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역사란 무엇인가?' 이 문제에 어느정도는 답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을 했다. 전에도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심도 있는 토의를 가졌고, 꼭 역사에 대한 시간이 아니더라도 역사를 바라보는 데서 나타날 수 있는 여러 가지의 문제들을 한번씩은 접해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 끝장을 넘기고 난 후로는 '역사'라는 것에 대해 기존에 가졌던 시각을 상당부분 수정해야만 했다. 그가 가진 생각을 따라 읽어 나가면서 두 번이나 놀랐는데, 하나는 추상적인 한 단어로 그토록 많은 주제들이 논해질 수 있다는데서 놀랐고, 또 하나는 저자가 내놓고 있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 - 이 말의 사용에는 신중을 기해야겠지만, 상관하지 않고 쓰자면 - 들에 한번 더 놀라게 되었다.
우선 그가 역사라고 정의하는 부분에 대해서 논하자면 참으로 적절하고도 신선한 정의인 것 같다.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 이말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과거의 사실과 현재 역사가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정의 뒤에는 역사 라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어느정도 안정된 시각이 뒷받침 되어 있다. 과연 역사적인 사실이 존재 할 수 있을까? 라는 문제를 '카'는 논리적인 필치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기본적으로 생각해 보았음 직한 문제를 그의 역사적 해박한 지식으로 잘 설명해 낸 것일 따름이라 생각한다.
한때 '참 사실을 제시하는 것'이 역사라고 믿었던 실증주의시대의 역사가의 역할에 항의라도 하듯 '카'는 역사라는 것이 역사가에 의해 해석되어지고 선택되어진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과거의 사실이란 역사가에 의해서 선택되어질때만이 그것이 사실로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비로소 역사적 사실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카'에 의하면 우리는 항상 역사가에 의해서 굴절된 역사를 접해야만 한다. 조금더 심하게 말하면 우리는 역사라는 것을 한 개인의 손에 맡겨두어야 하는 위험을 모두다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카'의 대답은 선명하다. 역사를 기술하는 역사가는 그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결코 개인이 아닌, 그 사회성을 필연적으로 가지고 살아가는 한 행렬의 한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한 부분은 어쩔 수 없이 시간속에서 한 시
대를 대표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인 것이고, 또한 그 역사가의 기술(記述)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의 공감을 얻어서야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기에 거기에서 역사가의 문제가 언급되고 있다.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고 확실하게 알려고 한다면 먼저 그 역사를 기술한 역사가를 연구해야만 한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굴절시켰는지, 그리고 죽어있는 과거의 사실은 어떻게 취사 선택해서 역사적 사실로 삼았는지에 대해서 면밀한 관철이 필요하다. 이것이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거기에서도 문제가 하나 등장하는 것 같다. 그 역사가를 이해하는 것 조차 역사기술 행위가 된다면 온전한 그 처음 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끝도 밑도 없는 '불가지론'적 사고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어떠한 것이 역사가 되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역사가에 의해서 선택되어지는 것이 과연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을까? 그 역사가 쓰여지게 되는 배경에는 역사가가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필요성은 아마도 - 뒷부분에 역사와 과학을 비교하며 말하지만 - 역사가 목적으로 삼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일 것이다.
역사의 기술은 대부분 그 시대의 위인들로부터 나온 것이 사실이고 '카'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의 말처럼 '역사는 위인전'인가 라는 질문에는 나도 반대하고 '카'도 반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역사가 되는가? 그것은 많은 개인의 상호작용에 대한 사실이며, 개인의 행위와는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는 사회적 제반 힘에 관련된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적 제반 힘'에 대한 부분은 '역사의 우연'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 같다. 미래로의 발전성을 지향하는 역사의 재료가 되는 것이 고립된 개인이 아니고 서로 상호작용하는 개인이라는 데서, 우리는 그 가운데서 과거의 빛을 통해서 현재를 파악하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가 지적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 위대한 개인에 대한 것 만이 역사의 모두가 아니라는 생각은 우리내 소박한 삶의 가치를 소중하게 지켜준 것이다.
역사가는 기본적으로 과거와 현재 사이의 중간자이다. 아니 어쩌면 '과거를 바라보는 현재의 응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과거와 현재의 이러한 협력체계는 역사로 하여금 끊임없이 흐르게 만들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역사가 과학일까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었다. 역사가 과학처럼 보편적인 진리를 가진 것일 수 있을까? 그리고 역사가 법칙을 생성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을 '카'는 다루고 있다. 참 친절하기도 하지! 궁금했던 부분인데, 자세하게 하나하나 말해주어서 얼마나 시원한지 모르겠다.
'카'가 어디에서 '과학이 역사를 과학이 아니라고 말하는 증거'를 구했는지는 모르
지만 다섯가지 정도의 논리를 가지고 그렇게 훌륭하게 추리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은 다른 것도 증명 가능하리라 믿고 역사가 과학이라는 사실에 의심하지 않는다.
'보편적인 것이 거의 없다'는 그의 주장은 실로 공감이 가는 말이다. 모든 사물이 그 본질을 말하게 되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흔히들, 아니 내가 제일 많이 그 외양만으로 그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리고 마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과학에서 다루는 것이 보편적인 것일까? 보편 타당해서 그것이 법칙으로 가능한 것만 다루는 것일까? 언뜻 과학이라는 이름 앞에 무조건 적인 순종을 하였지만 '카'는 과학에 절대 복종할 수 없었나 보다. 역사도 보편성을 지니며, 이 보편성을 근거로 역사는 그 시대에 혹은 개인에게 교훈을 주며, 특수한 개별적인 사건은 예언 할 수 없지만 보편적인 일을 예상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들을 전개 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미진하게 다루고 넘어가는 문제는 나에게도 아직 문제로 남아있다. 역사가 도덕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이길래 확실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일까? 역사가의 도덕적인 판단이 기본적으로 수용되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성없는 역사 기술은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이성은 인간의 기본 인격과 떼려야 뗄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카'는 결론을 명쾌하게 내리지 않았지만 분명코 역사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냥 지나쳐 갈 수 없게 되었다.
'동일한 인간과 그 환경에 대한 연구'를 하는 과학과 역사는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역사도 과학과 마찬가지로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해나가면서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라는 학문에는 항상 '왜'라는 질문이 따라오게 되는데, 그렇다면 과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제는 그렇게 불리어야 되지 않을까? - 역사도 '왜' 에 대한 부분이 설명되어야 할 것 같다.
도대체 그 역사적 사건은 '왜' 일어났는가? 그것은 '왜' 그런 것인가? 역사가들은 그것에 대한 답변을 해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카'가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 역사에서 그 '왜' 에 대한 대답이 올바로 이루어져 왔던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혼잡한 시대적 상황속에서 역사가는 그 시대성을 드러낼 만한 인물이었던가? 그리고 올바른 해석이었던가? 정말 수많은 원인 중에서 한 가지의 결정적인 원인을 찾기 위해서 노력을 했는가? 씁쓸한 대답뿐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속에서도 우리가 역사에 대해서 시정(是正)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현대사라는 이유일 것이다. '카'의 말에 의하면 현대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속에 원인이라고 생각되어질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그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다가 시대를 만나서 내놓고 고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좀더 거슬러 올라가서 중 일연이 우리 나라를 부처의 나라, 무당의 나라로 바꾸어 놓은 사실은 그 힘을 얻지 못하고 있는데 - 설령 이것이 어떠한 이유에서든 역사적 사실이 아니더
라도 - 그것은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원인의 부재때문일 것이다.
'역사의 우연'은 필연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 필연은 하나님을 믿는 나로서는 '섭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과학이 비판하는 역사의 종교적 문제일지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가를 볼 때 그것이 인간의 주어진 생각과 그 원인대로 일어난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만일 그렇다고 친다면 역사상의 수많은 악한들이 세상을 그들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그들은 분명 생각대로라면 그들이 힘이 있는 동안에 원하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들이 원했던 것처럼 그들의 시대는 아니다. 역사의 우연이 반드시 존재했던 것이다.
'역사적 우연'과 '역사적 필연' 이 둘은 동시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저 멀리서 있었던 일이 한 참이나 멀리 떨어진 그리고 시대상으로도 떨어진 나에게까지 인식되는 저 말 "클레오 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낮았어도 역사는 변했을 것이다"은 역사의 우연성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 진보하고 있다고 보는 '카'의 이론은 그 방향성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동의하기는 힘들다. 그도 말하지만 마땅히 진보가 있으면 퇴보도 있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제레미 리프킨이 말한 것처럼 이 시대는 열역학 제 3법칙 '엔트로피법칙'에 의해서 퇴락의 길로 걷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국지적으로 역사의 순환은 타나나고 있고, 역사에 대한 인간 해석은 도덕적으로 갈때까지 간 상황으로 비쳐지고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진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진보의 개념을 다시 한번 논의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정지된 세계에서는 역사가 무의미 한 것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 본질에 있어서 역사는 변화하며 운동하고 진보한다고 하는데, 그 본질에 서 있는 인간이 변화하고 운동하고 진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가? 진보와 퇴보를 나누려면 그 꺽어진 지점을 나누어야 할 터인데, 지금이 그 꺽어지고 저물어가는 시점이라 파악된다.
목적지에 대한 궁금함으로 걸음은 더 빨라질수 있겠지만, 결국 그 끝은 인간 누구가 관심을 가질 만한 죽음으로서 알수 있는 것이기에 이제 역사는 퇴보의 길을 걷는다고 말하고 싶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개발하고 발전 시켜온 것들이 이제는 자연으로 다시금 돌아가고 있다. 자연은 인간에게 발견되어 참 아름다운 동산을 이루었으나 이제는 쓰레기 더미로, 핵으로 인해 점점 시들어가며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흐른다' 역사는 그 흐름으로 인해 무엇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