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어제와 오늘

하나님아들 2020. 2. 11. 15:22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어제와 오늘

 


 

1. 머리말


 

한국기독교사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1920년대 백낙준의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백낙준의 연구는 19세기 초반의 한 선교사의 한국 접촉에서부터 시작하여 1910년까지 기독교의 복음이 선교사를 통해 이 땅에 전해지고 정착하는 과정을 기술하였다. 그 뒤를 이어 1930년대에 들어서서 선교희년을 맞아 한국 기독교사 연구에 대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했으나, 전시체제가 강화되면서 역사 연구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었다.

해방 이후에도 기독교사 연구는 좀처럼 본격화되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에 해방 이후의 시대사를 정리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한국기독교사를 관통해서 파악하려는 노력은 4.19 후에 이루어졌다. 4.19는 역사의식을 새롭게 깨웠다. 그 결과 한국 기독교사 통사가 나오게 되었다.

1980년대 '선교100주년'을 맞으면서 한국기독교사 연구에는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곳곳에서 개교회사와 교단사를 간행하였고, 한국기독교 100년사를 써야 한다는 논의도 비등하였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기독교사연구회'가 조직되었고, 연구 세대와 방법 등 연구환경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이 때 눈에 띄게 나타난 변화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첫째 그 동안 신학을 전공한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어 온 한국기독교사 연구가 역사학전공자들의 참여로 국사학의 한 영역으로 접목되었다. 둘째 한국 기독교사 연구가 개인적인 연구에서 공동 연구나 학회수준의 연구로 상승하게 되었다. 셋째 한국 기독교사 연구에 사용되는 자료가, 앞에서 언급한 백낙준의 연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내의 자료의 한계를 거의 넘어서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것을 넘어설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은 한국기독교사연구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선각자들이 논구한 바가 있는데, 이 글에서는 논의의 범주를 확대하여 선교사들의 업적까지를 포함하는 한편 연구의 시기를 새롭게 고려해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연구사에서 의당 취급해야 할 선진연구에 대한 평가는 지면상 극히 제한적으로 이뤄졌음을 미리 밝힌다.

2. 선교사들의 연구

19세기 말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복음전파의 사역지인 한국의 문화와 전통에 관해 연구하는 한편 자신들의 활동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일찍부터 서둘렀다. 그들의 한국문화 연구 및 선교사 전기 기술에 대해서는 이미 간단히 정리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선교의 역사를 정리한 부분을 언급하겠다.

선교사들의 한국교회사 연구는 전형적인 역사기록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먼저 선교사들의 연례보고서 등의 성격을 띄고 기록으로 남겨졌다. 그와는 달리 선교본부에서 선교현장을 돌아보고 현지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한 보고서도 있어서 당시 한국의 사회 상황은 물론 교회의 형편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미북장로회의 총무 브라운(A.J.Brown)의 Report of a Visitation of the Korea Mission of the Presbyterian Board of Foreign Missions (New York, 1902)와 Report on a Second Visit to China, Japan and Korea (1909), 역시 북장로회 총무로 있던 스피어(Robert E.Speer)의 Report in the Missions in Korea of the Presbyterian Board of Foreign Missions(1897)와 Report of Deputation of the Presbyterian Board of Foreign Missions to Siam, the Philippines, Chosen, and China, April-November, 1915 (new york, 1915) 등은 대표적인 것이다.

1909년 선교 25주년을 맞아 재한(在韓)장로교 선교회에서는 의료 및 교육 사업, 여성선교, 문서사업 등과 재정 상태와 각종 통계를 실은 25주년기념책자를 간행하였는데, 이는 바로 25년간의 선교사(宣敎史)였다. 1910년에는 또 한국 선교 25주년을 맞아 뉴욕의 미국 감리교 본부가 간행한 Korea Quarter Centennial Documents도 미 감리교회의 한국선교 관련사항-선교의 과정, 기독교 의료와 교육, 부흥운동- 등을 열거하였다. 이같은 책자는 1934년 선교희년을 맞아 미북장로회 조선 선교부에서 간행한 Jubilee Papers, Korea Missions, Presbyterian Church U.S.A.(YMCA, 1934)도 같은 종류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1910년을 전후하여 감리교와 장로교의 선교부(사)들은 그 동안의 한국 선교를 역사적으로 정리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한국 선교 25주년을 맞은 데다가 장로교의 경우 1907년 독노회 조직에 이어 1912년에는 총회가 조직되었으며, 감리교 장로교 사이에서는 교계예양(敎界禮讓)이라고 하는 선교지 분할이 이뤄져 어차피 역사를 정리해야만 했다.

1910년대에 들어서서 독립선교사인 펜윅(M.C.Fenwick, 片爲益)이 The Church of Christ in Corea (New York, 1911)를 간행하였고, 영국성공회의 트롤로프(Mark N.Trollope, 조마가)는 The Church of Corea (1915)를 썼다. 북장로교의 클라크(C.A.Clark, 郭安連) 선교사는 국한문판의 《長老敎會史典彙集》와 영문판의 Digest of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Chosen) (Yokohama, 1918)를 간행했는데, 자료집에 불과한 이 책은 엄격하게 말하여 사실기록에 지나지 않아 평가와 해석을 곁들인 역사서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가 한국교회사를 본격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작업이라고는 할 수 있다. 클라크는 이 책 서문에서 총회사기(總會史記), 교회헌법휘집, 총회규칙휘집, 총회의 각위원과 각국의 사기휘집, 선교사와 조선인목사 명부휘집 및 교회장설이래 30년간 총계휘집 등 6대조를 중심으로 편집한다고 하였는데 이 중 총회사기는 한국 장로회의 초기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전휘집은 비록 자료집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 장로교회의 초기의 역사를 밝히는 데에는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이것 자체가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중요한 문헌이다. 특히 기록의 전거를 일일이 밝혀 놓았기 때문에 이 책 자체가 요약된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전휘집이 편찬되기 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제5회 총회(1916년)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를 편찬키로 하고 편집위원 14인을 택한 바가 있다. 전휘집의 편찬자 곽안련도 14인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이 전휘집이 장로회사기와는 다른 것이라고 밝혔다.

곽안련은 뒤에 이 책의 후속편으로서《장로교회사전휘집》(朝鮮耶蘇敎書會, 1935)을 간행하였다. 1918년에 간행된 것이 장로교 선교사의 입국에서부터 독로회(獨老會)까지를 다룬 것이라면, 1935년에 간행된 것은 독노회 때의 사적을 간단히 언급한 후에 주로 1912년 총회가 조직된 이후의 사실을 수록하고 있다. 이것은 뒤에서 다시 언급되겠지만, 장로회 총회에서《조선장로회사기》를 상·하권으로 편집, 간행한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전자가 선교사의 입장에서 한국 장로교회사를 기록한 것이라면 후자는 한국 교회의 입장에서 한국의 장로교회사를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은 이 밖에도 한국의 선교상황과 관련된 글들을 많이 남겼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에 관한 기록과 일제의 한국 강점 후에 터진 소위 '105인사건'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The Korean Situation I, II (The 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America. The Commission on Relation with Orient, 1919.7, 1920.4)이다.

선교사들의 한국교회사에 대한 서술이 본격화되는 것은 1930년대다. 먼저 한국의 초대 선교사 언더우드의 아들 언더우드(H. H. Underwood, 元漢慶)는 1925년 뉴욕대학에서 한국의 근대교육을 다룬 Modern Education in Korea (New York, 1926)을 학위를 받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로도 활동한 피셔(J.E.Fisher, 皮時阿)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Democracy and Mission Education in Korea (New york, 1928)를 간행하였다. 언더우드와 피셔의 저술에 대한 홍이섭은 평가는 경청할 만하다. 이어서 클라크도 네비어스선교정책을 연구하여 학위를 받고 The Korean Church and the Nevius Methods (New York, 1930)를 간행하였다.

선교사들의 한국 선교사에 대한 서술이 본격화되는 것은 1930년대다. 1934년에 한국선교 50주년을 맞는다고 하여 여러 가지 행사가 계획되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선교사를 정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남감리회 소속의 쿠퍼(S.Kate Cooper, 巨布計)는 Evangelism in Korea (Nashville, 1930)를 써서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의 역사적 개관을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기독교복음이 한국이라는 토착문화 속에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를 보여"주었고, 미 북장로회 소속의 솔타우(Stanley T.Soltau, 蘇悅道)는 Korea: The Hermit Nation and Its Response to Christianity (New York, 1932)를 써서 초기 한국의 기독교 수용과 그 전개과정을 다루었다. 1930년에 합동한 남북감리교회는 1934년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발표된 글들을 묶어 Within the Gate (YMCA, 1934)라는 제목으로 간행하였는데, 와그너(Ellasue Wagner, 王來)의 극본 At the Hermit's Gate도 실렸다.

1934년 선교희년을 맞아 남감리회 선교사 왓슨(Alfred W.Wasson, 王瑛德)이 쓴 Church Growth in Korea (New York, 1934)는 선교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이룩한 한국 선교에 대해 최초로 선교학적인 체계로 접근하여 탐구한 수준높은 연구로서 한국 교회 성장의 원인을 규명함에 네비어스 선교방법과의 관련을 중시하고 있다. 또 미 북장로회 소속의 로드스(Harry A. Rhodes, 魯解理)가 펴낸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1884∼1934 (Seoul, 1934)는, 이에 앞서 긔독신보(基督申報)에 17회나 <朝鮮基督敎會略史>(1월 4일자∼5월 30일자)를 연재, 1933년에 이를 《조선기독교회약사》(조선예수교서회)를 간행한 것과 함께 한국 선교역사 연구의 혁혁한 공헌으로서, 비록 한 교단의 선교사를 정리한 것이지만 다른 교단의 선교사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책에 이어 그는 선교 75주년을 맞아 Archibald Campbell과 함께 공동편집으로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Vol. II, 1935∼1959 (New York, 1964)를 간행하였다. 이 책으로 미국 북장로회는 한국 선교의 역사를 나름대로 총 정리한 셈이다.

3. 한국인에 의한 연구의 출발 - 백낙준을 중심으로

한국 기독교인들이 한국 교회에 대한 자기인식을 나타내는 것은 감리교회의 <죠션크리스도인 회보>(1897.2.2 창간)와 장로교회의 <그리스도신문>(1897.4.1 창간)을 간행, 자기 표현수단을 갖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것이다. 이들 신문에는 초기의 교회의 사정을 말해주는 기사들이나 개인의 단편적인 역사를 소개한 것이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신문>(5권 38호, 1901년 9월 19일자)에는 '셔션생 샹륜의 경력'이라는 글 같은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서 소위 '105인 사건' 같은 한국교회 박해사건이 일어나제 되자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미주의 선교 본부나 선교본부의 관할하에 있는 기관들은 '105인 사건'의 만행을 폭로하는 한편 일본의 조선 기독교인 학대에 항의하는 문서를 간행하였다. 이 때 이승만은《한국교회 핍박》(1913)을 써서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고발하였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쓴 단편적인 글들은 감리교와 장로교가 연합하여 간행한 <基督申報>(1915∼1937)에 더러 나타나고 있다. <긔독신보>는 1928년에 들어서서 '조선기독교 각파의 정세'를 소개할 각파의 집필자를 소개하였다. 1934년의 희년을 맞으면서 역사의식이 고양되고 있었는데, 이 때 앞서 말한 선교사 로드스(魯解理)의《조선기독교회 약사》를 비롯하여 조선 기독교 각파의 略史도 소개하고 한국기독교계의 여러 기관의 역사와 한국 신학과 문화의 문제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언급하고 있다.

한국 교회가 자기 역사에 대하여 거교단적으로 관심을 표명하게 되는 것은 1916년 장로회 총회에서 '사기편찬위원'을 선정하는 데서 엿볼 수 있다. 그 2년 후 1918년에 선교사 클라크(C.A.Clark, 곽안련)가《敎會史典彙集》을 영문과 국문으로 편찬하였다. 이것이 총회사기, 교회헌법휘집, 총회규칙휘집, 총회의 각위원과 각국의 사기휘집, 선교사와 조선인목사 명부휘집 및 교회창설 이래 30년간 총계휘집 등 조선예수교 장로회의 연혁과 각종 통계를 넣었기 때문에 이를《장로교회사전휘집》이라고도 한다.

이 무렵 일본 총독부는 식민통치의 필요상 기독교에 대한 책자를 내부 업무용으로 편찬하였다. <朝鮮의 統治와 基督敎>라는 이 소책자는 1905년 조선통감부를 설치하면서부터 1919년 3 1운동 직후까지의 기독교 상황을 정리하였는데, 이것은 총독부가 그동안 기독교대책을 어떻게 세웠는가를 보여준다.

192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인에 의한 한국기독교회사 연구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은 白樂濬(George L.Paik)의 한국교회사 연구로부터다. 평북 선천의 信聖학교를 졸업한 그는 중국 천진의 新學書院을 거쳐 1918년에 도미, 미주리주 파크(Park)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프린스턴에서 신학과 역사학을 연구한 후 예일대학에서 당시 선교학과 교회사로 이름이 높던 라투렛(K.S.Latourette) 교수의 지도를 받아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곧 귀국하였다. 백박사는, 과거 신성학교 시절의 은사였고 미국 파크 대학을 소개해주었으며 그의 귀국 당시에는 평양 숭실대학 학장으로 있던 尹山溫(George S. McCune) 박사의 호의로, 1929년 숭실대학 출판부에서 이 논문을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그가 논제로 했던 한국선교의 역사는 당시, 선교사상 유례가 없다고 할 정도로 성장 발전했다고는 하나 아직 40여년 남짓한 역사밖에 되지 않아서 박사학위 논문의 논제로 삼기에는 여러 가지 난점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용기와 사명감을 가지고 당시 교통편이나 자료수집의 어려운 여건을 무릅쓰고 한국의 초기 선교사를 훌륭하게 정리해 냈던 것이다.

그가 이 연구에서 시도한 것은 "한국 개신교의 초기부터 1910년까지 그 수용과 확장 과정에서 실제 일어났던 것들을, 문헌비판적인 확증성이 허용되는 한, 객관적으로 기술, 해석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선교학자인 라투렛의 지도를 받았고 그의 The Study of the History of Missions에서 제시된 관점이 백 박사의 탐구에 기본적인 골격으로 채택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초기의 영문판 저서에서 이 연구를 '순전히 선교의 역사'로 단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저자가 1973년 그의 학위논문을 국문판으로 번역해 내면서 기독교사가 선교사임을 분명히 했다.

"기독교사는 그 본질에서 선교사이다. 또한 반드시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기독교사상의 한 중간적 존재이다. 우리 주님이 죽으심으로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만 존재하게 되어 있다.(고전 11: 26) 이 중간적 존재체인 교회의 철두철미한 사명은 복음선포이다. 기독교사는 자초지종에 선교사로 일관되어 왔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에 우리 한국개신교회사도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백박사는 한국기독교사 연구에서 초기사를 제대로 다뤄야만 후기사도 정확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초기사를 전문적으로 다룬 저서가 零星"하다는 판단 하에 한국기독교사로서는 1910년까지 비교적 초기사에 해당하는 이 분야를 연구테마로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유의한 것은 '국사의 한 분류사'라 할 수 있는 한국기독교사를 "서구사학가들의 연구방법을 응용"하여 연구하겠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역사학과 신학을 연구한 학자가 서구의 역사학적인 방법을 충분히 구사하면서 역사학과 선교학을 종합하는 관점에서 생산해낸 업적이다. 라투렛 교수가 서문에서 "그는 서양사학가의 방법응용에 능숙할만한 훈련을 받았으므로 持久力을 가지고 자료를 수색 수집하였고, 그 자료의 비판과 해석에는 객관성을 견지할 줄 아는 기술을 소유하였다."고 언급한 것이나, 백박사의 이 연구를 두고, "한국기독교사를 연구하는 저술가나 학생은 백 박사의 저작을 숙독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고 극찬한 것은 이 책이 한국기독교사 연구를 시작하는 학도들에게 꼭 거쳐야 할 입문서이면서 수준 높은 연구로 하여 한국사학사에서도 손꼽혀야 할 한 고전으로서 불후의 가치를 가진 것임을 말해준다. 이 저술은 또한 선교사에 의한 것이든 한국인에 의한 것이든 간에 한국 기독교사 연구로서는 학적인 체계를 갖춘 가장 선행적인 연구였고, 이 연구를 계기로 하여 그 뒤 이 분야에 관한 많은 저술들이 나오게 되었다.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백낙준은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문과의 행정책임을 맡아 국학을 강화하는 데에 노력하는 한편 기독교 지도자로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조선은 선교희년을 맞아 1934∼35년에 각종 행사를 치르고 한국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각종 행사를 거행하고 역사문건을 만들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조선기독교 50년사》(신동아, 1935)와 앞서 언더우드 소전을 쓰고 있다.

백 박사의 학위논문이 완성된(1927) 후 그것이 아직 간행(1929)되기 직전인 1928년에 한국 기독교사 연구에 주목할 만한 책 두권이 간행되었다. 李能和의《朝鮮基督敎及外交史》와 車載明이 저작 겸 발행자로 된《朝鮮예수敎 長老會 史記》가 그것이다.

이능화의《朝鮮基督敎及外交史》는 "한국 기독교의 전개과정을 근대한국의 정세와 국제관계를 통해서 서술"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 책은 상, 하편 대부분 주로 천주교를 다루고 있고 개신교에 관해서는 이 책 하편 말미에 약간 취급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앞서 이능화는 1923년 <東明>에 <朝鮮基督敎史>를 연재(제2권 21∼23호)한 적이 있다. 조선예수敎長老會史記》는 계발시대와 공의회시대, 독로회시대 등 세 시기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제1편 계발시대(1865∼1892)는 토마스(R.J.Thomas) 목사의 한국 연해 접근시기부터 그 시기를 잡고 있지만, 그 전의 천주교의 유래도 다루고 있다. 제2편 공의회시대(1893∼1906)는 미국 남북장로회의 선교사들이 1893년 한국에서 선교사공의회(Council of Missions holding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하고 1901년에는 합동공의회(장로회공의회)로 개칭하여 1907년 독노회를 조직하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제3편 독노회시대(1907∼1911)는 대한예수교장로회노회(독노회)를 조직하는 과정과 노회의 의안들을 쓰고 노회 산하의 7대리회의 교회조직과 전도 환란 교육 자선사업 및 진흥을 기술한 것이다.

장로회 총회 사기편집위원회는《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를 편집하면서 원래 1923년까지의 역사를 정리하였던 것같다. 그러나 1928년 이 책을 처음 출간할 때, 1912년 총회조직 때까지의 사실만 수록하고 나머지 총회조직 이후(1912∼1923)의 것은 원고상태로 두고 출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1930년에는 이미 수정 완료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 미간된 '사기 하권'의 원고는 몇 부 복사하여 보관하다가, 1965년 동경 오윤태(吳允台)목사 보관본이 발견되어, 1968년 백낙준이 한국교회사학회를 통해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권》으로 간행하였다.

자기 교단의 역사를 정리하려고 하는 시도는 성결교회와 감리교회에서도 1920년대 후반부터 있었다. 1929년에는 성결교회의 李明稙이《朝鮮耶蘇敎東洋宣敎會 聖潔敎會略史》를 써서, 성결교단의 역사를 나름대로 간단하게 정리하려고 하였다. 1930년 양주삼(J.S.Ryang, 梁柱三)은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 30년을 기념하기 위해 국·영문으로 된《朝鮮南監理敎會 三十年紀念報》(朝鮮南監理敎會傳道局, 1930) Southern Methodism in Korea. Thirtieth Anniversary를 한권으로 간행하였다. 1930년 감리교단 통합에 앞서 남감리회의 역사를 정리한 이 책은 편자에 의하면, 역사가 아니며 역사를 저술코자 한 것도 아니며 다만 "역사를 저술하기에 不少한 자료가 포함되었다"고 밝혔다. 이 책은 또한 클라크(C.A.Clark)의 1918년판 《敎會史典彙集》(국, 영문)과 좋은 대조가 되며, 사료집이라는 점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와도 맥락을 같이한다고 할 것이다.

1934년은, 앞의 선교사들의 저술활동에서도 보았듯이, 한국선교 50주년으로 기념하는 해였다. 그래서 수많은 행사가 있었다. 50주년의 역사와 기록을 남기려는 작업들도 눈에 띄게 나타난다. 이 해에 장로교 총회에서는《조선예수교장로회50주년 역사화보》를 출판하였고, 鄭仁果는《조선예수교장로회50년사 일별》을 간행하였다. 감리교계에서도 감리교 50년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협성여자신학교를 졸업한 여류시인 張貞心은 1934년에《朝鮮基督敎五十年史話》를 썼다.

일제가 1930년대 후반부터 전시체제를 강요하면서 신사참배에 불복하는 기독신자들을 투옥시켰다. 그런 분위기에서 東京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채필근은 <기독신문>(1938. 8. 16∼1942. 4. 23)에 <朝鮮基督敎發達史>를 연재하였고, 조선기독교회 전도부에서도《朝鮮基督敎會小史》(1941)를 편찬하였으나, 일제에 굴종한 한국교회는 자기정체성과 역사의식이 위축되어 갔다.

4. 해방 후 연구의 재흥 - 최초의 통사화 작업

해방 후 10여년간은 국토의 분단과 민족의 상잔, 남북 이산 가족의 양산과 교회의 분열 등이 중층적으로 부닥쳐온 시기로서, 이 때 교회의 재건과 혼란을 경험한 김양선(金良善)은 먼저 자기 시대의 당대사 《韓國基督敎解放十年史》(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종교교육부, 1956)를 썼다. 저자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된 가정적인 환경" 때문에 약관 때부터 한국기독교 사료수집을 시작하여 해방 때까지 5천을 넘는 귀중 사료를 수장하게 되었고, 그런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기독교 전래사를 '탈고'한 지 오래되었지만, 6 25로 그들 사료를 거의 유실하게 되어 기독교사 집필이 절망상태에서 한국선교 70주년(1954년)을 맞아 한국기독교연합회로부터 한국 기독교사의 집필을 의뢰받고 이 책을 펴냈던 것이다.

그는 원래 한국기독교사를 전래 포교 부흥 수난 재건(해방 십년사)의 5권으로 정리하는, 말하자면 한국기독교 통사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때 계획한 5권의 순서를 바꿔서 "최후의 것을 먼저 내어 놓게" 되었다.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는 우선 대결과 투쟁의 격동기에 상이한 이해집단의 주장을 '대립과 화해'라는 관점에서 풀어보려고 했고 또 사가들이 좀처럼 취급하기를 꺼리는 당대사를 연구의 대상으로 설정하였다는 점, 격동기에 보존하기 어려운 이해쌍방의 문건을 중요한 대목에서 '공정하게' 자료로 제시하려 노력했다는 점 그리고 기록사료 뿐아니라 경험과 기억을 자료로 활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우선 저자의 역사서술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백낙준·함석헌 이래 확고한 사관을 가지고 역사를 서술한 기독교인이 없었는데 그런 공간을 메웠다는 점도 내세울만 하다. 그러나 이 책은, 장로교의 분립문제를 서술함에 불편부당의 입장을 견지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다.

김양선은 이 밖에도《간추린 한국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962)와《韓國基督敎史(2)-改新敎史》(民族文化史大系 VI,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70)를 서술하여 한국기독교사를 일반 학계에 소개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그의 사후에는《韓國基督敎史硏究》(基督敎文社, 1971)가 간행되었는데, 이 책은 "그가 생전에 한국기독교사 개설의 원고를 써놓은 것"인데, "그의 별세 일주년을 기하여 그의 조카 김광수 목사가 이를 정리, 몇 개의 논문을 가하여 하나의 책으로 출판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원고상태로 보면 가장 먼저 쓰여진 한국기독교사 개설서일 수도 있으나 출판된 것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같은 업적에서 드러나는 김양선은 백낙준이 해외 선교사의 자료를 주로 활용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국내의 자료를 활용하고 있어 보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1950년대는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분열이 폭발적으로 나타나던 시기였다. 이 무렵 예일대학에 유학 중인 전성천(全聖天)은 '한국기독교의 분열과 연합'을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로 삼아 씨름하였다. 일본 청산학원을 졸업하고 조선신학원에서 7년간 교편을 잡았던 그는 만학으로 프린스턴에 유학, 석사학위를 마치고 예일대학에 진학, 니버(Richard Niebuhr)와 라투렛(Kenneth S. Latourette)의 지도를 받아 Schism and Unity in the Protestant Churches of Korea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연구논문은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가 1979년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영문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한국 교회 분열의 경향성의 요인을 밝히고 후대 학자들의 연구토대를 마련하고 그들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준비함에 있다"고 한 바와 같이 한국 교회 분열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연합의 전망을 그 분열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 세대로서 학문적인 접근을 꾀하려고 했던 것이다. 분열의 현장에서 이를 증언한 김양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전성천이 한국 교회의 분열을 한국기독교의 전 역사에서 조명하려고 했던 점이라 할 것이다.

백낙준과 김양선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까지 한국기독교계는 아직 한국기독교의 통사를 갖지 못했다. 이 점은 해방 후 일정한 시기까지 한국기독교가 자기의 역사를 관통해 볼 수 있는 역사적인 통찰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누구보다 안타깝게 생각한 변종호(邊宗浩)는, 그의 스승 이용도(李龍道)의 전기를 쓰고 그의 서간과 시가를 수집, 편찬해 왔는데, "한국에 기독교(개신교)가 전래한지 75년이 되었는데 그 역사책이 한권도 안 나온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또 "5년전에 선교 70주년 기념으로 기독교사가 나올 줄 믿었으나 안 나오더니 이제 75주년에도 또 안 나올 모양"인 것같아 1950년대가 저물어 갈 무렵《한국기독교사[개요]》(心友園, 1959)를 간행하였다. 그는 '선교 75주년'을 맞아도 자기의 통사 한권을 갖지 못한 한국기독교의 몰역사성을 안타까워하면서 이 책을 썼던 것이다. 199쪽의 이 책은 내용이 풍부한 것은 아니지만, 저자로 하여금 한국기독교사 전공자들이 갖지 못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사를 저술한 영예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자기 시대를 통찰할 줄 아는 역사의식의 소산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도 한국인에 의해서는 기껏 몇몇 교단사를 편찬하는 정도에서 그쳤고 그 외에는 이렇다 할 한국기독교사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외국인들의 한국교회사에 관한 연구서가 많이 간행되었다. 1960년대에 몇대에 걸친 외국인의 한국 선교가 막을 내리고 있었던만큼 선교사(의 후예)들 중에서는 그들의 한국선교사역을 학문적으로 정리하려고 하였다. 여기에는 스톡스(Charles D. Stokes, 都益瑞)의 History of Methodist Missions in Korea, 1885∼1930(1964)과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였던 브라운(George T.Brown, 夫明光)이 남장로회의 한국선교사를 정리한 Mission to Korea (PCUS, 1962), Archibald Campbell(甘富悅)의 The Christ of Korea Heart (Falco Publishers,1954)와 그가 로드스(H.A.Rhodes, 魯解理)와 함께 '편집'한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II, 1935∼1959 (Commission on Ecumenical Mission and Relations, 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1964), 클라크(Allen D.Clark, 郭安全)의 History of the Korean Church(CLS, 1961)와 스웨러(Roy E.Shearer, 徐明源)의 Wildfire: Church Growth in Korea(1966) 등이 있다.

1960년대에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한국의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재해석함으로 기독교 전통과 민족 전통을 배척과 단절 개념이 아닌, 연결과 보완개념으로 전화시키려는 신학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 土着化神學(indigenization theology)을 다룬 연구들이 나타났는데, 尹聖範의《基督敎와 韓國思想》(대한기독교서회, 1964)과 柳東植의《韓國宗敎와 基督敎》(대한기독교서회, 1965)가 대표적이다.

5. 역사신학의 한 분야 - 1970년대 연구

1950년대, 한국기독교계는 교단간의 분열과 6 25 때의 여러 교파와 기관의 이식으로 분열이 가속화되었고, 그만큼 교단의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이는 나름대로의 신학의 정립과 교단사의 정리를 필요로 하였다. 60년대와 70년대에 교단사의 간행이 부쩍 느는 것은 바로 이같은 이유가 있었다. 참고로 교단사는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1981년까지의 것을 연도별로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金庄鎬,《朝鮮基督敎會小史》 朝鮮基督敎會傳道部, 1941

김용해,《대한기독교침례회사》 대한기독교침례회총회, 1964

이영린,《한국재림교회사》 시조사, 1965

편찬위원회 편,《한국기독교장로회50년 약사》 한국기독교장로회, 1965

이영린,《한국재림교회사연구》 선명문화사, 1968

김세복,《한국그리스도의교회 교회사》 참빛사, 1969

이천영,《성결교회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1970

장희근,《한국장로교회사》 아성출판사, 1970

장형일,《한국구세군사》 구세군대한본영, 1975

기독교대한감리회교육국 편,《한국감리교회사》 1975

최훈,《한국교회박해사》 예수교문서선교회, 1979

이성삼,《한국감리교회사》 기독교대한감리회본부교육국, 1980

전용복,《한국장로교회사》 성광문화사, 1980

김장배,《침례교회의 산 증인들》 침례회출판사, 1980

오만규,《재림교회사:제칠일안식일예수재립교회》 성광, 1980

안수훈,《한국성결교회성장사》 기독교미주성결교회출판부, 1981

편찬위원회 편,《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30년사》 종려문화사, 1981

한편 신학교육이 궤도에 오르면서 한국교회사 과목은, 여러 과목의 세계교회사 강의 가운데 한 귀퉁이를 차지하면서 겨우 구색을 맞추는 정도로 시작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사 강의는 아예 없거나 '구전에 의한 단계'를 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교회 내에 전승되고 있는 구전의 역사가 기껏 강의의 주내용이었다는 뜻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기독교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학자·저술가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에 의해 한국기독교사는 역사신학의 위치로 접목하게 된다. 70년대, 80년대를 한국선교 100주년으로 기념하려는 시기여서 역사의식이 환기되기도 하였지만, 유신정권으로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이 현실비판 대신 역사연구를 통하여 자기소리를 내려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이 점은 일반학계도 마찬가지였다.

70년대 한국기독교회사 연구를 본격화하는 작업이 민경배(閔庚培)의 《한국의 기독교회사》(서울 기독교서회, 1970)와 《韓國基督敎會史》(대한기독교서회, 1972) 간행으로 본격화하였다. 그는 이 책의 서론에서 '기독교회사'의 개념과 범위를 정리하는 한편 '한국 교회사의 제 문제'를 다루어 한국교회사 연구를 반성하고 있다. 그는 먼저 백낙준의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을 宣敎史로 보고 선교사가 갖는 한계를, 첫째 '순전히 기독교 선교의 역사'이며, 둘째 史料의 선교사 파송국 편중성 때문에 한국 교회 쪽의 고백과 증언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이며, 셋째 따라서 '한국 교회의 체험과 삶이 혈맥처럼 파동'치는 그러한 방면의 학적인 공헌이 될 수 없다는, 세가지로 요약하였다. 그의 비판 중에서 백 박사가 "자신이 시인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순전히 기독교 선교의 역사"라고 했다고 한 부분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사료의 편중성 문제는 일찍이 山口正之가 "이 책이 지니는 전면적인 결함이라고 할 것은 조선측의 사료가 일체 묵살된 것"이라고 지적한 것과 같다. 그러나 山口正之는 이렇게 된 이유를 "저자의 알바이트가 주로 미국에서 된 것으로 할 수 없"었다고 여지를 열어 놓았다.

1972년에 이같이 민경배의 비판이 나오자 백 박사는 그 이듬해《韓國改新敎史》(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를 번역, 출판하면서, 영문판(1929년)과는 다른 내용의 自序를 통해, 앞의 첫째와 둘째번 비판에 대해서는 정면 대응하고, 셋째번 비판에는 답변을 보류한 채 그 답을 독자에게 맡겨 버렸다. 민경배의 비판에 대한 백 박사의 답변에서, 자신은 "기독교사는 그 본질에서 선교사"이며, 따라서 "우리 한국개신교사도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분명히 하였고, 사료의 편중성 문제는 山口正之와 민경배에게 함께 답하기라도 하듯, "이 연구가 진행되던 때와 곳에서는 본래 여기에 인용한 자료 이외의 한국문헌 입수는 불가능한 실정"이었다고 밝혔다. 이 점과 관련, 민경배가 인용한 사료의 양이나 질을 놓고 볼 때, 백 박사의 연구에 대해 사료편중을 들어 비판할 수 있겠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다.

민경배는 또 김양선의《韓國基督敎解放十年史》에 대해서도 "확실히 여기에도 민족 교회사의 의식이 바탕처럼 깔려 있지는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한국민족교회형성사론》(연세대학교 출판부, 1974)을 써서 자신의 '민족교회론'을 확고하게 세워갔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가 백 박사의 교회사를 '宣敎史'로 명명한 것처럼, 그의 역사학도 후학들에 의해 '민족교회사관'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런 여러 관점을 통해서 볼 때 민경배의《韓國基督敎會史》(대한기독교서회, 1972)는 '민족교회사관'이라는 사관을 토대로 쓰여진 것이며, 그런 점에서 스스로 확실한 사관을 의식하면서 쓴 최초의 '통사'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에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분으로 吳允台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일본 소재 한국기독교사 자료를 수집하여 그것을 토대로 日語로《韓日基督交流史》(1968년, 한국어판은 1980년 혜선문화사에서 간행됨)를 간행한 이래 70년대 이후 4권의《韓國基督敎史》를 저술하여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1960년대 전후부터 한국기독교사의 산 증인으로 왕성한 저술활동을 계속한 全澤鳧는 '토박이 신앙'을 강조하면서 기독교 신앙·신학의 한국적인 맥락을 찾는 데에 열중해 왔다. 그는《인간 신흥우》(1971),《월남 이상재》(1977) 등의 한국YMCA를 이끌었던 인물들의 전기와《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1978)를 쓰는 한편《토박이 신앙산맥 1, 2》(1978/1982)와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를 염두에 둔 《한국에큐메니칼운동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79), 이 땅에 묻힌 선교사들의 행적을 살핀 《이 땅에 묻히리라-양화진외인열전》(홍성사, 1986) 그리고 '한국기독교백년사대계'의 제1권인《韓國敎會發展史》(대한기독교출판사, 1987)를 집필하였다.

1970년대에 간행된 蔡基恩의 《韓國敎會史》(기독교문서선교회, 1977)와 李永獻의《韓國基督敎史》(컨콜디아사, 1978)의 주목된다. 전자는 언론인이며 총회신학교에서 출강했던 저자가 오랜 동안 한국교회사에 관해 견문하고 수집하였던 바를, 1972년 2월부터 '평신도를 위한 한국교회사화'라는 제목으로 40회에 걸쳐 <기독신보>에 연재한 것을 다듬어 엮은 것이다. 후자는 장로회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강의하였던 저자가 평신도들을 위해 월간 <새생명>에 따라 7년간 연재한 것을 묶은 것이다. 이 두 책은 신학교에서 한국교회사를 강의하였던 저자들이 평신도를 위해 썼다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 평신도를 위한 한국교회사가 필요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70년대에는 한국기독교의 시대사와 분류사도 선을 보였다. 이호운(李浩雲)의 《韓國敎會初期史》(대한기독교서회, 1970)와 김광수(金光洙)의 일련의 저작들, 尹春炳의《韓國基督敎新聞雜誌百年史》(대한기독교출판사, 1975), 신사참배와 공산주의에 항거한 재건교회의 역사를 다룬 崔薰의《韓國敎會迫害史》(예수교문서선교회, 1979), 한국YWCA50년사편찬위원회의《한국YWCA반백년》(1976), 김남식의《韓國基督敎勉勵運動史》(성광문화사, 1979) 등과 앞에서도 언급한 전택부의《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와《한국에큐메니칼운동사》가 여기에 속한다.

특히 이 때 기독교여성사와 관련하여, 김현자의《기독교여성운동사》(한국기독교교육사, 1974)가 간행된 데 이어, 이원화의《서울YWCA 50년사》(YWCA, 1976)가 출판, 한국여성운동사를 조명하는 시각이 열리게 되었고, 주선애의《장로교여성사》(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 1978)과 장병욱의《한국감리교여성사》(성광문화사, 1979) 등의 교단적인 차원의 여성운동사가 출간되었다.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에 이르는 한국기독교사 연구는 이제 겨우 신학교에서 역사신학의 한 분야로 강의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서서는 연구의 질적인 면이나 양적인 면에서 도약이 이뤄졌다. 한국기독교사에 관한 알찬 통사가 저술되어 교회사의 틀이 접혔고, 한국기독교사 연구를 필생의 사업으로 삼겠다는 학자도 나왔으며, 기독교사를 연구, 서술하는 방법과 사관도 학적인 체계를 갖추었던 것이다. 그리고 80년대의 한국 '선교100주년'을 역사연구의 측면에서 준비하는 모습도 보여지고 있었다.

6. 교회사와 국사학의 만남 - 1980년대 이후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지형이 새롭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이 때에는 유신정권이 무너지는 외적인 변화와 '선교 100주년'을 맞는 내적인 변화가 겹쳤다.

'선교100주년'을 맞아 한국기독교사를 정리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1980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한 기독교문사의《基督敎大百科事典》와 대한기독교서회가 간행한 '한국기독교백년사대계'가 대표적이다. 전자는 교회사 관계 항목을 사전에 정리함으로써 이뤄졌는데 중요한 것은 이 때 수집된 기독교문사의 한국기독교사 관계 자료가 이 대백과사전의 편찬에만 활용된 것이 아니고 그 뒤 이 방면 연구자들에게 활용되어 한국기독교사 연구를 한 차원 끌어올리는 한편 그들의 공동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후자는 1990년에 설립 백주년을 맞는 기독교서회가 "과거 100년의 역사를 현 시점에서 재검토하고 앞으로 선교 2세기를 전망"하기 위해 시도된 것으로, 전택부(全澤鳧)의 《韓國敎會發展史》를 제1권으로 하여, 송길섭(宋吉燮)의 《韓國神學思想史》, 이만열(李萬烈)의 《韓國基督敎文化運動史》 그리고 민경배(閔庚培)의 《韓國基督敎社會運動史》 등 4권을 1987년에 간행하였으나, 원래 계획한 연표는 중도에 좌초되고 말았다.

한국기독교사 연구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의 하나는 1982년 9월 말 한국기독교사연구회가 창립되었다는 것이다. 이 연구회는 지금까지 개별연구 단계에 머물렀던 한국기독교사 연구를 공동연구의 차원으로 끌어올렸고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복간에 힘썼으며, 연구방법에서 역사과학적인 방법을 더욱 발전시키게 되었다. 회원 중에는 역사신학을 전공한 이들도 있었지만, 일반 국사학을 전공한 학도들도 있어서, 이 연구회의 결성으로 과거 역사신학적인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진행되어 오던 한국기독교사 연구가 자연스럽게 역사학적인 문헌비판과 고증을 중시하는 학문적인 풍토가 조성되었고, 회원들에게는 '신앙과 학문'을 같이한다는 동지애적인 유대가 아주 끈끈하였다. 이 연구회는 매월 연구발표회를 가졌고 일년 일차씩 한국기독교 유적지를 답사하였으며, 1985년 4월 5일(이 날은 100년전 이 땅에 복음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한 날이다)을 기해서는 <한국기독교사연구>라는 격월간 소식지를 간행하여 회원들의 연구를 발표하는 장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 연구회가 모태가 되어 1990년 9월 27일에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창립되었다. 자료의 수집과 공람, 연구인력의 조직화와 연구재정의 확보, 연구의 체계화와 계속성 유지 등을 위해서 그리고 이제 한국에서도 한국기독교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이 필요하다는 판단 등이 복합적으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출발하게 되었다. 연구소로 발전한 뒤에도 매월 연구발표회를 계속하였으며 계간으로 소식지를 간행하는 한편 1991년 7월부터는 연 2회를 목표로 <한국기독교와 역사>라는 학술잡지를 간행, 연구를 발표할 수 있는 공동의 장을 마련하였다. 그 동안 연구회와 연구소에서 복간하여 보급한 자료들은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저변을 확대하는 일에 크게 공헌하였다. 연구소에서는 또 통사《한국기독교의 역사 I, II》(기독교문사, 1989, 1990)를 간행하였는데 한국기독교사의 연구성과를 잘 반영하였을 뿐 아니라 기독교사 인식을 한 차원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논문선집과 연구총서 번역총서 등 수십권을 간행하였다.

한국에서 교회사 관계 연구단체로는 역사신학을 교수하는 학자들을 회원으로 하여 1960년대에 조직된 韓國敎會史學會가 있는데, 초기에는 학회지를 간행하고《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下卷을 간행하는 등 활발하게 움직였다. 90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설립을 전후하여 최근에는 여러 연구기관과 역사자료실 등이 설립되었다. 그 중 한국감리교회사학회와 한국교회사학연구원(1997) 및 한국교회사문헌연구원(원장: 심한보) 등이 저술 발표 복간 사업 등을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시키고 있다.

1980년대 이후의 연구성과에 대해서는 신광철이 비교적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 때문에 필자는 먼저 아래와 같이 80∼90년대의 업적(단행본 수준)만 나열하고, 이 시기의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특징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1980년대∼1990년대 한국기독교사 관계 단행본

간하배,《한국장로교 신학사상: 장로교신학과 교단의 갈래》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강인철,《한국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고신선교40년편찬위원회,《고신선교 40년, 1958-1998》 대한예장[고신]총회선교부, 1998

구라다 마사히코(藏田雅彦),《일제의 한국기독교 탄압사》 기독교문사, 1991

국제신학연구원,《하나님의성회 교회사》 서울말씀사, 1998

금장태·유동식,《한국종교사상사 2-유교·기독교편》 연세대출판부, 1986

기독교사상편집부,《한국역사와 기독교》 대한기독교서회, 1983

김남식. 간하배,《한국장로교 신학사상사 I》 베다니, 1997

김광우,《한국감리교회 백년:제도변천기》 전망사, 1990

김덕환,《한국교회교단형성사(상·하)》 임마누엘, 1986/1989

김봉희,《한국기독교문서간행사연구(1882-1945)》 이화여대 출판부, 1987

김성준,《한국기독교회사》 한국교회 교육연구원, 1980

김성준,《한국기독교순교사》 한국교회 교육연구원, 1981

김성호,《한국성결교회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출판부, 1992

김수진·한인수, 《한국기독고회사 (호남편)》 범론사, 1980

김승태,《신사참배거부자들의 증언》 다산글방, 1993

김승태,《한국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다산글방, 1994

김승태 편,《한국기독교와 신사참배문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1

김승태 편역,《일제강점기 종교정책사 자료집》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김영재,《한국교회사》 개혁주의신행협회, 1992

김인수,《한국기독교회사》 한국장로교출판사, 1994

김진복,《한국장로교회사》 쿰란, 1995

김해연 《한국교회사》 성광문화사, 1993

김흥수 편,《일제하 한국기독교와 사회주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2

김흥수 편,《해방 후 북한교회사-연구·증언·자료-》 다산글방, 1992

김흥수, 《한국전쟁과 기복신앙확산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9

남영환,《한국교회와 교단 - 고신교단사를 중심으로》 소망사, 1988

노고수,《한국기독교서지연구》 예술문화사, 1981

노종해,《한국감리교회의 성격과 민족》 성광문화사, 1983

노종해,《한국감리교사의 새 시각》 도서출판 풍만, 1988

노치준,《일제하 한국기독교 민족운동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3

대한YMCA연맹 편,《한국 YMCA운동사 1895∼1985》 로출판,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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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경향성에 1984년 한국기독교 '선교100주년'을 맞아 교단사와 개교회사를 펴내는 데 열성이었다는 것은, 역사의 대중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럴듯하지만, 도무지 역사서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서술이나 사분오열 분열된 교단을 정당화하는 역사편찬 등이 오히려 역사의식을 흐렸던 점도 간과할 수 없다.

1980∼90년대의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경향으로 교회사와 일반 역사학과의 만남이 본격화되었다고 지적하였다. 과거 한국기독교사가 역사신학의 일부로서 연구될 때는 때때로 사실을 구명함에 역사작적인 방법이 소홀하거나 무시된 적이 있었다. 그러한 사실 구명에 앞서서 해석과 평가를 성급하게 하려는 경향 때문에 잘못된 사실의 인과관계를 가지고 역사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또 역사연구에서 지나치게 사관을 고집하는 경우도 있었고, 사관을 갖지 않고서는 역사적 사실을 대할 수 없는 것처럼 연구자세를 강조하게 되어 역사연구의 기본이라 할 사실 규명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기독교사 연구가 일반 국사학과 만남으로 그 방법론을 통해 문헌비판과 사실 고증이 한층 탄탄하게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점은 한국기독교사연구가 역사과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지는 데에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일반 국사학을 전공하는 학도들이 기독교사연구에 투신함으로 한국기독교사와 민족사와의 관련이 더 밀접해졌다. 한말 일제하의 민족운동사에서 민족운동의 한 유파로서의 '기독교민족운동' 분야설정이 가능하게 되어가고 있다. 여기에는 윤경로, 김승태, 한규무, 강명숙, 한석희(韓晳羲)와 구라다마사히코(藏田雅彦) 등의 연구와 업적들이 있다. 민족통일문제와 관련, 김흥수, 사와마사히코(澤正彦)의 저술 및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북한교회사》(1996)를 들 수 있고, 최근 한국기독교의 통일운동사를 정리하는 작업도 진행되고 있다.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의 하나는 한국의 기독교문화를 창달하기 위한 기반조성이라고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의 문화 전통과 만나 형성되고 있는 한국기독교에 대해 먼저 역사학적인 접근과 분석으로 그 정체성(identity)을 찾아야 한다. 이런 문제에 대한 연구와 관련, 이덕주의 일련의 저술과 서정민·신광철이 주목된다.

이 밖에도 80년대 이후의 한국기독교사 연구와 관련, 선교사들에 대한 연구와 전기류, 그리고 해외한국인 교회와 관련된 연구들을 들 수 있다.

6. 맺는 말 -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과제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연구사에 나타난 문제점을 짚어보고 앞으로의 과제를 몇가지 제시하고자 한다.

현단계의 한국기독교사 연구는, 한국기독교의 여명기와 관련, 기독교의 수용과정과 초기 선교사들의 입국, 선교정책, 선교지역분할 등은 어느 정도 밝혀졌으나 복음의 이입과정이나 한국인들의 입신과정 그리고 그들의 사상적인 변화 등에 관해서는 아직도 미흡한 느낌이다. 초기사와 관련, 아직도 선교본국의 신학과 신앙이 어떠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피선교지와 접맥되는가를 밝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중국의 것을 번역한 것이라 하더라도, 초기의 전도문서 등을 분석하여 기독교의 접맥과정과 초기의 신앙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었는가를 밝혀야 한다.

한말 일제하의 기독교사 연구와 관련, 그 시대가 격동기였던만큼 기독교와 대내외적인 민족운동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관심이 주어졌으나, 그러한 민족운동의 기독교적인 원동력으로서의 신학과 신앙에 대해서는 거의 무신경하였다. 기독교민족운동의 신앙과 신학적인 기반이 어떤 것인가를 맑혀야 한다. 또 연구가 취약한 해방 후의 시기에 대한 연구로 그 시야를 넓혀야 할 것이다.

그 동안의 한국기독교사 연구에서 검토해야 할 문제로 떠오른 것의 하나는 史觀이다. 요지는, 백 낙준의 사관을 '선교사관'으로, 민경배의 것을 '민족사관'으로 그리고 '민족사관'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 '민중사관'이라는 것인데, 이 시점에서 더 시급한 것은 이러한 사관에 입각한 한국기독교사의 정리보다는 사실 규명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하나의 사관으로 한국기독교사 전체를 일관되게 조명하고 설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한국기독교사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수집과 보존과 관련, 여기에 종사하는 기관들이 서로 협조하고 소장 자료를 공개, 공람하도록 하고 희귀자료의 복본제작과 자료의 교환 등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특히 외국의 한국기독교사 자료 소재처에 대한 정보와 자료의 반입 등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본다.

끝으로 앞으로의 연구 과제와 관련, 선교사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비롯하여 해방 후의 인권·민주화 운동과의 관계 규명, 분열과 연합에 관한 연구, 한국기독교문화의 정립을 위한 한국인의 신앙·신학사상·문화에 대한 연구 및 지역교회사와 인물사에 대한 연구 등 시각을 확대하는 것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도 연구의 협동화와 토론문화의 정착, 연구내용의 객관적 검증 등 역사연구를 질적으로 고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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