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 !! 여러교파!!

현대신학의 배경

하나님아들 2020. 8. 27. 09:15

현대신학의 배경

 

1. 종교개혁.

개신교 신학의 성격은 종교개혁자 Luther에게서 수립되었다. Luther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 절대적인 관계로 이해되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그 어떤 사물이나 인간의 매개도 필요하지 않은 Ich - Du 의 관계 즉 인격적이며 깊은 신뢰의 관계로 이해되었다. Sola fide, sola gratia. simul justus et peccator. 어느 누구도, 어떤 성자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잉여의 공적을 쌓을 수 있다. *Justification by Faith

로마 가톨릭 교회 - 가톨리시즘은 인간의 영원한 행복을 겨냥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객관적, 양적, 상대적 관계로 보는 거대한 체계다. 즉 가톨리시즘의 구조는 객관적인 것이지 인격적인 것이 아니고, 양적인 것이지 질적인 것이 아니고, 상대적이고 조건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에 의해서 대표되고 매개되는 신적이며 인간적인 한 관리체계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명령이 있는 반면 사제나 수도사에게만 요구되는 명령이 있다. 형벌과 보상도 지옥, 연옥, 천국으로 나누어진다.

(1) 진리의 기준, 규범은 교회의 교도권, - 성서와 전승이 두 가지 원천 중에서 무엇이 받아드려질 만한 것이고 바른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교도권뿐이다. 즉 교회는 성서의 진정한 의미와 해석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성서와 전승은 간접적 신앙 규범이며 교회는 직접적 신앙 규범이다. Luther - Sola Scriptura.

(2) 구원의 길 -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회가 인간에게 영원한 행복을 매개하고, 인간을 영원한 형벌에서 구해내는 수단을 갖고 있다고 생각. 성례전 - 일종의 마술적인 작용에 의해서 구원의 은총을 매개. 인간의 도덕적 자유 - 이것으로써 공적을 쌓을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객관적(성례전의 예에서 보듯이)이며 양적인 관계다. (죄나 선행, 공적 등에서 보듯이)

 

2. 신교 정통주의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위대한 선구자는 종교개혁자들이었다. 현대 신학자들이 기존 교리에 대하여 과격한 비판을 가할 때 그 논리적 결론은 언제나 종교 개혁의 원리에 근거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복음적 메시지의 감춰진 의미를 들어냄으로서 후대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복음의 힘찬 내용을 체계적으로 다듬고 논리화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수많은 교리, 신앙 고백이 작성되고, 교파 간에 교리 논쟁이 심하게 일어났다.( Protestant Scholasticism)

 

* 칼빈주의 5대 강령 1. double predestination by God 2. the total depravity of man 3. atonement limited to the elect 4. the irresistibility of grace 5. the gift of perseverance.

 

신교 정통주의는 다음 2가지 전제 혹은 바탕 위에 신학을 수립하였다. 즉 하나는 Aristoteles 의 철학적인 논리(logic), 다른 하나는 성서 무모설이다. 이들은 이성 (철학)과 계시(성서)를 서로 연결시켜 신학은 구성하였다.

Quenstedt(루터교 정통주의자) defined theology as "the science about God and divine things." Theology is twofold : natural and revealed (or supernatural) 자연적인 신지식은 구원을 이루는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부적합하다. 그러나 그 지식은 사람이 하나님께 핑계 할 수 없게 한다는 의미에서 소용없는 것은 아니다. It is innate because the concept of God is engraved upon every men by nature ; it is acquired by the human mind from the book of nature.

결국 신교 정통주의는 성서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체계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중세 스콜라 신학과 매우 비슷하게 되었다. 신교 정통주의는 신을 제일 원인’, ‘不動動者등으로 표현했으며,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신의 속성을 전지 전능, 불변 등 철학적인 개념으로 표현하였으며, 철학의 원리와 신학의 결론이 절대로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결과는 원래 의도와는 달리 신이 비인격화(de-personalized) 되었다.

한편 신교 정통주의는 철저한 축자영감설을 바탕으로 신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로마 교회의 전통에 대항하여 성서의 권위를 내세웠다. 성서의 본질은 성서가 영감으로 된 교리(inspired doctrine)라는데 있다고 생각하였다. 성서의 신적 성격은 그 내용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담고 있거나, 계시의 사실에 성서 기자가 참여한데 있다기보다는 기록된 방법에 있다고 보았다. 즉 성서는 신이 불러준 것을 받아 쓴 것으로서 그 내용과 단어에 영감이 작용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이상과 같은 신교 정통주의에 대하여 우리는 긍정적으로 받아드릴 점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17세기의 신학자들은 개혁자들의 종교적 진리를 잘 보호한다는 뜻에서 체계화하고 조직화하고 엄격하게 교리화 하였다. 이들에 의하여 이룩된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객관적 표현은 모든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다리가 걸쳐지는 橋臺였다. 그 후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모두 신교정통주의 안에 있는 종교 개혁 신학의 고전적 형식에 관련되지 않는 한 모호해지고 공허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신교 정통주의는 복음의 내용을 교리화하여 그 생명력을 상실시켰다. 신앙과 어떤 교리 신조의 승인을 본질적으로 동일시하는 결과를 초래 하였다. 율법주의가 복음주의를 극복하게 되고 신학적 정체상태를 초래하였다. 특히 신교 정통주의의 위험한 요소는 그 신학의 이층 구조에 있다. 아래층은 이성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자연 신학이요 위층은 계시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후에 아래층이 위층에 싸움을 걸음으로서 혁명이 일어났다. 계몽주의 기간에 아래층은 건물 전체를 차지할 권리를 주장하고 위층의 어떤 독립적 권리도 부정하였다. 즉 합리주의의 대두로 신학은 전통적인 주장을 더 이상 고집하기 힘들게 되었다.

 

3. 경건주의

신교 정통주의에 대한 반동은 경건주의와 합리주의를 통하여 일어났다. 경건주의는 좋게 말하면 죽어 융통성이 없어진 정통주의에 대한 산 신앙의 반동이었다. 교회가 교리 형식의 신앙과 제도로 굳어진 채 만족하고 있을 때 일어난 신앙운동이다. 경건주의의 지도자인 스페너(Spener)나 프랑케(Francke)의 의도는 어떤 교리 체계를 재조직하려는 것 보다는 영적 생명을 부흥시키는데 있었다. 그들은 교회가 세속화 하는 것과 냉랭해지는데 대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웠다. 그들은 더 깊은 경건으로 성서에 친숙해지기를 권면하였다. 이런 견지에서 그들은 성서 연구를 위한 그룹의 구성을 장려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성서 연구의 목적은 성서를 과학적으로 연구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경건을 연습하게 하는데 있었다. 그들은 크리스천들을 향하여 세상과 짝하지 말고 오히려 세상과 결별하라고 권했다.

경건주의자들 가운데 미성숙한 사람들은 편협하고 배타적인 편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로서의 성도의 교제보다 자기들의 사사로운 성서 연구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미숙하고 실용주의적인 교리 관념이 환영을 받게 되었다. 당장 덕을 세우는데 유효한 것이 아니면 어떤 이론도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대중들은 기독교 진리 자체를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 신자는 반드시 어떤 일정한 회개 경험의 경로를 통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법적인 두려움을 어느 정도 느끼고, 새로 찾은 신앙의 기쁨을 어느 정도로 느꼈는가 하는 등 회개의 주관적경험이 하나님께 용납 받는 기초라고 생각하는 위험에 빠지기도 하였다. 경건주의는 그 약점에도 불구하고 신교정통주의의 교리화된 성격, 냉랭한 성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신뢰와 복종의 생활에 결부된 신앙을 주장하였다는 점에 공헌이 있다.

 

4. 계몽주의의 도전.

계몽주의는 유럽의 30년 전쟁이 끝난 후(1648)부터 불란서 혁명(1789)까지의 기간을 지배했던 사상적 경향을 지칭한다. 이 시기에 그때까지 초자연적인 힘 외적인 권위에 의존하던 세계관에 대변혁이 일어났다. 국가, 사회, 문화가 기독교의 지배로부터 탈피를 선언하였고, 각종이론, 그 이론의 정당화가 교회나 교회의 권위에 근거한 교리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1) 계몽주의를 특징짓는 사고방식

Autonomy(autos + nomos)

인간은 정신적 황동의 전 영역에 걸쳐서 이성의 법칙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을 강조.

Kant - Enlightenment is man's release from his self-incurred tutelage.

Reason

추론적이고 사변적인 이성이 아니라 보다 경험적이고 실험적인 이성의 기능을 강조. 과학의 시대를 이끌어 감.

Melioristic optimism (세계 개선론 적 낙관주의)progress

이 세상에서 발견되는 부조화와 악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질서 있고 조화로운 세계상을 받아드렸다. Rembrandt의 그림처럼 어두움과 악은 전체의 조화를 들어내고 선을 들어내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 Leibnitz “the best of all possible world” 라는 사상으로 요약될 수 있는 세계관. 결국 인간과 세계의 모든 악은 점차 극복 될 것이라는 진보에 대한 희망을 같게 되었다.

Toleration

종교 전쟁의 결과 종교와 교리에 대한 무관심이 증대되었다. 악덕은 독단주의며 지적인 덕은 관용을 특징으로 한다고 생각하였다. 종교의 상대성을 인식하였으며, 종교의 진리성은 독단적인 이론이나 논리에 기초하기보다 하나의 내적 신념으로 인식되며, 도덕적 설복에 더 뜻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 종교다원주의도 이 흐름 가운데 있다) 계몽주의자 LessingNathan the wise는 종교적 관용주의를 대변한다. (어떤 종교의 참됨은 교리나 독단적 주장에 의해 증명될 수 없다. 그 결과로 증명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 아버지는 자기 집에서 오직 단 하나의 반지가 폭군 노릇 하는 것을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즉 어느 유일한 종교만이 참되다는 독단을 거부하였다.) 누구든지 자기가 진짜 반지를 끼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면 그 반지는 그를 축복할 것이고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 참 종교가 아니라 성실히 ale고 행동하는 것이 문제다)

 

(2) 계몽주의의 위협

계몽주의의 성격은 기독교의 확신을 흔들어 놓았다.

1) 성서의 권위 - 성서의 권위가 도전 받게 됨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권에 맞서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며, 성서의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개신교 정통주의는 성서의 무오성을 강조하였다. 성서는 무오하며, 일관성이 있고 어떤 문제에 있어서도 권위 있는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계몽주의에 따른 사고방식과 세계관의 변화는 성서에 대한 기독교의 확신을 받아드리지 않았다.

 

자연과학의 발달

Copernicus, Galileo, Newton 과 같은 사람들에 의하여 소개된 우주에 관한 새로운 이해는 창세기 1장과 2장에 대한 정통주의 신학의 설명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더 이상 성서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권위 있는 가르침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주의 근원, 양태, 법칙은 천문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의 권위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정통주의자들은 기적이야말로 성서의 권위를 뒷받침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성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합리주의자는 성서에 기록된 기적은 성서의 신뢰성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하였다.

 

역사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는 성서에 기록된 사건과 역사를 문제 삼았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이라는 주장을 더 이상 받아드릴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성경의 역사는 고고학적 연구나 문헌 증거에 의하여 입증되기까지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성서의 문헌으로서의 성격

성서의 문헌 연구 방법이 발전되는데 따라 획일적이고 융통성이 없는 전통적인 신앙 이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성서 사본 연구, 성서 본문의 전승사에 관한 연구, 본문 비평(lower criticism) 은 여러 종류의 사본이 있고 본문내용도 서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다른 사본가운데서 어느 것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문제되었다. 정통주의자들은 원본은 정확 하다고 주장. 그러나 어차피 성서 원문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적으로 성서의 무오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후에 고등 비평(higher criticism)의 발달은 성서에 대한 교회의 신앙을 뿌리부터 흔들게 되었다. 모세 저작설은 부정되었으며 4자료설이 제시되었다. 그 결과 성서는 보편적으로 타당한 몇몇 일반적인 종교적원리들을 제외하고는 단순한 근대 종교문헌들이 수집된 책으로서 취급되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성경에 관한 윤리적 비평

아말렉 사람의 살육, 저주를 비는 시편(137.9) 돼지 익사(8:30f) 암콤이 42명 죽게 한 사건(엘리사 왕하 2:23 ~25)

결국 성서가 신적 계시에 의하여 기록된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교회의 주장은 이성의 능력, 자율을 앞세우는 계몽주의의ㅡ 새로운 사조에 의하여 그 권위가 유지되기 힘들게 되었다.

 

* 오늘의 반응

현대적인 성서 비평 거부 축자영감설 고수

현대적인 성서 비평 적극 수용, 하나의 종교 문서로 이해, 고대 세계관 거부

현대적인 성서 비평 수용하면서 하나님의 메시지 들어야 한다고 주장.

 

(2) 자연 종교(J.C.Livingston 12ff) - 기독교의 특수한 교리, 의식이 비판되고 일반 종교 원리에 따른 성서나 교회의 교리적이고 독단적인 주장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 계몽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인간의 마음에 이식되어져 있는 종교의 가능성을 주장. 즉 종교가 성서의 권위나 기독교 전통에 근거할 필요가 없다.

기독교가 기적 등 비합리적인 것에 호소하지 않고도 영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을 중심으로 합리적인 것으로 제시될 수 있다.

30년 전쟁 등 종교의 독단적인 주장에 의한 폐해를 경험한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심기워져 있는 종교심의 발로로 자연스럽게 받아드려 질 수 있는 종교의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종교적 관용주의)

 

* 이러한 경향은 영국의 이신론(Deism)으로 나타났다. 이신론의 아버지로 알려진 Herbert of Cherbury(1583 - 1648)경은 De veritate에서 모든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종교의 성격을 제시하였다. 하나님은 다음 다섯 가지 내적 원칙(innate principles)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었는데 그것은 증명이 필요 없는 공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경배를 받으셔야 한다.

덕행의 실천은 하나님경배의 으뜸 되는 부분이다.

인간은 범죄를 혐오하며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다.

죽음 이후에는 보상과 벌이 있을 것이다.

그 후 영국에서 등장한 이신론자 들은 이성에 호소하는 한편 신적 계시를 강조 하면서 기독교의 합리성을 나타내 보이려고 하였다.

 

* John Locke(1632 - 1704) "기독교의 합리성“ (1695)

성경에 나오는 이성에 배치되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내용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구원에 필요한 2가지를 주장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보내신 메시아이다.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구약의 예언 성취 와 기적에 근거해서 )을 긍정.

회개의 필요성과 회개의 열매

 

* John Toland(1670~1722) - Christianity not Mysterious (1696)

이성에 근거한 종교를 주장하였다. 계시는 이성에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참된 종교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 있는 사람에게나 접근될 수 있어야 한다.

 

* 프랑스의 이신론 Voltaire(1694~1778)

영국의 이신론과 달리 보다 도전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로 정통기독교를 공격하였다. 초기에는 단순한 자연종교를 주장하였다.(1734) Newton 적인 세계관에 따라 우주 배후에 있는 신적 지성을 전제하였다.(하나님과 시계공을 유비로 설명, 신의 존재 증명(우주론적, 목적론적)

그러나 1751년 이후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 성서의 인물들이 보인 죄악, 거짓, 간음을 지적하면서 성서 기사의 불합리성 비판하였다. - 노아방주 - 코끼리 낙타, , , 뱀 생각해 보라! 예수님의 족보(마태와 누가의 불일치) 결국 새로운 종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의로우신 한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단순한 예배 덕행의 실천)

 

* 독일의 자연종교

H.S.Reimarus(1694 ~ 1768)

The Leading Truths of Natural Religion "(원제 : An Apology for the Rational Worshippers of God") 홍해 건넌 사건,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절규를 비판

G.E.Lessing(1729 ~ 1781) The Education of the Human Race 1777

 

<결론적 요약>

자연 종교, 이성적인 종교를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여러 가지 차이가 있지만 다음과 같은 생각을 공통적으로 지녔다.

(1)종교는 근본적으로 단순한 것으로 생각. 몇 개의 교리와 의식만 있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 반성직적, 반교권적 입장. 제도적 교회는 교활한 제사계급의 창안물이라고 비판하였다. 기독교는 단순한 것이며, 그 본질은 도덕을 위한 신의 승인(sanction)으로 간주하였다. 자연인은 이성에 의해 종교적 진리를 알 수 있고 진리를 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2)기독교를 자연종교와 같은 성격으로 이해. 기독교를 이성의 종교로 해석하였다.

(3)기독교는 자연종교의 보충 혹은 보다 고상한 형태로 이해하였다. 물론 자연종교의 보충을 위해 특별계시가 기독교에 주어졌다고 생각 하지만, 기독교의 특별 계시는 본성적인 이성(natural reason)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단계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4)기독교는 종교사에 있어서 진보의 한 단계에 위치하며 미래에는 보다 완전하고 보편적인 종교가 기대된다고 생각하였다. Lessing“인류의 교육

 

이처럼 기독교를 이성에 맞추어 생각하는 계몽주의의 일반적인 경향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기독교를 위협하였다.

(1) 종교의 본래 핵심으로 여겨지는 것들과 기독교를 형성해온 권위, 전통, 제도, 의식, 교리를 구분하고 후자를 기능한 한 제거함으로써 기독교의 본질적인 특수성까지 제거하는 문제를 야기하였다. (어린 아기와 목욕물을 같이 버리는 잘못)

(2) 기독교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어떤 토대위에 세우려 했다. 즉 그리스도교를 다른 종교와 똑같은 토대(이성, 내적 종교심, 종교일반의 원리)위에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역사상 인류는 그러한 종류의 자연종교에 자신의 영적인 미래를 걸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주적이고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종교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향기와 생명이 없어 영혼의 안식처가 될 수 없다.

 

3. 이성의 능력과 한계

계몽주의 시대에 자연종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성에 맞는 기독교를 요구 하면서 가능한 한 초월적이 내용을 배제하려고 하였다. 반면에 개신교 정통주의자들 역시 이성에 호소하며 합리적인 논증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였다. (여기에는 오랜 역사가 - 1274 년에 죽은 Thomas Aquinas 신 존재 증명 방법. - 자연적인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사용하여 구출 될 수 있는 신학의 가능성 제시하였다. 물론 이성에 의한 자연종교는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에 근거한 계시 신학에 의해 보충 되어야 한다고 생각.

18세기에는 적어도 3개의 증명방법이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우주론적 증명방법(인과론)

목적론적 증명방법(섭리 - 질서 절대자의 놀라운 계획을 반영)

존재론적 증명방법 (하나님은 최고의 완전한 존재라고 볼 때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정통주의의 시도는 David Hume(1761 ~ 1776)I. Kant(1724~1894)에 의해 공격 받았다. 흄은 인간 오성에 관한연구(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748)에서 그 문제를 논의하였다. 모든 사실에 대한 지식은 경험에 근거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실재에 관한 논쟁에서 흔히 일어나는 논리적 비약을 거부하였다.

신의 존재를 인과론에 의해서 증명할 경우 흔히 구체적인 경험의 영역을 벗어나 인과율의 교리를 확대하여 신을 제일원인으로 가정한다는 비판.

섭리에 근거해서 우주의 존재를 토대로 우주를 고민하고 만든 신을 가정하는 것 역시 잘못이다. 고안자 A 는 작품 B와의 관계에 있어서 작품 B만 가지고 무조건 고안자 A를 상정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Hume 은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하여 계획되었다고 믿을 수는 있으나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고 한다. 우리의 제한된 경험에서 비롯된 사고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실재와 특징에 대하여 어떤 결정적인 증명도 제시할 수 없다고 보았다.

Kant는 영국의 경험론자들이 정신을 수동적인 것으로 이해하여 단순히 외부의 인상을 받아드리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는 것에 대하여 정신(이성)은 능동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The mind imposes upon the material of experience its own forms of cognition, determined by the very structure of the human understanding. The raw material of experience is thus molded and shaped along certain definite lines according to the cognitive forms within the mind itself. 그런데 우리 인간은 경험의 카데고리(범주)를 통해 이 세계의 현상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초 세계적인 대상, 초경험적인 대상 즉, noumena(thing - in - themselves) 물 자체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cognitive organ 이 결여 되어있기 때문에 알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Kant는 현상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 동시에 시공을 초월한 하나님의 존재 등의 문제는 이성이 다룰 수 없음을 원리적으로 분명히 하였다.

 

4. 칸트(1724-1804)

19세기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이 Kant. 그는 계몽주의를 성취하고 극복했던 사람으로서 그의 철학의 빛 안에서 우리는 현대 신학의 성격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칸트는 신, 자유, 불멸이라는 종교적 관념이 이성적 논증에 의해서 확증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철학을 인식론적으로 비판하였다. 즉 그는 자연신학의 근거를 철저하게 공격하였다.

그런데 자연신학에 대한 비판은 인간 정신의 범주적 구조에 관한 그의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사고의 범주와 직관의 형식(시간과 공간)은 상호 유한성의 구조를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범주는 유한한 것의 상호 관계를 이해하는데만 타당성을 갖는다. 만일 사람이 유한한 것과 그 상호관계를 넘어 선다면 원인, 실체, , 질 따위의 범주는 그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유한한 것의 상호관계를 넘어서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성이 그 사실을 확증할 수 없다. 말하자면 이성의 이론적 능력으로서는 하나님이 세계의 원인이라는 선언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원인이라는 것은 유한한 것과 유한한 것 사이에서만 가질 수 있는 관계로서 한 감관적인 실재와 다른 또 하나의 그런 실재 사이에 있는 어떤 특수한 종류의 연쇄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한한 것이 아니고 그 본성에 있어서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유한한 사물에 적용할 수 있는 연쇄적인 인과관계의 하나로 다룰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이런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원인 이라면 우리는 그를 온갖 인과 관계의 쇠사슬 중의 한 고리로 보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의 배후에 있는 또 하나의 원인 즉 그를 존재하게 한 원인을 또 찾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자연 신학에서 시도하였던 신이나 불멸에 대한 논증이 공허한 것이 된다. (존재론적 증명, 우주론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을 반박) 이렇게 하여 칸트는 인간을 유한성이라 감옥에 가두어 놓았다. 이곳에서 탈출하려는 온갖 시도(이것은 신비주의와 합리주의 양쪽의 특징을 이룬다)는 헛된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다만 우리의 유한성을 받아드려야 할 뿐이다. 확실히 이점에 있어서 칸트는 프로테스탄티즘의 태도를 바로 표현하였다.

그러면 인간은 유한성을 넘어설 길이 없는가? 그는 이 문제를 <실천이성비판>에서 다루고 있다. 칸트는 인간이 유한성을 넘어 갈 수 있는 길은 이론적 사상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도덕적 명령의 무조건성의 경험에서 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도덕적 명령을 정언적 명령 또는 무조건적 명령(The categorical or unconditional)이라고 한다. 우리는 의무의 지상명령으로부터 온전한 도덕적 신념을 가지고 이론을 전개하여 영혼 불멸, 하나님의 존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칸트는 도덕적 명령의 당연한 귀결로서의 하나님의 존재를 변증하려고 하였다. 즉 초월적 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이론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행위로 말미암아 찾는 것이다. 이것은 칸트가 확신한바 실재에 대한 객관적 접촉이어서 과학이 이것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빼앗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도덕법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신의 영혼 불멸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동시에 이 우주에는 도덕적 통치자가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도덕적 의무감으로부터 얻은 도덕적 확실성은 순수 이성에 의하여 결정되는 확실성보다 훨씬 미약하다. 이것은 신념을 위해서는 족하나 필연적인 증거로서는 충분하지 못하다. 리츌은 칸트가 프로테스탄티즘을 회복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Like Kant, Luther voiced his protest against the proud attempt of human reason to reach God by speculation. 칸트처럼 루터는 das Ding an sich(하나님 자신)은 알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신지식은 계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Pure reason cannot apprehend this. It can be apprehended only by an act of faith, just as Kant maintained that religion is a proposition of practical reason, a commitment to the holy will of God.

칸트와 루터의 다른 점 Kant's religion is a throughgoing moralism, while Luther's is the religion of gr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