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계몽주의와 독일 낭만주의
인 성 기*
들어가는 말
독일은 18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의 역사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국은 이미 17세기에 정치 혁명으로 의회민주주의를 발달시켰고, 프랑스는 루이 14세 시대에 절대왕정의 중앙집권 국가를 형성하고 1789년 대혁명을 이룩한 반면에, 독일은 1780년까지도 314개의 소영방으로 나뉜 후진국이었으며1)독일국민이라는 자의식조차 희박했다. 이런 후진적 상황은 문화 예술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이미 16세기에 셰익스피어가, 프랑스는 17세기에 몰리에르, 라신느, 꼬르네이유가 고전주의 문화를 꽃피웠었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진다. 독일은 위대한 괴테와 쉴러를 비롯한 시인과 사상가들을 대거 배출하고 학문이 급격히 발달함으로써 유럽의 19세기는 독일의 시대가 된다.2)
본고는 바로 이 시대의 독일 정신사를 고찰하고자 하며 특히 낭만주의 사상에 촛점을 맞추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독일 정신사의 본령은 낭만주의였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독일 낭만주의는 무엇보다도 유럽의 계몽주의, 특히 영국의 경험론 및 프랑스의 합리주의와의 비판적 대결을 통해 생겨난 사상이었다. 이 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를 이해하는데도 일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포스트모더니즘도 이성 중심의 유럽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이기 때문이다. 본고는 독일 낭만주의의 이 현재적 의의를 아울러 생각해 보기 위해, 우선 유럽 계몽주의의 역사에 대한 간략한 개관을 선행시키고자 한다.
1. 계몽의 변증법
유럽에서 계몽주의의 맹아는 이미 16세기의 이태리 르네상스 시대에 싹텄다. 인간은 중세 이후 최초로 자아(自我)를 발견했고 신의 이성을 인간의 이성으로 대체했다.3)그로써 근대의 새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인간은 그 대가로 이제 중세의 종교적 구심점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미증유의 새로운 상황 속에서 인간은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중세적 총체성을 상실한 사회는 차츰 개인주의 사회가 되었고 개인은 자신의 주체 속에 갇히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가속화되었다. 인간성의 이념은 사실상 “단순한 무차별주의의 관용 Toleranz bloßer Indifferentismus”4)으로 변질되어 나타났으며, 유용성과 합목적성의 이데올로기로 축소되었다.
현대의 수많은 철학가들은 물질 이데올로기로 획일화된 이성적 주체의 극복을 위해 노력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의 의미에서 그 최초의 비판자는 니체였다.5)니체는 자신의 진술을 스스로 취하하는 비유적 형식의 글쓰기를 함으로써 확정적 주체의 해체를 시도했다. 그의 순환론적 역사관은 계몽주의의 진보 낙관주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니체의 서구문명 비판은 최근에는 프랑스의 해체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푸코의 주장에 따르면, 이성의 산물인 병원, 학교, 국가와 같은 근대의 제도들이 오히려 인간을 심리적으로 억압하는 “담론 Diskurs”이 되었다.6)료타르 역시 세계의 포괄적 인식과 설명을 위한 계몽주의의 과학이 오늘날 “거대 서사구조들 große Erzählungen”을 형성해 개인을 통제하고 획일화시키는 체계가 되었다고 주장한다.7)
들뢰즈(G. Deleuze)와 과타리(P. F. Guattari)도 획일적인 거대 집단적인 것(Molares)보다는 소집단적인 것(Molekulares)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보드리야르(J. Baudrillard)는 기호학적 시각에서 이런 거대 집단들의 허상성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세계는 대중 소비사회의 피상적 미학 (Oberflächenästhetik)만 남았다. 예컨대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디즈니랜드가 허상세계인 것처럼, 그 바깥의 미국 대륙전체가 허상세계이다. 왜냐하면 사실상 세계전체가 정보통신 다매체 시대의 테크닉에 의해 조작된 시물레이션으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은 광고의 홍수 속에 현실과 허상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예컨대 새로 자동차를 구입할 때 소비자는 자동차의 주용도인 출퇴근 목적으로 구입한다기 보다는 특정 모델의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이 속한 집단에 자기도 소속하게 된다고 인정받게 될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구입하며, 자동차는 그 환상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계몽주의의 현실은 이제 실체를 상실했고, 산업사회의 상업화된 이미지의 세계, 즉 기표(signifiant)로서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아도르노의 의미에서 계몽이 다시 신화가 되어 인간을 몽매하게 만들었다. 이제 철학의 과제는 이 획일화된 기호의 조직망을 뚫고 참된 대상과의 일치에 다시 도달하는 일일 것이다.
이런 인식에 바탕해 현대의 지성인들은 이성적 질서의 해체를 주장하는 해체주의자가 되었으며 후기구조주의자라고도 불린다. 이들은 거대담론을 대체할 수 있는 단기적인 지식 모델들을 만들어야 하며 개인주의적 체험의 강도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식의 가치판단 유보적 자세에 머무르고 있다.
독일 낭만주의도 오성의 절대화를 통해 사회를 획일화시킨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성립했지만, 거기서는 아직 확고한 윤리적 기준이 있었으며, 이 기준에 따른 학문적, 예술적 성과를 이룩했다.
2. 독일 낭만주의의 정의
19세기의 독일 낭만주의는 문학, 예술 이론일 뿐만 아니라 철학 및 사회 전반에 관한 정신 문화운동으로 폭넓게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독일에서 1780년경에 개화되어 1830년경까지 지속되었고, 동시대의 영국과 프랑스 낭만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8)렛싱의 반규범론적 예술론과 독일의 질풍노도 문학으로부터 시작된 독일 낭만주의는 18세기에 계몽주의의 오성에 의해 배제되었던 인간 본성의 비합리적이고 감성적인 측면의 해방을 목표로 하며, 괴테의 고전주의도 거기에 포함되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우리가 고전주의의 서유럽적 개념을 집중적으로 고찰해보면, 독일 고전주의도 이미 규칙 정전(正典)에 대한 배반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하는 질풍노도, 고전주의 그리고 낭만주의의 구분도 다분히 무너져야 한다. 그래서 독일 바깥에서는 질풍노도 역시 초기낭만주의로 불려지고 있으며, 특히 프랑스 문예학에서 그러하다.9)
프랑스인이나 영국인의 눈으로 볼 때, 고전주의자 괴테조차도 낭만주의자에 속한다. 실제로 독일의 예술사에서 고전주의 시대는 짧게 경과했으며, 고전주의 작품은 분량 면에서도 극소수에 머물고 있다. 단정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괴테 시대의 독일 이상주의는 본질적으로 낭만주의였던 것이다.
물론 독일의 낭만주의는 당시 영국의 샤프터베리, 그리고 프랑스의 루소에 의해 가장 많이 자극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본국에서 거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었다.10)영국에는 로크, 흄의 경험론이, 프랑스에는 디드로, 볼테르의 합리주의사상이 지배하고 있었다. 낭만주의 정신은 독일에 와서 18세기의 독일 경건주의에 접맥하면서 최초로 개화한 것이었다.
물론 독일에도 낭만주의 전통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후반에 가면, 렛싱의 계몽주의 정신을 계승한 신 계몽주의자로서 헤겔 좌파, 마르크스, 사실주의 작가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들도 독일의 역사발전과 사회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하지만 독일 지성인들은 전통적으로 사회나 정치에 대한 관심보다는 종교적 정신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더 컸다. 프랑스의 슈타엘 부인의 눈에 비친 독일은 정치인의 나라가 아니라 수많은 사상가와 시인의 나라였다.11)독일의 형이상학적 인식욕은 프랑스의 합리주의나 영국의 경험론 사상의 현실주의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프랑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는 확실하게 판명된 것에서 출발하는 연역적 사유방식을 특징으로 하므로,12)관념적인 것보다는 현실적인 것을 중시하게 된다. 또한 연역적 사유방식은 인과성의 연쇄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기존의 전제의 알려진 인식 구조 속에 포박되어 머물기 쉽다.
영국도 유럽 역사상 최초로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계몽주의의 문제점을 극심하게 체험했으면서도 독일처럼 정신세계로 눈을 돌리지 않고 여전히 경험주의의 원칙을 고수했다. 경험론자들은 기본적으로 선험적 오성의 진리 인식 능력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모든 관념은 외계의 경험의 산물로 여겨졌으며 경험을 통해 귀납적으로 입증되어야 했다. 경험론은 심지어 데카르트의 직관에 의한 진리인식 가능성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독일의 낭만주의는 사회사적 관점에서 볼 때 독일의 역사적 특수성에서 기인했다. 후진적 봉건국가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아직 이성적인 사회구조를 이룩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했다. 귀납적 진리 인식을 가능케 할 수 있는 경험의 토대가 없었고, 당연히 데카르트식의 연역적 추론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독일 지식인들은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를 목격하면서 계몽주의의 한계를 잘 인식할 수 있었다. 이 변혁기에 유럽인들은 중세 이래로 수백년동안 변화가 없던 삶의 모습이 별안간 바뀌는 경험을 했다. 철도의 건설은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 개념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으며 속도의 시대를 열어 놓았다. 사람들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이제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해서 반추해 볼 여유를 상실했다.
계몽주의에 의한 근대화와 도시화가 진행되었지만, 이것이 소수의 부르즈와지들을 제외한 일반 민중의 경제적 생활 수준을 높여주지도 못했다. 경제 발전에서 소외된 민중은 자신들의 앞날을 불확실한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요원의 불길처럼 퍼졌던 복권 구입의 열기는 사람들의 물질주의적 욕망과 정신적 불안감을 동시에 반영했다.13)
따라서, 독일 낭만주의자들은 사회건설을 곧장 유럽계몽주의에서 시작할 수 없었다.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은 계몽주의의 “산문적 이성 prosaische Vernunft”과 “정치적 계산 politische Rechenkunst”에만 의존한 불완전한 것이었다.14)그들은 인간과 세계가 다시 정신적, 윤리적으로 되어야 하며 중세적 총체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3. 낭만주의의 예술과 학문
3.1 철학
낭만주의자들은 르네상스에서 출발한 계몽주의의 역사가 막바지 벼랑에 와 섰다고 느꼈다. 괴테는 이미 자신의 눈앞에 심연(Abgrund)을 보고 있다고 느꼈다. 혁명적 작가였던 뷔흐너는 그런 상황 속에서 절대적 허무를 체험했다. 그의 드라마 ꡔ당통의 죽음ꡕ(1835)에서 대혁명을 주도했던 당통은 “앞으로 태어날 신(神)은 무(無)다”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괴테는 이 영점의 현순간을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질 수 있는 근원(Urgrund)으로서도 예감했다. 심연과 근원의 양가적(兩價的) 감정이 낭만주의 철학의 출발점이었다.
낭만주의는 경제적 유용성만을 위한 기계적 사고로 전락하게 된 인간이성과 시민사회에 대한 역사상 최초의 비판이었다. 이성에 의해서 물질주의로 축소된 세계를 낭만주의의 정신으로 보완함으로써 계몽주의의 참된 완성을 추구했다. 물질과 정신은 대립적인 것이지만, 그 대립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의 정신은 무한히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낭만주의자들은 믿었다. 괴테의 ꡔ파우스트ꡕ의 “대극성(對極性)과 끝없는 고양(高揚)”의 개념은 좋은 예이다.
청년 시기의 쉴러도 시민사회를 비판하고 혁명을 꿈꾸었지만, 그의 질풍노도 드라마 ꡔ군도 (群盜)ꡕ에서도 확인되는 바와 같이, 애당초 혁명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이 작품에서 동생 프란츠의 계산적 이성(理性)뿐만 아니라 형 카알의 혁명적 격정을 아울러 단죄함으로써, 낭만주의적 감상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계몽주의 이성을 포괄해줄 수 있는 현실성과 윤리성을 아울러 추구했다. 하지만 그의 보수적 정치관이 계몽주의를 무조건 파기하고 단순히 정신적인 중세로 복귀하자는 운동이 아니었음은 자명하다. 낭만주의는 오히려 계몽사상에 바탕을 두고 성장해 나온 것으로서, 계몽주의의 완성을 지향하고 있었다. 노발리스가 ꡔ논리학적 단장(斷章)들ꡕ (1798)에서 내린 유명한 낭만주의의 정의(定意)를 다시금 살펴보자.
세계는 낭만화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 원초적 의미를 재발견하게 된다. 낭만화라는 것은 질적인 强化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낮은 자아가 이 과정 중에서 고급의 자아와 동일하게 인지된다. [...] 저속한 것에 숭고한 의미를, 일상적인 것에 비밀스런 외양을, 잘 아는 것에다 미지의 품위를, 유한한 것에 무한한 모습을 내가 부여함으로써 나는 그것들을 낭만화한다. 보다 숭고한 것, 미지의 것, 신비로운 것, 무한한 것에 대해서는 조작이 이와 반대로 행해진다. 이 후자에는 이 연결을 통해서 수학의 로그 부호가 붙여진다. 즉 범속한 표현을 얻게 된다.15)
낭만주의는 세계를 신비하게 하고자 했지만 동시에 이 신비해진 낭만주의 세계를 다시금 계몽의 수학 정신으로 지양하고자 했다. 이 정신은 바로 낭만주의의 반어(反語)(Ironie) 정신이며, 낭만화된 주체의 객관화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객체(Subjekt)라는 것은 어원적으로 객체(Objekt)의 아래에 놓인다는 뜻으로서 전체 세계속에 포용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인간 이성의 극단화일 수도 있다. 인간의 오성이 닿지 않는 감성 부분을 발견해, 다시 고차원의 윤리적 이성 안에 포괄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20세기의 초현실주의 문학이 작가의 철저한 의식적 구성의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세계의 “낭만화”와 “수학화”간의 반복은 인류역사에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인간은 계몽주의에서 오성을 배웠고, 낭만주의에서 감성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모더니즘에 반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나오고, 서양이 동양의 선(禪) 사상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세계의 과도해진 모더니즘에 대한 역사적 지양이다. 괴테는 이 영원한 반복 속에서 인간이 유기체처럼 성장할 것으로 믿었다. 낭만주의의 이런 범우주적 세계관은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에게서도 확인된다.
햇빛은 우리가 현실의 조건들에 매여 살고 있는 활동적인 생활에서 윤리로 사용되는 이성(理性)이다. 반면에 밤은 선의(善意)의 장막으로 이 현실을 감싸며 별들을 통해서 가능성의 공간들에 대한 전망을 열어준다. 꿈들의 시간인 것이다. 몇몇 詩人들은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마치 태양이 자신의 궤도를 다 달리고 나서 저 무수히 빛나는 모든 불꽃들로 흩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이성과 환타지의 관계에 대한 탁월한 비유이다. 환타지의 아득하게 멀어진 예감 속에 아직 이성이 있다. [...] 옛 천지창조론에서 밤이 만물의 어머니라고 가르쳤던 것이 각 사람의 삶 속에서 새로워진다. 태고적 혼돈에서 그의 사랑과 증오, 동정과 반감을 통해 세계가 형상화된다.16)
계몽주의를 낮에 비유한다면, 낭만주의는 밤에 비유할 수 있다. 낮이 可視的이고 유한한 것이라면, 밤은 혼돈이며 파악하기 어려운 무한자이다. 하지만 이 혼돈은 새로운 창조가 이뤄지는 “가능성”의 영역이다. 인간 내면의 어두운 측면, 본성, 무의식이 꿈결 속에서 깨어나 활동하는 시간이다. 아직도 이성인 “수많은 별들”은 그 증거이다. 이것들은 그 하나하나가 자체적으로 소우주를 이루며, 다양한 모습이지만 서로 간에 조화롭게 어울려 아름다운 대우주를 구성하고 있다.
인생 전체를 두고 볼 때, 밤은 죽음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인생의 살아있는 시간보다 훨씬 길며 영원하다.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은 이 점을 인식하고 인생을 이 영원의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했던 것이다.
노발리스도 이와 비슷한 생각에서 밤을 찬양했다. 그는 ꡔ밤의 찬가ꡕ (1799)에서 “빛은 나에게 얼마나 하찮으며 유치하게 보이는가! Wie arm und kindisch/ Dünkt mir das Licht”17)라고 말하면서, 대낮의 태양보다 “밤이 나에게 열어준 무한한 눈들 die unendlichen Augen/ Die die Nacht in uns geöffnet”18)을 좋아하였다. 이런 정서는 세속적이건 종교적이건 간에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현시된 무한자를 향한 열망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이 무한자를 향한 열망은 칸트의 ꡔ실천 이성 비판ꡕ의 끝부분에서도 확인된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거듭되면 될수록, 또한 길면 길수록 더욱 새롭고 또한 더욱 강한 감탄과 숭앙의 정념으로써 마음을 충만케 하는 것이 둘 있다. 우리의 위에 있는 하늘의 별과 우리의 내면의 도덕법칙이다.”19)이 도덕법칙은 신이 인간의 마음 속에 심어준 것이었으며 인간을 하늘의 별처럼 숭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빛나는 별이 노발리스에게 주로 감성적인 영역이었다면, 칸트에게는 주로 이성적인 것이었고 윤리적 정언명령이었다. 이 이성은 합리주의의 오성(悟性)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오성은 단지 현상계만을 알 수 있었다. 쇼펜하우어의 비유를 빌자면, 그것은 겉모습을 스케치하면서 성채 주위를 빙빙 돌지만 입구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과 유사했다. 그러나 이성 (야코비는 이것을 신앙(Glauben)이라고 불렀다)은 관통할 수 있었다.”20)이런 고차원의 이성은 독일의 낭만주의자들로 하여금 단순한 현실주의자로 전락하거나 상대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해주었다. 낭만주의라는 개념은 독일 지성인들의 윤리적 이성 개념에 의해 그 원래의 의미의 폭이 매우 넓어지고 인식론의 차원으로 고양되었다.
이런 낭만주의 세계관은 그 당시 유럽에서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의 인간관, 세계관은 제한되고 편협했다.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들인 로크, 버클리 그리고 흄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은 객관적 실재에 의해서 구성된 피조물이었으며, 그 실재라는 것마저도 존재가 의문시되었다. 인간은 기껏해야 불확실한 실재의 피사체였고 수동적 존재였던 것이다. 이런 회의론적 사상은 확실하고 현실적인 것만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그림 ꡔ뉴턴ꡕ은 그런 계몽주의의 인간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림속의 뉴턴은 기하학자의 오성으로 세계를 측량하려고 시선을 땅으로만 향하고 있어서 하늘의 정신세계를 의식하지 못하는 자로 그려져 있다.
칸트는 이런 세계관과 인간관에 대해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인간의 경험적 오성의 인식능력에 한계를 그음으로써, 인식이 경험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 이성이 함께 작용하는 것임을 보였다. 피히테 (Johann G. Fichte)의 주관주의 철학은 인간의 그런 문제 해결 능력을 이론적으로 완성했다. 그에 따르면, 세계는 자아를 통해서 인식된다. 주체가 우선 자아를 정립한 다음에 여기에 바탕해서 비로소 인식이 이루어진다. 이로써 19세기는 다시 인간에 대한 신뢰의 시대가 되었고, 독일 철학은 위대한 인간의 이상주의 철학으로 태어났다.
이런 주관론적 이상주의는 독일 철학으로 하여금 인간의 인식능력을 신뢰하게 했으며 세계 전체의 인식을 추구하도록 했다. 독일어의 “세계관 Weltanschauung”이란 단어는 이런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어나 불어에는 여기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또한 인간의 성격 유형중의 하나인 우울증세를 의미하던 불어 “멜랑꼴리 Melancholie”란 단어도 독일어로 번역할 때는 “세계고(世界苦) Weltschmerz”가 되었다. 인간의 사적인 고민이 아니라 세계 전체에 대한 고민인 것이다. 독일 이상주의에서 인간은 이제 신과 같이 폭넓은 시야와 이성을 갖고 세계창조에 동참하는 능동적 존재가 되었다.
이런 비젼을 가지고 출발한 독일 낭만주의 운동은 시야를 고대와 중세의 역사속으로, 그리고 대자연속으로 확장시켰고 독일의 해방전쟁 이후에는 사회와 정치 사상으로 발전했다.
3.2 문학
독일에서 낭만주의 문학 운동의 이론적 체계화는 이미 18세기 후반에 렛싱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렛싱은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200년동안 프랑스를 지배한 사상인 신고전주의의 예술론과 대결했다. 신고전주의는 희랍 고전주의 예술에 자연의 이상적인 유형이 이미 구현된 것으로 믿었고, 이 “충실한 자연Naturtreue”을 데카르트식의 연역적 과정을 통해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희랍 예술의 정교한 모방에 불과했다.21)이미 라신느, 꼬르네이유의 고전 궁정극이 아리스토텔레스의 3통일 원칙을 철칙처럼 준수하려 했다. 이 점을 비판한 렛싱은 『함부르크 연극론』에서 인간의 저마다의 개성을 강조했다. 통일된 외적 줄거리보다 전인(全人)으로서의 인간의 다층적 “성격 Character”이 중요함을 발견했던 것이다.
렛싱에 의한 새로운 인간상의 발견에 힘입은 독일의 “질풍노도” 문학은 인간의 잃어버렸던 감성 영역을 표현했다. 괴테의 ꡔ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Leiden des jungen Werthersꡕ은 한 인간의 지순한 사랑으로 전유럽인의 심금을 울렸다. 쉴러의 ꡔ군도ꡕ는 물흐르듯 흐르는 힘있는 언어로 사회의 경직된 질서에 저항하는 질풍노도의 인간정신을 표현했다. 이로써 유럽세계는 인간이 오성뿐만 아니라 감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고 감성 예찬의 시대를 맞았다. 유럽은 의고전주의의 형식적 틀에 사로잡혀 망각하고 있던 인간 내면의 깊이를 발견했던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잃어버린 어둠을 되찾고 성숙해지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하우저는 사회사적 문학연구 관점에서 독일 사회의 정치적 후진성이 독일인들로 하여금 정신세계로 도피해서 이 정신세계를 정복하게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이 정신적 노력은 현실상실에 대한 보상심리로서의 단순한 도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 시도로 보아야 한다.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정신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낭만주의자들은 이 정신을 되찾음으로써 계몽주의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독일의 19세기는 신념의 시대였다.
주관주의 철학에서는 확정된 대상 세계만 궁극적으로 유효한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주체 역시 유효한 것이다. 이런 적극적인 사고방식은 낭만주의를 동양의 도교나 불교에서 말하는 허(虛)나 선(禪)사상과도 구분되는 것이다. 낭만주의는 관조(觀照)의 세계관이 아니라 인간 의지에 바탕한 실천의 세계관이었다.
괴테의 ꡔ파우스트ꡕ는 이런 인식론적 전제하에서 세계 전체의 탐구에 나선다. 중세 마녀들의 세계와 고대 그리스, 왕궁과 대학의 술집, 여염집을 두루 순례하며 세계 인식을 꾀한다. 이 형이상학적 인식 충동은 역사상 유례없이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괴테는 “프로메테우스”가 되어 신의 질서에 도달하려 했으며, “가뉘메트”처럼 그 인식을 인간 세상에 전달하려 했다.
낭만주의는 세계 탐험중에 동화, 전설, 민요의 세계를 발견했다. 계몽주의의 퇴색한 학문에 비교해 볼 때, 이 세계에는 민중의 원초적인 힘이 살아 있었다. 그래서 아르님과 브렌타노는 민요집 ꡔ소년의 기적 뿔피리 Des Knaben Wunderhornꡕ (1805)을 편찬했다. 환상의 예술 세계로 산문적 현실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림 형제는 자신들의 ꡔ동화ꡕ 편찬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방에서 불어 오는 바람이 정치가들의 머릿속에 옛 먼지를 불러 일으키고 다시 내몰아내기 때문에 그들이 세계를 15분만에 열번씩 계몽과 몽매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도록 하는 동안에, 나는 어린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 수공업자들의 편력은 제한되어 있거나, 적어도 위축되어 있으며, 낯선 나라에 군대를 파병하는 일도 요즘은 완전히 중단되어 있고, 대학생들에게는 조국 땅의 도처에서 지혜를 짜내려 이용하려 하므로 미리부터 국외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반면에 낯선 것을 전력을 다해 받아들이고, 이로써 토착적인 것을 균형잡는 일은 자유로운 시대의 최고의 업적이 될 것이다.22)
낭만주의자들은 문학의 상상력의 도움을 빌어 계몽주의의 획일화된 현실을 치유하고 시화(詩化)하려 했다. 낭만주의 문학 예술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단순한 취미 생활이 아니라 윤리적, 형이상학적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이 사명의 완수를 위해, 계몽주의에 의해 분리된 학문과 예술도 다시 서로 융화되어야 할 과제를 지니게 되었다.
아테네에서조차도 서로 동떨어져 각각 최고도로 개화해 작용했던 철학과 시, 즉 인간의 최고의 힘들은 상호간에 영속적으로 영향을 미침으로써 서로를 생기있게 하고 완성하기 위해서 이제 서로 얼싸안는다.23)
이런 보편주의적인 문학관은 독일문학을 성찰적인 문학이 되게 했다. 고트헬프(Jeremias Gotthelf), 슈티프터(Adalbert Stifter)의 소설들에 개입되는 철학적 주해들은 감성뿐만 아니라 오성도 인식의 도구로 인정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인식론적 문학은 당시의 민중극들에서도 확인된다. 예컨대, 프랑스의 낭만적 보드빌극(Vaudeville)들에서는 감성만이 존재하는 반면에, 이것들을 개작한 네스트로이의 빈 민중극들에서는 인물들이 자신의 상황을 계속적으로 일반화하는 폭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있다.24)독일 낭만주의 문학에서는 개별 체험으로서의 문학과 전체 인식으로서의 철학이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3.3 미술
쉴러가 『인간의 미적 교육론』을 저술한 이유는 인간의 물질주의를 예술로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예술은 정신의 고양을 위해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빙켈만 이래로 낭만주의자들은 고대의 예술세계에 관심을 기울였다. 횔덜린은 자신의 시에서 고대 희랍을 신성한 자연과 여전히 접촉하던 나라라고 낭만적으로 묘사하였고, 봐켄로더를 비롯한 수많은 낭만주의자들이 고대의 조각과 미술에 감동하는 평론을 썼다. 희랍 고대의 균형잡힌 조각예술품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던 사회의 통일성의 표현으로서 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19세기에는 그런 신화적 사회도 예술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독일 낭만주의의 시각 예술에서는 완결된 형식미의 조각작품보다는 무한성을 향해 개방된 종교적 회화작품들이 많이 창조되었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의 작품 ꡔ바닷가의 수도사 Der Mönch am Meerꡕ에는 자연의 무한성에 대한 인간의 외경심이 잘 표현되어 있다. 클라이스트 (Heinrich von Kleist)는 이 어두운 바닷가의 밤의 풍경을 보면서 무의식, 미지의 영원한 힘을 감지했다. 이런 무한자에 대한 동경은 독일 중세의 종교회화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중세의 성화(聖畵) 화가들은 인물을 그리더라도 현실의 인간을 그리지 않았다. 신의 말씀을 받아 적는 손과 신을 바라보는 두 눈을 유난히 크게 그렸다. 자연의 묘사가 아니라 정신의 표현이었다. 반면에 르네상스의 미술에서는 벌써 부르즈와 계급의 물질 이데올로기가 잠식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 미술사학자 안탄은 이태리 지오토의 성화들과 네덜란드 렘브란트의 인물화들에서 그 점을 증명한다.25)
이런 물화(物化)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원근법의 발견이었다. 르네상스때 최초로 발견되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의 배경에도 사용된 원근법은 자연을 자연의 본래 모습 그대로 놔두려하지 않고 인간의 시각에 종속시키기 때문이었다.26)원근법의 사용 이후 자연은 측량되고 태고적 깊이와 신비감을 상실했다. 이것은 자연에 대한 폭력이었으며, 이 때부터 자연은 분해되기 시작했다.
반면에 프리드리히의 작품들에서는 언제나 대자연 속에 고독하게 서 있는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이 관람자쪽에서 바라볼 때 항상 등을 돌린 채 무한히 먼 바다, 하늘, 심연, 석양, 달 등을 바라보고 있다. 인물은 허무의 심연을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으며, 무한한 정신에 대해 외경심을 갖고 동경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27)대자연은 계몽주의의 현실에 의해 분리된 주체와 객체, 이상과 현실, 정신과 물질을 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이런 자연관은 자연을 영적(靈的) 존재가 되게 했으며 향후 자연과학이 생태학적으로 발전하는데 기여했다.
3.4 건축
독일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높은 탑과 뾰족 지붕의 고딕 양식건물들은 19세기에 독일낭만주의자들의 낭만적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고딕양식은 고대의 완결된 형식미를 떠나, 본원적인 것의 깊이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중세때 문화의 불모지이던 북부 독일에서 시작되어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된 뒤에도 독일에서는 17세기 중엽까지 계속 선호되었으며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다시금 부활해 수많은 성당들이 개축 또는 신축되었다.28)쾰른 대성당의 재건축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르네상스의 건물들의 수평선 구도가 안정감을 준다면, 고딕 건물들의 수직선은 중력을 거부하고 하늘로 치솟는 정신성, 영혼성을 대변했다. 고딕식 성당은 익명의 중세 건축가들의 종교심의 발로였다. 수직선은 그야말로 신과 천국을 향해 솟아올랐을 뿐 아니라, 그 높은 형상자체로 존재의 다른 차원을 시각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었다.29)
고딕 성당의 내부 형태 역시 무한자에 대한 알레고리로 설계되어 있었다. 내부 평면도의 기하학적 구조는 신의 세계를 상징했었다. 좌우에 깊은 벽감이 있어 심오한 깊이를 강조했고, 하늘에서 내려다 볼 때는 십자가형으로서 그리스도의 신체를 상징했다. 자연채광을 중시하는 르네상스 건물과 대조적으로, 고딕 성당은 두터운 벽으로 외부와 차단되어 있고, “신앙의 광휘를 발견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 외부 장식보다 내부 공간의 구성을 중시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한 빛은 집중성과 분산성의 효과로 그런 느낌을 강화시켰다. 고딕 양식은 유한한 예술수단으로 무한한 존재를 표현하고자 하는 낭만주의적 열망의 표현이었다.
빈 근교 벨베데르(Belvedere)궁의 구조에서도 우리는 그런 알레고리 예술관을 확인할 수 있다. 정원과 본관의 미로(迷路)는 절대자를 향한 도정에 있는 인간행로에 대한 알레고리였다. 진리는 추구해서 발견해야 하는 미지의 것이었다.
중세의 독일 도시도 항상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건축되었다. 개별 건물은 그 자체의 기능보다도 항상 도시 전체에 종속되어 있어야 했다. 도시는 중앙의 성당과 광장을 정신 생활의 핵으로 삼고 유기체처럼 자연스럽게 발전해서 방사선을 그리며 성장했다. 거리는 기능중심의 바둑판 모양이 아니라, 불규칙적인 미로 구조로 되어 있었다. 19세기말에 오스트리아 빈의 건설에 참여한 지테에 따르면, “직선 도로는 기능적 도로의 표현이며, 곡선형 도로는 휴식의 표현”30)이었다. 이런 낭만적 도시 개념은 그 후 북구 유럽의 유기적 녹색 도시들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3.5 음악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 음악은 그들의 보편성을 향한 주관적 동경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예술 수단들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철학적 사색의 자리에서 음악관에 대해 곧잘 논의했다. 호프만 (E. T. A. Hoffmann)은 자신의 음악 체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음악은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영역, 다시 말해 외면적인 감각세계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세계를 개척해주며, 사람은 전혀 추상적으로 특정한 감정을 뒤로 하여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에 몸을 맡긴다.”31)
진정한 의미에서의 낭만주의 음악은 베토벤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720년경부터 1760년까지의 전(前)고전파 음악은 18세기의 화려한 궁정 생활을 반영하여 우아하고 세속적이며 사교적인 성격을 지닌 소곡들에 머물러 있었고 그후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음악도 여전히 정리된 멜로디를 특징으로 하며 이들의 신분 역시 궁정의 전속악사로서 실용 음악 (Gebrauchsmusik)을 공급하는 것이 본분이었던 반면에,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의 정신에 감화되어 최초의 자유주의적 낭만주의자로서 음악 장르를 독립시키고 인간 내면의 절규를 표현했다.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은 예술가의 고뇌의 표현이었다. 그 음조는 인간 존재의 심연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였다. 제 9번 교향곡 『합창』은 서로 다른 악기들과 인간의 합창의 조화를 이룬 새로운 심포니 형식으로 인간의 위대한 정신성을 표현했다.32)이로써 음악은 실용적 가치로부터 독립해 이른바 절대음악이 되었다.
후기 낭만주의 음악에는 자연스럽고 풍부한 감정의 표출을 특징으로 하는 표제 음악이 많아졌다. 하지만 이것들도 언제나 진지한 종교적인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는 개인의 우수 속에서 우주전체의 고독을 느끼게 한다. 음악은 개인의 주관성을 영원성과 연결하는 전형적 낭만주의 장르였다.
브루크너의 음악도 모두 주관적인 경향을 초월하여 보편적, 종교적 감정에 대한 표현이었다. 봐켄로더 (W. H. Wackenroder)는 음악, 그 중에서도 교회음악이 예술들 중에서 최고의 품격을 갖는다고 말하는 데 그 이유는 “그것이 번역할 수 없는 낯선 언어로 되어 있으며, 시끄러운 음향, 격렬한 몸짓, 그리고 살아있는 만군의 존재들의 조화로운 통일성으로 하늘의 것들에 대해 감히 말하고자 하기 때문”33)이었다.
3.6 종교
낭만주의에서 예술의 각 장르들이 궁정이나 부르즈와 계급의 실용적인 목적으로부터 독립해 자율화되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무한자와 연결되어 있듯이, 종교 역시 세속이나 정권의 이해관계로부터 독립되어 있으면서 무한자를 현시해줄 수 있는 중요한 형식들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빌헬름 슐레겔은 철학, 시, 종교 그리고 윤리를 세계의 필수 구성요소인 흙, 공기, 불 그리고 물에 각각 비유하기도 했다.34)종교는 비록 윤리의 물로 견제됨으로써 정신의 전체 질서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그 속성은 활활 타오르는 불이었다. 그래서 낭만주의의 종교는 감성종교였다. 프로테스탄트 종교조차도 엄격한 윤리에서 벗어나 우주를 직관케 하는 감성종교가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인 슐라이어마하에 의하면, “진정한 종교는 무한한 존재에 관한 감각이자 취향이다.”35)물론 인간이 고전주의적인 사상에서처럼 만물의 척도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은 늘 거대한 우주의 무한한 힘 속에 감싸여 있었다. 드로스테 휠스호프(Annette Droste-Hülshoff)의 종교적인 시들에도 인간은 대자연 속에 하나의 작은 곤충과 같이 미약한 존재로 통합되어 있다.
대부분의 낭만주의자들이 카톨릭에 귀의했는 데, 이것은 카톨릭이 보편성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개신교는 총체적 세계의 분열의 원인제공자로 여겨졌다.
3.7 자연철학
낭만주의자들에게 대자연은 인간이 이성으로 정복해 굴복시켜야 하는 적대적 대상이 아니었다. 자연은 영혼을 가진 존재였다. 계몽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자연은 일종의 죽어있는 기계였고, 일반 평민의 관점에서 볼 때는 마왕이 사는 무서운 곳으로 인식되었던 것에 비하면,36)낭만주의의 그런 영적 자연관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물론 이 자연관은 17세기에 네덜란드의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치에 이해 마련되어 있었다. 낭만주의는 그들의 범신론적, 목적론적 세계관을 수용했으며, 셸링은 이것을 자신의 자연철학에서 완성시켰다.
자연은 눈에 보이는 정신이고, 정신은 눈에 안보이는 자연이어야 한다. 여기, 다시 말해서 우리 속의 정신과 우리 외부의 자연과의 이 절대적 일치를 통해서, 우리 외부의 자연이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으로 존재하는지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계속되는 탐구의 궁극적 목표는 자연의 이런 이념이다. 그 이념에 도달하는 것이 우리에게 성공하면, 우리는 그 문제에 충분한 답을 얻은 것으로 확신해도 될 것이다.37)
자연을 정신적 존재로 보는 자연관은 인간과 자연이 화해할 수 있는 접점을 마련해 주었다. 자연은 정태적인 기계가 아니라 “능산적(能産的)인 자연 natur naturata”으로서 끊임없이 그 자신을 재창조하는 살아있는 존재였다. 노발리스는 광물계와 생물계도 서로 대화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런 사고 방식은 현대의 생태학적 자연관과 유사하다. 자연은 인간이 가꾸면 인간에게 보답하지만, 파괴하면 인간에게 자연 재해로 보복하기 마련이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자연의 사물들은 제각기 서로 다른 다양한 모습을 띠지만, 나름대로 무한자에 대한 독특한 상징이었다.
모든 인간은 제한적인 신, 모든 사물은 전체 세계.38)
낭만주의자들은 이 모든 사물들을 고찰함으로써 이 무한자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괴테는 자연의 모든 한정된 것에서 영속하는 진리를 보고자 했다. 그에게 주변의 모든 사물은 영원한 것, 본원적인 것의 상징이며 알레고리였다. 그는 ꡔ은행나뭇잎ꡕ 하나에서도 우주의 합일을 보았으며, ꡔ툴레의 임금ꡕ이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바다에 던지는 빈 술잔도 그런 감정의 상징이었다. ꡔ파우스트ꡕ의 첫부분에서 지령(地靈)이 나타나는 장면도 그런 신비적 자연 합일 사상의 표현이었다.
ꡔ식물의 변형 Metamorhose des Pflanzenꡕ을 집필중이던 괴테가 슈타엘 부에게 보낸 편지 (1786. 7. 10)는 그런 자연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목표는 “자연이 더불어 항상 유희하는 듯한 본질적인 형식, 또 유희하면서 다양한 삶을 불러내는 본질적인 형식의 인지”였다.39)이런 탐구 자세는 자연의 법칙을 찾아내는 자연과학이 발달하는 데 기여했다. 그것이 자연을 지배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연에서 인간 정신의 참모습을 발견하려 하는 것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라캉의 의미에서, 낭만주의자들에게는 현실의 실재계가 무와 죽음의 운명에 처해 있기 때문에 현실의 실재계보다 의식속의 상상계와 상징계가 더 중요했고 따라서 예술이 자연보다 더 중요했지만, 아직 토마스 만처럼 예술과 자연을 서로 다른 문화 영역에 속하는 대립적인 개념으로 보지 않았다. 노발리스는 오히려 과학을 무한자에 이르는 입구라고 생각해 물리학, 화학, 천문학, 생물학, 지질학 등을 연구했다. 다윈의 『진화론』(1795)의 기계론적 자연관조차도 독일 낭만주의에서는 절대자의 영원한 생성과 창조에 대한 증거가 되었다. 정신이 과학을 포용했던 것이다.
물리학은 이제 자연의 개별현상들의 상호관련성과 그 원인을 탐사하는 기초학문으로 이해되었고, 경험론적, 실험적인 자연사, 화학 그리고 수학은 경험 물리학을 이론 물리학과 올바로 관계 맺게 하는 철학적 자연론의 기초가 되었다.
문학의 詩語도 궁극적으로 인간을 대자연의 무한자와 연결해주는 열쇠로서 기능했고, 시인은 마술사이고 세계의 창조자였다. 그래서 아이헨도르프는 ꡔ작은 소원의 지팡이 Wünschelruteꡕ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여기 계속해서 꿈꾸는 모든 만물속에
노래가 잠자고 있네.
그대가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세계는 일어나서 노래하네.40)
3.8 역사학
절대자를 존재자가 아니라 무한한 생성자로 본 낭만주의자들은 역사마저도 살아있는 유기체로 인식했다. 이로써 그들은 역사학사상 최초로 과거와 구분되는 현재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들이었다. 이 인식은 슐레겔의 “신구논쟁”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은 현재의 순간을 단순히 과거시간의 종착점이 아니라 철저히 과거역사와 단절된 심연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동시에 현재는 미래로 향해 열려진 무한한 가능성의 근원이었다.
이런 관점은 근대적 의미의 역사학이 시작될 수 있게 해주었다. 왜냐하면 18세기까지도 유효했던 전통적 역사관에서는 역사는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일 뿐, 역사의 각 단계들 자체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인, 로마인들의 삶이나 18세기의 영국인, 프랑스인들은 삶은 별로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인간이란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아주 동일하기 때문에, 역사를 보면 우리는 이런 특수한 경우에서 새롭거나 진지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된다”41)라고 흄은 단정지었다. 계몽주의의 보편적 인간관에 바탕했던 비코, 볼테르, 로베르트슨, 콩도르세와 같은 계몽주의 역사가들의 주요 과제는 초시대적으로 불변하는 “영원한 역사의 이상(理想)”을 서술하는 것이었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낭만주의 역사 철학의 시조는 독일의 헤르더(J. G. von Herder)였다. 그는 각 민족들 사이의 유사성보다는 차이점들과 서로 다른 운명을 강조하였다. 그는 ꡔ인류의 교육을 위한 또하나의 역사 철학 Auch eine Philosophie der Geschichte zur Bildung der Menschheitꡕ (1774)에서 각 민족과 문화는 나무처럼 살아 있으며 많은 가지를 뻗으며 언제나 새로워진다고 하였다. 그의 이런 근대적 역사관은 나중에 랑케에 의해 역사주의 역사학으로 발전했고 헤겔의 역사철학을 낳았다. 낭만주의자들은 과거와 완전히 절연하는 계몽주의의 사고방식, 즉 역사보다 적나라한 이성에 몸을 내맡기는 행동을 어리석다고 생각하였다. 이집트인들과 페니키아인들, 그리고 중세의 게르만족들은 낭만주의 역사가들에 의해 비로소 자기 시대의 원상태대로 복구되었던 것이다.
물론 낭만주의 역사관은 20세기에 들어와서는 통탄할만한 결과를 빚기도 하였다. 헤르더의 유기체론적 역사관은 원래 단순한 문화적 민족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1806년 독일군대가 예나 전투에서 프랑스에게 패배했을 때, 피히테에 의해 정치적 민족주의 이론으로 변용되었고, 그의 연설문이 다시 나찌주의자들에 의해 발췌적으로 인용되어 악용되었다.42)그러나 문화의 정치화는 낭만주의자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헤르더는 중세의 게르만 부족들의 활력과 에너지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것은 국수주의에 바탕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식의 색깔없는 세계관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에 베를린 대학의 총장이던 훔볼트가 새로이 라틴어를 필수 교과목으로 채택한 것은 낭만주의의 보편주의에 대한 단적인 예이다.
물론 대부분의 낭만주의자들은 고대보다는 중세에 더많은 관심을 가졌다. 노발리스에게 중세는 위대한 신앙의 시대로 다가왔다. 그는 계몽주의의 무자비한 개인주의와 상업주의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던 당시의 유럽을 중세의 원초적 민족(Volk)정신, 기사도(騎士道) 정신, 장인정신 그리고 심미안으로 치유하고자 했다.
3.9 국가론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은 예술에 비해 정치를 상대적으로 경시했다. 그것은 그들이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인간의 이성에만 바탕한 급진적인 역사의 발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실적으로 아무런 사회적, 문화적 토대도 없는 상황에서 전통의 무조건적인 파괴를 거부했다. 그들은 정치를 내면화시켰고, 내면의 치유를 통한 사회개혁을 원했다.
영원한 평화의 이념은 정치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의 대상이다.43)
예나와 바이마르의 초기 낭만주의보다는 하이델베르크, 빈, 드레스덴의 후기 낭만주의에서 이런 보수적인 성향이 두드러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프랑스 혁명의 경과를 지켜보면서 “로마 공화정”의 모델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그 부정적인 여파로 인해 죄악의 징벌로 여겨졌으며, 현재는 새로운 완성의 시대를 향해가는 과도기 현상으로 이해되었다.
낭만주의자들에게 국가는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형성되어 있어야 했다. 인간의 의지나 계약에만 의존하는 기계론적 국가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당시로서는 통치자가 한 가정의 가장처럼 국민 하나하나를 식구처럼 보살피는 가부장제의 국가가 이상적이었다. 괴테가 신성로마제국에 대해 호의적 태도를 보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중세는 각 나라 간에 전쟁없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정치공동체를 형성했던 유토피아로 수용되었다. 중세는 이성적 국가가 정신적 종교에 의해 견제되고 있던 때라고 믿어졌다.
범유럽적 신앙 통일체인 중세 국가에서 교황 역시 황제와 마찬가지로 고차원의 이념 즉 절대자의 대리인에 불과했다. 낭만주의는 분열된 독일의 영방들을 이 절대자의 이념속에서 통합되길 원했다. 이런 정신은 오늘날 독일이 연방제를 유지하고, 동서독의 통일에 이어 유럽 15개국의 유럽공동체로의 통합을 주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유럽공동체가, 헤르더의 역사관에서도 보이듯이, 각국의 문화들의 자율성을 유지하는, 그러면서도 절대자와 연결되어 있는 정신적 공동체 성격을 유지할 것임은 자명하다.
맺는 말
지금까지 19세기의 독일 낭만주의 사상을 18세기의 유럽 계몽주의, 특히 프랑스의 합리주의와 영국의 경험론 사고와 비교하며 개관했다. 거기서 독일 낭만주의가 유럽 계몽주의의 극한 상황을 겪으면서 그 극복을 위한 시도에서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낭만주의는 물질주의에 대해 정신주의를 대립시키고 그 양극간의 끝없는 대립과 고양을 통해, 끝없이 인습적 형식을 지양하고 극복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했던 것이다. 이런 정신은 독일이 19세기의 새로운 예술과 학문분야들을 개척할 때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독일은 19세기가 경과하는 동안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하이데거 등 수많은 철학자들을 배출했으며, 랑케의 역사학, 베버의 사회학, 마르크스의 역사철학,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성립시키고, 화학과 물리학 등 자연과학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독일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서구의 합리주의 문명을 비판하는 실존주의 사상, 생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독일은 최근에 자연과학 분야에서 환경공학, 의공학(醫工學) 등 생명관련 분야를 개척하고 있는데, 이것도 유기체론적 자연관, 인간관과 관련이 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영국이나 미국에 비해서 독일은 전통적으로 아도르노나 하버마스의 사회비판적 철학과 같은 가치평가적 인문사회과학 분야가 강세를 보이는데, 그 이유 역시 독일인들의 인식 관심이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낭만주의의 정신성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학문 분야는 오늘날처럼 제반 학문들이 분과화되고 전문화될수록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도구화된 인간 이성은 전체성을 상실하고 전공분야에 갇히기 쉬우며, 자칫하면 부지불식중에 사회 전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철학자 피히테가 ꡔ학문론 Wissenschaftslehreꡕ (1797)을 저술하고 철학을 “학문중의 학문 Wissenschaft der Wissenschaften”으로 정의한 것도 그런 인식 때문이었다.
이에 비해 영미 계통에서는 주로 전자공학 분야에 치우쳐 발전하고 있으며, 사회 과학 분야에서도 통계학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것만을 학문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강해서 영국 경험론을 계승했다는 인상을 준다. 프랑스의 경우도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이 첨단 자연 과학분야의 용어들을 차용해 세련되게 다듬어 사용하고 있어, 역시 19세기 신고전주의 예술의 세련된 형식주의와 연역적 합리주의를 계승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부언하건대, 앞으로의 독일학은 낭만주의 사상과 그 학문적 예술적 업적들을 심도 있게 연구함으로써 우리가 현대의 독일과 서구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며, 아울러 우리가 독일학을 외국의 지역학으로서 연구할 때 헤르더의 의미에서 우리 고유의 문화의 토대 위에 서있어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참 고 문 헌
1. 작 품
Eichendorff, Josef von: Werke. Hg. von J. Perfahl. Bd. I. München 1970-1988.
Novalis: Logologische Fragmente, in: N.: Fragmente II. Hg. von Ewald Wasmuth. Bd. 3. Heidelberg: Lambert-Schneider 1957.
Schlegel, Friedrich: Gespräch über die Poesie, in: F. S.: Kritische Friedrich- Schlegel-Ausgabe. Hg. von E. Behler. Bd. 2. München u. a. 1967.
----------------: Philosophische Fragmente. Erste Epoche II (1796-1798), in: F. S.: Kritische Friedrich-Schlegel-Ausgabe. Hg. von Ernst Behler. Bd.18. München u.a. 1963.
Schlegel, August Wilhelm: Allgemeine Übersicht des gegenwärtigen Zustandes der deutschen Literatur, in: A. W. S: Kritische Ausgabe der Vor- lesungen. Hg. von Ernst Behler. Bd. 1. Paderborn u.a.: Ferdinand Schöningh 1989.
---------------------: Vorlesungen über philosophische Kunstlehre. Jena 1798. Hg. von Ernst Behler. Bd. 1. Paderborn u. a.: Ferdinand Schöningh 1989.
2. 연구문헌
Adams, Laurie Schneider: The Methodologies of Art. Massachusetts 1996.
(박은영譯: 미술사 방법론. 조형교육 1999).
Aune, Bruce A.: Rationalism, Empiricism and Pragmatism. New York. Random House 1970 (서상복 譯: 합리주의, 경험주의, 실용주의. 서광사 1997).
Baumer, Franklin L.: Modern European Thought. Continuity and Change in Ideas, 1600-1950 (조호연 옮김. 유럽 근현대 지성사. 현대 지성사 1999).
Begriffsbestimmung der Romantik. Hg. von Helmut Prang. Darmstadt 1972 (Wege der Forschung, Bd. 150).
Benz, Richard: Die deutsche Romantik. Geschichte einer geistigen Bewegung. Stuttgart: Reclam 1956.
Dieckmann, Herbert: Die Wandlung des Nachahmungsbegriffes in der franzö- sischen Ästhetik des 18. Jahrhunderts, in: Nachahmung und Illusion. Kolloquium Gießen Juni 1963. Hg. von Hans Robert Jauß. München: Fink 1969 (= Poetik und Hermeneutik 1).
Doderer, Klaus: Das englische und französische Bild von der deutschen Romantik, in: Begriffsbestimmung der Romantik. Hg. von Helmut Prang. Darmstadt 1972 (Wege der Forschung, Bd. 150).
Foucault, Michael: Histoire de la folie (독어번역: Wahnsinn und Gesellschaft. Frankfurt/M: Suhrkamp 1973).
Habermas, Jürgen: Der philosophische Diskurs der Moderne. Frankfurt/M.1985.
Hauser, Arnold: 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 München 1953 (염무웅/반성완 共譯: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개정판. 로꼬꼬․고전주의․낭만주의. 창작과 비평사 1999)
Hughes, Mchael: Nationalism and Society. Germany 1800-1945 (강철구 譯: 독일민족주의. 도서출판 명경 1995).
In, Seongki: Nestroys Theater als Abbild und Sinnbild der Welt. Der Zerrissene im Vergleich zu L'homme blasé, in: Nestroyana 19. Heft 3-4. Wien 1999.
Lesnikowski, Wojciech G.: Rationalism and Romanticism in Architecture. USA: McGraw-Hill 1982 (박순관, 이기문 共譯: 합리주의와 낭만주의 건축. 서울: 국제출판공사 1987).
Lyotard, J. F.: La condition postmoderne. Paris 1979 (독어 번역: Das postmoderne Wissen. Ein Bericht, Wien 1994).
Metzler Lexikon Literatur und Kulturtheorie. Ansätze-Personden-Grundbe- griffe. Hg. von Ansgar Nünning. Stuttgart/Weimar 1998.
Romantik-Handbuch. Hg. von Helmut Schanze. Stuttgart 1994.
Willms, Johannes: Nationalismus ohne Nation. Deutsche Geschichte 1789-1914. Düsseldorf: Fischer 1983.
Zusammenfassung
Die europäische Aufklärung und die deutsche Romantik
IN, Seongki
Die vorliegende Arbeit untersucht die deutsche Romantik in der Goethezeit als einen geistigen Aufstand gegen die europaweit verbreitete verstandes- betonte Aufklärung des 18. Jahrhunderts, welche stark von dem englischen Empirismus und auch vom französischen Rationalismus geführt wurde. Ihr Erkenntnisinteresse ist die Konstruktion einer Geistesgeschichte der deutschen Romantik, die hoffentlich dazu beitragen kann, einen Ausweg aus der Aporie der heutzutage orientierungslos gewordenen modernen Zeit zu finden.
Zuerst wird die Geschichte der europäischen Moderne bis heute kurz dargestellt. Dann definiert die Arbeit die deutsche Romantik unter einem kulturvergleichenden Aspekt zwischen Deutschland, Frankreich und England als einen typisch deutschen Begriff, der die drei Phasen der deutschen Literaturgeschichte umfaßt: „Sturm und Drang“, „Romantik“ und „Klassik“, sowie die idealistische Philosophie von Kant, Fichte, Schelling, da diese Philosophie mit der starken Betonung des Subjekts zur Gestaltung der deutschen Romantik entscheidend beitrug. Sie wertet dann die Entdeckung des Gefühlhaften bzw. Unbewußten von den deutschen Romantikern weniger als eine bloße Negierung der Aufklärung, sondern vielmehr als eine wünschens- werte dialektische Vollendung von der eigentlichen Humanitätsidee der Auf- klärung. Dann befaßt sich die Arbeit mit den künstlerischen und wissen- schaftlichen Leistungen der deutschen Romantik: Philosophie, Literatur, Malerei, Architektur, Musik, Religion, Naturwissenschaft, Geschichtswissen- schaft Staatslehre. Die Erkenntnis daraus läßt sich wie folgt zusammen- fassen.
Künstlerische Gattungen wie Literatur, Malerei, Architektur und Musik wurden sowie von dem strengen Formideal des französischen Klassizismus, als auch von ihrem geläufigen pragmatischen Gebrauchswert losgelöst. Sie wurden zum Selbstzweck. Sie sollten ausschließlich das neue Selbstgefühl des neu entdeckten Subjekts der deutschen Romantiker darstellen. Sie waren nämlich Ausdruck der Sehnsucht des künstlerischen Ichs nach einem absolu- ten Werdenden. Auch Religion wurde aus ihren herkömmlichen Dogmen gelöst und neu mit Sinn und Geschmack fürs Unendliche versehen.
Schließlich wurden auch Natur, Geschichte und Staat neu entdeckt. Diese Gegenstände wurden jeweils als ein organisches Lebewesen betrachtet, das sich selbst gestaltet und ununterbrochen wächst. Es wurde eine Analogie zwischen ihnen angenommen. Diese organologische Weltanschauung ließ die von dem aufklärerischen Verstand getrennten und somit entfremdeten Bereiche wieder in Beziehung zueinander treten und die ökologische Entwickelung der modernen Disziplinen wie Chemie, Physik, Geschichtswissenschaft, Sozial- wissenschaft fördern. Die Wissenschaften waren den deutschen Romantikern die Leiter zur Erkenntnis des Universellen. Sie wurden mit Poesie gleich gesetzt.
Deutschland wurde mit dem schöpferischen Gedanken zu einem geistig führenden Land im Europa des 19. Jahrhunderts. Die deutsche Romantik gibt uns auch heutzutage die Hoffnung, daß wir uns und die Welt neu gestalten können.
출처: https://lectio.tistory.com/1085?category=272960 [Lectio Divina]
'신학논문 소논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아의 집: 토마스 베른하르트 - 프란츠 카프카 (0) | 2020.01.04 |
---|---|
유럽문학에 나타난 가족 정체성의 문제* (0) | 2020.01.04 |
시대정신의 반영으로서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문학* (0) | 2020.01.04 |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0) | 2020.01.04 |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상급개념 (0) | 2019.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