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나 교회(2:8-11), 부요한 교회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 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 를 받지 아니하리라.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의 한가운데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있고 책망이 없는 교회입니다. 이 편지는 우리로 도전을 받게 합니다. “환난과 궁핍”과 함께 칭찬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부요와 함께 “곤고하고 가련한 교회”라는 책망을 받을 것인가?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8-9) 칭찬 둘째 단원(10) 권면 셋째 단원(11) 약속
첫째 단원(8-10상) 칭찬 ①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미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8).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나타내십니다. 이는 1:17-18절의 반영인데, 큰 환난에 직면한 서머나 교회에 용기와 소망(所望)을 주는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왜냐하면 처음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도 되시고, 죽으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딤후 2:11-13)을 믿기에 죽도록 충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서머나교회에 가장 적절한 모습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②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9중) 하십니다. 주님은 “내가, 알거니와”(9상) 하십니다. 출애굽 당시에도,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그러므로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어”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려 하노라(출 3:7-8)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안다” 하심이 서머나 교회 같이 책망할 것이 없는 교회에게는 큰 안위가 되는 말씀이요, 그러나 책망만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는 큰 엄위(嚴威)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지 않아서 하갈을 첩으로 취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시어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실 줄로 생각하고 비겁하게 하나님 뒤에서 행한 셈입니다.
이를 누구보다도 인식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의 서신서들을 보면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었습니다. 그는 순교를 눈앞에 두고 기록한 마지막 서신에서 디모데에게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1) 합니다. 이를 가리켜 신전신앙(神前信仰)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설교도 회중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고후 2:17) 행하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배하는 자들과 설교하는 자들이 신전신앙 이 한가지만이라도 놓치지 않고 있다면 예배와 생활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직면하게 되는 모든 어려움은 신전신앙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시 50:21) 하십니다.
신전 신앙 ③ 서머나 교회는 “환난을 당하고 궁핍”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9중) 하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분명 궁핍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부자 교회라고 말씀하시다니 그렇다면 서머나 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기에 부요(富饒)하다 하셨을까요? 주님은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이는 진정한 부요가 무엇인지쯤은 알고 있으리라고 여기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은 “그(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고 말씀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다른 것은 다 잃었다하여도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했기 때문에 부요한 교회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를 소유한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그러므로 바울은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시 119:56). 서머나 교회가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의 법도를 지킴으로 칭찬만 있고 책망할 것이 없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복음을 보수했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서머나 교회와는 대조적인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인데 그들은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17)한 교회라고 말씀합니다.
둘째 단원(10) 권면 ①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10상) 하십니다. 서머나 교회의 “환난과 궁핍”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닥쳐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를 막아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시험을 받게 하리니” 라고 이를 허용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지상의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 함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교회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작전은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히 2:10), 즉 죽음을 통한 승리, 이것이 복음의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중요한 요점이 대두되는데, 교회가 당하는 고난이 곧 주님이 당하시는 고난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와 연합한 그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로 하여금 어찌하여 이런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까 하고 부르짖지만 이럴 경우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당하시는 고난이라는 주님 중심적인 고백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알았기에 바울 사도는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면 바울만큼 당한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바울은 고난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바울 사도는 이렇게 하시는 의도가 우리에게 더 큰 믿음을 주셔서 더 큰 사명을 감당케 하시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②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10중) 하십니다. “십일”이라 하심은 문자적인 10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는 “천 년 동안 왕 노릇”(20:4) 한다는 말씀과 대조되는 말씀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환난은 “십일”이지만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하는 영광은 “천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또한 십 일이라는 말씀 속에는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고전 10:13) 하시겠다는 뜻이 함의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③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10하) 하십니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를 영적 전투라는 입장에서 평가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싸움이란 마지막으로 웃는 자가 참으로 웃는 자입니다.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10하) 하심이 이를 의미합니다. “면류관”이란 싸움이 끝난 후에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관(冠)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었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딤후 4:7-8)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부요한 교회요, 승리한 교회였습니다. 서머나 교회에게 수여되는 면류관은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그렇다면 서머나 교회가 어떤 의미에서 승리한 교회인가? 앞으로 살펴보게 될 4장-20장에서는 무엇이 승리이며, 누가 진정한 승리자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11장에 보면 두 증인을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11:7) 하는 말씀을 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두 증인은 패자(敗者)인가? 승리자인가?
12:11절에서는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들을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함으로 이것이 승리라고 말씀합니다. 저들은 증인들을 죽임으로 승리한 줄로 알았으나 그것은 세상적인 관점이요, 주님이 보실 때에는 죽기까지 그 정절을 지킨 증인들이 승리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몸은 죽일 수가 있어도 그 신앙의 정절은 꺾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승리에 의해서 확장되어 나간다는 점입니다.
셋째 단원(11) 약속 ①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11) 하십니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하심은, 몸이 죽는 첫째 사망의 해는 받을 수가 있을지라도 둘째 사망 “곧 불 못”(20:14의 해는 받지 않게 된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하심은 환난 중에 있는 서머나 교회를 향한 최대의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환난과 궁핍 중에 있는 서머나교회에 주신 약속은 “생명의 면류관이요, 영원한 생명”입니다. ② 이제 서머나 교회가 아니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할 차례입니다. 형제가 바라고 원하는 교회 상은 서머나 교회입니까? 아니면 라오디게아 교회입니까? 많은 목회자들이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는”(3:17) 라오디게아 교회를 꿈꿉니다. 그러나 부흥은 되지 않고 환난과 궁핍에 빠지게 되면 피곤해합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하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권하고 싶습니다.
최우선적인 목표를 큰 교회, 부자 교회가 되는 것에 두지 말고, “바른 교회, 칭찬 받는 교회”가 되기를 갈망하십시다. 그리고 적은 그 수를 붙잡고 “죽도록 충성”하십시다. 그렇게 하노라면 더 많은 심령을 맡겨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를 막고 있다면 그 때는 자신의 소명(召命)을 재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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