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의 최고참 왈도파
peter Waldo(?~ 1217)
12세기말에 프랑스의 론 골짜기에 있는 도시 리용에 피터 왈도(Peter Waldo)라는 상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당시의 로마 카톨릭의 신앙과 체제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1170년경, 두 사람을 고용하여 라틴어로 된 4복음서와 성경의 일부 책들, 교부들의 글의 요약본들을 로망어(중세기 남유럽 일부지역의 언어)로 번역하였다. 이런 번역물들을 읽음으로써, 피터 왈도사제나 주교 또는 교황의 말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말은 믿음의 토대가 될 수 없다는 것과 오직 성경만이 믿음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오직 한 분의 중보자가 계실뿐이며, 성례에는 오직 두 가지, 곧 세례식과 성찬식만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성자숭배,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연옥을 부정하게 되었다. 왈도는 이러한 진리와 그밖에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진리들을 받아 들였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프랑스와 롬바르디(이탈리아 북서지역)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자신이 읽었던 번역물들의 필사본들을 나눠주면서 설교를 했고, 많은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다. 전도여행 다니던 중, 1177년 프랑스 남동부 알프스 산맥 기슭의 피드몽 골짜기에서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같이 거하면서 그곳에서 설교했는데 그들은 곧 왈도의 이름을 따라 '왈도파’(Waldeneses) 또는 ‘왈도파 사람들’(왈덴시안들,Waldensians)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이들은 또한 예수님이 70인의 제자를 파송하셨던 것에 기초하여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나무로 된 신발인 사보트(Sabots)를 신고 다녔다고 해서 ‘사보타티’(Sabotati)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공개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렇지만, 왈도파 성경교사들이 곳곳에서 로마교 사제들로부터 배척받고 추방당하자,왈도는 로마의 합법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서 번역된 성경 등 신앙서적들을 두 사람에게 가지게 하고, 교황을 만나게 했다. 그러나, 당시 교황 알렉산더 3세(Alexander III, 170대 교황, 1159-1181)는 그 책들로 인해 야기될 사태를 두려워하여서 그 책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1179년의 제 3차 라테란 공회에서 “알덴시안들은 그들이 속한 지역의 성직자가 원하지 않는 한 어떤 경우에도 성경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결정하였다. 그리고, 곧 왈덴시안들에게 큰 환란이 다가왔다. 교황 루시우스 3세 (Lucius III, 171대 교황/1181-1185)는 왈도파가 자기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왈도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법으로 금하였던 것이다. 이후, 왈도파는 공공연하게 박해받게 되었고,특히, 교황권이 최전성기를 맞은 이노센트 3세(Innocentius III, 176대 교황/1198-1216)때 매우 큰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핍박 속에서도 왈덴시안들은 행상을 겸하여 유럽의 여러 지역으로 돌아다니며 자신들이 깨달은 진리를 전파하였고, 로마교의 거짓교리를 공격하였다. 왈덴시안들은 성경적 기독교의 재건을 크게 갈망했기에 신약성경을 거의 외울 정도였고, 각국어로 번역된 성경 필사본들과 소책자들을 보급하였다. 왈도파 운동의 주창자인 피터 왈도는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1217년 보헤미아(체코)에서 사망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확산되는 왈도파 운동에 당혹한 로마교 당국은 1229년의 발렌시아 회의(The Council of Valencia)에서 성경을 사제 외에는 읽지 못하게 하는 결정을 내렸다. 성경 자체가 금서가 된 것이다. 왈도파를 비롯한 반(反)로마교 단체들에 감행된 수백 년 동안의 살육으로 무려 100만 명이상이 학살당했다. 심지어 임산부를 돌에 깔아 죽이기도 하였고, 400여 명의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피신해 있던 동굴에 불을 질러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였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고, 그들의 시신은 때로 들짐승과 새들의 먹이로 던져지기도 하였다. 왈도파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인 경우에는, 무차별 살육과 방화를 감행해서, 황폐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혹독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왈도파는 멸절되지 않고, 오히려 15세기에 이르러는 가장 광범위한 반 로마교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검소한 생활을 강조했고, 엄격한 도덕률을 고수했으며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죽음이란 불안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신앙으로 힘을 얻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봇물이 터졌을 때, 그들은 보다 적극적이며 안전하게 그들의 신앙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고, 종교개혁운동의 최고 고참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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