의 뜻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들을 강건하게 하시므로 시험과 부패에 대항하게 하시며, 그들을 은혜로 양육하시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을 거룩함과 위로로 굳게 세우시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이처럼 구원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하는 매체가 바로 설교(preaching)이다. 하나님은 이 설교라는 방식을 통해 택한 자들을 내적으로 유효하게 부르시며, 그들을 향한 구원의 최종적인 목적을 불가항력적 은혜로서 철저하게 이루신다. 이처럼 설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성도들에게 적용되는데 가장 유효적절한 방도이다. 이 사안의 중요성을 자각한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하는 교회의 표지로서 ‘참된 말씀 증거’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따라서 개혁교회는 말씀의 바른 증거야말로 교회와 신앙이 세워져 가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며, 또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반드시 지켜져야 할 교회의 대원칙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신앙 정신에 따라서 개혁교회는 다음과 같은 신앙의 원리를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은 정신이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말씀 안에서 친히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하여, 말씀 안에 계시되어 있는 것을 기독교인은 참된 것으로 믿으며, 그 말씀의 각 구절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에 따라 행동하되, 명령의 말씀에는 순종하고, 경고의 말씀에 대하여서는 떨고, 금세와 내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기꺼이 받아들인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4장 2절)


이러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겠는가! 그러함에도 여전히 성경이 부분 복음이요, 부분 진리라고 우길 것인가? 성령과 말씀 외에 다른 것들(특히 인간의 전통과 행위들)을 은혜의 수단으로 삼겠는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히브리 기자의 경고를 다시 한번 마음에 되새기자.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히 2:1-3)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성도의 견인 교리는 칼빈주의 5대 가르침을 나타내는 TULIP 가운데 마지막 두음자에 해당하는 P이다. 혹자는 이 교리를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구호로 표현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듣는 이들로 하여금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한번 구원’과 ‘영원한 구원’ 사이의 상관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따라 성경적이거나 아니면 비성경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두 가지 구원의 관계를 물리적 도식처럼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번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평생 동안 ‘한번 구원’을 얻으려고 몸부림친다. 이것을 얻는다면 ‘영원한 구원’은 무조건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면죄부 판매를 정당화 시킨 논리이며, 알미니안주의자들의 보편구원론 또는 만인구원론의 근거이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에 대한 오용(誤用)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견인 교리의 논점은 “일단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 온 사람은 항상 그 은혜 가운데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그동안 앞서 네 번에 걸친 칼빈주의 교리 학습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성경 말씀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지금까지의 결론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성도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사역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은 아예 전무(全無)하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원래부터 하나님의 구원과는 상관없는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전적 타락).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창세 전에 어떤 이들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시고(무조건적 선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적용시키셨다(제한 속죄).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가능해진 것이다(불가항력적 은혜). 

견인 교리는 이러한 성경적 구원의 내용이 어떻게 최종적으로 완성되어지는가를 설명해준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성도의 구원은 결코 상실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 첫째,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구원의 확신 문제), 둘째, “우리의 구원은 무엇으로 끝까지 유지되어지는가?”(구원의 보전 문제) 견인 교리는 이 물음들에 대한 성경적 답을 제시해 준다.
 
“당신은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까?”
 
유난히 대중 전도를 강조하는 한국 교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도 프로그램 중에 ‘전도폭발(Evangelical Explosion)이란 것이 있다. 한국 교회에서 이 프로그램에 절대적(?) 확신과 지지를 갖고 있는 교회와 사람(목회자, 성도)들을 만나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이 프로그램에 대해 특별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다고 한다. 전도에 관한 한 세계적으로 임상 실험이 끝나고, 탁월한 효과를 검증받은 가장 확실한 전도 비법(秘法)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수년 전, 한국에서 섬기던 어느 교회에서 담임 목사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전도폭발 교육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가장 먼저 배운 것이 일명 복음제시 요령인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질문 1 (선생님), 만일 오늘밤이라도 이 세상을 떠나신다면 천국에 들어갈 것을 확신하고 계십니까?
질문 2 - (선생님), 만일 오늘밤 이 세상을 떠나 천국문 앞에 섰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선생님)에게 "내 가 너를 나의 천국에 들어오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러나 필자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 프로그램에서 소개하는 복음 내용에 접하기도 전에, 복음 소개에 앞서 반드시 물어야 하는 이 두 가지 질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신학적, 성경적으로 너무나 많은 오류를 내포한 물음이었기 때문이다. 질문 자체가 극단적인 설정인데다, 문제는 천국에 들어 갈 확신 여부를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이 질문을 받은 어떤 사람이 “나는 오늘 밤 죽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다”라고 답하면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하는가? 반대로 “나는 오늘 밤 죽는다면 천국에 들어 갈 자신이 없습니다”고 누군가 답한다면 그 고백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것이 사람의 확신 여부에 달려 있는가 말이다. 구원의 확신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성도로서 구원을 확신해야 할 이유에 관해 수도 없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그 어디에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우리 자신에 대한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구원의 확신 여부에 따라 누군가 하늘나라에 들어 갈 자격의 있고 없음이 결정되어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중대한 진리에 대한 도전 행위이다.
 
구원의 확신에 관한 네 가지 유형
 
현재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인 R.C 스프룰은 구원의 확신에 관해서는 이 세상에는 기본적으로 네 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상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1) 자기들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2) 자기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구원받은 사람들.
(3) 자기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구원받은 사람들.
(4) 자기들이 구원받았다고 “알고 있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1), (2), (3)의 경우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1) 그룹의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이 살아가는 불신자들이다. 이들에게는 구원이라는 말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해도 신경 쓰지 않는다. (2)에 속한 그룹은 구원받았으나 아직 중생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아직 내적 부르심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을 위해 늘 복음 증거와 전도가 요청된다. (3)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가장 바람직한 성도들의 모습이다. 구원받았음을 아는 사람에게 구원의 확신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4)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실제로 구원을 받지 못했으나 구원에 대해 누구보다도 확신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실제적인 구원과 구원의 확신과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지를 묻게 된다. 분명한 것은 구원을 확신한다고 해서 모두가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거짓되고 잘못된 확신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에 들어가는 일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정죄하신다. 어떤 이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거나 주의 이름으로 어떤 거창하고 종교적인 일을 완수하거나 또는 주의 이름으로 놀라운 기적이나 이적을 행한다면 (그러한 일의 결과로서)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들은 천국(구원)의 확신에 관한 한 그 누구보다도 경험적이며, 실제적인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의 확신을 정죄하셨다. 이들의 확신과 판단이 구원의 수여자되시는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구원을 인간의 의지나 행위를 조건 삼아 주시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구원의 확신에 관한 잘못된 정보와 오해가 끊이지 않는 것은 본질적으로 구원이 어떤 것이며, 또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확신의 근거와 성령의 역사
 
그렇다면 성도는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갖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은 구원을 말할 때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서 깨닫게 된다고 증거하고 있다. 지난 시간에 배운 불가항력적 은혜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구원에 대한 확신이다. 이 말은 구원의 확신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필연적이라는 결과임을 말해 준다. 사도 바울의 증거를 들어 보자.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10,11)
 
여기서 “굳게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가지라는 명령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정말 택함을 받지 못한 자나 부르심의 은혜를 입지 않은 자들에게는 이런 권면은 아무런 유익과 영향이 없다. 이 명령은 선택과 내적 소명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권면이다. 이렇듯 성경적인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에 대한 자각과 반응으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의 감정과 체험과 행위가 앞서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참된 구원의 확신에 대한 사도 바울의 한 가지 언급을 더 살펴보자.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6-8)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유언(遺言)이다. 사도는 자신의 육신의 생명이 다해 감을 느낄수록 구원의 확신에 대해 더 강한 소망과 애착을 갖고 있다. 어떻게 이러한 구원의 확신이 가능한가? 바울은 이 서신의 앞 부분에서 그 이유에 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이 말씀은 참된 구원의 확신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구원의 확신은 이러한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로부터 나온다. 즉 성도의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외에 다른 그 누구 혹은 어떤 것으로도 비롯될 수 없음을 아는 믿음과 신뢰의 다른 표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구원의 확신을 보증 받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6-18)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윗 구절들은 진정한 구원의 확신은 오직 성령의 역사임을 증거한다. 참된 구원의 확신은 성령의 증거로부터 말미암는다. 이 사실을 보증하시는 이가 또한 성령이시다. 여기에 우리의 흔들지 않는 구원의 소망이 있는 것이다. 만약 구원의 확신에 대한 보증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면 과연 누가 하나님의 완전한 의에 합당한 구원을 이룰 수 있겠는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영광의 상속자라는 이 복되고 영광스러운 진리를 보증하시는 분이 성령이기에 하나님의 약속의 효력은 영원하고 완전하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성령의 은사들과 은혜들을 친히 증거해 주시며, 우리 자신의 영혼과 더불어 그 사실을 친히 확증해 주신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사,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그리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다.

17세기의 영국의 탁월한 청교도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토마스 브룩스(Thomas Brooks, 1606-1680)는 그의 유명한 저서 『확신,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Heaven on Earth; A Treatise on Christian Assurance)』에서 참된 확신과 거짓된 확신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해 준다. 참된 확신은 거짓된 확신과 근본적으로 큰 차이점을 보이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동반된다. 고로, 다음과 같은 특징들과 반대되거나 이러한 특징들이 나타나지 않는 확신은 거짓된 확신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1. 참된 확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총에 대한 깊은 감격이 수반된다.
2. 참된 확신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더 완전하게 향유하도록 항상 추구하게 만든다.
3. 참된 확신은 대개의 경우 사탄의 강력한 공격을 받는다.
4. 참된 확신은 성도를 더욱 담대하도록 만든다.
5. 참된 확신은 성도로 하여금 이웃의 행복을 추구하게 한다.
6. 참된 확신은 모든 죄에 강력히 대항하도록 한다.
7. 참된 확신에는 사랑, 겸손, 그리고 기쁨이 수반된다.
8. 참된 확신은 성령의 증거로부터 말미암으며, 이 증거는 선명하고 완전하여 만족을 준다.

성도의 견인 교리에 나타난 용어 의미
 

먼저 성도(saints)라는 말을 살펴보자. 여기서 성도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최종적인 구원의 목적지까지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을 말한다. 대개 성경에서 성도라는 말이 사용될 때에는 '믿는 자(believers)'를 의미하는데,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구별함을 받은 사람들임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의 대부분의 서신서는 이들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이다(롬 1:7; 고전 1:2; 고후 1:1; 엡 1:1 등). 한 가지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은 이 교리에서 말하는 성도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 혹은 신앙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성령의 역사로서 깨닫게 되는 참된 구원의 확신은 오직 중생한 마음에만 주어진다. 하나님에 의해 돌과 같은 마음을 제거 받은 사람들이며(겔 36:25-27), 그리스도를 믿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자들이며(고후 5:17),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다(롬 8:15). 즉 참된 구원의 확신은 누구나 갖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사람만이 얻게 된다(엡 1:13).

견인(perseverance)과 보존(preservation)
 
‘견인’과 ‘보존’은 이 교리의 진정성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단어이다. 그러나 강조점에서 다소 차이가 난다. 견인이라는 용어는 참된 성도는 끝까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을 말하지만, 보존이라는 말은 이 성도의 구원이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로서 끝까지 완수되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즉 전자는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성도의 역할과 활동을 강조한 것이라면, 후자는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사역에 초점이 맞춰 있다. 이 두 용어는 구원이 성취되는데 필수적인 두 가지 측면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견인과 보존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지는 일이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볼 때, 보존이 견인보다 앞선다. 하나님께서 보존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견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존없이는 인간 스스로의 견인은 불가능하다.
 
"성도의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는가?“
 
이제 견인 혹은 보존 교리를 마무리하기 앞서, 한 가지 물음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아야겠다. “한번 얻은 구원은 정말 잃어버리지 않나요? 우리의 구원이 혹시 나의 연약한 믿음이나 외부적인 조건 같은 것 때문에 잃어버릴 수도 있나요?”하는 류의 물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이 받은 구원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생각 없이 있다가는 어느 순간 잃어버릴 수 있는 돈 지갑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이로 인해 말할 수 없는 영적 피로와 번민과 고통을 호소한다. 이런 사람들의 관심은 늘 “어떻게 구원을 얻나요?” 혹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잃지 않을 수 있나요?”라는 구원을 얻는 방법에 집중되어 있다. 구원을 얻었다고 해도 확신이 부족하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구원을 잃지 않기 위해 인간적인 노력과 헌신과 물질을 강요한다. 이러한 것들은 구원의 지갑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각성제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 세례를 수 십 번 받거나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듣게 되는가?
 
오늘날 시중에 떠도는 구원을 설명하는 많은 참고서들이 이러한 방식의 구원이 정석(定石)인 양 소개하고 있다.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과서인 성경을 보지 않고, 구원을 잘못 설명하는 참고서에 의존하고 있다. 성도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과 발에 족쇄를 채우고 있으면서도 구원을 쟁취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왜 우두커니 서 있느냐고 윽박을 지르고 있다. 구원이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 메시지라는 사실에 동의하면서도 정작 구원이 어떻게 주어지고, 어떻게 유지되는지에 대해 전혀 성경적이지 않는 발상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열악한 영적 수준의 현실이며, 따라서 성경과 교리를 통해 바른 구원 교리를 배워야 할 시급한 이유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 같이 성경은 ‘성도에게 주어진 구원은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달하고 있다. 반면에 성경은 ‘성도의 구원의 확신은 상실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개혁주의 신앙에서는 사람이 신앙을 고백하고서도, 심지어 중생의 경험을 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부인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할 수 있음을 기꺼이 인정한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이 얼마나 엄청나고 무서운 죄를 범하고 또 범할 수 있는지를 실제의 삶에서 자주 목격하게 된다. 게중에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도 있지만, 실제로 중생한 은혜를 경험한 사람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구약의 다윗의 경우이다. 다윗은 구원을 받은 대표적이 인물이지만, 엄청난 죄를 범했다. 간음죄뿐만 아니라 일급 살인자를 저질렀다. 신약에 나오는 베드로 역시 그리스도를 상대로 범해서는 안 될 중대한 죄를 저질렀다. 삼년 동안 예수의 제자 신분으로 많은 영적 혜택을 누렸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바로 전 날, 예수님을 배반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의 범죄를 지적하면서도 그것들로 인해 그들의 구원이 상실하지 않았음을 증거한다.
 
이 경우에 대해 대개의 알미니안들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다윗과 베드로가 구원을 받지 못할 엄청난 죄를 지었음에도 이들이 구원을 놓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회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회개를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한다. 즉 이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지 않았다면 결코 구원은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회개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지 않는다. 회개는 구원 얻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열매에 해당한다. 회개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믿음을 가졌기에) 때문에 참 회개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개혁주의에서는 구원의 서정을 설명할 때, 회개를 소명과 칭의와 양자됨과 믿음 뒤에 배치한다.
 
생각해 보라. 만약 다윗에게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의 죄를 지적하지 않았다면 그가 돌이켰겠는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라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고 예언하신 말씀 없이도 베드로가 스스로 자신의 죄로부터 회복될 수 있었겠는가? 다윗이나 베드로의 경우는 아무리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도 밀까부르듯 하는 사탄의 시험과 속임에 넘어갈 수 있음을 말해 준다. 회개하였더니 구원을 얻었다는 도식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자는 결국에는 참된 회개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회개를 해야 할 이유는 중생이후에도 사탄과 죄의 유혹과 도전을 받고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죄를 짓고, 방황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이 부분에 관해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고백을 들어보자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18-23)
 
그러나 성도는 이런 현실에 대해 완전히 비관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약과 무지와 게으름과 나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구원을 확신케 하시며, 다시 회복할 수 있게 하시기 때문이다. 비록 진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고 구원의 확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있지만, 구원의 확신의 장애물이 되는 사탄과 죄들이 종국적으로 성도의 구원을 소멸시키거나 그리스도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되게 만들지는 못한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1, 12)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
 
견인(혹은 보존) 교리는 이와 같은 주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고백을 근거로 만들어졌다. 개혁주의(칼빈주의) 신앙 고백의 결정판이라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3)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 안에서 용납하셨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효과적으로 부르시며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자리로부터 결단코 완전하게 혹은 최종적으로 타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히 마지막까지 견딜 것이며, 영원히 구원받게 될 것이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장 1절)
 
참된 성도의 구원이 결코 상실되지 않을 근거가 하나님께 있음을 감사하자. 구원의 최종적인 목적지까지 견인하는 것이 하나님의 보존하심의 은혜 덕분임을 감사하자. 

따라서 주께서 주신 구원의 확신을 더 깊이 각성하며, 주께서 공급해 주시는 은혜와 긍휼을 따라 구원에 확신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가도록 최선을 경주하는 신앙인의 삶을 힘있게 살아가자! 이 일이야말로 구원 얻는 성도가 취할 가장 마땅한 본분이 아니겠는가!

  

김병혁 목사(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