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문 소논문

시대정신의 반영으로서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문학*

하나님아들 2020. 1. 4. 10:13

시대정신의 반영으로서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문학*


김용민․윤태원․송지연**


서론


유럽문학사에 있어서 유토피아와 더불어 디스토피아의 문제는 서양문학의 역사만큼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의 ‘아르카디아’와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거쳐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독일의 ‘교양소설’, ‘사회주의 유토피아 소설’, 현대의 ‘사이언스 픽션’ 등등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이념에 따라 다양한 모습과 성격을 띠고 유토피아의 역사는 면면히 이어왔다. “문학은 유토피아이다”1)라는 표현이 반증해 주듯이 유토피아는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가장 잘 규명해주는 테마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유토피아의 성격을 담고 있는 문학이 시대에 따라 그 시대의 정신을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가장 잘 반영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유토피아와 유토피아의 또 다른 모습인 디스토피아의 연구는 시대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첩경임과 동시에, 그 시대의 작가가 사회를 향해 던지는 목소리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유토피아는 현실과 미래를 동시에 표현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현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며 미래를 묘사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이 항상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시대에 대한 발전적 비판으로서의 ‘새로운 세계’가 공간적으로 제시되기도 했고, 현실 도피적인 성격의 소극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했으며, 또한 개인적인 차원에서 주체의 완성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나아가 예술(작품)의 이상화를 통해서 미학적 유토피아의 성격을 구현하려 시도한 적도 있었다. 또 유토피아는 그 한계와 자체내의 부정적인 성격 때문에 ‘안티 유토피아’의 논의로 발전되어 ‘디스토피아’를 내포하고 있는 유토피아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유토피아(디스토피아)의 문학과 그에 대한 논의는 본질의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다른 모습, 다른 성격, 다른 대상, 심지어는 다른 결론으로 나타난다. 유토피아 문학은 시대에 따라 그 성격이 다르고, 학자에 따라 연구의 주안점과 방향을 달리 하기에 수많은 논쟁과 갈등을 야기하기도 하고, 새롭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가져오기도 한다. 독일의 예를 들면, 이러한 유토피아의 다양성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에2), 국내에서는 전반적인 연구가 부족한 상태이기에 개별적인 유토피아 문학의 분석과 더불어 포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본 연구는 독일과 프랑스의 유토피아 문학이 시대에 따라 어떤 모습을 지니고 나타났으며 그것이 시대정신과 어떤 연관을 지니는가를 분석해보려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즉, 시대에 따라 달리 나타난 유토피아 문학작품의 특성을 통해 인류의 꿈인 유토피아가 어떤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었으며,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밝혀보려 한다.

거의 대부분의 문학이 꿈과 희망 그리고 절망을 노래하고 있기에 유토피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과 프랑스 문학사에 등장하는 모든 유토피아 문학을 다룬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본 연구에서는 우선 독일과 프랑스의 작품 중에서 유토피아 문학의 전형이자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대표적 작품을 선별하여 집중적으로 분석하려 한다. 이를 통해 계몽주의 이상이 문학작품을 통해 어떻게 드러나며 변주되는가를 밝힐 것이다. 다음으로 본 연구는 이들 계몽주의적 유토피아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비판되고 자연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유토피아로 변모하는 과정과 다시금 암울한 디스토피아로 연결되는 과정을 분석하려 한다. 도구적 이성과 기술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기존의 문명 사회는 디스토피아로 나타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유토피아가 등장하는 과정을 투르니에와 크리스타 볼프의 작품의 분석을 통해 밝힐 것이다.


I. 계몽주의 이상과 유토피아


I. 1.이성과 진보의 유토피아: 이상세계로서의 슈나벨의『펠젠부르크섬』


유토피아는 미래의 이상사회를 지향하며 보다 더 나은 세계를 추구하는 희망의 표현이다. 유토피아는 현실의 개혁과 제도적인 비판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현상을 유지하려는 사상과는 대응될 뿐만 아니라 경쟁적이거나 적대적인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유토피아 사상은 블로흐가 얘기하고 있듯이 현실비판이라는 부정의 원리와 이상세계의 창조라는 긍정의 원리, 즉 “희망의 원리”3)를 그 본질로 하고 있다. “희망”이라는 본질의 근저에는 인간이 현재 사회의 부당한 점을 개선하고 나아가면 앞으로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그래서 역사가 발전할 것이라는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다. 역사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간격을 줄이고 최상의 현실을 실현하려는 인간의 활동이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휴머니즘에 입각한 합리적인 기획과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한 활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은 18세기 정신세계의 주된 흐름인 계몽주의가 표방한 주요 개념이었다. 계몽주의가 추구하는 계몽은 인간 개개인이 이성을 통해 몽매에서 벗어나는 ‘개인 계몽’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모여 이룬 사회에서도 합리적 정신을 통해 정치, 법률, 관습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하고 이상적인 상태를 실현하려는 기획이다. 따라서 계몽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기술’, ‘과학’ 등의 합리적 수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성, 과학, 기술에 대한 믿음이 이상사회에 대한 꿈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나타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특히 18세기에 나타난 유토피아라는 말은 계몽주의의 완전한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독일문학에 있어서 로빈슨 모티브를 제시하고 계몽주의적 이상향을 형상화 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슈나벨 J. G. Schnabel의『펠젠부르크섬 Insel Felsenburg』(1731)이다. 이 작품은 몇몇 항해자들이 유럽에서의 박해와 고난의 기이한 운명을 겪고 난 뒤에 펠젠부르크섬에 정착하여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18세의 나이로 배를 타고 항해하다가 난파된 뒤 아주 아름다운 섬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그와 동행했던 여인과 결혼하여 300명 이상의 가족을 갖게 되는 펠젠부르크섬 공동체의 창설자인 동시에 족장이기도 한 작센 태생의 알베르트 율리우스의 운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새로이 정착하게 된 이 섬의 주민들은 그들의 땅을 이성과 도덕을 중심으로 일구어 나가며 자신들의 이상향을 건설해 나간다. 등장인물들이 이성을 중심으로 하여 도덕의 이념을 내세우고 있는 점이나, 자신들의 거주 공간인 섬의 근대화를 통해서 진보를 확신하고 있는 점에서 이 작품의 바탕에는 계몽주의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겠다. 펠젠부르크 공동체는 계몽주의 이상이 실현된 이상적 세계, 즉 유토피아로 제시된다. 유토피아의 존재 그 자체가 기존하는 사회의 비판과 그 대립상을 전제로 하고 있듯이, 이상적으로 묘사되는 펠젠부르크섬은 당시 유럽세계에 대한 비판을 위해 마련된 세계라 할 수 있다.『펠젠부르크섬』에 계몽주의 이상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고찰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18세기 유럽사회의 부정적인 시대상에 대한 비판을 우선 살펴보도록 하자.

유럽사회에 대한 비판은 무엇보다도 난파당하여 섬에 상륙한 후 공동체의 일원으로 정착하게 된 비르길리아, 데이비드, 유디트 등의 인생사를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펠젠부르크섬을 추방지나 망명지가 아닌 피난처로 인식한다.4)이 섬이 계속 살고 싶은 정착지로서, 또 피난처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고향이 비판을 받을 대상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고아가 된 뒤 양부모의 학대를 당하고 상속권 박탈, 억울한 감옥살이, 고문, 인권침해, 사형선고 등의 험난한 인생역정을 보여주고 있는 비르길리아의 이야기는 불합리한 법, 무력한 국가, 불의와 음모, 부도덕으로 점철된 유럽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영국 명예혁명의 혼란스런 정치적 상황의 와중에서 정직한 자가 오히려 절도죄의 혐의와 감옥 수감, 가정 상실과 도피 생활 등의 핍박을 받는 데이비드의 이야기는 부정직하고 건전치 못한 유럽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납치되어 수난을 당하며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섬에 도착하여 구출되는 유디트의 이야기도 폭력, 모략과 간계, 이기주의, 여성을 육욕의 대상으로 하는 경박한 성과 연애 풍토로 넘치는 유럽사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5)이처럼 비르길리아, 데이비드, 유디트는 펠젠부르크섬에 오기 전에 유럽에서 겪은 수많은 부정, 모함, 기만, 이기적이고 실리적인 사고방식, 귀족과 평민간의 분리와 차별을 드러내는 엄격한 신분제도, 불평등한 결혼제도, 모순에 가득 찬 현실정치 등을 비판한다. 이들의 인생사는 간접적으로 이타주의와 미덕과 경건주의로 공동선을 구현하는 공동체 사회로서의 유토피아 상을 담고 있고 있으며, 이는 펠젠부르크섬이 곧 유럽사회의 대립세계임을 말해주는 동시에, 유럽사회가 극복되어져야 할 대상임을 극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두 번째로 펠젠부르크 공동체가 계몽주의 사회의 모델로서의 모습을 띠고 있음은 소설 속의 인물들이 문명화와 진보를 확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진보에 대한 그들의 확신은 우선 자연을 인간의 진보를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데서 드러난다. 펠젠부르크의 자연은 루소 식의 이상적인 자연이 아니라 자연상태 그대로의 원초적인 것이며, 펠젠부르크 사람들은 이러한 자연의 원상태를 유용성에 근거하여 개발하고자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펠젠부르크섬에 네 번째로 도착한 볼프강 선장의 행동과 사고에서 나타난다. 다른 인물들이 황폐한 섬으로 묘사하는 원초적 상태의 자연을 그는 노동을 통하여 유용한 밭이나 포도밭, 정원으로 가꾸고자 한다.6)자연을 유용하게 만드는 작업은 공동체 사람들의 문명화와 진보에 대한 믿음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로제마리 하스의 다음 주장은 공감을 주고 있다.


펠젠부르크 사람들은 원초적인 것, 건강한 것, 진실한 것으로서의 자연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들은 원시적인 것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이상은 문명화와 진보이다.7)


또한 펠젠부르크 사람들이 문명화를 위한 노동을 미덕으로 삼고 사회의 진보를 위해 과학과 기술을 강조하며 펠젠부르크를 근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점들을 생각해 보면 “문명화의 지속적 완성”8)이라는 진보의 이념이『펠젠부르크섬』에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진보의 이념이 계몽주의적 유토피아의 성격을 뚜렷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세 번째로, 섬에 상륙하고 난 뒤에 겪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펠젠부르크 사람들이 ‘이성’, ‘덕성’, ‘정숙’, ‘시민적 윤리’ 등을 강조하며 정착하는 과정은 인간 개개인의 계몽이 이루어진 사회의 바람직한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들은 펠젠부르크섬 사회구성원간에 얽혀져 있는 애정관계와 서로간의 불화와 성격차이 등을 이성과 도덕, 대화를 통해 극복하며 펠젠부르크섬을 신앙과 이성의 사회로 만든다는 것이다. 우선 자신들의 배우자를 찾게되는 과정에서 서로간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며 행복한 삶을 이루어 나가는지 데이비드의 말을 인용해보자.


하지만 아미아스와 로베르트 휠터는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좋은 질서를 위해 우리들의 감정을 진정시키고 이 일들을 다른 방법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설득시켜 주었다. (325쪽)


이처럼 결혼에 있어서도 이성적인 사고가 중시되고 질서를 통한 공동선이 강조된다. 이러한 이성에 근거한 도덕의 실행은 나아가 건전한 시민윤리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면은 콩코르디아가 알베르트와의 결혼을 결심하는 장면에서 더욱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당신의 경건함, 덕성, 정직성이 같은 마음에서 나온 나의 청혼을 경박한 정욕과 성급한 격정으로 해석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해줍니다. (237쪽)


이와 같이 경건함, 덕성, 정직성 등의 강조는 절대적인 사회관에 맞서고 있는 이성을 근거로 한 윤리로 가득 차있는 계몽적 시민사회의 유토피아 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이 소설에서 새롭게 나타나는 덕성과 새로운 양상의 내적 생활은 둘 다 시민적이며 이성적인 근거를 토대로 하고 있다”9)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 볼 때 펠젠부르크섬이 억압적 사회상황을 극복하고 궁극적으로는 계몽주의적 이념을 담지하고 있는 이상사회의 모델로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고에는 문명화에 비유되는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나 이성 편향적인 덕성, 그리고 계몽주의적 낙관주의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어쨌든『펠젠부르크섬』에서는 섬이라는 공간적 유토피아가 계몽의 완성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음은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이 미래지향성을 담지한 계몽의 유토피아로 보는 것을 제한하는 요소들을 많이 품고 있다는 의견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즉, 펠젠부르크 사람들이 섬에 없는 수공업기술자들을 유럽으로부터 데려오는 등 유럽을 혐오하면서도 유럽적인 문명을 포기하지 않아서 이 소설이 유럽에 대한 복안이며 강력한 개혁의지와 결부된 계몽의 유토피아라는 것을 중화시켜준다는 점이 그렇다. 유럽에서 겪은 펠젠부르크 사람들의 운명에서 유럽에 대한 혐오감만 나타나 있지 주인공들의 어떤 강력한 변화의지가 나타나 있지 않고 그들은 단지 자기 본성에 맞는 공간을 발견했을 뿐이라는 점과, 이들이 애초에 도덕적으로도 완벽한 인물들이 아니며, 일부 그들의 덕목도 펠젠부르크에 와서야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라든가, 펠젠부르크 공동체가 국가라는 공적인 영역이 아닌 족장인 알베르트를 축으로 한 개개 가정을 중심으로 가부장적 대가족 조직이라는 사적 영역에 유토피아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야할 부분이다.10)

물론 가부장적 체제가 유럽의 전제군주적인 사회의 성격으로 발달할 염려가 있지만 알베르트가 마지막 유언을 통해서 법이나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11)이 소설은 더욱 더 나은 미래상을 추구하고 있다. 또한 이들이 문명화를 위해 기술자를 유럽으로부터 데려오는 것을 유럽에 대한 대안적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의지가 약해서라기보다는 기존의 것을 비판하면서도 수용할 것은 더욱 받아들이자는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진보이념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진보라는 이념은 완전히 무에서부터 시작하자는 개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펠젠부르크 사람들의 도덕적인 문제나 주인공들이 유럽에서 보여주었던 개혁이나 변혁과 비판의지의 부족이라는 면은 공간적 유토피아가 가지고 있는 한계라고 할 수가 있다. 공간적 유토피아는 공동체의 선이나 낙원적 공간에 그 중점을 두는 까닭에 개인 주체의 발전과정이나 개체의 유토피아적 성향에는 등한시 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펠젠부르크 사람들이 섬에 와서 변화된 모습으로 자신들의 덕목을 보여주고 있다는 면에서 위와 같은 부정적 의견에 조금은 반박할 근거를 주고 있기는 하지만, 이 소설 자체가 개인보다도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고 그러한 계몽된 사회에 역점을 두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소설은 계몽주의적 이념의 실현을 바로 공동체 사회에서 선취하고자 하는 미래지향적 유토피아 작품이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를 개인 주체와 그 발전에 초점을 둔 것은 계몽주의에서가 아니라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작품에서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


I. 2. 낙관주의와 유토피아: 볼테르의『캉디드』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Candide ou l'optimisme』(1759)는 18세기의 프랑스 계몽사상을 대표하는 볼테르(1694-1778)의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읽혀온 재치 있는 ‘철학적 콩트’다. ‘순진한’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주인공 캉디드는 라이프니츠 류 낙관주의의 신봉자인 스승 팡글로스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지만, 구세계인 유럽과 신세계인 미 대륙을 누비는 모험을 통해 낙관주의의 허구성을 깨닫게 된다. 캉디드의 여행은 유토피아적 ‘최선의 세계’를 추구하는 긴 여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

총 30장으로 이루어진 이 콩트의 공간구조는 유토피아적 공간/디스토피아적 공간의 대립 구조로 나타난다. 지상낙원 툰더 텐 크롱크 성(제1장) - 낙원추방 및 고난(2장-16장) - 유토피아 엘도라도(17, 18장) - 유토피아 이탈 및 고난(19장-29장) - 정원(30장)이라는, 유토피아적 공간/디스토피아적 공간 사이의 왕복운동으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품의 세 가지 유토피아적 공간, 툰더 텐 크롱크 성, 엘도라도, 정원의 의미를 차례로 분석해보자.

첫 번째 유토피아적 공간인 남작의 성에서 작품 최초의 장면은 창세기의 ‘원장면’을 암시한다. 남작의 딸 퀴네공드는 공원을 산책하다가 팡글로스가 하녀에게 물리학 강의를 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 자신도 박식해지고 싶다는 욕망에 불탄다. 캉디드의 부재, ‘지식’이라는 선악과를 따는 퀴네공드, 그리고 유혹자 팡글로스는 창세기 3장의 세 주인공 아담-이브-뱀을 환기시킨다. 이 작품에서 금지된 선악과는 곧 낙관주의적 형이상학이다. 이 에덴동산과도 같은 ‘지상낙원’은 이내 전쟁의 폭력에 의해 폐허가 되면서 사실은 캉디드가 믿었던 만큼 좋은 곳도 행복한 곳도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된다.12)툰더 텐 크롱크 성은 팡글로스의 낙관론을 추종한 캉디드의 오해 속에서만 유토피아였던, 의사 유토피아 pseudo-utopie다.

두 번째 유토피아적 공간인 엘도라도는 캉디드가 도주 끝에 기적적으로 도착하는,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신비의 땅이다. 엘도라도는 ‘순진무구함과 무한한 행복’(71쪽)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며, 캉디드 말대로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는’(81쪽) 유일한 곳으로 소개된다. 엘도라도는 유토피아의 두 가지 어원, 즉 ‘행복한 곳’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을 모두 충족시키는 것처럼 보인다.13)

하지만 몇 쪽 되지 않는 이 에피소드에서, 국외자인 여행자 캉디드의 제한된 시점으로 본 엘도라도가 ‘어떤 유토피아인가’를 재구성하기란 쉽지 않다. 유토피아 소설에 늘 등장하는 주제인 가족, 소유, 소비, 정치․사회 구조, 종교가 엘도라도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간략히 살펴보자.14)

가족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고, 소유에 대해서는 빈부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공동소유제는 아닌 것 같다. 금은 보석이 땅바닥에 굴러다니지만 주민들은 그것을 ‘돌’로 여기고, 나름대로의 화폐 체제를 갖추고 있다. 소비에 대해서도 별다른 언급이 없는 대신, 정치 체제는 ‘왕’이 통치하는 체제로, 신분의 차이가 존재하는 불평등 사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모두 ‘의견이 일치한다(72쪽).’ 이 나라에는 법원도 감옥도 국회도 없으며, 대신 수학과 물리학 기구들이 가득 찬 ‘과학의 전당’이 있다. 가장 자세히 묘사된 것은 종교다. 엘도라도의 유래를 설명해준 172세의 현자가 설명한 바에 의하면, 이들은 유일신을 믿는다. 하지만 ‘가르치고, 논쟁하고, 통치하고, 음모를 꾸미고,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화형시키는’ 성직자들은 없다(72쪽).

이 유토피아의 묘사에서는 과학․기술의 진보를 믿으며, 종교적으로 ‘이신론’을 주장하면서 당대의 비합리적인 종교제도를 비판한 볼테르의 계몽 사상을 엿볼 수 있다.15)엘도라도는 기술, 과학 등 합리적 수단을 사용하는 인간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낙원’이나 ‘천년왕국’과 대비되는 진정한 의미의 유토피아다.16) 

그러나 『캉디드』에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1516)처럼 완벽한 이상 사회의 세세한 묘사와 새로운 모델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일이다. 볼테르의 목적은 또 하나의 이상사회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어떤 유토피아인가?’는 중요하지 않다.17)엘도라도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 곧바로 부정해 버리기 위한 유토피아이기 때문이다. 캉디드가 이곳에 안주하지 않고 퀴네공드를 찾아 떠나는 것은 물론 ‘사랑하는 여인을 찾기 위한 여행’이라는 작품의 서술 프로그램을 완결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를 공박한다는 소설의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낙관주의를 실현가능성의 조건으로 삼는 유토피아는 어떤 것이든 라이프니츠의 『신정론』(1710)과 같은 근본적인 역설 위에 자리하고 있다. 질서와 이성이 지배하는 유토피아는 시민들 간에 있을 수 있는 이해관계의 대립이나 경쟁, 의견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다. 유토피아에 불화나 범죄 등의 악은 그림자도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세계는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의 것’이며, ‘모든 것이 다 좋다’는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는 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18)볼테르는 캉디드의 방랑을 통해 끊임없이 디스토피아적 세계(전쟁, 화형식, 지진, 폭력, 절도, 살인)의 실상을 고발하며 악의 존재를 증명한다. 모든 악이 제거된 유토피아는 라이프니츠의 낙관론과 마찬가지로 모순적이다. 이 소설에서 엘도라도는 애초에 팡글로스의 낙관주의적 형이상학과 동일한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유토피아적 공간인 엘도라도는 이렇게 해서 거부된 유토피아 utopie déniée로 남는다.

마지막으로 남는 유토피아적 공간은 캉디드가 정착하게 되는 정원이다.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캉디드는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팡글로스는 이에 대해 ‘자네 말이 옳아. 애당초 신이 인간을 에덴 동산에 데려다 놓은 것은 일하게 하기 위함이었으니까. 그것은 곧 인간이 쉬려고 태어난 것이 아님을 입증하지’하고 답한다(125쪽). 창세기의 에덴 동산에서 인간은 일할 필요가 없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인간에게 노동이 벌로 주어졌다는 기독교 이념과는 반대로, 인간중심의 새로운 에덴동산에서는 일이 하나의 행복이다. 볼테르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 조건과 떼 놓을 수 없는 불행에 대한 가장 큰 위로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19)


정원이야말로 진정으로 ‘유용함이 곧 즐거움이 되는’(엘도라도에 대한 묘사, 67쪽) 곳이다. 이곳은 또 툰더 텐 크롱크 성에서 저지른 원죄라고 할 수 있는 공허한 말의 형이상학을 버리고, 몸으로 실천하는 곳이다.

인간이 추구할 것은 잃어버린 낙원의 회복도 아니고, 불가능한 엘도라도의 꿈도 아니며, 지상에서 일을 통한 소박한 행복이라는 것이 볼테르의 결론이다. 『캉디드』는 인생의 목적이 천상의 낙원이 아니라 지상에 있어서의 행복추구에 있음을 주장한 계몽사상을 반영한다. 캉디드의 행보는 결국 디스토피아적 세상 가운데서, 의사 유토피아에서 출발하여, 거부된 유토피아를 거쳐 나름의 ‘순진한(캉디드)’ 행복의 유토피아에 도달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II. 개인 주체와 유토피아


II. 1. ‘교양’을 통한 자아완성: 괴테의『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공간적 유토피아에 대한 논의는 다른 한편으로 이와 같은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면 우선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이 모두 계몽된 자아라든가, 자아완성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그 전제가 된다는 방향으로 발전되기 시작한다. 포스캄프는 유토피아의 유형을 크게 공간적 유토피아와 시간적 유토피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공간적 유토피아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당시의 역사적 현재와는 대조되는 이상적인 사회로서의 희망적 공간을 일컫고 있다면 시간적 유토피아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이룩해야 할 희망적 시간으로서의 미래상을 말하고 있다.20)유토피아의 개념이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으로서의 개인 주체와 연관이 된 것은 현실 공간에 유토피아를 세우려는 시간적 유토피아에 개인의 심리적 측면이 부각되는 자율적 주체의 개념과 자아완성의 과정을 강조하는 관점이 첨부된 것이다. 자율적인 주체가 유토피아를 이루는 전제가 된다는 사상이나 이러한 주체의 개별적인 자아완성에서 또 다른 형태의 유토피아를 보게 된다는 사고는 계몽주의적 유토피아의 사상적 배경에서 발전되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 진보사상과 마찬가지로 인간 개개인도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발전가능성, 즉 주체의 완성과 보편적 교양을 이룩할 수 있다는 생각은 바로 ꡐ무한한 완전성ꡑ에 대한 믿음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하겠다. 독일문학에서 이러한 논의의 중점에 서 있는 대상이 바로 교양소설 Bildungsroman이다. 개인적인 발전의 성숙과정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발전소설 Entwicklungsroman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한 개체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에서 사회의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성숙한 단계로 발전해 나가는 이른바 자아완성의 과정을 보여준다. 자율적인 한 개체가 인격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은 다시 말해서 인간 내부의 유토피아를 이루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며, 넓은 의미에서 보면 유토피아 사회를 이루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교양소설과 발전소설은 유토피아적인 것을 주인공의 사고와 감정으로 옮겨놓는다”21)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을 통해 자율적 주체의 자아완성의 과정을 잘 보여주어 개인 주체와 유토피아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는 교양소설로서 손꼽을 수 있는 작품 중의 하나가 바로 괴테의『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Wilhelm Meisters Lehrjahre』(1796)이다.

주인공 빌헬름 마이스터가 연극이라는 예술을 통해서 시민계급의 모범적 인간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연극체험을 다룬 5권까지의 전반부와 탑의 결사에 들어서게 된 이후의 7, 8권의 후반부의 주인공의 교양과정을 삶의 역정과 더불어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주인공 빌헬름은 아버지가 원하는 세계를 속물적 시민사회라고 비판하며 여기에서 벗어나 연극에서 더 큰 세계를 접하고 자기 자신에게 이르고자 한다. 빌헬름에게 있어서 연극세계의 체험은 시민사회의 대안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자기발전과 자아구현의 수단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체험은 우선 계몽주의의 정신적 흐름을 잘 대변해 주고 있으며, 자기 교양을 통한 자율적 주체의 총체적 완성의 길을 보여준다. 이를 잘 보여주는 대목으로 빌헬름이 시민세계의 전형적인 인물로 묘사된 그의 매부 베르너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자.


자네에게 한 마디로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수양해 나가는 것이 어렴풋이 어린 시절부터 나의 소원이었으며 또 나의 목표였다네. [...] 나는 지금 나의 출신이 거부한 나의 본성을 조화롭게 수양시키고자 하는 일에 억제할 수 없는 강한 충동을 가지고 있다네.22)


이처럼 자신을 수양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개인의 총체적 완성으로 나아가는 일은 ‘교양’ Bildung이라는 명제로서 주인공 빌헬름의 수업시대의 목표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양은 과연 자기완성의 길을 나타내는 개인적인 면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목표는 괴테가 살았던 고전주의적 사회가 추구하는 인간의 목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교양이라는 개념은 개인적인 자아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개인이 속하는 사회와의 상관관계를 나타내주고 있다고 하겠다. 요컨대 이러한 교양은 개인적 교양의 성격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사회가 원하는 형태의 사회적 교양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즉 이 교양은 “자아와 세계,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23)이 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은 소설의 전반부에서는 시민사회를 비판하며 개인적 체험을 통해 자기구현의 길을 나아갔던 주인공 빌헬름이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탑의 결사에 속하게 되면서 하나의 공동체 사회에 부합되는 인간이 되기를 요구받게 되고 본인 또한 이러한 새로운 목표 또는 이상의 제시를 수용해 나간다는 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로써 자율적 개인의 완성과 사회적 현실간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소설은 교양소설이라는 장르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 총체성이라는 주관적 요구와 사회적 현실이라는 대립이 화해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도 그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개인적인 자아실현과 사회와의 동화가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는 포스캄프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다.24)비슷한 관점에서 빌헬름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인정해야 하며 또한 그러한 개인의 교양은 그 사회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그러한 개인의 교양이 참된 것이라고 피력하고 있는 코르프의 견해를 들어보자.


이러한 (사회의 이념적인) 인정은 사회를 위해서나 또한 개인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통찰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 또한 개인을 위해서도 사회를 통한 제한은 긍정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사회를 접하면서 사회를 통해서 자신을 형성해 나간다. 즉 인간은 사회에 의해서 형성되고 사회에 맞도록 형성되어 간다. 진정한 교양은 개인적인 역량과 비개인적인 사회적 삶의 형태와 질서와 과제와의 풍성한 조화를 통해서 생겨난다.25)


이러한 사회와 개인의 조화는 바로 고전주의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조화와 균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이러한 개인과 사회와의 상관관계가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개인과 사회와의 조화라는 면뿐만 아니라, 사회와 개인과의 마찰이나 개인에 대한 사회의 제한이라고 하는 부정적인 측면으로도 표출되어 나타난다고 해석할 수가 있다. 주인공 빌헬름의 행동이 탑의 결사의 공익적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빌헬름이 내키든 내키지 않든 간에 이를 수용한 태도는 개인의 자율성이 침해되는 양상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빌헬름이 교양을 통한 자아완성의 길을 스스로 단념하게 되었으며 유토피아적인 사회 때문에 개인 주체의 유토피아가 상실되어 버렸다거나26), 또 이로 인해『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라는 작품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교양소설인가, 라는 의문을 남기고 있으며 처음에 추구하고자 했던 교양이라는 이념은 결국 현실에는 없는 유토피아로 남게 된다는 견해에는27)동의할 수가 없다. 애초부터 빌헬름이 추구하고자 했던 교양이라는 이름의 자기완성은 자신이 속한 사회와의 접촉을 통해서 나아갔던 것이다. 그래서 그 사회와의 길항 작용을 통해서 빌헬름이라는 자아는 자기발전을 해나갔으며 이를 통해 교양이라는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이념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속물이라고 보았던 시민계급과 시민사회를 비판했으며, 이러한 비판정신과 비판적인 행동을 통해 성숙해 나갔고, 물론 완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볼 때는 현실적으로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공동체 속에서 여태까지의 자신보다 더 나은 자아의 길을 나아가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시대가 요구하는 고전주의적 이상이라는 테두리가 빌헬름 자신에게는 개인이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로 작용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빌헬름의 일련의 인생역정을 통해서 볼 때는 그는 계속적인 자아완성의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그러한 과정이 발전적 단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탑의 결사라는 조직체가 빌헬름의 교양과정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자신이 처음에 비판했던 시민사회보다 훨씬 더 나은 사회인 탑의 결사에 빌헬름이 속하게 된 자체가 자신의 노력의 산물이며 자아완성의 도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을 종합해서 볼 때『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는 개인 주체를 통한 유토피아가 잘 구현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II. 2. 낭만적 자아와 동경: 프리드리히 슐레겔의『루친데』


독일문학사를 살펴 볼 때 낭만주의도 비록 그 방법을 달리하고 있지만 계몽주의의 큰 흐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루소가 계몽주의의 중심사상인 이성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자연’이 제도와 문명을 반대하고 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낭만주의도 유토피아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세를 동경한 과거 지향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미래지향적이고 직선적인 진보사상을 통해 급진적인 윤리적, 정치적 혁신을 루소는 요구함으로써 낭만주의의 유토피아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토피아 사상은 시간적 유토피아의 측면(프랑스 혁명의 열광을 통한 사회정의의 실현의지)뿐만 아니라, 자율적 개체의 자아완성이라는 인식론적이며 개인적인 유토피아로서 문학작품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예로 프리드리히 슐레겔 Friedrich Schlegel의『루친데 Lucinde』(1799)를 들 수가 있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많은 여성을 거치면서 인간적으로 성숙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 율리우스의 카오스적인 내면세계가 여러 체험을 통해 낭만주의 이상이 추구하는 인간형으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서술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개인 주체의 유토피아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작품『루친데』의 전, 후장의 한복판에는 괴테의『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연상시키는『남성의 수업시대 Lehrjahre der Männlichkeit』라는 부분이 있다. 즉 이것은 빌헬름의 수업시대처럼 율리우스의 수업시대를 묘사한 부분으로 주인공의 교양수업의 역정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 교양은 고전주의가 요구한 교양과는 판이한 낭만주의적 교양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때문에 이 소설을 낭만주의 교양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다.28)

이 소설은 독특한 형식과 외설적인 내용으로 인해 동시대 문학세계뿐만 아니라, 동시대 사회 전반에 폭탄과 같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작품이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경우에서는 고전주의의 시대상이 요구하는 시대적(사회적) 교양이 중시되었고 주인공도 또한 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반면에,『루친데』의 경우는 비윤리적인 면과 방탕함 그리고 도덕적 방종인 신성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동시대의 비판이 말해주는 것처럼29)사회적 유토피아나 요망사항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철저한 개인 중심적인 낭만적 자아의 완성의 도정을 보여주고 있다. 개체적 유토피아로서의 이러한 낭만적인 자아완성의 길은 주인공 율리우스와 그가 겪은 여성들간의 사랑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의 낭만적 교양과정은 이러한 여인들의 속성을 통하여 알아보아야 한다. 

율리우스가 만난 첫 번째 여성 루이제는 처음에는 목가적 소녀로 상징되어 이들의 사랑은 순수한 목가적인 사랑으로 비쳐지는 긍정적인 면을 띠고 있었지만, 나중에 이 여성은 남성 의존적이고 나아가서는 여성미덕에 대한 불신을 자아내게 하는 부정적인 면을 보여준다.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에서 겪는 사랑의 경험을 통해 율리우스는 자아성숙의 계기를 찾게 된다. 두 번째 여성은 매사 적극적인 여성으로서 율리우스에게 거짓된 사랑을 보여준다. 율리우스는 여성의 허위성을 통해 참다운 인간성을 깨닫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세 번째 여성으로 율리우스는 이기주의와 고집과 돈에 대한 열정을 지닌 창녀 리제테를 만나게 된다. 이 여성을 만나게 된 때가 율리우스 자신이 사랑에 실패한 후 도박과 타락에 빠지게 되어 사회의 어두운 길을 걷고 방황할 때였던 만큼 이 여성의 관능적인 면에만 관심이 집중된다. 하지만 곧 이 윤락여성을 통해 오히려 그는 사회적 편견을 경멸하게 되면서 내적 성장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다음에 율리우스는 지성적이고 시민 세계의 덕성을 갖춘 여성을 만나게 된다. 이 여성을 통해 율리우스는 화가로서 미술에 대한 사명을 깨닫게 된다. 다섯 번째로 율리우스는 감각적인 여성을 만나지만 아직도 사랑에 대한 참다운 가치관을 형성하지 못한 자신을 드러낸 채 여섯 번째 여성을 만나게 된다. 성숙한 덕목을 갖춘 이 여성을 통해 율리우스는 그의 예술세계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된다. 이처럼 성장한 작품세계는 율리우스 자신의 내면적 성장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그 다음 일곱 번째로 만난 여성과의 지성적인 대화를 통해 율리우스는 더욱 더 자기 수양의 길을 걷게 된다. 마지막 여덟 번째의 만남으로 율리우스는 사랑의 방황을 종식하게 된다. 즉 사랑의 이상으로서 낭만주의적 여성 루친데를 만나게 된 것이다.30)루친데와의 사랑은 바로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율리우스는 이를 통해 자아완성의 정점에 다다르게 된다. 율리우스는 루친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랑이란 “우리를 진정으로 완전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64쪽)이라고 말하면서 바로 이러한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완전한 자아”(27쪽)를 찾고자 한다. 율리우스는 이러한 사랑이 가져다 준 자신의 내적인 변화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는 나의 본성에서 커다란 변화를 느낀다: 즉, 영혼과 정신의 모든 능력에 있어서 온화함과 따뜻한 열기를 느낀다.(65쪽)


이처럼 루친데와의 사랑으로 율리우스는 자신의 내적인 변화, 즉 자아의 성숙의 길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럼, 수많은 방황과 오류 끝에 도달하게 된 낭만적 사랑인 루친데와의 사랑이 과연 그를 어떠한 상태로 나아가게 했는지 더욱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그의 내부에 빛이 생겼다. 그는 한가운데에 서 있어서 자신의 삶의 모든 큰 사건들과 그 전체의 구조를 명확하고도 올바르게 살펴보았으며, 또 파악해 보았다. 그는 이처럼 하나가 된 상태를 결코 잃어버릴 수 없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의 생존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는 그 해답을 찾아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그렇게 되리라고 운명적으로 정해졌던 것처럼 보였고, 아주 옛적부터 그것을 사랑에서 찾아야 될 것이라고 계획되어져 있는 것 같았다.(57쪽)


이와 같이 율리우스는 루친데와의 사랑의 결합 후에 “자아를 개혁하는”31)정신적 변화를 겪게 되며, 이것은 사랑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통한 율리우스의 내적인 발전과정을 뚜렷이 암시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율리우스의 말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율리우스의 사랑은 단순한 남녀의 애정의 범위를 뛰어넘어 “완전한 인간”이나 완전한 자아를 성취하는 의미를 띠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슐레겔은 그의 한 단상에서 사랑의 의미를 명확히 말해주고 있다.


단지 사랑과 사랑의 의식을 통해서만 인간은 인간이 된다.32)


사랑이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이라고 슐레겔이 강조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에서는 여성인 루친데는 얻으려고 노력해야 될 이상의 화신으로 나타나는 반면에 “남성인 율리우스에게는 무한한 완성의 과정으로서 발전, 전진의 속성이 주어진다”33)고 한 바이겔의 주장이나 “이 소설의 중점은 율리우스의 인격도야의 역정에 있다”34)고 한 베커-칸타리노의 의견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루친데』에서는 초기낭만주의자들이 동경했던 절대적인 그 무엇으로서의 무한자 또는 완성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이 낭만적 자아에로 전이되어 나타나며, 사랑을 통한 ‘무한한 자기완성’이라는 초기낭만주의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을 통한 더 높은 인간성 형성의 길은 율리우스 개인의 내적인 완성과 절대적 경지를 향한 전진을 말해준다. 또한 이러한 인간적인 성숙은 율리우스 자신의 예술에의 성숙과 동일시되어 나타나게 된다. (50쪽 참조)

이와 같이 낭만적 자아의 동경은 사회적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고 순전히 개인적 존재의 의미의 차원으로 전개되며 개인 주체의 내적인 완성을 위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계몽주의적 이성의 실현을 통해 보여주는 공간적 유토피아나 고전주의적 이상을 담고 있는 사회와 개체의 조화로서의 유토피아가 아닌 낭만적 자아의 낭만적 교양이라는 무한한 자아완성의 길을 보여주고 있는 개체의 유토피아를 볼 수 있다.


III.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변증법: 현대의 유토피아


III. 1.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 탈식민주의 시대의 로빈슨 크루소: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프랑스의 현대 작가 미셀 투르니에(1924- )의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고성소 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1967)는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1719)를 정면으로 패러디한 소설이다. 18세기 계몽주의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로빈슨 크루소』는 ‘원시’ 자연에 대한 식민주의 시대 서구문명의 승리를 그린다. 그러나 20세기 탈식민주의 시대의 로빈슨 크루소에게는 문명과 ‘원시’의 개념이 전복된다. 투르니에 소설의 제목이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라 원시인인 『방드르디』(‘프라이데이 Friday’처럼 불어로 금요일이라는 뜻)인 것도 이러한 전복을 반영한다. 투르니에는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영향하에 문명의 야만성을 고발하고, ‘야생’의 문명에 입문하는 새로운 인간형의 로빈슨 크루소를 제시한다.35)

『방드르디』는 로뱅송(로빈슨의 불어식 발음)이 서구문명을 복원하는 과거지향적 단계에서 방드르디의 영향으로 전혀 새로운 유토피아를 발견하는 단계로 이행하는 긴 과정을 그린다. 무인도에 표류한 로뱅송은 혼자 힘으로 인류역사의 전개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는 수렵과 채취 시대에서, 목축과 농경시대로 성공적으로 옮겨간다. 그는 서구인의 관점에서 무질서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자연을 인간의 힘으로 지배하고자 한다. ‘섬 전체는 단 한 사람의 정신력으로 조금씩 제어되고, 지배되고, 요컨대 길들여질 것이다.’36)그는 스스로를 총독으로 임명하고, 법을 제정하여, 이 절해고도에 대영제국의 ‘식민지’라는 아이덴티티를 암암리에 부여한다. 그의 일련의 ‘문명화 작업’(경작, 목축, 건설, 행정, 법 등)은 이 섬에 서구사회의 축소판과 같은 또 하나의 사회를 복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이 사회는 로뱅송이 떠나온 세계를 모델로 하는 ‘회고적인’ 사회로(116쪽), 이상사회의 건설이라는 유토피아의 미래지향성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 없는 인간’이 만든 이 ‘사회’에는 무엇인가 삐걱거리는 요소가 있다. 뼈저린 고독에 시달리는 로뱅송은 ‘진흙탕 목욕’으로 상징되는 극도의 절망과 퇴행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짐승과 같은 상태에 빠지는 ‘비인간화’ 과정을 되돌리기 위해 노동을 시작했다.37)따라서 그의 노동은 ‘공허와 싸우는 미치광이의 투쟁’, ‘어린애와 같은 무질서한 광기’(58쪽)에 비유되는, 과도함이 특징이다. 과도한 노동의 결과는 과도한 생산을 낳는다. 그에게 있어 ‘일체의 생산은 창조이며 따라서 좋은 것이다. 일체의 소비는 파괴이며 따라서 나쁜 것이다’(61쪽). ‘축재하라!’는 모토로 일한 로뱅송의 동굴 안에는 ‘한 마을 전체를 여러 해 동안 먹여 살리기에 충분할 만큼 비축된 곡식들이 넘쳐 났다’(140쪽). 로뱅송은 결국 이 모든 작업의 헛된 면을 의식하여, 그에게 ‘경작은 무용하고, 목축은 부조리하고, 저장된 곡식은 상식에 대한 모독이며, 헛간은 조롱거리 같아 보였다’(124쪽). 게다가 헌장, 형법 따위의 법 제도나 총독이라는 지위는 피지배자가 전무한 1인의 식민지에 애초부터 부조리한 것이었다.

내부로부터 붕괴될 위기에 처한 이 1인의 사회는 방드르디라고 명명될 원주민의 등장으로 전기를 맞는다. 주민이 두 명이 됨으로써 보잘 것 없는 것이긴 하지만 진정한 사회가 형성된 이 섬에서, 예의 회고적 서구사회의 질서는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간다. 로뱅송과 방드르디는 섬에 구축된 식민지적 질서에 따라 주인과 노예,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투르니에는 소설의 전반부에 『로빈슨 크루소』와 같이 무인도에 혼자 힘으로 건설되는 문명사회를 배치하지만, 그의 목적은 디포와 반대 극에 있다. 투르니에는 이 사회의 묘사를 통해 노동과 생산 자체를 비판한다. 노동과 생산은 자연에 대한 폭력이기도 하다. 로빈슨들이 이룩한 서구사회는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대신, 끊임없이 자연을 변형시킨 결과 자연을 파괴해 왔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서구자본주의 사회(과잉생산과 이로 인한 자본의 지배)와 서구 식민주의(총독제도, 법제도)를 비판한다. 투르니에는 로뱅송의 회의를 통해 서구문명의 자연파괴와 식민주의적 가치관의 전모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소설은 문명비판의 한 획을 긋고, 유토피아의 창조로 방향을 선회한다. 블로흐가 말하는 부정의 원리에서 긍정의 원리로 나아가기 위해서다.38)어느 날 섬의 모든 것이 집약된 중심부인 동굴이 폭파되고, 이와 함께 지금까지 애써 이룩한 모든 문명이 한순간에 일소된다. 이로써 섬은 백지 위에 모든 것을 새로 쓰는,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할 준비를 갖춘다. 야만적 문명사회를 청산하고 다시금 ‘원시’ 자연으로 돌아간 섬(‘희망’이라는 뜻의 ‘스페란자’로 명명된다)에서 로뱅송은 방드르디를 스승으로 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다.

방드르디는 로빈슨의 충복 프라이데이와 달리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인간이다. 그는 로빈슨과 같은 공작인 homo faber이 아니라 유희인 homo ludens이라는 새로운 인간형을 대표한다. 방드르디의 놀이는 대부분 ‘공기’와 관계된 것들이다.39)물수제비뜨기,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화살을 만들어 날리기, 염소 가죽으로 만든 연 날리기, ‘바람의 음악’이 연주하는 ‘원소의 악기’ 만들기......40)야생의 문명인인 방드르디가 하는 모든 일-놀이는 가벼움과 상승을 속성으로 한다.

반면 로뱅송은 무거움과 하강을 속성으로 하는 ‘대지’의 인간이었다. 그의 대지적 속성은 땅의 경작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도 드러나지만, 전반부 ‘동굴’의 에피소드에 결정적으로 집약되어 있다(그는 어머니-대지의 자궁 역할을 하는 동굴을 대지의 태아로서 체험한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대지(바위)와 공기(허공)의 두 원소가 집약된 ‘절벽 오르기’에 성공한 로뱅송은 자신의 ‘대지적 시대’를 결정적으로 부정하면서, 영혼이 대지로 이끌리는 것은 거기서 ‘죽음의 평화’를 예감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99쪽). 로뱅송은 방드르디의 무언의 가르침에 따라 가벼움과 상승의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을 다한다.

마침내 로뱅송은 아침마다 남양 삼나무에 올라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며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다. 상승하는 ‘불’인 태양의 기사가 되어 일어선 것이다. 태양은 대지의 인간이었던 로뱅송에게 깊이 자리한 중력, 존재의 무게를 덜어주고, ‘새로운 희열’을 솟구쳐 오르게 한다(203쪽). 로뱅송은 이로써 대지적 존재인 ‘유충’에서 태양빛을 받아 화려한 나비로 탈태하는데 성공한다. 새로운 인간 로뱅송에게는 시간의 개념도 바뀐다.


매일 아침이 그에게는 최초의 시작이었으며 세계사의 절대적인 시작이었다. 태양신 아래서 스페란자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영원한 현재 속에 진동하고 있었다. 그는 어떤 완벽의 극한점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 영원한 현재에서 나와서 마멸과 먼지와 폐허의 세계 속으로 추락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246쪽).


로뱅송은 마침내 일직선으로 흐르는 역사적 시간을 벗어버리고 ‘영원히 반복되는 현재’라는 절대적 시간 가운데 살며, 자연(태양)과 혼연일체를 이룸으로써 지고의 ‘태양적 행복’에 이른다. 이것이 로뱅송이 마침내 이룬 유토피아의 모습이다. 이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 식으로 ‘인간사회의 이상적 조직을 구체적이고 자세히 묘사한’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있다.41)이 유토피아는 독일 교양소설에서와 같이 한 개인주체가 기나긴 변모의 과정을 거쳐 자아의 완성에 이르는, 인간 내부에 이루는 ‘개인적 유토피아’의 성격에 가깝다.

희망의 ‘고성소’에 유토피아를 이룩한 로뱅송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불현듯 배를 타고 나타난 문명인들을 보고 오히려 ‘객관적 거리감’을 느낀다.42)투르니에는 로뱅송을 문명세계로 돌려보내지 않고 섬에 그대로 남겨둠으로써 『로빈슨 크루소』뿐 아니라 유토피아 소설 대부분의 결말과 결정적으로 결별한다. 이제 로뱅송에게 있어 문명세계는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마멸과 먼지와 폐허의 세계’인 디스토피아에 불과하다. 그가 깨달은 문명세계의 악이란 문명인들이 ‘열에 들떠 추구하고 있는 목적들의 어쩔 수 없는 ‘상대성’이었다.’


그들은 모두 목적을 추구하고 있었고, 그 목적은 어떤 취득, 어떤 부, 어떤 만족이었다. 하지만 왜 이런 취득, 부, 만족을 추구하는가? 물론 누구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었다(243쪽).


거듭 태어난 로뱅송이 추구하는 것은 절대적인 정신적 만족과 절대적인 시간성이다. 태양 속에는 ‘정신이 담겨 있으며, 태양을 향해 스스로를 열 줄 아는 존재들에게는 영원의 빛을 비추어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244쪽).

계몽 시대의 유토피아는 자연을 지배하고, 야만인을 길들이고자 했으며, 노동하고 생산하는 인간을 찬양했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관은 식민제국주의라는 불행한 결과를 낳았다. 탈식민주의 시대의 『방드르디』에는 자연과 합일하고, 야생인에게서 그들의 문명을 배워야 한다는 전복된 가치관이 등장한다. 『방드르디』는 또 새로운 유토피아에 합당한 인간관을 암시한다. 새로운 유토피아인은 유희인이며, 보다 절대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정신적 인간이면서, 자연과 조화롭게 살 줄 아는 인간이다. 투르니에는 이 소설에서 모든 문명과의 고리를 끊고, 야생의 상태에서 정신적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전혀 새로운 유형의 로빈슨 크루소를 창조했다.


III. 2. 참된 사회주의 유토피아 - 크리스타 볼프의 ꡔ카산드라ꡕ


억압과 착취가 없는 사회주의 세계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이상향으로 여겨졌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꿈꾸던 공상적 사회주의든지 맑스와 엥겔스가 꿈꾸던 과학적 공산주의 사회든지 사회주의 이상은 하나의 꿈으로 유토피아로 작용해 왔다. 사회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은 많은 문학작품에서 말 그대로 언젠가는 이루어야 하지만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꿈으로만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나치 패망 이후 독일 땅에 사회주의 국가가 건설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꿈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나치에 의해 조국을 떠나야 했던 많은 독일 작가들이 패전 후에 독일 땅에 비로소 “노동자와 농민의 나라”를 세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사회주의 국가인 동독을 선택했을 때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지상에 세운다는 실험이 시작되었다. 이제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지금 여기에서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가 되었다.

1948년에 건국된 동독은 1950년대까지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위해 매진하였기 때문에 당시까지는 당국이나 작가들이 자신이 꿈꾸던 유토피아가 현실에서 실현된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1960년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건설이 완료되고, 동독사회가 안정을 찾자 동독은 사회주의 완성, 즉 유토피아의 지상에서의 완성을 선포한다. 대표적인 예로 1962년에 동독의 당주석인 울브리히트는 「동독의 국민들에게, 전 독일민족에게」라는 연설에서 “자유로운 땅에 자유로운 백성과 살고 싶구나”라는 파우스트의 마지막 희망이 바로 동독에서 실현되었음을 선언한 것을 들 수 있다.43)비평가들 역시 사회주의 사회가 실현되어 유토피아가 완성되었으므로 이제 유토피아는 종말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1964년에 편찬한 ꡔ철학사전ꡕ에서 만프레드 부어는 “과학적 사회주의는 유토피아의 종말을 의미하고, 유토피아는 사회주의에서 고유한 차원을 상실해 버렸다”44)라고 설명하고 있다.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꿈’인 유토피아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이미 실현되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사회에서 유토피아는 낡고 쓸모 없는 개념이 되어버린 것이다. 유토피아의 종말은 또한 기술발전과 핵에너지의 사용을 통해 곧 꿈의 현실을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에 의해 가속되기도 하였다. 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핵발전소 건설 및 핵에너지 시대로의 진입을 동독에서는 “에너지가 철철 넘쳐나는 낙원 같은 미래로 내딛은 위대한 발걸음”이라고 환영하였다. 작가들도 “증기의 시대가 자본주의의 것이었다면 핵의 시대는 사회주의에 속한다.”는 모토를 내세우며 핵에너지의 사용을 통해 사회주의 사회에 지상의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을 피력하였다.45)

유토피아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사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이다. 그러나 60년대의 동독사회는 결코 지상의 낙원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건설이 끝나 낙원에 거의 가까이 왔다는 공식 담론과는 달리 동독의 현실은 열악하기만 하였고, 많은 내부적 문제가 극복하기 힘든 구조적 모순으로 드러났다. 새로운 사회의 열광이 가시고 난 뒤 뒤돌아보는 동독 사회는 그 전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많은 모순과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고, 작가들에게도 완전한 자유 대신 검열과 제한이 가해지고 있었다. 작가와 예술가뿐 아니라 동독사회 전체가 동서독 분단과 동서 냉전의 이데올로기 대립상태로 인해 상당한 자유의 제약을 받았으며, 경제적으로도 낙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1961년에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어 동독이 외부세계와 스스로를 차단시킴으로써 작가들은 오히려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깊이 “자신들의 고유하고, 지역적이며, 구체적인 생활상황과 여건”46)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들의 눈에 비친 동독의 현실 사회주의 사회의 모순은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추월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끈질기고 보다 더 막강한 발걸음”의 시대모순으로 다가왔다.47)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들은 자연히 동독의 현실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60년대에 시작하여 70년대에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비판적 사회주의 문학이 태동하였다. 현재의 동독 현실이 작품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면 될수록 동독 사회가 지닌 문제점이 더욱 많이 드러났으며, 이 문제점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비판하는 문학, 즉 “반대 텍스트이자 주도 담론을 전복하는 문학”48)이 60년대 말에 이르러 뚜렷한 모습을 드러냈다.

현실사회주의의 문제점은 1968년의 ‘프라하의 봄’을 바르샤바 동맹군이 무력으로 밀어붙여 좌절시킨 사건과 1976년에 동독의 비판적 시인인 볼프 비어만을 추방한 사건을 통해 더욱 증폭되었다. 이에 따라 현실사회주의는 사회주의 이상에서 더욱 더 멀어지게 되었고, 동독의 문학 역시 자신의 사회를 비판하는 강도를 더해갔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의 바탕에는 언제나 ‘진정한 사회주의’ 또는 ‘참된 사회주의’라는 이상이 놓여있었다. 사회주의 이상에 대한 희망과 함께 동독사회의 공식 담론에서 사라졌던 유토피아가 다시금 복원된다. 동독의 현실이 사회주의 이상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참된 사회주의’는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유토피아가 된다. 비판적 작가들은 따라서 참된 사회주의, 즉 진정한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이루기 위해 현실 사회주의 사회를 비판한다.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것을 개선해 나감으로써 언젠가는 진정한 사회주의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에게 “역사는 물론 미완성이지만 이곳이나 다른 곳에서, 오늘이나 내일 완성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자유로운 사회에서의 개인의 해방과 자기실현이라는 인류 역사의 목표”49)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숭고한 이상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참된 사회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을 동독이 무너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견지하였다.

현실 사회주의에 대비되는 이상으로서의 참된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이후 동독의 비판적 사회주의 문학의 기저를 이룬다. 80년대를 거치면서 동독 사회가 더욱 더 경직되고, 발전의 희망이 점점 멀어져 보이면 보일수록 비판적 작가들은 사회주의 이상에 더욱 더 매달렸으며, 유토피아는 더욱 더 빛을 발하였다. 76년 이후 많은 작가들이 강제로 또는 자의로 동독을 떠났지만 대다수의 작가들이 동독에 남아 있었던 것은 그들이 어용작가였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사회주의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록 현실사회주의가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불만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자본주의라는 거대 악에 비해서는 자그마한 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현실사회주의의 문제를 개선하여 진정한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지니고 있었기에 자신의 사회를 뿌리째 흔들거나 그로부터 등을 돌릴 수는 없었다.


참된 사회주의 이상에 대한 동경과 그 이상에 비추어본 현실사회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이 주도적 위치를 차지한 80년대의 동독문학의 중심에 크리스타 볼프의 문학이 놓여있다. 크리스타 볼프는 일찍이 1968년에 ꡔ크리스타 테에 대한 생각 Nachdenken über Christa T.ꡕ을 통해 동독의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이후 ꡔ어느 곳도 아닌 곳 Kein Ort. Nirgendsꡕ(1979), ꡔ카산드라 Kassandraꡕ(1983년), ꡔ원전사고 Störfallꡕ(1987)에서 동독사회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여왔다. 이 중에서도 특히 볼프의 대표작이라 일컬어지는 ꡔ카산드라ꡕ에는 자신의 사회에 대한 비판과 함께 모두가 함께 잘사는 유토피아에 대한 모색이 잘 드러나 있음으로써 동독의 비판적 사회주의 문학의 특징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ꡔ카산드라ꡕ의 무대는 물론 트로이 전쟁이 벌어졌던 신화 속의 트로이 사회이지만, 이 신화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많은 사건들은 매우 커다란 현실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ꡔ카산드라ꡕ에는 그리스와 트로이 간의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며, 그와 함께 언어조작과 언론통제, 인권탄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세밀하게 추적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1980년 당시의 심화된 동서냉전으로 인한 독일 땅에서의 전쟁 발발의 위험성과 그로 인한 동독에서의 언론검열과 통제에 대한 비판에 다름 아니다. 이는 신화소재를 이용하되 언제나 신화를 과거의 세계에서 끄집어내어 현재의 공간으로 옮겨오고 신화적 사건을 오늘날의 문제로 변화시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크리스타 볼프의 작업방식, 즉 ‘탈신화화 Entmythologisierung’ 또는 ‘신화의 재해석 Umdeutung des Mythos’ 작업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ꡔ카산드라ꡕ에서 트로이 세계를 빌어 비판하고 있는 동독의 현실사회주의 사회의 문제는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 작품에서도 많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볼프의 ꡔ카산드라ꡕ에는 현실에 대한 비판 못지 않게 유토피아에 대한 성찰이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볼프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구체적 모습은 그리스와의 오랜 대치 상황으로 인해 적을 닮아 가는 트로이 사회 내에 형성된 이다산 공동체를 통해 드러난다. 스카만드로스 강가의 이다산 동굴에 자리한 이 공동체는 그리스와 트로이로 대변되는 이분법적 세계와는 기본적으로 다른 제 3의 장소이다. 서로가 죽고 죽이는 전쟁의 한가운데서 생겨난 이곳은 죽음이 아닌 삶이 중심이 되는 공간이다. “죽이는 것과 죽는 것 사이에 제 3의 것, 삶”50)이라는 모토는 이다산 공동체가 지향하는 유토피아적 특징을 대변해 준다. 적과 아군, 죽임과 죽음, 이성과 감성, 남성과 여성, 진실과 거짓의 이분법적 대립, 즉 아군이 아니면 모두 적이며,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논리 대신에 대안적 가치가 제시된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진실 아니면 거짓이, 옳음 아니면 그름이, 승리 아니면 패배가, 친구 아니면 적이, 삶 아니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다르게 생각한다. 볼 수 없고, 냄새맡을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날카로운 구분사이에 뭉개버린 다른 것, 그들의 생각으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제 3의 것이 있다. 그것은 미소지으며 살아있는 것이고 스스로를 항상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이며 분리할 수 없는 것, 삶 속의 정신, 정신 속의 삶이다.(124쪽)


유토피아로서의 이다산 공동체는 바로 이 제 3의 것, 즉 “남을 죽이지 않고 세상에 존재하는 삶의 다른 방식”51)을 실현하는 공간으로서 등장한다. 이곳에서는 적과 아군의 구별 없이 그리스군의 노예와 트로이 여인들이 함께 어울리며, 공주와 하녀, 왕족과 평민, 남자와 여자의 차이 없이 모두가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전쟁에서 부상을 당하거나 전쟁을 피하려 도망친 사람들과 여자, 남자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전쟁의 법칙과 두려움, 살인, 불신에서 벗어나 트로이 성밖의 푸른 자연으로 둘러싸인 이다산 공동체에서 평화와 피난처를 찾는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전쟁과는 멀리 떨어져서 “음식을 끓이고, 먹고, 마시고, 서로 웃고, 노래하고, 놀고, 배우”(62쪽)며 일상의 소중한 자족적인 삶을 영위한다. 이곳에서의 삶은 딱딱한 이성이 아닌 부드러운 감성으로 채워져 있다. 노래를 부르고, 불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직접 전달해 주고, “접촉”을 통해 서로를 알아 가는 삶의 방식은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삶의 방식과 대비되는 새로운 대안적 특징을 지닌다. 또한 이다산 공동체에서는 “감정이입, 자기 인식 그리고 자연과 삶에 대한 숭배”52)가 중요한 덕목이 된다. 이를 통해 이다산 공동체는 “상호 적대적인 진영의 공존, 상호 연대, 서로간의 사랑으로 각인되어 있는 공동의 삶”53)을 실현하려고 한다.

이 공동체로 들어오면 전쟁으로 황폐해진 인간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그리스군 진영에서 도망쳐서 이다산 동굴에서 지낸 여자노예를 카산드라는 다음 해에 보고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된 것을 보고 놀란다. 이제 자유로운 인간이 된 그녀는 남성들에 대한 증오로 트로이를 도와 그리스군에 싸우러 온 여전사 펜테질레아에게 자신들의 공동체로 올 것을 권하기까지 한다. “펜테질레아, 우리에게로 와. 산으로. 숲으로. 스카만더의 동굴로. 죽이는 것과 죽는 것 사이의 제 3의 것, 삶으로.”(138쪽)

볼프가 이다산 공동체를 통해 그리고 있는 유토피아는 남성과 여성, 이성과 감성,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이다. 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중심인물은 안키세즈인데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상적 면모를 지니고 있다. ‘짐승’으로 표현되는 영웅적 남성의 대표적 인물인 아킬레스와는 정반대로 안키세즈는 환상, 섬세함, 부드러움, 풍부한 감수성 등과 같은 여성성을 많이 가지고 있고, 유유자적하며, 편견이 없으며, 이해심과 동정심을 갖추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부드러운 현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의 특징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쾌활함”을 잃지 않으며 늘 기쁨을 찾고 “자신과 사람들을 꿰뚫어 보는데" 있다. 어느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107쪽)인 그의 집에는 적대적인 양쪽 진영의 사람들뿐 아니라 에우멜로스의 측근 장교와 왕비 헤카베와 같이 트로이 사회 내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는 인물들도 함께 모이며 이들을 그는 아무런 편견 없이 대해준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서 그가 세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나무를 베어야 할 때도 나무의 존속을 배려한다. “그는 사전에 세심하게 나무와 대화를 나누지 않고는 단 하나의 나무도 벤 적이 없었고, 나무에서 얻은 씨나 어린 가지를 먼저 땅에 심어서 나무의 계속적인 삶을 보장하지 않고 벤 적이 한 번도 없었다.”(158쪽) 자연과 대화를 나누고, 자연을 존중하며, 자연의 존속을 배려하는 안키세즈의 태도는 유토피아 사회에서의 인간과 자연의 바람직한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안키세즈는 또한 이야기 중에도 “늘 나무 조각을 세공하고 있거나, 적어도 만지고 있는데”, 이는 정신과 육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합일을 몸소 실천하는 행위로 유토피아 사회의 또 다른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를 통해 안키세즈는 유토피아적 인간의 모범적 상으로 제시된다. 이를 카산드라는 “안키세즈는 하나의 꿈을 실현하였고 인간이 어떻게 대지 위에 두 다리를 딛고 서서 꿈꿀 수 있는지를 우리 젊은이들에게 가르쳤다.”(156쪽)고 평가한다. 유토피아적 인간상인 안키세즈는 그러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대지 위에 두 다리를 딛고” 선 현실 속의 인물이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실현 가능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스와 트로이 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트로이가 멸망해 가는 절망적인 상황에도 한 쪽 귀퉁이에 이다산 공동체라는 지상의 유토피아를 등장시킨 것은 크리스타 볼프가 유토피아의 실현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꿈꾸는 유토피아를 언젠가는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자연에 대한 착취 대신에 대화를, 적과 아군 대신에 친구를, 옳고 그름 대신에 제 3의 것을, 죽임과 죽음 대신에 삶을 찾는 작업은 동서독의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대치된 냉전상황을 극복하고 바람직한 사회를 세우려는 크리스타 볼프의 절실한 소망의 표현이다.

크리스타 볼프가 ꡔ카산드라ꡕ에서 이다산 공동체를 통해 그리고 있는 유토피아는 사회주의 유토피아라기보다는 인간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의 일반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지닌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다산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 가치와 원칙이 사회주의적임을 알 수 있다. 어느 한 집단에 부가 편중되지 않고 모두가 함께 나누는 경제 공동체의 성립, 스스로 선택한 가난, 계급이 없고 인간 사이의 평등이 실현된 사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결합된 사회의 근간에는 사회주의 이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이상을 바탕으로 여기에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간의 조화와 평화주의라는 가치를 덧붙여서 이다산 공동체를 유토피아 사회로 만든 것이다.


III.3. 유토피아에서 디스토피아로 - 폴커 브라운의 ꡔ나의 테러지구ꡕ


참된 사회주의 이상을 바탕으로 삼아 현실사회주의의 문제점을 지양한 새로운 유토피아를 실현하려는 볼프의 생각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강력한 희망으로 표출된다. 베를린 장벽의 개방으로 동독사회의 개혁이 가시화되면서 볼프를 위시한 동독의 개혁 사회주의자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이들이 내세운 방안은 자본주의도 현실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이었지만 그 바탕에는 물론 참된 사회주의 이상이 놓여 있었다. 사회주의 이상을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 요소를 가미한 사회체제가 장벽 개방 후에 개혁사회주의자들이 제시한 동독의 발전 방향이었다. ‘제 3의 길’,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동독산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진 그들의 유토피아에 대한 구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1989년 11월 11일자 신문에 실린 볼커 브라운의 글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인민소유 더하기 민주주의. 이것은 아직 한번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시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독일민주주의 공화국(동독) 산(産)’ 이라고 말할 때 바로 이것을 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이 나라를 향해 길을 떠납시다.54)


“인민소유”, 즉 사회주의의 기본 바탕에 민주주의의 원칙들을 결부시켜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를 세우려는 계획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연결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 계획에 동참하여 주도적 역할을 해야할 동독 국민들이 등을 돌림으로써 개혁사회주의자들의 꿈은 좌절하고 만다. 1990년 3월의 동독지역 자유 총선에서 동독 기민련이 승리를 거두고, 이어진 화폐통합과 공식적인 흡수통일로 동독이 멸망함으로써 참된 사회주의 이상, 즉 장벽 개방 이후 새로운 조명을 받았던 사회주의 유토피아 역시 몰락하고 만다. 이제 동독의 비판적 작가들에게는 그 어느 곳에서도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암울한 현실, 즉 디스토피아 Dystopie만이 남게 되었다.

동독의 모든 것을 폄하하고, 사회주의를 그 근본에서부터 부정하는 통일정국에서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동독의 작가들에게 통일 독일의 자본주의 사회는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이들의 눈에 비친 사회는 유토피아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세계일 따름이다. 디스토피아의 현실을 1991년에 발표한 폴커 브라운의 시 「나의 테러지구」는 잘 보여준다.


나의 테러지구


오늘날 독일은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내일이면

임시직 일, 기업연합 품프와 라우흐함머는 파산하고

스킨헤드들: 분위기가 마치 국민축제

같다 - 이 검둥이 새끼들아

호이어스베르다가 어디에 있지? 가장 암울한 세상

레싱은 이마가 짓밟혀 하수구속에 쳐박혀 있고

선생은 옷을 잡아찢는 한 떼의 학생들에 둘러싸여 시장터에

나는 사십년 동안 가르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얼굴엔 투구를 손에는 플라스틱 유리방패를 들고

내 독자들 앞에서 최루탄 가스를 맡고 있다55)


시 제목 「나의 테러지구 Mein Terrotorium」는 얼핏 보면 「영토 Territorium」로 읽기가 쉽다. 이 단어는 그러나 브라운이 “테러 Terror”와 “지역, 영토 Territorium”를 합쳐 만든 신조어이다. “테러가 횡행하는 땅”이나 “테러 공화국”의 의미를 지닌 시의 제목에서 이미 브라운이 통일된 독일사회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가 분명히 드러난다. 통일이후의 독일 사회는 온통 실업과 테러와 가치혼란으로 가득 차있다.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고 임시직 일로 연명하며, 동독 경제의 기반이던 기업연합인 품프 Pump와 라우흐함머 Lauchhammer는 파산해 버렸다. 구동독 지역의 도시 호이어스베르다에서는 1991년 여름에 극우파가 외국인 추방을 외치며 이 도시에 있던 망명자 숙소에 방화하여 여러 사람이 숨졌다.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시적 자아에게 세계는 “가장 암울한 세상 finsterste Welt”으로 여겨진다. 이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문학을 헌신짝처럼 팽개쳐 버리고, 물질의 유혹과 맹목적 쇼비니즘에 빠져버렸다. 사회주의 40년 동안의 모든 노력이 모두 무위로 돌아가 오로지 벌거벗은 폭력만이 남은 시장터에서 선생은 학생들에 둘러싸여 옷을 찢긴다. 정신적 가치의 몰락과 혼란을 경험하는 선생은 “나는 사십 년 동안 가르친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자조에 찬 회한의 독백을 내뱉는다. 40년이란 물론 동독이 건국하여 망할 때까지 존속했던 기간을 말한다. 이 표현은 또한 그 동안 국민을 사회주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교육시키려 했던 모든 노력이 헛수고였음을 인정하는 뼈아픈 고백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작가인 시적 자아는 “투구와 방패”로 무장하고 독자들과 대치하며 최루탄까지도 불사한다. 이러한 대립은 한편으로는 작가와 독자사이의 대화 가능성이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한 비판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폭력을 거침없이 행사하며 정신적인 가치들을 헌신짝처럼 내던진 독자들에 대한 선전포고로 읽을 수 있다. 이제 시적 자아는 모든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리고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되고 버림받아 외로이 홀로 서서 세상과 대립관계에 놓여있다. 그래서 이 시에는 아무런 출구나 해결방안이 보이지 않고 현실에 대한 우울한 비판과 절망이 주조를 이룬다.

통일이후의 독일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절망은 동독 출신 작가들의 작품에서 공통으로 발견된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리고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되고 버림받아 홀로 외롭게 세상과 대립관계에 놓여있는 상황이 주조를 이룬다. 크리스토프 하인의 ꡔ란도 Randowꡕ, 헬가 쾨니히스도르프의 ꡔ아프리카 바로 옆에서 Gleich neben Afrikaꡕ, 크리스타 볼프의 ꡔ메데아 Medeaꡕ 모두 버림받고 출구를 찾지 못한채 절망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메데아의 마지막 독백이 그 상황을 잘 말해준다. “내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들을 저주하는 것. 너희들 모두를 저주하는 것. [...]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내게 맞는 세계와 시대를 생각할 수 있을까. 그걸 물어볼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것이 대답이다.”56)


이들 옛 동독작가들의 작품 속에 주도적으로 표현된 절망과 비판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은 곧 그러한 문제점이 없는 사회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 소망은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유토피아의 모습을 띠고 나타나지 않는다. 이들이 오랫동안 간직해왔던 참된 사회주의라는 유토피아에 대한 꿈이 산산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돌아보는 현실은 암울한데 그렇다고 미래의 좋은 세상에 대한 꿈을 더 이상 꿀 수가 없다. 이들에게는 현재의 연장선이 될 미래는 유토피아의 반대인 디스토피아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많은 작가들의 작품에 유토피아의 희망 대신 디스토피아가 그려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부정과 비판을 통해 절망을 드러내는 것은 결국은 그렇지 않은 사회에 대한 소망을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런 점에서 비록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사라졌지만 모두가 잘사는 세상인 유토피아에 대한 염원은 동독출신 작가들의 가슴에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


유토피아 문학은 비록 그 본질은 같더라도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형상과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 결론까지도 다르게 나타난다. 유토피아 문학은 한편으로는 현재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하여 미래의 더 나은 사회를 그리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도피적 성격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유토피아상은 내적인 부정적 성격 때문에 안티 유토피아로 발전하고, 나아가 디스토피아를 나타내는 다른 형상의 유토피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유토피아는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표현하는 포괄적 개념으로 존재한다.

계몽주의 시대 독일과 프랑스 문학에 나타나는 유토피아의 주된 관심은 더 나은 사회의 건설이었다. 따라서 이성이나 합리주의와 같은 계몽주의의 가치관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슈나벨의『펠젠부르크섬』과 볼테르의『캉디드』는 계몽주의 시대 유토피아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토피아가 반드시 사회적 낙원을 제시하는 공간적 유토피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공간적 유토피아의 전제조건으로서 개인적 자아의 완성이라는 주체의 유토피아의 모습도 유토피아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개개 자아의 완성은 그 자체 내에서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괴테의『빌헬름 마이스터의 방랑시대』의 경우에서와 같이 개인적 교양이 사회와의 조화를 이루는 자아의 완성의 길을 걷기도 하고 프리드리히 슐레겔의『루친데』에서의 경우와 같이 사회의 가치관과는 다른 순전히 개개인의 인격도야와 자아완성에 역점을 두는 개체적 유토피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양자는 모두 독일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시대적 가치관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유토피아는 종종 디스토피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현대 산업기술문명이 많은 문제점을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암울한 디스토피아가 되었다. 그러나 서구문명의 문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유토피아를 세우려는 노력 역시 서구문학에 활발히 등장하였다. 트루니에의 ꡔ방드르디ꡕ와 크리스타 볼프의 ꡔ카산드라ꡕ에는 서구의 기술문명을 비판하며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체계와 질서를 지닌 새로운 대안세계의 가능성이 제시됨으로써 현대에도 유토피아에 대한 꿈이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크리스타 볼프를 위시한 동독 작가들의 경우 동독의 몰락과 함께 참된 사회주의 이상 자체가 사라짐으로 해서 유토피아가 디스토피아로 변모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서구 문학에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서로 맞물리면서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는 결국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제 현상이 시대정신의 반영임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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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Utopie und Dystopie als Widerspiegelung des Zeitgeistes


Kim, Yong-Min․Yoon, Tae-Won․Song, Gee-Yeon


Die Literatur der Utopie hat in den verschiedenen Epochen unterschiedliche Formen, Charaktere, Gegenstände und Schlußfolgerungen hervorgebracht, obwohl das Wesen der Utopie gleich ist. Das Bild der Utopie repräsentiert sich manchmal als die zukünftige neue Welt mit einer konstruktiven Kritik, manchmal als ein Fluchtort aus der Wirklichkeit. Dieses Bild entwickelt sich auch mal wegen des inneren negativen Charakters zur Anti-Utopie und weiter zu einer anderen Utopie, die eine Dystopie enthält. Jedenfalls ist Utopie ein umfassender Begriff, der im positiven und auch gleichzeitig negativen Sinne die Gegenwart und die Zukunft ausdrückt.

Im Zeitalter der Aufklärung wird der Hauptakzent der Utopie auf die bessere Gesellschaft und Zukunft gelegt, in der das gemeinsame Gute verwirklicht wird. Deswegen wird die Mangel an aufklärerischen Werten in der Gesellschaft, z. B. wie Vernunft und Rationalismus, kritisiert und das Konstrukt einer neuen Welt dargestellt. In diesem Sinne stellenInsel Felsenburgvon J.G. Schnabel undCandide ou ㅣ’optimismevon Voltaire typische Beispiele der aufklärerischen Utopie dar. Utopie zeigt sich jedoch nicht nur in der gesellschaftlichen Raum-Utopie, sondern auch in der Vollendung des Subjekts, die als die Voraussetzung der Raum-Utopie verstanden wird. Die Vollendung der Subjekts bezieht sich auf verschiedenen Formen. Einerseits greift sie die klassische Vorstellung einer Harmonie des Ichs mit der Gesellschaft wie inWilhelm Meisters Lehrjahrevon Goethe auf und andererseits die romantische Idee der menschlichen Vollendung und Selbstperfektibilität des einzelnen Ichs, wie sie sich inLucindevon Friedrich Schlegel finden. Utopie kann auch ideologisch interpretiert werden. Die DDR-Literatur setzt den wahren Sozialismus als das Paradies der Menschheit voraus. Der Glaube an die Utopie des wahren Sozialismus dauert bis zum Sturz der DDR. Aber der utopische Charakter in den Werken der ehemaligen DDR-Schriftsteller verwandelt sich nach der deutschen Einheit zur Dystopie, in der der Traum der sozialistischen Utopie verlorengegangen ist. Mit Hilfe dieser Beispiele kann man zeigen, wie Utopie und Dystopie den Zeitgeist widerspiegeln.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핵심어: 유토피아(Utopie), 디스토피아(Dystopie), 시대정신(Zeitgeist)

필자 E-mail : kimym@yonsei.ac.kr

논문투고일 : 2001.10.11. / 심사일 : 2001.10.31. / 심사완료일 : 2001.11.26.



출처: https://lectio.tistory.com/1087?category=272960 [Lectio Div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