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안식교’라고 부르는 교회의 공식 명칭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이다. 이들의 교리를 살펴보기에 앞서 간략한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안식교의 역사는 재림파의 창시자인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 1782-1849)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침례교 목사였던 밀러 자신은 혼의 소멸과 수면설(여호와의 증인 교리와 유사함), 제칠일 안식일에 대한 교리 등 안식교의 주요 교리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안식교의 창시자인 엘렌 G 화이트가 밀러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밀러는 “재림대각성운동”을 펼치면서 1843년 8월 21일에 그리스도가 재림할 것이라고 예언함으로써 많은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약 10만에 달하는 추종자를 얻게 되었으나 그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다니엘 8:14 해석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께서 1844년 10월 22일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또 한 번 계산하였으며, 당시 그의 추종자들은 심지어 가산을 다 정리하고 흰 옷을 입고서 산에 모여 들림 받기를 기다렸다. (이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윌리엄 밀러’라는 이름하에 실린 내용이다.) 이 역시 이루어지지 않자 신도들 가운데 소위 ‘대실망’이 일어났으며, 많은 사람이 재림파 신앙을 떠났다. 그러나 그 가운데 남아 있으면서 밀러의 성경 해석의 ‘오류’를 지적하고 새로운 해석 체계를 세운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와 엘렌 화이트(Ellen G. White, 1827-1915) 부부이다. 그들은 밀러가 계산한 10월 22일이 날짜는 맞았는데 그 날 일어날 사건이 잘못되었다면서, 그 날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재림하시는 날이 아니라 하늘 성소에 들어가시어 소위 ‘조사 심판’을 시작하는 날이라고 재해석했다. 즉 믿는 자들 가운데서 누가 영생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가려낸다는 것이다.
안식교의 창시자요 여선지자 노릇을 한 엘렌 G. 화이트는 17살 때부터 87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70년 동안 2천 가지가 넘는 환상과 꿈을 보았다고 하며, 안식교인 들은 그녀가 남긴 40권의 책과 무려 5000편에 이른다는 그녀의 글을 ‘영감 받은’ 것으로 믿고 있다. 감리교 배경을 갖고 있던 어린 엘렌은 당시 윌리엄 밀러가 주도하고 있는 재림파 운동에 깊이 참여하였으며 1844년의 ‘대실망’ 이후에도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정예배를 보던 중 그녀는 재림파 신도들이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가는 ‘환상’을 보게 된다. 그들은 이 환상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빛으로 믿었으며, 엘렌 화이트는 그 후 계속해서 많은 ‘환상’을 본다. 그녀는 곳곳을 다니면서 자신이 본 많은 환상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실의에 빠지고 흩어져 있던 재림파 신도들을 결속시키며, 각종 강연과 상담 등의 활동으로 지도자의 역할을 하기에 이른다.
제임스와 엘렌 화이트 부부는 조셉 베이츠(Joseph Bates)의 <제칠일 안식일>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제칠일을 거룩히 여겨야 한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으며, 이 확신은 엘렌 화이트가 본 환상으로써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환상의 내용인즉, 그녀가 하늘 성소에 들어가 십계명을 보는데 유독 안식일에 관한 넷째 계명에 ‘후광’이 비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안식일 교리가 정립되게 되었다. 그녀는 또한 후에 ‘건강 개혁’을 일으켜야 한다는 환상도 보았으며, 이로써 맑은 공기와 햇볕, 운동, 건강 음식 등을 강조하는 운동이 안식교 내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엘렌 G. 화이트의 지칠 줄 모르는 활약으로 전 세계 약 13만에 불과한 소수 종파로 시작했던 안식교는 현재 천백만 명에 이르며(안식교 측의 집계에 따른 숫자임) 그녀의 책은 140개가 넘는 외국어로 번역되어 보급되고 있고, 세계 곳곳에 안식교가 퍼지지 않은 지역이 거의 없는 정도이다. 다음 주부터는 그들의 주요 교리를 하나하나 성경적으로 비평함으로써 왜 안식교의 교리가 이단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이단 연구 시리즈 - 안식교(2)
안식교는 그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창세기를 읽어보면 1장부터 5장까지 어느 누구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세기 2:2-3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그것을 거룩하게 하셨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창세기가 끝날 때까지 어디에서도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지 않다.
어떤 안식교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요일을 언급하신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창세기 3장에서 출애굽기 11장에 이르는 2,500년의 세월 동안 아담이나 이브, 아벨, 셋, 노아, 에녹, 나홀, 테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르우벤, 갓, 단, 납탈리, 아셀, 레위, 시므온, 요셉, 베냐민, 리브카, 라헬,에서, 이스마엘, 에프라임, 므낫세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안식일을 언급하신 적이 없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이 정하신 “거룩한” 안식의 날을 지키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제정하셨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라고 말하는 안식교인도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한 이후 2,500년 동안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안식일을 언급하지 않으셨음은 모르는 것이다. 또 어떤 안식교인은 안식일이 계시록 20장 이후에도 계속 지켜질 것이기 때문에 영원에서 영원까지 (계속해서) 지켜질 명령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모세의 율법이 제정되기 전, 아담 이래로 2,500년 동안 안식일을 지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 서신에서 안식일은 “십계명”에 포함되어 언급된 적이 없으며, 로마서 13장에서는 “십계명”을 언급하면서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뺐다(롬 13:8-9). 안식교인 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신 후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에는 계명에 따라 쉬었기” 때문에 우리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눅 23:56). 그러나 누가복음 23장은 물론이고 누가복음 전체 어디에도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나타나지 않는다.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유대인 제자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율법을 지키고,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고(행 3:1),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며, 남자들의 경우 할례를 받고 수염을 기르는, 철저한 구약의 유대인들이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팔레스타인 지방 밖에 있는 이방인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쓰였으며(행 11:26), 이는 복음이 유대인들의 지역(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행 1:8) 바깥으로 퍼져나간 후에야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했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안식교인들은 한 가지 교리를 잘못 받아들이는 바람에 성경 말씀 전체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담부터 모세 전까지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바로 이것이 아담부터 2,500년 동안이나 구약의 성도들이 안식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이유이다. 안식교인들은 안식일이 “영원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모세가 창세기 속의 사건들을 기록했을 때는 이미 그 사건들이 발생한 지 2,500년이 지난 후였다는 사실을 간과해 버린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한 B.C.1500년 이전에는 아무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 안식교인들은 이런 엄연한 사실도,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도 정직하게 말하려 들지 않는다. 그 “영원한 안식일”의 율법은 2,500년 동안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계시되지 않은 채 잠자고(안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터 럭크만의 <나는 왜 안식교인이 아닌가>에서 요약 발췌함)
이단 연구 시리즈 - 안식교(3)
성경에서 이스라엘에 해당되는 구절을 오늘날 교회시대에 적용시키는 것이 바로 이단이 되는 지름길이다. 안식교인들은 구약의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구절이나 미래의 천년왕국 때 실현될 구절들을 오늘날 적용시킴으로써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거짓 교리를 만들어 냈다.
안식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변증해 놓은 신계훈 박사의 글을 인용해 보자. “안식일은 창조와 동시에 제정되어, 아담 때부터 존속된 제도이므로, 범죄와 상관이 없고, 유대인과도 상관이 없고, 의식적인 율법이나 십계명과도 시대적으로 상관이 없어, 안식일을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에 국한시키려는 시도는 비성서적이다.”(<오직 성경만이 판단 기준이다> p62) 안식교의 전형적인 논리이다. 그럴 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과 전혀 무관한 것을 그럴듯한 인간의 ‘논리’로써 변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안식일이 “아담 때부터 존속된” 제도인가? 성경 어디에 아담이 ‘안식일’에 아무 일도 안하고 불도 피우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가? 하나님께서 언제 아담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셨는가? 성경에 없는 것을 놓고 그저 논리로 꿰맞추려 해서는 안 된다. 모세 이전에 안식일을 ‘준수한’ 구약 성도는 단 한 명도 없다. 안식일에 관한 계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유대인의 대표적인 법이었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이 주님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의 ‘표적’(sign)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라는 말이다. “또 내 안식일들을 거룩하게 하라. 그 안식일들은 나와 너희(이스라엘) 사이에 표적이 되리니 이는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인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겔 20:20). 그러나 성경에 안식일이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이방인은 말할 것도 없고) 표적이라고 기록된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안식일은 지금이 아니라 미래의 천년왕국 때에 다시 지켜질 것이며(사 56:6) 계시록 20장 이후에 등장하는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도 바로 그 시대에 속한 사람들이다(사 66:22-23). 안식교인들은 안식일이라는 말만 나오면 그것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미래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그저 안식일 준수가 “사람의 본분”이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안식교인들은 교리 하나를 엉뚱하게 세우는 바람에 신학이라는 건물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다.
다른 면을 살펴보자. 성경의 안식일은 현재 우리가 쓰는 달력상의 금요일 저녁 6시부터 토요일 저녁 6시에 해당되지 않는다. 엘렌 화이트는 콘스탄틴과 로마의 달력을 쓴다. 그 달력 속의 일요일이 주의 첫날로 선언(A.D.321년 3월 7일)되어 있음을 보고서, 엘렌 화이트는 하나님과 성경도 그 달력에 맞추어 안식일을 조정하셨다고 단정 지어 버렸는지, 토요일을 주의 일곱째 날로 채택해 버렸다. 마귀에게 속은 이 여인은 유대인들이 쓰는 달력은 30일을 한 달로 치고 일 년(음력임)을 360일로 정해놓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이 어리석은 이론 때문에 안식교인들은 매주 토요일 예배당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서 자기들이 성경의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 안식교인이 물었다. “만약 우리가 어떤 날이 안식일인지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안식일 날을 기억하고 그것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물론 당신이 만약 B.C. 1500년에 시내 산에서 이 계시를 받은 구약의 유대인이라면 이 일곱째 날을 알아내기란 쉽다.
또한 유대인들의 유월절 안식일은 20년의 기간만 놓고 봐도 월요일이나 화요일, 혹은 수요일이나 목요일, 때론 금요일이나 토요일 심지어 일요일에도 닥칠 수 있는 날이었다. 유월절 행사자체에도 이틀의 안식일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가. 그들은 누가복음 23장의 여인들이 ‘안식일에는 계명에 따라 쉬었으므로’(눅 23:56) 우리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나, 그 날은 일요일이나 월요일, 화요일, 혹은 수요일, 아니면 목요일이나 토요일이었을 수도 있다. A.D.33년 당시 성경에 근거한 유대력을 따른다면 말이다. 그런데 왜 토요일만 고집하는 것인가?
이단 연구 시리즈 - 안식교(4)
“그후 암피폴리와 아폴로니아를 경유하며 데살로니가에 오니, 거기에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은 습관대로 그들에게 가서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변론하더라.”(행전 17:1,2) 이런 구절들을 가지고 안식교인들은 우리도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회당”은 구약과 신약 사이의 과도기에(B.C. 400-A.D.90) 유대인들이 임시방편으로 만든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집회 장소는 성전이었고, 그전에는 “장막”이나 “성막”이 그 역할을 감당했었다(삼하 7:6, 출 39:40, 대상 9:19, 사 16:5, 행 15:16). 구약의 유대인 중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회당에 모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신약의 그리스도인들도 예배를 위해 회당에 모이지 않았다. 교회 건물은 회당이 아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안식교인들은 바울이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회당으로 들어간 사실을 가지고,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의 안식일을 지켰다고 스스로 속인다.
안식교인들이 그 근거로 인용하는 구절들은 사도행전 13:42와 16:13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13:42의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사도행전 16:13의 이방인 여인들은 안식일 날 회당에 모여 기도하는 유대교의 관습을 따르던 여인들이었다. 모든 유대교 개종자들은(행 9장의 아나니아, 10장의 코넬료, 8장의 에디오피아 내시, 눅 7:5의 백부장, 행 2:10의 수많은 사람들) 신약의 복음이 전파되기 이전, 구약식으로 구원받은 사람이거나, 구원받지 못한 채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에디오피아로 돌아가던 내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코넬료(행 11:14을 볼 것)도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루디아나 빌립보 간수도 바울이 에베소서 2:1-6이나 고린도전서 15:1-6, 혹은 요한복음 3:16을 전해 주기 전까지는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안식교인들은 이들이 “안식일을 지키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에베소에 있던 아폴로의 제자들(행 19:1-4)을 회당에 모여서 안식일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의 한 예로 제시한다. 그러나 아폴로의 개종자들은 바울을 만나기 전에는 신약의 복음을 몰랐고 구원을 받지도 못한 상태였다(행 19:4). 사도행전 19장에서 바울이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신약의 그리스도인은 한 명도 없었다. 그는 구원받지 못한 유대교 개종자들에게 갔던 것이다(행 18:1,4이나 17:1-3도 같은 경우이다). 안식교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한 유대인(바울)이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서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장면을 두고,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특정한 날에 어떤 특정한 교회로 가야 하는지를 규명해 준 구절이라고 믿어버리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배드리기 위해” 유대인의 회당으로 모이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들의 주장을 검토해 보자. 안식교 :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셨다.”(눅 4:16-마 4:23 사이에서 발견되는 모습임) 물론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 아래” 계셨으며, 정통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지키셔야 했다. 그러나 3년 반 동안 안식일이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고정적으로“ 겹쳤던 경우는 없었다. 안식교 :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안식일이 존재한다.”(눅 23:56) 물론 정통 유대인에게는 그렇다. 누가복음 23:24장의 모든 여인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율법 아래 있는 정통 유대인이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 이르러서도 자신이 아직 율법 아래 있는 줄로 여기고 있었다. 안식교: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안식일은 남아 있다.”(마 24:30) 마태복음 24:10-12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다. 마태복음 24장에는 신약의 “그리스도인”이 한 명도 없다. 안식교: “안식일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존재한다.”(행 16:13). 바울이 왜 “자기 처소”(출 16:29)에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할 안식일에 강가를 어슬렁거리고 있었겠는가? 강가에 있던 사람들 중에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없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마음이 주께로 열려진” 이방 여인들과 이교도들뿐이었다.
이단 연구 시리즈 - 안식교(5)
안식교인들은 자신들의 책이나 매주 내보내는 방송에서 떳떳하게 ‘안식교인’임을 밝히지 않고 대신 “그리스도인” “성경 학도” 혹은 “예언을 공부하는 사람들” 정도로 자신들을 소개한다. 안식교 책자를 발행하는 ‘헤럴드 앤 리뷰’ 출판사에서 펴낸 책들을 검토해 보면 한곳에서는 “안식일을 범하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라고 변명하면서 다른 곳에서는 또 “일요일을 지키는 것은 짐승의 표(계 14:19)”라고 덧붙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안식교인들은 또 이곳 펜사콜라에서 펴낸 소책자에서 “짐승을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이란(계 13장) 일요일 대신 토요일을 준수하는 사람들이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안식교인을 제외한 나머지 교인들은 짐승을 경배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 글의 저자는 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인용하면서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멸망의 아들”과 연관시키고, 그들의 이름은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없다(계 13:4,8)고 주장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짐승을 경배하거나 그 표를 받는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저주를 받는다고 단언하면서, 짐승의 표를 받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같은 계시록 14장에서 9절이나 11절은 슬쩍 넘어가 버린다. 왜냐하면 그 표는 사람의 “이마나 손에” 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요일에 교회 가는 것과, 이마나 손에 표를 받는 것과는 아무 연관도 없다.
그들은 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이유는 이렇다. 안식교의 여선지자 엘렌 화이트의 모든 글을 살펴보면 그녀는 “짐승의 표”란 주님이 부활하신 날과 부활절로서 일요일을 지키는 것과,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일요일에 모이는 것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행 20:7, 요 20:1, 행 2:1을 보라). 그러나 부활하신 날은 주의 첫 날이었지 토요일이 아니었다.
1900년부터 1990년 사이에 이들의 교리는 계속해서 변했다. (이단을 분별하는 방법 중 하나는 교리를 자꾸 바꾼다는 것이다.) 안식교의 원래 입장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받기 위해 십계명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이 교리를 더 이상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은 원래 짐승의 표는 토요일 대신 일요일에 교회를 가는 것이라고 가르쳤지만, 이것도 더 이상 가르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처음엔 침례교인들과 감리교 신자들, 루터파 교회, 성공회, 카톨릭, 장로교회의 교인들은 “십계명”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요한일서 2:4의 ‘거짓말쟁이’라고 가르쳤지만 요즘은 더 이상 그런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
1997년 웨스트플로리다 대학에 왔던 어떤 안식교인은 이렇게까지 말했다. “계시록에서는 마지막 때에는 짐승을 경배하는 대신 창조주를 경배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전 세계적인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 14장에는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사실은 왜 모르는가. 계시록 14장에서는 구원받기 위해 믿음뿐만 아니라 행위까지 필요하다.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있으며 여기에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느니라.”(계 14:12). 또 계시록에서 말하는 “마지막 때”란 앞으로 있을 대환란의 마지막 때를 말하는 것이지 교회 시대의 마지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우리를 속이기 위해 이렇게 덧붙인다.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구원을 잃어버리냐구요? 물론 그건 아니죠.” 그러나 엘렌 화이트로부터 시작돼서 계속되어 온 안식교인들의 변함없는 가르침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곧 ‘짐승의 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짐승의 표를 받고도 구원을 잃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성경은 누구든지 만약 짐승의 표를 받는다면 (대환란 때) 반드시 구원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계 14:10-11). 안식교인들은 이렇게 모순되는 말을 하고 있다.
이단 연구 시리즈 - 안식교(6)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행 13:14, 14:1을 보라) 자주 유대인같이 되곤 했던 이방인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서신들 중 13개의 서신에서 안식일에 대해 거듭 이야기함으로써 이 문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바울 사도는 돌 판에 새겨진 십계명(고후 3장)은 신약의 구원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주의자들에 대해 경고하면서(골 2:16), 자신이 지적하는 “안식일”은 안식교의 여선지자 엘렌 화이트의 주장처럼 “절기 안식일”(절기가 있을 때마다 지켜지는, ‘요일’과 관계없는 안식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주 규칙적으로 있는 의식으로서의 안식일임을 밝힌다. 안식교인들은 “그러므로 음식으로나 마시는 것으로나, 거룩한 날이나 새 달이나 안식일들에 관해서는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골 2:16)는 구절과 마주치기만 하면 그 구절의 ‘안식일’은 모세의 십계명에서 언급된 ‘안식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펴는 책에서 이 말도 안 되는 이론을 완성시키기 위해 엘렌 화이트가 19세기에 했던 말을 끄집어낸다. “십자가에서 지워 버리고 못 박아 없앤 율법(골 2:14)은 모세의 십계명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살인, 거짓말, 안식일을 범하는 행위들은 폐하지 못하셨다는 말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방금 늘어놓은 말을 뒤집는 말을 덧붙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죄들을 씻기 위해 죽으셨다.” 그렇다면 십계명의 안식일은 그들이 말하는 “절기 안식일”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없어진 것이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다음의 성경 구절들은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것이라.”(요 1:17) “너희가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하였던 그 모든 일에 있어서도 믿는 자는 모두 그분을 통하여 의롭게 되느니라.”(행 13:39)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라.”(롬 6: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셔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으니...”(갈 3:13)
안식교인들은 은혜에서 시작했으나 은혜를 뒤집고 육신의 행위를 자랑할 기회만을 엿본다. 그들은 죄가 모두 속죄된 것이 아니라 일부만 속죄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불현듯 자신들의 교리가 뭔가 말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현대의 안식교인들은 정신없이 뒷걸음질 치다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전하는 구원 계획에까지 다다르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도, 구원받을 수도 없다.”(같은 안식교 책자에서 인용한 것임) 이 말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며,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 갈 것이라는 행위구원을 주장한 바로 다음에 한 말이다. 결국 그들은 도저히 풀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모순에 묶여 버린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고는, 처음에 밝혔던 자신들의 믿음의 근본 사항을 배격한다. 즉 짐승의 표를 받고 안식일을 어겨도 구원을 받을 수는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들의 처음 주장은 이것이었다. “일요일에 교회를 가는 것은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고 동시에 저주를 받는 것이다.” 다음엔 이렇게 말했다. “토요일에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요일 2:4)이며 진리가 그 사람 안에 있지 않다.” 그리고는 또 이렇게 발전했다. “토요일에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다(마 5:19).”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이렇게 말한다. “토요일에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이 안식교 사기꾼들의 정체이다.
이단 연구 시리즈 - 안식교(7)
모세에게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인 출애굽기 12장에는 은혜 아래 있는 유대인들이 나온다. 그들은 '어린 양의 피'로 구해냄을 받는다(출 12:1-20). 그런데 그들 중에서나 그들 이전 2000년의 세월 동안 지상에 살았던 그들의 조상 중에서 누군가가 어떤 '안식일'을 지켰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창세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거듭남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안식일’이나 ‘하나님의 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는 요셉을 비롯한 모든 족장들과 창세기에 등장하는 모든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들이 모두 죽고 난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었고, 모세 이전에 안식일을 지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에 회당이건 교회 건물에서건 모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주의 첫 날에 모여서(행 20:7) 설교를 들으며(행 20:7에서는 한밤중까지)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또한 주의 첫 날에 모여 헌금을 드렸고(고전 16:1-2), 주 중 특별한 날을 정하는 것에 관해서는 어떤 날을 고르기 이전에 이 문제에 관해 각자 자기 생각에 “확정해야” 한다고 배웠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니, 각자 자기 생각에 확정해야 하리라”(롬 14:5). 만일 안식교인들이 금요일이나 토요일을 소중히 여기고 싶어 하는 것이 월요일이나 화요일을 그렇게 여기고 싶어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우리 주님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의 첫 날에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셨다 성령께서는 주의 첫 날에 강림하셨다. 안식일이 아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예루살렘, 그리고 새 땅(영원 세계의 도래를 알리는-계 21장)을 예표 하는 것도 일곱째 날인 안식일이 아니라 주의 첫 날과 여덟째 날이다. 유대인의 ‘안식’은 천년왕국의 ‘날’(계 20장)이다. 이 ‘안식일’은 계시록 21-22장에서 끝이 날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명령하신 “안식일”은 월요일이나 화요일, 혹은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또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닥칠 수 있는 날이었으며, 5000년 동안 계속 요일이 바뀌었다.
직장에 나가지 않고 물건만 사지 않는다고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처소에서 나가지도 말아야 한다. “각인은...일곱째 날에는 자기 처소에서 아무도 나가지 말지니라.”(출 16:29). 불도 피우지 말아야 한다. 안식교인들은 안식일을 올바로 지키는 데 실패함으로써 이 안식일을 파괴시켰기에, 만일 그들이 정말 십계명 아래 있었더라면 1년에 50번 이상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죽어야 했을 것이다. 나는 이들 중 한 명이 ‘안식일’ 날에 부엌에 가서 요리를 하기 위해 불을 켠다는 사실을 지적받고 싶지 않아서 변명을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는 말했다. “글쎄요, 인자는 곧 안식일의 주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고요.” 나는 “저도 그 부분에 관해서라면 충실한 안식교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월요일이나 화요일이 “주 안에서 쉬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성경을 공부하기에 최상의 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요일을 더 낫게 여기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이 날에 부활하셨고, 성령께서 이 날에 우리에게 오셨고, 하나님께서는 이 날이 예표 하는 바 ‘첫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방인의 사도였으며 교회의 계시를 받은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주의 첫 날에 모여서 헌금을 내고 설교도 듣는다. 우리는 구약의 유대인이 아니라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다. (피터 럭크만의 <나는 왜 안식교 인이 아닌가?>에서 요약 발췌. 로마서, 마태복음, 사도행전, 계시록, 다니엘서, 이사야서 등 성경 강해 테이프 구입 및 합본을 원하시는 분은 지금 전화 주십시오!)
이단 연구 시리즈 - 안식교(8)
몇 주 전에 한 안식교인 L씨가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안식교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출애굽기 20장 8절에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에 지킨다.” “출애굽기 31장 15절을 보면 안식일이 더없이 중요하기 때문에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는 죽이라고까지 말씀하셨다”고 썼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쓰여 있는 말씀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안식교인들은 결코 성경을 ‘문자적으로’ 풀지 않는다. 성경 한쪽에서는 문자적으로 푸는 척하다가 자기들에게 불리한 곳에 이르러서는 슬쩍 넘어가버린다. 먼저, 그들이 진정으로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면 왜 안식일을 어기는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수 없는가? 이는 구약 시대에는 문자적으로 시행된 일이었다.
그는 안식일이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해당된다는 증거 구절로 이사야 56:6-7을 들었다. “또한 스스로 주께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고, 그의 종들이 되는 타국인들의 아들들, 곧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고 지키며 나의 언약을 붙잡는 모든 자들을” 그러나 반쪽만 문자적으로 보고 나머지 반쪽은 슬쩍 넘어가는 전형적인 모습이 여기서도 발견된다. 7절을 보자. “내가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나의 집에서 그들을 즐겁게 해 줄 것이며 그들의 번제들과 희생제들도 나의 제단 위에 받아들이리니...” 그 이방인들이 ‘번제들과 희생제들을’ 드린다는 사실과 ‘나의 거룩한 산’이 시온산이라는 사실은 문자적으로 보지도 않고 언급도 하지 않는 것이다. 위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이 아니라, 미래의 일, 즉 교회 시대가 끝나고 대환란이 지난 뒤인 천년왕국 때 이루어질 것이다.
그는 또 바울도 안식일을 “지켰다”고 말하기 위해 사도행전 18:4을 제시한다. “그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변론하며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설득시키니라.” 여기서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간 이유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예배드리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바울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안식일에 그리 들어간 것임을 오직 눈먼 안식교인들만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안식교인들이 그렇게 바울을 열심히 따라하려면, 행 21:26에서 바울이 사람들을 데리고 ‘정결례를 행하러’ 성전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까지 따라해야 하지 않겠는가?
안식교인들의 논리가 일부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개신교 목사들이 토요일은 유대인의 안식일이고 일요일은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라는 식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 소위 “주일성수” 개념 때문에 안식교인들은 더욱 소리 높여 기존의 개신교가 잘못되었고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사실 일요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지 않은, 잘못된 교리이다. 많은 개신교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교회 출석과 봉사를 강조하기 위해 주일 성수라는 개념을 편리하게 이용해 왔다. 그러나 은혜로 구원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일주일 중 어느 한 날을 ‘지키라’는 명령을 결코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든 그렇지 않는 각자 마음에 확정하고, 날을 소중히 여겨도 주를 위하여, 소중히 여기지 않아도 주를 위하여 그렇게 하라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롬 14:5,6).
혹자는 성경에 “주의 날”이 나오는 것을 가지고 ‘주일’ 성수를 지지하려 든다. 물론 성경에는 ‘주의 날’이 나온다. 이를 두고 흔히들 ‘주일’이라고 고쳐 부르지만, 성경에는 “Lord's day”(굳이 차이 두어 번역하자면 주일)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the day of the Lord”(주의 날)이 나올 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날은 일요일을 칭하는 날이 아니다. 구약에서, 특히 선지서들에서 반복되어 등장하는 이 단어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심판, 천년왕국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이다.
이단 연구 시리즈 - 안식교(9)
안식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 구절을 해석하는 데 있어 그것이 “어느 때”에 해당되는지를 전혀 보지 못한다는 데 있다. 즉 그들은 성경을 올바로 “나누지” 못하는 것이다(딤후 2:15). 안식교인 신계훈 박사는 안식교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쓴 <오직 성경만이 판단 기준이다>에서 안식일 준수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여러 구절들을 인용하지만, 출애굽기, 신명기, 에스겔, 이사야 등을 오갈 뿐 은혜 구원을 정확히 말하고 있는 바울 서신은 인용하지 않거나 인용해도 왜곡되게 해석한다.
그 중 한 예로 예레미야 31:33을 들 수 있다. “주가 말하노라. 그러나 이것이 내가 이스라엘 집과 더불어 맺을 언약이 되리니 그 날들 이후로 나는 내 법을 그들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속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는 안식일 법이 우리 마음속에 기록되어 있기에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다음 구절도 보자. “그러면 그들은 각기 자기 이웃과 각기 자기 형제에게 말하기를 ‘주를 알라.’고 더 이상 가르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 모두가, 즉 그들 가운데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요, 내가 그들의 죄악을 용서할 것이며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아니할 것임이라. 주가 말하노라.”(같은 장 14절) 이 구절도 지금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인가? 지금 현재 주의 법이 모든 이의 마음에 이미 기록되어 있기에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되고 말씀을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 말씀은 미래에 천년왕국 때에 이루어질 일이다. 그 때에는 위 말씀대로 ‘주를 알라’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통치하시는 주님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볼 것이기 때문에 ‘예언’이 필요 없을 뿐 아니라, 예언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자가 여전히 예언하게 되면, 그를 낳은 그의 아비와 그의 어미가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지 못하리니 이는 네가 주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함이라.’ 할 것이며 그를 낳은 그의 아비와 그의 어미는 그가 예언할 때에 그를 찌르리라. 그 날에 선지자들은 자기가 예언했을 때 각기 자기의 환상을 부끄러이 여길 것이며, 또한 그들은 속이기 위한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라”(슼 13:3,4).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이나 사복음서나 일반서신이 아니라 바울 서신에 입각하여 성경을 해석한다. 이는 아전인수 격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였으며(롬 15:16), 그에게 교회에 대한 계시가 주어졌기 때문이다(엡 3:2-8). 안식교인들은 이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분명한 바울 서신의 구절들에서도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것으로 ...그러므로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냐?... 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에 의해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들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단정하노라.” “율법의 행위로 난 자들은 누구든지 저주 아래 있느니라. 기록되기를 ‘행하도록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계속해서 행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 저주를 받느니라.”(갈 3:10).
물론 우리가 믿음으로써 율법을 폐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성경은 말씀한다(롬 3:31). 이것은 그래도 안식일 같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셔서(갈 4:4) 모든 율법을 흠없이 지키시고,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셔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심으로써(갈 3:13) 율법의 끝이 되신 것을 뜻하는 것이다(롬 10:4). 또한 율법은 있으나 우리가 지킬 수가 없으므로 믿음으로써 우리를 의인으로 삼아 주시는 것이며,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더욱 더 높이는 결과가 된다.
이단 연구 시리즈 - 안식교(10)
안식교인들은 소위 “조건적 불멸”을 믿는다. 이를 요약하면, 모든 사람은 죽은 뒤에 “무의식 상태”에 들어가며, 구원받은 자들은 재림 때에 부활하여 불멸함을 입고, 구원받지 못한 악인은 천년왕국 후에 부활했다가 심판받고 불살라짐으로써 그 존재가 소멸된다는 것이다. (혼의 수면을 믿고 지옥을 부정하는 여호와의 증인 교리와 상당히 유사하다.) 안식교인 신계훈 박사의 책 <오직 성경만이 판단 기준이다>을 인용해 보자.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러나 홀로 불멸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받은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실 것이다. 그 날까지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의식 상태이다...”(p.182) "성경은 인간 전체를 가리키는 영혼(soul)이 죽을 수 있는 존재임을 거듭거듭 확인하고 있다(겔 18:4, 마 10:28) 너무나 분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는 조건적 불멸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부정하면서, 이를 믿는 안식일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p.183)
그러나 이는 ”영, 혼, 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이 ”죽음“이라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생긴 거짓 교리이다. 먼저, 인간은 영, 혼, 몸으로 되어 있다(살전 5:23 제55호 글 참조).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 사람 자신(자아)인 ”혼“이 몸을 떠나는 것을 말하지만(창 35:18), 이 육신의 죽음(몸의 생명이 다하는 것) 외에도 성경은 영이 죽는 것과 혼이 죽는 것을 말씀한다. 이 두 가지 죽음과 육신의 죽음과는 다른 것이다. 육신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살아 있는 동안 휴거되지 않는 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히 9:27).
영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이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로 죽은 영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그 날에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네가 거기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 2:17) 아담은 그 뒤로도 930살까지 살았다. 그 날 죽었던 것은 그의 몸이 아니라 그의 영이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들을 “죽은 자들”이라 부르셨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라”(마 8:22)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고인을 장사할 수 있는가? 역시 영이 죽은 자들을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의 죽은 영은 그가 거듭날 때 성령이 그의 안에 들어오심으로써 살아난다. 엡 2:1) (참고 - 구약에서는 신약처럼 거듭날 때 받는 영적 할례가 없었기 때문에 성도의 몸과 혼은 붙어 있으며, 따라서 “몸”과 “혼”이 상호 교환적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단들은 이것을 혼동한다.)
혼의 죽음이란, 신계훈 씨가 믿는 것처럼 그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죄인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한다면, 그것이 고생이지 사망은 아니다. 그것은 ‘죄의 값은 사망’ 대신 ‘고생’이라는 뜻으로 성경을 바꾸어 놓는 일이다.”(p.194) 그러나 성경은 저주받은 혼이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고 말씀하는데, 소멸된다면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너희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마 25:41) ”그러므로 이들은 영원한 형벌에 들어갈 것이라.“(마 25:46, 그밖에 단 12:2, 계 14:11을 볼 것) 구원받지 못한 혼이 소멸된다면 지옥에 대해 경고할 필요가 없어진다. 신약 성경에서는 회개하지 않는 자를 기다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파멸에 대해 162군데에서 언급하고 있으며, 이 중 70번 이상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단들은 지옥의 교리를 희석시킨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안식교의 거짓 교리에 속지 말고, 소멸되지 않는 자신의 혼이 지옥 불에 떨어져 영원히 불타지 않도록, 오직 믿음으로써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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