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상급개념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 박 장 덕
지도 김지철 교수
목 차
I. 서론 ------ 6
II. 본론 ------ 10
1.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 ------ 10
(1) 유대교의 하나님 나라 이해 ------ 10
(2)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 11
(3) 하나님 나라의 중심개념- 통치인가, 영역인가 ------ 14
2. 하나님 나라의 상급개념 ------ 17
(1) 로마와 헬라세계에 있어서 상급개념 ------ 17
(2) 구약에서 상급개념 ------ 23
(3) 후기 유대교에서의 상급개념 ------ 29
(4) 복음서에 있어서 상급개념 ------ 31
3.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난 상급개념의 주석적 고찰 ------ 36
(1) 상급을 나타내는 어휘들 ------ 36
(2) 상급의 차등 ------ 39
(3) 상급의 내용 ------ 71
(4) 상급의 동기 ------ 83
(5) 상급과 신앙과의 관계 ------ 87
III. 결론 ------ 90
I. 서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한 모든 사역(Work)과 인격(Person)에 대하여 사역에 중심을 둔 신앙이 있고, 그리고 인격을 강조하는 신앙이 있다. 전자의 신앙은 신앙생활함에 있어서 일을 강조하게 되고, 후자의 경우는 사람에게 강조점을 두는 신앙이라고 볼 수 있다.
먼저 사역에 중심을 두어, 일을 강조하게 되면 일을 함으로써 그 일에 대하여 지치게되고 일의 결과인 땀을 흘리게 된다. 그래서 그 일이 힘들고 지치게되어 일하지 못하게 될 때 제시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상급이다. 지금 힘들고 땀이 나고 어렵지만 참고 견디어 내게되면 천국에서 지금 일한 것이 충분한 보상으로 주어진다고 하여 다시 힘을 얻는 근거와 다시 일할 수 있는 동기로써 “천국상급”이 동원되기도 한다.
그리고 죄성을 가진 인간은 일한 대가를 ,그리고 땀흘린 만큼 보상을 받아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인과응보의 법칙과 가치관에 지배를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땀의 대가나 공로의 결과인 보상이 천국에서 주어지는 것을 이 땅에서 증명을 해야되는데, 그 증명 요구가 바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일한 것에 대하여 자랑하게 되고 또 땀흘린 대가를 인정해 달라는 요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을 이만큼 했다는 것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받기를 원하고, 인정받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의 뜻대로, 기대한 대로 이루지면 계속 일할 힘과 근거를 가지지만,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응분의 대가가 지불되지 않으면 일을 중단하거나 아니면 문제를 일으키고 답답해하고 갈등하게 되는 것이다. 소위 간증이라는 것이 모두 이런 류이다. 교회에 얼마만큼의 헌금을 했는데 하나님이 그 헌금의 수천배 이상을 보상해 주었다. 일천번의 기도회에 참석하고 제물(헌금)을 일천번 내었는데 자식이 대학에 합격하고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다. 이런 종류의 간증이 판을 치게 되니 이런 간증이 없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것으로 취급하기에 이런 간증 만들기 위하여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혈안이 되어 있는가? 현재 여기 저기서 봇물터지듯이 일어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윤리. 도덕적문제가 모두 일을 강조한 신앙의 결과라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또 일을 강조하는 신앙1)은 이 땅에서 단번에 행한 신앙의 행위(?)에 대하여 그에 상응하는 물질적인 보상이 천국에서 차등으로 주어진다고 한다.2) 이런 신앙의 형태가 결과 지상주의 신앙을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예배당을 지으면서 불의와 불법을 행해도 괜찮고, 그리고 교인이 죽어가도 예배당만 지으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또 교회의 좌석이 많이 있기에 하나님이 채워주어 성장한다라는 이상한 논리에 따라 과정과 내용을 무시하는 신앙을 양산하게 되었다.
이것을 과연 성경에 기초한 신앙이라고 볼 수가 있는가? 이것이 기독교 신앙인가?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에 근거하여 우리의 신앙생활도 예수님의 기적사역(특히 치유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일”하기에 열심이다. 물론 예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의 공생애때 행하신 모든 치유사역들은 역사적 사실이다. 분명히 예수님에 의하여 치유함을 받은 사람들은 전인적 치유와 함께 구원이 임하였고 삶의 질의 향상과 삶의 일상성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지금도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임한다3)고 인정한다손치더라도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그 특정사역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다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사역의 행적들을 다 기록한 것을 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21:15) 그러므로 치유의 사건, 사역들은 그 기적의 사건 자체만이 목적이 아니라 이 기적의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의미하고 나타내고 있는가?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가르치시고자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내용은 무엇인가? 물론 그 치유의 대상에게는 전인적인 치유와 회복의 삶이 일어났지만 그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즉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가에 초점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은 인격/가르침을 떠나서 독자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없으며,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과 인격을 조화하는 신앙, 인격과 사역을 통전적으로 함께 묶는 신앙이 필요하다. 그러면 어떻게 인격과 사역을 통합하는 신앙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인격을 위한 사역이다. 일을 위하여 사람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일을 동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과 의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이 동원 되도록 해야 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어져가는 중에 하나님의 일이 열매로 나타나도록 하는 것에 신앙의 방향과 원리를 두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인격과 사역을 함께 조화하는 통전적 신앙을 위하여) 우선 하나님 나라의 상급의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요청된다. 하나님 나라의 상급에 대한 바른 이해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사역과 인격을 잘 조화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그릇된 신앙관을 바로 잡을 수가 있으며 기독교 신앙의 올바른 이해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먼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오는 오해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보고,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상급에 대하여 헬라와 로마세계, 그리고 구약과 후기 유대교에서 하나님 나라의 상급개념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상급개념과의 차이점과 어떤 관계성을 가지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의 차등성과 내용, 동기 그리고 신앙과 상급과의 관계에 대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II. 본론
1.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
(1) 유대교의 하나님 나라 이해
1) 유대묵시문학에서 하나님 나라 이해
유대묵시문학에서 “하나님 나라”는 표준적인 용어는 아니었지만4) 하나님 나라가 중심사상이었다. 최후의 심판을 이 세상에서 악한 세력의 패배로 인한 멸망으로 표현하고 있고, 더불어 하나님의 오심으로 인하여 의로운 자들(이스라엘)이 행복해진다라고 나타내고 있다. 이스라엘이 행복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인 것이다. 이는 죄인들에게는 고통의 심판이 임하고, 의인들에게는 기쁨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분/메시야/영원하신 하나님/이 나타나 모든 악을 멸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이 소망이 마지막 심판 날에 성취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날의 심판은 세상 안에서의 하나님 나라와 영화롭게 된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 나라 사이의 긴장을 결합하는 날5)로 이해하고 있다.
2) 바리새파-랍비적 유대교에서 하나님 나라 이해
유대교에서는 이방의 통치(로마의 식민지 통치)라는 역사적 현실로부터 해방시켜 줄 메시야적 왕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주요 사상이었다.6) 그렇다고 이들이 민족의 독립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들이 로마의 통치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종교적인 염원이 되기도 한 것이었다. 이 종교적인 염원에는 자신들이 지켜오던 종교적인 전통을 지키는 것이었다.7) 그리하여 로마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는 현실적인 문제이든지, 아니면 자기들의 종교적 전통을 지키기 위한 문제이든지 하나님 나라 사상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방의 통치로부터 하나님의 통치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는 것이었다.8)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통치가 신속하게 임할 역사의 발전을 기대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주요 사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하나님 나라 사상은 이방의 통치라는 현재의 역사의 현실을 보다 중요하게 여기므로 마지막 날에 대한 심판 즉 유대묵시문학만큼 종말론적이지는 못했다.
그러면 예수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를 했는가? 복음서에는 하나님 나라의 이중적 의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이중적 의미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이다.
(2)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9)
복음서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도래할 것이라는 가르침과 현재에 이미 임했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요하네스 바이스 이래로, 알버트 슈바이츠등이 있고 20세기 와서는 루돌프 불트만이 주장한다.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도달할 것이라는 즉 미래적 종말론은 철저한 종말론/절대적 종말론/연속적 종말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미래적 종말론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유대 묵시개념에서 그 명제를 빌려와서 발전시켰다고 보고 있으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미래에 철저하게 임할 종말론적이고 초월적인 차원에서 그의 인격과 사역을 선포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따금씩 현실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마11:28,눅11:20)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나타나는 즉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관하여 말한 것은 예언자적인 열정에 잠깐 사로 잡혔기 때문이라고 보았다.10)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속에 이미 현재에 실현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은 돕쉬츠를 시작으로 다드11)가 대표적으로 주장한다.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도래했다는 즉 현재적 종말론/실현된 종말론은 대부분 앵글로 색슨계열의 학자들이 주장하는데, 불트만이 주석학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하나도 인정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도래에 관한 말씀들을 하나도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에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에 관한 말씀이 나타나는 것은 현재의 종말론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의도일 뿐이라고 한다.12)
그러나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미래적이면서도, 현재적인 종말론의 성격을 띠고 있는 이원론적인 구조13)를 가지고 있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아직 임하지 안했다. 그리고 그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 속한 모든 공동체가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14)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부분적으로 임한 것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에 들어가야 할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 현재의 땅에서 부분적으로 임한 증거가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이미 나타났다. 여기서 예수님의 사역이란 치유사역을 의미한다. 김지철은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하나님 나라의 문맥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며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성취를 위한 구체적인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치유사역에 나타났으며 하나님의 구원이 지금 역사의 현장에 들어오게 한 것이 예수님의 치유사역이라고 한다.15) 이 치유의 사역이 바로 기적이 되는 것이다. 성서에 말하는 기적16)은 어떤 비상한 사건으로써 비상한 하나님의 행동이며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이다. 어떤 특정한 하나님의 행동들이 역사에 신기로움과 경이로움을 일으키는 것17)는 것이 성서에서 말하는 기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역사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예수님의 치유사역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지금 하나님의 통치가 부분적으로 임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은 지금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들이 완성을 이루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직접적인 통치를 받는 것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부분적으로 알고,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나,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볼 것이며, 주님이 나를 온전히 안 것과 같이 온전히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고전13:11-12)
(3) 하나님의 나라의 중심개념 - 통치인가, 영역인가
복음서에는 하나님 나라(basileiva)라는 단어가 모두 63회18)가 나온다. 이 basileiva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hk;WlM'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단어(basileiva이든지, hk;WlM'이든지)의 중심적인 의미를 영역이라는 유형의 구체적인 의미보다는 무형의 추상적이고 역동적인 의미인 지배. 다스림. 통치라는 개념으로 이해해왔다. 그리고 존 브라이트는 신. 구약성서를 묶어주는 띠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역동적 개념이다라고 한다.18)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통치라는 한가지 의미로만 해석하게 될 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편향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여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통일성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의 통일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4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고 G. E. Ladd는 말하고 있다.19)
첫째로 하나님 나라가 통치, 지배의 추상적인 개념과 의미를 나타내는 구절들이 있다.(눅19:12,15; 23:42, 요18:36),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 나라를 의로운 자가 들어갈 미래 묵시적 질서로 보는 구절들이 있다.(막9:47;10:23-25;14:25/마8:11/눅13:28), 세 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인간들 중 현존하는 어떤 것이라고 하는 구절들이 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지금 인간들이 찾아야 하고 받아야 하는 어떤 것이다. 찾아야 하는 것은 마6:33,눅12:31에 나오고, 받아야 하는 것은 마11:12,눅12:28에 나오는 것들이다. 네 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지금 들어가고 있는 현재 영역이나 범위이다라고 말하는 구절들이 있다.(마11:11,눅16:16,마21:31;23:13)
여기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왕권을 나누어 받아 다스리도록 임명받는 자들 중에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과거 옛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상속받았듯이 새 이스라엘도 땅을 상속받아 그곳에서 하나님의 왕권을 받아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20).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중심개념이 통치인가, 아니면 영역인가? 그리고 묵시적 질서인가 아니면 세상에서 활동하는 현존하는 능력인가? 이 중에 어느 한가지만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이들 사이에는 어떤 요소가 있으면 어떤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는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권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미치는 범위가 주어지는 영역21)을 포함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통치권이 없는 영역으로만 정의하게 되면 “나라”가 누구의 나라인지, 나라가 누구에게 속한 것인지 규정이 불가능하다. 그 나라에 대한 정체성이 불분명해 지는 것이다. 그 나라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불명확해진다. 그리고 영역 없는 통치권으로만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게 되면 점진적 역사 발전에 의하여 최종의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으로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결국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세상의 종말을 말하는 예수님의 말씀의 많은 부분을 배제하는 것이 된다.(마11:11,눅16:16,마21:31;23:13)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원과 구속의 영역이라는 것이 제외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이 세상이라는 영역에서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부분적으로 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통치는 이 세상의 가치관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변하며, 구 질서에 속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족의 공동체라는 새 질서에로의 초청에 응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부분적 통치는 미래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여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이 된다.22)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은 불가분의 연속성을 가지게 된다. 또 지금 이 세상에서 부분적으로 세상의 가치관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 변하고,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라는 새 질서에 참여하는 것 역시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있음을 증거 하는 것이 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의 표시로 새질서에로 초청, 하나님의 통치가 역동적으로 임하는 것도 종말에 이루어질 새 땅과 새 하늘에서 안식으로써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며,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라는 새 질서에로의 초청이 완성되는 미래의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2. 하나님 나라와 상급개념
(1) 헬라와 로마세계에 있어서 상급개념
1) 헬라의 윤리학에서 상급 개념
헬라의 윤리학에서는 선행과 행복이 필수적으로 일치한다고 가르친다. 도덕적으로 선한 행동이 전 삶의 행복에 기여하여 행복이 최고의 선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최고의 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으며, 언제나 보다 나은 삶에 최고의 관심을 가졌다.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행복은 영혼과 육체의 조화이고, 자기 자신이 이 사실을 아는데 있다. 이것이 헬라 윤리인데 도덕성이 이 땅에서 상급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여겼다. 이 조화는 행복의 핵심에 속하며 이 세상에서 성취될 수가 있다고 한다. 올바른 왕은 땅의 부요함과 백성의 풍성함과 함께 이러한 행복을 누리며, 신들은 이를 촉진시키고 지식은 행복으로 가는 길을 안내한다. 악한 행위는 광란이나 번개. 질병 등에 의해 징벌을 받는다. 선행은 이 땅에서도 상급 되어 지는데 그 내용은 그들의 정직과 의로움이다. 행복한 사람은 선한 생각(정직과 의로움)을 가짐으로써 높은 수준의 진리와 지혜를 가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서 현재 시간에서 받는 상급의 개념은 미래의 상급이나 징벌에 대한 신앙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진정한 선은 그 자체만을 위해 추구된다. 행복은 도덕의 실천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다.23) 오직 선행은 그 자체로써 상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헬라 윤리학에서는 현재이든지, 미래이든지 상급의 기대나 징벌의 두려움에 대하여 개의치 않는다.
2) 헬라와 로마세계의 철학에서 상급개념
헬라와 로마의 철학세계에 있어서는 성서적인 상급 개념의 부재 되어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상급의 사상 즉 상급을 위해 선을 행한다는 사상을 거부한다는 면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가르침은 신약과 구약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볼 수가 있다24). 플라톤도 상급에 대해서 언급하기는 하나 이는 다만 헬라 철학의 내재적 존재 법칙의 노선에서 언급하는 것이지 동기적 맥락에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플라톤은 오르퓨스(Orpheus)25)의 정의에 대한 상급이나 사악한 행위에 대한 징벌을 거부한다. 그는 상급의 개념으로부터 도덕적 행위의 가치와 본성적으로 행하는 것을 신중히 구분했다. 도덕적 행위의 가치로서의 상급은 도덕적 행위가 어떤 것인가하는 지식을 알게 될 때 선행을 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도덕적 행위은 상급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 있어서도 역시 선에 대한 지식이 도덕을 행하게 하는 참된 동기가 된다고 한다. 선에 대한 생각이 변화되는 것은 신의 강제와 명령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인 것이라고 여겼다.26)
그러므로 헬라 로마세계의 철학도 마찬가지로 미래의 상급 사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의 선행 자체가 최고의 선이 되는 것이며, 인간이 선행을 통하여 도덕적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선행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 데 이 지식에 의하여 선행이 나타나게 될 때 이것이 상급이 되는 것이다.
3)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상급 개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성이 행복에 대한 내재적인 욕구에 의해 뒷받침 받으면서 영혼을 덕으로 이끈다고 믿는다. 스토아주의에서는 도덕성이란 우주법칙으로서 신에 대한 순종이다. 편재하시는 신은 모든 것을 보시지만 행복은 덕 안에 존재하며 덕과 악덕 이외의 상급이니 징벌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이 도덕에 의해 존재하기에 도덕적으로 향상된 생활이 행복으로 이끈다고 한다. 죄에 대한 징벌과 선에 대한 상급은 도덕과 죄밖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이다. 도덕과 죄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유일한 상급은 이 세상의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며 그 외의 상급은 없다고 본다.27)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의 본성에 존재하는 도덕성을 개발해야 되는데 왜냐하면 이 도덕성이 최고의 목표가 되는 행복으로 이끄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4) 밀의 종교에 있어서 상급개념
밀의 종교들은 미래의 삶과 상급을 지향한다. 영원한 구원의 제의에 참여함으로써 상급이 보장되는 것으로 보았다. 영원한 미래에 대한 구원은 농업의 신인 어머니(Demeter)와 딸의 신비스러운 희생의 제의에 참가함으로써 얻어진다고 생각했다. 또 이들은 초기에는 오르퓨스의 정의에 대한 상급과 사악한 행위에 대한 징벌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오르퓨스 집단에서는 하나의 시험으로써 금욕 생활이 요구되었지만 이들에게 있어서는 신의 제의에 참여함으로써 하늘의 상급과 영원한 고통이 주어지는데, 오직 최후의 심판으로 인하여 하늘의 상급과 영원한 고통이 결정된다고 믿었다.28)
5) 헬레니즘의 종교들에서 상급개념
헬레니즘 종교에서는 미래의 상급을 상당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사후세계에 대해 크나큰 관심을 보였다. 선행이 많았느냐 악행이 많았느냐에 따라 영혼의 운명이 결정된다. 선행보다 악행이 많은 사람은 지하세계에 삼킨바 되어 육체와 영혼이 파멸에 이르게 되어 더 이상 살지 못할 것이며, 악을 행한 행위보다도 선을 행한 행위가 더 많으면 그 영혼은 지하세계의 거룩한 심판관에 의하여 그의 영혼은 하늘 나라의 영광스러운 축복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유사하게 미트라교29)에서도 죄보다 공력이 많은 자들은 안전하게 하늘의 빛날 영역에까지 옮겨진다고 여겨졌다.30)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서 상급은 미래의 영원한 삶이 되는 것이다. 미래에 영혼들의 영광스러운 삶을 위하여 이 땅에서 선행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6) 로마종교에서의 상급개념
로마종교에서는 다른 종교에서와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신들과 인간 사이에 계약적 관계를 많이 담고 있다는 것이다. 희생의 의미에서 상급의 개념을 이끌어 낸다. 거기서는 신들의 도우심에 대한 보답으로써 맹세와 제의가 행해진다. 제의를 드릴 때 예배 자들은 신에게 자기들이 드린 선물을 상기시키면서 그 대가로 자기들이 소원이 상달되기를 기대한다. 기도하는 것이 허락된다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선행에 대한 상급이기도 한 것이다.31)
그리고 헬라 로마의 세계에 있어서는 상급으로서 죽음을 생각했다. 고대에서 신에 의한 최고의 인정은 신에게로 들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 죽은 것은 하나의 상급으로 여겨졌다. 죽음은 또한 신비적 환상을 통한 신격화를 수반할 수도 있는데 신비적 환상은 하늘여행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가 사는 한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자유로와 질 수 없게 하는 외적인 의복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 육체라는 의복을 벗어나는 것이 죽음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육체를 벗어버리고 나면 영혼이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죽음은 아름답고 즐거운 것이며 심지어는 죽음이 찬양되기도 했던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육신의 세계를 사랑하는 자이며, 육신의 세계에 속하게 되면 감각의 세계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32)
이상과 같이 로마와 헬라세계에 있어서 상급개념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종합적으로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가 있는데 그것은 이 땅에서 최고의 선으로 행복이 하나의 상급이 되고, 그리고 미래의 영원한 영혼들의 축복스러운 삶을 상급으로 기대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 땅에서 행복한 삶이든지, 미래의 영혼의 축복된 삶이든지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선행이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 인간의 선행에는 도덕적 행위와 신의 제의에 참여하는 것과 신과의 계약을 지키는 것이 다 포함된다.
결국 이들의 상급개념은 철저한 인간중심적 세계관에서 기인한 것이다. 인간이 이 땅에서 행복한 유토피아 건설을 위하여 그리고 영혼들의 영원한 복락을 위하여 선행 자체가 동원되기도 하고 이를 위한 안내자로 지식을 제시되기도 하고 그리고 신이 동원되기도 하는 것이다.
(2) 구약에서 상급 개념
구약성서에서는 상급을 나타내는 단어인 “reward”라는 단어는 악/선에 대한 상급이라는 중립적 의미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호의적인 상급이나 유익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1) 상급에 대한 기원
상급에 대한 기원을 살펴보면, 상급에 대한 구약의 믿음은 매우 오랜 것인데 이 믿음은 아마 선행은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고 악행은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이 사상은 초기의 구약 성서에 전제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사상의 시작을 나타내는 고대의 견해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구약 성서에 있어서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엄격한 의미의 선행은 행복을 가져오고 악행은 불행을 가져오는 그런 상급 개념의 형태를 부여하였다. 행위와 운명을 연결짓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이 상급 사상은 처음에는 사물의 본질에 그 기본적인 견해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이 모든 사물에 있어서 자연법칙인 것으로 보았다.33)
모든 사물의 행위의 결과는 원인과 견고하게 관련되어졌고, 씨앗을 뿌린 후에 수확을 거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급은 행위의 원인에 의해 나타나는 것으로 여겼다.34)
그러나 이 사상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여겼다. 야훼는 공평하신 하나님으로써 각 행위들에 대해 마땅한 상급과 징벌을 부여하신다. 행위와 상급, 행위와 징벌은 이스라엘에게 적절한 조화로 나타나게 되었고 또 그것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유지되게 되었던 것이다.35) 로마와 헬라세계에서 상급개념은 출발이 인간인 반면에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상급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으로 여겨진다.
2) 상급의 의미와 중요성
구약에서는 윤리적 종교적 차원에서의 상급과 상관이 있다.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은혜의 증거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이스라엘에게 주신다는 약속이었던 것이다. 불순종은 계약의 파기였고 그것은 재난과 죽음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의롭고 좋은 것에 순종하면 그들은 번성하고 땅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었다. 광야를 방황하고 있는 기간에, 지도자들과 사람들 중에서 순종에 대한 실패가 고통과 죽음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의 역사는 신실함에 대한 상급과 죄와 우상숭배에 대한 벌의 관점에서 쓰여졌다. 땅에서의 승리와 복지(welfare)는 순종에 달려있었던 것이다.(수1:7-9,삿2장) 복락을 누리는 삶은 순종과 제자도(discipline)의 기초 위에 확신되어 졌고 지혜는 번영을 누리는 삶과 동일시되었다.36)
사사기9:23-24에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으로 인하여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게 되는 것은 여룹바알의 아들들에게 행한 죄로 인해 하나님이 내리신 보응이라고 해석하는데서 나타나고 있다. 사무엘상15:2-3에서 아말렉에 대한 전쟁은, 그리하여 그 전쟁을 통하여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말렉이 애굽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에게 대적한 일로 인하여 하나님이 내리시는 천벌로 간주된다. 두 경우에 모두 하나님은 보응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과율의 법칙을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하시면서 그 법칙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에게 나타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응의 법칙을 나타내는 역사적인 모든 사건들은 서로 연결되며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잘 설명해준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들 가운데서 역사하심으로 이 사건들의 내적 정당성이 명료하게 나타나며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통치하시며 주관하신다는 것을 증명하게 하시는 것이다. 역사는 임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2:4-11:9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죄에 있다. 왜냐하면 죄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보응 사상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악행에 대해서는 징벌이 임하고, 선행에 대해서는 상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응 사상에서 주된 사상은 다만 하나님께서 악행을 징벌하시고 선행에 대해 상 주신다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은 그의 사람인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구원역사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상급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고 있다.37) 그리고 계속해서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이루가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는 인간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를 초래하는 그런 인과응보의 법칙을 극복하고 있음을 족상사의 역사를 통해 보여 주고 있다.
예언서에 나타난 상급사상을 보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모든 죄를 거부하시며 죄에 대해 진멸의 심판을 내리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민들에 대해서조차 죄를 묵과하지 않으신다(암1:3-2:16).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순종과 불순종을 통해 결정되는 인격적 관계인데, 보응은 인간의 경박한 선택관38)을 배제시킨다. 하나님의 보응은 그의 실재성을 선포하며 그가 발하시는 주장의 내용에는 조건이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조건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거절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 이스라엘은 하나의 집단이기 때문에 보응은 무엇보다도 집단적으로 내려지는데, 죄인뿐 아니라 무죄한 자들에게도 내려지고 부모뿐 아니라 자녀에게도 내려진다. 그러나 만약 이 원칙이 너무 엄격하게 적용되면 회개의 여지가 없어진다. 그리하여 선지자들은 만약 백성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도 그의 심판에 대해 회개하실(돌아서실)것이라고 선포한다.(렘18:1) 에스겔은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해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없다는 개인적인 보응에 대해서까지 그의 사상을 발전시킨다.(겔18:21) 그러나 이것은 교리적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항상 회개하는 자를 임박한 재난에서 건져내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확신에서부터 나온 주장이다.39) 여기서 회개하는 것이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이 그의 역사를 펼쳐 나감에 있어 필요하다면 인간의 회개를 통해(인간이 회개하게큼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의미) 심판을 면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실현시키고자 하실 때 인간의 회개를 이루시는 것을 말한다.
보응의 이중적 측면이 신명기에서는 응징뿐 아니라 상급의 사상도 강하게 나타난다. 신명기 28장에서 특히 상급과 징벌사상의 적극적인 면이 강조되고 있다. 즉 어떻게 심판을 피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축복을 받으며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사사기와 역대기에서 언급되는 이스라엘 역사는 이 원칙을 예증해 준다 비록 악한 므낫세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뒤늦은 회개를 보시고 그에게 장수를 허락하신다.(대하33장)40)
지혜문학인 잠언에서 보응의 이중적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잠언11:11, 11:31, 19:17). 여기서의 목표는 행복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욥기는 행복을 얻으려는 배후의 동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위험성이 있음을 보여준다.(욥1:9)41) 욥기에서는 친구들은 의인이 복지와 장수를 상급 받으며 또한 죄에 대한 보응으로 질병과 가난이 주어진다고 여겼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결백 즉 순결을 주장하고 자기에게 닥친 고난은, 의는 상급을 받고 악은 벌을 받는다라는 그 기계적인 엄격한 공식을 뛰어넘는다고 주장한다.42) 전도서가 궁극적으로 선인은 고통을 당하고 악인은 번성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라면 (8:14) 욥기는 하나님께서 상급의 원칙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43)
첫 번째 시편은 현자와 경건한 자의 복을 묘사했고 불경건한 어리석은 자의 화도 묘사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시4장과 23편에서는 이 경건한 자를 하나님 자신의 의를 위하여 그들을 하나님이 선택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편에서 경건하며, 의로워지기 위한 어떤 시도나 행위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의 주권으로 말미암아 경건한 자를 선택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자나가더라도 하나님이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편73편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하늘과 땅에서의 모든 상급을 능가하는 믿음으로 그 원칙을 완전히 초월한다. 그리고 순종이 복락을 누리는 삶으로 연결되지만 이 복락이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복은 아닌 것을 말하고 있다.(시73:4,12) 그리고 순종이 복락으로 연결되고 불경건한 삶이 화로 연결되는 기계적인 패턴도 시편기자가 용서에 대한 기도를 하게 될 때는 무너지는 것을 알 수 있다.(시103:10 그는 우리를 우리의 죄에 따라서 다루지 않고 우리의 부정을 따라서 우리를 보복하지 않으셨다)44)
인간의 노력 만으로써만 억척스럽게 성공할 수 있다는 믿는 자신만만한 인간의 사고에 대하여 “야훼의 축복만이 부요하게 만들며, 자신의 수고는 하나도 도움이 되는 것이 없다”(잠10:22)라며 하나님은 인간의 사고와 정반대 개념의 말씀을 가르치신다. 일을 하면 돈을 번다는 일반적인 기대는 야훼의 축복의 결단을 떠나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가 없다. 인간의 의지와 성취사이에도 야훼가 개입하여 차질이 생기게 하신다.(잠 16:1) “의지의 시도는 인간에게 있으나 혀의 대답은 야훼에게서 온다” 자기 힘으로 성취하겠다고 과도하게 열심을 내는 모든 행위는 냉엄한 허사를 겪게 되는 것이다.45)
잠언은 정통교리를 따르지만 그러나 잠언 기자 또는 전도서 기자는 삶은 그렇게 깔끔하며 단순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보복의 교리(순종=복, 불순종=화, 벌)가 개인의 삶의 범위 안에서 항상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의인이 고통 당하는 것과 악한 자가 번성하는 것을 보았을 때 또는 그들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의 인간의 운명을 발견했을 때 냉소적인 주의를 말했던 것이다.46)
이상과 같이 구약성서에서는 순종의 결과가 복으로 나타나고, 불순종의 결과가 화로 나타나는 인과율의 법칙이 적용됨에 있어 물질적이고, 눈에 보이는 현상계인 현실적인 것들을 제시하는 것 같이 보이나, 결국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유일한 하나님의 상급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한 영적인 의미47)가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3) 후기 유대교에서의 상급개념:
공로와 상급에 대한 후기 유대교에 있어서 바리새인들의 상급사상은 그들의 체계 안에서 그들의 로마의 식민지의 통치를 받고 있는 현재의 상황과 함께 구약성서에 있던 사상들이 함께 어울려져 발전되었다. 십계명에 상급의 약속이 주어졌고, 신명기에서는 자주 율법 실천 여부의 종교적 행위에 의하여 축복과 상급 그리고 저주와 징벌로써 갚아질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하여 그 상급사상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바리새인의 신학에서 제일 핵심 되는 개념은 하나님은 정의롭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하나님이 옳고, 그른 것을 가리고 응분의 대가를 지불할 것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가장 큰 관심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구별이며, 그 옳고 그른 행위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것이 이들의 상급 사상이 되었다.48)
바리새인에게 있어서 상급내용은 “더 나은 상태”를 의미하였다. 더 나은 상태란 현세에서 평화롭고 넉넉한 생활을 유지시키는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포함하는 것이다.
또 이들의 상급 사상에서 특이한 것은 “공로사상”이다. 하나님의 정의롭고 바른 행위는 인간의 그릇된 행위와 내용적으로 다르다. 그렇기에 인간의 공로는, 사람이 전력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의로운 행위를 힘써야 한다는 전제 아래서 행하는 자에게 이 “공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로”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을 때보다 하나님께 더 기쁨을 드릴 기회가 되는 것이다. 이 공로는 그릇된 행위를 행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행한 일이 하나님께 무슨 변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그릇된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길을 제시할 경우 순종하는 길을 택할 때 바로 거기에 공로가 생기는 것이다.49)
그리고 이들은 상급의 원칙을 채택하여 이를 종말론적 기대와 접합시킨다. 의인에게는 영생이 상급으로 약속된다. 이 세상에서도 이미 상급과 징벌이 존재하지만 죽음은 악인에게는 징벌이요 의인에게는 죄의 속량이 된다. 때때로 상급 사상이 상업적 상징들 안에 표현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대한 개념도 역시 표현되고 있다. 상급은 율법을 지키는 데 있어 강력한 동기를 제시해 준다 그러나 일부 랍비들은 율법이 가져다주는 상급보다는 율법 그 자체를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50)
그러므로 후기 유대교 사상에서 발견되어지는 바리새인들의 상급사상에는 현재적이며 물질적인 내용도 있는 반면에 묵시적이며 종말론적인 기대도 포함된다. 상급이 율법의 실천력을 자극하며 율법 준수에 대한 동기를 부여해주기도 했으나,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의 의무를 다 행하였다고 하여 보상해야 할 책임을 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보상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상급을 받는다라고 무어(G. F Moore)는 말하기도 한다.51)
(4) 복음서에 있어서 상급개념
개신교에서 이 상급 사상은 임마누엘 칸트의 의무사상의 영향으로 무시하거나 경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의 결과이라는 사상이 상급의 개념을 무시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의 공로와 업적사상에 반대의 산물이 하나님의 상급의 약속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카톨릭에서는 이 상급의 사상을 그들의 윤리관에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윤리행위의 동기로써 높이 평가하여 발전시켜 왔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카톨릭의 상급을 목적으로 한 윤리행위은 인간의 자주적인 존엄성을 유린할 뿐만 아니라 윤리행위 자체를 유린하는 것이라고 개신교신학에서주장한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상급을 내걸고 사랑을 명한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52) 그러나 공관복음서에서 이 상급의 사상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기에 이 상급사상을 제외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으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복음서에 나타난 상급 사상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이 상급의 사상이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행위를 위한 모티브로 사용되지 않았다면 어떤 의미로 예수님은 이 상급사상을 언급하였는가?
보른캄은 예수님의 상급사상을 윤리행위와 연결시킬 것이 아니라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하는 점에 눈길을 돌리고 거기서부터 상급의 약속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는 구약과 신약의 전반에 나타나는 인간의 이해를 하나님의 관계에 있다고 보고 상급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53)
첫째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고용된 일꾼이 아니라 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한 결정권을 가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종은 일꾼과 구별된다. 일꾼은 주인과의 관계에서 일이 그 관계성을 맺게 한다. 그러므로 일꾼은 주인에 대하여 일을 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다. 그래서 일이라는 의무를 다했을 때 주인과의 관계는 끝이 난다. 그러나 종은 주인과의 관계는 그렇지가 아니하다. 종의 존재는 주인이 있음으로 증명된다. 주인은 종의 생존권을 가지고 있다. 종은 주인에 대하여 그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가 없다. 주인에 대하여 다만 복종만이 있을 뿐이다. 종과 주인은 끊어질래야 끊어질 수 없는 그런 관계이다. 종은 주인과 일 자체를 매개로 관계되기 전에 존재론적으로 주인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 주인과 운명을 같이 한다. 따라서 종은 그 주인의 명령에 복종할 때에도 주인이 맡겨 준 그 일만을 기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의 내면에 담긴 주인의 전체적인 뜻을 헤아리고 거기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상급의 약속은 주인의 일방적인 자유로운 은혜인 것이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은혜의 연속이지 모순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상급의 약속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존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 이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자기 목적적인 선이나 선한 행위 자체가 자리잡을 어떠한 공간도 허락하지 않는다. 심판은 인간의 본성이나 그의 어떤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그 독자적인 가치로서 인정받는 것이 아니며 이 심판을 통하여 비로소 새로운 가치의 창조 또는 기성의 가치에 대한 부정이 된다. 심판은 하나님의 철저하며 자유로운 행위인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상급의 약속은 인간의 피조성, 제한성, 비천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에 인간에게 명령하고 약속하시는 상급 사상은 인간 존재 자체가 오직 하나님에게만 의존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른캄은 이상과 같이 하나님의 상급에 대한 약속은 카톨릭의 윤리적 행위를 위한 동기부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성과 그 하나님 앞에 존재하는 인간과의 관계성을 인간에게 확인시켜주기 위하여 상급의 약속을 제시한다고 보았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철저한 순종이라고 본 것이다.
복음서에 상급을 나타내는 말씀 중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여부에 따라 상급이 주어지며, 상급의 동기를 제시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의 위치와 자리라는 상급의 내용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에 복음서에 상급의 사상이 없다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54) 그런데 복음서 중에서도 공관복음서에서 상급사상이 강조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상급의 주제가 공관복음서보다 훨씬 적다는 것은 4:36절에 거두는 자가 삯을 받는다라고 하는 1곳밖에 나타나지 않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거두는 자가 모으는 것은 영생을 위한 열매라고 한정하고 있다. 실로 영생은 너무나도 큰 상급이어서 요한의 많은 구절을 볼 때 부차적인 다른 상급들은 미미한 것들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얻는 자들을 비판하였고(요5:44) 유일한 영광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였다.55)
공관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상급은 공간과 질에서 모든 인간의 개념을 초월한다. 그것은 천상의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땅의 시간을 초월하는 것을 말한다.(막13:31, 눅12:20, 마25:13) 그러므로 예수님은 상급에 대한 사소한 계산이나 좋고 나쁜 일에 대한 헤아림을 말하지 않는다. 또 성취와 상급사이의 상응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은혜의 선물로써 상급을 이해했는데 그 선물은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마20:1-15, 눅15:11-32) 실제로 하나님의 왕국이 상급인 것이다.(마5:3, 5:10 , 25:34)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 대한 상급인데 인간의 모든 노력에 대한 상급인 것이다. 인간은 가치 없는(눅17:7-10) 죄인이다.(눅18:10-14) 그와 같은 상급이 행위에 대한 동기가 되게 하는 것은 성서에 기초한 것이다.56)
그런 가운데서도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바랄 수 있는 상급에 전혀 구애받음이 없이 종종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부정적, 혹은 역설적인 의미에서만 상급에 대하여 언급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종종 상급이란 기대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가르치기도 했다.5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로 인하여 욕을 받고 핍박을 받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시면서 “하늘에서 너희들의 상이 크다”(마5:11-12)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의 의(구제, 기도, 금식등)를 행하지 않는 자에게도 천부께서 상을 주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6:4,6,15)
상급을 받을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으며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너희의 상이 클 것이라(눅6:35)고 말씀하신다, 선지자를 선지자로 예우하고 의인을 의인으로 영접하며, 지극히 자은 소자에게 그가 주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들 역시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마10:41-42) 이런 구절들은 분명히 상급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는 구절에서도 상급이라는 단어는 언급되지 않지만 사람이 행한 것과 그가 언젠가는 받을 것 사이에 파기 할 수 없는 상호상관이 있음을 보게 된다.(마24:45, 25:14-30, 25:31-46, 12:36-37)
그러므로 복음서에서 상급개념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데 죄사함과 반대되는 개념으로만 생각할 수가 없으며, 죄사함 때문에 상급개념이 없어져야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전체계획에 파괴적인 것이 될 것이다.58)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에는 죄를 심판하시는 방도에서 상급의 개념이 나타나며 복음 그 자체에서도 상급의 개념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에 상급의 개념이 분명히 나타나는데 이 상급이 인간의 어떤 신앙적 행위에 의하여 차별되어 주어지는가? 그리고 상급의 내용은 무엇인가? 인간의 신앙적 열심을 위하여 이 상급이 인간의 어떤 행위의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인가?에 대하여 상급의 개념들을 나타내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주석적 고찰을 함으로써 예수님이 어떤 의도와 의미로 상급에 대하여 말씀하셨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3.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난 상급 개념:주석적 고찰
(1) 상급을 나타내는 어휘들
먼저 신약성서에서는 “상급”을 나타내는 단어에는 다음과 같은 3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1) kevrdo"
이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3번 나타나고 있는데 바울서신에만 나온다. kerdaivnw는 16번 나온다.59)(마16:16, 막8:36, 눅9:25, 마25:26, 빌3:8, 고전9:19등)
이 단어는 상급을 나타내는 단어 중에 가장 광범위한 뜻을 가지고 있다. 어떤 지불의 결과를 나타내며, 손실(Loss)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60)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선생들이 그 결과로 더러운 “이익”을 취한다고 할 때(딛1:11), 집사들에게 더러운 “이득”을 취하지 말라고 할 때(딤전3:8, 참고 벧전5:2),
허망한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일정 기간 동안 장사를 하여 “이익”을 보게 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약4:13) 목숨이 천하보다도 더 귀중하며, 목숨을 잃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할 때 “유익”을 나타내기도 한다.61) (마16:26, 막8:36, 눅9:25)
2) ajpodwvsei
ajpodwvsei라는 단어가 상급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마태복음에 18회 사용되는 것, 누가복음에 12번, 바울서신에 8번등 전체 43회 가량 나온다.62) 이 단어는 구약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각 사람의 태도. 행동에 따라서 마지막 날에 그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됨을 나타낼 때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넘겨주다, 내주다(마27:58), 주다(눅4:20), 팔다(행5:8), 약속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지불하는 것(마20:8), 빚을 갚는다(마18:23), 맹세한 것을 지키다.(마5:33) 등을 나타내기도 한다. 신약성서에서 이 단어의 개념이 신약성서의 중심개념과 가장 잘 맞게 표현되어있는 구절은 마가복음 8:38절(평행; 마16:27, 눅9:26)이다.63) 그리고 이 단어의 신약성서에서의 배경은 신자이든지 불신자이든지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 책임이 있다고 보는 데 있다.(롬2:6, 고전3:15, 고후5:10) 그리고 이 단어에는 인간의 행적에 따라 상급을 지급한다는 구절들(마16:27, 딤후4:14, 계22:12)이 있지만 인간 스스로의 도덕적 행위나 가치 그리고 공적에 의하여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지는 않는다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인간의 공적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믿음에 반대되는 것이다. 인간의 행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거절된 불신자의 상태를 나타내거나 또는 그리스도께 복종된 신자가 되어 그리스도와 새로운 계약관계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된다.64)
3) misqo;;"
misqo;;", 마태복음에 10번, 바울서신에서 5번,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4번 나오는 것을 포함하여, (3번 "reward"상misqapodo;"ia), (day laborer:일일 노동자,눅15:17,19 misqio;"), (행28:30 misqwma), (rewarder:상주는 이, 히11:6 misqapodotoh;"),(롬1:27, 고후6:13 anmisqia), (hire:고용하다, 마20:1,7 misqoomai), (막1:20,요10:12 misqwtos;") 등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단어군에서 그 단어들의 전체 등장의 43번 중 16번(모두 바울서신 밖에 나오는데)은 즉각적인 신학적인 의미는 가지지 않는다 나머지 가운데 12번은 공관복음의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나오고 7번은 바울서신에 나온다.65)
misqo;;"(문자 그대로 의미로 pay의 의미)는 우선 일일 노동자의 임금 또는 고용된 일군의 임금(마20:8, 참고 눅15:15-21, 요10:21f) 을 의미한다. 이것은 70인역에서 군인의 임금(급료 겔29:18)에 상응하는 용어에 사용되고 레위인의 차지할 부분(민18:31) 그리고 제사장의 차지할 부분(미3:11) 노동자의 임금(출2:9, 신15:18)에 상응하여 사용된다.66)
이것은 모든 노동자(막1:20)가 받을 그의 임금(눅10:7, 딤전5:18) 가치를 나타내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신약성서는 노동자의 임금을 억제하는(held back) 착취자들을 강하게 비난한다.(약5:4) 유11(참고: 벧후2:13,15)은 부정의 상급(reward of unrighteousness)을 말하는데 그것은 죄를 통해 얻어진 물건(goods)으로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참고: 눅16:9, 행1:18), 이것은 잘못된 가르침의 물질적 상급을 의미하는 것이다. (벧후2:3, 딛1:11) 요4:36은 선교사역의 결과를 기술하기 위한 숫적의미(fig. sense)의 상급으로 사용된다. 유사한 숫적 의미의 사용은 바울서신(고전9:18-3)에서 발견된다. 히10:35에 따르면 약속된 것들이 상급으로써 주어졌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개인적 상급의 바램에 대한 이미지는 신앙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기질에서 강하게 보여졌다. 그 상급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유익에 속하는 것이었다. 자유롭게 여겨지는 하나님과의 교제는 신앙의 상급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빛나는 약속과 성취에 대한 지향인 것이다.67)
또 예수님의 말씀에 있어서 misqo;;"는 보복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삽입되어 있다. 그리고 상급개념은 구약과 유대교의 가르침으로부터 기인되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misqo;;"는 막9:41/마10:42, 마5:12/눅6:23, 마5:46, 마6:1, 6:5, 6:16 , 10:41, 42, 마20:8, 눅6:35, 눅10:7에서 발견된다. 예수님은 종종 땅의 사건에서 상급을 인정했는데(막2:5, 눅13:1-5,눅19:31-44) 비록 이것이 모든 이해를 대신 할 수 있을지라도(눅17:29),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완전하게 발생할지라도 그것을 인정했다.68)
그러나 kevrdo", ajpodwvsei, misqo;;"라는 단어들이 비록 개별적으로든지 아니면 단어간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또 한 단어에 이중적이고, 단어간에 일치되지 않는 의미들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이것은 서로 배타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단어들이 문맥상으로, 그리고 그 문장에서의 표현상 서로 혼용되어 보이는 것은 이해를 위한 표현의 다양한 형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상급의 차등
1)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니라
caivrete kai; ajgallia'sqe, o{ti oJ misqo;" uJmw'n polu;" ejn toi'" oujranoi'": ou{tw" ga;r ejdivwxan tou;" profhvta" tou;" pro; uJmw'n.
여기서 misqo;" polu;"는 다음 네 가지 측면에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의 차등을 보여주고 있다고 권성수는 지적한다. 1)구약의 병행구(창15:1), 2) polu;" misqo;"에 대한 원 청중의 이해, 3)인간의 신실성(핍박)과 하나님의 상급과의 상호 관계, 4) 제자들과 선지자들의 당한 일의 동등성이다.69)
먼저 마5:12의 oJ misqo;" uJmw'n polu;" ejn toi'" oujranoi'":에 가장 가까운 구약 병행구는 창15:1절이다. 거기서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daom] hBer]h' *r]k;c] &l; @gEm; ykinOa; 라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은 “ 나는 너에게 방패이다 너의 상급은 매우 클 것이다.”라고 번역이 가능하다고 한다. 여기서 큰 상급은 무엇보다 무수한 후손의 의미로 이해할 수가 있으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즉각적인 반응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다(창15:2)” 이 반응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구체적인 무엇(후손)과 관련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라고 한다.(창15:4-5)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약속대로(창12:1-3)후손을 선물로 주실 뿐 아니라 또한 아브라함의 언약적 신실성에 대한 상급으로 그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70) 그러므로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구체적인 신실성이 나타나게 될 때 하나님의 그의 대한 대가로 자손이라는 상급을 주신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5:12절의 misqo;"도 창15:1절의 근접 병행구절로서 상급이 구체적인 무엇으로 이해해야 되는 것이 합당하다라고 한다. 이 상급이 앞에 나온 천국을 소유한다는 의미에서의 차별이 없는 상급의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신실한 순종의 여부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는 차등상급을 가르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예수님께서 핍박을 받는 자들에게 상급의 소망을 품도록 격려하신 것이다. 핍박받는 자를 위로하기 위해서는 핍박받는 자에게 정도에 따라 상급이 차등으로 주어진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71)
그러나 마5:12절과 병행구라고 볼 수 있는 창15:1절 .daom] hBer]h' *r]k;c] &l; @gEm; ykinOa; 나는 너의 방패이다 나는 너의 큰 상급이다.72) 라고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큰상을 줄 것이다. 라고 해석하여 차등상급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게될 경우에는, 차등상급에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원인이 되는 내용이 나와있어야 하는데 그 상급의 원인이 1절에 나와있지 않다. 그리고 “나는 너의 방패이다”와 “나는 너의 큰 상급이다” 이렇게 연결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내가 너에게 큰 상급을 줄 것이다” 이렇게 번역될 경우에는 앞의 내용이 “나는 너에게 방패를 줄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 연결이 자연스럽다.
방패는 전쟁에 사용되는 기구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상을 얻는다. 그런데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는 기구가 이 방패인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 전쟁에 사용되는 방패가 되어 주겠다고 하시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전쟁을 아브람이 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전쟁을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람에게는 전쟁의 승리에 대한 아무런 상을 받을 공로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람의 상급이 되는 것이다.
둘째로 마5:12절의 약속을 청중들은 어떻게 이해를 했을까 하는 측면에서도 권성수는polu;" misqo;"를 차등상급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고 본다. 당시의 청중의 큰 상급 이해를 재구성하기가 매우 힘든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아마 천국에서의 지위 면에서 이해했을 가능성이 짙으며, 원청중의 통속적인 이해는 신실한 순종과 하나님의 은혜(마20:1-16)에 따라 주어진 천국의 차등상급 측면에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polu;" misqo;"를 원 청중이 이해한 최소한 차등상급으로 이해해야 된다라고 한다.73)
그러나 마5:12절의 주님의 큰 상급에 약속에 대하여 청중들이 차등상급으로 이해한 것은 제자들의 주님에 말씀에 대한 오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18:1절에 제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천국에서 누가 크느냐에 대한 자리다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큰 자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들어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답변을 주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와 몰이해74)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청중들/제자들에게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이 비록 천국에서의 차등상급으로 이해했을지라도 천국에서의 차등상급이 인과율의 법칙에 의한 인간의 공로를 전제하는 차등상급의 존재를 말씀하신 것이라고는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셋째로 인간의 신실한 순종과 하나님의 상급간의 상호성 원리도 차등상급을 지원한다고 권성수는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마5:12에서 상호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차등상급은 그 자연적인 귀결이다. 왜냐하면 상호성의 원리는 본래 각기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중에 공의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마12:36, 17:27) 마5:12에서 상호성이 발견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이유인 것이다. 원청중 일부의 신실한 순종이 이미 받은 핍박(5:10)에서 나타났고 또한 의를 위하여 즉 하나님의 뜻에 신실한 삶 때문에 그들이 받을 미래의 핍박에서도 나타날 것이었다. 그들이 당한/당할 핍박은 e{neken ejmou 즉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고 그에게 밀착하기 때문에 겪은/겪을 핍박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의와 예수그리스도 사이의 기능적 동등성을 본다, 즉 의가 기독론적 국면을 띠고 있으며, 의와의 관계 때문에 당하는 핍박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의 밀착관계, 즉 제자도 때문에 당하는 핍박이고 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제자란 신분 자체가 핍박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며, 이렇게 원청중 일부는 이미 메시야이신 예수님과 직결된 신분에 따라 삼으로써 핍박을 당했고 거기서 신실성을 보여 주었고 앞으로 이런 신실성을 보일 자들 이었다라는 것이다. 기쁨의 근거가 약하다면 상급이 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기쁨이 크다는 것은 기쁨의 근거가 크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상급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큰 상”이라는 것은 행복성이 아니라 영광의 차등이 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핍박이 크면 클수록 많은 영광을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한다.75)
그러나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받는 핍박은 제자라는 신분이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다. 제자라는 신분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제자들이 핍박을 받고,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는 것은 그 제자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나타낼 때 핍박을 받게된다. 제자라는 자격/신분 때문에는 핍박이 생기지 아니하고 제자의 자질을 나타내려고 할 때 핍박이 생기는 것이다. 제자의 자질을 많이 드러내는 사람/주님과의 밀착관계가 깊을수록 핍박이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자질의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많이 나타내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큰상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제자의 삼음의 목적이 그 자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이 제자의 자격에서뿐만 아니라 자질에 있어서 그의 모든 백성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핍박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자질이 완성에로 향한다는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의 결과이지 많은 핍박의 결과로 큰상이 베풀어지는 것은 아니며 핍박의 다소간에 따라 상급의 차등이 주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넷째로 제자들이 당할 일이 선지자들이 당한 일과 동일시 한 것으로 본다.
ou{tw" ga;r ejdivwxan tou;" profhvta" tou;" pro; uJmw'n.(5:12 이하)에서 profhvta"가 제자들이 정체성에 있어서 선지자들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고난에 있어서는 동일시된다고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구약 중간기에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상급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라는 사상을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청중들에게 그 선지자와 같이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 견디는 자는 선지자들이 받았던 특별한 상급을 받는다라고 했던 것이다.76) 그러므로 이 땅에서는 주님의 제자로서 신실한 삶의 결과가 선지자들이 받았던 상 처럼 상급의 차등지급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선지자들이 핍박받았다라는 말씀이 있는 것은 박해를 받을 때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덧붙어진 말씀77)으로 보아야 한다. 제자들이 핍박을 받을 때 선지자들도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핍박을 이겨내고 극복하게 되는 위로로 삼으라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polu;" misqo;"이 핍박 아래 있는 제자들의 신실함에 대한 것이라면 이 상급은 그들의 공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현재나 미래에 하나님 나라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다.
이 상급의 내용에 대해서는 모호한 점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을 상속하는 것이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을 가르친다고 볼 수가 있다. 그래서 현재의 핍박이나 고통스러운 환경을 견디어 내어 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이다.78)
이상과 같이 마5:12절은 차등상급을 나타내는 구절이라기 보다는 “큰 상”은 하나님 나라 그 자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홍창표는 마5:12 절이 차등상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79)
12절 하반절은 즐거워해야 할 이유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로 설명되어 있다. 이 큰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성취될 때(the consummation)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욕먹고 핍박받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성취되면 얻게 될 상급을 기억하고 지금 받는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격려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것은 욕먹는 것이나 핍박을 당하는 것 자체를 추구하도록 격려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고난을 당하는 일들로부터 물러서는 말씀도 아니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와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니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전망을 보여준다. 전자는 구원역사의 지나간 한 부분의 사실을 드러내고 후자는 앞으로 있을 구원역사의 영원한 전망을 보여준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이러한 두 가지 전망에 대하여 반응할 수 있는 믿음의 응답인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믿음의 응답인 것처럼 이와 관련하여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상급도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된 것이고 어떤 특정한 이들의 특권이 아니다 따라서 이 본문에 완취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급에는 차이가 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격려 받고 있는 사람은 제자의 신분을 가진 자들이다. 제자신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의 충실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충실함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지닌 진정한 기쁨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표징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이 기쁨의 생활은 다음의 세 가지를 점검하고 그 해답을 실현할 때 가능해 질 것이다 1)나는 누구인가 2)나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3)나는 하늘에서의 큰상을 기억하며 사는가 산상보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하늘에서의 큰상은 미래의 것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는데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 당하는 지금 기뻐하라고 명령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큰 상급은 제자신분으로서 실현하게 될 예수님에 대한 믿음 충실함에 대한 상급이므로 자신의 공로에 근거되는 상급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는 상급임이 분명하다 팔복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이 명백하게 이러한 상급의 의미를 표현해 준다 팔복의 각 복마다
o{ti 구절(that-clause)이 복이 있나니를 설명하고 있고 그렇게 설명된 것이 상급이며 이러한 상급은 곧 깊고 풍성한 기쁨이다 그러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중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늘에서의 큰상은 팔복 중 여덟 번째 복이 말하고 있는 의를 의미한다 즉 11-12절은 여덟 번째 복10절)을 설명하며 확장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비평학자들은 11-12절을 본래는 독립된 절이라고 보았다. 비평학자들의 그러한 견해는 11-12절 이전의 복의 구절이 3인칭을 사용한 반면 11-12절은 2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데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11-12절이 10절의 복에서 독립되어 있다면 앞에서의 복의 구절들과 조화시키기 위해서 마태가 쉽게 3인칭으로 대체시켰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견해와 달리 본문은 예수님이 10절의 복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적용하시기 위해 3인칭을 2인칭으로 바꾸신 것이 분명하다 여덟 번째 복의 말씀은 하늘의 상 곧 하나님의 상이 하나님의 의인 것을 밝혀주고 있다 그 상급은 도덕적이거나 영적인 것과 무관한 어떤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다 지금 실현되고 있는 이러한 최고의 기쁨과 즐거움은 내적 하나님 나라에 귀속되는 축복을 구성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 9) 이러한 축복들은 성취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묘사하고 있고 상급 곧 최상의 즐거움이 완료된 하나님 나라의 구성 요소가 되고 있다. 이러한 본질적 상급의 개념에 반대하여 하나님은 의롭다 함을 받은 자기의 백성에게 완취된 하나님 나라에서 행함에 근거한 공로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게 상급을 주신다는 생각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주의의 상급개념인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상급개념은 법률상의 필요에 의해 형성되었다. 즉 율법의 성취가 상급을 얻을 수 있는 본래적 가치를 소유하고 있다는 상업적 사고를 상급의 원리에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근거하면 그러한 상업관계는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 존재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러한 상업적 사고의 관련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봉사와 순종에 대하여 하나님으로서의 권리가 있다.
이상은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의 상급개념80)을 제자들과 그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에게 가르치며,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을 하나님의 나라의 최상의 복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하나님 나라의 상급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안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들과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로써 일어나는 모든 특권들을 상급의 풍성함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2) 마10:41-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oJ decovmeno" profhvthn eij" o[noma profhvtou misqo;n profhvtou lhvyetai: kai; oJ decovmeno" divkaion eij" o[noma dikaivou misqo;n dikaivou lhvyetai. kai; o}" eja+n potivsh/ e{na tw'n mikrw'n touvtwn pothvrion yucrou' movnon eij" o[noma maqhtou', ajmh;n levgw uJmi'n, ouj mh; ajpolevsh/ to;n misqo;n aujtou'.
본절에서 misqo;n profhvtou, misqo;n dikaivou, misqo;n aujtou' 선지자의 상, 의인의 상, 그의 상을 상급의 여러 명칭으로 보아 각각의 상급의 종류로 보면 차등상급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제자들을 선지자로 알고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사역을 돕는 것이 됨으로 선지자가 받을 상급에 동참하는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을 의를 행하는 의인으로 알고 영접하는 자는 제자들이 의를 행하도록 가르친 교훈을 따르며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됨으로 의인이 받을 상급을 똑같이 받는다는 것이다.81) 그리고 10:40-42절은 선교훈화의 결어로서 천국의 메신저들이 신적 권한을 부여받은 축복의 통로들이라는 격려의 말씀을 담고 있다. 그리하여 메신저를 영접하는 행위에 대한 대가로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을 가르키며 이 상급은 구원이라는 시각에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과는 달리 메신저를 영접하는 자와 거절하는 자, 영접 자와 메신저간에 각기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본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면서82). 차등상급을 나타내는 구절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권성수는 지적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복음의 일꾼을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서 그가 받는 상급을 다르게 나타날 수가 있으며, 복음을 전하는 자와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상급이 다르게 나타날 수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의 일꾼들을 대우함에 있어 나의 정성과 성의가 어느 정도가 되느냐에 의하여 상급의 차등은 다르게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며, 친히 복음을 들고 전하는 복음의 일꾼과 복음의 일꾼을 영접하는 자가 받을 상급도 또한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비록 대접 정도가 냉수 한 그릇일지라도 결단코 상을 잃어버리지 아니한 것이 됨으로 성도들의 어떠한 정성이나, 복음의 선포에 대한 어떠한 신실함도 하나도 헛되이 지나가지 아니하고 다 어떤 상급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마10:40-42절의 말씀은 평행(parallelism)과 동일화(identification)를 나타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평행에서 “너희”는 선지자 = 의인 = 제자 = 소자 중 하나와 동일화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83). 이와 같이 동일화 된 너희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과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되는 것이다.84) 선지자는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씀은 의의 말씀이고 의의 실행과 실천을 위한 것이다. 의를 실행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의인이다. 그리고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고 주는 것이 의를 실행하고 실천하는 것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의 상, 의인의 상, 잃어버리지 아니하는 상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상(misqo;")이라는 것은 속죄 구속론을 함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결국 구원의 성취임을 확증하는 것이 된다.85) 그러므로 이 구절은 신자들의 어떤 신앙의 행위의 공로에 의한 상급의 차등을 나타내는 말씀이라고는 볼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전해지는 복음을 전해 받고 구원을 얻게되는 구원의 사건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축복의 종류와 그리스도와 관계성의 결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특권들을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10:39절에 나오는 말씀에서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자기를 위하여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는다는 말씀에서 선지자를 영접하고, 의인을 영접하고,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자기를 내어놓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3)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mevllei ga;r oJ uiJo;" tou' ajnqrwvpou e[rcesqai ejn th'/ dovxh/ tou' patro;" aujtou' meta; tw'n ajggevlwn
aujtou', kai; tovte ajpodwvsei eJkavstw/ kata; th;n pra'xin aujtou'.
... 그는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공동번역>... 그가 각자에게 그들의 행한 대로 주실 것이라.<새번역>
;and then he shall reward every man according to his works.<KJV>
:and then shall he render unto every man according to his deeds.<ASV>
:and then he will repay every man for what he has done.<RSV>
:and then he will reward each person according to what he has done.<NIV>
여기서 갚는다의 ajpodwvsei의 뜻은 상급을 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약성서에서는 상급을 나타내는 단어로 “misqo;"”라는 단어이외에 ajpodwvsei라는 단어가 사용되기도 하는데 여기서의 뜻은 마지막 날에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행한 일에 따라서 주어지는 상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행한 일이란 이웃과의 관계를 말한다.86)
그의 행위에 따라서(KJV, ASV)라고 번역하게 되면 현재에 이웃과의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상급이 된다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가 행하여 온 것(RSV, NIV) 라고 번역되면 미래에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살면서 행한 공적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상급이 주어지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본문의 강조 점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에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행하는 일 자체에 있기보다는, 그리고 현재에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일에 대한 결과로서 상급이 주어지는 것에 관심과 강조 점을 두어야 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강조점이 있다. 왜냐하면 그 일의 내용에 따라 상급이 주어지든지, 심판이 주어지는 즉 생명을 얻고 잃는 것과 상관이 있기 때문이다.(마16:25) 구원받을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웃과의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즉 그리스도를 향하는 그런 삶의 방향이 설정되어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의 내용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즉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요6:29)이며, 반대로 믿지 않는 것은 죄가 되는 것이다(요16:9, cf. 12:48) 이 일에 따라서 주어지는 상급은 예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하여 얼마나 신실하게 그를 시인하였거나, 거절하는 것이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지 각 개인의 행위의 가치와 분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87) 그러므로 상급은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르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헨드릭슨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지만(엡2:8)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벌의 정도와 또한 영광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고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8,49 고전3:12-14)라는 말씀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한다.88)
영광 혹은 형벌의 등급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사실에 따른다. a.이 사람이 얼마나 많은 양의 빛(지식)을 받았는가(롬2:12)?, b.그는 받은 빛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눅12:47,48)? 그는 신실했는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 그랬는가 그는 신실치 못했는가 그렇다고 하면 어느 정도인가. 이것은 그의 행위에서 명백해 질 것이다. 이 행위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신실한 신자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가 받은 빛을 옳게 사용했거나 혹은 남용한 정도를 보여 줄 것이다.(계20:13, 고전3:12-14) 따라서 본 구절은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라고 되어 있다.
그렇지만 많은 양의 빛을 받고, 적은 양의 빛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은 인간에게 원인과 조건이 없다는 사실과 신실하게 응답되는 경우와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하지 못한 행위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아니면 이런 경우가 가능한가? 이 모순되는 것 같이 보이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와의 관계는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서로 연결되는 것도 아닌 것이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의 은총으로 돌아가야 되고, 하나님의 은총을 맞닿는 순간 인간의 자유가 응답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서로 모순된다고 생각하면 서로 연결시키지 말아야 하지만 서로 모순이 아니기에 함께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은총을 많이 베풀고 적게 베푸는 것에 의하여 인간의 응답의 신실성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응답의 신실성 여부와 옳고, 그른 행위의 응답의 여부는 이 땅에서 인간들이 가진 신앙의 모양이나 형태를 서로 상대 비교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행위에 의하여 주어지는 보응의 차등을 나타내는 구절이라기 보다는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행위 내용이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고 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구절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4) 마 20 : 1-16 - 포도원 품꾼 비유
집주인이 아침 일찍이 장터에 나가 삼시에 사람들을 얻어 가지고 포도원으로 들여보내고 하루의 품삯을 약속한다. 다시 주인은 제육시와 제구시, 제십일시에 장터로 나가서 사람들을 얻어 가지고 포도원으로 들여보내고 하루의 품삯을 약속한다. 그리고 다시 주인이 장터로 나가보니 품꾼으로 고용하는 이가 없어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라 그들에게 하루의 품삯을 약속하고 역시 포도원으로 들여보낸다. 날이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그의 청지기에게 이르기를 “저 품꾼들을 불러서 품삯을 주는데 맨 마지막에 온/열한시에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사람까지 삯을 주라”라고 말한다. 그래서 열 한시에 온 자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자 먼저 온 자들이 자기들은 더 많이 받을 줄 알았는데 그들도 역시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 그러자 먼저 온 자들이 자기들은 하루 종일에 더위에 수고를 하였고 나중에 온 자들은 한 시간밖에 일을 하지 않았는데 같은 품삯을 받는다고 주인을 원망한다. 그러자 주인이 “ 친구여 내가 그대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 내가 그대하고 약속한 것은 하루의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이 아닌가? 그리고 누구든지 하루 일하면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정당한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자네는 자네의 것을 가지고 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 하루의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여 준 것은 내가 원하는 데로 그렇게 한 것뿐이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 아닌가, 내가 지금 잘했는데 잘한 것을 가지고 왜 자네가 악하다고 하는가?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 본문의 비유의 말씀은 차등상급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 상급에 대한 태도를 교훈 하는 말씀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있고 또 상급의 차등성을 부인하는 말씀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먼저 차등상급의 정당성을 교훈하는 말씀으로 보는 것에 대하여는 본 비유의 말씀이 19:16절 이하의 예수님에 대하여 재물이 많은 청년이 영생에 관한 질문과 관련하여 제자들에게 교훈으로 주시는 말씀 1923절 이하의 말씀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19:27이하의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재물이 많은 청년은 재물을 버리지 못했지만 우리는 다 버리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무슨 상을 주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하자-여기서 베드로의 질문은 자기의 공로에 의한 상급을 요구하는 것이다-19:28절에서 주님께서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라고 대답함으로써 천국에서의 특별한 상급을 약속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19:30, 20:16절의 말씀을 통하여 이 특별한 상급은 자기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차등상급에 대한 자기의 공로사상을 교정해주기 위하여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89)
상급의 차등성을 부인하는 말씀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마20:20-28절의 말씀의 의미와 연결시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계급제도를 회복시키고 있다고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은 그의 모든 백성에게 차별 없이 긍휼을 베푸시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다.90) 그러므로 이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상급의 차이를 거부하는 것이다.91)라고 주석하고 있다.
그런가운데 J. Jeremias는 이 비유가 나중에 순서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이유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 되는 마지막 날에 서열의 뒤바뀜을 설명하는 비유가 아니라, 일손이 시급히 필요함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언급된 것92)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보수의 균등성에 관한 가르침인데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품삯이 주어진 것에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사람에게 그렇게 많은 품삯에 주어진데 있다.93)라고 해석하지만,
그러나 본 비유의 말씀은 상급의 차등의 타당성과 부당성을 나타내는 말씀이라기보다는 상급의 내용에 관한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상급의 내용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의 내용과 가치관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원리와 규범이 어떠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나타내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그 이유이다.
- 본 비유의 사회학적 해석-
A. 본 비유의 말씀은 차등상급의 유무에 관한 말씀도 아니고 구원/영생의 조건에 관한 말씀도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내용 즉 하나님의 백성이 그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치신 법도에 의해 하나님이 내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여기 본문에서는 물질과 경제관를 하나의 예로-에 의해 신실하게 살아가야 된다는 것을/하나님 나라의 삶의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a. 본문에서 영생/구원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많이 했든지 아니면 적게 했든지 간에 영생을 상속하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포도원에 먼저 들어간 사람이 많은 일을 했고 나중에 들어간 사람은 적게 일을 하였지만 그들이 얻은 삯은 한 데나리온으로 다 동일하였다 그러므로 영생은 일의 분량에 따라, 일의 질이나 상태에 따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차별과 차등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영생은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한 사람에게 품삯을 주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영생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얻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포도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품꾼들은 구원에 들어간 것이다. 포도원에서 일한 결과에 의해서 영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품꾼들이 포도원(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되는지에 대한 비유의 말씀인 것이다. 구원/품삯을 받기 위해서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영생을 이미 얻었기에 구원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다. 품꾼들이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하기 전에 포도원 주인과 품꾼들이 만난 그 자체가 이미 구원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b. 본문은 포도원에서 일을 마친 품꾼들에게 품삯을 지불함에 있어 나중에 포도원에 들어가 한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한 품꾼부터 품삯을 지불한다. 이것을 목격한 먼저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이 나중에 들어온 품꾼이 자기의 품삯의 1/12를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다가 자기와 약속한 한 데니리온을 받자 주인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이 본문의 말씀은 먼저온 품꾼이 많은 일을 했으니 많이 받아야 하겠는데 적게 주는 것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94) 왜 나중에 온 사람에게 먼저 온 사람 즉 자기와 약속한 같은 품삯을 주는 것에 대한 불만이다.95) 그러므로 이 비유는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한 것에 대한 상급차등이 다르게 나타난다라는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이 비유의 말씀은 무엇을 가르치며, 교훈하기 위한 말씀인가?
B. 오늘 본문의 비유에 나타내고 있는 내용은 포도원에서 주는 것은 주인이 일꾼에게 지급하는 보수/임금에 관한 것 이외에 다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보수는 일을 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일을 하지 않은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은혜이지 보수가 아니다.
a. 본문에서 그리고 있는 세계는 자본가/포도원 주인과 노동자/품꾼의 대립이 있는 현실세계이다.96) 그리고 노사의 대립이 나타나고 있는 현세적 세계에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틴 지역의 주요 생산물은 올리브유, 포도주, 보리나 밀 같은 곡류들이었고97) 이같은 농산물을 생산하는 땅은 경작하는 농부의 소유이지만 일정액의 세금을 내어야 했다. 수확 양이 많을 경우에는 상관이 없지만 수확 양이 적을 경우에는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98) 그리고 돈이 있는 부자가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일손이 부족할 경우에는 일꾼을 채용하기도 했다.99)
여기 포도원 비유에서 간취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구원을 얻은 신자들이 이 현세적인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진 사회제도와 경제 원칙을 가져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20:1절에 천국은 ... 같으니 에서 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b.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들의 하루의 품삯이거나 군인들의 하루 품삯에 불과하다. 본문에서 알 수 있는 당시의 경제상황은 그렇게 호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노동자가 일거리를 찾기 위하여 장터에 모이서 자기를 사용해 주기를 바라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20:3 장터에서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리고 그 일꾼들을 찾아 고용하려는 자본가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여 주고 있다.(이른 아침, 제삼시, 제육시, 제구시에 장터로 나간다. 그리고 품꾼과 품삯에 대한 약속을 자유롭게 한다.)
그러므로 본 비유는 자본과 계급이 기정 사실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런 계급과 자본에 대한 불만이나, 계급을 분쇄하려는 어떠한 행동도 나타나고 있지 않음은 그런 제도를 인정하며 또 존재해야 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c.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자본과 노동에 대한 원칙은 자본가가 자본을 투자할 때나 노동자가 노동의 가치를 공여할 때 잉여의 가치라는 것이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적인 사상에서와 같이 모든 노동의 공급에 대한 대가는 그 사람의 노력에 정확하게 비례하여 계산되어야 된다는 것에 대하여 본문은 반드시 그런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맨 마지막에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은 한 데나리온의 1/12만을 가져가야 하는데 하루의 품삯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은 무슨 이유로 맨 나중에 일꾼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지불하였을까? 그것은 하루의 생계를 위한 경비이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에 포도원으로 들어온 품꾼은 열 한시가 되기까지 다른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집에서 놀고 있은 것도 아니다. 그들은 다만 자기들이 일꾼으로 쓰임 받기를 원했으나 자기들을 고용하는 주인이 없어 열 한시가 되도록 포도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노동할 의사가 없어서 놀고 있은 것이 아니라 노동의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놀고 서 있은 것이다.100)(마20:7 너희가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서 있느냐 이렇게 질문을 하니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었다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하루의 기본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공급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 최소한의 공급을 위해서 한 데나리온이 필요한 것이다. 이 한 데나리온은 한 사람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할 경비인 것이다. 여기에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포도원 주인의 정당한 경제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인간 생명을 존속시키고 유지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다. 생존의 보장은 하나님의 권리인 까닭에 맨 마지막으로 품꾼으로 고용된 사람을 한 데나리온으로 지지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주님의 모습인 것이다.(눅15:4) 만약 포도원 주인/자본가가 품꾼들에게 품삯을 지불할 때 먼저 온 사람부터 약속한 한 데니리온을 지불하였다면, 또는 나중에 온 품꾼부터 품삯을 지불하더라도 먼저 온 사람들이 보지 않는데서 한 데나리온을 지불하였다면101) 먼저 온 자들의 주인에 대한 불만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자본가가 왜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 역시 자본가의 생명 존중성을 인정하기 위한 정당한 경제 가치관을 먼저 온 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함이다. 이는 20:13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다 내가 너와 한 데니리온을 약속하지 안했느냐 하는 것이 포도원 주인의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 뜻이라고 말한다(20:14). 내가 이렇게 하는 뜻을 알아라 하는 것이다.
d. 다음에 이 본문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포도원 주인/자본가의 현 사회제도의 존중 태도가 있다. 사회의 형평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사회의 제도의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이 먼저 들어온 자들이 보는 가운데 나중에 온 자들에게 한 데니리온의 품삯을 지불하는 것은 먼저 온 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은 더 많이 받을 것을 기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20: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중 알았더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은 먼저 온 자들의 이런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고 왜 약속한 그 한 데니리온만을 주는 것일까? 포도원 주인이 경제적 여유가 없었으면 약속한 한 데니리온을 주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경제적으로 품삯이 부족하여 더 많이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한다라는 암시하는 말씀은 나타나 있지 아니하다. 다만 먼저 온 자들이 많이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나의 뜻이다 하여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가가 노동자와의 약속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와 자본가와의 약속도 지키기 위함이다. 포도원을 운영하는 주인들끼리의 그 운영하는 원칙/품꾼의 임금에 대한 약속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지켜지지 않고 어느 한 포도원 주인의 임의대로 먼저 온 자들이 많이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고, 또 많은 일을 했으니 한 데니리온의 약속을 깨뜨리고 많은 데나리온(12데나리온)을 주었다고 가정할 때 현재 존속하는 모든 경제 원칙의 평형은 깨어져서 혼란스럽게 될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은 자기의 임의대로, 자기의 뜻 가운데서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사회제도의 결핍을 보완하는 지혜를 사용한 것이다. 일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여 나중에 들어가 한 시간밖에 일을 하지 못한 품꾼에게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최저 생계비인 한 데나리온을 주었고, 현 경제. 사회제도의 틀을 인정하고 존속시키며, 평형을 깨지 않기 위하여 먼저 온 자들이 많은 데니리온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는 줄을 알면서도 자기의 뜻대로 약속한 한 데나리온만을 지불하는 것이다.
e. 본 비유의 말씀이 19:30절의 말씀을 시작으로 해서 20:16절의 말씀 안에 들어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된다(19:30),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다(20:16)는 같은 내용을 가지고 순서만 바꾸고 있다. (먼저 된 자-나중 된다 : 나중된 자-먼저 된다 , 나중된 자- 먼저 된다 : 먼저 된 자 - 나중 된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받은 것으로만 보면 먼저 되고 나중 된 사람은 없다. 먼저 온 자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고, 나중에 온 자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을 뿐이다. 여기서는 먼저 일한 사람이 있고 나중에 일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은 먼저 되는 사람이 없고 나중 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누가 먼저 되고 누가 나중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일한다고 많이 받는 것이 아닌 것이다. 먼저 일한다고 많이 받을 것으로 생각하니 주인에 대하여 불평과 원망이 생기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의 생존권도 무시되기도 하고, 사회. 경제원칙의 형평성도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도 동일 한 것이다. 많이 일을 한다고 많이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올바른 가치관이 실현될 수가 없다. 하나님 나라에서 많은 일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상급인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10)에서와 같이 인간에게는 인간의 어떤 행위나 공로에 대한 결과로써 보상의 청구권이 없다는 것이다.
f.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에 맨 나중에 들어온 품꾼부터 품삯을 지불하는데 있어서 먼저 들어온 사람이 “보는데”서 지불했을까? 이 품삯 지불 방법이 먼저 온 사람으로 하여금 더 많이 받을 것을 기대하게 만들었고, 또 나중에 온 사람을 왜 먼저온 사람과 같이 주는 것에 대하여 결국은 주인을 원망하고 불평하는데 까지 발전 된 것이다. 주인이 보이지 않는데서 품삯을 지불하였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정보의 독점을 막겠다는 것이다.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계약관계를 자본가와 그 대상 노동자만 알고 있다면 그 포도원과 관련된 모든 정보는 그 포도원의 울타리 안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리하면 다른 노동자들은 그 포도원에 관한 정보를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 포도원의 경영원칙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부패와도 상관이 있다. 투명하지 않으면 부패해진다라는 원리와 동등한 것이다. 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한 노동에 대한 임금의 약속이 투명하지 않으면 올바른 경제제도가 지속될 수가 없을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보이는데서 품삯을 지불하였기에 먼저 온 자들의 불평과 원망에 대하여 정당한 주인의 뜻을 알릴 수가 있었고, 나중에 온 자는 자신의 기본적인 생명의 생존권을 존속시키고자 하는 주인의 뜻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결과가 현체제,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미비한 점을 고치며,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사회. 경제제도가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g. 마지막으로 본 포도원의 비유는 베드로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가 있느냐라는 질문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데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또 한 번의 질문에 세상이 새롭게되어 인자가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너희들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심판한다는 말씀과 함께 예수님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가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여러배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한다는 말씀을 한다.(마20:25-29)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좇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더 줄 상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시작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의 구원의 문제로 시작을 했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상급을 더 많이 받을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본 포도원 품꾼 비유와도 적절하게 맞는 것이 된다. 구원에 있어서는 먼저 온 자나 나중에 온 자나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먼저 온 자나 나중에 온 자가 다 마찬가지로 한 데나리온을 받은 것처럼 구원에 있어서는 포도원에 들어가서 한 일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포도원에 들어가서 많이 일을 하였다고 많이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라는 것이다.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자기들이 먼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으니 자기들이 버린 물질적인 것들이 상급으로 주어질 것으로 알았다. 그들이 바라는 물질적인 상급이라는 것은 로마의 식민지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현실적인 공리사상에 기초를 둔 상급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포도원의 비유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바로 가르쳐 주고자 하는 상급 사상은 품꾼들이 어떤 상태로 있느냐이다. 포도원 주인의 뜻에 의하여 먼저 포도원에 들어간 사람은 자신이 포도원에서 일하는 삶의 기회를 주인으로부터 먼저 받았다는 것이 그 일꾼에게는 주인의 상이 되는 것이다. 일하는 삶의 기회를 주인이 인정을 하고 승인한 것이 바로 일꾼에게는 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은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인정과 승인이 있는가가 인간에게는 차등상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102).
5). 눅 19 : 11-27 므나 비유
이 므나 비유는 마25:14-30의 달란트 품꾼 비유와 유사한 점이 있으나 예수님께서 동일한 사상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103). 이 비유의 말씀은 삭개오의 집에서 하신 말씀이다.(19:11) 이 비유에서도 먼저 전제되는 말씀은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지상 적이고, 현실적이며, 물질적인 것으로 임하여 유대인의 영광으로 당장에 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기대하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하나님 나라의 사상을 고치기 위하여104) 자신들을 의인으로 여기는 유대인 대신에 죄인을 구원하러 왔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헨드릭슨은 말한다.105)
a)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특정한 어느 한 국가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비유에서도 정치적인 자유를 얻게 한다는 일말의 암시조차 없다.
b) 하나님의 나라의 외형적인 도래는 바로 당장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12절)
c)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 마지막 심판 날에 충성했던 이는 상을 받고 충성하지 못한 이는 벌을 받을 것이다.(15-27절)
A.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에서 어떤 귀인이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왕위를 받으러 간다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이 기대하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릇된 기대를 고치고자 하시는 것이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 자체는 잘못된 것이 없는데 그 기대에 대한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 나라의 기대에 대한 잘못된 요소는 2가지이다. 첫째로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둘째로 제자들은 그런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임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기대에 대한 잘못된 요소를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로 간다고 말씀함으로써 지적하고 있다.(19:12)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은 당장에 기대하는 것이 바로 제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위를 먼 나라로 받으러 간다고 말씀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는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여기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제자들에게 당장에 임하는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상태(state)와 존재(being)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B. 여기서 귀인이 열명의 종에게 열 므나106)를 주면서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라는 것은 종들이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가는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서 장사(Pragmateuvomai)는 사업을 하다. 무역하다의 뜻으로 돈을 건네 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혀진다.107) 국사, 저술행위, 사업과 관련하여 “몰두하다”를 가리키는데 사용된다.108)
한 므나의 액수에 대한 가치가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1 므나가 100드라크마이기에 노동자의 100일의 품삯임에는 틀림없다.109) 그러므로 주인이 이 재물을 종들에게 준 것은 하루의 생명 보존을 위하여, 생존권을 위한 의식주 사용을 위하여 돈을 준 것은 아닌 것이다, - 포도원의 품꾼의 비유에서 종들의 기본 생존권을 위하여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하여 주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이 종들이 돈을 어떻게 활용을 하여야 하며 이 돈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돈의 사용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19:17절을 보면 이 한 므나를 가지고 장사를 한 종들에 대하여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한 므나는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주인의 부탁하신 것(장사, 19:13,15)을 충성스럽게 지켜나가기 위한 도구로써 수단으로써 종들에게 준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들이 한 므나를 가지고 장사를 위한 수단으로, 도구로 충성했다면 그 결과에 대한 상급은 우열이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19:17)
C. 열 므나를 남긴 종은 열 고을 차지하고, 다섯 므나를 남긴 종은 다섯 고을을 차지하며, 한 므나를 수건에 싸 두었던 종은 그 한 므나를 빼앗기어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 준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19:26)
이 말씀에 대해서 J. Calvin은 다음과 같이 주석하는데110) 그의 주석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씀의 본래의 의미는 게으르고 쓸모 없는 종들이 현재 성령의 은사들을 받아 가지고 있지만 마침내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길 것이며 그들이 가진 것 없고 부끄러움 중에 당하는 궁핍은 착한 종들에게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게으른 자들이 자신들의 평안과 쾌락만을 생각하고 어떤 수고도 원치 않았으므로 그들이 받은 달란트나 므나를 땅속에 묻어 두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는 자신들과 자기들의 개인적인 편의에만 몰두하고 사랑의 온갖 의무와 타인들과의 덕을 생각지 않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종들의 주인은 돌아와서 회계하기 위해 종들을 불렀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착한 종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다. 자기들의 수고가 전혀 헛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주인과의 회계는 게으르고 태만한 종들을 크게 두려워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오시기 전에 매일 자신들을 격려하고 스스로를 살펴야 하겠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명령들을 충실히 행하면 그 행하는 것으로 인하여 더욱더 하나님의 뜻을 알아 하나님의 통치와 풍성하심 속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이는 하나님의 인정과 승인이 계속적으로 많아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풍성하신 통치에 더 넓게 깊게 그리고 풍성하게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을 가지는 창조신앙을 가지는 것을 뜻한다.111)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운행 속에 포함되어 하나님의 뜻을 알고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연을 정복과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며, 그리고 나누어야 하는 통전적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있는 자는 더 받게 된다는 것이다. 나무의 잎사귀를 바람으로 움직이며 때가 되어 낙엽이 되어 땅에 떨어지게 만드는 이가 하나님이시며, 오늘 내리는 비가 내일이면 기온이 떨어지게 하여 눈이 되게 하시는 이가 바로 천지만물을 운행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전 인격적으로 신앙하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속에 더 풍성히 참여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 나라에서 차등상급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리고 더욱더 풍성하게 알게 되어 하나님께 충성스럽게 응답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되는 것인데 그 결과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목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112). 물론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목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안에 거하게 하시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기의 아들로 삼는 것이다.(엡1:4) 이것은 하나님 쪽에서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많이 알게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알게 하는 즉 차등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이 차등으로 베푸시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 인간의 응답 즉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간의 신실함, 충성의 정도차이가 하나님이 차등 상급을 베푸시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 쪽에서 차등상급을 느끼는 것이고 인간 쪽에서 인간간에 상대 비교하니 그런 상급의 차등이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과 의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사람되는 목표지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분별하여 신실함과 충성으로 응답하는 삶의 내용은 무엇이며,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의 내용에는 어떤 종류와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3) 상급의 내용
하나님 나라의 상급의 내용이 무엇인가
1) 예수님 당시 유대종파에서의 상급의 내용
예수님 당시 유대종파에서 상급의 내용은 어떠한 것인가? 유대주의 구원론의 기본 주제는 율법의 성취의 공로에 의한 상급사상이다113). 구원의 수단인 토라(모세오경, 혹은 율법)가 이스라엘에게 특별 은총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주신 목적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 토라를 성취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상급을 받고자함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인간은 자신 속에 토라를 성취할 도덕적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즉 인간은 순전하고도 거룩한 영혼을 그의 창조주로부터 지음 받았기에, 그의 감각적인 육체인 까닭에 어떠한 악한 본능들을 그의 내부에서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그것들을 억누를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는 이것들을 억압할 수 있는 수단인 토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관은 인간의 완전주의적 사상에서 출발한다. 물론 죄를 부정하지 않으나 그것을 수량적인 방법으로 이해한다. 율법의 성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범법한 수가 율법을 성취한 수 보다 적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원이 매 순간 율법성취의 새로운 행동에 좌우되는 것처럼 살라는 충고를 받는다. 그러므로 유대주의의 구원론은 율법적이며 수량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죄의 성질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견해와 인간의 완전주의적 관념에서 출발하는 자력구원종교인 것이다.114)
율법을 성취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매 순간 율법을 지킨 결과는 무엇인가? 그 결과 하나님의 상급은 어떤 것인가?
먼저 바리새파에 있어서 율법을 성취함에 있어 그들이 기대한 하나님의 상급은 어떤 것으로 기대하였는가?
바리새인들은 경건한 자들(하시딤)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민족주의자들인데 이들은 일찍이 제사장적 귀족 정치를 형성하고 이방의 영향과 관습들을 공공연히 불러들인 헬라화주의자들을 반대하였다.115) 자기들을 이스라엘의 참되 공동체라고 생각하는 폐쇄적인 공동체이었다. 바리새파의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정기간(한달 내지는 일년간의 시험기간)을 거쳐야 하며 이 시험 기간 동안에 정결 규정을 지킬 수 있다는 신뢰성을 입증하여야 한다.116) 그리하여 이들은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준수를 해야 하며 자선과 매일 세시간의 기도와 일주일에 두 번의 금식을 세심하게 준수해야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경건한 자, 의로운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혹은 가난한 자라고 불렀고(솔로몬의 시편), 특히 스스로에 대하여 “분리된 자(the seperated ones)”라고 칭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117) 이들이 사두개파와는 달리 민중의 추종자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제사장 계층과 성전에 큰 종교적 비중을 두지 않고 회당을 중심으로한 종교제도를 가졌기 때문이다.118) 그리고 이들은 사두개파와는 달리 이 땅의 현실보다는 현 억압받는 민중들에게 메시야의 소망, 죽은 자의 부활 등을 주장함으로써 민중들을 끌려들이는데 호소력이 있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지금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시킬 메시야를 소망하게 되었는데 그 메시야가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유토피아 왕국을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건설할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기대는 묵시적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성취는 인간과 국가의 운명과 장래를 결정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119)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상급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율법을 준수하고 지킴으로써 자기 민족이 정결하고 거룩하게 하여 메시야 오심을 준비한다면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로 나타나 흩어진 이스라엘의 지파들을 모으고 다윗의 왕국을 다시 건설할 것이라는 것120)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상급으로 기대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사두개파에 있어서 하나님으로 기대한 상급은 어떤 것으로 알고 있었는가?
사도개인들은 주로 대제사장직과 예루살렘 유지들로 구성된 이들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이었으며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산헤드린을 독차지하였다. 이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에 헌신하고 문자적으로 매우 엄격하게 율법을 지켰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보다도 율법에 의로운 행실과 헌신함으로 이스라엘의 독립을 기대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건설될 것으로 믿었다. 이들은 하나님을 이스라엘만을 위한 신으로 보고 바리새인들의 신관을 배척했고 동시에 부활과 천사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은 안식일을 매우 엄격하게 지켰고 하나의 종파를 세우기보다는 귀족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121) 그러므로 이들은 자기들의 현재 상황과 자기들의 현 자리 즉 기득권 층으로써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는 것이 되었다. 바리새인들이 메시야에 의한 새로운 이스라엘의 건설을 묵시적으로 기대했던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자기들의 현재의 삶의 자리와 위치를 유지하는 그런 이스라엘의 새로운 건설을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율법(모세오경만)을 열심히, 매우 엄격하게 지킴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상급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로마의 통치하에서는 더 적극적으로)정치적인 신중성과 재치 있는 행동122)으로 그들의 권력이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셋째로 열심당에 있어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한 상급은 어떤 것으로 알고 있었는가?
열심당은 사두개파와 대적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이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율법에 대한 헌신을 연합시켜서 나라와 율법을 위하여 싸울 결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스라엘 땅을 하나님의 땅으로 믿었다. 하나님의 땅인 이스라엘의 땅이 이방인이 거함으로 더럽혀졌고, 이방의 통치를 받는 것을 하나님의 의를 망령되어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123) 이들에게는 이방들이 이스라엘의 땅에 거하는 것과 이방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당하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무력으로도 이방을 이스라엘 땅으로부터 쫓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바른 도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로마의 황제를 주로 인정하고 그에게 세금을 내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만을 공경하라는 첫째 계명을 범하는 것으로 여겼다.124) 이들은 바리새인들처럼 미래의 메시아적인 전환기를 참고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125) 역사성과 시간성 속에서 그들의 삶의 자리를 무시하지 않는 현실적인 삶을 사는 것이, 그리고 이 땅에서 공평한 분배를 통하여 함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삶의 권리는 암하레츠(땅의 백성들)가 주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들이 하나님만을 공경하는 삶을 살아감에 있어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한 상급은 그들이 폭력과 혁명으로 이 이스라엘의 땅에서 이방을 쫓아내는 것이 성공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에세네파/쿰란 공동체126)에 있어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한 상급의 내용은 무엇인가
에세네파는 의복을 통하여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표현하였고 식사 전에는 전신목욕(full bath)을 하는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런 요구사항이 자기들의 공동체에 들어오기 위한 표준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자기들을 남은 자, 이스라엘의 택함을 받은 자, 유다의 순전한 자, 은혜의 아들들, 거룩의 사람들, 새언약의 회원들, 완전한 생명의 백성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들들, 은혜의 가난한 자들이라고 불렀다.127) 그리고 이들은 공동환대를 실천하였고 먼 지방에서 온 에세네를 자기의 형제같이 대접했다.128) 이와 같이 에세네파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집단 속에 소속된 사람에 한하며 그 집단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기들이 제시하는 요구 기준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었다. 또 이들의 삶은 종말론적이며, 묵시적이었다는 점에 있어서 사두개파와 열심당과 달랐으며, 역사와 현실의 삶을 도피하는 생활을 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역시 바리새파와 구별된 삶을 살았다.
이들 공동체는 어둠의 아들들에게 대항하는 싸움을 수행하기 위하여 엄격한 계급질서129) 가운데 살았으며 엄격한 규율에 의하여 자기 서열에 따라서 행동하도록 훈련을 받았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규정들이 매일의 생활조건들에 조화를 이루도록 율법을 해석하려고 노력한 반면에 쿰란 공동체에 있어서는 율법에 대한 어떠한 타협과 완화도 있을 수가 없었다.130) 이들은 이렇게 율법의 엄격한 요구에 대한 철저한 수행과 철저한 실행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상급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들은 빛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는 천사인 미카엘과 그의 군사에 의하여 보호를 받는 이것이 율법을 잘 지키고 철저하게 율법을 준행한 결과인 것이다.131) 그리고 이런 철저한 율법준수가 최후의 심판까지 어두움의 세력과 싸울 수 있는 하나님의 상급이 되는 것이다. 이들의 이런 삶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증거 하는 것이 되는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2) 예수님의 말씀에 있어서 상급의 내용
예수님께서 사셨던 유대주의에서는 하나님은 죄를 벌하시고 의를 상급하는 그런 사상이 있었다. 유대인 교사들은 선한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한 행동을 하는 그는 하나님의 상급을 약속받았다라고 가르쳤다. 내세를 위하여 지금의 선한 행동들을 쌓아 둘 것을 훈계했다. 에스더라II와 토비트에서는 선행은 좋은 보물이 있음을 말한다. 율법의 명령이 많이 증식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지킨 자에게 주어질 상급의 수도 내세에서 증식 될 것이다.132)라는 사상이 있었다. 눅10:25의 율법사는 그의 질문에서 “영생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이 질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급에 대한 관점에서 선행의 예를 제시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같은 방식으로 답변한다. “이것을 하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마10:28). 이것은 다가오는 시대에 관한 유대의 종말론적인 이론의 발전과 상급의 큰 전망을 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상급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자주 나타나고 있으며, 때때로 그 결과가 지금 이 세상의 연장선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133)
아마도 마7:1-3에서 의미하듯이 그러나 그 상급의 결과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 속에서(마6:4, 6,18) 또는 다음 시대(마6:20,막10:21 : 천국의 보물)에 있다는 것이 더욱 자주 나타난다. 또 다른 때에는 예수님께서 상급이 없는 헌신 즉 섬김을 요구하시기도 한다. (눅9:57-62, 14:25-33). 그리고 예수님의 상급 윤리의 내용은 다음의 사항들을 포함하고 있다.134)
a) 상급은 명령된 원칙과 행위와 섬김과 동일한 성격이다.
b) 그 상급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삶의 방법의 필요한 결과로서 이해되어 질 수 있다. 삶은 이러한 결과들에게로 움직이며 하나님은 도덕적 영적 질서를 유지하시는 분으로 생각되어 질 수 있다
c) 상급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신앙으로 응답하는 모든 자에게 제공된 구속 안에 포함된다.
d)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목적은 자기 확장을 위해서가 아니며 하나님 나라에서의 자기망각적(self-forgetful) 섬김이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것인데 그것은 상급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이다.
상급에 관한 고려에서 우리는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 사이에 차이를 발견할 수가 있다. 요한복음서에서는 영생은 믿음에 달려있지만 이 생명은 죽은 이후 미래의 상급이 아니다- 신앙인의 죽음은 더 이상의 죽음이 아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요11:25-26)하신 것과 같이,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가운데 현존하는 소유인 것이다. 신앙과 그것의 결과는 이 영생 속에 들어 온 것이다. 이 영생을 신자들은 지금 즐기고 있는 것이다. 오래된 종말론 적 유물/흔적들은 심판과 부활에 관해서 주장한다. 예수님의 그의 제자들을 위한 장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신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의 떠나심에 대한 보충으로 오실 것이다. 그러나 그 미래의 상급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 속에서 현재적인 소유가 되는 것이다.135)
이상에서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나고 있는 상급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먼저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를 현재136)의 삶에서 의를 실천하는 것에 대하여 주어지는 하나의 상급으로 보는 것이다.(여기서 “현재의 삶”이란 미래/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과 연결된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왕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권의 결과로 마지막 날에 베풀어질 여러 가지 축복들의 복합체를 가리키는 것이다.137)
둘째로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의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가족에로의 부르심에 참여이다. 사두개파, 열심당, 에세네파, 바리새파와는 달리 예수님이 가장 선호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즉 구원의 공동체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가족과 비교하는 것이었다.138)
내가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쟁하게 하기 위하여 왔다. 내가 온 이후부터는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을 할 것이다.(눅12:51-53) 여기서 둘은 부모를 의미하고, 셋은 자녀들은 가리킨다. 이 말씀은 기존의 부모와 자식간의 가족 공동체. 가족질서를 파괴하겠다는 것이다. 셋이 둘과, 그리고 둘이 셋과 : 아버지와 아들이, 아들이 아버지와.... 에서 보는 것과 같이 기존의 가족 질서가 파괴되는 것은 부모의 잘못도 아니고, 자식의 잘못도 아니다139). 다만 분쟁의 주체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으며, 예수님으로 인하여 새로운 구원의 가족공동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은 큰 상급을 받을 것이다.(막10:28) 예수님을 위해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분 겉에서 끝까지 견디어내는, 제자공동체에 성부께서 주시는 큰 상급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눅6:20, 마태5:20, 참조 눅22:28)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자기들이 구원을 굳게 확신해도 좋은 것이다.(눅10:20). 예수님의 이런 약속의 말씀은 모두 예수님의 작은 공동체가 마지막 시대에 구원받을 공동체 즉 쇄신된 하나님의 백성의 핵심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은 새로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 아래 살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이스라엘 즉 쇄신되어 마지막 시대에 모아질 그 열두지파 백성을 다스릴 미래의 군주들 자리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앉히기로 이미 결정하셨다.(눅22:28-30)140)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있는데 버려야 할 것에는 아비가 포함되어 있으나 새로운 가족에는 아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아비는 가부장 지배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마태23:9절에서는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부르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에서 예수님의 형제 자매들이라는 새 가족 안에는 인간의 지배의 개념인 아비는 없는 것이다. 형제성과 자매성과 모성만이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141)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개념은 지배의 개념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인 것이다. 열심당과 에세네파와 바리새파들이 분파로 뭉쳐져 있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 기간에 남들이 하는 대로 그러한 “하이레시스”(hairesis, 학파, 분파) 또는 분파를 세우려는 시도를 결코 하지 않았다.142) 여기서 예수님이 분파를 세울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파를 세워 다른 분파들과 싸움을 하는 의미에서의 분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12군단이나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의미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하여 전이스라엘을 향한 회개에로의 초청이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여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하나님 백성은 먼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 회개가 요청된다. 그러나 이것도 절대적인 부르심의 요구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백성에로의 절대적인 요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의 시현으로만 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143) 예수님께서 구원의 공동체로서의 하나님의 백성은 영적인 공동체만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삶이 있는 곳에 즉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이 나타나는 곳에는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구원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것이었다. 갈릴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지방의 베다니, 사마리아 지역에까지 구원의 공동체가 나타났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초청은 여자와 남자의 구별 없이,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 없이, 어린아이. 억압받는 민중과 같은 힘이 없는 자와 권세를 가진 자(요4:46 이하, 왕의 신하)의 계층 없이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마태10:6의 잃어버린 양들이란 죄인과 배신자와 같은 백성의 한 부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144)를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145) 예수님의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심은 보편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초청에 방해되는 모든 계층의 차별과 모든 사회적 장벽들과 차별은 종말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영/예수님의 영 즉 성령에 의해서 지양되었고 지양되고 있고,146) 그리고 이 일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계속될 것이다.
(4) 상급의 동기
불트만은 인간은 당시의 유대인들과는 달리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주장을 해서도 안되고 할 수도 없다.147) 며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은 동기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 배후에 있는 약속의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보른캄은 신약의 상벌사상이 윤리적 요구의 순수성을 희석시키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결코 진정한 복종의 동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148) 계속해서 그는 하나님의 상급을 기대하는 것을 행위의 동기로 삼는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금지하신 것을 행하는 것이 된다고 설명한다. 예수님은 상급을 정당한 동기로 삼지 말라는 의미에서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6:3)고 하셨다는 것이다.149)
또 상급의 동기에 대하여 P.E. Davies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150)
상급의 동기는 노동자의 비유에서 날카롭게 표현되고 있다.(마20:1-16) 그곳에서는 데나리온의 지급은 모두에게 주어진다. 또는 들판의 종의 비유에서도 표현되고 있는데 그 종들은 자기들의 노동이 아무런 상급을 만들지도 못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의무만 했습니다.(눅17:7-10). 마25장의 최후의 심판 장면에서 의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급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목마른 자에게 행한 섬김, 배고픈 자, 벗은 자에 대한 섬김은 상급을 위해 행했기는커녕 의인들은 그들이 했던 것을 전혀 알지도 못한다고 했다.
이상과 같이 상급동기의 타당성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권성수는 상급동기의 타당성을 주장하는데 상급동기의 부당성은 그는 동료인간들로부터의 상급을 기대하는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기대하는 것을 구별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기억하는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기대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라고 다음과 같이 상급동기의 타당성을 주장한다.151)
예수님은 인간들로부터 어떤 상급, 가령 인간의 칭찬 같은 것을 전혀 기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6:1이하,눅6:3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청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도록 계속 자극하셨다. 그는 청중으로 하여금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심으로써 은밀 선행을 독려하시며 자기 선행을 기억하지 말도록 하셨다(마6: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상을 주신다는 약속을 통해서 그들의 동기를 주저 없이 유발하셨다.(마6:1이하), 마25:31-46에서도 예수님은 상급의 동기를 거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양과 염소의 비유 자체가 이미 상벌을 통한 동기유발의 비유이기 때문이다. 그가 상급동기 자체를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로운 행위들의 시행시기(when)와 시행내용(what)에 근거한 ,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자기주장을 거부하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상급으로 동기를 유발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상급을 받겠다는 동기에서 선행하는 것을 전적으로 정당하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의를 기억하고 이 의에 근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이에 상응하는 상급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이미 우리가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자기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 숨어들어 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기평가를 포함하는 어떠한 상급기대도 단호히 거부하셨다.(마20:1-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으로 상급을 바라보도록 동기부여를 하셨다.
그리고 게할더스 보스도 다음과 같이 상급동기의 정당성을 주장한다.152)
상급을 바라보는 열심을 동기로 갖는 것을 높은 수준의 도덕성에 무가치한 윤리적 행동으로 선언하며, 그것이 우리 주님 자신의 가르침의 더 나은 부분에 들어갈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볼 권리가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것이 유일한 최고의 동기라면 전혀 사심이 없는 하나님 중심의 다른 동기들이 함께 병행되거나 그 위에 있지 않는 경우라면 충분히 그렇게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주님이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악을 멀리하는 하나의 방패막이로 보고 그것에 호소하셨다면 축복과 상급에 대한 열심을 선을 유발하는 하나의 촉진제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예수님 자신이 그의 고난을 견디시면서 그에게 약속하신 영광을 바라봄으로써 힘을 얻으셨다는 사실을 믿어서는 안된다는 말인가(히12:2)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떡과 음료수로 여기시는데 최소한 그런 영광을 기대하신 일로 인해서 방해를 받았다고 생각할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상급에 대한 약속을 통해서 주어지는 자극이 반드시 저급한 감각적인 본능에 호소하는 것으로만 볼 필요가 없으며(물론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그런 경우가 있었지만) 그 자극이 최고의 영적 열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 주님의 가르치심은 최고의 수준을 달리고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그 의로 완전한 만족을 얻을 것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거이다 팔복의 말씀의 이 두 번째 절들은 상급이 주어지는 그 최종적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적하신 그 상급이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내적인 하나님 나라와 관련해서 자연적인 축복의 상태를 구성하고 있는 그것들을 최고로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급은 그에 상응하는 행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우리는 유대교가 상급의 원리에 대해서 가졌던 태도와 예수님이 그것에 대해서 가지신 태도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유대교에 의하면 상급은 하나의 법적인 필연이었다 율법을 성취하는 것 그 자체가 상급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으며 상급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성취하는 것과 상급사이에는 철저한 동등한 비율이 존재한다, 율법을 성취시킨 만큼 상급도 그 만큼 주어진다는 것이다.15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그런 상업적인 관계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가르치셨다. 인간의 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이유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인간이 아무리 성실하게 율법을 지킨다 해도 그런 상업적인 관계로 상급을 준다는 개념을 배제하는데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행하는 모든 섬김이나 순종에 대해서 상급을 주기로 어떤 계약이나 약정을 맺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그들에게 요구된 모든 것을 행한 후에도 스스로 “무익한 종들인 것이다(눅17:10)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노고가 아무 쓸데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그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 그들에게 기대하시는 그 이상으로 무슨 일을 행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상급을 신자들에게 제시할 때 그 상급 자체가 목적이냐, 아니면 상급을 제시하여 요구하는 그 무엇이 목적이냐 할 때 상급이 목적이 아닌 것이다. 상급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신앙의 행위가 우선이고 우리의 연약함이 우선인 것이다. 그러므로 상급동기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기자리를 지키기 위함인 것이다.
운동선수가 신기록을 갱신할 때 포상금이 지급된다. 그런데 이때 주는 포상금은, 그 포상금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이다. 이는 신기록이 목적인데, 신기록을 갱신하도록 포상금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직장생활에서 모범적으로 사원들에게 해외여행을 보내주는 인센티브 제도가 있다. 그런데 모범 사원들은 이 해외여행이라는 상을 목적으로 직장 생활하는 것이 아니다. 성실한 직장생활, 활기차고 정직한 생활의 결과가 해외여행이라는 인센티브가 주어지는 것이다.
주택복권의 당첨금제도는 1등상으로 주는 당첨금을 목적으로 복권제도를 만든 것이 아니다. 서민들에게 주택보급이라는 희망과 주택보급을 위한 주택자금을 마련하는데 당첨금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급동기에 있어서는 상급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다만 상급을 제시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함에 있어 인간의 연약성을 고려하여 수단으로 동원된 것이다.
(5) 상급과 신앙과의 관계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새롭게 창조하실 것이다. (시102:27, 사34:4, 51:6, 65:17, 마24:35, 히1:11-12, 요일2:17, 계21:1) 현재의 이 땅의 세상의 외형들은 그 날이 오면 다 지나 갈 것이다.(고전7:31) 이 새 창조의 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가족 구성원들의 아버지가 직접 되셔서 그의 가족들을 직접 통치하시며 다스릴 것이다. 이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나타나는 삶의 내용과 함께 이루어지는 교제에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존재할 것이며 나중에 들어온 자와 나중에 들어온 자가 함께 어울릴 것이다.
이 새 창조의 완성의 날들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내용들은 이 땅에서 그들이 행한 믿음에 따라서 다양하게 존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신실하게 응답한 신자들은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이 있는 삶을 살 것이며, 반면에 그렇지 못한 신자들은 자기 자신이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에서의 부끄러움을 가지게 될 것이다. 뿌린 만큼 수확을 하게 된다(고후9:6). 그런데 이 뿌린 데로 거둔다는 것은 뿌린 것을 근거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상급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이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와 대면으로 인하여 인간 스스로가 가지는 자족의 정도 차이인 것이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그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믿음의 응답들과 예수님으로 행해지는 삶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모든 핍박에 대한 상급이 분명히 존재한다.(마5:12, 6:1) 신자들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하는데 있어 신실한 정도에 비례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더 큰 영예와 권세를 받을 것이다.(마25:14이하) 심지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준 냉수 한 그릇도 심판의 날에 잊혀지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해진 선행을 갚아주시고 상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동일한 축복, 동일한 영생 그리고 하나님과 동일한 교제에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란함과 영광에 대하여 그들 차이가 존재한다. 그들의 신실함과 열정에 비례하여 교회들/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다른 면류관과 상급을 받을 것이다.(계2-3장)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이 있는 것(요14:2) 같이, 교회들의 자기 자리와 위치와 과업의 차이에 따라 성도들의 교제는 부요해질 것이다. 마치 찬송의 조화가 그 목소리의 질에 의해 고양되고 또한 빛의 아름다움이 그 색깔과 명암의 풍성함 안에서 더욱 빛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상급의 개념도 그러한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능력과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이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인정할 때 그 사람은 만족할 수가 있을 것이다. 30년 이상을 농사일만을 해온 농부한테 어느 날 갑짜기 국회의사당에 들어가서 국회의원으로 일을 하라고 하면 이 농부가 진정으로 만족하며, 기쁨을 가지고 그 국회의 일을 과연 감당할 수가 있을까? 이 농부에게 “국회의원”이 상급이라고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이 농부에게는 계속해서 농부의 일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상급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회사 또는 학교의 문을 지키는 수위(여기서 수위라는 직업과 일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임)라는 직업을 정상인들은 기피하지만 지체장애인에게 이 직업을 맡기게 되면 얼굴에 웃음꽃이 피면서 그 일을 지극히 충성스럽게 잘 감당한다. 정상인 보다 더 열심히 그 자리를 잘 지키며 정확하게 근무한다. 이 지체장애인에게는 수위라는 자리가 상급인 것이다. 그런데 국회의원한테 수위라는 직업이 상급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수위를 채용할 수 있는 사람 중에 이 사실을 확신하고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교회들의 아버지는 그의 백성들을 창조한 하나님이시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거할 곳에 많은 아버지의 집에 그의 백성들을 다양성과 차별성을 가지고 배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급인 것이다.
상급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의 결과로 발생한 그의 백성들이 행하는 하나님을 향한 응답인 신앙의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맞는 요구하심과 기준에 이르기까지 베푸시고 사용하시는 모든 하나님의 방법들이 바로 상급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인간들은 서로 상대 비교함으로써 인간의 공적과 행위와 공로가 원인이 되어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피조물인 인간은 이 땅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분적일 수밖에 없고, 희미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가지는 부족성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과 상급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고, 소극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소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이 신앙이 좋아져서 그리고 성숙. 성장하여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어떤 것은 적극적일 수가 있고 다른 것이 소극적일 수가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것이 소극적일 수가 있고, 다른 것이 적극적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의 개념도 소극적 의미와 적극적 의미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의 신앙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응답되고 있으면 그 자체를 상급으로 여기면서 신앙 생활한다는 것은 적극적 신앙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권리가 부여되어, 하늘나라 주민 명부에 자기 이름이 기록된 것을 아는 사람은 이미 이 지상에서도 마음속에 천상의 기쁨을 품고 순례적 생활을 하며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겠기 때문에.154)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에 신실하게 응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연약성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 낙심되고, 좌절될 때에는 상 주시는 이를 바라보고 소망하여 하나님의 상급을 기대하는 것이다. 인간의 죄성으로 인하여 인간 행위에 대한 결과와 공로에 의한 상급의 기대를 근거로 새 힘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III 결론
하나님 나라의 상급은 현재 이 땅에서 주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도 분명히 주어질 것이다.
이 현재의 하나님 나라에서 주어지는 상급은 이 땅에서 부분적이고 희미하게 주어지지만 미래의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주어지는 상급은 명료하며 완전할 것이다. 이 땅에서 부분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되는 하나님 나라의 상급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이 분명히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상급의 내용에 있어서는 이 땅에서 주어지는 물질적인 상급이 전부가 아니다.(이 땅에서 부분적으로 물질적인 상급이 주어진다는 것은 그 상급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죄성과 연약성을 고려한 하나님의 은혜의 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상급을 통하여 하나님의 요구하심이 무엇인가에 강조점과 초점이 있는 것이다.) 미래의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주어지는 상급의 내용은 개인의 신비한 체험을 통하여 일어나는 세상적이고 눈에 보이는 현상계을 대표하는 물질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인간의 행적과 공로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서 개털모자, 금면류관, 초가집, 대궐같은 맨션등이 차등적으로 지급된다는 상급사상은 성경을 완전히 벗어난 상급사상이다. 하나님 나라의 상급의 내용은 이 땅에서나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나 언제나 성품적(person)이고, 존재적(being)이고 하나님 앞에서 상태(state)이다. 왜냐하면 일(work)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이 목적이 되면 일의 대가로 주어지는 물질적인 보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삶의 내용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과 승인과 칭찬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상급은 상급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상급을 하나의 수단으로, 도구로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자리, 수준인 하나님의 거룩과 의/하나님의 형상/그리스도의 성품에 이르기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의 연약성을 고려한 하나님의 은혜베푸심이다.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자리와 수준은 하나님의 그의 택한 백성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에 참여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 나라의 상급개념은 이 땅에서 인간의 신앙적 행위나 공로, 일한 대가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보상들을 인간의 요구대로 주어야만 된다고 하는 신비주의를 배격하여야 하며, 또 기독교를 하나님의 이성과 윤리의 종교로 생각하여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이 땅에서 이성의 발달 진화에 따른 윤리, 도덕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보는 자유주의를 배격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상급개념이 주는 교훈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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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길”. 『기독교사상』(1992,7)
2. 권성수, “마태복음에 상급교훈에 관한 연구”『 신학지남』, 1986
3. 전경연, “예수의 말씀에 나타난 응보와 상급” 『기독교 사상』, 1972
주석
1. Hagner Donald A. , Word Biblical Commentary, Vol.33a, ed. R. P. Martin, Word Books. Dallas Texas, 1993
2. 모리스, L. /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y-The Gospel according to St. Luke, 이정석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3. 마샬, I. H. / The Gospel of Luke-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한국신학연구소 역, 1984
4. 깔뱅, J. / 『성경주석 공관복음I, II』성서교재간행사, 1988
5. 헨드릭슨, W. / 이정웅 역, 김유배 역, 『신약주석』아가페출판사, 198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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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놀란, A. / 정한교 역, 『그리스도교이전의 예수』분도출판사, 1997
4. 로제, E. / 박창건 역, 『신약성서 배경사』1994
5. 래드, G. E. / 이태훈 역, 『예수와 하나님 나라』엠마오, 1993
6. 리차드슨, A. / 이한수 역, 『신약신학 개론』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4
7. 리델보스, H. / 오광만 역, 『하나님 나라』엠마오, 1996
8. 로핑크, G. / 정한교 역, 『산상설교 누구에게?』분도출판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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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마틴, R. P. / 정충하 역, 『신약의 초석』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3
10. 보스, G. / 원광연 역, 『하나님 나라와 교회』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8
11. 비슬리-머리, G. R. / 박문재 역, 『예수와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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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불트만, R. / 허혁 역, 『공관복음전승사』대한기독교서회, 1996
13. 볼프, H. W. / 문희석 역, 『구약성서의 인간학』분도출판사, 1996
14. 브라이트, J. / 박일영 역, 『하나님 나라』컨콜디아사, 1996
15. 예레미아스, J. / 정충하 역, 『신약신학』새순출판사, 1996
--- 허혁 역, 『예수의 비유』분도출판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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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쿨만, O. / 전경연 역, 『영혼불멸과 죽은자의 부활』대한기독교서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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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퍼거슨, E. / 박경범 역, 『초대교회 배경사』은성, 1993
21. 성종현, 『신약연구개론』장신대출판부, 1995
22. 안병무, 『공관복음서의 주제』한국신학연구소, 1997
23. 홍창표, 『하나님 나라의 의 산상보훈의 해설』크리스찬 북, 1997
----- 『신약과 문화』합동신학교출판부,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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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을 강조하는 신앙은 경제발전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70년대부터 일어난 경제부흥과 도시화, 산업화가 교회의 양적인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고 사회학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양적인 성장의 배경에는 일을 강조하는 신앙이 절대적으로 공헌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실제 필자가 다닌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부흥사가 필자의 교회에 와서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신부전증으로 죽을 날이 얼마남지 않은 한 집사님에게 부흥사가 하는 말이 “집사님이 이 땅에서 신앙의 공적을 쌓은 것이 너무 없기 때문에 천국에 가면 상급이 하나도 없다고 하여 죽기 전에 헌금을 많이 하게 되면 천국에 가서 많은 물질적인 상급을 받게 된다고 말하였다.
2) 실제 필자가 다닌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부흥사가 필자의 교회에 와서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신부전증으로 죽을 날이 얼마남지 않은 한 집사님에게 부흥사가 하는 말이 “집사님이 이 땅에서 신앙의 공적을 쌓은 것이 너무 없기 때문에 천국에 가면 상급이 하나도 없다고 하여 죽기 전에 헌금을 많이 하게 되면 천국에 가서 많은 물질적인 상급을 받게 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몇 년간 같이 신앙생활해 오면서 이 집사님에 대한 평판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름다운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3) 예수님의 기적과 사도들이 행한 기적이 지금도 동일하게 임한다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이 논쟁의 내용은 사도들에게 나타난 기적은 교회의 탄생과 사도들의 권위와 성경의 완성을 위하여 하나님이 기적을 그 때에 한해서 허락했다라고 휫필드는 주장한다. 벤자민 휫필드 / 이길상 역, 기독교 기적론,(서울:나침판, 1993), pp. 29-36를 참조하라. 그러나 특히 오순절계통의 교회에서는 예수님과 사도 시대에 일어났던 기적들이 지금도 동일하게 일어난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기적 논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4) L. 고펠트 / 박문재 역, 『신약신학1』(서울: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7), p. 87
5) G. R. 비슬리-머리 / 박문재 역, 『예수와 하나님 나라』 (서울:크리스찬다이제스트,1998 ), pp. 86-93
6) L. 고펠트, op., cit., p. 87
7) 안병무, 『공관복음서의 주제』(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97), p. 273
8) Ibid., p. 88
9)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관한 예수의 말씀과 비유를 나타내는 구절들 : 말씀들, 막1:15/마12:28,눅11:20/마11:5-6,눅7:22-23/마13:16-17,눅10:23-24/눅4:16-30/마11:12,눅16:16/막11:11,눅7:28/눅17:20-21/막4:11-12 ; 비유들, 막3:27,마11:29,눅11:22/마13:44-46/눅15:4-32/마18:23-25/마20:1-16/마22:1-14,눅14:16-24/막4:30-32,마13:31-32.눅3:18-19/막4:1-9,마13:1-9,눅8:4-8/마13:24-30/마13:47-50/막2:18-22 ,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에 관한 예수의 말씀과 비유를 나타내는 구절들 : 말씀들, 마6:9-13,눅11:2-4/마5:3-12,눅6:20-23/마8:11-12,눅13:28-29/마9:43-48,마8:8-9/마7:21/막10:23.마19:23,눅18:24/막10:15,마18:3,눅18:17/막5:20/마21:31,마23:13,눅11:52/마16:19/눅12:32/막9:1,마16:28,눅9:27, 비유들,막4:30-32,마13:31-32,눅13:18-19,마13:33,눅13:20-21/막4:26-29/막4:1-9,마13:1-9,눅8:4-8/마13:24-30/마13:47-50/눅16:1-8/눅18:1-8/마24:43-44,눅12:39-40/마25:1-13/마25:14-30,눅19:11-27등이다. 단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나타내는 구절들 중에 양쪽에 중복이 되는 구절들이 있는 것은(예:마13:1-9) 학자들간에 해석학적 견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10) L. 고펠트, op., cit., p. 91
11) 다드는 나중에 예레미아스와의 토론에서 예레미아스가 “실현 과정에 있는 종말론이라는 전형적인 표현을 사용했을 때 이에 동의하였다.
12) Ibid., p. 94
13)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성취”이지만 “완성”은 아니라고 이해하는 학자는 래드이고, 그리고 쿨만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관계로 이해한다. 기타 예레미아스, 큄멜등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주장한다.
14)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다는 말씀과 비유들로는 막9:43-48,마8:8-9/머7:21/막10:23,마19:23,눅18:24/막10:15,마18:3,눅18:17/마5:20/마21:31,마23:13,눅11:52등이 있다
15) 김지철, “예수의 치유”, 『교회와 신학』제28집(1996), 201
16) 기적을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기적이란 “자연법칙”에 어긋나고 과학의 원리나 이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을 기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성서가 말하는 기적과는 거리가 멀다. 세계 안에 일어나는 모든 일 즉 자연법칙으로 설명이 되든지, 아니되든지 그리고 과학의 원리나 이치로 증명이 되든지, 안되든지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일부분일 뿐이다.
17) A. 놀란 / 정한교 역, 『그리스도이전의 예수』(서울:분도출판사, 1997), p. 61
18) J. 예레미아스 / 정충하 역, 『신약신학』(서울:새순출판사, 1996), pp. 62이하 참조 마가복음13회, Q어록9회, 마태복음에만 27회, 누가복음에만12회, 요한복음 2회 모두 63회가 등장한다.
18) J. 브라이트 / 박일영 역, 『하나님 나라』(서울:컨콜디아사, 1996), p. 197
19) G. E. 래드 / 이태훈 역, 『예수와 하나님 나라』(서울:엠마오, 1993), pp. 150f.
20) A. 리차드슨 / 이한수 역, 『신약신학 개론』(서울: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4), pp. 111f.
21) 특정 지역을 의미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를 나타낼 수 있는 틀이나 범위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그러나 완성된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는 새하늘과 새땅이라는 특정지역으로 이해된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은 불가분의 연속성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통치와 영역의 개념도 연속성을 가진다.
22) 하나님의 부분적 통치와 완전한 통치의 차이는 무엇인가? 구원받은 백성이 성화단계에서 일어나는 신앙의 내용들이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즉 영화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신앙의 내용으로 이해해야 되는가할 때 이것은 주저된다. 그러면 무엇인가? 부분적 통치라는 것은 인간의 연약성과 죄성으로 인하여 구원 이후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함에 있어 대하여 여전히 실수와 실패로 응답된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정도가 부족한 것을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통치가 지속되는데 이것이 부분적 통치인 것이다. 그러면 완전한 통치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로 나타나는 신앙의 내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3) Preisker,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 Kittel and G. Friedrich, 4 vols, (Grand Rapids: Eerdmans, 1985) p. 703
24) 구약에서는 보상동기를 강조하는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난 보상동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보상동기의 타당성과 부당성에 대한 논의는 뒤에 나오는 보상동기를 참조하라
25) Orpheus는 고대 희랍의 전설적인 영웅으로 초인간적인 음악과 노래와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오르퓨스는 오르퓨스교의 설립자이며 그 교리를 성문서로 규정했다고 알려졌다. 오르퓨스의 종말론은 죽음 후의 보상과 형벌을 매우 강조하였다. 영혼은 신적인 본질이며 육체의 죽음 후에만 그 참된 생명을 성취하였다. 충만한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서 영혼은 그 이전의 공로에 따라 삶의 보다 나은 형태 또는 보다 못한 형태로 다시 태어나는 화신의 순환을 견뎌야 한다. 기독교백과대사전, 기독교문사, 제12권 오르퓨스 내용 중에서
26) Preisker, TDNT, op., cit., p. 703
27) Ibid., pp. 703f.
28) Ibid., p. 704
29) 미트라는 아리안족 가운데 가장 동쪽에 거주한 두 종족에 의해 인도-이란 시대에 숭배된 신이다. 이들이 동쪽 아리안인들에 의해 숭배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이름이 베다 판테온의 신들 가운데에서 미트라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고대 페르시아 종교사 속에 미트라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서 입증되고 있다. 이 미트라교가 로마세계에 확산은 군대에 의해서, 노예들로 인해서, 그리고 무역로를 통한 보급경로를 통해서이다. 이 미트라교는 최종단계에서 “태양 범신교”로 흡수되어 3-4세기의 아우렐리아누스 재위시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미트라교, 기독교백과대사전 기독교교문사 참조
30) Preisker, TDNT, op., cit., p. 705
31) Ibid., p. 705
32) O. 쿨만 / 전경연 역,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서울:대한기독서회, 1997), pp. 15f.
33) Wurthwe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 Kittel and G. Friedrich, 4 vols, ( Grand Rapids: Eerdmans, 1985) p. 706
34) P.C Pottger,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New Testament Theology, ed. Colin Brown, 3 vols (Exeter:Paternoster), p. 138
35) Wurthwein, TDNT, op., cit., p. 706
36) P.E. Davies,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ed. Thomas Samuel Kepler, (Abingdon Press, 1998) , pp. 71f.
37) Wurthwein. TDNT, op., cit., pp. 708f.
38) 여기서 경박한 선택관이란 인간이 행하여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행위에 대하여, 그리고 주변에 흩어져있는 여러 가지 상황과 현실 속에서 선을 선택하여 상을 받고 악을 선택하여 징벌을 초래하는 그런 인간의 선택여부에 따라서 상과 징벌이 다르게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39) Wurthwein, TDNT, op., cit., pp. 709f.
40) Ibid.
41) Ibid., p. 711
42) P.E. Davies, IDB, op., cit., pp. 71f.
43) Wurthwein, TDNT, op., cit., p. 712
44) P.E. Davies, IDB, op., cit., p. 72
45) H. W. 볼프 / 문희석 역, 『구약성서의 인간학』(서울:분도출판사, 1996), p.230
46) P.E Davies, IDB, op., cit., p. 72
47) 깔뱅은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의 주요 차이점을 5가지로 나타내고 있다. 1. 구약은 영적인 축복을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표현했다. 2. 구약의 모든 형상과 의식과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했다. 3. 구약은 문자적이고 신약은 영적이다. 4. 구약은 종살이의 언약이라고 하여 노예의 상태인 율법을 나타내고, 신약은 자유의 언약인 복음이다.( 그렇다고 구약의 백성들이 율법의 준수 여부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다라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백성들도 신약의 백성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5. 구약은 한 민족을 신약은 모든 민족을 지향한다. 기독교 강요, 생명의 말씀사, pp. 600-643
48) 전경연, "예수의 말씀에 나타난 응보와 보상", 『신학사상』1972, pp. 263f.
49) Ibid., pp. 264f.
50) Preisker, TDNT, op., cit. pp. 712f.
51) 전경연, op., cit. p. 266
52) Ibid., p. 160
53) G. Bornkamm, "Der Lohngedanke in New Testament", in: Evang., Theology., 1946, pp. 143f. 안병무의 『공관복음서의 주제』pp. 161f.에서 재인용.
54) 안병무, op., cit., p. 160
55) D. 거쓰리 / 이중수 역, 『신약신학 5』 (서울:성서유니온, 1993), p. 107
56) W Pesch, Exeget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2 vols, ed. Horst Balz and Gerhard Schneider, p. 433
57) H. 리델보스 / 오광만 역, 『하나님 나라』 (서울: 엠마오, 1996), p. 297
58) Ibid., p. 298
59) B. Siede,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New Testament Theology, ed. Colin Brown, 3 vols, (Exeter: Paternoster, 1975-1978), p. 141
60) Ibid., p. 138
61) Ibid., p. 141
62) P.C Bottger, NIDNTT, op., cit., pp. 138f.
63) 이 구절에 대한 주석적 고찰은 나중에 언급하겠다.
64) P.C Bottger, NIDNTT, op., cit., p. 140
65) Preisker and Wurthwein, EDNT, op., cit, p. 432
66) Ibid., p. 432
67) Ibid.,
68) W. Pesch, EDNT, op., cit., p. 432
69) 권성수, "마태복음의 상급 교훈에 관한 연구(III)-제2장 차등상급" 『신학지남』1986, p. 19
70) Ibid., pp. 19-21
71) Ibid., pp. 20f.
72) 나는 너의 방패이다. 내가 큰상을 줄 것이다. 라고 번역된 곳은 공동번역과 RSV이고, 나는 너의 방패이다. 내가 너의 큰 상급이다. 라고 번역된 곳은 개역성경, 새번역, 그리고 NIV, KJV, NKJV, ASV이다, 그리고 전자로 번역하기를 주장하는 학자는 Von Rad이고 후자로 번역하는 학자는 Clouse Bestermann이다
73) 권성수, op., cit., pp. 21-22
74) 주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와 몰이해는 마가복음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막4:13,6:52,7:18,8:17-18,8:32-33,9:32,10:37-38,14-15장 자세한 내용은 성종현,『신약연구개론』(서울:장신대출판부,1996) p. 68을 참고하라
75) 권성수, op., cit., pp. 22-26
76) Ibid., pp. 26f.
77) J. 칼빈 / 칼빈성경주석번역위원회 역,『 성경주석 공관복음 I 』(서울:성서교재간행사, 1978), p. 252
78) Donald A. Hagner,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3A, ed. R. P. Martin, Dallas Texas, 1993, p. 95,
79) 홍창표, 『하나님 나라와 의 산상보훈 해설』 (서울:크리스찬 북, 1997) pp. 448-451
80) 유대인들의 상급개념에 대해서는 앞에 언급한 것을 참고하고, 유대인들이 이해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의 내용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겠다.
81) W. 헨드릭슨 / 이정웅 역, 『신약성경주석-마태복음(중)』 (서울:아가페출판사,1984), p. 180
82) 권성수, op., cit., pp. 121f.
83) 40절 : 너희를 영접하는 자 - 예수님(예수님을 보낸자 하나님 아버지), 41절 :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 - 선지자의 상 , 의인을 영접하는 자 - 의인의 상 , 42절 : 작은 자 중 하나 - 상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가 평행을 이루고 있다. 너희 = 선지자 = 의인 = 작은 자 중 하나 와 예수님 = 선지자의 상 = 의인의 상 = 잃어버리지 않는 상은 대상과 대상에게 주어지는 상을 말하고 있다.
83) 40절 : 너희를 영접하는 자 - 예수님(예수님을 보낸자 하나님 아버지), 41절 :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 - 선지자의 상 , 의인을 영접하는 자 - 의인의 상 , 42절 : 작은 자 중 하나 - 상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가 평행을 이루고 있다. 너희 = 선지자 = 의인 = 작은 자 중 하나 와 예수님 = 선지자의 상 = 의인의 상 = 잃어버리지 않는 상은 대상과 대상에게 주어지는 상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선지자, 의인, 제자가 병렬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이들은 동일한 대상이다라고 보는 학자는 Allen, Manson이 있고, 이들은 각기 신분과 직책이 다른 구별된 특수계층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Hill이다. 그리고 G. Theissen은 초기 기독교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는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되기도 하였고 그런 반면에 시골출신들로서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한 무리들도 있었다. 이들 시골 출신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집이나 전토나 가족들도 모두 버려두고 예수님을 철저하게 따르고자 하였던 그룹이었다. 이들을 순회 은사자들이라고 불렀고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보존하여 전수하면서 시리아-팔레스틴의 시골 기독교의 회중들을 찾아다니면서 여행하였다. 여기 본문10:40-42의 예수님의 제자들 중 네 그룹이 바로 이 그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째든 이들이 서로 다른이이든지 동일 대상이든지간에 42절에 나와 있는 소자와는 연결되며 이들에게 주어지는 상은 소자에게 주어지는 잃어버리지 않는 상과 동일한 것이다.
84) 홍창표, op., cit., p. 297
85) Ibid., p. 297
86) P.C. Bottger, NIDNTT, op., cit., p. 140
87) Ibid.,
88) W. 헨드릭슨, op., cit., pp. 423f.
89) 권성수, 『천국상급』, pp. 33-34 , 그리고 J.Calvin과 R.Knox은 이 『비유를 하나님이 누구든지 그의 기뻐하시는 자들을 부르시며 그가 부르신 자들에게는 무엇이든지 그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시는 상급을 주신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Zahn는 이 비유는 자기가 받는 보상에 대해서 마치 그것이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자랑을 하고 동료들을 시기하는 자들은 형벌을 면치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주인이 관대하게 대우 해 줄 것으로 완전히 믿고 일하러 간 자들을 칭찬하고 있다고 한다. F.W. Grosheide는 이 비유가 하나님의 자유와 절대주권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 그의 절대 주권적인 뜻대로 은혜를 베푸시는 고로 아무도 자기의 행한 일에 근거하여 어떤 자격을 주장할 수 없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을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R.C.Trench는 사람들에게 자기 행위가 하나님께 어떤 복을 요청할 수 있는 근거나 되는 것처럼 자랑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사실을 바로 보여 주고 있다. W.Hendriksen, 이정웅 역, 마태복음 주석(하)』pp. 94-96를 참조하라
90) R. 불트만 / 허혁 역, 『공관복음서 전승사』 (서울:대한기독서회, 1996), p. 252
91)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20:20절 이하)세배대의 두 아들들의 어머니다 자기의 두 아들을 위하여 예수님께 구했다. 여기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의 차이를 거부하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첫째 오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소망했던 유대인들의 상급개념을 들 수가 있다. 메시야 기대를 소유하고 있던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세상의 개념을 가지고 그들의 왕을 기대하였으며 일시적인 영광을 구하였다 이러한 메시야 기대에서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는 그와 같은 간청을 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러한 종말론은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둘째로 너희가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마20:23)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의 간청에 대한 이와 같은 예수님의 대답은 마치 어떤 사람은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높은 지위를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신 듯이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자기들의 위치가 종의 신분임을 깨닫도록 제자들의 그릇된 시각을 교정해 주는데 있었다.
92) J. 예레미아스 / 허혁 역, 『예수의 비유』 (서울:분도출판사, 1994), pp. 30-33
93) Ibid., pp. 33-34
94) 나중에 온 자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먼저온 자들이 더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다(20:10) 그러나 그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자 그들이 주인에게 불만을 토로했는데 그 불만은 자기들이 한 데니리온을 받은 것을 가지고는 시비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불만은 왜 나중에 온 자들을 자기들과 같은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에 대한 불만인 것이다.
95) R. 불트만, op., cit., pp. 33f.
96) W. M. Taylor는 먼저 온 자들이나 나중에 온 자들에게 동일한 품삯을 지불했을 때 주인이 먼저 온 자들에게 들은 불평이 산업계 현장에서 들리게 된다면 그것은 큰 불행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97) E. 퍼거슨 / 박경범 역, 『초대교회 배경사』 (서울:은성, 1993), p. 88
98) Ibid., p. 86
99) 잔치를 벌려놓고 일손이 부족하면 거액의 돈을 주고 요리사를 고용하기도 했다. J. 예레미아스, 한국신학연구소 역, 『예수시대의 예루살렘』(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8), p 132
100) 지금도 인력시장에 가보면 새벽5시부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일감이 생기면 인력시장을 관리하는 사람이 그 일에 적당한 사람부터 일터로 보낸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8시가 되어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데 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은 일할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5시부터 8시가 넘도록 계속해서 긴장과 초조 속에서 시간들을 보낸다. 오늘도 일할 기회를 갖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싶어 시간이 지나갈수록 불안의 정도가 깊어간다. 그러므로 노동의 대가보다도 일하는 자체가 큰 기쁨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101) 왜 먼저온 사람들이 보는데서 품삯을 지불했는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다
102) 하나님 나라에서 일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과 인정이 어떻게 인간에게 차등상급으로 다가오는 것에 대하여는 나중에 언급하겠다.
103) L. 모리스 / 이정웅 역, 『틴텔신약성경주석-누가복음』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p. 392
104) W. 헨드릭슨 / 김유배 역, 『신약성경주석-누가복음』 (서울:아가페출판사, 1995), p. 167
105) Iibd., p. 168
106) 데나리온과 드라크마가 화폐의 단위인 반면에 므나는 돈의 액수를 말한다. 므나는 달란트와 함께 무게의 단위를 가리키기도 했다. 화폐량이 아닌 화폐액을 말할 때는 그 동전이 금화냐 은화냐에 따라 달라진다. 므나는 한 달란트의 1/60이며, 100드라크마이며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의 품삯이다. H. Wayne House / 김일우 역,『신학요해(신학의 연대 및 배경일함표)』(서울:아가페출판사, 1994) p. 22를 참조하라.
107) I. H. 마샬 / 한국신학연구소 역, 『국제성서주석-누가복음 주석』(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4), p. 452
108) C. Maurer, TDNT, op., cit., pp. 632-644
109) W. 헨드릭슨, op., cit., p. 169
110) J. 깔뱅 / 깔뱅성경주석번역위원회 역, 『성경주석 공관복음II』 (서울:성서교재간행사, 1992), p. 230
111) 김지철, “예수에게 나타난 창조신학”, 『장신논단』(1992, 8), p. 99
112) 예를 들어 이것은 다음과 같은 비유의 경우이다. 서울역에서 자동차를 가지고 장신대를 찾아갈려고 하면, 먼저 장신대가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곳까지 가는데 있어 여러 가지 길이 있고, 그 길에는 수많은 표지판이 있는데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표지판을 정확하게 보고 올바르게 길을 선택하여 가야 정확하게 그리고 약속된 시간 안에 바로 찾아 갈 수가 있을 것이다. 갈림길이 나와 표지판을 바로 보고 가게되면 운전하면서 가는 자신은 자신이 표지판을 바로 보고 이해했고, 그리고 지금이 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인가를 알게 될 때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혹시 표지판을 잘못 읽어 잘못된 길을 들어서게 되면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장신대로 가는 표지판은 보이지 않게 되어 긴장과 혼란이 있게되어 혹시 목표지점까지 정해진 시간 안에 못 가게 되며, 또 못 찾아 갈 수 있다는 염려와 걱정이 넘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장신대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거룩과 의에 참여하는 사람을 말한다.(엡1:3-6, 5:7, 골1:22, 살전2:10, 3:13, 벧전1:15) 그리고 표지판은 하나님의 거룩과 의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데 있어 그 방향과 지시 받는 원리와 틀을 말한다.
112) 예를 들어 이것은 다음과 같은 비유의 경우이다. 서울역에서 자동차를 가지고 장신대를 찾아갈려고 하면, 먼저 장신대가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곳까지 가는데 있어 여러 가지 길이 있고, 그 길에는 수많은 표지판이 있는데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표지판을 정확하게 보고 올바르게 길을 선택하여 가야 정확하게 그리고 약속된 시간 안에 바로 찾아 갈 수가 있을 것이다. 갈림길이 나와 표지판을 바로 보고 가게되면 운전하면서 가는 자신은 자신이 표지판을 바로 보고 이해했고, 그리고 지금이 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인가를 알게 될 때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혹시 표지판을 잘못 읽어 잘못된 길을 들어서게 되면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장신대로 가는 표지판은 보이지 않게 되어 긴장과 혼란이 있게되어 혹시 목표지점까지 정해진 시간 안에 못 가게 되며, 또 못 찾아 갈 수 있다는 염려와 걱정이 넘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장신대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거룩과 의에 참여하는 사람을 말한다.(엡1:3-6, 5:7, 골1:22, 살전2:10, 3:13, 벧전1:15) 그리고 표지판은 하나님의 거룩과 의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데 있어 그 방향과 지시 받는 원리와 틀을 말한다.
113) 유대교의 구원관이 율법의 성취여부에 의하여 결정된다. 라는 전통적 견해에 대하여 E.P Sanders는 반대하고 있다. 그의 책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라는 책에서 그는 예수와 바울 당시의 유대교는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율법주의 구원관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라는 구원 사상이었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한 이래로 유대교가 율법의 성취여부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라는 사상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라는 사상이 신약학계에서 가장 큰 논쟁이 되고 있다.
114) Strack Billerbeck,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aus Talmud und Midrasch, IV, I pp. 4-15 위의 책에서 재인용
115) R. P. 마틴 / 정충하 역, 『신약의 초석』 (서울: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3), p. 102
116) J. 예레미아스 / 한국신학연구소 역, 『예수시대의 예루살렘』(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96), pp. 315-321
117) J. 예레미아스 / 정충하 역, 『신약신학』 (서울:새순출판사, 1996), pp. 215f.
118) 김지철, “예수의 길”, 『기독교 사상』(1992, 7), p. 97
119) H. 코스터 / 이억부 역, 『신약성서 배경연구』 (서울:은성, 1995), p. 389
120) E. 로제 / 박창건 역, 『신약성서 배경사』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94), p. 69
121) 홍창표, 『신약과 문화』 (서울:합동신학교출판부, 1995), pp. 211f.
122) E. 로제, op., cit., p. 65
123) 홍창표, op., cit., pp. 212f.
124) E. 로제, op., cit., p. 71
125) Ibid., p. 71
126) 에세네파와 쿰란 공동체가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그룹인가에 대해서는 요세푸스,푸리니,필로등은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한 것,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를 배척한 것, 청결하게 목욕을 하는 것, 제사장이 축복하고 먹는 공동식사, 회원이 입회할 때 하는 맹세이외의 어떤 맹세를 하지 않는 것, 병든 자를 고치는 축도 등의 동일한 증거를 들어 동일하다고 보고 있다. 홍창표, op., cit., pp. 220-221
127) J. 예레미아스 / 정충하 역, 『신약신학』(서울:새순출판사, 1996), pp. 254f.
128) 홍창표, op., cit., p. 217
129) 이들의 계급질서는 사독의 아들들 즉 사제들의 제일 높은 계급인 사제계급이 있고, 그 다음으로는 레위인들이 있으며 , 다음으로 이 공동체에 협약으로 들어온 남자들이 있고 , 마지막으로 새로 이 공동체에 들어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마지막 계급인 공동체에 들어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2년의 시련기간을 통하여 총회의 명령에 의해 시험한 후에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 후에 율법과 법규와 정결 그리고 그의 재산의 투자에 따라서 형제들 가운데 서열의 순서에 등록된다. Eduard Lohse, op., cit., p. 86 참조
130) E. 로제, op., cit., p. 87
131) Ibid., p. 88
132) P.E. Davies, IDB, op., cit., p. 72
133) Ibid., pp. 72f.
134) Ibid., p. 73
135) Ibid.
136) 예수님의 말씀에 보상의 시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눅6:23,마5:12),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눅6:35),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6:4,6,18)의 말씀에서는 이미 현재에 보상을 받았다는 것과 대조적인 약속을 예수님이 하고 있다. 이 구절들의 표현을 종합해 보면 미래의 보상을 의도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마25:14-46절의 달란트 비유에서도 충성된 종이 큰 책임을 누리는 보상을 마지막 날에 받는 것처럼 나타나고 있는데 이 역시 현재의 삶에서도 나타날 수가 있다. Donald Guthrie / 이중수 역, 『신약신학 5 미래.윤리편』(서울:성서유니온, 1997), pp. 100f. 참조하라.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와 미래가 연결되듯이 보상은 현재와 미래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연결된다. 현재와 미래의 연결성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참고하라.
137) G. 보스 / 원광연 역, 『하나님 나라와 교회』 (서울: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8), pp. 65f.
138) 홍창표, op., cit., p. 251
139) 기존 가족질서의 갈라짐의 원인이 부모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식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51절에 셋이 둘과 , 둘이 셋과 분쟁한다라는 말씀에서 서로 반복되어 역으로 말하는 것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52절에서는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51절을 반복하고 있는데 분쟁의 주체를 상치하여 기록하고 있다.
140) H. 슈르만 / 김윤주 역, 『주님의 말씀-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복음』 (서울:분도출판사, 1980), pp. 186f.
141) G. 로핑크 / 정한교 역, 『산상설교 누구에게?』 (서울:분도출판사. 1990), pp. 80-81
142) L. 고펠트, op., cit., p. 281
143) Ibid. p. 283
144) 여기서 예수님의 구원의 공동체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나타낼 때 전이스라엘/이스라엘전체/구원의 보편성등의 표현을 로핑크가 사용함에 있어 만인구원론을 주장하는 것 처럼보이지만 본 논문에서 사용하는 위와 같은 표현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제한된 구원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또 필자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그의 백성들의 구원의 공동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보편성이라는 말도 구원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구원이 인간쪽에서 시작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됨으로 인간에게 원인과 조건이 없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45) G. 로핑크 / 정한교 역,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서울:분도출판사, 1996), p. 27
146) Ibid., pp. 151이하
147) Rudolf Bultmann, The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I, K. Grobel 역( London:SCM, 1952), 1:14 권성수, "마태복음의 상급교훈에 관한 연구(IV) 제 3장 상급 동기", 신학지남』, p. 62에서 재인용
148) G. Bornkamm, Der im Neuen Testament, (Gottingen: Vandenhoeck and Ruprecht, 1961), p. 15 , 권성수의 위의 같은 책에서 재인용
149) Ibid., p. 16
150) P. E. Davies, IDB, op., cit., p. 72
151) 권성수, op., cit., pp. 65f.
152) G. 보스, op., cit., pp. 65f.
153) 유대교에 있어서 상급개념은 앞에서 언급한 유대교의 상급개념을 참고하라
154) H. 슈르만, op., cit., p.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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