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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나님아들 2020. 1. 7. 22:20

문화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 글은 라브리 대표이며 복음과 상황 편집위원장을 맡고 계시는 성인경 목사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문화는 옷과 같습니다. 입는 사람의 개성과 미적 감각을 맵씨있게 표현하는 것이 옷입니다. 마찬가지로 문화는 우리의 생각과 종교의 외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20세기 말의 문화는 우리 시대의 철학과 믿음, 그리고 삶의 태도가 낳은 산물입니다.
우리 나라의 초대 문화부 장관이었던 이어령 교수는 오늘을 "문화주의 시대" 라고 불렀습니다. 즉 문화가 사람의 의식을 변화시킴으로써 세상과 인간의 삶의 양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주옥같은 설교나 철학 강의를 듣고 사람들이 바꾸지 않고 문화를 통해 인생과 세상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철학과 정치 시대에서 이제는 문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수 십년간이 이데올로기와 정치 제도간의 전쟁 시대였다면 다가올 21세기는 서로 다른 문화간의 문화 전쟁 시대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문화 전쟁의 와중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문화를 어떻게 보고 대할 것인가 하는 것은 문화의 옷을 입고 사는 모든 사람의 관심이며 특히 오늘을 사는 모든 청년들의 정직한 질문입니다.


반 문화적인 태도
문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더구나 시대적인 사명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기독 청년들의 태도는 문화의 방향과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주위에는 문화 창조는커녕 반문화적인 태도가 팽배하고 있습니다.

첫째, 문화보다는 전도를 우선합니다.
기독 청년들 중에는 아직도 문화 창조보다는 전도하는 것이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터툴리언(Tertulian)은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으며, 학교와 교회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반문하여 문화를 기독교와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했습니다.
오늘날은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런 생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새로운 문화 창조를 위해 밤낮없이 뛰는 사람들이나 문화 선교를 하는 사람들을 2등 사역자로 취급하는 경향이 그것입니다. 혹은 오랫동안 쌓은 전문 지식, 경험, 직장을 선교와 직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포기하기도 합니다. 일반 직장보다는 이랜드와 같은 기독교인 사주(社主)가 운영하는 직장을 선호하는 것 등이 그런 것입니다.
전도는 주님의 지상 명령입니다.(마태복음 20:19-20) 최우선적인 사명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도 못지 않게 중요한 사명인 하나님의 문화 창조명령도 있습니다. 이제 전도는 이론이나 말로만 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불신자들은 우리의 말보다는 우리의 삶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말 뿐만 아니라 문화 속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기독교가 진리라는 것을 과시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둘째, 영향보다는 고립을 자초합니다.
기독 청년들이 현대 문화를 침투해 들어가기보다 오히려 문화로부터 도피하는 길을 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요즈음 상영되고 있는 영화는 하나도 볼 게 없다."고 단정한다든지,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라 있는 책은 하나도 읽을 게 없다."고 말하는 것 등이 그런 것입니다. 유명한 도예가의 후손이 예수 믿은 후에는 도자기에 성경 구절만을 새기고 있다든지, 성경적 주제만을 그리는 것을 기독교 화가라고 생각하는 것 등입니다.
고립이 좋다는 수많은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들은 가장 그럴듯한 이유 중에 하나는 소돔성에 들어간 롯을 핑계하는 것이었습니다. 서투른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롯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롯이 경건치 못하고 무법하고 음란한 문화 속에서 고통하는 중에 의로운 심령을 지킨 의인이라고 말합니다.(베드로후서 2:6-8) 결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롯의 인생이 실패했다는 평가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고립을 정당화하는 경건한 기독 청년들이 유명한 가곡이나 민요 혹은 교향곡은 다 잊어버리고 기껏 음도 잘 맞지 않는 기타 반주에 외국 복음송이나 부르고 있는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패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같은 자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는"(마태복음 5:15)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전통 문화를 반 기독교적이라고 매도하기만 하거나 재창조를 포기하고 싸워 보지도 않고 사단에게 문화의 전쟁터를 넘겨주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의 한 기독교 방송에서는 복음송 가수(Any Grant)가 대중 가요를 부른다고 하여 그의 노래를 더 이상 방송해 주지 않았다."(제람 바즈)고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를 '종교적인 울타리 속으로'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기독 청년들이 현대 문화에 적대감을 갖고 '종교적인 울타리' 속으로 슬며시 후퇴해 버리는 것은 문화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셋째, 변혁보다는 모방에 앞장섭니다.
앞의 태도들과는 대조적으로 어떤 기독 청년들은 현대 문화를 적극적으로 모방하고 흉내내는데 앞장서는 것입니다. 문화 창조의 소명으로 작업실이나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대신에 세상의 문화에 부응하거나 예속되는 것을 지혜로운 자세라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예술의 영역뿐만 아니라 철학과 기술의 영역에3까지 확산되고 있습니다.
창조는 모방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지나치면 교회가 세속 문화의 여인숙이 되어 버립니다. 모방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명성과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편리한 왕도로 통합니다. 그러다가 세속 문화의 배후에 있는 세계관까지 모방합니다. 우리 시대에도 문화 선구자들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지나친 적응력을 자랑하다가 그만 세속 문화를 교회 속에 대중화하는데 앞장서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결과로 어린 기독 청년들 중에는 성경대로 이 세상을 변혁하는 것을 포기하고 세상의 흐름대로 살기로 마음먹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되는 것입니다. 소금 맛을 잃어버린 기독 청년들, 밝기를 잃어버린 빛이 가장 불쌍합니다. 이런 청년들이 아무리 많아도 세상이 변할 리가 없습니다. 이런 자세들은 반 문화적인 태도들입니다.


반 문화적인 태도의 원인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원인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전도와 문화를 갈등 관계로 보기 때문입니다.
즉 문화에 정신을 파는 것은 복음 전파의 긴급한 소명에 대한 불충성이라고 간주하는 영성 때문입니다. 전도보다 문화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비 영적이며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문화 창조의 명령은 복음 전파의 명령에 종속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와 문화는 대립 관계나 갈등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최초의 문화 명령은 전도 명령 전에 주어졌습니다.(창세기 1:27,28) 그리고 문화는 언제나 계시와 선교의 다리였습니다.(창세기 2:16,17; 요한복음 4:3-42) "아테네와 예루살렘"은 서로 상관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았습니다. 그러므로 문화와 선교는 오히려 보완 혹은 동반 관계입니다.
전도는 사람의 영혼 구원이 핵심입니다. 그러나 영혼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의 문화적 삶의 변화를 동반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문화 창조가 없는 전도는 영혼 구원에만 머무르게 하고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전도 없는 문화는 영혼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기독교 진리는 전도할 뿐 아니라 실천되어야 하는 진리입니다. 믿기만 할뿐 아니라 삶 속에서 실험되어야 하는 진리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문화 고립을 자초하는 것은 세속 문화가 너무나 악하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 청년들이 현대 문화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비기독교인들의 능력과 업적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테네와 예루살렘, 학교와 교회,"가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습니다.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사이에는 세계관적인 '대립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절대적인 세계관을 믿고 비기독교인들은 상대적인 세계관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통성'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격이라는 사실에 기초합니다.
역사적으로는 가인의 후손들이나(창세기 4:16-22), 고대 문명을 이룬 사람들도 물론이거니와(창세기 11:1-32) 우상의 도시 아테네 시민들(사도행전
17:16-34)도 문화적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들도 높은 문화 창조의 능력과 의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죄와 한계가 있었습니다. 만약 비기독교인들이 이것 마져 없다면 대화나 전도의 여지도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특별 은총만 주장하고 일반 은총을 무시한다면 우리 스스로가 기독교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두 성격의 포용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가장 극심한 피해는 세대주의적인 종말론에서 옵니다. 그들의 구원관도 문제이지만 잘못된 문화적 사고의 폐해는 심각한 지경입니다. 얼마 전에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가정과 직장을 포기하고 휴거를 기다린 것도 그 뿌리는 세대주의에 있습니다. "세대주의는 문화적 활동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크게 감소시키는 주된 원인이다."(조지 엘든 라드)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현재의 문화와는 완전히 단절된다고 주장합니다. 즉 우리가 만든 문화의 일부가 하나님 나라에서도 연속된다고 믿지 않습니다. 현재의 모든 문화는 뜨거운 불에 활활 타 버리고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과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문화적 행위들은 무가치한 것들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의 세상과는 완전히 불연속적인 것이라고 오해한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헨델은 구원받아 천국에 가지만 헨델이 만든 문화적 업적인 '메시아' 찬양곡은 불타 버릴 것이라는 생각과 같은 것"입니다.(빔 리트께르크)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이 함축하고 있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비밀을 포기한다면 문화 창조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 문화 창조를 위한 과제

이제는 몇 가지 시급한 과제를 생각할 차례입니다.

첫째, 신앙과 문화의 일관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신앙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복음과 문화 사이에 비일관성을 중단해야 합니다. 세계관으로서의 기독교는 신앙과 생활, 복음과 문화가 일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 독특성입니다.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문화적인 삶 속에서 믿는 것을 표현하고 과시하는데 미숙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믿는 전제에서 나오는 논리적 결론이 무엇인가를 고찰해야 할 때입니다."(프란시스 쉐퍼) 내면적 신앙이 외형적 문화로 나타날 때입니다.
다니엘과 같은 각성이 필요합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의 세속적인 문화, 즉 "바벨론의 진미와 포도주"에 취해 있을 동안에는 아무런 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신앙의 전제와 논리적 결론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모순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비일관성을 극복한 후로는 바벨론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하와 헨델도 종교 개혁의 열매입니다. 법치 정신을 외친 루더포드도 같은 맥락입니다. 얼마 전 서울에서 효성 여대의 오의석 교수가 전시한 테라코타 작품 '이브의 유혹'은 정말이지 유혹에 대한 열 편의 설교보다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이 믿는 바를 그들의 작품 속에서 과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둘째, 개혁적인 문화관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기독교인의 독선을 버려야 합니다. '기독교는 절대적이다'라는 전제를 문화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기독교 문화라는 것이 정형화될 수 있다든지, 혹은 기독교 문화만이 절대적이라고 고집하면 곤란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만든 문화만을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거나 성경적인 주제를 다루지 않는 문화는 비기독교적이라는 자세와 같은 독선을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기독교가 절대적인 진리라 하더라도 기독교인이 만든 문화까지도 다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비록 비기독교인들이 만든 문화라고 하더라도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내포된 것도 있으며, 더 정직하게는 그들의 문화도 기독교적 세계관을 완전히 벗어나서는 만들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수납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기독교적 세계관을 이탈해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이며 하나님이 지으신 질서와 우주 위에서 작업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성 안에 숨어서 바깥으로 돌이나 던지는 방어적인 문화관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성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서 세속 문화와 싸워서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들 작품의 예술성, 기술성, 내용성 등에서 받아들일 것은 수용하고 고칠 것은 다듬고 새롭게 만드는 개혁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물론 비기독교적인 세계관이 지나칠 정도로 스며든 것은 폐기해야 합니다.(고린도후서 10:4,5)
먼저 건전한 비판과 대결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자랑하고 싶은 우리의 전통 문화라 할지라도 살풀이, 한풀이 등의 굿장단과 그 세계관은 본받을 수 없습니다. 백남준의 예술 철학은 "예술은 재미이며 사기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디오 작가인 백남준이라 할지라도 반예술적 철학에 대해서는 대결을 선언해야 합니다. 이어령 장관이 "창조적인 삶과 문화를 만드는 요소는 '바람개비'의 원리에서 발견되는데 그것은 "가역성, 가동성, 가시성이다."고 주장한 것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비판이 없는 곳에서 창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 청년들 사이에 문화 비평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은 다행입니다. 그러나 비판과 대결 못지 않게 몇 배나 더 진지한 희생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겨우 백 년 밖에 되지 않는 기독교 역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직 예수 문화가 뿌리를 내리기보다는 전통적인 문화에 더 익숙하기 때문에 더욱 세심한 희생이 요구됩니다. 우리는 바른 영성과 성경적 지성 그리고 절대적 윤리와 같은 문화 창조의 기본 원리가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예수 문화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는 그 날까지 대결과 희생을 포기하지 맙시다. 개혁적인 문화관이 문화 창조의 방해물이 아니라 자극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문화적 변증가의 마음을 가집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문화 시대에는 문화를 통한 복음 전파라는 것은 중요한 선교 전략입니다. 지금은 기독교인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만든 종교적 영화나 노래를 부르면서 '기독교 문화'를 즐길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속 문화에 종노릇하고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데 눈을 돌려야 합니다. 문화를 현대인을 만나는 다리로 삼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문화적 변증가'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즉 현대 문화의 양식뿐만 아니라 그 철학적 배경을 이해하고 복음을 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마음입니다. 문화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사상의 산물입니다. 잘못된 사상이 잘못된 문화를 만들고 좋은 사상이 좋은 문화를 만듭니다. 그러므로 현대 문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며 그것을 매개로 하여 전도하려는 '문화적 변증가', 혹은 '문화적 전도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서구 교회와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도 이런 일을 하는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교회 짓고 수양관 짓는데 너무 바빠서 현대 문화의 방향과 그 위험성을 연구하는데 힘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청년들을 문화적 변증가의 마음을 갖도록 훈련하는데 등한히 하고 있습니다. 세속 문화 속에 24시간 노출되어 있고 그들의 영혼을 위협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단적인 예로서 기독교 영화가 없다고 무조건 극장가지 말라고 하지만 "보고 싶은 영화는 다 봅니다"는 것이 신세대들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청년들이 현대의 세속적인 문화의 거친 파도 앞에서 굳건히 살아갈 수 있는 바른 정신과 마음을 갖도록 도와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퇴폐적인 문화를 추방하는 운동에 동참하게 하거나 그들이 마음껏 즐기고 창작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을 만들어 주는 등의 좀 더 적극적으로 문화 운동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일부 문화인들에게 맡길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관심을 갖고 모든 기독교인들이 참여해야 할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